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면제인 알코올이 각성제인 커피로 바뀌면서 근대가 시작되었다(신영복 지음 담론’ 20 페이지)는 글은 흥미롭다. 사실이라 하지 않고 글이라 한 것은 자료 출처가 명기되지 않아서이다. 그렇다고 내가 저 글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의 경우 글의 출처가 명기된다 해도 해당 글을 내 식으로 이해하지 못하면 전후 맥락을 제대로 알 수 없어 그냥 잠정적인 지식으로 알고 있다. 어떻든 저 글을 수용한다면 허먼 멜빌의 모비딕의 일등 항해사인 스타벅으로 하여금 전 세계인들을 커피의 바다로 이끌게 하고 사이렌이 그들을 커피의 세계에 빠지게 한다는 스타벅스 커피점의 전략은 대단히 상징적이고 전략적이다.

 

두 로고(스타벅과 사이렌)를 사용한 것은 스타벅스의 본점이 있는 시애틀이 항구 도시이고 커피는 대개 배를 통해 전 세계로 운반되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모비딕의 스타벅은 퀘이커교도이다. 퀘이커는 절대금주주의(teetotalism)를 지킨다.(물론 이것보다 중요한 것이 그들의 절대평화주의이다.)

 

대신 그들은 물, 쥬스, (), 커피 등을 마신다. 커피 모델로 쓰기에 제격이다.(절대금주주의를 지키는 퀘이커교도인 스타벅을 커피 모델로 쓰는 것은 절묘해 보인다.) 일본의 커피 오타쿠인 의사 탄베 유키히로의 커피 과학에 이런 내용들이 있다.

 

중세 아랍의 수피들이 환각제로서 커피를 마시고 대중에게 퍼뜨렸다는 기록, 카페인은 커피 나무와 차 나무가 생존 전략으로 갖게 된 성분이라는 기록..고옥주 시인은 녹차 한잔 속에 바다의 출렁임과 잔잔한 온기가 잠들어 있다는 말을 했는데 유키히로의 책에는 커피에 깃든 오래된 역사와 문화 및 과학이 있다.

 

커피를 마시며 창을 통해 밖을 내려다 보는 해찰(일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쓸데없이 다른 짓을 함)의 호사를 누리고 싶다.(당연히 혼자 가야 할 것.) 책을 읽다가 이런 글을 쓰는 것 자체가 해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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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생명과 환경, 공동체적 삶 問 라이브러리 4
장회익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최옥정 작가의 ‘2라운드 인생을 위한 글쓰기 수업에서 자득명(自得明), 법득명(法得明)”이란 단어를 보았다.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의 패러디인가? 어떻든 자득(自得)이란 말을 장회익 교수의 온생명과 환경, 공동체적 삶에서 다시 만났다.(먼저 나온 장회익 교수의 책을 내가 나중에 읽은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칸트가 인간 이성의 한 본질적 요소라고까지 말한 시간, 공간 등은 배우지 않고 스스로 아는 자득적인 개념으로 여겨졌지만 상대성이론으로 인해 그런 생각이 불완전해졌다. 시간, 공간 외에 자득적인 개념이 생명이다.

 

저자는 온생명이란 개념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시간, 공간처럼 불완전한 개념을 수정하듯 생명이라는 불완전한 개념을 수정한 것이다. 상대성 이론으로 시간, 공간을 다시 보면 사물을 보는 눈이 전혀 달라지듯 생명을 온생명으로 수정해 보면 생명에 대해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다.

 

저자는 (개별 인간의) 상위 개체로서의 공동체도 하나의 삶의 주체라는 말을 한다. 저자는 생명을 현상으로서의 생명과 삶의 주체로서의 생명으로 나눈다. 온생명은 우주의 빈 공간 안에서 생명현상이 주위의 아무런 도움 없이 자족적으로 지탱해나갈 수 있는 최소여건을 갖춘 물질적 체계이다.(17 페이지)

 

생명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전체 체계는 온생명이고 각 단계의 개체들은 낱생명이다.(20 페이지) 온생명에 속하는 낱생명들은 온생명과 분리되어서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자족적인 온생명조차 그럴 경우 생존이 무제한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20 페이지)

 

온생명도 내적 구성 요소들 사이의 정교한 조화에 의해 그 기능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생명이 지닌 매우 특이한 성격은 생명 체계의 내부에서 자신을 주체로 파악하는 의식이 발생한다는 점이다.(21 페이지) 의식은 물리적 인과관계에 예속되는가? 저자는 마음과 물질을 한 가지 대상의 다른 두 측면으로 본다.(23 페이지)

 

의식의 주체로서는 자기 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물리적 기구가 어디에 어떻게 놓여 있는지도 모르면서도 의식은 주체로서의 자기를 곧잘 상정한다. 개체로서의 내 몸과 주체로서의 나의 관계가 그리 간단하지 않은 것처럼 사회조직으로서의 공동체와 삶의 주체로서의 공동체의 관계도 간단하지 않다.(28 페이지)

 

저자는 생명을 파괴함으로써 생존을 이어가는 현대 사회를 우려하며 제한적 의미의 이상을 내포한 대안공동체의 필요성을 제기한다.(37 페이지) 우리는 아직 인간이란 무엇인가란 물음 못지 않게 생명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에 완벽하게 답하지 못하고 있다.(70 페이지)

 

생명을 논할 때 부딪히는 난점 가운데 하나는 살아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명백하게 구분할 기준이 없다는 점이다.(72, 73 페이지) 어느 범위의 대상을 놓고 생명을 말해야 하는지도 쉬운 문제가 아니다.

 

저자는 분명히 생명이라는 말로 지칭될 엄연한 현상이 존재하는데도 그것을 엄밀히 규정하려고 하면 번번이 우리의 개념의 틀에서 벗어나는 난점은 우리가 생각하는 생명 개념 안에 독자적으로 규정될 그 어떤 실재로서의 생명 개념과 그것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되어야 할 부분적 대상으로서의 생명 개념이 상충하기 때문이라 말한다.(74, 75 페이지)

 

비유하자면 생명현상의 경우 나무에 해당하는 것이 온생명이고 나뭇잎에 해당하는 것이 낱생명이다.(76 페이지) 어떻게 낱생명과 함께 온생명을 파악할 수 있을까? 인간은 결국 물질의 화신이다. 그 자체가 물질이고 물리적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이면서 이 물질 세계의 질서 일부를 자신의 의지라는 형태로 내면화하여 사고하며 행위한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러나 물질의 이러한 조화가 결코 쉽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97 페이지)

 

환경 문제의 경우 과학의 언어만으로는 대중을 파고들 수 없기에 필요한 것이 문학이다. 작가는 두 가지 기능에 능통해야 한다. 과학을 포함한 이성적 사유를 통해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야 하며 다시 이를 문학의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 대표 사례가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이다.(104 페이지)

 

미국 작가 다니엘 퀸의 장편 소설 ’(고릴라) 이스마엘은 문제의 근원으로서 인류의 농경생활을 든다.(107 페이지) 인류는 다시 농업 이전의 수렵 시대로 되돌아가야 하는가? 다니엘 퀸은 그렇다고 말하지 않는다.(110 페이지) 레이켈 카슨은 문명 자체를 문제삼지 않는다. 이에 비해 다니엘 퀸은 문명 자체의 근원적 문제점을 지적한다.

 

생명체 안에 이를 살아 있게 해주는 그 무엇이 별도로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부러진 나뭇가지가 살아날 수 있는 것은 이것 안에 생명이란 것이 들어 있어서가 아니라 이것이 외부의 여건과 잘 연결됨으로써 살아 있다고 할 때 보여주는 여러 기능들을 되살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113, 114 페이지)

 

저자는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이 우리에게 작은 위안을 준다고 말한다.(125 페이지) 이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평화롭고 규칙적인 일, 고산지대의 살아 있는 공기, 소박한 음식,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혼의 평화가 이 노인(황무지에 나무를 심은 사람)에게 거의 장엄하리만큼 훌륭한 건강을 주었다. 그는 하느님의 운동선수였다. 나는 그가 아직도 얼마나 많은 땅을 나무로 덮을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문학의 힘이고 희망의 승리라 할 수 있겠다. 물론 현실은 삭막하고 파괴적이지만 우리는 그렇기에 이런 작은 씨앗 같은 모습에서 위안을 얻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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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39) 임동확 시인의 시집 '누군가 나를 간절히 부를 때'를 두 번째로 샀다. 알라딘 중고서점 가로수길점에서였다. 직원이 "이 책 구입하셨는데 또 하시나요?"란 말을 했다

  

구입 장소(첫번 째는 종로점)가 다르지만 같은 알라딘 중고서점 내에서 이루어진 구매이기에 자료가 통합되어 남음으로써 생긴 일이다. 나는 "선물하려고 그래요."란 말을 했다. 안 해도 되는 말이었을까?

 

어떻든 설마 구입한 책을, 그것도 며칠 사이에 다시 구입하겠는가 생각하고 불편해 할 수도 있겠지만 마치 간단한 책 상담이라도 받은 듯 싶어 기분이 좋다.

 

이미 가지고 있는 책을 처음 보는 책으로 알고 또 구입하는 것은 탐서가들의 특성 중 하나이다. 지금껏 5000권이 넘는 책을 구입했지만 책벌레가 아니어서인지 나는 아직 그런 경험이 없다.

 

그런 사람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 그들의 실수가 부럽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런 사람들은 순간적 영감으로 충만한 천재 유형의 인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들은 책도 술술 읽어낼 것 같다. 나처럼 구체 세목들을 기억하느라 애쓰지도 않고 재빨리 핵심과 요점을 파악한 뒤 그 내용을 잊었다가 필요할 때 무의식에서 잘 인출할 것 같다.

 

무의식이 있다는 것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자기동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최화 지음 박홍규의 철학’ 15 페이지) 자기 동일성이 있어서 나를 나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물질은 기억이 없으므로 자기동일성이 없어 매순간 타자화한다.(= 다른 존재가 된다.) 물질은 분자 차원에서 매순간 진동한다,(물론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자기동일성을 외부에 투영해 매순간 달라지는 물질(사물)을 동일한 것으로 파악한다. 무의식이 우리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입증하는 것이다.(최화 지음 박홍규의 철학’ 15 페이지)

 

인간은 태어났다가 죽는 과정으로서의 (존재가 아닌) 사건이다. 24시간마다 모든 세포가 교체되는 췌장, 열흘만에 전면 갱신되는 백혈구, 한달만에 대부분의 단백질이 교체되는 뇌 등 복잡한 사건의 집합이 인간이다.(송희식 지음 존재로부터의 해방’ 71 페이지)

 

존재로부터의 해방이란 말은 3(3: 인간, 시간, 공간)이 존재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것을 주문하는 말이다. 3(3)은 존재가 아닌 사건이라는 의미이다. 상호의존, 상호연결되었다는 의미이다.

 

최화 교수는 인간은 기억이 있어 자기동일성이 있다고 말하고 송희식 변호사는 인간은 존재가 아니기에 자기동일성이 없다고 말한다. 두 저자가 사용하는 말은 같지만 맥락이 다르다. 최화 교수의 말은 인간이 물리적으로 동일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변화함에도 자신을 자신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한재훈 교수의 서당공부, 오래된 인문학의 길에 이런 말이 나온다. 자연에 대한 일반적 인식은 명사로서의 자연인 반면 서당이라는 공간적 특성에서 보는 자연은 명사가 아닌 형용사 또는 동사로서의 자연이라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우리가 자연을 명사로 인식하는 것은 자연을 인간이 정한 범주의 틀 속에서 대상화하는 것으로 이런 대상화로 인해 결국(結局: 바둑 용어에서 일반 용어로 유입된 말)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고 향유하고 보호할 대상으로 인식하는 오만함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반면 자연을 형용사 또는 동사로 이해하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힘과 그것들 스스로의 법칙에 따라 전개되는 현상에 공감하고 그것을 존중하는 태도를 내포한다.(126, 127 페이지)

 

이는 신()을 명사로 이해하는 것과 형용사로 이해하는 것(신적인..)의 차이와도 연결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서당은 내게 그리움(경험하지도 못하고서!)의 대상이자 희유(稀有)의 매력을 가진 공간으로 인식된다는 점이다.(이미 소멸했지만..)

 

물론 나는 이 시대착오적 동경(憧憬)에서 잠시 머물다가 나갈 생각이다. 어쩌면 내가 주역(周易)’을 읽고 논어(論語)’를 읽는 것은 그 갈 수 없는 경지를 간접 체험하려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소광섭 교수의 물리학과 대승기신론도 인용하고 싶었지만 큰 공사(!)가 될 듯 해 생략. 다만 이 세계는 찰나생 찰나멸하는 (실체가 아닌) 사건들의 집합이라는 말은 하고 싶다. 송희식의 존재 = 소광섭의 실체. 이제 다시 과학책들 좀 읽을 때가 되었다. 이강영 교수의 스핀’, 리언 레더먼, 크리스토퍼 T. 힐의 힉스 입자 그리고 그 너머’, 사카이 쿠니요시의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상대성이론같은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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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공부, 오래된 인문학의 길
한재훈 지음 / 갈라파고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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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시인이 초등학교에 들어 가기 전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는 사실을 알고 흥미를 느끼던 차에 한재훈 교수의 서당 공부, 오래된 인문학의 길이란 책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입학 통지서를 받은 일곱 살 시골 서당으로 내려가 15년간 한학을 공부해 사서삼경을 뗀 뒤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간 저자의 특별한 이력이 반영된 책이다.

 

현재 저자는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본문에는 1904년 생인 겸산(兼山) 안병탁 선생이 아흔 살 시절 스물두 살의 저자에게 편지를 보냈을 때 노우(老友)라는 표현을 썼다는 구절이 있다.(207 페이지) 이 구절에 따르면 저자와 스승의 나이 차이는 68년이다. 그러니 저자는 1972년생이고 서당 공부를 한 시기는 1978년부터 1993년 사이이다.

 

겸산(兼山)이란 주역의 대성괘 가운데 하나이다. ()을 뜻하는 간()괘가 겹친 괘이다. 산처럼 흔들리지 않고 굳센 기질을 의미한다. 스승이 제자에게 벗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의미심장하다. 더구나 스승은 존함 뒤에 조아릴 돈()이란 글씨를 쓰기까지 했다. 퇴계(退溪)도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하지 않고 강론(講論)했다는 표현을 했다.

 

공자는 제자들이 자신을 두고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아신 분이라 칭하자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알았던 사람이 아니라 옛것을 좋아하여 민첩하게 추구했던 사람이라 말했다.(176 페이지) 또한 누구보다도 배움에 목말라 했기에 열린 마음으로 누구에게라도 배우려 했다.(176 페이지) 스승의 완고한 자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유연한 행동이다.

 

스승은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가장 좋은 벗이다. 스승과 벗의 관계를 말한 사상가가 있다. 명나라 양명학자 탁오(卓吾) 이지(李贄)이다. “스승이 될수 없으면 진정한 친구가 아니고,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스승으로 섬길수 없다.”는 말이 그의 말이다. ‘분서(焚書)‘로 유명한 사상가이다.

 

저자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를 이야기한다. ’소학(小學)‘에 나오는 이 말은 스승으로부터 받는 은혜가 부모로부터 받는 은혜만큼 크다는 의미이다.(162, 163 페이지) 스승은 선택되는 존재이다. 임금이나 부모와 달리. 어버이나 임금은 바꿀 수 없지만 스승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바꿀 수 없는 관계는 간함을 통해 개선을 위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겠지만 바꾸는 것이 허용되는 관계에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166 페이지)

 

이 부분에서 나올 말이 온고지신(溫故知新)이다. ()은 지속적으로 열을 가하는 것 즉 변화 이전에 있는 어떤 것에 지속적으로 열을 가함으로써 변화할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하는 것이다.(170 페이지) 이 말에는 누구든 완벽할 수 없기에 반드시 끊임없는 배움의 열정을 가지고 늘 새롭게 하는 자기양성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스승이라는 의미가 있다.(171 페이지)

 

군사부일체를 말하며 군과 사와 부라는 주체가 아닌 그들로부터 비롯되는 은혜가 갖는 의미 또는 성격에 주의해야 한다(156 페이지)고 말한 저자는 예기(禮記)’에 나오는 교학상장(敎學相長)에 대해서도 새로운 해석을 선보인다.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함께 성장한다는 의미일 수 있지만 그보다 본질적으로는 가르침과 배움이 서로를 성장시킨다는 의미이다.

 

교학상장은 한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인바 이때 그 현상의 주체는 교사(敎師)이다.(187 페이지) 군과 사와 부라는 주체가 아닌 그들로부터 비롯되는 은혜 즉 추상 명사에 주의해야 하듯 교학상장에서도 스승과 제자라는 주체가 아닌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추상 명사에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논어위정편에서 온고이지신을 말한 공자는 예기(禮記)’ ‘표기(表記)’편에서 도()를 향해 가다가 중도에서 그만 두더라도 몸이 늙어가는 줄도 잊고 남은 날이 부족한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부지런히 하루 하루 애쓰다가 죽은 뒤에나 그만 둘 것이라는 말을 했다.

 

지속적으로 열을 가하는 것 즉 온()을 말한 공자의 다른 말인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은 깃털의 총체로서 날개를 뜻하고(199 페이지) 날개의 주체인 새는 특정 종류의 새가 아니라 날갯짓을 할 수 밖에 없는 존재 즉 어린 새이다.(200 페이지) 이는 공부에 끊임없이 에너지를 투입하는 것과 늘 새롭게 자기 수양의 준비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세상이란 없었던 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만나지 못한 세상을 말하며 그 새로운 세상이란 세상이 변해서 우리 앞에 던져진 세상이 아니라 우리가 변화하고 성장했을 때 만나게 되는 세상이다.(203 페이지) 날마다 새로워지고 또 날마다 새로워진다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과 스스로 힘써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쉬지 않음을 의미하는 자강불식(自强不息)을 연상할 만하다.

 

저자가 서당 공부를 하게 된 것은 아버지의 의사로부터 비롯되었다. 어머니가 반대해 저자에게 선택권이 부여되었는데 저자가 형처럼 서당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말을 함으로써 전격 결정된 사안이다.(32 페이지) 물론 저자의 아버지는 삼형제를 똑같이 학교에 보내지 않고 서당에 보내 공부하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자의 아버지가 너희들 가운데 한 사람 정도는 대학에 가서 현대학문을 겸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는 말을 했다. 저자는 아버지의 이 뜻에 따라 현대학문을 공부하게 되었다. 누가 새로운 공부를 할지는 형제들이 알아서 정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는데 저자가 선택된 것이다.(110 페이지)

 

검정고시와 대학 입시 준비를 거쳐 고려대 철학과에 진학한 저자는 동서양의 철학을 섭렵했다. 저자가 인상 깊게 읽은 책들 가운데 하나로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들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저자가 서당 교육과 서양식 교육의 차이를 질적으로 논할 수 있게 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서당은 계단처럼 나이가 다른 학생들이 함께 기거하며 공부하고 예절을 배우는 공동체이지만 저마다 다른 글들을 읽고(61 페이지) 스승으로부터 배우지만 공부란 결국 자율적으로 보완하고 관리해가는 것(75 페이지)이며 어떤 글들을 더 읽어야 하고 어떤 글들을 덜 읽어도 되는지는 철저하게 자신이 알아서 할 일이다.(100 페이지)

 

서당에서는 100번의 성독(聲讀: 소리내어 읽기)을 통해 문장을 암송(暗誦)을 할 것을 요구한다. 서당에서 암송을 중시하는 것은 그것이 문리(文理)가 트이게 하기 때문이고(64 페이지) 글을 장악하게 하기 위해서이다.(68 페이지) 문리에 대해 저자는 글의 결을 이야기한다. 장악에 대해 저자는 글을 충분히 소화해 전체적 이해가 가능한 상태가 되는 것이라 말한다.

 

저자의 글을 통해 전통 한학 공부를 하는 서당과 현대식 학교의 분명한 차이를 알 수 있다. 현대의 교육 체계는 너무 인위적이고 통제적이고 획일적이다. 서당은 그렇지 않다. 자율적이고 인간적이고 학문적이다.

 

저자가 공부한 서당은 초동서사(草洞書舍)란 곳이다. 스승에게 받아들여질 때 우여곡절이 있었다. 저자는 먼저 공부하고 있는 형이 스승께 동생을 제자로 받아주실 것을 말할 것이라 생각했고 형은 동생인 저자가 청할 것이라 생각해 결과적으로 아무런 말 없이 선생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결과가 빚어졌다.

 

이에 선생님이 지금 뭐하는 것이냐 물으셨고 저자는 글을 배우려 한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네가 언제 내게 글 배우겠다고 한 적이 있으며 내가 언제 너를 가르치겠다고 한 적이 있느냐 하셨다.(141 페이지) 급기야 선생님은 저자에게 책 들고 당장 나가라는 말을 했다. 사태가 결말이 난 것은 선배들이 선처(善處)를 청해서였다.

 

서당 공부, 오래된 인문학의 길은 촘촘한 인문학적 사유가 시종 흥미롭게 읽히는 책이다. 나로서는 신영복 선생님의 책들을 읽을 때 느꼈던 것과 비교할 만한 감동을 느꼈기에 상당히 고무적임을 밝힌다.

 

예에 깃든 정신이 아까워 양을 바치는 의식을 보존했다는 의미의 애례존양(愛禮存羊)의 고사를 이야기하며 이미 없어져 버린 서당을 통해 그 안에 스며있는 소중한 가치를 음미하고 그런 가치를 통해 오늘 우리가 직면한 문제 상황에 새로운 해결의 단초를 찾아보고자 한다는 말을 한 머리말에서부터 배움으로 인해 나의 삶이 변화, 성장하고 그로 인해 좋은 세상을 위한 파장이 나로부터 비롯되게 하라는 마지막 장의 마지막 말까지 저자의 책은 수미일관하고 논리적이며 따뜻한 인문학적 성찰과 사색으로 빛난다.

 

깊게, 치밀하게 사유하기의 전범(典範)을 본 느낌이다. 깊고 치밀하게 읽는다는 것은 새로움을 담보하려는 시각이 있어야 가능하고 또 그런 읽기를 통해 새로운 시각을 갖출 수 있는 것이리라.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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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가 출간되었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의 저자 조지 레이코프와 그의 제자 엘리자베스 웨흘링이 함께 쓴 책이다. 2012년 출간된 토마스 프랭크의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같은 책과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책이다.

 

레이코프와 웨홀링의 책은 정치가 환멸을 부르는 우리 현실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물론 나 뿐이 아니겠지만 적폐세력이 만들어내는 환멸을 문재인 대통령이 만들어내는 상식과 합리의 새 정치를 보며 견디는 것이 최근의 큰 흐름이리라.

 

인지언어학의 창시자이기에 충분히 예상한 바이지만 레이코프와 웨흘링의 책에서는 은유가 상당한 비중으로 다루어졌다. 은유는 시를 논할 때만 만나는 개념이 아니라 인간 사유와 언어활동에 필수불가결한 수사(修辭)이다.

 

그래서 이 책에 많은 관심이 간다. 토마스 프랭크의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는 자기편을 꾸짖는 저자의 일갈을 접할 수 있지만 이번 책에서는 어떤지 모른다.

 

단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우리와 미국의 사정이 다르다는 점이다. 미국 보수 정당은 교묘한(수준 높은?) 프레임 조작을 행하지만 우리 적폐세력은 종북 프레임과 색깔론 외에 특별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 그때 그때 다르게 아무 말이나 하는 막무가내 어법도 있다.

  

레이코프와 웨흘링은 사람들에게 정당의 정치적 프레임을 파악할 것을 주문한다. 한 철학자가 한 말을 참고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철학을 하는 한 독사(doxa)에 만족하지 말고 에피스테메(episteme)를 택하는 것은 사활(死活)의 문제”(최화 지음 박홍규의 철학’ 79 페이지)라는 말이다.

 

독사는 그릇된 견해, 에피스테메는 참된 앎을 의미한다. 나는 앞서 인용한 철학자의 말을 정치적 선택을 하는 한 프레임의 실상을 파악해 바르게 판단하는 것은 사활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말로 바꾸어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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