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뿔이다 - 어느 헤겔주의자의 우리 철학 뒤집어 읽기
전대호 지음 / 북인더갭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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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호의 '철학은 뿔이다'는 헤겔주의자인 저자가 김상봉, 이진경, 김상환, 이어령 등을 실명 비판한 책이다. 저자는 자칭 주체주의자이다. "주체라는 개념에 어마어마한 의미, 역량, 직접성, 현실성 등을 부여"하는 사람들이다. 반면 이진경, 김상환은 존재주의자란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저자는 양쪽 모두에 진리가 있다는 생각을 늘 견지하려 애쓰는 헤겔주의자이다. 저자는 주체는 반드시 행동해야 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점에서 존재와 결정적으로 다르다고 말한다.


저자는 공부가 깊어지면 자신이 잠정적으로 편갈라본 존재파/ 주체파가 동전의 양면으로 밝혀지기를 기원한다고 말한다.(존재파는 주로 자연의 광활함 앞에서 철학의 동기를 얻는 사람이고 주체파는 시장의 난장판에서 철학의 동기를 얻는 사람이다; 15페이지) 철학에서 주체는 기독교의 구원, 불교의 불성과 같다. 저자는 김상봉과 자신의 주체관이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지가 드러나기를 희망한다.


저자는 주체성이란 무엇보다 자기의식에 존립한다는 김상봉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주체란 자기를 나라고 부르는 모든 각자라는 상식적 정의를 나란히 놓는다.(주체는 자기관계이다.) 김상봉은 홀로주체성을 비판하고 서로주체성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김상봉은 자기상실을 동반할 때 참된 의미에서 자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중요한 점은 김상봉이 말하는 만남이 결속을 특징으로 한다면 저자가 말하는 만남은 싸움을 특징으로 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자신이 이해한 헤겔의 주체이론을 아리아드네의 실로 삼으려 한다.


저자는 자신에게 주체의 본질은 시스템 안의 나와 시스템 밖의 나가 나누는 대화라고 설명한다. 주체 안에는 반드시 깊은 균열이 내재한다. 저자는 김상봉이 자유는 이야기하지만 그 짝에 해당하는 책임은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헤겔의 변증법은 항상 이미 어디에나 있는 자기거리(距離)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과정이라 설명한다. 상반된 둘을 모아 하나의 통일체를 만드는 과정으로서의 변증법은 자신이 아는 변증법의 정반대에 가깝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저자에 의하면 대화는 주체의 본질적 활동이며 다른 이름이다.


저자에 의하면 진짜 생각은 보편적인 나와 특수한 나가 나누는 진짜 대화이다. 모두 각자는 내면에서 진짜로 생각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동등한 상대로서의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다. 특수한 나와 특수한 너가 진짜로 대화하려면 특수한 나가 이미 내면에서 보편적 나와 대화하고 특수한 너 역시 이미 내면에서 보편적 너와 대화하고 있어야 진짜 대화가 이루어진다. 진정한 대화에서 나를 변화시키거나 유지시키는 것은 나 자신이다.(41 페이지)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든 관계는 객체화(사물화)와 결부되어 있다. 사람과 사람은 항상 객체화된 나와 객체화된 너로서 만난다. 그러면서도 주체로서의 나와 주체로서의 너를 인정한다. 여기에 신비가 있고 이 신비는 나가 사물화된 나를 주체로서의 나로 인정하는 것과 똑같은 신비이다.(44 페이지) 인간은 생각된 대상을 있는 그대로의 대상으로 간주하곤 한다. 거꾸로 있는 그대로의 대상으로 간주되었던 것이 다시 생각된 대상으로 재조명되기도 한다. 서양근대철학은 주체(생각된 대상)와 객체(있는 그대로의 대상) 사이의 넘나듦을 본격적으로 탐구하는 사상이다.(45 페이지)


저자는 김상봉이 주객관계를 일종의 주종관계로 파악하고 있는 듯 하다고 말한다.(46 페이지) 저자는 나의 주체는 항상 이미 서로이며 홀로라고 말한다.(52 페이지) 저자는 김상봉이 자꾸 아픔이나 고통 같은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한다. 저자는 실재하는 자기거리를 품지 않은 주체는 아예 주체가 아니며 서양 사상은 대체로 이런 주체를 이야기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58 페이지) 저자는 헤겔의 아우프헤벤의 번역어로 거두다란 말을 선택한다.


숨을 거두다란 표현이 부정적이라면 구호단체들이 고아들을 거두는 것은 긍정적이라는 말을 하며 저자는 두 번째 의미를 간과하지 않는 것이 헤겔 철학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느낀다고 말한다.(59 페이지) 거두다란 표현이 지양(止揚)하다란 표현보다 훨씬 더 낫다는 것이 저자의 추가 설명이다. 김상봉이 말하는 자기상실이 마음대로 없앨 수 있다는 의미에서 정말로 실재하는 자기거리를 뜻한다면 자기상실은 한국적 주체만의 특징이 아니라 모든 주체의 특징이자 근본구조이다.(60 페이지)


저자는 김상봉이 한국철학의 부재를 한탄하지만 한국어 사용자들의 삶 자체가 이미 한국철학이라고 본다. 철학이 꼭 따로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헤겔이 말하는 목적론이란 보고 또 보고 끝까지 보아야 정체를 안다는 의미이며 헤겔이 말하는 전체란 풍요 그 자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진경의 ‘철학과 굴뚝청소부’를 논하며 거울을 주체로 놓은 이진경을 비판한다. 주체는 자신을 나라고 부르는 모든 각자인데 어떻게 사물인 거울을 주체로 설정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저자는 이진경이 일관되게 추구한 것은 주체로 대표되는 근대성에 대한 냉혹한 비판이라 설명한다.(84, 85 페이지) 저자는 인간은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하는 이진경 자신은 그런 코드에서 해방되어 보편의 관점에서 말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란 질문을 던진다.(85 페이지) 멋진 공격이다.
저자는 인간에 대한 믿음과 예의 때문에 인간은 자유롭지 못하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인간은 사실 자유로운 만큼 자유롭지 못한 존재가 아닌지?


이렇게 말하면 모순처럼 들리겠지만 인간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존재도 아니고 전적으로 부자유스러운 존재도 아니라 말하면 좋을 것이다. 나는 이진경이 인간은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하며 논의를 이어나가는 것은 이진경 자신은 그런 코드에서 해방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뿐 아니라 인간이 가진 한계를 인식하고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저자는 이진경이 주체를 영 오해하는 것은 아닐까, 라고 말한다. 저자는 분리와 거리두기는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이라 말한다. 분리는 단절을 의미하고 거리두기는 새로운 관계설정을 함축한다는 것이다.(92 페이지)


자기 자신에게까지 거리를 두는 존재라고 말하는 저자는 데카르트의 의심이 거리두기의 하나라고 덧붙인다.(이진경은 근대철학은 주체를 신으로부터 분리함으로써 성립했다는 말을 했다. 분리함으로써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저자는 이진경이 주체의 인식과 대상의 일치 여부를 주체 자신이 확인할 길이 없다는 딜레마를 지적하고 나서 곧바로 거울로 자기 얼굴 보기를 예로 든다고 말한다.(93 페이지)


저자는 내용 없는 사상(생각)은 공허하다는 칸트의 말에서 내용은 데이터이고 생각은 계산이라 말한다. 데이터로 뒷받침되지 않는 생각(계산)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한편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란 칸트의 다른 말에서 개념은 계산으로, 직관은 데이터로 설명된다. 계산을 통해(거쳐) 데이터가 도출된다는 것이다.(내용 없는 사상은 공허하고 개념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란 칸트의 말은 이렇게 이해된다. 데이터 없는 생각은 공허하고 계산 없는 데이터는 맹목이라는 의미!)


저자는 과학에어 계산과 데이터 둘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란 물음을 받는다면 과학에서 중요한 것은 과학이라 말할 것이라 말한다.(117 페이지) 저자는 과학에서 계산이 중요한 것은 기본적으로 과학이 대화판이기 때문이라 말한다.(119 페이지) 그런데 저자는 이진경은 근대과학의 중심에 수학과 계산을 놓는데 그것은 숫자와 계산이 비교할 수 없는 것들을 비교하게 하고 전혀 다른 종류의 것들을 숫자들의 질서, 수학들의 질서 속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계산을 확실한 증거로 본다면 이진경은 계산에서 모든 사물을 계산 가능한 관계 속으로 끌어들이는 자본주의를 본다. 저자는 근대철학은 아직 그 잠재력을 충분히 펼치지 못한 악기와 같다고 말한다.(131 페이지) 저자는 이진경이 근대철학으로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기는커녕 주로 근대철학의 문제, 한계, 약점 같은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키는데 그마저도 현악기의 울림통을 두드리면서 이것이 타악기로서 영 신통치 않다는 격이라고 지적한다.(131 페이지)


저자는 김상환을 비판하는 자리에서도 주체 이야기를 한다. 주체 자신이 아무리 부정하더라도 무릇 주체는 소통이란 것이다.(145, 146 페이지) 저자는 오늘날 철학판의 불문율은 할거(割據)라 말한다.(148 페이지) 할거란 땅을 나누어 차지해 세력을 형성한다는 뜻이다.(나눌 할, 의거할 거) 저자는 정신현상학의 어느 한 대목을 뚝 떼어다가 헤겔에게 설명해달라고 말하면 한참 고민 끝에 몇 마디 버벅거리다가 그냥 스스로 이해하시면 안 될까요? 하며 난색을 표할 것 같다고 말한다.(150 페이지)


저자는 헤겔을 조금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거의 누구나 이항대립의 극복, 모순의 해소를 운운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저자에 의하면 헤겔이 문제삼는 것은 이항대립에 대한 무기력한 이해, 다른 한편으로는 이항대립을 뛰어넘겠다는 낭만주의적 포부의 허망함이다. 저자는 철학이 시장에서 탄생한다는 것도 경이로운 자연 앞에서 탄생한다는 것 못지 않게 진실이라고 본다고 말한다.(181 페이지)


저자는 김상환이 설정한 세 인물 즉 불행한 의식, 성실한 의식, 아름다운 영혼을 일목요연하게 비교한다. 김상환은 인문학자인 자신을 불행한 의식과 성실한 의식, 아름다운 영혼의 조합으로 규정한다. 저자는 헤겔을 프랙털 미로, 지옥의 유황 안개 자욱한 미로로 규정하며 거기에 발을 들인 이상 피차 영원히 헤맬 각오를 해야 할 판이니 어떤 해석자가 자신의 길만 옳다고 우길 수 없다고 말한다.(199 페이지)


저자는 태권도에 빗대면 품새보다 겨루기가 바닥에 닿은 철학의 형식으로 적합하다고 느꼈다고 말한다. 저자는 고맙게도 철학적 정신은 아무리 싸워도 다치지 않는다고 말한다.(305 페이지) 철학에서 겨루기란 대화이다. 맞선 두 사람이 말로 얽히는 과정이다. 이것이 저자가 이해하는 한 헤겔이 말하는 변증법의 정체이다. 저자는 서양근대철학, 자기관계, 자율과 책임이 우리에게 유효한 해방의 구호라고 느낀다고 말한다.(311 페이지)


저자는 우리 곁에서 한국어로 활동하는 철학자들을 논하면서 굳이 먼 나라의 헤겔을 끌어들일까? 말한다.(319 페이지) 저자는 자신이 배운 헤겔과 이 땅의 많은 지식인이 이야기하는 헤겔이 퍽 다르다는 충격적인 경험이 자신에게 오랫동안 큰 수수께끼였다고 말한다.(320 페이지) 저자는 칸트와 헤겔을 연속선상에 놓고 해석하는 쪽을 선호한다고 말한다.(320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칸트에서 헤겔에 이르는 독일고전철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오류를 어떻게 취급하느냐와 관련이 있다.


저자는 흔히 사람들이 칸트의 사물 자체 불가지론이 서양근대철학 특유의 한계요 머뭇거림이요 후퇴라 말하는 것은 몰라도 너무 모르는 해석이라 말한다.(325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칸트는 그 이름도 중후한 존재를 몽땅 내주고 허공에서 나풀거리는 대화를 붙잡은 셈이다. 사물 자체는 칸트와 헤겔의 차이를 이야기할 때도 즐겨 거론된다. 칸트가 사물 자체를 알 수 없다고 한 반면에 헤겔은 알 수 있다고 했으니 두 철학자의 차이는 하늘과 땅 만큼 다르게 보이지만 그들의 관계는 아스라한 지평선 만큼이나 미묘하다.


사물 자체는 알 수 없다는 칸트와 알 수 있다는 헤겔을 차이나는 것으로 보기보다 대화를 살리기 위한 취지에서 완벽하게 한편이라 볼 필요가 있다. 저자는 헤겔을 칸트와 더불어 존재를 대화로 떠받치고 재구성한 철학자로 본다. 이해하기 버겁고 정리하기에도 바쁜 책 읽기를 마치며 다음을 기약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은 무리한 생각이 아닐 것이다. 공부가 깊어지면 다시 읽을 수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내공이 턱없이 부족함을 느낀 읽기였음을 고백한다.(스스로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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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불교의 관계는 단편적인 시각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이슈이다. 잘 알려졌듯 조선은 숭유억불을 공식화한 나라였다. 세종은 소헌왕후와 막내 아들 부부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불교에 매달렸다.(‘조선왕조 스캔들’ 98 페이지) 여기까지 읽으면 세종이 숭유억불이라는 대의(大義)를 어기며 사익을 위해 기복신앙에 매달린 것으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사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세종에게 신하와의 투쟁에서 늘 불리하게 작용했던 두 가지 이슈가 있었다. 하나는 형인 양령대군과 관련한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불교 관련 문제이다. 물론 그럼에도 세종은 불교를 둘러싼 신하들과의 논쟁에서 만만찮은 면을 보였다.(이한우 지음 ‘세종, 조선의 표준을 세우다’ 97 페이지)


세종은 당시 7종이었던 불교 종파를 천태종과 조계종 등 2종으로 통합하고 전국의 사찰을 양대 종파에 18사씩 총 36사만 남기고 모두 없애며 상당한 사찰 재산을 국고로 환수했다.(이근호 지음 ‘궁금해서 밤새 읽는 한국사‘ 193 페이지) 불교에 의거(依據)했지만 사적 이익을 추구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왜 세종은 불교 책을 읽었을까'의 저자 오윤희 씨에 의하면 세종은 우리말 불경 주석에 유학자들에 대한 불평을 담았다. 언해불전은 세종이 불교 책을 쉬운 우리말로 옮겨 널리 보급한 결과 탄생한 책이다. 오윤희 씨는 (훈민정음과) 언해불전은 세종이 성리학 지배층을 겨냥해 이념 및 계급투쟁을 하기 위해 취한 방편이었다는 취지의 말을 한다. 세종과 불교의 관계는 결국 세종과 유교 즉 세종과 지식권력의 관계라 할 수 있다.


세종은 25년간 하루도 거르지 않은 성종 다음으로 많은 20년간 하루도 경연(經筵)을 거르지 않은 임금이다.(이향우 지음 ‘궁궐로 떠나는 힐링 여행 경복궁‘ 120 페이지) 경연은 (고려와) 조선 시대에 신하들이 임금에게 유교의 경서와 역사를 가르치던 시간을 말한다. 바람이 그물에 걸리지 않듯 유교(儒敎)적 가치관을 주입받았지만 지식(성리학)권력에 대처했다는 추론이 가능하지 않을지? 아니면 “주자학을 비켜가 잡학에 몰두하기보다 주자학의 심장부를 정면으로 돌파”(이정우 지음 ’인간의 얼굴‘ 161 페이지)한 다산(茶山)처럼 지식권력을 정면으로 돌파했다는 추론이 가능할 것이다. 관련 저서(읽기)를 부르는 세종, 대단한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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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칭과 균형은 흔히 쓰는 말이다. 그런데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그 두 개념의 차이이다. 어거스틴이 시간이 무엇인지 묻는 사람이 없을 때는 아는 것 같다가도 묻는 이에게 설명하려 할 때면 말문이 막힌다고 말한 것처럼 설명을 하려 하면 어렵게만 느껴지는 것이 대칭과 균형의 차이이다.(물론 각각의 개념을 설명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어제 이런 답을 들었다. 대칭과 균형의 차이를 묻는 내 질문에 대한 답으로 대칭은 균형을 낳고 균형은 질서와 조화를 낳는데 단 대칭과 균형이 계속되면 지루함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복궁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중심 영역들과 문들은 대칭을 이루게 했지만 기타의 내전들과 행각들은 자유롭게 배치해 전체적으로 안정감 속의 역동감을 느낄 수 있게 한 건축물이 경복궁이다. 금동대향로 복제에 참여한 금속공예가가 백제 사람이라도 된 듯 빠져들며 우리 것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는 말을 한 것을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그 분과 나는 차이가 분명하다. 그 분은 제작(복제)을 맡은 것이고 나는 경복궁을 배우는 기회를 얻은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 공예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행복한 일이다. 선생님의 말씀처럼 이런 하나 하나의 배움의 시간들을 갖는 것이 전문성을 갖추는 길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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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 기자의 ‘세종, 조선의 표준을 세우다’를 읽고 있다. 10년 전 책이기에 내가 그의 저서 중 유일하게 읽은 ‘슬픈 공자’(2013년)의 출간 기록은 책 날개에 반영되지 않았다. 이한우 기자는 군주(君主) 열전(列傳) 시리즈물로 ‘세종, 조선의 표준을 세우다’ 외에 ‘정조 조선의 혼이 지다’, ‘숙종, 조선의 지존으로 서다’, ‘선조 조선의 난세를 넘다’, ‘성종 조선의 태평을 누리다’, ‘태종 조선의 길을 열다’ 등을 썼다. 저자에 의하면 세종은 조선의 화신(化身)으로 영조니 정조니 하는 이야기는 조선의 에피고넨에 관한 모색일 뿐이다. 이 말을 다소 희극적으로 비틀면 세종을 먼저 사랑하지 않고 영조, 정조를 사랑하는 것은 순서와 개념이 없는 경도(傾倒)라는 말이 가능하지 않을지?

 

지금 읽고 있는 ‘세종, 조선의 표준을 세우다’는 오늘 도서관에서 빌린 ‘성종 조선의 태평을 누리다’와 ‘세종, 조선의 표준을 세우다’ 중 한 권이다. ‘세종, 조선의 표준을 세우다’는 지난 2003년 출간된 ‘세종, 그가 바로 조선이다’의 개정판이다. 인용이 너무 길고 문체도 다분히 논문 스타일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자평이다. ‘세종, 그가 바로 조선이다’를 구해 ‘세종, 조선의 표준을 세우다’와 비교할 필요가 있다.(나에게만 필요한 것) 어떻게 인용을 간결하게 하고 (어렵고 지루한) 논문 스타일에서 벗어났는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기회이다. 의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중뿔나게 어렵고 재미 없게 쓰는 나에게 필요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중뿔나다: 분수에 지나친 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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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청(丹靑)의 문외한으로서 조금씩 아니 하나씩 의미를 알아간다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색만 칠한 가칠 단청, 가칠 단청에 선을 그은 긋기 단청, 모서리에 무늬를 그려넣은 모로 단청, 가운데를 화려한 문양들로 채운 금단청 등... 아무리 복잡한 단청 문양도 결국 이 네 범주에 포함된다. 물론 세부로 들어가면 현란하고 미로(迷路) 같은 단청의 깊이가 우리를 현혹한다. 그런데 최근 (내가 설명해야 할) 경복궁 근정전의 단청을 제작한 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단청은 무명의 누군가가 제작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뜻 밖이어서 반가운 한편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왜일까? 결국(?) 이 분은 불에 탄 숭례문의 단청 복원 공사를 맡아 값싼 화학접착제를 사용해 수억원의 공사 대금을 빼돌린 혐의로 구속된 단청장(무형문화재)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놀라운 일이다. 불과 1년 전의 일이다. 신비하고 멀게만 느껴지던 단청의 세계가 확 눈 앞으로 다가온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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