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만성(大器晩成)이 아니라 대기면성(大器免成)이 맞다는 주장이 있다. 노자(老子)에게서 나온 대기만성은 큰 그릇은 모양이 없다(정해진 형태가 없다)는 의미의 대기면성(大器免成)으로 봐야 옳다는 주장이다. 주인공은 울산대 중문학과 박삼수 교수로 쉽고 바르게 읽는 노자’(20162)란 책을 통해 제기된 바에 의하면 대기’(大器)’()를 의미하는 말이다.

 

박 교수는 노자가 쓰인 2500년 전 만()자는 무()를 뜻하는 면()자의 가차자(假借字·어떤 뜻을 나타내는 한자가 없을 때 뜻은 다르나 음이 같은 글자를 빌려 쓰는 것)였다고 말한다. ..

 

이 대기면성은 앞 구절인 큰 사각형은 오히려 모서리가 없다는 뜻의 대방무우(大方無隅)는 물론 뒷 구절인 한없이 큰 소리는 오히려 들을 수 없다는 의미의 대음희성(大音希聲)과 문맥상 맞는다.

 

대방’, ‘대기’, ‘대음이 모두 도()를 의미하고, ‘’, ‘’, ‘가 모두 없다는 뜻이기에 일관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앞뒤 구절에 비추어 대기만성을 해석하는 것을 보며 김수영 시인의 '' 해석을 떠올리게 된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이 시는 여러 해석이 엇갈리는 난해시라 할 수 있다. 김수영 시인은 을 쓰기 전에 해동(解凍)’이란 수필을 썼다.

 

이 수필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이 봄의 과제 앞에서 나는 나를 잊어버린다. 제일 먼저 녹는 얼음이고 싶고 제일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철이고 싶다. 제일 먼저 녹는 철이고 싶고 제일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얼음이고 싶다.”

 

현실이나 외적 조건에 좌우되지 않고 스스로의 리듬에 따라 살아갈 것이라는 의미를 읽을 수 있다. 대기만성을 앞뒤 구절에 비추어 일관된 해석으로 연결해내는 것은 ''의 어려운 구절을 의미가 통하는 그의 수필에 비추어 해석하는 것을 연상하게 한다.

 

물론 나는 수필을 참고해 시를 해석하는 것이 설득력 있다고 생각하지만 타자의 해석의 자유를 존중한다. 나는 다만 시는 시 나름의 논리가 있겠지만 시가 시인의 삶 및 생각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말은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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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화요일 지구과학 강사인 동기 이** 님에게 ‘수학 언어로 문화재를 읽다‘(2017년 8월 출간. 수학 교사 오혜정 지음)란 책을 소개했다.

그러자 그는 학생들에게 과제로 낼 것이라며 책 제목을 메모해 갔다. 문화재에 관심을 두는 사람과 수학(자연과학)에 관심을 두는 사람에게 모두 유용할 것이라 생각되는 책이다.

‘다양한 문화 속에 창의적으로 사고하고 실현된 건축 수학‘이란 부제를 가진 이 책은 첫번째 챕터인 경복궁의 품격에서 도형과 수를 만나다‘부터 심상치 않은 구성을 선보인다.

근정전이 품은 금강비란 글이 그것이다. 두번째 챕터인 ‘지혜로 한옥을 짓다‘에서는 선조들이 선택한 지붕 곡면의 정체, 사이클로이드란 글이 눈길을 끈다.

사이클로이드란 말은 지난 해 11월 세미나에서 부적절한(어려운) 용어로 선정된 것들 중 하나이다.

네번째 챕터인 ‘과학적 사고로 지은 수원 화성은 철옹성‘에서는 ‘수문을 받들고 있는 오각 기둥의 숨은 역할‘이란 글이 관심을 부른다.

좋은 책인데 이 책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전문적인 내용은 익히기도 어렵고 익힌 것을 쉽게 풀어내는 것도 만만치 않다.

결정적인 것은 그런 내용들을 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나에게는 건축과 관련된 세 권의 책이 기억에 남아 있다. 철학자의 건축학 책인 박영욱의 ‘필로아키텍처‘, 건축학자의 철학 책인 임기택의 ‘생성의 철학과 건축 이론‘, 건축학과 철학 두 분야의 박사인 브랑코 미트로비치의 ‘세상에 단 하나 뿐인 건축을 위한 철학‘ 등이다.

KMOOC(Korean Massive Open Online Course)에서 건축 강의가 몇 개 있었다.

건축으로 읽는 사회문화사, 현대건축의 흐름, 건축공간론 등.

건축가 승효상 교수는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란 책에서 우리 사회는 아직도 건축을 공학이나 예술의 일부분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말을 하며 건축물의 외관인 아닌 공간의 조직을 보아야 바른 인식(공부)이 된다고 결론지었다.

승효상 교수에 의하면 우리가 사는 방법을 의미하는 공간의 조직은 쉽게 말해 거실과 주방, 침실 등을 얼마나 크게 하고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사는 방법이 달라짐을 의미한다.(13 페이지)
건축은 사물들로 이루어진 장소와 사물들을 담고 있는 무엇인 공간을 두루 다루는 학문이 아닐지?

나무, 돌, 흙, 철근으로 짓는 집이 아닌 언어로 짓는 집을 말하는 책이지만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을 읽어야겠다.

요즘 부족했던 몽상이라는 심성을 보충하기 위해서, 그래서 실제의 건축에 관심을 더 잘 가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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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부처님 공부
김정아 / 문학아카데미 / 1995년 4월
평점 :
품절


"온 종일 백지 공책에 금강경을 베껴 쓸 수밖에 없었던 때가 있었다. 온 종일 백팔배, 천팔십배, 절을 할 수밖에 없었던 때가 있었다. 그것은 사경(寫經)을 한다거나, 기도(祈禱)를 한다거나, 참선수행을 하기 위한 어떤 것도 아니었다. 내 앞에 닥쳐온 고통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그것 밖에 다른 어떤 선택을 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었다.

 

신기하게도 그곳에는 원망이나 기원, 황홀경 같은 밖으로 향하는 기운을 내 안으로 돌이켜 단숨에 집어삼킬 것처럼 덤벼들던 고통의 발톱을 따뜻하게 껴안는 알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오로지 그냥 쓰는 일, 오로지 그냥 절하는 일, 오로지 그냥 앉아보는 일, 나의 부처님 공부는 그 자리에서 시작이 되었으며 지금도, 앞으로도 변함 없으리라 생각한다."

 

시인 김정아 님의 '나의 부처님 공부'의 서문격인 '독자를 위하여'란 제목의 글 가운데 일부이다. 불교방송 구성 작가로 일하며 쓴 글이다.('나의 부처님 공부'가 출간된 지 23년이 지났다. 작가의 근황이 궁금하다. 2003'최초의 모더니스트 정지용'을 쓴 시나다 히로코 님의 근황을 물었으나 답을 듣지 못한 이번 달 초의 일이 생각난다.)

 

제목이 인상적인 '나의 부처님 공부'는 불경의 주요 구절들을 일상의 일들로 쉽고 친절하게 풀어쓴 책이다. '독자를 위하여'의 일부이지만 꽤 긴 글을 인용한 것은 이 부분이 '나의 부처님 공부'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말씀도 유의미하지만 닥쳐온 고통 앞에서 작가가 취한 실존의 몸짓을 알 수 있는 글이고 시적인 글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온 종일 백지에 금강경을 베껴 쓰고 백팔배, 천팔십배를 하고 벽을 마주 보고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을 사경도, 기도도, 참선수행도 아닌 것이었고 선택의 여지 없는 어떤 행동이었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것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사경이고 기도이고 참선이 된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종교적 의미의 사경을 세속적으로는 필사(筆寫)라 할 수 있다. 필사를 하면 자신도 모르게 놀라울 정도로 문장력이 좋아진다고 한다.(해본 적이 없는 나는 확언하지 못한다.) 그럼 사경은 어떨까? 부처님에 대한 간절함이 커지는 한편 문장력도 좋아지지 않을까? 기도나 면벽 참선도 내가 말하기에는 너무 힘들고 종교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그래서 '나의 부처님 공부'를 선뜻 산 것이다. 시간 날 때마다 펴보기 위해. 작가는 그런 무목적적 행위의 결과 놀랍게도 그런 행위에는 원망, 기원, 황홀경 등 밖으로 향하는 기운을 자신의 안으로 돌이켜 단숨에 집어삼킬 것처럼 덤벼들던 고통의 발톱을 따뜻하게 껴안는 알 수 없는 힘이 있었다고 말한다.

 

종교적이기보다 내 마음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한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나도 같은 유의 체험을 한 기억이 생생하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그냥 쓰고 절하고 앉는 일이다. 작가는 자신의 부처님 공부는 그 자리에서 시작이 되었다고 말한다. '나의 부처님 공부'의 구성은 동화 속 부처님 일화 한편, 살며 생각하며 한편, 경전 한 말씀이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작가는 동화집을 낸 동화작가이기도 하다.)

 

경전 속 한 말씀은 불경의 말씀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한편 어디서부터 읽어도 좋을 독립적인 글들이라는 특성이 있다. '별점'이란 글에서 작가가 인용한 말씀은 '전생담(前生譚)'의 한 구절이다. "행복은 별에 달린 것이 아니다. 별을 보고 길흉을 점치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행복은 찾아오지 않는다." 이 인용에 덧붙여 작가는 불교가 점을 봐주거나 운명론을 믿고 따르는 종교라는 인식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전혀 맞지 않는 일이라는 설명을 한다.

 

작가는 그렇게 점을 보거나 운명론에 빠지는 원인을 분석한다. 그것은 이 순간을 제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지나간 일이 알고 싶으면 지금을 보고 앞으로 올 날이 알고 싶으면 지금을 보라는 부처님 말씀을 덧붙임으로써 깨어 있어야 할 당위를 깨닫도록 유도한다.(97 페이지) 지금이 중요하다. 지금은 지난 일의 거울이고 미래의 씨앗이다.

 

'별점'이란 글의 서두는 "지금은 그런 인식이 많이 사라졌지만..."란 글이다. 조심스러운 마음이 읽힌다. 나 역시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지만..이란 전제를 한 뒤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우울증 당사자들에게 호손의 주홍글자를 새긴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애욕에 물들고 분노에 떨고 어리석음으로 괴로워하는 것은 어떤 마음인가 과거인가, 현재인가, 미래인가"라는 보적경(寶積經)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시작한 '괴로움과 맞서는 용기'라는 글은 불교의 핵심적 가르침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즉 생각을 일으키기 전 깨끗한 우리의 본래 마음을 의미하는 본바탕 진심('선가귀감' 참고)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지만 그렇게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그것은 망상일 뿐 정진이 아니라는 말씀에 대한 글이기에 그렇다. 이는 금강경의 무주상(머물지 않는 마음)의 가르침과도 통한다.

 

작가는 게으른 사람은 항상 뒤를 돌아보는데 이는 스스로 자신을 포기했음을 의미하고 뒤돌아 본다는 말은 과거의 어느 생각에 사로잡혀 있음을 뜻한다고 말한다. 이 글에는 이런 부분도 있다. 괴로운 일이 생기면 머리를 깎고 산으로 들어가야겠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순간적으로 괴로운 마음을 피해서 달아나는 것일 뿐 근본적으로 자신의 마음에서 괴로움이 사라지지 않는 한 산 속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괴로움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작가의 결론이 압권이다. "사실 마음 공부를 한다는 것은 그 괴로움과 정면으로 맞서서 싸우기도 하고 악수도 하고 같이 뒹굴면서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괴로움은 실체가 없는 일이어서 정면으로 마주보기만 해도 그 힘이 약해져 결국 흔적없이 사라지고 맙니다."(115 페이지)

 

'날마다 좋은 날'이란 글도 의미심장하다. 이 글에는 이런 부분이 있다. "못이 없으면 망치는 망치로서의 제일 큰 기능 하나를 잃는 것처럼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도 피아노 조율사가 있어야 빛나고 훌륭한 의사도 환자를 운반할 구급차 운전기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중생이 있기 때문에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119 페이지)

 

작가는 아무리 자기 존재를 무가치하게 낮추려 해도 우리는 무엇인가 일을 하고 있으며 단지 그 일을 떠나 다른 어떤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우리가 보내는 시간은 날마다 편안한 날, 날마다 좋은 날이 될 것이라 말한다. "오로지 그냥 쓰는 일, 오로지 그냥 절하는 일, 오로지 그냥 앉아보는 일"이란 작가의 모토가 생각난다.

 

'평등'이란 글은 파격적이다. '보문문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남녀는 모두 평등하다. 하늘과 땅, 천지가 낳은 것이 무엇이 다를 것인가" 작가에 의하면 부처님은 남자와 여자의 차별을 두지 않으며 다만 불성만을 가장 존귀하게 여긴다고 가르치셨다.(213 페이지)

 

살며 생각하며의 한편인 '마음의 힘을 기른다'도 작가의 지론을 잘 드러내는 글이다. 문학작품 읽기, 공연예술 감상하기, 사색, 자연과의 교감, 경건함에 대한 외경심, 참선과 명상, 아름다움에 대한 황홀감.. 등이 우리의 마음을 기르는 진정한 교재이며 영양식이라는 글을 인용하며 작가는 아침 저녁으로 모든 생각을 놓고 단 10분만이라도 앉아볼 것을 권한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 공부이리라.

 

작가는 스승 그 가운데서 가장 큰 스승인 부처님을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속가(俗家)에 사는 저희 또한 인류의 큰 스승이신 부처님을 만나 자신을 찾는 바른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그 은혜로움이 한이 없고(219 페이지) 우리가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된 많은 인연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믿고 의지한다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를 새삼 깨우쳐 보게 된다(231 페이지)는 것이다. 시간 날 때 틈나는대로 힘들 때 찾아 읽을 책으로 '나의 부처님 공부'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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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이 낳은 세계적 작곡가 윤이상(尹伊桑: 1917 - 1995) 님(1)의 따님인 윤정(Djong Yun) 님의 싱글곡인 Du Sollst Lieben(2)를 생각한다.

그룹 포폴 부(Popol Vuh)의 보컬과는 별개로 1972년 발표한 솔로 곡이니 나온 지 50년이 다 된 작품이다.(3)

생각만 하다가 유튜브를 통해 듣는데 Du Sollst Lieben 다음에 자동으로 그 분이 속했던 Popol Vuh의 대표작 Hosianna Mantra로 넘어간다.(친절하다.)

어제 올린 맹추위에 대한 포스팅에 시인 이령 님께서 이런 댓글을 달아주셨다. “아ㆍ봄은 오겠죠ㆍ오고야말겠죠.˝(4)

이에 나는 We shall overcome이란 댓글을 달고 바로 당신은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의 Du Sollst Lieben이란 곡을 떠올렸다.

포폴 부의 곡들은 지금도 변함 없이 신비하고 주술적이고 영적으로 들린다.(5)

나는 신성(神性)을 찬미하는 진언(眞言)이란 의미의 Hosianna Mantra도 좋지만 이별이란 뜻의 ‘Der Abschied’도 좋다.(6)

(1) 윤이상 님이 윤동주 시인과 같은 해에 태어난 분이라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잘 매치가 되지 않는다.

윤이상 님의 유해(遺骸)를 고향 통영에 이장(移葬)하려는 움직임을 보도한 신문 기사 가운데 제목을 ‘윤이상 유해 이장 놓고.. 쪼개진 통영’으로 설정한 곳이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바로 조선일보...
(2) You shall love.
(3) 2005년 ‘55세에 이른’이란 제목의 글을 쓴 기억이 난다. 그러니 윤정 님은 곧 70세가 되신다.
(4) ‘무엇 무엇에 대한‘이란 말을 반드시 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최근 ‘여성신문’의 현송월 관련 기사를 읽었다. ‘현송월 보도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여성 관음증’이란 제목의 기사이다. 여성에 대한 관음증이라 해야 정확하고 오해의 소지가 없게 된다.
(5) 교회 청년회에서 배운 가스펠송인 ‘호산나 호산나‘란 곡과 Hosianna Mantra는 너무 차이가 난다. ’호산나‘는 밝고 Hosianna Mantra는 현묘(玄妙)하다. 독일어인 Hosianna, 이탈리아어인 Osanna, 영어인 Hosanna. Osanna라는 이름을 한 이탈리아의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이 있다.
(6) 한무숙 님의 ‘축제와 운명의 장소‘란 작품에 ˝결별의 눈으로 볼 때 그 풍경은 진실로 아름다운 것이다.˝란 글이 있다. 결별의 눈으로 볼 때 사람이든 사물이든 상황이든 아름다울 수도 있고 욕망을 내려 놓고 볼 수 있기에 실상을 있는 그대로에 가깝게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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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시베리아보다 온도가 낮게 기록될 정도로 연일 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이 사상 최강의 한파(寒波)는 온난화의 역설적 결과라고 한다.

북극해의 얼음이 급격히 사라져 대기로 많은 양의 열과 수분이 방출된 탓에 추운 공기를 북극에 가둬두었던 극 소용돌이가 약해졌고 이로 인해 매서운 한파가 중위도를 강타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을 빙하기라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지난 목요일(1월 25일) 아침 소요산에서 출발한 1호선 전철에서 나도 고스란히 한파에 노출되었다.

문이 열릴 때마다 불어닥친 칼바람은 단연 최고였다.

물론 그럼에도 바깥 추위에 비하면 참을 만 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날 얼마나 추웠는지 손과 발이 시려웠다. 이런 일은 근래에 없었는데 난방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최대로 가동했지만 추위에 힘을 잃은 탓이었다.

(우리가 날씨를 고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추위와 좋은 공기 질’ vs ‘따뜻함과 나쁜 공기 질’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면 전에는 ‘추위와 좋은 공기 질’을 고르겠다고 했지만 지난 목요일 추위를 겪다 보니 그런 생각이 주춤해진다.

지금의 이 상황을 우리의 무분별한 이산화탄소 배출로 인한 온난화의 결과라 말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 것과 무관하게 자체의 순환 주기를 따르는 자연의 질서 탓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떻든 봄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한파 때문에 생각도 멈춰선 것 같았던 시간을 보냈다. 모두 이 극강(極強)의 추위를 잘 견디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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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18-01-28 15: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재의 서재글에서 윤정 님 얘기 읽으러 들어왔다가 내친 김에 다른 글도 몇 개 읽고 고마워서 댓글 남깁니다.
벤투님이 쓰신 김정아 님의 <나의 부처님 공부> 독후감 읽고 요즘 제 고민의 실마리를 찾은 느낌이예요.
윤정님 이야기도 좋았고 벤투님이 소요산발 1호선 얘기하시니 더욱 반가웠어요.
저도 집값 때문에 서울에서 밀려나 동두천 산 지 한 해 다 돼 가는데 차 없어서 어디 가려면 늘 소요산발 1호선을 타거든요.
벤투님도 경기북부에 사시나 봐요.
추운 날씨 건강하시기를.

벤투의스케치북 2018-01-28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네.. 반갑습니다. 저는 연천 삽니다.. 제 글을 읽고 실마리를 찾은 느낌이시라니 다행입니다..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8-01-29 15: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29 15: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29 15: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29 16: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30 15:3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