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어제 저와 인연이 있는 출판사(서초구 강남대로)에 다녀왔습니다. 이 출판사 저 출판에서 소개해주기를 바라고 가져온 100권은 넘을 책들 가운데 마음대로 골라갈 수 있는 상황에서 저는 17권을 들고 왔습니다. 택배로라면 30권은 더 넘게 골랐을 텐데 무게감을 느끼고 싶어 들고 왔습니다. “내 청춘은 내 집 하나 넓히지 못하고 전투도 못 하고 몇 수레의 책들과 함께 지나갔다”는 강규 작가의 말을 떠올리며... 전철 안에서 70세 정도로 보이시는 분이 제가 들고 있는 니체 책을 보시더니 언제 나온 책이냐 물어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산에 다녀오시는 길이라는 그 분은 몇 년 전 등산 중 실족해 머리를 다쳐 혼수 상태로 며칠을 지내신 끝에 겨우 회복되어 지금은 약간의 후유증만이 있을 뿐 생활에 큰 무리는 없다고 하시더군요.

 

b) 제가 들고 있는 책이 50년 전 실존주의 철학과 니체, 하이데거 등을 읽느라 치른 그 분의 고투(苦鬪)와 환희(歡喜)를 추억하게 한 것 같습니다. 대화는 그분의 아직은 완전하지 않은(어쩌면 쇠퇴해가는 것이라 해야 옳을지도 모를) 기억 때문에 몇 군데 빈 곳이 있는 철학 개념들과 철학자들에 대한 말을 그 분이 던지고 제가 그것을 수리(修理)하듯 마무리하는 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 분은 양재 시민의 숲 역에서 출발해 양재에서 환승한 저와 종로 3가까지 동행하며 대화를 나누다 정이 드셨는지 헤어지는 순간 성(姓)이라도 알고 싶다고 하시며 악수를 청하셨습니다. 답으로 건강하세요란 말씀을 드린 저는 그 분이 저에게 멋있다고 하시기에 제가 그런 면을 가지고 있어서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c) 하지만 그보다는 제가 대화 상대를 해드림으로써 그 연배로서는 드물게 철학 이야기를 하실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 분 스스로 자긍심을 느끼셔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었을까, 란 생각을 했습니다. 실존주의에 카뮈를 포함시켜도 될까요? 란 제 말에 그 분은 그렇다고 답하셨습니다. “유명한 가난과 질병에의 위험”, “우아한 태도와 진지함, 자기의 속사정을 겉에 나타내지 않는 특징적인 수줍음과 어느 그룹에서나 어느새 자타가 공인하는 지도자로 군림하는 ‘대장기질'의 설득력”이란 김화영 교수의 카뮈론(論)을 기억했습니다. 집에 돌아와 이 글을 다시 들추어 보며 어느 부분은 저와 비슷하고 어느 부분은 거리가 있고, 어느 부분은 닮고 싶고 어느 부분은 그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게는 특별한 시간인 2016년 10월 15일은 그렇게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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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과 비탄, 환희, 고통을 알려면 니체를 읽을 필요가 있다. 그를 모르면 감동과 비탄, 환희, 고통을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단정적인 만큼 오만하기에 그렇게 말하지 않기로 한다. 그런데 너바나의 보컬 커트 코베인이 천천히 사라지는 것보다 한 번에 불타 없어지는 것이 낫다("It's better to burn out than to fade away.")는 유서를 쓰고 자살(1994년)했다는 사실 앞에서는 니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니체에 꽂힌 사람들은 아마도 그의 첫 저서인 ‘비극의 탄생’에서부터 눈을 뗄 수 없을(can't take my eyes off you)지도 모르겠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의 긴장과 상호 도움이라는 묘한 만남으로 비극(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고 삶의 고통과 허무를 이기게 하는)이 탄생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비극이 몰락했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니체는 몰락을 이끈 주범(主犯)으로 “마신(魔神)” 소크라테스를 든다. 니체는 소크라테스의 각본에 따라 비극 작가 에우리피데스가 사람들이 부르는 합창을 대체해 소크라테스의 변론술을 상연한 이래 다른 장르들과는 달리 비극은 단번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죽었다고 보았다. 이 부분에서 커트 코베인을 생각하게 된다. 그는 니체를 읽었다. 허무주의에 빠져.


물론 니체의 허무주의와 커트 코베인의 허무주의는 맥락이 다르다. 어떻든 커트 코베인의 유서(“천천히 사라지는 것보다 한 번에 불타 없어지는 것이 낫다.”)에서 니체가 슬퍼하고 안타까워한 비극의 죽음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커트 코베인이 ‘비극의 탄생‘을 통해 니체가 폭로한 ’단번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비극‘ 부분을 읽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읽었으리라고 본다. 니체 매니아라면 니체의 첫 저서이고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니 읽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커트 코베인은 정말 비극처럼 단번에 사라진 것을 실천한 셈이 되는 것일까?(답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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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오래지 않지만 내 서울 나들이의 역사도 몇 개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90년대 중반 저가이면서 양질의 레퍼토리를 자랑하는 Naxos 레이블의 클래식 음반을 사기 위해 한동안 압구정의 신나라 레코드를 드나들었다. 당시는 프로그레시브 록도 함께 좋아하던 때여서 홍대 앞의 Mythos에도 자주 갔었다. 그 이후 2001년 논현동의 기수련 센터와 2002년 양재동의 초기 불교 명상 센터를 드나들던 시기를 거쳤다. 창덕궁 인근에 화실을 가지고 있던 도반(道伴) 덕에 궁궐문화와 불교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내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들 중 하나가 서점 순례이다. 어느 해에는 200번도 더 넘게 서울의 서점들을 드나들기도 했다. 2002년 폐업한 종로서적이 한창 영업중이던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내 서점 순례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어 어느덧 3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올해 들어서는 문화, 역사, 글쓰기, 편집 등의 강의를 듣기 위해 종로(정독도서관, 궁궐문화원), 마포, 구로, 양재 등을 자주(또는 가끔) 방문했으니 특별한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좋을 만하다.

 


역사와 문화, 미술 등에 대한 관심의 일환으로 궁궐과 박물관, 미술관 등을 자주 찾은 것도 올해 자랑할 만한 개인사이다. 어제는 고궁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어둑해진 안국동 거리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정독 도서관에서 강의를 듣고 집에 오니 밤 11시가 넘어 있었다. 서울에 가면 걸으면서 책을 읽게 된다. 그 자유가 참 좋다. 이제 서울을 찾게 된다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가장 먼저 해보고 싶은 것이 골목길 순방이다.

 

 

한양 도성이나 정동길 순례도 있고 경리단길, 가로수길 등도 좋지만 무엇보다 골목길이 마음을 끄는 것은 왜일까? 앞으로는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많이 궁궐과 박물관, 미술관 등을 찾아야 할 것이고,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면서도 음악회에 많이 가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부암아트홀 같은 소극장을 자주 찾고 싶다. “정오가 되면 성공회쪽 담을 넘어 종소리가 들린다”처럼 김용범 시인의 서정적인 시를 음미하며 조용히 걸어야 할 곳들이 이렇게나 많아 행복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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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릉(宣靖陵)은 성종과 그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가 묻힌 선릉(宣陵), 중종이 묻힌 정릉(靖陵)을 합한 말이다.(정릉(貞陵)은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가 묻힌 곳이다.) 10월 27일 테마 해설 수업을 듣기 위해 찾게 될 선정릉. 성종(成宗)이란 이름을 통해 알 수 있듯 그는 조선의 기틀을 마련한 임금으로 꼽힌다. 법전(法典)인 '경국대전'의 편찬사업을 이어받아 1485년 최종 완성, 반포했기 때문에 그렇게 인정되는 듯 하다.


성종의 첫 번째 왕후는 압구정(鴨鷗亭)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 한씨이다. 성종은 낮에는 성군(聖君)의 대명사인 (중국 신화 속 군주인) 요순처럼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밤에는 폭군의 대명사인 중국 하나라의 걸왕과 은나라의 주왕처럼 쾌락을 탐해 주요순(晝堯舜) 야걸주(夜桀紂)로 불렸다고 한다. 이상곤 한의사는 '왕의 한의학'에서 성종이 묻힌 선릉 주변 거리인 강남을 주목한다. 즉 낮에는 한국 경제 발전의 심장부이지만 밤에는 환락의 거리가 되는 강남에 주요순 야걸주의 임금인 성종이 묻힌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흥미롭다. 하지만 함께 묻힌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를 고려하지 않는다 해도 성종과 차이점이 뚜렷한 중종은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중종은 우유부단과 잔인함이라는 이중적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주요순 야걸주처럼 이중적인 면에서는 비슷하지만 그것을 같은 부류에 포함시킬 수는 없다. 특기할 것은 그가 죽인 선비들의 수가 형인 연산군이 죽인 선비들의 수보다 많다는 것이다. 중종의 어의(御醫)는 그 유명한 여의 장금(대장금)이었다. 중종이 사사(賜死)한 대표 인물로 조광조를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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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星湖) 이익(李瀷) 선생의 전집이 17권으로 완역, 출간되었다. 다산(茶山) 정약용 선생은 좋아하는데 그의 스승이 누구인지 아느냐는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면 안 되겠기에 이번 출간을 계기로 확실한 계보를 그리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아시겠지만 다산의 스승은 성호 이익이다. 물론 다산 선생은 성호 선생을 사숙(私淑)했다. 성호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다산 선생의 나이는 두 살이었다. 박석무 선생은 다산이 성호의 유저遺著를 읽고 흔연히 학문을 하리라 마음먹은 뒤 학문적으로 큰 성공을 이룬 것을 성호라는 큰 호수를 다산이라는 거대한 산이 둘러싼 것으로 표현했다.(‘다산 정약용 평전’ 96 페이지) a) 궁금한 것은 다산처럼 유명한 사람이 아닌 무명의 선비가 유명한 분을 사사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또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해도 사람들이 그들을 스승 - 제자 사이로 인정할까, 이다.


‘주역’에 교육에 관한 괘(卦)가 두 개 있다. 산천대축(山川大畜)과 산수몽(山水蒙)이다.(이런 이야기를 하지만 주역의 괘와 명칭의 관계도 자의적이고 그 의미도 자의적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다만 그들이 두 가지 괘를 설정했다는 말 정도를 하려는 것이다.) 산천대축은 사숙에 해당, 산수몽은 직접 가르침을 받는 것에 해당. 나는 불교의 성문, 연각, 보살 중에서 연각(緣覺) 또는 독각(獨覺)을 좋아하기에 사숙, 산천대축을 세트로 좋아한다.(사숙: 산천대축: 연각: 독각/ 직접 배움: 산수몽: 성문(聲聞): 우파니샤드?) 성호, 다산 모두 실학자이다. 약 20년 전 한형조 교수가 ‘주희(朱熹)에서 정약용으로’를 낼 때 이제부터 ‘정약용에서 주희로’가 필요하겠다는 말을 했다.


학위 논문을 쓸 때 다산의 주자학 비판을 발전사적 관점과 진보적 시각으로 보았는데 논문을 마칠 때쯤 되자 다산의 주자학 비판이 전적으로 옳은가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직 관련 출간 소식은 없어 많이 기다려진다. 알기로 주희는 희(熹: 밝을 희)의 기운을 중화시키기 위해 그믐 회(晦)를 써서 호(號)를 회암(晦庵)으로 했다. 때마침(?) 지난 달 23, 24일 실학 담론 학술대회가 열렸다. 실학(實學)이(라고 하지만) 실천 없는 말잔치였다는 의견과 유학(儒學)의 역동적 흐름이라는 의견이 맞섰다. b) 이런 경우는 보는 입장에서 참 난감하다. 실학이 20세기 후반, 근대에 대한 절실한 욕망이 만들어낸 유령이라는 입장이 학계의 공식 입장이라고..(재작년부터 유령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백상현 교수의 ‘라캉 미술관의 유령들’부터..)


c) 유령이란 존재들의 있음의 질서 속에서는 출현할 수 없었던 무언가가 그와 같은 존재 질서의 일관된 흐름이 멈추는 지점에서 출현하게 되는 무언가이다. 세계에 출현하는 모든 것들을 환영(幻影)으로 간주한 라캉은 세계 - 현실이 가진 환영적 정체를 삶의 가짜 리얼리티, 세계를 구성하는 현상들의 정상성의 효과들을 스크린이라 표현. 스크린은 인간의 눈 앞에 펼쳐진 거대한 영화 스크린 같은 것으로 그 너머에 존재하는 실체를 가리고 은폐하는 기능을 한다.(‘라캉 미술관의 유령들’ 13, 14 페이지)


사실 실학 논쟁에서 나온 유령과 ‘라캉의 미술관‘에서 언급된 유령은 다르다. 전자는 실체가 없는 것을 가리킨다면 후자는 세계의 거짓을 가리는 스크린이 오작동을 일으킬 때 출현하는 무엇이다. 라캉은 진리를 갈구하는 주체의 응시를 진정으로 충족시키기보다 이미지의 속임수 속에서 응시를 달래는 한 줌의 유사 진리를 던져주는 그림의 속성을 언급하며 그런 화가들을 소작농 협회에 종속된 사람들이라고 비판했다. 라캉이 보기에 화가들은 우리가 꼭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진리를 보여주겠다고 하지만 오히려 진리 자체를 은폐하는 마술사, 미혹하는 자들이었다.(’라캉 미술관의 유령들‘ 86 페이지)


유령 즉 세계의 진실을 은폐하는 그림이 아닌 그것을 폭로하는 그림 이미지를 남긴 화가들의 사례를 찾아야겠다. 백상현 교수는 (진정한) 예술가들이란 유령을 소환하는 무당들이라 말한다. 현실의 질서를 구성하는 규범적 아름다움의 영상을 비틀어 낯설면서도 기이한 유령 이미지를 창조하고 그것을 새로운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삼고자 투쟁하는 사람들이라 설명한다. 저자가 예시하는 화가들은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린 피카소,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등을 그린 프란시스코 고야 등이다.


흥미로운 것은 두 화가가 전쟁을 폭로하는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이다. 피카소는 ‘게르니카‘, 고야는 ’1808년 5월 3일‘이다. 이 그림들은 현실을 폭로하는 그림들이지만 “낯설면서도 기이한 유령 이미지”를 창조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아비뇽의 처녀들’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기존의 상식을 뒤트는 그림이 된 것이다. 사각의 큐빅 모양으로 입체감을 표시했고, 여러 방향에서 본 모습을 하나의 평면에 합쳐 그림을 완성했다. 앞으로 누가 유령을 소환하는 무당으로 기록될지? 화가만이 아니라 철학자, 작가, 시인 등도 그 대열에 포함될 것이다. 내가 가장 기대하는 사람들은 단연 철학자들이다. 새 철학자들을 찾는 데 힘을 기울여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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