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피상적으로만 이해하고 받아들여 오던 한글 궁서체의 비밀에 대해 들은 것은 며칠 전이다. 갈물한글서회 회원들의 연구 결과를 참고해 유지원 교수께서 정리한 글을 통해 얻게 된 통찰이다.

세계 문화사에서 여성 전문 인력들이 남성을 주도한 사례의 대표가 15세기 궁궐에서 탄생한 한글의 글꼴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궁녀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풀이하면 궁녀들의 한글 글씨체는 곱고 여성적이었고 인내심있는 훈련으로 표준화라할 수 있는 전범을 마련하기에 이른 데다가 여타 한글 글씨체들과는 확연하게 차이나는 품위를 지녔기에 사대부들조차 한글로 글씨를 쓸 일이 생기면 그들의 글씨체를 따라 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단아한 옛 글씨체라 짐작되는 서체를 만들어 궁서체라 이름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궁서체에는 옛 궁녀들의 역사가 깃든 것이었다.

긍정적 의미에서 매우 충격적인 사례임에 분명한데 그렇게 여성 전문 인력들의 남성 주도란 말을 들으니 조선 후기 영정조 시대의 임윤지당(任允摯堂: 1721 – 1792)과 강정일당(姜靜一堂: 1772 – 1832) 등 여성 성리학자들을 다룬 ‘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에서 접한 특별한 해석 하나가 떠오른다.

지금까지 주역의 여성 괘로 읽혀오면서 부정적으로 평가되어 오던 곤(坤) 괘가 실은 건도(乾道)의 생명의 창생에 비해서 만물의 형성과 성장을 주관하는 도로서 이로부터 비로소 몸으로 하늘의 도를 이루려는 유교 종교성이 완수된다는 것이다.(‘동방사상과 인문정신’ 수록 이선경 글 ‘易의 坤卦와 유교적 삶의 완성: 곤괘에 깃든 유교의 종교성과 인문정신을 중심으로’ 참고)

주역에 관심이 있으나 깊이나 구체성에서 부족하기만 한 내 생각에 길을 마련해줄 주장이 아닐 수 없고 흥미 있고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 하기에 족하다 싶다. 인간은 결국 몸으로 도를 이루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을 덧붙일 수 있을 뿐이다.

사고가 여성형인지 남성형인지를 가리는 테스트에서 몇 가지의 문항을 거친 뒤 내게 할당된 결과를 확인했는데 놀랍게도100 퍼센트 여성형이었다.

약간의 과장이 있겠지만 전기한 한글 궁서체 사례와 곤 괘와 건도 사이의 새로운 해석 사례를 축하하는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이럴 때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끈다는 ‘파우스트‘의 구절을 인용해야 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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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기 작가의 ‘라하트 하헤렙‘은 내가 글에 몇 차례 인용한 바 있는 장편 소설이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 동산에서 창조주인 구약의 신에 의해 먹을 수 없도록 설정된 열매인 선악과를 먹고 선과 악의 실체에 대해 알게 되자 신이 아담과 이브가 생명나무를 먹고 영생하지 못하도록 에덴 동산에서 그들을 쫓아내고 그 주위에 칼 모양의 불을 설치하는데 그것을 라하트 하헤렙이라 한다.
나는 가끔 30여년 전의 군대를 무대로 한 이 소설을 보며 요즘 군대와 사뭇 다르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기억이 정확한지 모르지만 작가는 군 복무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 소설을 며칠만에 써 투고해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작가는 군대에서는 여러 종류의 불을 만나며 군대 복무는 젊은 날의 통과의례라는 말을 했다.)

나도 작가 정도는 아니지만 벼락치기 글을 써야 할 상황에 처했다. 마감일까지 6일이 남았는데 48, 000자 정도를 써야 하니 하루에 무려 8,000자 정도씩 엿새를 써야 한다.

일과(officium?) 후 써야 하니 상당히 정신 없는 일정이 될 것이다. 그래도 혼비백산(魂飛魄散) 할 정도는 아니리라.

몹시 놀라거나 혼이 나서 혼백이 사방으로 흩어짐을 뜻하는 이 말을 보며 혼백의 그런 좌충우돌이 아닌 자연스런 귀근(歸根) 같은 것은 무엇이라 할까 생각해 보게 된다.

낙엽이 자신의 뿌리로 돌아가는 것을 뜻하는 귀근은 결국 죽음을 뜻한다. 갑작스런 죽음이 아닌 자연사(自然死)를 말한다.

이럴 때 신혼체백(神魂體魄)이란 말을 쓴다.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혼은 양(陽) 즉 가벼운 것이어서 위로 향하고 백은 음(陰) 즉 무거운 것이어서 아래로 향한다고 말한다.

토마스 만의 장편 소설인 ‘마(魔)의 산(山)‘의 주인공 한스 카스트로프가 그랬듯 힘들고 고통스런 일정 가운데 묘한 매력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을까?

어쩌면 그런 느낌은 과제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 과정을 돌아볼 때 가질 수 있는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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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 선생의 따님인 윤정(Djong Yun) 여사가 보컬로 참여했던 1970년대 독일 전위(前衛) 록 그룹 Popol Vuh의 호지안나 만트라(Hosianna Mantra)를 호지안나 만투라라 소개한 한 페북 유저의 글을 읽고 가볍게 웃었다.

그 페북 유저는 오래 전 우리나라에 프로그레시브 록을 소개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성시완씨가 음악 방송 진행을 하며 ˝여성 보컬리스트가 특이하게 한국인입니다˝라고 소개했다는 기억을 전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그는 이 여성이 윤이상의 딸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당시는 몰랐을 것”이란 말을 했다.

성시완 씨가 한 청취자로부터 이탈리아 그룹 라떼 에 미엘레(Latte e Miele)란 이름이 성경이 말하는 ‘젖과 꿀’에서 온 것이란 사실을 전해듣고 아, 그렇군요... 하는 반응을 보였던 것이 생각난다.
90년대 초 성시완 씨가 운영하는 서울 마포의 리치몬드 제과점 인근의 마이도스(Mythos)라는 음반(CD) 가게를 자주 갔었다.

지금 이 분은 경인방송 에프엠에서 ‘사이언스 라디오’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과학자들을 초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순서가 있는데 이정우 교수(철학자)의 순서도 있었다.(영화 매트릭스 해설인데 반드시 다시 듣기로 들어야겠다.)

서론이 길었는데 내가 실수라고도 할 수 없는 다른 표기를 보고 가볍게 웃은 것은 만투라란 단어가 나투다란 단어를 생각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나투다란 말은 부처의 현현(顯現)을 의미한다. 현현이란 윤회(輪廻)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작은 단서로부터 관련 이야기들을 이끌어내고 다른 이야기들로 맥을 이어가는 것이 내게는 영감이 찾아드는 것 즉 나투는 것으로 이해된다.

생각은 현현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윤회하거나 공전(空轉)할 수도 있다. 현현과 윤회 또는 공전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가느냐 아니냐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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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해밀턴의 원어 이름을 Alive Hamilton이라고 치고 말았다. 자판의 c 옆에 v가 있는 탓이고 내 손이 정교하지 못한 탓이다. 그런데 alive는 ‘살아 있는’, ‘생기가 넘치는’ 등을 뜻하기에 나쁘지 않다.

아니 그럴 뿐 아니라 ‘이 세상의‘라는 뜻도 가지고 있어 무언가 영감을 주는 단어라는 생각마저 든다.
납의 유해성과 수은의 직업병 관련 사실 등을 밝혀낸 해밀턴은 한 세기(1869 – 1970)를 살다 간, 직업병 연구와 산업 독성학 분야의 선구자이다.
매카시즘과 베트남전을 반대해 90 세가 넘은 나이에 정보 당국의 감시를 받은 분으로 연구 활동만이 아니라 사회 활동도 적극적으로 했다.

여학생이 없었던 시대의 하버드대에서 최초로 여성 교수가 된 분으로 여성 형제들이 결혼을 하지 않고 친하게 지낸 것으로도 화제를 낳은 분이다.

그가 활약했던 시대는 이상한 시대였다. 문득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생각난다.

하지만 이 경우 이상하다는 말은 원어로는 wonder이니 당시는 물론 지금의 기이하고 불합리하고 폭력적이고 충동적인 시대를 나타내는 말로는 부적절하다.

미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 앨런 그린스펀이 미국 주식시장의 거품을 우려하며 쓴 비이성적 과열(過熱: irrational exuberance)이라는 흘러간 말에서 힌트를 얻어 ‘비이성적인‘이라는 형용사를 써야 할까?

지금의 시대를 과열의 시대로만 볼 수는 없다. 어떤 분야에 대해서는 냉정하거나 무관심하기까지 하니 말이다.

어쩔 수 없지만 사람들은 정치에 과한 열정과 관심을 보이지만 문화 예컨대 비평 같은 것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비평의 대중성을 거의 기대하기 힘든 시대이다.(2017년 8월 5일 오길영 교수 페북 글 참고)

오 교수님은 비평이 사라지면 비평의 대상인 문학도, 영화도, 예술도 사라질 것이란 점에서 비평은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

지금은 거대한 물결 같은 것에 휩쓸려 비평을 포함해 소중한 것들을 아깝게 흘려보내는 현실이 상실감을 주는 시대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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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독실(篤實)한 신앙인으로 알려진 한 기독교 신자 부부가 갑질의 주체로 떠오른 것은 씁쓸한 일이다. 과연 새벽 교회에서 무슨 기도를 했을까 궁금하게 하는 그 부부에 대해 내가 할 것은 규탄(糾彈)이 아니다.

언론은 독실이라는 말을 신앙 행위만 보고 쓰지 말거나 독실을 도타울 독(篤)과 방자할 실(肆; 이 글자는 방자할 사이기도 하다.)을 써서 독실(篤肆)이라고 하든지 해야 할 것이다.

언론에 문제가 있다. 그런 새 갑질 인생들이 등장하면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는 말을 할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알려졌지만 이제는 아닌 기독교 신자라고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런 갑질을 한 사람에게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기독교에도 좋은 일이 아니다.

교회 열심히 출석하고 헌금 잘 내고 미소 지으며 적당히 교양 있는 척하는 사람에게는 갑질을 해도 독실한 신자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교회를 욕보이는 일이 된다.

예수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언론에서 그런 식으로 독실이란 말을 무분별하게 써왔기에 냉소를 부르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인들이 냉소의 대상이 되거나 욕을 듣는 것은 언론의 책임이기 이전에 기독교인들이 보인 행태 자체로 인해서이다.

신앙 양심과 일상에서의 양심이 일치하지 않거나 상충하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 아니다. 그런 기독교인들을 독실한 신앙인이라 부르는 언론은 문제 있는 언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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