미술관 옆 카페에서 읽는 인상주의 - 모네의 빛에서 고흐의 어둠으로
나카노 교코 지음, 이연식 옮김 / 이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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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뱅, 바로크 등의 말이 조롱의 의미가 담긴 말이었듯 인상주의도 조롱의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이 그림은 대체 뭘 그린 걸까? 벽지라도 이 그림보다는 낫겠다. 필시 이 그림에는 인상이 듬뿍 담겨 있으리라...”처럼. 이 그림이란 모네의 ‘인상, 해돋이’이고 그런 혹평을 받게 된 것은 시시각각 달라지는 빛을 순간적으로 포착하려다 보니 붓질이 빠르고 거친 데다가 간혹 칠하다 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상이란 말은 인상비평 등의 말을 통해 만날 수 있는데 이는 물론 부정적이다.


인상주의도 여러 가지여서 하나로 묶을 수 없다. 고흐는 인상주의로 분류하기에는 너무 독창적이었고 세잔은 시시각각 변하는 빛을 좇다 보면 인간과 사물의 형태가 불명확해진다는 점을 용인하지 못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인상(印象)을 시뮬라크르(사건, 이미지, 감성적 언표 등등)에 비유할 만하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그림을 문학으로부터, 역사로부터, 신화로부터, 주제로부터 떼어내 독립시키려 했다. 인상주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데생이 변변치 못함을 지적한다. 화법에 집착하여 주제를 버리다 보니 그림에서 이야기, 나아가 정신성까지 사라져 버려 식상하다는 말도 한다.


하지만 인상주의 화가들은 ‘근대’를 그렸다. 인상주의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두 가지 기술은 튜브 물감과 사진 기술이다. 튜브 물감 이전 시대인 16세기에 활약했던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 1490 - 1576)는 워낙 톡특한 붉은 색으로 그림을 그려 그가 사용하는 색은 피를 섞어 만든 것이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인공 염료와 달리 당시의 물감은 금방 굳어 버려 사용할 만큼 매번 새로 준비해야 했다. 공방들마다 제조 기법이 달라 미묘한 색조 차이도 두드러졌던 시대이기도 했고.


J 모 시인의 신간 시집을 “심장의 피를 비커에 받아 가을 햇살로 우려내면 저런 숨 타는 소리가 나올까 싶은 시편들로 빼곡”한 시집으로 표현한 K 시인의 말을 접하며 문득 티치아노 베첼리오의 일화를 떠올려 본다. 사진의 경우도 흥미롭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화가처럼 움직이는 대상을 잡아내려 했지만 손이 흔들려 화면이 흐려지거나 프레임이 흔들려 예상 밖의 영상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프랑스 제2 제정기(1852 - 1870)는 인상주의의 여명기와 겹친다. 에밀 졸라는 왕성한 미술평론가이기도 했다. 마네, 세잔, 드가, 모네 등과 친하게 지냈고 대중이 인상주의 회화를 수용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인상주의가 거센 바람에도 꺾이지 않고 봉오리를 피우고 마침내 커다란 꽃송이를 활짝 피어올린 때는 1870년대 말부터 1900년 사이였다. 산업혁명의 시대, 빛나는 근대화의 시대, 영광스러운 유럽의 시대였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대부분 파리의 거리를 캔버스에 담으려 했다.


거리 이야기가 나왔기에 하는 말이지만 당시에 이미 젠트리피케이션에 해당하는 기획이 있었다. 오스만 남작의 파리 개조 사업의 중요한 목적은 맹렬한 기세로 지방에서 유입되는 빈민(잠재적 범죄자로 여겨진)들을 일소하는 것이었다. 빈민을 중심부에서 몰아내려면 땅값을 올려 부자만 살 수 있게 하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비인간적인 취급을 받는 육체 노동자의 실상을 통해 사회의 모순을 고발하는 모양새는 인상주의 예술가들이 가장 피하고 싶어 한 것이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신화, 성경 등의 내용에 주목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그것에 육체 노동자는 포함되지 않았다.


반면 일하는 여성은 빈번하지는 않지만 그림 속에 등장했다. 인상주의 화가들 중 로트레크, 고흐 등이 압생트 중독이었다.(20세기 초 제조 및 판매가 금지되었는데 오늘날 압생트와 전혀 다른 술이다.) 인상주의 화가 가운데 드물게 여성 화가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 1841 - 1895)가 등장한다. 여자는 자유롭게 외출도 할 수 없었던 시대의 화가로 그로 인해 그녀는 주변 사람들과 주변 풍경들만을 그릴 수 밖에 없었다. 사소설 외의 것을 쓸 수 없게 강제된 소설가를 연상하게 하는 대목이다.


로트레크가 반 고흐의 그림을 헐뜯는 사람을 때리려고 덤벼들었다는 에피소드와 고흐에게 남프랑스 아를로 가라고 권유했던 사람도 로트레크였다는 이야기도 흥미 거리이다. 고흐는 초기 작품만 보면 이런 그림으로 잘도 화가가 되려고 했구나, 하고 아연해질 실력이었음을 생각하면 악착 같이 밀어붙이면 사람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견본 같다고 저자는 말한다. 고흐는 자연광을 있는 그대로 붙잡으려 했던 모네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고흐의 색채와 모네의 색채는 너무 다르다.


서양 회화는 여러 세대에 걸쳐 2차원의 화폭에 3차원 입체를 구현하기 위해 고심을 거듭하고 골똘히 궁리했는데 아예 그것을 문제삼지 않은 우키요에의 경쾌함과 자유로움이 고전의 속박에서 빠져나오려 했던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인상주의와 미국은 깊은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새롭고 젊은 미국이 프랑스 문화를 사랑(해 그림들을 구매)했기 때문에 프랑스의 새로운 화가들이 한껏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인상주의 화가들은 미국의 덕을 보았으면서도 벼락부자라 해서 경멸했다.


인상주의 회화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이유는 밝고 화사한 화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좋은 기분 좋은 분위기, 위로를 주고 지식이 없어도 즐길 수 있는 특성 등을 지녔기 때문이다. 물론 재해(災害) 장면을 보며 그저 감상의 대상으로 여겨 그림을 그리는 것은 독(毒)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그럼에도 아름답다’는 것이야말로 예술의 독(毒)이자 매력이라 말한다. 이 책을 읽고 생각한 것은 역사적 지식, 문화사적 배경을 충분히 갖추는 것이 그림을 이해하는 데 필수라는 점이다. 그래야 올바른 설득력 있는 감상을 즐길 수 있다. ‘미술관 옆 카페에서 읽는 인상주의’를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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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기억하라 - 징비록
정종숙 지음 / 북스타(Bookstar)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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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숙 작가의 징비록 기억을 기억하라는 개인 회고록 중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132)된 서애(西厓) 류성룡의 징비록을 분석한 책이다. 전쟁 후 일본의 끈질긴 요구에 국교를 재개할 때 개방한 부산 왜관을 통해 일본으로 흘러들어가 당시 동아시아를 열광시킨 베스트셀러가 된 징비록(懲毖錄)은 그 만큼 임진왜란을 정확하게 묘사한 책으로 반대파의 탄핵으로 파면당했다가 회복되어 임금의 두 번의 부름을 받았으나 뿌리치고 정치의 중심이 아닌 전쟁의 전모를 담고자 한 류성룡의 집념이 만든 역작이다.


징비란 시경(詩經)에 나오는 말로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하여 훗날의 환란이 없도록 조심하게 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징비록에는 류성룡이,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보낸 통신사 일행 중 김성일(유일하게 일본의 침략 기세를 느끼지 못했다고 보고한)을 따로 만나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재차 묻는 장면이 나온다. 김성일은 황윤길의 말이 너무 강경해 잘못하면 온 나라가 동요(動搖)될까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이라 답했다. 김성일은 일본의 침략을 대비하지 못하게 된 책임자로 지목되었다.


그런데 당시 선조(宣祖)는 여러 사람이 보고한 전쟁 가능성론을 듣지 않고 유일한 의견 즉 전쟁이 일어날 기세를 느끼지 못했다는 김성일의 의견을 수용한 뒤 전쟁이 일어나자 김성일을 희생양으로 지목했다. 선조는 무능한 만큼 간교했다. 기축옥사(정여립鄭汝立의 모반으로 서인에 의해 동인 1000여명이 고문 등으로 목숨을 잃은 사건)때 정철에게 전권을 주어 모진 고문으로 동인의 핵심 세력을 제거하게 한 것이다.


정철은 세자 책봉 문제를 건의한 것이 빌미가 되어 삭탈관직되고 유배당했다. 관동별곡, 사미인곡등 걸작들을 남겼지만 피를 묻힌 손이었다. 정철은 임진왜란이 나자 선조의 부름을 받고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온 뒤 모함을 받는다. 이에 정철은 강화로 들어가 살다가 굶어죽는다. 선조는 파천(播遷: 임금이 도성을 떠나 난리를 피하는 일을 이르던 말)에 반대한 류성룡을 유도대장에 임명해 한양 사수를 지시했다. 소심한 복수였다.


전쟁이 나자 어명을 받고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천거(薦擧)한 사람이 류성룡이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가 된 것은 일곱 품계를 뛰어넘는 초고속 승진이었다. 당연히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없었다면 할 수 없는 천거였다. 선조는 이순신의 임명 철회를 요구하는 빗발치는 상소를 윤허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당시의 주력 전함(戰艦)인 판옥선(板屋船)이 전투 요원이 노출되는 위험을 지니고 있음을 알았다. 판옥선에 뚜껑을 덮고 옆을 막은 것이 거북선이다.


군함 건조 역시 류성룡의 절대적 지지와 후원 덕에 가능했다. 놀라운 것은 조선 수군의 대응이었다. 조선 수군은 일본 함대가 새까맣게 몰려오는 것을 보고도 출정하지 않았다. 대포 한 방 쏘지 않고 상륙을 허락한 것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을 때의 대한민국 재난 구조 시스템을 연상하게 하는 상황이라는 말을 한다. 당시 조선의 수뇌부는 일본을 너무 몰랐다. 수군을 폐지하자는 말도 있었을 정도이다. 전쟁 발발 230일만에 수도를 적에게 넘겨주었다.


당시 조선의 방어체계는 제승방략(制勝方略)이었다. 유사시에 각 고을의 수령이 군사를 이끌고 자신의 고을을 떠나 약속된 방어 지역으로 집결하고 중앙에서 임명된 순번사, 방어사, 도원수 등이 도착하면 그 휘하에 예속되어 지휘를 받는 체제를 말한다. 그런데 류성룡은 이 체제가 지휘관이 적군보다 늦게 도착하면 싸우기도 전에 붕괴될 위험성이 있는 문제적 체제였기에 진관체제로 바꿀 것을 주장했다. 물론 반대에 부딪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류성룡은 전쟁 초기 도망치기 급급했던 조정의 모습을 숨김없이 기록했다. 백성들의 원망과 질책도 빼놓지 않았다. 저자는 선조가 전란 극복 과정에서 국왕으로서 전혀 모범을 보이지 않은 것을 임진왜란의 또 다른 비극이라 말한다. ()나라에서는 아무리 왜적(倭賊)이 강하다 해도 그렇게 빨리 치고 올라올 수 없다고 판단하고 조선이 일본과 손을 잡고 요동을 넘보려 한다는 말이 나돌기까지 했다. 선조가 진짜인지 의심하기도 했다.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도망 다니기 바빴던 임금이기에 가짜 왕으로 의심받은 것, 그리고 일본군의 조롱과 협박의 대상이 된 것은 당연해 보인다.


한때 수군을 폐지하려 했던 조정을 구한 것은 이순신의 수군이었다. 이순신은 한산해전에서 학익진 전술을 구사해 대승을 거두었다.(한산대첩) 류성룡은 한산해전의 승리로 나라를 되찾을 수 있었다고 썼다. 과언이 아니라 할 수 있다.(143 페이지) 근세일본국민사란 책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정벌은 한산해전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썼다. 일본군의 앞잡이 노릇을 한 조선 사람들을 부왜(附倭)라 한다. 부왜는 전국 곳곳에 있었다. 적극적으로 간첩 활동을 한 자로부터 단순 부역자들에 이르기까지... 전쟁 초기 임금이 도성을 버리면서 문제의 싹이 튼 것이라 할 수 있다.(172 페이지)


행주대첩의 권율과 6진 개척의 김종서가 무관이 아닌 문관이었듯 류성룡 역시 문관으로 3도도체찰사(都體察使: 일본군이 남하하는 지역을 담당하는 총사령관) 역을 수행했다.(여담이지만 권율은 행주대첩을 자신의 최고 전공으로 생각하지 않고 웅치 - 이치 전투를 자랑스러워 했다. 한민족 4대 대첩은 살수, 귀주, 행주, 한산 대첩이다. 웅치熊峙는 전라남도 화순군 청풍면과 전라남도 장흥군 장평면을 연결하는 고개이다. 이치梨峙는 전라도 진산군과 고산현 경계의 고개이다.)


()의 참전으로 전쟁을 새로운 계기를 맞는다. 우리는 그제나 이제나 작전 지휘권이 없는 나라이다. 명의 장군 이여송은 탄핵을 받았다. 그가 참획했다고 주장한 일본군 머리의 절반이 조선 사람의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명의 원조를 받아 전쟁을 치르는 입장이기에 사건은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이여송이 행주에서 참패한 이래 사기가 꺾일대로 꺾인 일본군의 퇴로를 열어준 것이다. 병력 손실을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


온건파였던 류성룡도 이 부분에서만은 강경했다. 류성룡은 명의 황제를 상징하는 기패(旗牌)에 참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명군과 일본군의 합의 내용을 전하는 기패였다. 합의 내용에는 철수하는 일본군을 공격하면 참형에 처할 것이라는 조항도 있었으니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참배를 거부한 것은 합의 내용을 승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그렇게 강화를 반대하면서 왜 당신네 국왕은 도성도 버리고 도망쳤느냐는 말까지 들었다.


일본은 한양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철수하게 되자 진주성을 함락시킨 후 주민 6만을 몰살시켰다. 일본은 아예 남해안 각지에 성을 쌓고 들어앉아 장기 주둔 상태에 들어갔다. 전쟁 후 조선 최초의 직업군인인 훈련도감(訓練都監)이 설치되었다. 훈련도감은 류성룡의 제안으로 창설된 특수부대이다. 1594년 봄 류성룡은 선조에게 조총 제작 기술을 개발하자고 요청했다. 대구 광역시 달성군의 녹동서원에 임진왜란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총이 보관되어 있다. 당시 조선군으로 투항한 일본 장수 김충선(일본명 사가야)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아 만든 것이었다.


류성룡은 징비록의 끝을 이순신의 이야기로 장식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전쟁도 끝이 났다. 선조는 종전과 함께 전란 극복에 기여한 공신들을 선정했다. 104명이 선정되었는데 직접 싸워 공을 세운 선무공신(宣武功臣)18명에 불과했다. 선무공신은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慄) 18명의 무신(武臣)에게 내린 훈공(勳功)을 말한다. 어이없는 것은 호성공신 86명은 선조가 피난갈 때 호위했던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선조는 우리 장수들은 간혹 명군의 뒤를 쫓아다니다가 요행히 잔적(殘賊)의 머리를 얻었을 뿐이라고 폄하했다. 선조는 전란 극복의 공을 명군에게 돌림으로써 이순신 같은 전쟁 영웅의 공을 상대적으로 축소시켰다. 선조에게 백성들이 따르고 존경한 이순신은 위협적인 존재일 뿐이었다. 선조는 곽재우, 조현, 고경명 등 의병장들은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선조가 명군을 절대적으로 평가한 것은 피난만 다닌 무능한 왕이 아니라 명군을 불러 전란을 극복한 구국의 왕으로 이미지 변신을 시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반대급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명으로부터 재조지은(再造之恩: 거의 망하게 된 것을 구원하여 도와준 은혜)을 입었다는 점을 강조한 탓에 그 논리에 갇혀 조선은 명청 교체의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었다. 조선이 명을 섬겨야 할 나라가 인식했기에 막을 수 없었던 참변이었다. 저자는 역사는 기억하는대로 움직인다고 말한다. 류성룡을 추모하고 기리기 위해 세운 병산서원(屛山書院: 경북 안동)에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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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은 작가의 소설집 '11;59 PM 밤의 시간'(2026년 9월 12일 출간)에 수록된 '파르마코스 - 희생양의 조건'은 심상치 않은 작품이다. 파르마코스는 고대 그리스에서 제물로 바쳐진 인간 희생양들이었다.독일어 gift가 약과 독을 함께 의미하듯 파르마코스는 약과 독을 함께 의미하는 파르마콘과 관계 있는 말. 희생양, 인간 제물 등의 역사는 길고 잔혹하다. 오늘날 그런 폭력적이고 원초적이고 직접적인 희생양 및 희생제물화는 자취를 감추었다고 할 수 있지만 한 두 사람을 희생양(비유적 의미에서)으로 만들어 조직을 보전하는 행태는 계속되고 있다. '11;59 PM 밤의 시간'에서 만날 수 있는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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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에티카’ 해설서를 쓴 한 국문학 박사는 대학 2학년 시절 스피노자의 ‘에티카’ 번역본을 처음 만났을 때의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강영계 선생의 번역으로 나온 서광사판 ‘에티카’를 집에 사들고 와서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펼쳐보았을 때의 참담함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첫 문장부터 스피노자의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에티카’에 이해하기 어려운 글들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자유로운 인간들만이 진정으로 서로에게 고마움을 느낄 수 있다.”(4부 정리 71) 같은 구절은 얼마나 감동적인지요? “..만약 인간에게 침묵할 수 있는 역량이 말할 수 있는 역량과 동등하다면 분명히 인간의 삶은 훨씬 더 행복했을 것이다.”(3부, 정리 2의 주석) 같은 말은 또 어떤가요? 철학자 시인 서동욱 교수는 ‘스피노자’란 시의 마지막 연에서 “글을 쓴다는 것/ 오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기대 없이,/ 하도록 돼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란 말을 합니다.


스피노자는 “다른 사정이 동일하다면, 기쁨에서 생겨나는 욕망이 슬픔에서 생겨나는 욕망보다 강하다”는 말을 했습니다.(‘에티카’ 4부, 정리 18) 스피노자의 말 가운데 "눈물 흘리지 마라. 화내지 마라. 이해하라.“란 말을 페북 타임라인 전면에 게시한 분이 있습니다. 이를 보며 이런 글을 올리는 경우는 두 가지이리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는 잘 실행하고 있어서 게시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잘 안 되기에 마음을 다잡기 위해 게시하는 경우일 것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글을 게시하지 않았지만 게시한다면 분명 후자입니다. 오늘 스승의 생일을 축하하는 글을 페북에 남기려다가 카톡 글로 대신했습니다. 슬픔 때문입니다. 이것만 봐도 제가 스피노자의 가르침을 잘 따르지 못하는 스피노자주의자 즉 사이비 스피노자주의자란 사실이 드러납니다. 다시 ‘스피노자’를 읽고 슬픔이 아닌 기쁨으로 세상을 긍정하는 법을 가다듬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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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6-09-26 1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렇지만 강영계 선생님 번역은 정말 어렵고 스피노자를 두렵게 만들어요ㅠ 전 지성개선론 두 부를 펴 놓고 한 3페이지 대조해 보고는 황태연 선생님 번역을 골랐습니다.

원문과의 싱크로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읽혀야 읽을 텐데요ㅠ 아쉬워요. 스티븐 내들러 책에 가끔 등장하는 스피노자 원문 구절의 번역은 좀 잘 읽히던데.....

벤투의스케치북 2016-09-26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 분의 번역은 저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국문학 박사가 강 교수의 번역에 문제가 있다는 말을 하려고 그런 글을 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령 있는 번역이었다 해도 준비 없이 에티카를 읽는 것은 쉽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말씀 하신 스티븐 내들러의 책 저도 즐겨 읽지요. 황태연 선생의 번역에 대해서는 대체로 호평이 나온다 생각합니다. 서동욱 교수처럼 시를 쓰는 철학자가 또는 서동욱 교수가 번역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문득 적절한 말, 정확한 지적을 둘러싸고 모순이 풀려 질서를 찾게 되고 무질서가 멈춰 버린다." 카뮈가 스승 그르니에에 대해 한 말을 음미하는 아침. 카뮈에게 "섬세한 스승"이었던 그르니에 같은 분이 그리운 시간. 아침 한 일간지에 이원 시인이 조용미 시인의 '침묵지대'를 설명한 기사가 실렸다. 시인은 침묵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침묵을 위대하다고 말하면 수다가 되어 버린다/ 침묵을 고요하다 말해 버리면/ 즉시 언어의 이중구조 안에 갇혀 버린다".. "침묵 예찬, 침묵의 소리, 위대한 침묵, 침묵의 세계/ 모두 다 침묵에 대해 말하고 있"는 바 "침묵을 그냥 침묵이게 놔두자".. 침묵을 비유로 말하지 말자는 의미이니 이 부분에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수잔 손탁의 '은유로서의 질병'이란 책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런 시인이 같은 '나의 다른 이름들'이란 시집에 '침묵 장전'이란 시를 썼다는 사실이다.


침묵을 "용암 같은" 것, "얼음 같은" 것 등으로 표현한 시이다. 침묵을 장전했다는 표현 자체가 비유이고, 침묵을 용암 같은 것, 얼음 같은 것으로 표현한 것 역시 비유이다. 손탁은 사람들은 은유 없이 사고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자제하고 피하려 애써야 할 은유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모든 사유가 해석이라 해서 해석에 반대하는 것이 언제나 옳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말을 한다. 맞는 말이지만 시에서 은유는 풍성해야 한다. 때로 모순으로 보일지라도. 침묵을 그냥 침묵이게 놔두자는 것도 수사(修辭)이고, 용암/ 얼음 같은 침묵이 장전되어 있다는 표현도 수사이다. 시인은 침묵을 용암처럼 뜨거운 것으로도, 얼음처럼 차가운 것으로도 표현한다. 모순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이런 사유들이 결국 시를 풍요롭게 하는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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