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시인, 윤동주 연구
이미옥 지음 / 박문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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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옥(李美玉)디아스포라 시인, 윤동주 연구는 구성주의, 유동(流動) 의식을 가진 디아스포라, 현상학 등 세 단어를 키워드로 하는 책이다. 구성주의란 타자 체험과 관계된 말로 타인의 시점으로 세계를 조망하고 현재를 수렴해가는 것, 자신의 좌표를 설정해 나가고 주체를 구성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유동 의식은 고향 상실이 아닌 고향을 설정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현상학이란 주체의 의식을 흐름을 추적하는 방법론을 의미한다. 그간 윤동주 시인은 기독교 시인, 저항 시인 등으로 알려져 왔고 분석되어 왔다. 저자가 이 책에서 한 작업은 윤동주 시인의 의식의 변모 과정을 추적한 것이다.

 

윤동주는 북간도 시인이다. 북간도는 윤동주의 물리적 고향이라는 의미이다. 그런 그는 북간도 이후 평양, 경성(연희전문), 동경에 이르는 이동 궤적을 보였다. 저자는 윤동주가 저항 시인이라는 연구에 대해 실제 그가 독립운동을 한 기록이 없음을 설명하며 그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있었음을 언급한다.

 

흥미로운 점은 물의 심상에 주목한 연구자들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본격적 작품 분석에 앞서 시대적 상황을 해석에 개입시키면 온당한 해석에 도달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저자는 윤동주 시인을 디아스포라란 키워드로 분석한 시론들도 식민지 문제를 강조하고 있음을 주지시키며 식민지 문제만으로 환원되지 않는 순수한 디아스포라 의식의 측면에 대한 고찰이 부족하다고 전제한다.

 

저자는 디아스포라 문제를 디아스포라 정체성보다는 디아스포라 의식의 문제로 보고 그것을 주요 이론 틀로 세워 전개해 나갔다고 밝힌다. 디아스포라 정체성은 디아스포라 개인의 상황과 환경 등에 따라 다양한 층위로 구분할 수 있는 분절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 디아스포라 의식은 디아스포라 개인이 경험한 사유의 모든 지점을 포괄할 수 있는 수렴적 특성을 갖는다.(17 페이지)

 

저자는 디아스포라 개인과 타자가 한 공간에서 만나 발생할 때 생성되는 의식의 변용을 디아스포라 의식으로 설명한다.(22 페이지) 저자는 디아스포라에게 있어서 타자는 일상화된 개인이 아닌 거대한 구조 체계라 말한다.(23 페이지)

 

저자는 디아스포라는 역사적 산물이지만 의식의 작용은 내재적임을 언급한다. 즉 그것은 디아스포라가 처한 세계와의 상호 작용 속에서 생성, 발전하며 그 자체의 의식 자기의식의 뿌리와 연동하여 작용하는 것이다.(24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디아스포라 의식의 확대는 공간이나 시간, 가치 조망의 확대를 가져온다. 이런 확대는 시적 언어를 통해 확인 가능하다.(26 페이지) 저자는 모국이라는 상상적 질서가 결코 현실에서는 질서화될 수 없음을 식민지라는 극단적 경험을 통해 확인한 윤동주는 자기 소외를 통해 만주에서도 모국 조선에서도 충족되지 못한 자기성을 구축하고자 했다고 설명한다.(27 페이지)

 

윤동주의 디아스포라 의식은 디아스포라 경험에 기초하여 발현되는데 초기에는 외부로부터 방해받지 않는 순수의식을 보여준다면 후기로 갈수록 점차 자기 부정의 균열과 모순을 드러냈다.(28 페이지) 저자는 윤동주의 디아스포라 의식을 따라가다 보면 한 가지 방법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난점이 대두됨을 언급하며 그것을 효과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현상학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한다.(30 페이지)

 

윤동주의 정신적 모태인 명동촌이 북간도에 세워진 것은 1899218일의 일이다.(36 페이지) 윤동주는 만주를 거쳐갔던 다른 국내 시인들(백석, 이용악, 유치환, 이육사, 서정주 등)에 비해 오히려 만주에 대한 의식이 덜 반영되어 있다.(38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윤동주의 만주에서의 삶에는 유랑의 고통이 체험되어 있지 않다. 환경이 넉넉했고 일제 식민지의 영향을 덜 받았고 북간도가 민족 공동체적 공간이었다는 점 등 때문이다.

 

윤동주로 하여금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게 한 평양 숭실중학교는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되었다. 이에 윤동주는 만주로 돌아가 광명학원에 입학하는데 이 학교는 철저한 친일 학교였다. 연전(延專: 연희전문)으로의 유학, 모국과의 만남은 윤동주 일생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53 페이지)

 

연전에 오기 전까지 윤동주는 상상적 고향에 대한 추구를 보여왔다.(61 페이지) 윤동주는 자화상이후 12개월 간 절필한다. 이 시에는 우물 물 즉 거울이 나온다. 저자는 라캉의 견해를 받아들여 거울을 통해 보는 것은 자기의 모습이지만 이 바라봄을 통해 주체는 안과 밖을 구분하고 타자와 그 타자들로 구성된 세상을 응시한다고 말한다.(70 페이지)

 

저자는 욕망의 대상이 실재하지 않음을 인식하는 과정은 죽음과도 맞닿은 고통을 수반한다고 말한다.(81 페이지) 라캉에 따르면 대타자를 상실한 실재계는 주체의 결여를 뜻하며 이는 자아의 죽음이란 측면에서 죽음의 충동과도 이어진다.(81 페이지) 이 상황에서 윤동주는 희생을 선택한다. 이는 윤동주가 외적 인격 즉 페르소나를 추구했음을 의미한다. 페르소나는 타인과의 관계설정을 가능하게 해주는 인격의 또 다른 모습이다.(82 페이지)

 

윤동주가 모델로 삼은 예수(‘십자가’)와 프로메테우스(‘’)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언어로 개념화된 수많은 시간 가운데 윤동주는 항상 밤에 주목하고 있다. 밤은 윤동주에게 있어 물리적인 시간이 아니라 심리적이고 상징적인 시간이다.(93 페이지) 윤동주에게 있어 출구가 없는 현실은 모국에 와서도 정작 모국을 되찾을 수 없는 시대적 디아스포라의 운명을 의미한다.(94 페이지)

 

저자는 평양 만주 경성 일본 등으로의 이동을 통한 물리적인 거리는 상대적인 그리움을 유발시킨다고 말한다. 영원한 고향이란 없으며 한 곳에서 또 다른 곳으로의 이동은 존재론적인 탐험과도 같다.(107 페이지)

 

저자는 윤동주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바람이란 시어를 디아스포라적인 원류인 끊임없이 이동하는 것에 대한 상징으로 해석한다.(110 페이지) 저자는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디아스포라 의식의 정점을 보여주는 것으로 표현한다.(121 페이지) 이 시에는 윤동주의 전체 시 가운데 가장 많은 대상들이 등장한다.(122 페이지)

 

저자는 시공간적인 움직임이 급류처럼 흘러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고 자신의 고정된 위치가 없이 눌 불안하고 초조한 헌대인들 또한 넓은 의미의 디아스포라라 말한다. 저자는 그런 이유로 윤동주가 하나의 이정표가 된다고 결론짓는다.(131 페이지)

 

디아스포라 시인 윤동주 연구는 문제의식이 참신하고 논의가 성실한(설득력 있는) 책이다. 물론 윤동주가 사랑받는 이유는 디아스포라적 공통성 때문이라 단정지을 수 없지 않을까 싶다. 윤동주가 디아스포라적 시인임은 분명하지만 그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은 저항, 순수 등의 키워드로 인해 지지를 보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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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26일 일산의 책방이듬에서 있었던 문보영 시인의 강의 때도, 그 다음 날 있었던 용산 도서관에서의 이혜미 시인의 강의 때도 나는 리듬감 있는 행동 예컨대 춤이나 운동이 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물었다.

내가 이런 질문을 한 것은 그즈음 읽었던 레진 드탕벨의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는 책들’의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

가령 이런 문장. “버지니아 울프는 맨 처음 영감이 떠오르면 그것을 탯줄로 삼아 자신의 내부에서 움직이며 새롭게 형성되는 모든 생각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리고 아주 작은 씨앗, 즉 독창적인 착상의 배아가 자신의 몸 전체에 영향을 끼쳐 두 다리로 박자를 맞추게 된다고 했다.”(96 페이지)

작곡(석사)과 물리학(박사)을 공부한 존 파웰은 리듬을 특정 시간 동안 짧은 음과 긴 음이 서로 어우러지는 유형으로 정의했다.(‘과학으로 풀어보는 음악의 비밀’ 244 페이지)

파웰에 의하면 우리가 사용하는 리듬이란 말은 사실상 템포(빠르기), 박자(힘을 주어 강조하는 주기), 리듬을 포괄하는 말이다.

내 의문에 단서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세종대학교 무용과를 졸업한 김리영 시인의 시집 ‘춤으로 쓴 편지’에 실린 동명의 시에 이런 구절을 보았다.

“금박쾌자에 가슴띠 두르고 등장하면/ 어깨에 긴장쯤 녹아내려야 해/ 낯선 관객 앞, 어색한 기분 가라앉히고/ 손끝이 자유롭게 움직일 거야...단 한 장 찍어내는 모노타이프/ 발밑에 밟혀오는 뜨거운 활자들/ 3분 34초 공연 시간이 흘러가버리면/ 다시 불 켜져도 읽을 수 없을 거야// 참을 수 없게 차오른 숨/ 춤으로 맥박을 바치는 편지를 전한다”
이 시가 시집 전체 가운데서 리듬과 생각의 밀접한 연관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시란 생각을 한다.

“함(doing)이 곧 앎이며, 앎이 곧 삶”이라는 인지생물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나와 프란시스코 바렐라의 명제(신승철 지음 ‘구성주의와 자율성’ 19 페이지)를 생각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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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ith Jarrett 버전으로만 듣던 my song을 Jan Garbarek 버전으로 들으니 이상하다.

피아노 연주로 듣던 것을 색소폰 버전으로 들어서일까?(조금 전 KBS 1FM에서)

작고한 분을 고(故) 누구 누구라 하지 않고 그냥 이름을 부르니 이상하다.(신승철의 ‘구성주의와 자율성‘이란 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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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옥주(高玉柱) 시인의 ‘나무 나무’를 출판사를 통해 직접 구입했다. 긴긴 27년의 시간만에 내게 온 시인의 첫 시집이다. 30대 초반의 젊은 시인의 흑백 사진이 아스라한 추억 하나를 떠올리게 하는 표지를 한 시집이다.

계절로 보나 내 마음에 비추어 보나 ’흰 목련‘이란 시가 눈에 띈다. 어서 봄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내 마음의 진정한 봄도 아울러 바라며 시를 읊는다.

겨우내
꽃 피는 시늉으로 견디다
주춤한 숨결에
느닷없는 흰 횃불이다

목련은 어떻게 사랑하나
먼저 피어나
막 가슴 부풀리는
어린 것의 순결을 바라보고
굵은 빗방울만 흩어보내다
가슴 속의 말 전하지 못하여
봄날 햇살 아래
기진맥진
맨 몸뚱아리로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가장 진한 사랑의 말이다

겨우내 그 자리 지나며
가슴에 불 켜는 시늉.

맑고 고운 시이다. ’다시 목련‘이란 시에서 햇빛 길목으로 몰려 고개 내민 목련 송이들을, 아껴두고 하지 못한 가슴속 말이 펑펑 터뜨려진 것으로 표현한 시인의 또 다른 목련 시이다.
목련의 계절이 간절히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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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효정 님의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는 서울의 모 대학에서 강사(講士; 정치철학)로 노동하다 해직된 후 복직 투쟁을 벌이고 있는 저자의 이론적, 현실적 입장을 제시한 책이다.

현재 저자는 국회 앞에서 피켓 시위를 벌이고 있다.
돋보이는 점은 부당 해직 당한 저자 자신의 처지를 밝히는 과정이 기업화하고 신자유주의화한 우리 대학의 전반적 현실을 여실히 드러내는 장(場)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의 해직은 ‘돈이 안 되는‘ 인문학 축소 또는 폐지와 맞물리는 현상이다. 물론 대학은 저자가 말했듯 정치, 교육, 노동, 학생, 교수 등이 없는 곳이다.

저자는 대학의 출발지인 유럽에서 성직자와 관료 및 귀족들을 양성하는 제도권 대학들은 대부분 산속 수도원에 있었던 반면 그 성스러운 캠퍼스를 박차고 나와서 철학과 법학 같은 세속의 학문을 커리큘럼으로 삼고 자유학예를 중심으로 가르치는 대학들은 도시의 거리와 장터 광장 옆에 자리 잡았다고 말한다.

대학은 아고라 또는 포럼(정치적 광장) 역할을 해아 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인문학을 비판과 저항의 학문으로 정의한다. 이 정의는 인문학이 중산층의 지적(知的), 문화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속물주의적 교양으로 전락한 면이 있다고 본 그의 다른 정의와 짝을 이룬다.

이 정의는 지난 2011년 나온 이진경, 최진석 등 여러 필자들의 ‘불온한 인문학’이란 책의 논지와 맥을 같이 한다.

그들에 의하면 우리의 인문학은 두루두루 듣기 좋고 무난하게 소비되고 있다. 가벼운 유행 차원에서 소비되고 고급스러움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불온한 인문학’의 필자들은 익숙하고 안온한 삶에 낯설고 날선 감각, 우리 자신을 베고 다치게 함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삶의 형태와 강제로 맞부딪히게 만드는 과정에 불온한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는 말을 했다.

여러 논의를 다 제쳐두고 나는 인문학이란 이름이 아무 데나 사용되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나는 “비판과 저항”(채효정)도 힘들고 “이전과는 다른 삶의 형태와 강제로 맞부딪하는 것”(‘불온한 인문학’ 필자들)도 어렵고 그저 솔직히 지적 허영을 위해 (통합적인 의미의) 인문학이란 말 대신 구체적으로 개별 학문들 가령 사안에 따라 정신분석학을, 역사학을, 문화예술을, 주역을, 시를, 자연과학을 배우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할 수 있다.

민중신학을, 마르크시즘을 배우던 때가 그립고 그 시절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뭉텅뭉텅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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