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전문가가 한 사상가의 지적 계보와 인연 등에 초점을 두고 강연을 진행하는 세션 중 두 번째 시간에까지 참석했다. 어제 강연자는 해석학(解釋學)에서 말하는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지평 융합, 그리고 전이해(前理解) 등의 개념을 언급했다.

 

사상가가 처했던 삶의 자리와 시대 정신을 알아야 그에 대한 온전한 조명(照明)이 가능하다는 것이 어제 강연자의 결론 중 하나였다.

 

어제 강연자의 지도 교수인 김경재 교수에 의하면 전이해는 어떤 텍스트를 대할 때 독자 또는 수용자가 이미 가지고 있는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특정 시각을 말하는 바 이는 편견, 오해, 아전인수격 해석 등과 관련된 말인 한편 내용 자체를 이해하도록 이끄는 단초(端初)가 되기도 한다.

 

나는 이 말을 들으며 준비의 필요성을 실감했다. 강연을 들으려면 관련 책 두, 세권 정도는 읽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질문도 하고 깊은 이해의 길에 들어설 수 있고 (필요하다면) 책임 있는 비판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 달 세 번째 강연자로 나설 양현혜 교수의 시간(526)에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말한 대로 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책을 찾다가 이 분이 쓴 우치무라 간조, 신 뒤에 숨지 않은 기독교인와 번역서인 탕자의 정신사’, ‘동화의 숲에서 절대자를 만나다’, ‘메르헨 자아를 찾아가는 빛등의 흥미로운 책을 알게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번역한 세 책이 모두 정치학과 유럽 정치사상사를 전공한 미야타 미쓰오의 책이기 때문이다. 미쓰오의 책들은 내 관심사와도 관련되었다.

 

동화의 숲에서 절대자를 만나다가 특히 그렇다. 성인들에게 동요 작가 윤극영에 대해 말해야 하는 내 과제에 단서가 될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좋은 책을 만나는 것은 이렇듯 각별한 느낌을 불러 일으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주역(周易)의 역(易)이 상형 문자로는 도마뱀을 형상화한 것이고 회의 문자로는 일(日)과 월(月)을 합한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일과 월 부분은 처음 듣는 이야기이다. 용(用)이 일과 월의 합성어라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위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 일과 월을 합하면 명당(明堂)의 명(明)이 된다. 주역의 관점으로 보는 세상은 이렇듯 재미 있는 만큼 어렵다.

문제는 주역을 과도하게 의미화하는 것이다. 초가 삼간이란 말이 있다.

한 주역 애호가가 왜 삼간인가, 하는 물음을 던졌다. 주역 8괘 때문에 삼간을 기본으로 설정했다는 것이 그의 답이다.

세칸짜리 집은 기둥이 여덟개가 나온다. 그는 이 여덟개의 기둥이 8괘를 염두에 두었기에 나온 것이라는 말을 했다.

그런데 사실은 가난하거나 신분이 낮아 세칸짜리 집을 지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주역에 8괘와 삼간 집의 연관성을 언급한 부분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8괘와 삼간 집을 연결짓는 것은 추정한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 순리가 아닐지?

근거 없이 확정적으로 말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는 물론 주역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 생각인지 아닌지, 추정인지 근거가 있는 것인지 확실히 밝히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박서원 시인의 시전집(최측의농간 출판)을 받았다. 최측의농간으로부터 받은 열두번째 책이다.

시인은 1960년에서 2012년까지 살았고 경기 양평군 양동면 소재의 한 수목원에서 수목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책 뒷편에 황현산 평론가의 ‘박서원을 위하여‘란 제목의 해설이 있다.

˝누가 시라고 하는 것을 주어서 읽어보았는데, 이런 것을 나도 쓸 수 있겠다 싶어서 썼고, 그걸 투고했더니 당선되었어요˝라고 했다는 시인이다.

‘부서진 십자가‘란 시를 읽는다. ˝주여,/ 나에게 聖女가 되길 요구하지 마세요.//갈비뼈 앙상한 십자가 허리/ 망치로 내리친다 차례대로 ..../ 손목...무릎..발목...˝

우에노 치즈코는 여성을 성화(聖化)하는 것도 여성 혐오라 했다. 그 생각을 하며 시를 읽게 된다.
이 시인의 시를 읽을 때는 엘가의 슬픈 곡(첼로협주곡)을 들어야 할 것 같다. 슬픔 때문에..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반만 맞는 것이 될 터이다. 그의 짧은 삶, 신산(辛酸)했던 삶을 보면 슬픈 곡을 들어야겠지만 시를 보면 슬픔을 의한 곡보다 초현실주의적 그림이나 아트록을 들어야 할 것 같다.

심호흡을 하며 읽어야 할 시, 그리고 시인의 삶.. 힘겨운 시간이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거칠게 말하면 우리나라에 나와 있는 주역(周易) 책은 둘로 나뉜다. *** 님의 해설서와 나머지 주역 해설서들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문법을 아무리 정밀하게 적용해도 그 의미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이 수두룩한 책이 바로 ’주역‘이다.“, ”’주역‘은 단순한 유교 경전이 아니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주역‘은 중국 고대사회에서 오랫동안 여러 사람들이 연구하고 정리한 성과물을 집대성한 책이며, 역사의 흐름과 함께 변화해 온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저자는 8괘가 먼저 만들어지고 본문(괘사: 卦辭)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본문이 만들어진 후 누군가 후에 괘상을 덧붙인 것이라고 본다.

저자는 주역 첫 괘인 건(乾)괘의 건을 하늘의 절대성, 시간의 절대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그 뒤에 이어 나오는 원형이정(元亨利貞)의 원(元)은 혼돈의 시기로, 형(亨)은 카오스 다음에 오는 창조의 시기로, 리(利)는 왕성한 활동과 결실의 시기로, 정(貞)은 소멸의 시기로 풀이한다.
그리고 현룡재전(見龍在田) 이견대인(利見大人)에서 전(田)은 공간(空間), 인(人)은 인간(人間)으로 푼다.

건(乾)과 함께 말하면 이 부분에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조화와 공존을 강조하는 사상이 집약되어 있는 것이다.

내가 읽은 ’여성혐오, 그 후 - 우리가 만난 비체들‘과 ’여성의 정체성, 어떤 여성이 될 것인가‘의 저자인 철학자 이현재 님을 비롯 물리학, 과학철학, 철학 등의 연구자들이 함께 쓴 ’공간에 대한 철학적 이해‘란 책이 있다.

공간형이상학에서 공간인문학으로, 생성의 보모로서의 공간: 플라톤의 코라, 공간의 선험성: 칸트의 순수직관의 형식으로서의 공간, 화이트헤드의 상대적 시공간 등의 장이 말할 수 없이 흥미를 자극하는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 공간의 다면적 풍요로움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주역을 읽으며 공간론을 읽기, 참 매력적인 일이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무를 심은 사람 - 개정2판
장 지오노 지음, 최수연 그림, 김경온 옮김 / 두레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무를 심은 사람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 열렬한 평화주의자가 된 장 지오노의 사상이 집약된 소설이다. 장 지오노는 1895년에 태어나 1970년에 세상을 뜬 프랑스의 작가이다. 이 책의 출간 연도는 1953년으로 이 시기는 환경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이전이다.

 

그렇기에 환경 문제에 대한 작가의 과학적 또는 철학적 의식이 반영되지 않았다. 하지만 깊은 감동을 준다는 점에서 그런 의식의 반영 이상이라 할 수 있다. 환경 문제를 본격 거론한 책으로 꼽히는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1962년 나왔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작품의 화자는 여행길에 나선 사람이다. 그가 여행한 곳은 한때 인간이 살고 있었으나 현재는 모두 마른 거친 풀이 자랄 뿐인 어느 광활한 황무지이다. “알프스 산맥이 프로방스 지방으로 뻗어 내린 아주 오래된 산악지대였다.

 

그곳은 야생 라벤더 외에는 아무 것도 자라지 않는 땅이었다.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6월의 어느 아름다운 날 그는 그곳에서 한 사람이 홀로 나무를 심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양치기였다. 화자는 물을 찾을 수 없어 고생을 한다.

 

작품에는 시간 배경이 약 40년 전으로 설정되어 있다. 양치기는 화자에게 도르래로 깊은 천연의 우물에서 건져올린 물을 건넸다. 뜻 밖에도 그곳은 숯을 만들어 파는 나무꾼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놓고 경쟁했다. 경쟁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양치기는 도토리(떡갈나무)를 심었다. 그가 나무를 심는 땅은 자신의 땅이 아니었다.

 

그는 그곳이 누구의 땅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는 3년 전부터 나무를 심어 왔다. 그가 심은 것은 도토리 10만개였고 그 가운데 2만 그루의 싹이 나왔다. 그는 자신의 나이를 55세로 밝혔다. 엘제아르 부피에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다.

 

아들과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고독 속으로 물러나 양, 개들과 함께 한가롭게 살아갔다. 그는 너도밤나무 재배법을 연구해 오고 있으며 자작나무도 심을 것이라 했다. 화자와 양치기는 헤어지는데 그 이듬해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다.

 

화자는 5년간 전쟁을 치르고 다시 양치기를 만난다. 그 사이 그는 양들을 내 마리만 남기고 그 대신 100통의 벌을 치게 되었다. 전쟁 전 양치기가 심은 나무는 열 살이 되어 키가 두 사람보다 컸다. 화자는 인간이란 파괴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는 하느님처럼 유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화자가 전쟁을 치르던 때 양치기가 심은 나무는 자작나무 숲이 되었다. 화자는 창조란 꼬리를 몰고 새로운 변화를 몰고 오지만 엘제아르 부피에는 그런 데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고 썼다. 화자는 늘 말라 있던 개울에 물이 흐르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엘제아르 부피에가 1년에 걸쳐 심은 1만 그루의 단풍이 모두 죽기도 해 그는 단풍나무를 포기하고 떡갈나무들보다 더 잘 자라는 너도밤나무를 심었다. 엘제아르 부피에는 75세의 나이에 집에서 12km 떨어진 곳에까지 가 너도밤나무를 심었다.

 

55세부터 계산해도 그가 나무를 심은 세월은 20년이 넘었다. 화자는 엘제아르 부피에를 하느님이 보내준 일꾼이라 칭했다. 엘제아르 부피에가 조성한 숲은 19392차 세계대전으로 심각한 위기를 겪는다. 당시는 많은 자동차들이 목탄(木炭) 가스로 움직였다. 그러나 그 나무들은 경제성이 없어 살아 남았다.

 

엘제아르 부피에는 1차 대전에 마음 쓰지 않았던 것처럼 2차 대전에도 마음을 쓰지 않았다. 화자는 1946687세의 엘제아르 부피에를 마지막으로 본다. 엘제아르 부피에의 노고로 인해 숲이 만들어졌고 마을이 살아났다.

 

화자는 부활의 상징이란 말을 한다. 화자는 한 사람이 오직 정신적, 육체적 힘만으로 황무지를 가나안 땅으로 만든 것을 보며 인간에게 주어진 놀라운 힘을 느낀다. “위대한 혼과 고결한 인격이란 말은 엘제아르 부피에에게 하기에 충분한 말이 아닐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