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 휴지(休止) 없이 곧바로 다음 악장으로 연결되는 곡들이 있다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2악장에서 3악장으로 넘어가는 부분이 그렇고, 슈만 첼로 협주곡 가운데 2악장에서 3악장으로 넘어가는 부분이 그렇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서우석 교수의 음악과 현상에 나오는 다음의 글 때문이다.

 

비발디의 사계는 처음부터 고양(高揚)된 감정에서 출발해 버린다. 그런가 하면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6번 교향곡)’의 시작은 우리가 이미 선율의 중간에 들어가 있는 느낌을 준다...베토벤의 합창 교향곡(9번 교향곡)’은 시작이라고 할 수도 없고 서주(序奏)라고도 할 수 없는 느낌으로 시작된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은 천천히 그리고 장중하게 그 시작을 오랫 동안 알린다...”(164 페이지)

 

이 논의에 맞춰 휴지 없이 다음 악장으로 이어지는 곡들에 대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이런 곡들은 기다림 또는 쉼의 기쁨을 주지 않는 대신 긴박(緊迫)한 일정을 수행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런 정도(定度)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의 경우보다 슈만 첼로 협주곡이 더하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은 2악장에서 3악장으로 넘어갈 때 약간의 늦춤이 있지만 슈만 첼로 협주곡은 그렇지 않다.

 

이런(중간 휴지 없이 바로 다음 악장으로 연결되는) 곡들 가운데 베토벤 현악 4중주 73악장에서 4악장으로 넘어가는 부분을 빼놓을 수 없다어떻든 나는 멈추지 않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라는 스스로 다짐하고 싶을 때 이런 곡들을 듣는다.

 

슈만의 다섯 개의 민요 소품이 어떤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늘은 오랜 만에 슈만 만찬의 시간을 가져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조선왕실의 왕릉조성 조선왕실의 의례와 문화 3
신병주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천릉(遷陵)이 빈번했다. 풍수상의 이유를 표방했지만 정치적 상황이 더 큰 원인이었다. 왕실의 광(; 뫼 구덩이)의 깊이는 10(3미터), 일반 사대부의 경우는 5 - 6(1.5 1.8미터)이다.

 

태조의 능(건원릉)은 개성의 신의왕후나 정릉의 신덕왕후의 무덤 곁에 조성되지 못했다. 개성은 새 왕조 조선의 첫 왕이 묻힐 곳으로는 부적합했고 신덕왕후 옆에 능이 조성되는 것은 태종에 의해 거부되었다. 건원릉이 구리에 조성된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태조의 무덤에는 석실(石室)이 만들어졌다. 현실(玄室; 주검이 안치된 무덤 속 방)을 석실로 할지 회격묘(灰隔墓)로 할지는 동전 던지기로 정했다. 태종이 세자를 종묘에 보내 동전을 던지게 했다. 세조는 석실이 아닌 회격묘로 왕릉을 조성할 것을 유언했다.

 

신의왕후는 처음 절비(節妃)라는 시호를 가졌었다. 후에 신의왕후로 호칭이 변경된 것이다. 조선 초기 왕릉을 특징짓는 기념비적 조형물은 신도비였다. 조선 초기 왕릉에는 고려 말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능인 현, 정릉에 정릉사를 세운 전례에 따라 능침사찰을 조성했다.

 

태종은 유교 국가로서 기틀을 잡아가야 하는 과정에서 능침에 사찰을 두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 인식했다. 신의왕후의 제릉(齊陵: 개성 판문군 지동)은 여말, 선초 왕릉의 양식으로서 건원릉을 조성할 때 선례가 되었으며 현존 조선 왕릉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오늘날 조선 왕릉의 전범을 확립하는 데 획기적인 왕릉으로 평가받고 있다.

 

능침사찰을 원찰(願刹)이라 한다. 세종은 워낙 효심이 깊은 왕으로 자신이 죽으면 부모 능 가까이 묻어줄 것을 누누이 강조했다. 그래서 아버지 태종의 헌릉(獻陵: 서초구 내곡동) 서쪽에 능 자리를 정해 놓았다. 수릉(壽陵)을 설정한 것이다. 수릉은 임금이 죽기 전 미리 만들어 두는 무덤을 말한다.

 

세종 당대에도 세종의 무덤에 대한 논란이 분분했다. 길지(吉地)가 아니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급기야 물길이 흘러나오는 등 풍수지리적으로 터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예종 때 여주로 옮겼다. 살아 있는 사람의 상하 질서는 좌상우하이고 사자(死者)의 경우 우상좌하이다.(좌우는 당사자가 기준이고, 동서는 보는 사람이 기준이다.)

 

문종의 능인 현릉(顯陵)에 자리한 문인석과 무인석은 모두 미소를 띄고 있다. 아랫사람에게 온화하게 대했다는 문종 시대의 정치 분위기를 반영한 듯 하다. 현릉부터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다는 점도 중요하다. 왕의 치적은 국사(國史)에 실리기에 굳이 사대부처럼 신도비를 세울 필요가 없다는 논리에 따라서이다.

 

세종의 영릉(英陵)을 여주를 옮긴 후에도 비를 세우지 않았다. 신도비(神道碑)는 사자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을 말한다. 단종의 장릉(莊陵)은 한양의 궁궐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능이다. 우상좌하의 원칙을 어기고 남편의 오른쪽에 조성된 능이 소혜왕후 한씨(성종의 모후, 연산군의 할머니)의 능인 경릉(敬陵)이다.

 

소혜왕후의 정치적 비중이 컸음을 반영한다. 큰 영향력을 행사한 왕후로 문정왕후(중종의 두번째 비)를 빼놓을 수 없다. 문정왕후는 중종 옆에 묻히길 원했다. 그래서 장경왕후(중종의 첫째 비)의 능 옆에 있었던 정릉(靖陵)은 풍수지리적으로 좋지 않으니 성종의 선릉(宣陵) 옆으로 가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자신이 심혈을 기울인 봉은사가 왕릉의 원찰로 기능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작용했다. 그러나 새로 옮긴 중종의 정릉은 지대가 낮아 홍수 피해가 자주 일어나 문정왕후는 결국 그 자리에 묻히지 못했다. 문정왕후의 능은 서울시 공릉동의 태릉(泰陵)이다.

 

중종의 능은 원래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의 희릉(禧陵)이었다. 중종은 먼저 승하한 첫번째 비인 장경왕후의 희릉 옆에 묻혔다. 중종의 능은 처음 희릉으로 불렸으나 대왕이 후비(后妃)의 능호를 그대로 따르는 것은 문제라 하여 정릉으로 명칭 변경했다.

 

문제는 정릉은 풍수지리적으로 좋지 않다는 문정왕후의 의견을 따라 옮겼는데 그 옆의 희릉은 그대로 두었다는 점이다.(희릉과 정릉은 같은 영역에 있었다. 중종의 능을 정릉이라 이름하기 전에 희릉이라 했던 것은 두 능이 같은 영역에 있었음을 뜻한다.)

 

조선 왕릉에서 유일하게 하마비가 있는 능이 세조의 광릉(光陵)이다. 광릉은 금천교가 없는 능이기도 하다. 천릉(遷陵) 또는 천장(遷葬)은 조선 왕릉만이 가졌던 특수한 현상이다. 천릉이란 용어는 조선시대 이전에 없었고 중국에서도 등장하지 않는 용어이다. 조선시대에는 풍수적 길흉과 함께 추숭(追崇), 복위(復位)와 같 정치적 이유로 천릉이 주로 이루어졌다.

 

왕릉을 조성하기 전 반드시 풍수사(風水師) 또는 상지관(相地官)이 대신과 함께 봉심(奉審; 임금의 명을 받들어 능소나 묘우를 보살핌)하여 능지의 길흉을 판단한 것은 왕릉 조성에서 풍수가 중요 요인이었음을 보여준다.(상지; 땅의 모습을 보고 길흉을 판단하는 일)

 

조선시대에 왕릉을 조성한 후에는 의궤(儀軌)를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조선 전기에 제작한 의궤들은 현재 한 건도 남아 있지 않다. 현존 의궤의 최초의 것은 1600년에 제작한 선조의 비 의인왕후의 장례 관련 의궤들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선릉, 정릉과 더불어 태릉(泰陵)과 강릉(康陵: 노원구 소재의 명종과 인순왕후의 능)의 경역도 왜적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었다. 강릉과 태릉의 경우 왜적이 도굴을 시도했지만 회격묘인 내부 구조로 인해 도굴 위협에서 벗어났다.

 

천릉(遷陵)은 이장(移葬), 개장(改葬), 개묘(改墓) 등의 용어와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일반묘의 이동은 천장(遷葬)이나 이장(移葬)이란 용어로 굳어지고 왕실의 능원에 대해서는 천릉(遷陵), 천봉(遷奉), 천원(遷園)이란 용어가 일반화되었다.(197 페이지)

 

조선 후기 왕릉 조성 역사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정조가 거행한 사도 세자의 현륭원(顯隆園)으로의 천장, 익종의 수릉(綏陵)의 천릉 등을 통해 알 수 있듯 천릉 양상이 전대보다 비중이 커졌다는 점이 눈에 띈다.(229 페이지) 사도세자의 묘인 영우원(永祐園)은 양주 배봉산(현 서울시립대 뒷산)에 있었다.

 

조선 후기 왕릉 조성 역사는 대부분 의궤 기록으로 정리되었고 대부분의 의궤가 현존하고 있다. 왕릉 조성에 관한 역사(役事)는 산릉도감(山陵都監)에서 주관하였고 국장도감(國葬都監), 빈전도감(殯殿都監), 혼전도감(魂殿都監)과 긴밀한 업무 협조를 통해 진행했다. 산릉도감은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능침 조성을 관장하였던 임시 관서이다.

 

국장도감은 조선시대 왕이나 왕비의 국장에 관한 모든 것을 담당한 기관이다. 빈전도감은 왕의 옥체를 모신 빈전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을 총괄했다. 혼전도감은 임금이나 왕비의 국상 중 장사를 마치고 종묘(宗廟)에 입향할 때까지 신위를 모시는 곳인 혼전의 일을 담당함 기관이다.

 

조선 역사상 왕이 생부와 생모의 무덤을 함께 조성한 사례는 그리 많지 않았다. 세종이 태종과 원경왕후의 무덤을 조성한 이래 처음으로 숙종이 부모의 무덤을 모두 조성했다.(230 페이지) 왕이 두 왕비의 무덤을 재위 기간에 조성한 사례는 숙종이 유일하다. 숙종은 세자빈의 신분이었던 경종의 정비 단의왕후 심씨가 1718년 승하하자 경기도 양주에 혜릉을 조성하였는데 이는 현재 동구릉 경역이다.(숙종의 재위 기간은 46년이다.)

 

현종비 명성왕후 김씨는 재능이 비상하고 성격이 과격했다. 명성왕후는 정비로서 세자빈, 왕비, 대비의 세 과정을 모두 거친 유일한 왕비이다. 효종대에 세자빈, 현종의 왕비, 아들 숙종이 왕이 된 후 대비가 된 것이다.(235 페이지)

 

현종(顯宗)과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의 숭릉(崇陵: 숙종 부모의 능)은 높은 언덕 위에 조성되었고 현재의 동구릉 능역 중 가장 왼쪽 호젓한 곳에 있다. 쌍릉이며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정자각에 팔작지붕을 했다. 성리학이 절정을 이루며 중국화 바람이 불던 시대에 조성된 능이기에 전래의 맞배지붕 정자각에서 벗어나 중국 양식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237 페이지)

 

숙종은 재위 시절에 어머니와 2명의 왕비를 잃은 데 이어 세자빈까지 잃은 아픔을 겪었다. 경종의 빈 단의왕후(端懿王后) 심씨가 승하한 것이다.(240 페이지) 경종의 계비 선의왕후 어씨의 능에는 유언에 따라 예기시경을 넣었다.(264 페이지)

 

1800628일 정조가 오랜 투병 끝에 창경궁 영춘헌(迎春軒)에서 승하했다. 순조가 73일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했고 정조의 왕릉인 건릉을 조성하였다. 정조의 묘호는 정종(正宗), 전호(殿號)는 효령(孝寧)으로, 능호는 건릉(健陵)으로 정해졌다. 순조는 재위 기간 중 효명세자를 잃는 아픔을 겪었다.

 

세도정치가 정점을 이루던 철종 대에는 왕과 왕후의 능을 조성하고 천릉하는 일에 대한 첨예한 의논은 보이지 않았으며 대체적으로 왕이나 왕을 대신해 수렴청정하던 대왕대비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한 가문이 정권을 장악하여 국정을 독단적으로 운영하던 세도정치의 시대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313 페이지)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고종이 황제로 격상되면서 왕릉 조성에도 변화가 있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왕후가 살해된 후 명성왕후의 능은 왕비의 예에 의거해 조성되었지만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이후 명성왕후가 명성황후로 추존되면서 능에도 황후의 위상에 맞는 의례와 양식이 적용되었다.(320 페이지)

 

1910년 조선이 멸망한 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 조선 왕실에서는 세 차례 왕과 왕비의 장례식이 있었고 왕릉이 조성되었다. 일제 강점에 의해 국가가 없어지고 황실의 격이 낮아졌다. 따라서 국장 대신에 어장(御葬)이라 불렸고 국가가 없어진 관계로 도감(都監)을 설치하지 못하였다. 이왕직 산하에 몇 개의 주감(主監)을 두어 장례를 주관했다.(325 페이지)

 

왕릉은 유교적 의례와 정치 관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풍수지리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사례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왕릉은 추존 문제와도 연관된다. 추존은 왕위의 정통성 및 왕권 강화와도 관련되어 많은 이야기거리를 낳았다. ‘조선왕실의 왕릉조성은 조선 왕실의 왕릉들을 왕을 중심으로 한 시대별로 정리한 체계적인 책이다. 내게는 관련 책들을 찾아 읽을 필요를 느끼게 한 의미 있는 책이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목어와 법고와/ 낮은 해거름 사이/ 뒤돌아보면, 천년을 기어 뻘밭을 통과한/ 진흙게 한 마리/ 대웅보전 민흘림 두리기둥을/ 자욱한 범종 소리로 짚어 오르고 있다.”..김명리 시인의 먼 길의 마지막 부분이다. 흘림은 뿌리, 몸통, 머리 등 기둥 부위의 지름에 변화를 주는 것임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민흘림 기둥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가늘게 마름질한 기법의 기둥이고 배흘림 기둥은 중간 부분을 굵게 하고 위와 아래 부분을 가늘게 마름질한 기법의 기둥이다.

 

두리기둥은 둥근 기둥이다. “벌레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 소리..”란 구절이 있는 조지훈 시인의 봉황수(鳳凰愁)‘란 시가 생각난다.

 

한 블로그에 기둥이 종류별로 분류되어 예시된 것을 보았다. 이 블로그는 배흘림 기둥의 예로 부석사 무량수전 기둥을, 민흘림 기둥의 예로 논산 쌍계사와 경복궁 경회루의 기둥을, 둥근 기둥인 원주(圓柱)와 모난 기둥인 방주(方柱)로 구성된 직립(直立) 기둥(다듬은 기둥)의 예로 경복궁 교태전 기둥을, 원목을 껍질만 벗겨 자연 그대로 세운 기둥인 도랑주의 예로 충남 서산의 개심사(開心寺) 기둥을 들었다.(직립이라는 말이 맞지만 곧게 다듬은 기둥이라는 의미이고 도랑주는 휘어진 모습을 그대로 세웠다는 의미이다.)

 

흘림은 착시(에 의한 불안한 심리)를 교정 또는 보정하는 기법이다. 기차길 같은 평행선은 먼쪽이 좁아 보이고 가까운 쪽이 넓어 보이지만 기둥은 높은 쪽이 굵어 보인다아래보다 위가 굵으면 불안해 보인다. 이를 교정하는 것이 흘림이다. 귀솟음과 안쏠림도 착시 교정을 위한 방편이다.

 

귀솟음은 기둥을 모두 같은 높이로 하면 건물의 양쪽 끝이 낮게 보이는데 이런 착시를 보정하기 위해 네 귀퉁이의 기둥을 약간 높게 하는 것을 말한다안쏠림은 귀기둥을 곧게 세우면 윗 부분이 밖으로 벌어진 듯한 착시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를 보정하기 위해 귀기둥을 안쪽으로 약간 기울어지게 하는 것을 말한다.(착시 현상이 심할 경우에만 주로 한다.)

 

문화재보수 기술자 김종남은 귀솟음의 예로 완주 화암사 극락전과 서산 개심사의 대웅전을 들었다반변 종묘(宗廟) 정전(101 미터)처럼 도리칸이 한없이 늘어나는 목구조에서는 귀솟음 기법을 적용하기에 무리가 있다는 말을 했다.(’한옥 짓는 법‘ 188, 189 페이지)

 

기둥을 알면 한옥 구조의 절반은 안 것이라고 한다우리나라의 기둥에는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놀라운 과학적 원리, 세계의 건축가들이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는 수준 높은 건축 기법이 감추어져 있다.

 

조선의 궁궐 공간 구조와 건축‘(궁궐 지킴이), ’궁궐 건축 양식과 용어’(궁궐 길라잡이) 등의 프로그램에서는 상기(上記)한 것들을 배우는가궁궐이든 일반 가옥이든 공간 구조나 건축 양식을 모르면 해설에서 그 구조물 안에서 살았던 사람들 이야기만 하게 된다.

 

클래식 음악을 이야기하면서 내적 구조를 모르기에 작곡가 개인 이야기만 하는 것처럼궁궐 지킴이나 궁궐 길라잡이의 건축 프로그램에서 무엇을 배우든 별 관심이 없다.

 

그냥 가서 들으면 듣는 것이고 아니면 아닌 것이다.(“수준이 어떻고..“식의 논의는 불편하다. 프로그램의 수준은 결국 강사 즉 전문가의 수준이다. 전문가는 결국 극복의 대상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러기 위해 배울 수 있으면 그들에게 배우면 되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한국의 재발견이 궁궐 지킴이인지 길라잡이인지, 또는 우리문화숨결이 궁궐 지킴이인지 길라잡이인지 적응이 안 된다.(머리가 나쁜 탓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최초의 모더니스트 정지용 - 일본근대문학과의 비교고찰
시나다 히로코 지음 / 역락 / 200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나다 히로코(眞田博子: 인하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최초의 모더니스트 정지용은 정지용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가 만들어놓은 권위 있는 통념에 구애받지 않고 문헌연구와 작품분석을 통해 나름대로 평가를 내리려고 시도한 책이다.(이 책은 인하대학 박사 논문을 수정, 봉환한 것이다.)

 

최초의 모더니스트 정지용이란 표현은 시인이자 평론가인 김기림(金起林: 1908 - ?)이 정지용(鄭芝溶: 1902 - 1950)에 대해 한 최초의 모더니스트라는 정의에서 비롯되었다. 정지용은 일본 교토에 유학한 존재로 도시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윤동주가 도시샤 대학을 선택한 것은 그가 스승으로 삼은 정지용이 다닌 학교였기 때문이다. 정지용은 일본에서 대시인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 1885 1942)의 큰 영향을 받았다. 하쿠슈는 다이쇼 말기에 동시(童詩)라는 말을 썼고 정지용이 최초기에 발표한 작품 중에서 동시 개념에 잘 맞는 게 많다.

 

지용 시 어디선가 하쿠슈 냄새가 풍기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하쿠슈가 애용했던 시어나 이미지가 지용 작품에 산견(散見)되기 때문이다.(51 페이지) 하쿠슈와 정지용 작품에 공통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화자(話者)의 존재가 시 뒤에 숨어 전경(前景)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지용의 향수슬픈 인상화를 봐도 거기서 묘사되는 풍경과 화자와의 사이에 어쩔 수 없는 거리가 있어 마치 화자가 풍경 속으로 들어가지 못해 슬픈 눈으로 멀리에서 바라보기만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56 페이지) 하쿠슈가 일본에서 사상성, 사회비판성을 결여한 시인이라는 평을 받은 것처럼 정지용도 한국에서 비슷한 평을 받았다.(57 페이지)

 

하쿠슈가 형안(炯眼)으로 정지용을 뽑아 추천했듯 정지용은 공평하고 엄격한 전형으로 숨어 있는 신선한 재능을 발굴하려 했다.(58 페이지) 하쿠슈가 그가 편집한 문예 잡지인 근대 풍경의 투고 작품에 지나치게 하쿠슈 냄새가 풍긴다는 비판을 받은 것처럼 정지용은 양주동에 의해 지용의 시풍이 시단을 풍미하는 나머지 많은 신인 시인이 지용의 모방이 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58, 59 페이지)

 

정지용은 자신보다 앞선 한국 근대 시인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61 페이지) 저자는 정지용, 주요한, 김소월 등이 일본어로 시를 쓴 것은 불가피하게 거쳐야 했던 과정이라 말한다. 그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당연한 것처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한국어 구어문체는 개척자들의 외로운 분투 끝에 얻어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63 페이지)

 

저자는 고아는커녕 조혼한 정지용이 일본에서 고아의 꿈이란 시를 쓴 이유를 식민지 청년으로서 문화마저 크게 다른 일본에서 문화적 고아의식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라 말한다.(73 페이지) 정지용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본명을 그대로 쓸 수 있었지만 발음은 일본 식으로 데이 시요라 했다.

 

같은 도시샤 대학이라 해도 태평양 전쟁 말기라는 억압이 가장 혹독한 시기에 유학 간 윤동주의 어렵고 고독한 상황과는 여러 면에서 큰 차이가 난다.(74 페이지) 정지용의 도시샤 대학 유학은 1923년에서 1929년 사이에 있었다.(윤동주의 경우는 1942년에서 1943년까지이다.)

 

정지용은 일제 강점기 조선민예 연구가로 광화문 철거를 공개적으로 반대했던 일본의 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 - 1961의 제자였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윌리엄 블레이크연구자로 유명했다.(저자는 일본에서 블레이크의 선구적 연구자로 알려진 사람은 뜻 밖에도 야나기 무네요시라 말한다.: 116 페이지)

 

야나기 무네요시는 민화(民畵)라는 말을 만든 사람이다. 저자는 정지용을 모더니스트로 본 김기림의 말과 모더니즘은 이마지슴이라는 등식을 삼단논법으로 활용해 정지용 = 이마지스트로 본 이상한 논법이 있게 되었다고 주장한다.(91 페이지)

 

에즈라 파운드가 만든 이마지슴 3원칙을 보자. 1)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사물을 직접 취급할 것, 2) 제시(presentation)에 도움이 안 되는 말은 절대 쓰지 말 것, 3) 리듬에 관해서는 메트로놈에 의거하지 말고(틀에 박힌 운율을 쓰지 말고) 음악의 악구(樂句: phrase) 같은 흐름으로 시를 지을 것 등이다.

 

저자는 향수‘, ’카페 프란스등의 작품을 구체적으로 분석한다. 이 시에는 종려나무, 장명등, 루바쉬카, 보헤미안 넥타이, 페이브먼트, 울금향, 대리석(大理石) 이국종 등의 시어가 등장한다. 이 가운데 울금향은 무엇일까? 울금은 향신료이지만 울금(鬱金)향은 튤립이다. 저자의 야나기 무네요시(유종렬; 柳宗悅; 1889 - 1961) 언급은 정지용이 도시샤 대학 시절 야나기 무네요시의 강의를 들었다는 사실이 증언된 것과도 관련지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저자는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해 일본에서 윌리엄 블레이크의 선구적 연구자는 뜻 밖에도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말을 한다.(116 페이지) 이 말만으로 부족했는지 사나다 히로코는 도시샤대학 영문과의 역사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우리는 너무나 의외로운, 그러나 낯익은 이름에 부딪힌다는 말을 한다.(154 페이지)

 

이는 영문학 전공자가 아닌 야나기 무네요시가 스물 다섯의 나이에 윌리엄 블레이크에 대한 선구적 연구로 큰 화제를 낳았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무네요시의 파격은 뜻 밖이란 말, 너무도 의외롭다는 말로 설명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지용은 "'백록담'을 내놓은 시절이 내가 가장 정신이나 육체로 피폐한 때다.. 친일도 배일도 못한 나는 산수에 숨지 못하고 들에서 호미도 잡지 못하였다."는 말을 했다.(197 페이지) 당시 친일 강요는 조선총독부로부터 뿐 아니라 조선인 문사배(文士輩)들로부터도 있었다.(197 페이지)

 

저자는 조선의 민중예술에 관심이 깊었던 무네요시가 시인 지망생인 정지용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었는지 또 정지용이 야나기 교수를 어떻게 생각했었는지 그것에 관해서는 남겨진 글이 없어서 수수께끼로 남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저자는 20년대 초기시에서 지용이 현실적 사회문제를 직접 묘사하지 않는 작품에 있어서도 사회적 문제를 개인화하고 내면화한 근대인의 고뇌라는 형태로 표현함으로써 현실을 그렸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178 페이지)

 

저자는 우주의 질서를 카톨릭이라는 정연한 체계로 이해한다는 것은 암울한 시대에 시인이 정신적 건강을 유지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며 서양문명의 하나인 카톨릭을 믿는다는 것은 서양에 대한 절망이나 적의를 가질 계기를 없애고 서양제국의 식민지 상태에서 아시아를 해방한다는 대동아전쟁의 허무한 이론에 현혹당해서 친일로 흘러가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했을 것이라 말한다.(179 페이지)

 

해방 후 정지용의 심경은 참으로 참담한 것이었다. 해방 전 '문장'지가 폐간될 때까지는 혹독한 검열 아래에서 그래도 그는 훌륭한 작품을 써서 발표했는데 막상 광복을 맞이하고 나니까 어찌된 일인지 시를 쓸 능력이 다 고갈해 버린 것처럼 도무지 시를 쓰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222 페이지)

 

저자는 정지용의 좌경을 현실을 분석하고 작품에 반영시킴으로써 문학으로 사회현실에 개입하는 의도의 결과로 분석한다.(224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지용의 정치사상은 소박, 온건한 것이었다.(227 페이지)

 

정지용은 시작 활동을 시작했을 당초부터 문학에 사회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다만 그것을 직접 나타내는 것보다 개인적 차원으로 전환시켜서 시적으로 표현하는 게 적당하다고 믿었던 것이다.(229 페이지) 저자는 정지용과 같은 유명인사가 친일행위를 거절한다는 것만 해도 1930년대 후반 이후에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말한다.(230 페이지)

 

정지용에게 뚜렷한 친일 작품이 없었다면 그가 그런 대로 저항했었다고 평가해도 될 것이다.(230 페이지) 여태까지 감각 밖에 없는 시로 간주되어 온 작품도 선입견을 버리고 작품 자체를 보면 어떤 때는 강한 사회성을 읽을 수가 있으며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현실과 고투하는 자아를 찾을 수가 있다.(231 페이지)

 

1920년대 전반에 일본의 근대적 기제 속에 들어간 지용으로서는 새로운 언어를 창출할 필요가 있었다. 낡은 언어로는 근대 도시에 사는 자의 생활감정을 표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스승 하쿠슈에게서 배운 것은 작품상의 기법만이 아니라 시인으로서의 삶 전체 즉 새로운 언어를 개척하는 단독자의 자세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지용에게 외국 문학의 영향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거나 부정적으로 평가할 이유는 아무데도 없다. 그는 근대인의 감정을 구어 한국어에 담을 길을 거의 혼자서 개척했다.(231 페이지)

 

정지용 작품에 이르러서야 처음 한국인은 자기 감정의 구석구석까지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을 얻었다. 민족이라는 것이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은 이미 상식으로 되어 있지만 민족의 개념을 확고히 해서 민족의식을 가지기 위해서는 민족고유의 언어라는 것이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저자는 자기들의 사상이나 감정을 자유롭게 표할 수 있을 만큼 언어가 성숙해지면 사람들은 마치 먼 옛날부터 그런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해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고 말한다.(232 페이지)

 

감각적 표현이라는 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추상적 사고를 할 수 있게 만든다고 생각하면 근대인 또는 도시인의 생활감정이나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를 처음으로 남김없이 표현했을 뿐 아니라 근대인의 심리를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창출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시인 정지용은 한국 문학이 근대로 들어갈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시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235 페이지)

 

정지용은 문학조류의 하나인 협의의 모더니즘을 도입했을 뿐 아니라 문학의 근대화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김기림의 말대로 최초의 모더니스트라 할 수 있다.

 

사나다 히로코의 최초의 모더니스트 정지용은 설득력 높은 책이다. 일본인 연구자의 정지용 분석은 정교한 만큼 신선하다. 야나기하라 야스코란 이름을 윤동주와 관련하여 알게 된 이래 다시 한 사람의 참신하고 신뢰할 만한 연구자를 알게 되어 다행이고 기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나다 히로코는 ‘최초의 모더니스트 정지용(鄭芝溶)‘에서 야나기 무네요시(유종렬; 柳宗悅; 1889 - 1961)를 언급한다.

이는 정지용이 도시샤 대학 시절 야나기 무네요시의 강의를 들었다는 사실이 증언된 것과도 관련지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사나다 히로코는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해 일본에서 윌리엄 블레이크의 선구적 연구자는 뜻 밖에도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말을 한다.(116 페이지)

이 말만으로 부족했는지 사나다 히로코는 도시샤대학 영문과의 역사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우리는 너무나 의외로운, 그러나 낯익은 이름에 부딪힌다는 말을 한다.(154 페이지)

이는 영문학 전공자가 아닌 야나기 무네요시가 스물 다섯의 나이에 윌리엄 블레이크에 대한 선구적 연구로 큰 화제를 낳았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무네요시의 파격은 뜻 밖이란 말, 너무도 의외롭다는 말로 설명해도 지나치지 않다.

잘 알듯 도시샤대학 영문과는 윤동주가 공부한 학과이다. 아니 이렇게 말하면 부족하다.

윤동주는 스승격인 정지용이 공부한 도시샤대학 영문과를 선택했다고 해야 충분할 것이다.

정지용의 도시샤 유학 시기는 1923년에서 1929년 사이고 윤동주의 도시샤 유학 시기는 1942년 즉 조선인 유학생들에게는 너무 엄혹했던 태평양 전쟁 말기였다.

상당한 사회적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질 없는 가정이지만 윤동주가 한 15년 일찍 태어나 무사히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면 어떤 결과가 빚어졌을지 궁금하다.

히로코는 조선의 민중예술에 관심이 깊었던 무네요시가 시인 지망생인 정지용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었는지 또 정지용이 야나기 교수를 어떻게 생각했었는지 그것에 관해서는 남겨진 글이 없어서 수수께끼로 남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윤동주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무네요시가 윤동주의 시를 알았는지도 그렇다.

‘시의 아포리아를 넘어서‘에서 이숭원 교수가 말했듯 ˝시 작품 속에는 시인이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수많은 의미가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기에 야나기 무네요시가 만일 윤동주의 시를 알았다면 어떤 생각으로 시들을 풀어냈을지, 우리가 헤아리지 못하고 윤동주도 의식하지 못한 부분을 야나기 무네요시가 읽어냈을지 궁금하다.(‘시의 아포리아를 넘어서‘에서 다루어진 윤동주 시인의 시는 ‘또다른 고향‘, ‘간(肝)‘, ‘참회록‘ 등 세 편이다.)

* 조선 미술을 비애감을 지닌 아름다움이란 말로 표현했던 사람, 민화(民畫)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 1922년 조선총독부의 광화문 철거 방침에 반대해 일본 잡지 ‘개조‘에 ‘사라지려는 한 조선 건축을 위하여‘란 글을 기고(이향우 지음 ‘궁궐로 떠나는 힐링 여행‘ 62 페이지)한 사람 야나기 무네요시를 뜻 밖의 지점에서 만나는 것은 예기치 못한 재미를 누리는 시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야나기 무네요시의 두 얼굴‘ 읽기는 다음 기회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