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와 칼‘의 저자 루스 베네딕트는 앤 싱글턴(Anne Singleton)이라는 필명을 썼다.

역사 및 젠더학 교수인 로이스 배너(Lois Banner; 1939 - )는 싱글턴을 싱글 톤(single tone)으로 읽을 수 있다고 말한다.

베네딕트의 시 가운데 ‘유니콘(일각수)과 일출‘이 있다. 이 시는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희곡 ‘별에서 온 일각수‘에 응답해 지은 작품이다.

이 시는 베네딕트가 장미 십자회원들의 신지학 분파인 황금 여명회(Order of the Golden Dawn)라는 신비주의 교단에 모종의 방식으로 연루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베네딕트는 당대의 다른 여성 시인들과 달리 자신의 시편에서 1인칭 단수를 사용한 적이 없다.

그녀는 남성의 목소리로도 노래하고 여성의 목소리로도 노래했다. 유니콘은 신비주의 전통에서 성별 횡단과 남녀 양성의 영혼을 상징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둘이 조화를 이루며 고상하게 협력할 때 존재는 비로소 정상적이고 편안한 상태에 놓인다.

남자라도 여성적 뇌가 틀림없이 영향을 미친다. 여자도 그녀 안의 남자와 관계를 맺는다.˝는 말을 했다.(‘마거릿 미드와 루스 베네딕트‘ 참고)

로이스 배너의 책에서 눈에 띄는 것은 버지니아 울프의 말이다. 남자라도 여성적 뇌가 틀림없이 영혼을 미친다는 말이다.

시인 윤동주를 생각하게 된다. 책에 좀체 밑줄을 치지 않았고 술자리에서조차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사람.

책 속에 마른 꽃이나 단풍잎을 끼워넣었고 시적 긴장을 위해 말을 아꼈고 침착한 어조와 내용으로 웅변대회에서 1등을 한 사람.

가필, 정정의 흔적을 찾기 어려운 시/ 몇 달, 몇 주를 두고 머릿 속에 간직해 두며 갈고 다듬은 완전한 시를 쓴 사람.

축구 선수로도 뛰었고 재봉틀도 잘 한 사람. 유순하고 다정했으면서 지조와 의지는 굳고 강했던 사람.

스스로 설정한 절대적 양심과 실제적 자아 사이에 존재하는 현격한 괴리를 괴로워하며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랐던 사람..

이런 윤동주를 단지 양성이 조화롭게 통합된 사람이었다고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는 그 이상의 완전한 인격을 갖춘 사람이었다고 말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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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한참 지난 내 글을 다시 보면 아, 내가 이런 글을 썼나? 싶은 때가 있다.

이런 글이란 소재면에서 최근 내 행보와는 어울리지 않는 글이라는 의미이기도 하고 문장의 연결성, 시선, 유려함 등에서 다시 쓸 수 없을 것 같은 글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동순 시인의 시집인 ‘그 바보들은 더욱 바보가 되어간다‘는 나에게 해당하는 제목인 듯 하다. 진심으로 그렇게 느껴진다.

유명 저자들 역시 자신의 지난 글을 보며 변화를 실감할까? 한다 해도 그들은 소재면에서의 변화나 수준의 차이보다 생각의 변화를 느끼지 않을까 싶다.

유종호 교수는 지난 1995년 나온‘시란 무엇인가‘란 책에서 <가령 시인이 “나를 키운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라고 했을 때 팔할이라는 언뜻 비시적(非詩的)인 말이 이례적인 참신성과 의외성과 박력을 획득하고 있음을 본다>는 말을 했다.

누구나 알 듯 유종호 교수가 말한 시인은 서정주 시인이다. 나는 “나를 키운건 팔할이 바람”이란 문장이 참신하다는 주장에 공감한다.

시적 파격이 돋보이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이나 거의 등의 부사와 달리 정확히 계량한 수치인 팔할이라는 말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제 미당의 시어는 너무 흔하게 인용된다는 생각이 든다. 인용자들은 생소함이나 참신함을 의도하고 그러는지 모르겠으나 너무 많이 인용되다 보니 죽은 비유가 되고 있다.

궁금한 것이 있다. 유종호 교수는 지금도 미당의 저 시어가 참신하고 의외성을 내고 박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할까?

시인 이승하 교수는 지난 2009년 ‘새로운 시와 지루한 시‘란 글에서 ˝신인의 등단작을 갖고 타박하여 미안하지만 우리 시의 앞날이 밝게 느껴지지 않아 고언을 한 것이니 이해해 주시기를˝이란 말을 했다.

나는 지금 이승하 교수는 우리 시의 면모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하다.

애프터 서비스를 하듯 자신의 과거 글들을 들춰 생각의 변화를 진술하는 것도 의미 있으리라 생각한다. 무리한 기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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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의 연인
김현경 지음 / 책읽는오두막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김수영의 연인'에서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사실 하나. 김현경 여사(1927 - )가 이화여대 영문과 시절 정지용 교수로부터 시경(詩經)을 배웠다는 사실이다. "나는 아직 당신과 동거중입니다"란 말을 하는 김수영 시인의 첫 독자, 아내, 한 여인이었던 김현경 여사의 에세이 '김수영의 연인'은 이렇게 책 날개서부터 관심을 놓지 못하게 한다.

 

정지용 시인은 영어, 라틴어, 한문, 고전 등에 능통한 르네상스 지식인이었다. 김순남, 김현경의 5촌 오빠이자 성우 김세원의 아버지인 이 분은 쇼스타코비치로부터 천재라는 칭호를 받은 작곡가이다. 스승인 하차투리안이 오히려 김순남에게서 새로운 음악을 배웠을 정도이다.

 

김순남의 집에는 임화, 오장환, 김남천, 안회남, 함세덕 등의 카프(KAPF) 시인들이 자주 모였다. 진명여고 2년 여름 김수영 시인을 처음 만난 김현경 여사는 그를 아저씨라 불렀다. 이종구란 이름도 책을 통해 만날 수 있다. 김수영 시인의 선린상고 2년 선배이자 일본 유학 내내 함께 기거한 막역지우이다.

 

이종구가 김수영 시인과 김현경 여사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 당시 김현경 여사는 배인철을 만나고 있었다. 임화의 집에서 알게 된 배인철은 흑인시라는 장르를 개척한 영문학자였다. 남로당 주요 멤버였던 배인철은 김현경 여사와 데이트 중 괴한의 총에 맞고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으로 김현경 여사는 연애 금지 학칙을 어긴 죄로 이화여대에서 제적을 당했다.

 

모두 꺼렸지만 김수영 시인은 가택 연금 중인 김현경 여사를 찾아왔다. 김수영 시인은 알지 못하는 것은 분명하게 모른다고 말을 한 사람이었다. 김수영 시인은 My soul is dark란 말로 프로포즈를 했다. 김현경 여사는 문학은 모든 각질화된 제도에 저항하는 양식이 아니던가란 말을 한다.

 

"우리는 스스로 결정한 운명이 형식이 되고 제도가 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32 페이지) 1950825일 서울에 남아 있던 김수영 시인은 인민군에 징집되었다. 시인은 그 체험을 일체 말하지 않았다. 김현경 여사에게 두어 번 말했을 뿐이다. 시인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소련군을 만났다가 미군을 만나 서울로 돌아왔지만 지서로 끌려가 악몽 같은 고문을 당했다. 이후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가게 되었다.

 

시인은 결국 살아 돌아왔다.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 시인의 허락을 얻어 고교 영어 교사를 하던 이종구에게 취직 자리를 부탁하러 갔다. 그곳에서 일년이 훌쩍 지났다. 이종구는 광적으로 집착했다. 세 사람, 아니 김현경 여사가 김수영 시인과 이종구 사이에서 한 처신은 애매했다. 더 이상은 내가 논할 바가 아니다.

 

김수영 시인은 '방안에서 익어가는 설움'이란 시에서 "설움을 역류하는 야릇한 것만을 구태여 찾아서 헤매는 것은/ 우둔한 일인줄 알면서/ 그것이 나의 생활이며 생명이며 정신이며 시대이며 밑바닥이라/ 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마지막 설움마저 보낸 뒤/ 빈 방안에 나는 홀로이 머물러앉아/ 어떠한 내용의 책을 열어보려 하는가"란 말을 했다.

 

김수영 시인은 생계를 위해 김현경 여사에게 외설 소설을 쓰게도 했다. 그렇게 받게 된 원고료를 김수영 시인은 괴롭고 부끄러운 마음에 모두 술을 마시는 데 쓰고 말았다. 김수영 시인은 매문(賣文)이란 말도 했다. 속물이란 말도 했다. 진짜 속물이 되는 것은 속물이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것 만큼이나 어렵다고도 했다. 진짜 속물이란 어엿한 글쟁이를 것을 말하는 듯 하다.

 

김현경 여사는 '도취의 피안'을 김수영 시인의 시 중 제일로 꼽는다. 서정의 가락이 유창하게 늘어서 있는 문장들이 특히 좋은데 명확한 의미가 선뜻 다가오지 않아 직접 물으니 김수영 시인은 사회주의에 대한 노스탤지어라고 말했다.(73 페이지) 김현경 여사는 황무지 같았던 서강 언덕에 삶의 자리를 잡았을 무렵 "농사라고 할 것은 없지만 500평의 채소밭을 가꾸"었다고 한다.

 

"그는 농부요 나는 알뜰한 농부의 아내를 자처했다. 그는 또한 매일 같이 읽고 쓰고 또 읽고 쓰고 했다. 농부와 시인이 하나였던 시절이었다."(77 페이지)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 시인이 삶의 여유를 반기면서도 끊임 없이 경계하는 의식을 드러냈다고 말한다.(132 페이지) '풀은 김수영 시인이 작고하던 해 529일 쓴, 김수영 시인의 마지막 작품이다. 김현경 여사는 '' 역시 수식 없이 수영의 온몸에서 울려 나온 듯한 소리로 꽉 차 있다고 말한다.

 

김수영 시인은 새로운 시를 쓰느라 꼭 몸부림 같은 진통을 겪었다.(135 페이지) 김수영 시인은 개인으로서 시인의 행복이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여기고 안일(安逸)과 무위(無爲)를 극도로 거부했다. 오직 존재의 참되고 아름다운 정신의 지표를 바랐다. 김수영 시인은 작고(作故) 무렵 단호한 자신감을 가지고 시와 에세이에 자기만의 시론을 멋지게 정리하려고 마음 먹고 있었다.(143 페이지)

 

김수영 시인은 예술가는 끝까지 고독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 시인과 자신의 자랑이라면 가끔 대화로 밤을 지새울 수 있는 열정을 잃지 않고 살아온 것이라 말한다.(145 페이지)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 시인의 죽음을 "48년 생애를 마치고 조각처럼 희고 단정한 얼굴로 무()의 세계로 들어간 것이라 표현한다.(149 페이지)

 

김수영 시인이 운명(殞命)의 날 마지막으로 집을 나선 것은 번역 원고료를 받기 위해서였다. 김수영 시인은 술이라도 한잔 한 날이면 "부끄러움도 없이"(김현경 여사의 표현) "시를 쓰는 일은 바로 인류를 위한 일이야. 나는 인류를 위해 시를 쓴다"는 말을 했다.(152 페이지)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 시인과 함께 박인환 시인의 서점 '마리서사'에 드나들었던 시절을 이야기한다. 한 일본인 시인의 시를 박인환 시인이 일본어로 낭송했는데 음독이 너무 틀려 그 후로 그를 철저하게 무시했다고 말한다. 김수영 시인은 초현실주의 예술이나 전위예술에 무서운 비평을 가했고 거기에 취해 있는 시인들을 뒤떨어진 시인이라며 경멸했다.

 

김수영 시인은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뒤 무척 당황했다고 한다. 갑자기 자유의 몸이 되어 길 한복판에 서서 어디로 갈 것인가 하고 한참이나 망설였다고 한다.(166 페이지) 그것은 어머니한테 먼저 가야 하나, 아내와 아들한테 먼저 가야 하나의 문제였다. 김수영 시인이 택한 곳은 아내와 아들이 있는 곳이었다.

 

김수영 시인은 포로수용소에서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매순간 다짐했다. 김수영 시인은 포로수용소의 답답한 시간을 이를 흔들어 빼는 것으로 달랬다. 김수영 시인에게 그 고통은 살아 있음의 징표였다. 김수영 시인은 소리에 극히 민감했다. 특히 글을 쓸 때 그랬다. 그래서 소음이 없는 곳을 찾다 보니 황무지 같은 서강(西江) 언덕에 자리하게 되었고 호구지책으로 양계를 했다.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 시인이 늘 그늘과 비애를 삼킨 위대한 서정을 깔고 시를 썼다고 표현한다. 김수영 시인은 일 년에 평균 10편에서 13편 정도 시를 썼다. 김현경 여사가 한 일은 초고(草稿) 정서(淨書)였다. 김수영 시인은 비위에 거슬린 술을 마신 날 김현경 여사에게 심한 주사를 부려 여사로 하여금 이혼을 생각하고 별거를 하게 만들기도 했다.

 

안일과 무위를 싫어한 김수영 시인은 무위도식하는 사람의 술은 마시지 않은 염결(廉潔)성을 보였다. 김수영 시인은 집에서는 절대 술을 마시지 않았다. 집과 서재를 엄숙한 일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수영 시인은 앞서 가는 시 정신을 갖기 위해 철학서는 물론 새로운 문학 책을 숙독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 시인이 문명과 서울과 인간정신과 인류의 온갖 오염을 시와 행동으로 구체적으로 밀어붙이고 살다 간, 끈질긴 의지의 시인이었다고 말한다. 김수영 시인은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삶을 자발적 또는 적극적 감금생활로 정의했다. 김수영 시인은 사람은 죽을 곳을 알아야 한다는 말을 시에 적용해 시인은 자기만의 스타일을 가지고 죽어야 한다는 말로 정리했다.

 

김수영 시인은 고독이나 절망이 용납되지 않는 생활도 그것이 자신의 현실이라면 조용히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순수하고 남자다운 일이라 생각했다. 김수영 시인은 시는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나가는 것이라 말했다. 김수영 시인은 시는 문화와 민족과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지만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한다는 말을 했다.

 

김수영 시인은 그것을 형식이 내용이 되고 내용이 형식이 되는 것이라 표현했다. 김수영 시인은 새로움은 자유고 자유는 새로움이란 말도 했다. 김수영 시인은 시인의 스승은 현실이고 시인에게는 현실에 정직할 수 있는 과단과 결의가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

 

김수영 시인은 진정한 시의 테두리 속에서 살아 있는 낱말들이 진정 아름다운 우리 말이라는 말을 했다. 김현경 여사는 시를 쓰고 책을 읽으면서 번역도 쉴 사이 없이 부지런히 한 수영의 정진하는 자세를 정말 좋아했다고 말한다.

 

김수영 시인은 잔병치레를 많이 했다. 그 중 하나가 기관지염이다. 김현경 여사는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을 읽으면 수영의 기침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는 말을 한다. 김수영 시인은 술에 취하면 애교가 대단해질 때도 있었지만 울분과 불만의 분화구로 변할 때도 있었다. 울분과 불만 이후에 새로운 시들이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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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최근 들은 시 강의 중 가장 알차고 흥미롭고 자유로운 강의가 어제 용산도서관에서 열린 이혜미 시인의 강의였다고 자신한다.

우리는 연말연시를 운(韻)으로 하는 4행시 짓기 과제를 수행했고, 스티커에 질문을 써서 내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강의는 자연스럽게 토크쇼처럼 진행되었다.

시인은 4행시를 가장 잘 지은 한 사람과 좋은 질문을 한 두 사람에게 사인을 하고 직인까지 찍은 자신의 시집(‘뜻 밖의 바닐라‘와 ‘보라의 바깥‘)을 선물로 주었다.

나는 좋은 질문을 한 사람 가운데 하나로 뽑혀 ‘보라의 바깥‘을 선물로 받았다. 나는 시집을 받으며 두 시집 모두 있지만 사인을 하고 직인을 찍은 시집을 받게 되어 더 좋다고 말했다.

시인은 4행시 수상자에게 ‘뜻 밖의 바닐라‘를 읽게 한 뒤 창작 배경을 설명했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에게는 ‘넝쿨 꿈을 꾸던 여름‘과 ‘바난(Banan)‘을 읽게 한 뒤 역시 배경 설명을 했다.

‘넝쿨 꿈을 꾸던 여름‘은 ˝꽃은 물이 색을 빌려 꾸는 꿈˝이란 표현이 마음에 드는 시이다.

내가 한 질문은 운동이든 산책이든 춤이든 명상이든 그런 것들이 생각이나 문체에 영향을 미치는지였다.

시인은 애인을 따라 스킨스쿠버를 한 경험을 이야기하며 그런 것들이 시의 좋은 소재가 된다는 말을 했다.

명상은 아직 해보지 않았다는 말을 했다. 나는 운동이나 산책을 하면 리드미컬한 시가 쓰일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시인은 내 질문이 뜻 밖의 질문이라 말했다. ‘뜻 밖의 바닐라‘를 응용해 한 말이 아닐까 싶다. 시인은 좋은 시를 쓰기 위한 10가지 방법에 대해 말했다.

이 가운데 ‘감정에게 언제나 예의를 차린다‘, ‘다 썼다고 느낀 순간 바로 그 순간부터 다시 시작할 것‘이 인상적으로 느껴진다.

시인은 시를 쓸 때 고칠 부분이 있으면 전체를 다시 쓴다고 한다.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를 필사하느라 손가락에 이상이 생길 정도였다는 시인이 우리에게 일깨우는 것은 성취는 저절로 또는 쉽게 얻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랜만에 참 밝고 유쾌한 강의를 듣게 되어 기분이 좋다. 당분간 그의 시를 읽고 해석하느라 애쓰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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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김이듬 시인의 책방이듬(일산 동구 평화로)에서 진행된 문보영 시인(2017년 김수영 문학상 수상) 초청 강연에서 나는 춤이 생각이나 문체에 영향을 미치는지, 미친다면 그런 점은 어떻게 드러나는지 등을 물었다.

하루 종일 시를 생각한다는 26세의 그녀는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답을 했다. 다만 춤을 출 때는 시 생각에서 놓여날 수 있고 슬픔 같은 감정도 아무렇지 않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춤은 효과면에서 명상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시인은 시와 무관한 취미를 갖기를 주문했다.)

시란 논리적 설명을 거부하려는 경향이 있고 그런 점에서 설명을 하는데 앨러지를 느끼는 사람에게 시는 쉽게 느껴질 수 있다는 말이 인상적으로 느껴졌다.

논리로, 인과관계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사람에게 시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내가 그런 경우가 아닌가 싶다.)

얼마 전 자살한 샤이니의 종현이 담당 정신과 의사로부터 ˝왜 힘든지를 찾아보라˝는 말을 들은 사실을 인용하며 시인은 그가 그 말 앞에서 설명의 부담을 느꼈을 것이라 말했다.

공감한다. 다만 나는 그 의사에게 그러면 의사는 무엇 때문에 있는가, 란 말을 하고 싶다. 출구를 찾으러 간 사람에게 힘든 이유를 찾아보라는 말을 하다니..

시인은 지난 2년간 일기에 죽고 싶다는 말을 200번도 더 썼다고 한다. 그녀가 시로써 치유를 이루기를, 그래서 그 비결을 오래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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