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혜린 선생의 책을 뒤져 기어이(?) 편지에 관한 글을 찾아냈다. 참 오래 전 읽은 기억을 되살려 그의 에세이집인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서 찾은 글은 이렇다. “방안에 들어가 서신함을 보고 편지가 없으면 전쟁 통에 오래 소식이 두절된 것 같다.” 내가 이 구절의 대략을 기억하는 것은 이 글이 워낙 임팩트 있는 글이기 때문이다. 1964년 6월 그러니까 자살하기 몇 개월 전의 일기로 이 글을 찾는 과정에서 나는 그의 천재성과 광기에 찬 지식욕, 가을과 봄, 겨울을 보는 낭만성, 편집적이라 할 수도 있을 만큼의 생에 대한 사랑과 낯선 것에 대한 동경(憧憬) 등을 확인했다. 전혜린 선생의 일기는 짧고 강렬하다. 어쩌면 그에게 흰 종이에 단지 “죽었니?”라고 쓴 편지를 보냈다는 어느 지인의 영향도 작용했으리라. 전혜린 선생이 페북 시대를 살고 있다면 그에게 어떤 풍경이 빚어질까? 정도의 차이는 있을 망정 좋아요의 부재를 전쟁 통에 편지가 두절된 것 만큼 느끼는 사람들이 만드는 페북 시대에 말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장소] 2016-10-02 1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런 글들을 보면 저 난리통 ( 전쟁의 와중) 속에 그 느린 서신이란 교통의 방법에 , 그게 유일한 통신이란 걸 알면서 놀랍고 신기합니다 . 하긴 , 펜팔을 해봐서 하루하루 편지를 주고받던 날들의 기다림에대해 알지만 ..( 잊고 있었는데)그럼에도 그게 환경의 특수성을 말하면 늘 놀라운 일 ... 간절한 일이라 가능한 건지 싶다는 ...

벤투의스케치북 2016-10-02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뜨거웠던 여름의 흔적을 그리다 사라진 젊은 화가에게서 불현듯 전사통지서가 날아오고....˝란 시가 생각납니다.
 

 

최근 '공자의 생활난; 김수영과 논어'를 낸 철학자 김상환 교수님의 열린 연단 '욕망과 기율' 강의를 들었다. 내게는 열 여덢 권의 책을 가지고 있는 이정우 교수님에 미치지 못하지만 김 교수님도 내가 철학적 사유를 형성해 나가는데 많은 도움을 받은 분이다. 읽은 것을 기준으로 했을 때 김 교수님의 첫 책인 '해체론 시대의 철학'은 이 교수님의 첫 책인 '가로지르기'보다 약 1년 정도 이른 1996년 7월에 출간된 책이다. 두 분은 나로 하여금 처음 철학을 사랑하게 한 분들이다.

 

20년이란 시간이 한 순간인 듯 느껴진다. '해체론 시대의 철학'의 첫 두 문장이 김수영 시인의 '비'의 일부를 인용한 뒤 붙인 "김수영은 시를 사랑의 기술이라 했다.그것은 구하던 것보다 피하려던 것을 먼저 만날 때 생기는 기술, 소모 속에서 생의 본능을 키워가는 언어적 행위"라는 구절임을 감안하면 최근 나온 '공자의 생활난; 김수영과 논어' 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예견 가능한 출간이라 할 수 있다. 올 들어 오구라 기조의 '새로 읽는 논어'와 신정근 교수의 '공자의 인생강의', 이한우 기자의 '슬픈 공자' 등을 읽은 내게 '공자의 생활난; 김수영과 논어'는 제대로 김수영 시인의 시에 흥미를 붙일 좋은 기회가 되어줄 것이다.


도서관에서 빌려다 놓은 한명희 교수의 '현대시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도 만날 수 있는 김수영 시인은 박인환, 김종삼 등의 시인과 함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분석하기에 충분한 이야기거리가 있는 시인으로 나온다.'철학과 인문적 상상력', '예술가를 위한 형이상학' 등 김 교수님의 다른 책들도 함께 읽을 계획이기에 이 가을은 아무래도 철학과 (인)문학으로 물드는 시간이 될 것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AgalmA 2016-10-02 1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상한 건지 당연한 건지 한국 대다수 남성 시인의 시집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읽을 수 있습니다. 독선적인 가부장, 사회적으로 강요된 남성성, 자본주의의 첨병 뭐 그런 역할을 한국 아버지들이 두루 갖춰? 보여줘서 그런 걸까요? 아버지 계승보다 아버지를 죽여야 독립이 더 확고하기도 할 테니...
말은 거칠게 해도 엘렉트라 컴플렉스를 보여주는 여성 시인도 많고.
둘러싸임과 벗어남의 미묘한 결합들...

벤투의스케치북 2016-10-02 10:53   좋아요 1 | URL
김화영 교수는 ‘프랑스 문학 산책’에 수록된 ‘아버지’의 신화 - 파스칼 자르뎅의 ‘노란 꼽추’란 글에서 이런 작가들은 거론합니다. 샤를르 페기, 기욤 아폴리네르, 앙드레 지드, 몽테를랑, 앙드레 말로, 루이 아라공, 사르트르, 카뮈... 이들은 프랑스 문학사 속에서 어린 시절에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거나 아버지를 알지 못한 채 자란 작가들입니다. 김 교수의 결론은 이들이 아버지와 정상적인 관계를 맺고 자랐다면 운명(삶, 작품)은 달라졌을 것이란 점입니다. 김 교수는 카뮈의 삶(저 말없는 어머니라는 우회를 통하여 부재하는 아버지를 찾아 끝없이 방황하는 도정)으로 대표되는 프랑스 문학의 예외로 마르셀 파놀의 ‘내 아버지의 영광’을 듭니다. 이 작품은 “온통 정다운 아버지의 포근한 웃음 속에 묻힌 천재의 걸작“으로 작가는 이를 의식했음인지 이후 세 권의 소설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청산하려는 듯 빠르고 따뜻하고 때로 잔혹하게 ‘아버지’를 말했다고 합니다. (카뮈의) 어머니를 이야기했지만 제게 큰 격려를 해주신 박지영 시인/ (정신분석) 평론가의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욕망의 꼬리는 길다’에서 저자는 이성복 시인의 몇몇 시에서 시인이 자신을 어머니와 동일시하지 않았는가 즉 자신을 심리적으로 여성으로 본 것이 아닌가 하는 말을 합니다.

”앵도를 먹고 무서운 애를 낳으면 좋겠어“란 구절이 있는 ‘口話’가 대표적입니다. 개인사를 들추고 싶지 않고 또 그럴 수 있어 시인의 삶을 잘 알 수 있다 해도 그런 앎이 환원주의적으로 시 분석에 유용한 의미를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삶을 부지불식간에 형성된 갈등 관계를 여하히 극복하는가의 문제로 봅니다. 그렇기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가부장, 자본주의적 관계가 굳이 아니라 해도 있을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구성하는 주 내용이 아버지에 대한 것인지 사회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아버지로 상징되는 사회에 대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여러 시인들이 언급하는 그 콤플렉스는 어느 정도는 삶에 바탕을 둔 것이기에 진정성이 있고 또 어느 정도는 그것이 고급스런 내용물이라는 점에서 (‘책으로 사랑을 배웠어요“란 어느 코미디의 대사처럼) 자신의 진정한 것이 아니기에 의도적인 위악(僞惡) 또는 과장(誇張)일 수 있다고 봅니다. 저는 만일 시인들이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프로이트와 그가 말한 콤플렉스에 대한 앎을 갖지 못한 채 시를 썼다면 지금과는 많이 다를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페북의 한 여성 시인 친구는 차(茶)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새로운 시를 쓰기 위해 그렇다고 합니다. 새로워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족 관계라 해도 들뢰즈가 말한 가족 관계에 주목하거나 스피노자의 기쁨에 영향을 받았다면 시는 많이 달라질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AgalmA 2016-10-02 1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카프카도 그런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그런 작품이 안 나왔을 수 있겠죠.
기형도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그런 시를 쓸만큼 우울한 가계가 아니었다고 말하죠. 그 시절 고만고만한 가난이었고 그는 유쾌한 사람에 더 가까웠다고. 즉 현실보다 시인 스스로가 시 속에서 구축하며 바라보는 시점이 가장 큰 원형이겠죠.
이성복 시인 <아, 입이 없는 것들>은 온통 임신 얘기죠. 아무래도 이성복 시인의 여성성은 예술가들의 창작 배출의 심리와 맞닿지 않을까 싶어요. 잉태와 힘든 출산을 하는 과정은 창작의 그것이죠. 이성복 시인을 비롯 제가 아는 시인들은 프로이트를 엄청 읽더라는. 스스로에 대한 치유가 갈급한 사람들이니 오죽하겠습니까.
글을 쓰기 위해 고난을 자처하던 예전 방식에서 좀 벗어날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茶 공부도 좋네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지나가고 나니 언니와 차남들의 세계도 왔잖습니까. 유령 가족을 꾸리는 시인들도 있고. 시 세계에서의 가족 관계란 여러모로 모색해 볼 여지가 있죠.

벤투의스케치북 2016-10-02 11:31   좋아요 1 | URL
네. 맞습니다. 시인들의 삶을 이해하는 것은 충분히 참고의 의미를 갖는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카프카와 기형도 시인의 예는 흥미롭고 의미 있다고 생각됩니다. 자기 치유의 차원을 넘어 즉 프로이트 탐독에서 더 나아가 다른 창의적인 길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 해도 그로부터 벗어나지 못해 고착되면 문제라 생각합니다. 자기 치유를 위해 프로이트를 엄청 읽는 시인을 말씀 하셨지만 부작용으로 병리적이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김승희 시인이 ‘객석에 앉은 여자’에서 “..삶을 피하기 위해서/ 삶을 피하는 자신을 용서해주기 위해서/ 살지 못했던 삶에 대한 하나의 변명을/ 마련하기 위해서/ 꿈의 상실에 대한 알리바이를 주장하기 위해서..” 늘 여기 저기가 아프다고 말하는 여자를 말한 것이 생각납니다. 에드가 모랭이 말했듯 인간은 환상과 공상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 무질서를 만들어내는 광기의 존재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 정들 것 없어 병(病)에 정듭니다...“란 허수경 시인의 시구처럼 병리(病理)적인 것에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노벨상 시즌이 돌아왔다. 정확하게 말해 수상 개시일이 며칠 남은 지금 문학상 수상 유력 후보에 대한 말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문학 부문에서는 일본의 하루키가 1순위에 오른 듯 하다.하지만 내 관심은 물리학상을 향하고 있다.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는 물리학자들을 알지 못하지만 여성 과학자가 그 상을 수상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강하다. 노벨 과학상을 수상한 여성은 두 명(세 차례)이다. 1903년 마리 퀴리가 물리학상을 남편 및 앙리 베크렐과 공동 수상했고, 1911년 역시 마리 퀴리가 화학상을 수상했다. 1935년 그의 딸 아일린 졸리오 퀴리가 화학상을 수상했다. 내가 이름을 들어 알고 있는 여성 과학자는 두 명 정도이다. 리사 랜들과 내터 배철 등이다. 내가 읽은 그들의 책은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 '이것이 힉스다' (이상 리사 랜들) 정도이다.

 

천국과 신 등의 비과학적(?) 말들이 들어 있는 책들이지만 상당히 엄격한 책들인 것은 분명하다. 우리의 우주를 가속팽창을 막는데 필요한 체중이 미달하는 곳으로 표현한 배철은 시적이기까지 하다. 사르트르는 문학상 수상을 거부하며 노벨상 수상 이력이 자신의 순수한 문학적 능력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취지의 말을 한 바 있다. 작품 자체만을 진중히 검토하고 구매하기에 현대인들은 너무 바빠 작가의 지명도, 목차, 표지 등을 주된 선택 요인들로 삼는다. 그래서 이름에 비해 수준이 떨어지는 작품, 제목이 좋은 작품, 표지가 예쁘거나 인상적인 책들이 선택되는경우가 많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 씁쓸하다. 문학 작품에 비해 그럴 가능성이 낮은 과학 책들을 많이 읽어야겠다. 왠만한 문학작품들보다 유려하고, 상투적인 문제의식에 사로잡힌 종교책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철학적인 과학 책들을 말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벤투의스케치북 2016-10-01 18: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에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의 번역자인 이강영 교수께서 “노벨 과학상 여성 수상자는 그보다 많습니다. 물리 2명 (다른 한사람은 마리아 괴펠트 메이어) 화학 4명 (마리 퀴리는 중복) 의학생리학상 10명입니다. 2009년에는 2명이 같이 생리학상을 받았습니다.”란 댓글을 달아주셨다. 지적에 따라 글을 고쳐야 하지만 글의 요지가 여성 과학자가 노벨 물리, 화학 등의 상을 수상하기를 바란다는 것이기에 그대로 두기로 했다. 이 교수의 지적을 그대로 반영하더라도 여성 과학자가 노벨상을 수상한 비율은 10%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기복 불교에 부정적이었던 제가 약간 마음을 고친 계기가 된 것은 불교가 인도를 벗어나 실크로드를 따라 전파될 때 가장 주된 후원 역할을 한 상인(商人)들이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이유에서 불상, 염주, 불경 등을 몸에 지녔다는 글을 읽고서입니다. 상인의 중요함은 동아시아 언어 학자인 루이스 랭커스터(Lewis Lancaster: 1932 - )가 세속(世俗)을, 특정한 부류의 상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불교평론’ 32호)고 말한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세속이란 삶을 향유하면서도 깨달음을 추구하는 재가 보살을 의미하는 말인 것입니다.


실크로드의 중요 거점 중 하나로 중국 감숙성(甘肅省: 간쑤성) 주천(酒泉: 주취안) 시의 오아시스 도시인 돈황(敦煌)을 들 수 있습니다. 사막의 대화랑(畵廊)이라 할 돈황 석굴(막고굴)에서 법화경 사본을 비롯한 5만 점의 고문서와 함께 법화경을 모티브로 한 벽화가 발견됩니다.(1900년 6월) 묘법연화경이 정식 명칭인 법화경은 우리나라 천태종의 근본경전입니다. 인도 경전인 법화경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데 공헌한 사람들 중 하나로 법화경을 번역한 구마라즙을 들 수 있습니다.


일본의 경우 니치렌(日蓮; 1222 - 1282)이 법화경을 최고의 가르침으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법화경과 니치렌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일본 창가(創價)학회가 주관하는 ‘법화경 - 평화와 공생의 메시지전’이 9월 21일 시작되어 12월 21일까지 계속됩니다.(서울 구로 공원로 이케다 홀 특별전시장. 무료. www.thelotussutra.org) 하필 일본인가, 하시겠지만 그 이전에 법화경이라는 인도발(發) 대승경전의 가르침을 만날 수 있는 전시회라 생각됩니다. 이케다는 국제창가학회 회장 이케다 다이사쿠를 말합니다. 창가학회는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국가신도(国家神道) 체제로 돌입하게 된 시점에서 대다수의 종교계와 달리 신찰(천황숭배)을 거부해 탄압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빛납니다.


러시아의 우주비행사 알렉산드르 세레브로프와의 대담집인 ‘우주와 지구와 인간’에서 “여러 차례 그리고 오랜 시간에 걸쳐 생각할수록 항상 나에게 새로운, 아니 더해지는 감탄과 외경심으로 내 마음을 채우는 것이 두 가지 있다.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률이 바로 그것”(234 페이지)이라는 칸트의 말을 인용하기도 한 다이사쿠 회장. 지녀서 읽고 외우며 바르게 기억하며 그 도리를 이해하고 익히며 서사하는 자는 마땅히 곧 석가모니불을 보게 되리라 말(미즈노 고겐 지음 ‘경전의 성립과 전개’ 74 페이지)해지는 법화경. 종교를 떠나 인류 문화 유산을 배우는 차원으로 보면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벤투의 스케치북
존 버거 글.그림, 김현우.진태원 옮김 / 열화당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 닉네임인 ‘벤투의 스케치북’은 미술비평가이자 소설가인 존 버거의 ‘벤투의 스케치북(Bento's Sketchbook)‘에서 따온 이름이다. 벤투는 베네딕투스(Benedictus)의 약칭이다. 벤투는 스피노자의 이름이다. 일반적으로 바루흐 스피노자라 불리기도 하는데 스피노자는 유대교로부터 파문(破門: herem)당한 뒤 이름을 히브리어 바루흐에서 라틴어 베네딕투스(벤투)로 바꾼다. 스피노자에 대한 회고에 의하면 스피노자는 드로잉을 즐겼고 스케치북을 들고 다녔다. 그러나 그림은 발견되지 않았다.


‘벤투의 스케치북’은 스피노자의 드로잉이 있는 스케치북을 발견하는 상상을 한 존 버거의 사유를 만날 수 있는 책이다. “원래 네덜란드인들은 모두 타고난 화가“(나카노 교코 지음 ‘미술관 옆에서 읽은 인상주의’ 55 페이지)라는 말이 있다. 특히 17 세기 황금시대에는 시민계급이 미술 수집에 열을 올렸다고 한다. 스피노자는 17 세기(1632 - 1677)를 살았던 철학자이다. 얀 페르메르, 헤라르트 다우 등이 스피노자와 동시대 화가들이다. ‘그랑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의 화가 조르주 쇠라는 사람들이 자신의 그림에서 시가 보인다고 말하지만 자신의 눈에는 오직 과학이 보일 뿐이라는 말을 했다.


일치의 어려움을 말하는 듯 하다. 그런데 존 버거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이끌어 가는 어딘가, 또는 그 무언가에 대한 인식을 자신과 벤투가 공유했다는 말을 한다. 버거는 무언가를 다른 이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계산할 수 없는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그것과 동행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고 말한다.(15, 17, 20 페이지) 추상적인 개념에 대한 사유의 결과물을 구체화하기 위해 그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행위자 자신들의 이익을 목표로 하는 작용은 굳건함과 연결시키고 다른 이들의 이익을 목표로 하는 작용은 관대함과 연결시킨 스피노자를 소개한다.


이 부분은 ‘에티카’ 3부, 정리 59의 주석을 통해 접할 수 있다. 이 주석 마지막 부분에 우리는 외부 원인들에 의해 여러 가지 방식으로 휘둘리고 출구도 모른 채, 운명도 모른 채 동요(動搖)한다는 글이 있다. 스피노자는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를 능가하는 외부의 무한한 힘으로 인해 정념(情念) 없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저자는 ”운명에 이름을 지어 줄 수 있을까. 운명에 종종 기하학 단위 같은 규칙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걸 표현할 명사는 없다. 드로잉 한 점이 명사를 대신할 수 있을까. 오늘 아침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확신이 없다“고 말한다.(71 페이지)


스피노자는 어떤 이미지가 더 많은 다른 실재들과 결합할수록 그 이미지는 더 자주 생생해진다는 말을 했다. 저자는 저항에 대해 이야기한다. ”누군가 저항을 하는 것은 저항을 하지 않으면 너무나 모욕적이고 너무 왜소해지고 죽은 것처럼 되기 때문“이라고. "저항은 영(零)으로, 강요된 침묵으로 떨어지기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전 세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고 설명한다. 하나는 숨어 있는 본질을 강조하는 서사를 지닌 이야기, 다른 하나는 드러난 것을 강조하는 서사를 지닌 이야기이다.


스피노자는 다른 사정이 동일하다면 기쁨에서 생겨나는 욕망이 슬픔에서 생겨나는 욕망보다 더 강하다는 말을 했다.(‘에티카’ 4부, 정리 18) 저자는 “모터사이클을 타러 오셨나요, 벤투? 모터사이클과, 당신이 깎은 렌즈가 들어간 망원경을 직접 비교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몇몇 공통점이 있지요. 둘 다 목적지를 잘 찾아야 하고, 둘 다 거리를 줄여 주고, 둘 다 관심의 터널이 되며, 속도감을 줍니다.”라고 말한다.(117 페이지) 저자는 오랜 세월 모터사이클을 타는 것과 드로잉을 하는 것 사이의 어떤 평행관계에 매혹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라봄으로써 더 가까이 가는 것을 말한다. 저자는 습관적으로 혼란에 빠지며 그것을 마주함으로써 종종 어떤 분명함을 얻기도 한다고 말한다. 스피노자가 그 방법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세 가지 형태의 지식에 대해 서술했다. 소문과 인상에만 근거하여 전체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제 멋대로의 지식, 적절한 개념을 활용하며 사물의 성질에 집중하는 지식, 사물의 본질에 집중하는, 그리하여 신에게 이르는 지식. 저자는 드로잉을 무언가를 지향하는 실천으로 정의한다.


저자는 드로잉을 무언가를 꼼꼼히 살피는 형식으로 정의하며 그림을 그리는 본능적인 충동은 무언가를 찾으려는 욕구, 점을 찍으려는 욕구, 사물들과 자신을 어딘가에 위치시키려는 욕구에서 나온다고 설명한다.(146 페이지) 저자는 드로잉을 시작할 때마다 우리는 그때만의 서로 다른 희망을 가지며 매번 드로잉은 예측할 수 없는 그때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실패하지만 그럼에도 모든 드로잉은 비슷한 상상력의 작동으로 시작된다고 말한다.(157 페이지) 스피노자는 자신이 최상의 철학을 발견했다고 주장하지는 않겠지만 참된 철학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는 말을 했다. 스피노자가 행했고 존 버거가 정성들여 서술한 ’그림‘에 대해 알아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