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 - 한국 사회과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
김경만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은 논쟁이 사라진 시대인 듯 하다. 여러 이유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문학계라면 인상비평, 끼리끼리 해먹는 카르텔 때문이지만 사회학계에서는 철저하지 못한 학문 자세 때문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경만 교수의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은 매우 시사적인 책으로 꼽을 만하다.

 

이 책에는 상징자본이란 말이 자주 나온다. 이는 피에르 부르디외의 용어이다. 그는 재산, 소득 등은 경제적 자본으로, 인맥 등의 사회적 관계는 사회적 자본으로, 명예, 위신 등은 상징 자본으로 불렀다. 그는 문화 자본도 언급했는데 그의 분류에 의하면 지식, 교양, 기능, 취향, 감성 등은 체화된 문화자본이고 문화상품, 골동품, 예술품 등은 객체화된 문화자본이고 졸업장이나 학위, 자격증 등은 제도적 문화자본이다.

 

저자는 한국사회과학의 서구 종속적 재생산 구조를 비판한다. 저자는 우리가 서구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글로벌 지식장에 직접 둘어가 상징 공간을 지배하는 서구 학자들과 부딪치고 논쟁함으로써 그들이 만들어놓은 지식장의 구조를 변형시키는 길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글을 통해 우리는 비판적 정신에 근거한 철저한 연구 및 사고(思考)가 학문에 필요한 것 중 하나임을 알게 된다. 내가 이 책을 구입한 것은 출간 3년이 넘은 시점인 최근의 일이다. 저자의 철저한 논리에 통쾌함마저 느꼈는데 나는 저자에 의해 실명(實名) 비판을 받은 학자들이 어떤 반응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물론 기사를 찾으면 되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부분적 오류나 오해가 있겠지만 저자의 논지는 대체로 타당해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하겠기 때문이다. 저자의 글을 통해 나는 실명 비판의 대상이 된 학자들이 참 안일(安逸)하고 불철저하게 사유해 왔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 점은 글을 보면 금방 드러난다.

 

독자들은 자신의 논리에 이상함이 발견되면 거울을 보고 얼굴을 확인하듯 저자의 책을 논리적 기준점으로 삼을 만하다. 저자의 날카로운 논리에 비판 대상자들은 여지 없이 어설른 좌충우돌의 논리를 보여준 학자, 생각이 잘못된 학자들이 되었다.

 

한 학자는 기의 소생, 기의 소진 등의 용어를 썼다. 이는 말할 필요도 없이 사회과학적 용어 또는 설명이 될 수 없다. 학자들이 그럴진대 그들이 가르치는 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다. 예컨대 원전을 읽지 않고 공부하니 능률이 오를 수 없는 것이다. 아니 난해한 서구 이론가들의 논지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공부 시간에 이론이나 이성적인 이야기가 아닌 정서나 느낌 차원의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서구 학자의 이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을 돌아보지는 않고 그 학자의 이론은 현학적 지식 놀이에 불과하다고 말하거나 현실적합성이 없다고 짜증을 내는 것이다.

 

저자는 묻는다. 우리에게 푸코의 담론장이나 권력 또는 분류와 담론 구성체나 계보학 같은 강력한 이론적 자원이 있는가?라고.(93 페이지) 저자는 1900년대의 형평사 운동(백정들의 신분제 철폐 운동)을 분석할 때 서구 지식사회학 가령 카를 만하임의 지식사회학의 중심 개념인 계급, 불평등, 지배, 이데올로기 등을 빌려올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적실성 문제를 떠나 어떤 문제를 한국 학자가 연구하더라도 우리는 우리 고유의 개념적 자원이 없기 때문에 서양이론을 차용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에게 열려 있는 유일한 대안은 유교가 아니라 서구 사회과학 전통이라 본다. 설령 유교가 대안이라 해도 그것은 아주 비생산적인 대안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99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유교를 재해석하는 것은 여러 문제가 있고 비용면에서도 현실성이 없는 작업이다.(101 페이지) 저자는 묻는다. 이론이 고도로 추상적인 것이라면 왜 토착이론이 필요한가?라고.(107 페이지) 저자는 각 나라마다 그에 적합한 이론을 만든다는 것은 전 역사적으로 그리고 경험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당대의 지적 관심 공간에서 살아남는 학파나 사유의 수는 항상 소수의 법칙을 따르는바 그 수는 적게는 셋이고 많게는 여섯이다.(109 페이지) 저자가 말했듯 이론이 무엇인지 답하지 못하면서 한국적 이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당위만 난무하는 현실은 안타깝다.

 

저자에 의하면 무질서한 자료(자료더미)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이론이다.(110 페이지) 무질서한 자료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은유(隱喩)이다.(112 페이지) 과학철학자들의 주장대로 이론이 일종의 은유라는 말은 연구대상의 세부적 경험 내용의 일부를 희생하더라도 은유를 매개로 낯설거나 추상적인 대상을 익숙하고 구체적인 대상으로 치환하는 이론적 이상화 과정을 함축한다.(113 페이지)

 

무엇이 선험적인지(당연한 것인지) 분석적인지는 맥락을 초월한 보편 기준이 아니라 주어진 이론틀에 따라 결정된다.(118 페이지) 그렇다면 인간 사회를 기본적으로 갈등(마르크스적 관점) 관계로 보아야 할까, 아니면 조화(뒤르켐의 관점) 관계로 보아야 할까?

 

두 이론가는 이 질문에 대한 서로 다른 선험적/ 분석적 답을 제시한다. 이론은 실재나 현실을 잡아내거나 담아내기 위해 고안된 개념들의 유기적 연결망이다.(118 페이지) 망을 어떻게 짤 것인가에 대한 영감을 제공하는 것이 은유이고 은유에 따라 망에 들어갈 개념들이 결정될 뿐 아니라 개념들의 관계도 결정된다.

 

상징폭력이란 물리적 폭력과 대비되는 말로 교육과정을 마치고 전문 사회학자가 되어서도 거인들의 어깨 위에서 연구를 진행시킬 수밖에 없는 데에서 비롯된다.(123 페이지) 가령 우리나라뿐 아니라 어느 나라의 문화연구도 부르디외의 기여를 모른 척 무시할 수 없다. 그의 의견에 동의하든 아니든 그의 유산에서 시작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는 여러 나라 연구자들에게 상징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상징폭력은 누구에게나 가해지는 것이 아니다. 이 폭력은 장()의 환상을 공유하는 사람들에게만 가해진다. 상징공간(저술을 통해 대화하는 공간)에 진입해 장에서 중요하다고 설정된 내기물(내기에 건 돈: stake)이 연구할 가치가 있고 또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믿는(부르디외 용어로는 오인하는) 행위자에게만 가해진다.

 

장 내부에 일체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가해지지 않는 것이다. 상징폭력을 당하는 것은 우리만이 아니다. 서구의 대다수 학자들이 당하는 것이 상징폭력이다. 지적 종속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127 페이지) 저자는 부르디외의 장이론은 한국 사회과학을 글로벌 지식장에 위치시켜 한국 사회과학의 민낯을 직시할 수 있도록 해주고 미래를 조망하게 하는 매우 풍부한 적실성이 있다고 말한다.(129 페이지)

 

저자는 학술적으로 통제된 이론적 인식론적 논쟁을 요구하는 글로벌 지식장의 참여자가 되기보다 대중과 미디어의 시선을 끌 흥미 본위의 시사적인 작업을 하며 장외의 방관자로 남길 원했던 우리 학자들을 비판한다.(130 페이지) 저자는 네덜란드의 한 사회학자가 부르디외에게 한 질문과 부르디외가 한 답을 제시한다.

 

질문자가 당신 글은 왜 그토록 어렵고 난해하냐고 묻자 부르디외는 (자신이) 다루는 사회현상이 그만큼 복잡하고 어렵기 때문이라 답했다. 저자는 이를 언급하며 그 답은 반만 맞는다고 말한다, 사회현상이 어렵고 복잡하기에 어려운 것이만 그가 상대한 수많은 학자들의 글이 일상세계와 유리된 학문장에서 오랜 세월 진화해온 상징 산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131 페이지)

 

저자는 서구 이론을 비판하고 넘어서려는 끈질긴 노력은 결국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132 페이지) 저자는 순수한 학문연구를 무시하는 풍토에서 지식장의 자율성을 기대할 수 없고 그렇다 보니 지식장 밖에서 추대한 사회과학의 가짜 거장들이 판치는 난국이 형성되어 있다고 말한다.(134, 135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눈앞에서만 한국적 이론 구축을 주장하면서 뒤로는 이론과 실천의 경계 허물기에만 여념이 없는 상황에서 독창적 이론이 나올 가능성은 아예 없다. 지난 반세기 넘게 한국적 이론을 외쳐왔음에도 아무 결실을 거두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135 페이지) 저자는 담론과 해방’(2005년 출간)의 출간으로 글로벌 지식장에서 자신의 위치를 한 단계 상승시켰다는 안도감과 중압감을 함께 느꼈다고 말한다.

 

새로운 연구의 이정표를 만들고 곡괭이질을 다시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야 할 연구 방향을 재설정하고 책에서 한 주장을 더 확장하고 발전시켜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입지를 마련해야 한다는 중압감이다.(209 페이지)

 

저자는 이 부분 이후 중요한 사실을 전한다. 부르디외의 과학학과 성찰성을 세계적인 사회학자들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기든스도 부르디외도 상징자본이 보잘 것 없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한다.(247 페이지) 두 사람 모두 글로벌 지식장이 요구하는 수준의 학문적 하비투스를 체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당시 글로벌 지식장을 지배하던 학자들을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극복함으로써 점차 세계 최고의 학자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글로벌 지식장의 리더가 될 수 있는 사회과학자를 배출하려면 글로벌 지식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다른 나라의 학자들과 논쟁하고 경쟁하는 튼튼한 중간계층 학자들을 양성하는 길밖에 없다고 말한다.(247 페이지)

 

저자는 부르디외가 미국 사회학에 대항해서 글로벌 지식장의 지배구조를 바꾸기 위해 프랑스의 지적 자원(뒤르켐, 메를로퐁티)에만 매달리지 않았고 미국의 이론적 전통(고프먼과 가핑클)과 통계방법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변증법적으로 종합한 결과 발생론적 구조주의라는 새로운 이론체계를 정립하고 그 당시 이미 현대의 고전이랄 수 있는 수많은 경험연구를 양산했다고 말한다.(249 페이지)

 

1970년대 글로벌 지식장에서 영향력이 미미했던 부르디외가 장을 지배하는 이론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한국적 사회과학을 부르짖는 국내학자들과 다르게 미국사회학과 단절했기 떄문이 아니라 미국 사회학에 대한 정밀한 분석과 비판에 기초한 자신의 이론을 가지고 장의 지형을 바꾸려는 지속적이고 고통스러운 노력을 경주(傾注)했기 떄문이다.(250 페이지)

 

이제 우리는 병적으로 집착했던 한국적인 그 무엇을 찾아헤매는 우회적이며 비생산적인 방법을 지양하고 서구이론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이 비판을 토대로 한 창의적인 이론을 무기로 글로벌 지식장에서 투쟁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251 페이지) 필요한 것은 서구 이론들을 재생산하는 것도 배척하는 것도 아닌 비판이다.

 

저자의 책을 두루 공감하며 읽었다. 논쟁의 방식과 그 내용들을 익히려고 산 책이지만 논쟁거리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저자의 주장을 반박할 학자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저자가 비판한 최재천 교수의 통섭을 비판한 책(’통섭과 지적 사기‘)을 읽을 차례이다. ’통섭을 너무 비판 없이 읽은 지난 행적을 반성하는 마음으로.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prenown 2018-04-20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르디에의 ‘구별짓기‘는
오늘날 양극화와 차별을 이해 할수 있는 중요한 저작이지요.물론 자본주의 를 용인하는 보수적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과 자본주의의 핵심을 찌른다고 봅니다.
부르디외는 훌륭한 사회학자예요. 사회참여 와 비판의식이 있는 실천적 지식인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이비 진보주의자가 있습니까? 잘난척 하면서 입으로만 진보를 외치는...프랑스의 지적 풍토가 부럽습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8-04-20 20:57   좋아요 0 | URL
네. 부르디외가 프랑스 이론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미국 이론과 투쟁한 끝에 세계적인 이론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우리의 풍토와 많이 다른 프랑스 그리고 미국의 풍토가 부럽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공감합니다..
 

박은영 교수의 풍경으로 본 동아시아 정원의 미는 사유를 자극하고 감흥을 일으키는 매력적인 책이다. 저자는 원정(園亭)을 보는 두 가지 풍경을 제시한다. 하나는 시적 풍경, 다른 하나는 회화적 풍경이다.

 

시적 풍경은 문학적 상상을 통해 채색되고 회화적 풍경은 그림으로 채색된다.(정원庭園)이란 명칭은 일본식 용어이다.) 시적 풍경의 주인공인 시인과 회화적 풍경의 주인공인 화가는 각기 다른 위상을 갖는다.

 

시인이 계절이라는 시간을 마음대로 불러온다면 화가는 공간을 자유자재로 뛰어넘을 수 있다. 시는 공간적 한계가 전제되고 그림은 시간적 제약이 전제되는 것이다. 공간을 자유자재로 뛰어넘을 수 있는 화가의 예로 겸재 정선을 들 수 있다.

 

그가 그린 만폭동은 한 자리에 앉아 사생(寫生)한 장면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다. ‘만폭동은 정선이 계곡 아래쪽에서, 그리고 높은 절벽 꼭대기에서 본 장면들을 멋지게 합성한 구도(構圖)의 그림이다.(이종수 지음 옛 그림 읽는 법’ 89 페이지)

 

박은영 교수의 책에는 도연명(陶淵明)귀거래사(歸去來辭)‘ 전문이 번역되어 있다. 강릉 선교장의 사랑(舍廊)인 열화당(悅話堂)과 전남 보성의 열화정(悅話停)은 모두 귀거래사로부터 비롯된 이름이다.

 

즐거운 이야기를 의미하는 열화는 돌아가자/ 사귐도 어울림도 이젠 모두 끊으리라/ 세상과 나는 어긋나기만 하니...친척 이웃들과 기쁘게 이야기 나누고.”란 말에서 유래했다. 그런데 이 구절 다음에 거문고와 글 즐기니 근심이 사라진다는 구절이 있다.(樂琴書以消憂)

 

책에서 또 하나 눈여겨 볼 부분은 춘오(春塢)라는 말이다. 봄 언덕이란 의미이다. 잘 알듯 담헌(澹軒) 홍대용의 별장 이름이 유춘오(留春塢)이다. 그런데 해당춘오란 이름이 박은영 교수의 책에 나온다. 해당춘오(海堂春塢)이다. 이는 중국 주오정위안의 중부에 있는 정원이다.

 

봄날 해당화 피는 담장이란 뜻을 가진 해당춘오는 방 두 칸, 잡석 몇 개, 수죽(樹竹) 몇 그루가 있는 소박한 정원이다. 수죽(樹竹)이란 이름에 걸맞게 해당춘오에는 해당화와 대나무가 있다. 사람들은 이를 해당화의 짧은 시간과 대나무의 오랜 시간을 對比하여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자 함이라 말한다.

 

그림이 전하는 메시지는 심대하다. 그제 시간과 공간으로 풀어낸 서울 건축문화사강의에서 강사 박희용 님은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1497 1543)대사(大使)과 마사초(Masaccio: 1401 1428)() 삼위일체를 대비시켜 설명했다.

 

정면을 응시하는 두 남자가 전면을 장식하는 그림인 1533년 작품 대사들에는 태양광과 태양시를 계산하는 데 사용하는 복합 태양관측기, 하늘에서 태양의 위치를 측정하는 육분의(六分儀), 장난감 팽이처럼 생긴 9면체의 별자리 파악하는 도구 등이 있어 작업장 조직에서 일어난 변화를 나타낸다.(리처드 세넷 지음 투게더‘ 165, 166 페이지)

 

중요한 것은 화폭 맨 아래쪽에 자리한 죽음의 두상(頭狀)이다. 왜상화법(歪像畵法)으로 그려진 이 장치는 감상자가 옆으로 비껴서야만 보인다.(리처드 세넷 지음 투게더‘ 168 페이지) 마사초는 성삼위일체를 통해 원근법을 최초로 선보인 화가이다.

 

요점은 홀바인의 대사들에 나오는 두개골은 있는데 못 보는 것이고 마사초의 성 삼위일체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하는 그림이라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상상력(의 힘)이다. 박은영 교수에 의하면 예술적 상상력은 제약이 없는 열린 주위 환경의 맥락(context)에서 특정 부분(텍스트)을 잘라내는 행위를 의미하는 틀 짜기(프레이밍)에서 나온다. 이것이 예술에서 필연적인 추상화 작업이다.

 

세계를 전체로 바라보지 않고 부분을 통해 전체를 조감하는 것이 틀 짜기인데 물론 부분의 조합을 통해 인식되는 전체는 처음의 전체와 다르다.(’풍경으로 본 동아시아 정원의 미‘ 93, 94 페이지)

 

전호근 교수는 세한도(歲寒圖)를 예시하며 추사(秋史)의 그림을 감상할 때는 문자의 향()이라 할 수 있는 정신을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철학자가 사랑한 그림‘ 29 페이지) 전호근 교수에 의하면 세한도는 김정희가 유배지인 제주 풍경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닐뿐더러 종()을 알 수 없는 나무와 있을 수 없는 집을 그린 괴이한 그림이다.

 

나는 상상력(의 힘)을 인정한다. 물론 상상력도 공부를 통해 더욱 유연하고 깊이 있는 것이 될 것이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 대해 푸코가 가한 해석을 이해하려면 공부가 필요하다. 푸코가 가한 해석이란 그가 말과 사물1장에서 제시한 것을 말한다.

 

나는 지금 이지영 교수가 그 부분을 설명한 글을 앞두고 있다. 이 글은 여러 필자가 쓴 철학자가 사랑한 그림에 속한 운동과 시간, 그리고 인간: 르네상스 원근법과 수태고지 그리고 바로크란 글이다. 필자는 맨 처음 푸코의 분석을 접했을 때의 놀라움이 떠오른다는 말을 했다.(‘철학자가 사랑한 그림’ 258 페이지)

 

이성과 감성 모두 필요한 읽기가 되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에 나는 바로 그 글을 읽기 전에 필자의 신간인 ‘BTS 예술혁명 - 방탄소년단과 들뢰즈가 만나다를 주문했다. 푸코의 시녀들해석과 관련이 없지만 머뭇거리며 망설이는 우회의 독서도 어느 시점에선가 빛을 발하리라 생각하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풍경으로 본 동아시아 정원의 미 - 시적 풍경과 회화적 풍경 아시아의 미 (Asian beauty) 6
박은영 지음 / 서해문집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원(庭園)이란 말 역시 일본 문화의 영향을 받은 용어이다. 우리는 원래 원림(園林)이란 말을 사용했다. ()은 마당과 동산의 의미를 지닌다고 말하며 저자는 우리의 원()은 원정(園亭), 중국은 원림(園林), 일본은 정원(庭園)으로 호칭한다.

 

저자는 원정(園亭)을 보는 두 가지 풍경을 제시한다. 하나는 시적 풍경, 다른 하나는 회화적 풍경이다. 시적 풍경은 문학적 상상을 통해 채색되는 것이고 회화적 풍경은 그림으로 채색되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시인은 계절이라는 시간을 마음대로 불러온다. 그런가 하면 화가는 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다.(15 페이지) 시는 공간적 한계가 전제되고 그림은 시간적 제약이 전제된다.(37 페이지)

 

풍경으로 본 동아시아 정원의 미는 시와 그림이라는 두 얼굴을 통해 세 나라 정원의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간 여정을 담은 책이다.

 

경관(景觀)을 이해하는 것은 객관성을 추구하는 것, 과학적으로 사물을 바라보려는 태도이다. 풍경은 상대적으로 감성적이며 정감(情感)에 의존하기에 주관적으로 그려지는 하나의 심상이라는 의미가 있다.(25, 26 페이지)

 

시적 풍경은 마음의 그림이다. 시적 풍경은 상상에 의해서, 회화적 풍경은 연상에 의해 생명을 갖게 된다.(27 페이지) 우리의 원정에서 연못에는 시적 풍경과 회화적 풍경이 공존한다.(29 페이지)

 

시와 그림은 원림을 만드는 과정에서 중요한 개념적 골격을 제공했다. 그리고 완성 이후에는 원림의 자연미를 완상(玩賞: 아름다움을 보고 즐기는 것)할 수 있게 했는바 완상한 원림 곳곳을 다시 시와 그림의 소재로 삼는 것이 원림의 역사였다.(29 페이지)

 

회화적 풍경은 화가의 눈과 보는 이의 마음 사이에 만들어지는 또 다른 풍경이다.(39 페이지) 그림이 창조한 풍경을 회화적 풍경이라 한다.(41 페이지) 시적 풍경은 반드시 시를 읽는 것을 전제하지 않는다.(55 페이지)

 

그림은 표현된 사물 자체에 관심이 집중되도록 유도하지만 시는 독자에게 언어를 던져줄 뿐 더욱더 상상을 유발하게 해 이미지 층을 두껍게 형성한다.(60 페이지) 그림은 정태적이고 평면적인 예술이어서 동태적이고 입체적인 내용을 한 폭에 모두 담기 힘든 경우가 많다. 제화시(題畫詩)는 바로 이런 결점을 보완한다. 시와 그림이 한 화면 속에 있는 이상 제시(題詩)의 위치는 당연히 전체 화면의 구도에 영향을 준다.(61 페이지)

 

우리 선비는 기화요초(琪花瑤草: 옥같이 고운 풀에 핀 구슬같이 아름다운 꽃)를 멀리했다. 조선의 문사는 꽃과 나무를 감각적인 매력의 대상으로 보기보다 인격을 부여해 그 소재를 사람이 지켜야 할 유가적 덕목의 상징으로 보았다.(87 페이지)

 

자세한 관찰을 통해 특징적 형식(패턴, 정형, 규칙)을 찾아내는 과정을 과학에서는 일반화라 하고 예술에서는 추상화라 한다. 예술 역시 추상화를 통해 사물의 여러 얼굴을 읽으려 한다. 우리가 인식하는 사물의 속성은 언제나 불완전해서 그 일부만 알 수 있을 뿐이다. 나머지 속성은 추상화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92 페이지)

 

예술에서 추상화의 길은 필연적이다. 자연의 추상화는 예술에서 이른바 틀 짜기(프레이밍)라는 방법으로 구현된다. 틀 짜기는 제약이 없는 열린 주위 환경의 맥락(context)에서 특정 부분(텍스트)을 잘라내는 행위를 말한다. 예술가가 주위의 모든 사물로부터 특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이를 추출하는 과정이다.(93, 94 페이지)

 

세계를 전체로 바라보지 않고 부분을 통해 전체를 조감하는 것이 틀 짜기이다. 부분의 조합을 통해 인식되는 전체는 처음의 전체와 다르다. 예술적 상상력은 이런 틀 짜기에서 발생한다.

 

원림(園林)은 자연을 가두는 일이다.(100 페이지) 한국 원정에서 틀 짜기는 그 대상이 무엇이든 녹색의 자연 뿐이다. 문틀 자체에 특별한 장식이 없고 바라보는 그대로의 자연을 감상하게 되어 있다. 변하는 것은 사시사철의 색깔, 바람, 안개, 그리고 눈(snow)이다.(105 페이지)

 

정원에서는 자연미를 대체로 두 가지 방식으로 체험한다. 정적인 상태에서 자연미를 읽는 정관(靜觀)과 원로를 따라 움직이면서 풍경을 감상하는 동관(動觀)이다.(111 페이지) 정관과 동관은 본질적으로 상대적 개념이다. 정지의 뜻이 없는 움직임이 없듯 움직임 속에 머뭇거리는 정지 개념이 없는 동적 풍경 체험은 불가능하다.(112 페이지)

 

저자는 다비드상을 예로 들며 그 상()에서 대리석이 갖지 않는 다른 성질(다비드라는 인간의 성격)이 나타날 때 우리는 이런 현상을 예술적 창조 또는 재현이라 말한다고 설명한다.(117 페이지)

 

원림은 인간의 우주에 대한 이상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하나의 심미적 수단이다. 고대부터 중국의 통치자는 원림을 지상의 신선세계로 건설하고자 했다.. 그러나 봉건제 하의 민가에서는 대규모로 원림을 조성할 수 없어 점차 작은 규모 안에 거대한 자연을 끌어들이는 수법을 발전시켰다.(129 페이지)

 

원림은 그림과 시가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예술 분야다. 시화서가 일체라는 생각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시대 변천에 따라 자연스럽게 융합된 것이다.(159 페이지) 원림은 가장 완벽한 공간예술이며 원림 조성은 인간에 의한 자연의 의미를 재현하는 예술행위다. 즉 원림은 자연을 통해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느나에 관한 생각이 공간에 나타나는 예술이다. (162 페이지)

 

지배계급에 의해 향유되었던 시, , 서의 문화적 맥락을 동시에 이해하지 못하면 동아시아 원림문화의 진정한 미적 표현과 정서, 나아가 미적 체험을 경험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원림을 보고 느끼기 이전에 읽고 이해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163 페이지)

 

원이라는 개념은 회화에서 추구하는 미학적 사유이면서 동시에 공간 구축에도 적용되는 예술적 사고방식이다.(167 페이지) 중국 원림 속 자연이 인간에 의한 자연이라면 한국 원정에서 자연은 자연 속의 자연이라 할 수 있다.(175 페이지)

 

일본의 정원은 불교의 선종과 관련이 깊다.(175 페이지) 일본 정원에서 자연은 인간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관조(觀照)의 대상이다.(176 페이지)

 

선비가 관직에서 물러나 칩거하면 은둔이고 세속을 멀리해 별서(別墅)를 짓고 살면 복거(卜居)라고 한다.(203 페이지)

 

한국에서 조선시대를 풍미했던 귀거래(歸去來)와 도원경(桃源境)에 대한 향수는 점차 그 의미가 약해지고 있다. 같은 귀향이지만 과거에는 정치적, 사회적, 제도적 모순에 대한 해결책으로 귀거래를 택한 반면 지금은 건강, 가족, 직업, 안전, 소통 등 새로운 가치에 대한 인간성의 회복이라는 목표에 따라 움직인다.(286 페이지)

 

현대 정원이 어떤 방향으로 진화할지를 예측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사회가 변하고 문화적 가치가 변화하는 보편적 추세에 따라 서서히 변할 것은 틀림 없다.(287, 288 페이지) 정원이 자연을 가두고 그 속에서 자연을 다시 생각하는 공간적 장치라는 개념은 아마도 앞으로 변하지 않는다고 전제할 때 미래의 정원에서 시적 회화적 풍경은 어떻게 전개될지가 곧 미래 정원의 형식과 내용이 될 것이다.(288 페이지)

 

저자는 21세기에 들어와 세계적으로 각국의 문화가 거로 충돌하고 섞이는 정도가 심대하다고 전제하며 그러므로 한 나라의 원림문화를 독자적, 배타적으로 말하는 것은 동아시아의 원림미를 조감하는 데 큰 의미가 없다고 결론짓는다. 상대적으로만 구별할 수 있는 미묘한 형식과 상징의 차이만이 있기 때문이다.(293 페이지)

 

물론 저자가 말했듯 사람들은 한마디로 그 특징을 말하고 듣기를 원한다.(293 페이지) 동아시아의 원림에 영향을 미치는 기본적 요소는 종교이다. 중국의 경우는 도가 사상이 지배했고 일본은 불교 특히 선불교가 크게 작용했고 한국은 그 위에 유가적 가치관이 덧씌워져 발전해왔다.(294 페이지)

 

원에는 두 개의 얼굴이 있다.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광은 그림 같다는 느낌으로 통하고 이것은 곧 원림에서 회화적 풍경으로 인식된다. 그런가 하면 어느 순간에는 마음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경우가 자주 있는데 이것이 바로 시적 풍경이다. 원정에서는 이 두 얼굴이 서로 교차한다.(295 페이지)

 

그러나 시와 그림이 그 자체로 우리 마음속에 끝까지 남지 않듯 정원미를 음미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인간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다. 이것은 예술이 인간에게 주는 정신적 가치와 동일하다.(295 페이지)

 

원정에서 자연은 그냥 산천에 펼쳐지는 구름과 산과 강과 꽃나무 그대로가 아니다. 오히려 이것들이 장인(匠人)의 손에 의해 어떻게 달리 아름답게 창조되었는가를 발견하는데 그 가치가 있다.(296 페이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모 루덴스 - 놀이하는 인간
요한 하위징아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과 동물에게 다 같이 적용되며, 생각하는 것이나 만드는 것 만큼 중요한 것이 놀이이다. 놀이에는 뜻이 있다. 여기에서 호모 루덴스란 개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생각하는 것이란 호모 사피엔스, 만드는 것은 호모 파베르를 염두에 둔 말이다. 놀이는 본능으로도, 의지나 정신으로도 설명할 것이 아니다.

 

물론 놀이를 인정함에 따라 우리는 정신을 인정한다. 놀이는 총체성으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놀이는 어떤 것의 목적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한다. 세계가 맹목적인 힘의 작용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된다고 보면 놀이는 말 그대로 하나의 과잉(過剩: superabundance)이 된다.

 

abundance(과잉)란 단어의 마지막 부분 즉 dance에 눈이 간다. 다시 말해 superabundance(놀이를 대표하는) dance냐가 관건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놀이는 비이성적인 것이다. 신화도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놀이이다. 온갖 분방한 상상 작용에도 불구하고 환상적인 정신은 진실과 농담의 경계선 위에서 놀이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진정한 의미의 순수한 놀이가 문명의 주된 기초 중 하나라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웃는 동물이란 개념이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개념보다 인간을 더 잘 묘사할 수 있다. 놀이는 지혜와 어리석음의 대립으로 설명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참과 거짓, 선과 악의 대립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놀이는 자발적인 것이다.

 

명령에 의한 것은 이미 놀이가 아니다. 놀이는 언제든 연기될 수 있고 중지될 수 있는 여분의 것이다. 놀이는 문화적 기능이 있기에 사회적으로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놀이는 제한된 시간과 장소 속에서만 존재한다. 놀이는 질서를 창조하며 질서 그 자체이다. 놀이는 불완전한 세계 속으로, 혼돈된 삶 속으로 일시적이고 제한된 완벽성을 가져다준다.

 

놀이는 우리가 사물 속에서 인식하고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두 가지 성질 즉 율동과 조화로 충만해 있다. 제의(祭儀)는 좀더 신성하고 좀더 성스러운 진지함이다. 그런데 이것이 놀이가 될 수 있을까? 그렇다. 제의는 참여자들을 다른 세계로 옮겨놓는다는 점에서 놀이이다.

 

플라톤은 성스러움을 놀이라고 불렀다. 이는 물론 신성모독이 아니라 놀이의 개념을 정신의 최고 영역에까지 올린 것이다. 놀이가 제한된 공간에서 행해지듯 제의도 성스러운 영역에서 행해진다. 공동체의 종교의식이 고귀하고 진지하듯 무의식적이고 순수한 진짜 놀이도 매우 진지하다.

 

놀이는 자유분방함과 무아경의 두 극단 사이에서 움직인다. 음악은 시간과 공간의 엄격한 한계 내에서 시작되고 끝나며 반복할 수 있고 그 본질은 질서, 율동, 변화로 구성되어 있으며 청중과 연주자를 동시에 일상적인 생활을 벗어난 기쁨과 평안의 세계로 데려다주기에 청중과 연주자를 매료하고 사로잡는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음악을 놀이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은 완전히 납득 가능한 이야기이다. 놀이의 반대어는 진지함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두 반대어를 상호 보완적으로 결합시키는 것이다. 가령 놀이 진지함(Spiel Ernst)이란 말이 그것이다. 놀이는 문화로 변하지 않는다. 다만 문화의 초기 단계에 놀이적 성격을 갖는다.

 

하나의 문화가 진행됨에 따라 놀이와 놀이 아닌 것 사이의 본래적 관계는 정적인 상태로 남아 있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놀이 요소는 대개의 경우 종교 의식 영역으로 흡수되어 버리면서 점차 그 세력을 잃는다. 물론 어느 시대에든, 고도로 발전된 문명에서까지도 놀이의 본능은 매우 강력한 힘으로 되살아나서 개인이나 대중을 거대한 놀이의 황홀경 속에 빠져들게 할 수 있다.

 

저자는 포틀래치를 단순한 투기(鬪技) 본능으로 보며 그것에 엄격한 놀이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문화는 놀이로서 시작되는 것도 아니고 놀이로부터 시작되는 것도 아니고 다만 놀이 속에서 시작된다. 놀이는 문명보다 더 오래되고 원초적인 것이다. 라틴어에서 성스러운 경기가 놀이라는 단순한 말로 불렸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모든 문화에서 투기적 관습으로 특징지어지는 놀라운 유사성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분야는 인간 정신의 영역 즉 지식과 지혜의 분야이다. 시를 짓는 것도 놀이 기능이다. 그것은 정신의 놀이터 즉 정신이 그것을 위해 창조해주는 그 독자의 세계 속에서 진행된다.

 

이 속에서 사물은 일상생활에서 갖는 외관과는 매우 다른 외관을 갖는다. 시는 진지함 너머에 즉 어린이, 동물, 미개인, 예언자가 속하는 보다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수준, , 매혹, 엑스터시, 웃음의 영역에 속한다.

 

고대 시인의 진정한 명칭은 라틴어로 바테스(Vates) 즉 악마에 홀린 사람, 신들린 사람, 헛소리 하는 사람이다. 이런 자격은 동시에 특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 원초적 문화 창조 능력에서 볼 때 시는 놀이 속에서, 놀이로서 탄생한다. 그러나 항상 그 신성함에도 불구하고 쾌활한 탐닉, 환락, 흥겨움과 접해 있다.

 

시적 능력은 사교적 모임, 씨족과 부족, 종족 사이의 격렬한 논쟁 속에서도 개화한다. 순수한 미적 욕구의 만족과는 멀리 떨어진 시라는 형식이 공동 사회의 생활을 위해 필수적이고 중요한 것들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상태는 오늘날의 진보된 문화 속에서도 그대로 간직되어 있다.

 

세계 어디서나 시가 산문에 선행한다. 진지한 것, 성스러운 것을 표현하는 적절한 수단은 시 뿐이다. 신화는 어떤 형식을 취하든 항상 시이다. 시와 놀이의 유사성은 외형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창조적 상상력의 구조에서도 그 유사성은 나타난다. 시구의 전환, 주제의 전개, 분위기의 표현 등에는 항상 놀이 요소가 작용한다.

 

그 자체가 경쟁의 한 형식인 시는 고대의 수수께끼 기합과 거의 구별할 수 없다. 후자는 지혜를 만들고 전자는 아름다운 언어를 만든다. 시적 언어가 이미지를 다룬다는 것은 이미지를 가지고 논다는 것이다. 어떤 은유의 효과가 사물과 사건을 살아 있는 것과 움직임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묘사하는 것에 있다면 그와 동시에 우리는 의인화의 과정에 접어들게 된다.

 

형체도 생명도 없는 어떤 것을 한 인격체로서 묘사한다는 것은 모든 신화 형식의, 그리고 대부분 모든 시 짓기의 정수(精髓)이다. 기술적으로 하나의 표현 형식으로 간주되는 궤변법은 원시적 놀이와 많은 연관성을 갖는데 그런 연관성을 우리는 이미 소피스트의 전신인 바테스에게서 발견한 바 있다.

 

놀이와 음악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제의(祭儀), , 음악, 놀이의 관계는 플라톤의 에 쉽게 잘 서술되어 있다. 플라톤은 신들이 슬픔을 안고 살아 가도록 태어난 인간을 불쌍히 여긴 나머지 그들이 고통으로부터 잠시 쉴 수 있도록 추수 감사 축제를 제정하고 그들에게 뮤즈들의 우두머리인 아폴로와 디오니소스를 보내 그들의 친구가 되게 했다고 썼다.

 

음악에 관련된 모든 것이 놀이 영역에 머무는 것이라면 음악의 쌍둥이 자매라 할 무용은 더욱 그렇다. 놀이와 춤의 관계는 너무 밀접해서 거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이다. 춤이 그 자체 안에 어떤 놀이적인 것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놀이를 이루는 데에 절대 필요한 하나의 구성 요소가 춤이라는 말이다.

 

둘 사이의 관계는 직접적인 참여의 관계이며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춤은 특수한 형식의 놀이이며 특별히 완벽한 형식의 놀이이다. 조향 예술의 경우에는 놀이와의 연관성이 시, 음악, 춤의 경우처럼 명확하지 않다. 질료의 구속을 받으며 또한 그 질료가 허용해주는 형태의 한계에 매인다는 사실 때문에 조형 예술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놀이가 될 수 없으며 음악과 시에는 허용된 천상의 공간으로 날아오를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춤은 변칙적이 위치에 있다. 춤은 음악적이며 동시에 조형적이다. 리듬과 동작이 주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음악적이며 불가피하게 물질에 매이기 때문에 조형적이다. 춤은 조각과 마찬가지로 조형적 창조이지만 순간적으로만 그렇다.

 

제의, 예술, 놀이 사이의 언어적 연관성을 나타내는 말이 아갈마이다. 환희, 기쁨, 축하하다, 빛나게 하다, 자랑하다. 기뻐하다, 치장하다, 장식, 내보이는 물건, 귀한 물건, 입상(立像), 특히 신상(神像)을 의미한다. 저자는 서유럽 문명을 놀이의 아종(亞種)으로 분류한다.

 

저자는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은 어느 정도까지 놀이 형식을 유지하고 있는지 묻는다. 저자는 스포츠는 이제 점점 체계화하고 조직화되어 순수한 놀이적 특질의 어떤 부분이 상실되었음을 지적한다. 프로페셔널의 정신은 이제 진정한 놀이 정신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움과 내키는 대로 하는 태평스러움을 상실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아마추어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따라서 아마추어들은 열등 콤플렉스에 시달림으로써 스포츠를 진정한 놀이 영역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만들어 마침내 스포츠는 독립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정신과 손이 가장 자유롭게 움직이는 분야에서 특히 놀이 기능이 작용한다.

 

놀이는 도덕적 규범의 영역 바깥에 놓여 있다. 놀이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의지가 우리에게 명하는 어떤 행동이 진지한 의무인가 또는 놀이로서 적법한가를 결정해야 한다면 그때에는 우리의 도덕적 양심이 즉시 그 시금석을 제공할 것이다. 행동하려는 우리의 결심 속에 진실, 정의, 동정, 용서가 포함되어 있다면 그 행동이 놀이인가 진지한 것인가, 하는 우리의 걱정스러운 의문은 곧 무의미해지고 만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의 저자 부르크하르트가 중세와 르네상스를 명확하게 대비시킨 데 비해 하위징아는 중세의 가을에서 르네상스를 중세의 결실로 보았다.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는 문화사 연구의 자연스런 귀결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uperabundance vs dance

 

세계가 맹목적인 힘의 작용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된다고 볼 경우 놀이는 하나의 과잉(superabundance)이 된다. 요한 하위징아가 놀이하는 인간(호모 루덴스)’에서 한 말이다.

 

하위징아는 춤만이 아니라 시, 음악, 운동 등 여러 가지를 놀이로 보았다. 인간과 동물에게 다 같이 적용되며, 생각하는 것이나 만드는 것 만큼 중요한 것이 놀이이다. 놀이에는 뜻이 있다.

 

superabundance(과잉)란 단어의 뒷 부분 즉 dance에 눈이 간다. 다시 말해 superabundance(놀이를 대표하는) dance냐가 관건이 아닐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