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으로서의 편집자 (양장) - 현대 독일 프로테스탄티즘과 출판의 역사
후카이 토모아키 지음, 홍이표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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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하이데거(1889 - 1976)란 이름으로부터 우리가 연상하는 것은 무엇일까? 난해한 사상과 나치와의 연관성 등이지만 그가 유고(遺稿) 정책을 시행했다는 사실은 생각하기 어렵다. 유고 정책이란 자신의 작품이나 저작이 후세에 어떤 취급과 평가를 받을지를 염두에 두고 글을 작성하고 편집하는 모든 행위 전략의 총체를 의미한다. 이는 저자 - 독자라는 2자 관계 틀에서 저자 - 편집자 - 독자라는 3자 관계 틀로 전환된 현대의 출판 환경을 말하기 위해 일본의 철학자 후카이 토모아키(1964 - )가 예시한 사례이다.


하이데거가 그렇듯 독일의 신학자 폴 틸리히(1886 - 1965) 역시 유고 정책의 시행자였다. 1950년대 망명지 미국에서 독일 출신의 무명 신학자 틸리히의 성공에 한 몫을 한 데에는 편집 역할을 한 번역자가 있었다. 틸리히는 어떤 내용은 넣고 어떤 내용은 뺄지, 제목은 어떻게 지을 것이며 구성은 어떻게 할지 등을 면밀히 구상한 편집자의 도움으로 독일과는 사정이 다른 미국 독자들을 상대로 책을 출간할 수 있었다. 편집 전략에 따라 틸리히가 쓴 논문의 일부는 완전히 새로운 신작 논문으로 작성되기도 했다. 틸리히는 애덤스의 도움을 받았는데 그는 틸리히에 의해 ‘나 이상으로 나의 사상을 잘 아는 사람’이라 불린 사람이다.


빌헬름 제정기에서 바이마르 시기에 걸친 독일의 신학사상에 대한 새로운 독해를 선보인 저자는 사상이 더 이상 일부 지적 서클의 독점물이 아니게 되었을 때 저자 - 독자라는 공고한 틀이 깨지고 양자 사이에 새로운 지성의 프로모터로서의 편집자가 등장했다고 주장한다. 저자에 의하면 편집자가 사상가인 경우도 있다. 저자는 비틀스를 발견하고 세상에 내놓(아 성공 가도에 올려놓)은 프로듀서 브라이언 엡스타인(1934 - 1967)을 예로 든다. 저자는 비틀스를 엡스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밴드라고까지 언급한다.


책을 읽으면 알겠지만 저자의 맥락에서 (분야는 다르지만) 엡스타인은 현대의 출판 시장에 종사하는 편집자들의 선례이자 모범이라 할 수 있다. 저자가 말했듯 지금처럼 모든 것이 시장 거래되는 상황에서 출판사나 편집사의 프로듀싱 없이 그 사상을 대중에게 온전히 전달하기는 어렵다. 저자는 독일어로 출판사를 페어라크(Verlag)라 하고 편집자를 페어라거(verlager)라 하는데 페어라거는 단순한 편집자가 아니라 한 상품의 종합 코디네이터였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저자는 사상의 상품화가 운명처럼 되어버린 사회에서 편집자나 출판사가 사상가 및 저자와 대치(對峙)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市場)과도 대치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전문적인 편집자를 대신하는 시장 또는 대중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편집자’가 새롭게 사상의 편집과정을 지배하기 시작한 상황에서 누가 편집자인가를 묻는다. 흥미로운 것은 ‘직업으로서의 학문’의 저자 막스 베버(1864 - 1920)의 경우이다. 저자는 베버가 오이겐 디더리히스(Eugen Diederichs: 1867 - 1930) 같은 카리스마적인 지식의 프로듀서를 동경한 한편 그 존재를 두려워 했다고 말한다.(베버가 두려워 한 것은 디더리히스의 인맥과 정치적 입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디더리히스는 헤르만 헤세(1877 - 1962)의 데뷔에도 관여한 인물로 “출판이라는 수단을 통해 기존의 사상이나 제도를 파괴하고 새로운 지식(학문)의 틀을 만들고자” 한 출판인이었다. 저자는 그런 점에서 디더리히스를 표현주의적 편집자였다고까지 말한다.(디더리히스는 독자 앙케트 엽서를 역사상 최초로 삽입한 사람이기도 하다.) 표현주의는 본질을 표현하는 것을 방해하는 기존의 형식이나 형태를 파괴하려고 한 회화(繪畫)의 한 유파이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학문’에서 “학문은 자기 성찰과 사실적 연관의 인식에 따라 전문적으로 영위되는 직업이며, 구원의 양식과 계시를 주는 선견자나 예언자의 시혜(施惠)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미리 인식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디더리히스는 문학(헤르만 헤세), 신학(프리드리히 고가르텐, 칼 바르트 등)이나 종교 뿐 아니라 정신과학 등의 다양한 분야에 두루 영향을 미쳤다. 저자는 편집자의 역할을 강조하며 도스토예프스키나 칸트의 저작들을 새롭고 젊은 감각의 최근 언어로 읽기 쉽게 번역하여 이전과 같이 고생하지 않고서도 잘 읽을 수 있게 된 것과, 아침 러시아워 때 열차 안에서 현실을 잊고 꿈속에 있는 듯 멋진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새롭게 만들어진 지식(지성)의 산물을 상품으로서 소비하기 쉽도록 보내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말을 한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 ”지식은 신이 내려준 은사(恩賜)이므로 팔 수 없다.“는 중세의 격언은 격세지감이 느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저자는 사상은 저자에 힘입어 로고스화하지만, 현대에는 한층 더 편집자에 힘입어 사회화한다고 말한다. 현대는 출판이 교회나 국가의 통제 안에 있었거나 단순한 제본 수준이었던 때에서 완전히 벗어난 시대이다. 저자는 해석자로서의 독자는 저자의 사상과 편집자의 사상이라는 두 사상체계를 하나의 세트로 전달받게 되지만 이것을 식별하기 위한 노력이 분명히 무의식 속에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을 것이라 말한다.


저자는 편집인들의 정치적 색에 대해 언급한다. 공산주의와 결별해 있던 (붉은 괴벨스라 불렸던) 빌리 뮌첸베르크(1889 - 1940), 나치즘의 선전 장관이었던 파울 요제프 괴벨스(1897 - 9145), 중립성을 기본 편집 방향으로 설정했던 로볼트 부자(父子)...‘일러스트 노동자 신문’의 편집인 등으로 활약했던 뮌첸베르크는 교조적인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자유로웠다. 이를 통해 그의 편집자로서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운동가로서의 그의 유연한 관점은 편집인으로서 일할 수 있었던 동인(動因)이었다. 한 마디로 그는 선전(宣傳)과 편집(編輯)을 구별한 사람이었다.


괴벨스는 당시 사람들이 언론과 출판이 현상을 정확하게 분석해 알려주는 것보다는 매력적인 말과 문장으로 단순화하여 설명해주기를 바란다는 점을 강하게 느꼈다. 괴벨스는 이미 일어난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 이상으로 앞으로 실현되어야 할 모습을 그려보이는 평론이 필요하다고 보고 그것을 날조나 유언비어가 아닌 비전 제시라 생각했다. 괴벨스는 편집자의 정체성과 정치가의 정체성 사이에서 어떤 모순도 느끼지 않았다.


에른스트 로볼트(1887 - 1960)는 프란츠 카프카의 재능을 간파하여 출판을 추진했고 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세상에 내놓은 편집자였다. 로볼트는 시대를 완벽하게 읽은 편집자였다. 그는 지나친 자유는 대중에게 오히려 불안과 불투명성을 느끼게 해 사회를 급격히 보수화시킬 것이라는 점을 간파했다. 저자는 말한다. 로볼트의 입장은 무정치성이 아니었다고. 로볼트는 책은 시대의 조류 속에 될 수 있는 한 격렬히 비집고 들어가 우에서 좌에 이르는 여러 이데올로기의 물결이 반달 모양으로 그려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했다.


저자는 출판사가 단순 직업의 인쇄소와 같지 않은 것은 거기에 편집자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편집자는 저자가 쓰려고 하는 사상만이 아니라 사상으로서의 편집자로 존재하고 있는 자신의 입장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마지막 장(4장)에서 시장에서 잘 팔리는 책을 만들기 급급한 편집인에 대해 다룬다. 시장(市場)이 마치 편집자와 같은 상태가 된 것이다. 저자가 말했듯 편집자는 사상의 프로모터임과 동시에 출판이라는 산업에 속해 있는 한 시장원리와 관련될 수 밖에 없다.


저자는 그러나 시장이 역사의 산물이며 사상은 시장에서 소비되긴 하지만 시장을 상대화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상과 시장, 사상과 대중의 관계를 생각할 때 여전히 유효한 것은 폴 틸리히와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론이다. 틸리히는 대중을 세 유형으로 나누었다. 기계적, 역동적, 유기적 대중이 그것이다. 기계적 대중은 정치적 지배자에게는 단지 조작의 대상일 뿐이다. 역동적 대중은 기계적 대중을 파기해 온 대중이다. 양 유형의 대중은 변증법적이다.


가세트는 대중이란 스스로를 특별한 이유로 평가하려 하지 않고 자신이 모두와 같을 것이라 느낌으로써 주변인들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 채 막연하게 타인과 자신이 동일하다고 느끼면서 오히려 기분 좋은 상태가 되는 그런 사람들이 거의 전부란 말을 했다. 가세트가 ‘대중의 반역’에서 주장한 바는 대중은 무지하지도 않고 미련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가세트는 대중의 특징을 익명성, 무명성 등으로 보았다.


저자는 출판사가 경제나 정치라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익명의 편집자에게 지배당할 가능성이 있음을 우려한다.(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을 떠올려도 될지?) 지난 번 출판 편집인을 위한 강의에서 내가 들은 바를 거칠게 요약하면 출판은 철저히 독자의 입장에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두 강사가 강의했는데 한 분은 표절을 한 누구 누구 작가를 거론하며 그가 책을 내도 여전해 팔릴 것을 예언(?)했다. 고뇌에 시기를 넘기고 운운하며 다시 독자들에게 모습을 드러낼 것이란 이야기이다.


”시장이라는 이름의 검열“(앙드레 시프린의 표현)이 문제이다. 2009년 일본에서는 미국 동화 작가 아론 셰퍼드의 경험담이 ‘이제 출판사는 필요 없다’는 책으로 번역, 출판되었다. 지난 번 강의에서 들은 이야기들 가운데 새로운 변화를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출판사가 저자로부터 돈(제작비)을 받고 출판을 해주는 시스템(의 도입)이다.


저자는 저자가 편집자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시장에 접근하는 시스템은 대중이라는 익명의 편집자에게 지배당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 우려한다. 우리의 흐름은 너무 흥미 위주로 흐르고 있다. 대중을 상대로 한 문화강의는 깊이보다 넓이를 고려해 한 두 시간에 세계 수십 개 나라를 거론하고 있다.


인기를 얻고 있는 책들은 재미와 간결함을 강조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 칸트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책들을 읽기 쉬운 문체로 재번역하는 것과, 다이제스트판으로 소화하기 편하게 만드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저자는 우리의 삶 속에서 책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는 시프린의 말을 소개하는 것으로 책을 끝맺는다. 공감한다. 책이 소중하다는 것은 모든 책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고 중요한 책들을 골라내야 하는 전제하에 할 수 있는 말이다. 나도 모르게 독서 습관이 경박해진 것은 아닌지 반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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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최초로 책 갈피에 독자 앙케트 엽서를 삽입, 막스 베버가 존경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두려워 했던 카리스마적인 출판 편집인, 일본의 한 철학자가 표현주의적인 편집자라고까지 말한 사람, 헤르만 헤세의 데뷔에도 관여했던 사람, 교회를 비판해 러시아정교회에서 파문당하고 쫓겨난 톨스토이 전집을 간행, 새로운 플라톤 해석을 보급하는데도 앞장섰던 나는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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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완고하게 연결돼 있다/ 우리는 서로 통한다..”란 구절을 보고 용원화(溶原化)라는 생물 용어를 생각했다면 시인에게, 그리고 글을 올리신 ***님께 실례일까요? 용원화는 바이러스의 DNA의 양끝이 숙주의 끊어진 DNA와 결합해 하나의 DNA가 되는 것을 말하지요. 저는 다시 과학에 관심을 많이 기울이는 시간을 만들 생각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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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이 신의 선물이라면 마지막 문장은 무엇일까? 마지막 문장이 인상적인 작품으로 자크 모노의 자연과학서 ‘우연과 필연’과 카뮈의 소설 ‘이방인’을 들 수 있다. “인간은 마침내 그가 우주의 광대한 무관심 속에 홀로 내버려져 있음을, 그가 이 우주 속에서 순전히 우연에 의해서 생겨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우주의 그 어디에도 그의 운명이나 의무는 쓰여 있지 않다. 왕국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말하는 모노. 

 

”... 나는 세계의 부드러운 무관심에 스스로를 열었다. 이 세계와 나는 너무도 닮았다는 것을, 마침내 한 형제라는 것을 실감했기에 나는 행복했고,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내게 남은 유일한 소원은 나의 사형 집행에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이라 말하는 카뮈. 광대한 무관심이란 단어와 부드러운 무관심이란 단어가 대비되어 울린다. 당연히 부드러운 무관심이 좋으리라. 그 세계는 ”상처와도 같은 작은 빛“을 남기고 ”아프게 사라”(이상 최윤 작가의 ‘회색 눈사람’에서 인용)지는 사람들에게 눈물이라도 뿌려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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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 만들어진 신의 기원에 관하여
이영진 지음 / 홍성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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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음성을 듣는다는 사람을 만나면 불가피하게 나는 다니엘 파울 슈레버 생각을 하게 된다.(슈레버는 치매, 신경증, 편집증 등을 앓았던 20 세기 초 독일의 판사로 ‘한 신경병자의 회상록’의 저자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광선을 발하는 거대한 신경망을 통해 자신을 파괴하려던 신과 소통하며 그 속에서 자신의 육체가 여자로 변신하는 환상 등을 고백한 사람인 다니엘 파울 슈레버. 그의 원형이라 할 스베덴보리를 이야기하며 칸트는 그런 소리를 헛소리로 치부하면 중요한 문제를 간과한다는 비난을 받고, 진지하게 반박하면 비웃음을 면하지 못하게 마련이라는 말을 했지만 내 피난처는 스피노자의 사상 즉 신 즉 자연이다.


스피노자의 신을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본원성이라는 어거스틴과 아퀴나스의 신, 이성(理性)이라는 데카르트의 신, 관념이라는 칸트의 신, 합리성이라는 헤겔의 신, 진화라는 다윈의 신, 물질이라는 마르크스의 신, 허무라는 니체의 신, 무의식이라는 프로이트의 신, 존재와 현상이라는 하이데거의 신, 구조라는 소쉬르의 신, 욕망이라는 라캉의 신, 해체라는 데리다의 신 등을 이야기한 이영진 목사의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는 참고 자료로 삼을 만하다. 부제는 ‘만들어진 신의 기원에 관하여‘이다. 저자는 작고 아름다운 교회를 지향하는 미문(美門) 교회를 설립, 목회를 병행하며 책을 쓰고 있다.


앞서 이야기한 스베덴보리의 이름을 내가 처음 들은 것은 2009년이다. 칸트(1724 - 1824)보다 한 세대 앞섰던 스베덴보리(1688 - 1772)는 스웨덴의 과학자 출신의 영성 신학자로 칸트는 수백 km 떨어진 곳의 화재 상황을 화면을 보듯 중계한 스베덴보리의 능력에 매료되어 그를 영혼을 보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시령자(視靈者)로 인정하지만 후에 스베덴보리의 능력을 부정한다. 순수이성은 신, 영혼 등을 파악할 수 없지만 실천이성적 관점에서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고 본 칸트. 열린 가능성을 인정한 것이지만 나에게는 스베덴보리라는 아포리아를 해결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보인다.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는 해당 사상가의 사상 중간 중간에 관련 영화 이야기를 넣은 구성이 돋보인다. 중요한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는 어거스틴이 플라톤을 재구성했던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를 신학으로 재구성한 인물”이라는 구절(29 페이지) 등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플라톤: 연역적: 어거스틴적이라는 공식과, 아리스토텔레스: 귀납적: 아퀴나스적이라는 공식을 얻게 된다. 앞서 스베덴보리 이야기를 했지만 칸트는 “경험의 대상이 되지 않는 영역에서 출몰하는 판단과 행위를 회의론자들이 부정의 형식에 대입한 것과 달리 적극 수용하여 변증했“다.(61 페이지)


칸트는 쾌감이란 이성 없는 동물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며 선(善)은 모든 이성적 존재자 일반에게 적용되는 것이지만 아름다움은 동물적이면서도 이성적 존재자에게 즉 이성적 존재자이면서 동물적 존재자인 인간에게 적용된다고 보았다.(’판단력 비판‘) 칸트는 아름다움의 원천을 두려움으로 정의했다. 이 두려움이란 자연을 만났을 때의 감관에 의한 것이다. 우리는 두려움을 통해 놀라고, 그 놀라움을 타고 들어온 미적 쾌감을 통해 비로소 즐거움에 이른다.(73 페이지) 저자가 헤겔의 합리성을 설명하는 데 든 영화는 톰 후퍼 감독의 ’레 미제라블‘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장 발장인데 발장은 성(姓)이고 장은 이름이다.


마르크스의 신 즉 물질은 다소 논쟁적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칼 마르크스에게 종교란 아편이다. 그것은 그가 보기에 관념으로 이루어진 착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메시아는 관념이 아니다. 철저한 인성 즉 물적 토대에 기인한다. 이것을 부인하면 적그리스도라 하였다.“(129 페이지) 저자가 말하는 확실한 물적 토대에 기인한 것은 십자가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가 그리스도교를 관념적이라 말하는 것은 저자가 말하는 물적 토대에 기인한 십자가를 못 보아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교가 관념적 해결책을 구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니체를 이야기하며 저자가 거론한 것 즉 ”근대 이성주의 과학은 그리스도교적인 도덕은 존재하지도 않는 초월적 가치 위에 성립“(141 페이지)되었기 때문에 (마르크스가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기독교를 관념적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니체는 허무주의 시대에 신뢰할 만한 가치기준을 잃고 주춤거리는 소극적 허무주의와 달리 적극적 허무 즉 영원회귀를 할 것을 주문했다. 그 과정을 통해 초인이 되는 것이다.(관념적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저자는 ”종교는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말과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은 우상을 제거하는 의미로 발(發)해진 말이지만 프로이트의 ”의심“은 그들과 달리 자기 우상을 제거하는 공적(功績)이 있다고 말한다.(159 페이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명제는 ”나는 의식할 때(노에시스) 의식된다.“(노에마)는 현상학의 명제와 다르다. 하이데거는 우리는 (플라톤의 생각과 달리) 천상에서 하계(下界)로 내던져졌기 때문에 불안한 존재가 된 것이 아니라 (자의와 상관없이 내던져졌다는 의식으로 인한) 불안감을 통해 존재한다고 보았다.(174 페이지. 피투성: 被投性)


피터 위어의 영화 ’트루먼쇼‘에서 트루먼은 스튜디오라는 갇힌 공간에서 탈출하고 뛰쳐나와야만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스튜디오 내에서 이미 불안감을 통해 자신을 내던져진 존재로 인식함으로써 존재가 된 것이다. 하이데거는 사물의 존재는 이론적이고 분석적인 파악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이 세계 속에서 갖는 지위 즉 세계의 총체적인 도구적 연관 속에서 탈은폐되는 순간 저절로 드러난다고 보았다. 소쉬르의 신 구조에서 저자는 랑그와 파롤을 이야기한다. 오순절에 방언(方言)이 터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하늘의 언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교도의 악령의 말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전하며 이는 방언이라는 시니피앙이 지닌 시니피에를 오독한 데 따른 결과라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이 사건을 기록한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는 그것을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 사건으로 유비(類比)한 것이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대두된 남근을 생물학적 성의 기관이 아닌 일종의 기표로 제시했다.(211 페이지) 이는 남근이 남성성에게는 아버지 되기이며 여성성에게는 이성의 선망이라고만 정의되는 한계에 대한 보충이다.


라캉은 성적 결합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욕망에 관한 문제의 답에 착안한 것이다. 라캉은 주체는 결핍이고 욕망은 환유적이라는 명제를 도출했다.(환유는 그것이 지닌 속성과 밀접한 다른 관계를 지닌 것을 빌려 나타내는 수사학 방법이다. 은유란 어떤 사물의 표현을 빌려 그 의미를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방법이다.) 마지막 장은 데리다의 신 해체이다. 이 챕터에 인용되는 영화는 ’시네마 천국‘이다.


데리다의 해체는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가장 특별한 것은 언어에 대한 해체이다. 그의 에크리튀르는 글씨, 필적 등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단어이지만 데리다는 활자로 된 문자로서의 글씨라기보다 흔적과 자국의 의미로 채용했다. 에크리튀르는 원저자가 처했던 상황을 보존하고 있는 개념으로 저자가 사라지면 문맥도 사라지겠지만 데리다는 오히려 그렇기에 그것은 반복된 읽기의 가능성으로 열린다고 보았다. 데리다는 반복 가능성을 지닌 (문자적) 에크리튀르야말로 우월한 언어라고 역설했다. 데리다가 음성언어에 반하는 언어로서 제시한 에크리튀르는 해석학상의 궁극적 언어인 소리로서 언어의 기능을 연상시킨다.(23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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