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고수들의 숨겨진 노하우를 훔쳐라 - 포커스 라이팅
박성후 지음 / 오디세이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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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신(斬新)을 참신하게 해석한 것이 눈에 띈다. 하늘 아래 새 것이 없다는 전제 하에 나온 말이다. 참신의 참은 벨 참자이다. 신은 새로울 신이고. 모든 분야의 대가들은 어디에선가 재료를 가져와(나무를 베듯 가져와) 새롭게 만드는 작업의 명수들이라는 것이다. 물론 거기서 그쳐서는 안 되고 자기다워야 한다. 자기만의 색깔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창작(지음)의 비밀이다.

 

짓는다는 말은 서로 다른 재료들을 섞거나 연결해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다. 저자는 글은 사람이라 표현한다. 글에는 저자의 정신과 삶에 대한 가치관과 인격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좋은 글의 요건은 이렇다. 본질적인 주제에 충실하고, 독창적이되 타당성과 설득력을 가져야 하고, 정확하고 명료해서 과장되지 않아야 하며, 최소의 말로 최대의 효과를 만드는 간결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확성(correct), 명료성(clear), 간결성(concise)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산(茶山)은 공부란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만드는 과정이자 어려운 것을 쉽게 풀이하는 절차라 말했다.(133 페이지) 다산은 복잡한 것을 갈래로 나누고 무리를 지어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도록 종합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산은 언제나 문제는 문제가 아니다. 정말 큰 문제는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공부는 따지는 데서 시작해서 따지는 것으로 끝난다. 선명한 길이 뚜렷이 드러날 때까지 따지고 또 따져라.”란 말을 했다.(225 페이지)

 

책을 쓰는 사람들은 목차를 정리하고 나면 책의 절반은 완성된 것이라 생각한다. 그 만큼 목차는 중요하다.(136 페이지) 고수들의 책은 아무리 두꺼워도 키워드가 그리 많지 않다. 저자는 말한다. 물려받은 재능이 없는 사람이 문학적 글을 제대로 쓰려면 오랜 시간의 뼈를 깎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반면 실용적 글쓰기는 주제에 대한 올바른 해석과 논리적 구조 세우기가 우선되어야 한다.

 

저자는 중()의 특성을 적당한 타협이 아니라 삼각형의 정점과 같은 최선의 시너지를 도출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74 페이지) 이것은 윈윈 전략이기도 하다. 함께 이기는, 소통을 의미한다. 글쓰기의 목적은 소통임을, 서로 바람직한 영향을 주고 받는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저자는 지식 창조를 염두에 두지 않는 배움은 허무한 것이며 글쓰기를 생각하지 않는 책읽기는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103 페이지) 상당한 자극이 되는 말이다. 물론 글쓰기와 책쓰기는 차원이 다르다.

 

칸트는 내용 없는 사상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라는 말을 했다. 또한 지성은 아무것도 직관하지 못한다. 감각은 아무것도 사유하지 못한다. 오직 양자의 결합을 통해서만 지식이 태어난다.”는 말도 했다.(320 페이지) 각 개인에게는 서로 다른 주관적 형식인 선험적 사고의 틀이 있지만 반면 공통적 사고의 틀도 있다. 글쓰기는 이 두 사고의 틀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배우는 것이다.(105 페이지)

 

책은 천천히 한 번 읽는 것보다 핵심 중심으로 빠르게 여러 번 반복해서 읽는 것이 더 활용 가치가 높다.(129 페이지) 전략적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저자는 논리적인 구조 안에 스토리텔링이 담긴다면 가장 효과적인 설득 방법이 될 것이라 말한다.(172 페이지)

 

고수들은 실패의 대가들이다. 가장 많이 실패한 사람들이 고수가 될 자격이 있다.(198 페이지) 베케트는 다시 더 낫게 실패하라는 말을 했다. 세종대왕은 백독백습(百讀百習)으로 유명하다.(208 페이지) 한 권의 책을 백 번 읽고 백 번 필사(筆寫)한 것이다.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주제를 정하라.(232 페이지) 첫 문장이 중요하다. 계속 읽을 것인지 말 것인지는 첫 문단 또는 첫 문장에서 거의 결정된다.(252 페이지) 요점을 세 개 이상 만들면 그것은 이미 요점이 아니다.(255 페이지) 헤드라인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나 대답해야 할 의문을 제시한다. 이어 3개의 핵심 메시지를 설정한다. 결론부에서 구체적인 행동을 위한 지시나 명령, 제안, 단정 등을 제시한다.(255 페이지)

 

소설이 아닌 실용문에서 연역적 방식으로 논리를 정연하게 펼치기는 어렵다. 연역법은 결론을 나중에 제시하는 수사법이다. 또한 특수한 사실을 먼저 제시하는 것이다. 귀납법은 반대이다. 결론이나 핵심을 먼저 제시하고 그 증거나 이유들을 나열하는 방식이다.(270 페이지) 귀납법적 사고를 하려면 여러 가지 복잡한 사실들 중에서 핵심을 포착하는 안목과 공통 분모를 찾아내는 능력이 중요하다.(272 페이지)

 

논리적인 글쓰기에서 필수적인 것은 단 하나의 포인트를 잡아내는 것이다.(292 페이지) 에토스와 파토스 위에 로고스를 세워야 한다.(147 페이지) 로고스는 논리, 이성을 말한다. 파토스는 청중분석을 바탕으로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사용하는 감성적 어필을 말한다. 에토스는 화자가 전하는 메시지에 대한 신뢰를 말한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주장과 근거를 내세워야 한다.(합리성) 글쓴이의 주체적인 색깔이 선명해야 한다.(주체성).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목적성) 저자는 상식적인 생각으로 마땅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으면 비상식적인 관점으로 다르게 구상해 볼 것을 권한다.(306 페이지) 소통과 융합을 추구하되 다른 사람의 생각에 끌려다니지 말고 내면에서 끌리는 대로 질문을 마구 던질 필요가 있다.(32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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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과 에세이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생동하는 실험적 사유의 글을 찾다가 미국의 페미니스트 이론가 벨 훅스의 인상적인 글을 접했다.

“대학은 유토피아가 아니다. 하지만 대학은 유토피아를 창조할 수 있는 장소다.”(2017년 4월 17일 교수신문 수록 김종영 교수 글 참고)

내가 읽은 벨 훅스의 책은 ‘사랑은 사치일까?’ 한 권이다. 그래서 저 말의 출처가 어디인지 알지 못하지만 ‘벨 훅스, 경계 넘기를 가르치기’가 아닌가, 하고 추정할 만하다.

‘벨 훅스, 경계 넘기를 가르치기‘의 원서 제목인 ‘Teaching to Transgress: Education as the Practice of Freedom’에 교육을 뜻하는 단어인 education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경계 넘기보다 위반하기 또는 금기 어기기 정도가 더 타당할 자유의 실천으로서의 교육이란 부제가 눈에 뛴다. 이 책에서 훅스는 케케묵은 인식론을 유지하는 대학 교육을 비판했다.

훅스는 교육을 왜곡하고 있는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 등 각종 편견들을 보며 교사/교수들부터 변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훅스는 노동 계급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교육이라 생각하고 어린 시절부터 열렬한 독자(讀者)로 살아온 분이다.

우리 사회에서 교육은 온갖 차별과 서열주의의 시발점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은데 훅스가 만일 이런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지금 우리가 하는 비판과 자탄 이상의 말을 했으리라 생각한다.

최근 기형도 시인의 ‘오래된 書籍‘을 소개한 이령 시인 덕에 다시 그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을 들춰 보았다.

이 시집에 대학의 유토피아성 여부에 대해 사유하게 해주는 ’대학 시절’이란 시가 있다.

이 시는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로 시작된다.

그리고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는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는 구절이 있고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는 구절로 끝이 난다.

(최루탄을 쏠 때 들리는) 총성과 감옥, 군대, 기관원 등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듯 옛 정서를 불러 일으키는 시이다.

앞서 인용한 김 교수는 벨 훅스의 말을 언급한 데 이어 이런 말을 덧붙였다. ˝한국의 대학은 유토피아를 창조하고 있는가? 아니다...‘헬’(hell)을 창조하고 있다.”는..

벨 훅스가 말한 대학이 갖추어야 할 위상과 너무도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대학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한 기형도는 대학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유토피아로 보았는지 모르지만 어디에도 유토피아는 없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다만 유토피아에 가까운 곳은 있으리라.

물론 기형도 시인이 대학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그가 대학을 유토피아로 생각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기형도 시인은 대학을 유토피아가 아닌 사회보다 덜 두려운 곳으로 보았을 것이다. 총성, 감옥, 기관원 등은 기형도 시인이 살았던 시대(1960 - 1989)의 대학이 유토피아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당시 대학은 사회보다 덜 전쟁터 같았던 곳이자 낭만적인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지?

문득 그런 시절이 그립다. 물론 이는 장소를 그리워 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갔기에 돌아갈 수 없는 특정 시간을 그리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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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7-07-31 07: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쓰는 후배는 기관원이라고˝....이 문구가 확 들어옵니다.헬을 창조하던 시절이 그리 멀지 않은 과거겠지요?

벤투의스케치북 2017-07-31 0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렇습니다... 인상적인 구절입니다...^^
 

( )한 여름 보내시나요?

물건이나 어떤 대상이 시원스럽도록 마음에 들다, 일이 진행되는 상황이나 일의 처리 따위가 시원하고 말끔하게 이루어지다 등을 뜻하는 이 말은 무엇일까요?

저는 불행하게도 ( )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사투리도 비속어도 아닌 표준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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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은 ‘쌈박‘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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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이 직접적으로 대상을 비추는 너무도 밝은 실외에서는 스마트폰의 사진, 글 등등 모든 것을 식별하기 어렵다.

들어갈 실내를 찾아 두리번 거리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럴 때 아웃 포커싱(outfocusing)이란 단어가 생각난다. 촬영하려는 대상만을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배경은 흐릿하게 처리하는 사진 기법이다.

어제 구입한 독일 문학 전공의 작가 서용좌 교수의 장편 소설 ‘흐릿한 하늘의 해’를 읽으며 나는 흐릿한 해라는 말이 아웃 포커싱이란 개념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생각하고 있다.

게슈탈트 심리학에서는 건강하지 못한 개체는 대상의 전경(前景)과 배경(背景)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전경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대상을 말하고, 배경은 나머지 부분을 말한다.

전경과 배경을 구분하지 못하면 뒤죽박죽 혼란스러운 상태에 머물게 되리라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자전적 성격이 어떤 작품보다 짙은 ‘흐릿한 하늘의 해’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한 줄의 글을 쓰지 못한 채 삼백예순날이 흘러갔다.” 개인적 차원의 문제가 아님이 짐작되는데 이어지는 부분에서 작가는 “슬럼프라고 하는 말은 잘 나가던 사람들을 두고 쓴다. 그러니 나로서는 그냥 침체의 늪이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란 말을 한다.

거의 일주일에 걸쳐 성(城)에 진입하려는 고투(苦鬪)를 계속하지만 실패하는 K의 이야기인 ‘카프카의 ‘성(城)’을 생각하게 된다. 내가 그런 것 같다는...

나는 전경과 배경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문을 찾아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고 해야 맞다. 마음을 살피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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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서정과 감각’이란 평론집으로 2014년 김달진 문학상 평론 부문 수상자가 된 김진희 평론가에 대해 대학의 과 선배 정끝별 평론가가 쓴 작가론을 읽었다.

 

이 글에는 김진희 평론가가 대학 2년때 쓴 ‘그때 우리에겐 詩가 있었다’는 구절로 시작되는 시가 소개되어 있다.

새롭다 할 수 없는 것은 ‘시에 관한 각서’라는 평론집에서 저자 김진희 평론가가 “일찍이 시인이 되고 싶었던 나는 아주 자주 시인의 마음이 되어 시를 읽는다.”는 글을 썼기 때문이다.

 

이 글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저자가 시인이 되려 했으니 어느 만큼의 시를 썼음에 틀림 없는 일이라는 점이다. 특기할 것은 이 글에 이어지는 다음의 글이다.

 

“시인의 마음이 되려고 애쓰기 때문일까. 시인이 부리는 시어 하나하나에 마음이 쓰이고 비유 하나를 만들기 위한 시인의 고통이 상상되곤 한다.”

시인이 되려던 마음을 접고 그는 이제 시인의 마음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시인으로 사는 것과 시인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확신할 수 없지만 시인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의 평론에는 남다른 언어 감각이 있지 않겠는가?

 

다시 정끝별 평론가의 글을 인용하자면 김진희 평론가는 “대학원에 진학한 후에도 여전히 시 쓰는 걸 놓지 않는 눈치였지만” “더 이상 시 작품을 발표하거나 보여주지는 않았다.” 이 부분에서 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평론만을 하는 사람(김진희)과 시 쓰고 평론도 하는 사람(정끝별)의 차이를 가려내는 것일까?

그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시급한 일도 아니리라. 혹 많은 시 읽기, 시 평론 읽기가 갖추어진 후라면 밝혀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또한 의도해서 써낼 수 있는 것이기보다 저절로 마음에 차오르면 말할 수 있는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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