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해 일어난 민간인 학살을 부정하려는 사례는 한국의 인터넷 상에서 찾기 쉽다. 특히나, 나무위키를 비롯한, 반공주의적 색체가 강한 사이트는 ‘베트남 전쟁/한국군/논란’이라는 문서까지 만들어 놓고, 어떻게는 베트남 전쟁 당시 벌어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부정하려는 추태를 보이고 있다. 네이버에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검색해보면, 나무위키식 주장에 영향을 받은 글들이 제법 보인다. 이런 주장을 하는 문서들에서 가장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부분은 바로 한국군에 의해 일어난 고자이 학살을 극구 부정하는 것이다.

(고자이 학살을 묘사한 벽화, 이걸 가지고 남베트남군이 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지만, 사실 물타기에 가깝다.)


고자이 학살은 1966년 2월 26일 베트남 빈딘성 떠이선현에서 일어난 학살이다. 얘기에 따르면 주민 380명을 모아놓고, 한 시간 만에 한 사람도 남김없이 학살당했다고 한다. 당시 학살을 겪었던 대다수 그 지역 베트남 주민들은 학살의 주체를 한국군 소속 맹호 부대로 규정하고 있다. 2007년 오마이 뉴스에서 연재했던 베트남 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 관련한 기사를 보면, 당시 한국군이 어떻게 학살을 벌였는지 나와 있다.

(학살 피해자 응우옌떤런씨, 2016년 뉴스타파에서 만든 다큐멘터리에도 나왔고, 2015년에 학살을 증언하러 한국을 방문했었다.)


(응우옌떤런씨와 구수정 박사)


(빈딘성 박물관에 있는 고자이 학살 희생자의 사진.)


1966년 2월 26일 아침. 평화로운 베트남의 한 마을에 포탄이 날아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많은 헬기가 마을의 하늘을 가득 메웠으며, 녹색 전투복을 입은 한국군이 마을로 밀려 들어왔다. 그렇게 해서 한 시간 동안 학살이 자행됐고, 모두 380명의 베트남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한 베트남 관리는 이 학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한국군은 주민들을 언덕위에 몰아 놓은 뒤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으며, 노인들을 끈으로 묶어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내버려두고, 어린이들의 몸을 찢어 손과 발을 나무 위에 내던져 버린 경우도 있었다.”


고자이 학살이 있던 곳에는 전쟁 이후 마을 주민들이 만든 큰 위령비가 있다. 이 마을에 있는 위령비에는 희생자 380명의 이름과 나이가 새겨져 있다. 아래의 내용을 보자.


“침략자 미국에 대한 원한을 깊이 새긴다. 1966년 2월 26일 남조선 군대가 미제국주의 지도하에 380명의 무고한 주민을 학살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 지역에서 무차별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학살을 부정하려는 이들은 현재 고자이 학살 지역에 그려진 벽화를 문제를 삼고 있다. 그 이유는 벽화에서 묘사한 한국군의 군복 마크가 한국군의 맹호부대가 아닌 당시 남베트남군이던 레인져 부대의 마크라는 것이다. 한국군의 맹호부대 마크는 줄무늬가 있는 호랑이이지만, 벽화에 그려진 마크는 당시 남베트남군 특수부대인 레인져 부대가 사용하던 흑표범 마크다. 즉 그러한 점을 들어 학살의 주체를 한국군이 아닌 남베트남군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맹호부대 마크와 남베트남군 레인져 부대 마크, 이걸 가지고 학살 부정론자들은 한국군의 무고함을 주장하고 있는 중이며, 이는 나무위키 같은 반공 성향의 인터넷 사이트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소 함정이 있다. 그리고 이렇게 반론도 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과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학살당할 뻔한 피해자가 굴뚝 개수를 잘못 기억한다고 해서, 나치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즉 그러한 점에서 이러한 주장은 면피용에 가깝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상조사가 아직 이루이지지 않은 상태에서 남베트남군이 했다고 주장하는 건 올바르지 못하다.

(빈안 학살 50주년 추모제)


그렇다면, 학살에 대한 묘사는 과연 거짓이고, 한국군은 그러한 학살로부터 무고한 것일까? 이러한 얘기는 한국군이 해방 후 제주 4.3 사건이나 여순사건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국민 보도연맹 학살이나 거창 양민학살 사건 등을 보면, 베트남인들이 증언한 한국군에 대한 묘사는 결코 거짓이 아니다. 실제로 한국군은 그러한 학살의 경험이 있고, 주월한국군사령관이던 채명신만 하더라도 제주 4.3 사건에서 진압작전에 동원됐던 인물이다. 즉 박정희 정부의 월남 파병은 그러한 연속성을 가진 상황에서 진행된 역사다. 따라서 한국군이 민간인 학살을 하지 않았다고 변명하는 것은 말 그대로 현실 부정이다.


2016년 방송채널인 뉴스타파에서 제작한 ‘베트남 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 관련 영상을 보면, 빈딘성 박물관에서 해설하는 한 베트남 여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사진은 1965년에 뀌년(Quy Nhon) 항구에 상륙했던 한국군의 모습입니다. 이때부터 빈딘성에서 학살이 시작됐습니다. 뀌년하고 빈딘성에 들어온 후, 한국군들은 북베트남군을 다 없애기 위해서 ‘깨끗이 불태우고, 깨끗이 없애고, 깨끗이 죽인다’는 전략으로 굉장히 많은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한국군은 여성들을 강간하고 나서 음부에 칼을 꽂아서 죽이기도 했습니다. 아이들 위에 지푸라기를 덮어서 산 채로 태워 죽이기도 했습니다. 한국군들은 후잉티본 할머니 집의 방공호에 숨어 있던 17명의 주민들을 발견했을 때, 그 안으로 총을 난사했습니다. 그 후에 이 방공호 안에 침투하기 위해 지푸라기 같은 것들을 밀어 넣고 불을 질렀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산 채로 불태워졌습니다.”


제주 4.3 사건 관련 진상조사 보고서에도 이러한 잔혹행위들이 무수히 많이 기록되어 있다. 한국군이 이러한 잔혹행위로부터 무고할 것이라는 주장은 우리의 비극적인 현대사를 되돌아 볼 때, 설득력이 떨어진다.

(고자이 학살을 반성했던 참전용사 이우석씨)


(고자이 학살 희생자 380명의 명단)


이후 채명신이 집필한 자서전인 <베트남 전쟁과 나>에서도 1966년 당시 한국군의 학살 피해의 그늘을 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1966년 1월에서 3월까지 대략 6주동안 벌인 작전으로 총 1,004명의 베트남 민간인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고, 이걸 빈안 학살이라 부르기도 한다. 빈안 학살은 모두 15개 지점에서 벌어진 학살로, 1966년 2월 26일에 일어난 고자이 학살도 그 중 일부다. 채명신 장군은 회고록에서 1966년 2월 26일부터 28일까지 전개된 맹호부대의 번개작전을 회고했다. 아래는 <베트남 전쟁과 나> 288쪽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작전 기간 중 전과는 적 사살 92명, 포로 33명으로 기록되었지만, 소총은 불과 4정 노획으로 그쳐 이 문제에 대한 심각한 분석이 요구되었다. 왜냐하면, 무기가 너무 없다면 사살자의 일부가 양민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기갑연대의 이번 작전지역인 빈케군 빈호아강 북방 평야지대에 산재해 있는 부락은 거의가 베트콩의 전략촌이기 때문에 사살자가 민간인이 아닌 것은 거의 확실하다. 즉 교전 중 사살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주목해야할 점은 바로 “심각한 분석이 요구되었다.”는 점이다. 작전상 맹호부대는 대규모의 군사작전을 벌였는데, 기록된 베트콩 사살 숫자에 비해 노획된 소총 숫자가 불과 4정 밖에 안 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심각한 분석이 요구된다고 말한 것이다. 물론 채명신은 민간인이 아니라고 확신적인 발언을 했는데, 채명신 입장에선 학살의 가능성을 굳이 인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트콩과 민간인의 구분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전개된 베트남 전쟁의 특수성을 생각해보면, 이 당시 전과보고는 정직하지 못했다. 사살된 시신만 가지고 전과를 보고하는 바디 카운트(Body Count) 방식인데, 당연히 여기에는 폭격으로 몸이 산산조각 나거나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된 시체는 포함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적군 사살이 비교적 적게 나올 가능성도 무시할 순 없다.

(빈안 학살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구수정 박사)


또한 앞에서 말한 민간인 희생을 생각해보더라도, 380명의 민간인이 죽었음에도 기록을 하지 않는 경우가 높다. 당장 1년간 미군에 의해 철저히 은폐되었던 미라이 학살(My Lai Massacre)만 보더라도, 504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지만, 전과보고는 120명의 베트콩 사살로 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해보자면, 고자이 학살이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로 규정해볼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일각에서는 고자이 학살 지역에 한국군이 있지 않았다고 변명을 하지만, 이것은 2017년 미국에서 방영했던 켄 번즈(Ken Burns) PBS Vietnam War만 보더라도 반박이 가능하다. 아래는 PBS Vietnam War Episode 4에서 나왔던 내용 중 일부다.


“주월미군사령관인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2만 명으로 구성된 미군과 남베트남군 그리고 한국군을 보내, 빈딘성 지역을 휩쓸어 적과 그들의 보급선을 찾아내고자 했다. 먼저 전단을 뿌리고 대형 스피커로 방송하길 “헬기에 사격을 가하면 가혹한 운명이 기다릴 것”이라고 했다. 집을 떠나라고 권고했으며, 항복하는 베트콩에게는 안전을 보장했다. 그러고는 공군과 포병대를 불러 마을을 산산조각 냈다. 이 전쟁 최초의 대규모 베트콩 토벌 작전이었다. 공격은 42일간 지속됐고, 미 육군 보고에 따르면 적 2,389명이 죽었다. 웨스트모어랜드는 기뻐했지만, 현장 지휘관들은 미군이 화력을 그렇게 쏟아 부었는데도 북베트남 정규군 대부분이 중부고원 지대로 도망간 것을 우려했다. 이 작전은 민간인 10만 명을 고향에서 쫓아냈다.”


PBS Vietnam War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미군과 남베트남군 그리고 한국군은 당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난 곳에서 군사작전을 전개했다. 1966년 2월 26일날 일어난 고자이 학살도 주월미군사령관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가 주도한 수색과 섬멸 작전(Search and Destroy Campaign) 과정 중 일부였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즉 고자이 학살은 이 군사작전 중 일부였으며, 군사적으로 보고되지 않은 민간인 학살이었다. 또한 위에서 인용한 빈딘성 박물관 해설사의 내용은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만주에서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과 신사군을 토벌하기 위해 전개했던 삼광작전”과 같은 비슷한 군사작전이 진행되었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베트남 전쟁 당시 전쟁에 참여한 군 지도부는 이러한 경험을 일본군과 한국군에서 쌓은 인사들이었으며, 채명신 또한 제주 4.3 사건 당시 진압군이었다. 


따라서 고자이 학살에서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은 분명히 있었으며, 한국군의 이러한 학살은 과거 일본군에서 벌인 학살과 해방 정국과 한국전쟁에서 벌인 학살의 연장선상이라는 점에서 봐야한다. 그리고 한국군에 있었다던 광복군 출신들도 엄밀히 따지자면, 양민학살이라는 측면에선 일본군과 크게 차이가 없는 중국 국민당군 출신들이었다. 중국 국민당군 출신이자 광복군 출신인 최덕신이 한국전쟁 당시 거창 양민학살을 자행한 인물이었다는 점은 이를 입증해준다.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은 분명히 있었고, 고자이 학살도 한국군에 의한 것이었음은 여러 가지 근거를 통해 생각해보면, 한국군의 잔혹성을 보인 케이스며, 남베트남군이 했다는 변명은 물타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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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이승만 정부의 단독정부 수립에 맞서제주도에선 봉기가 일어났다제주도에서 봉기가 일어나자미군정과 이승만은 이를 막고자 했다그러나 미군정과 이승만의 정책은 제주도를 피바다로 물들이는 정책이었고이에 따라 상상을 초월하는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했다최소 3만 명 이상의 제주도민이 제주 4.3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미군정과 이승만이 파견한 진압군에 의해 학살당했다그러나 이러한 숫자가 다소 적게 추산되었다는 의혹을 받기도 하며, 6만 명 정도가 이들에 의해 죽었다는 통계도 있고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의 경우 그 숫자가 8만 명일 수 있다고 2016년 제주도에서 열린 학술 포럼에서 주장하기도 했다.

(제주도에 방문하여 진압군을 사열하는 대통령 이승만, 당시 이승만은 제주도 진압을 명분으로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러한 숫자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제주도 인구 최소 1/4이 학살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이다학살당한 이들의 수치가 보여주둣이제주도는 1948년부터 1949년 내내 섬 전체가 피바다였다그러나 제주 4.3 사건 당시 크게 얘기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그것은 바로 미군정과 이승만이 파견한 진압군 지휘관들의 출신성분이다놀랍게도 제주 4.3 사건 당시 진압의 책임을 맡았던 주요 지휘관이었던 박진경최경록송요찬함병선유재흥 등은 모두 일본군 출신이었다일본군 출신인 이들은 일본군에서의 경험 덕분에 진압군으로 발탁될 수 있었다.

(제주 4.3 봉기를 진압했던 이들이 했던 발언)


(현재 제주4.3평화박물관에 있는 묘지)

 

박진경은 일본군 학병 출신으로 태평양 전쟁 말기 제주도에서 일본군 장교로 근무에 제주도에 구축된 진지구조와 지형에 익숙했다박진경이 암살당한 이후 부임한 11연대장 최경록은 일본군 지원병 1기 출신으로 태평양 전쟁 당시 실전경험이 풍부한 것으로 확인된다그는 일본군 제78연대에서 하사관 후보생 시험에 합격한 뒤 군조 대 일본 육사시험에 합격해남태평양의 뉴기니에서 전투를 하다 종전이 돼 준위로 귀국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심지어 그는 1989년 주일대사로써 일본 산케이신문에 기사를 기고 했는데그 기사에는 일본은 자위대의 명칭을 일본국군으로 바꾸고 당당히 군사력을 강화해 아시아의 방파제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썼던 인물이다.

(4.3 사건 당시 토벌대 사령관이던 유재흥, 놀랍게도 한국말을 잘 못했다고 한다.)


(4.3 사건 당시 암살당한 박진경을 대신해 부임한 최경록, 이후 주일본대사관을 지냈던 그는 1989년 일본 자위대를 칭송하는 글을 산케이 신문에 실었다가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1960년 4.19 혁명 때 이승만의 진압 명령을 거부했던 송요찬의 경우 일제시대 당시 일본군지원병훈련소에서 조교생활을 하다가 조장(상사)까지 진급한 일본군 지원병 출신이다2연대장 함병선도 제주도 토벌작전을 전개한 전임 지휘관들과 마찬가지로 일본군 지원병 출신이며낙하산 부대에서 근무한 경험을 가진 일본군 준위 출신이다. 2연대 출신 최갑석은 함병선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함 연대장은 국내 전투에는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이 참가한 군인이었다그는 국군에 들어와서는 여순사건제주4.3사건옹진지구 전투홍천 전투춘천 수복 전투, 6.25전쟁 등 한국군의 전장에는 반드시 그 복판에 있었으며 혁혁한 공을 세웠다일본군 준위와 상사 출신은 사관학교 출신보다 실전 경험이 많고그래서 전쟁의 난국에는 머리 좋은 장교들보다 이들의 용맹성·효용성이 더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함 연대장이 그 대표적인 인물인 것이다.”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으로 토벌을 지휘한 유재흥은 일본 육사 55기로 일본군 대위 출신이며해방 이하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한국어가 서툴러 통역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유재흥은 대위 시절인 1943년 이광수·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메이지 대학에서 조선인 학병 지원을 촉구하는 연설을 할 정도로 친일파 출신 장교였다주한미대사관은 그를 말과 행동이 너무 일본식이기 때문에 한국적 방식에 적응할 수 없지만동급의 한국군 장교들보다 훨씬 더 영어를 잘 구사하고 이해한다고 평가했다.

(제주 4.3 사건 당시 진압군이 적색지역으로 설정한 곳에서 속출한 희생자들을 나타내는 지도)

 

국방경비대 사관학교(육사) 4기로 1947년 9월 10일 졸업한 황인성은 임관과 동시에 동기생 4명과 함께 9연대 소대장으로 발령을 받아 1948년 1월 광주의 4연대 지불관으로 전출될 때까지 제주도 주둔 9연대 1소대장으로 근무했다그에 따르면당시 육사에서는 일본군의 보병조전’, ‘작전요무령등을 사용했고미군의 야전교범도 조금씩 번역돼 사용되기 시작했다일본군과 미군의 군사교육이 혼합된 체제였던 것이다.

(이후 진실화해조사위원회의 활동으로 발견된 학살로 희생된 이들의 유골)

 

이러한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는 건 제주 4.3 봉기 당시 미군정이 도왔던 토벌군 지휘관들이 일본군에서 경력을 쌓았던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결국 이들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서 쌓은 전투경험이 제주 4.3 봉기를 진압하는 데 이용됐고그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 희생이 발생했다무엇보다 제주 4.3 사건 당시 희생자들 중 90%가 이들에 의한 희생이었다는 점에서 우리 역사의 흑역사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허호준그리스와 제주비국의 역사와 그 후그리스 내전과 제주4.3 그리고 미국선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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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55년 4월 18일 호치민 주석이 소련 기관지인 프라우다(Pravda)에 게재한 글입니다.)


1870년 4월 22일, 오래된 전제주의 러시아 땅에서 장차 전세계 근로대중과 피압박인민의 지도자요 탁월한 교사가 될 사람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 태어났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자본주의는 그 최고이자 최후의 단계(제국주의)에 도달했으며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시대를 예고하고 있었다. 맑스와 엥겔스의 위대한 작업을 새로운 역사적 조건 속에서 훌륭하게 계승한 사람이 바로 블라디미르 레닌이었다. 개량주의자들을 비롯하여 맑스주의를 왜곡한 온갖 종류의 인간들에 대해 비타협적으로 싸우면서 레닌은 과학적 사회주의를 새로운 단계로 발전시켰다. 그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위대한 이념적 무기인 맑스주의를 더욱 풍부화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론의 정식화에 크게 공헌했다.


그는 노동자·농민동맹, 민족과 식민지 문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그리고 노동자 계급과 예속민족들의 다양한 형태의 투쟁을 지도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인 새로운 형태의 프롤레타리아당의 건설과 강화에 대한 맑스주의적 원칙을 발전시켰다. 레닌은 새로운 사회주의 혁명 이론을 수립했으며 일국 사회주의의 성공 가능성을 입증했다.


레닌은 제국주의의 억압에 신음하고 있던 근로인민들이 사회 발전의 법칙,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전체 해방운동의 각 단계에 있어서 정치투쟁의 주관적 요구와 객관적 조건들을 보다 포괄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는 피압박대중에게 복잡하게 뒤얽힌 우리 시대의 발전과정을 설명해주었다. 그는 그들에게 자신들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데 필요한 기적과 같은 무기, 즉 볼셰비즘의 이론과 전술들을 주었다.


레닌에 의해 건설된 소련 공산당은 세계 인민에게 빛나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유능한 전략가이자 전술가인 위대한 레닌의 명민한 지도하에 공산당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로 하여금 권력을 장악하고 최초로 근로대중의 국가를 건설하도록 했다. 이 국가의 건설은 인류역사의 새로운 시대를 예고했다. 평화와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민족들의 눈에 소연방은 독립과 자유의 견고한 보루로 비쳐지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소비에트 연방이 지도하는 평화와 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강력한 진영이 제국주의에 대항해서 등장했다.


레닌의 인기와 교의는 엘베강에서 태평양까지, 그리고 북극에서 적도에 이르기까지 펼쳐져 있는 평화와 민주주의 진영이 거둔 모든 성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억압받는 불행한 민족들이, 모든 나라의 공산주의자들이 높이 쳐들고 있는 레닌의 기치를 신념의 상징, 희망의 횃불로 여기고 있는 이유다. 공산주의를 건설하려는 소연방 인민의 영웅적 투쟁은 이제 모든 민족들에게 용기를 주고 있으며 그들에게 인간다운 생활을 쟁취하는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레닌이 서명한 포고령 속에 구체화되었고,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후 즉시 공포되었던 소비에트 연방 정부의 일관회된 평화정책은 이제, 광범위한 인민대중들이 평화를 보존하고 강화하기 위한 투쟁과 미제국주의자들을 추중하는 전쟁광들에 대한 투쟁에 나서도록 고취하고 있다. 레닌에 의해 제기된 민족자결, 평화공존, 타국에 의한 내정불간섭(즉 관련 당사국들의 호혜평등원칙, 이 원칙은 소연방 외교정책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 원칙들은 이제 식민지와 예속국 인민들에게 민족통일과 독립을 위한 투쟁의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평화와 독립, 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주의를 위해 싸우고 있는 전 세계 민족들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아시아 민족들에게도 레닌주의는 즐거운 삶을 가져다주는 태양과 같은 존재다. 레닌은 항상 아시아 민족들의 민족해방운동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했으며 그것을 제국주의 지배자들에 대한 전 세계 근로인민들의 투쟁의 일부로 간주해왔다. 레닌은 아시아의 각성과, 권력장악을 위한 유럽 선진 프롤레타리아트의 초기 투쟁이 세계 역사에 새로운 시대, 20세기와 함께 시작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점을 명확히했다. 1913년 블라디미르 레닌은 다음과 같이 썼다.


“전 유럽은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유럽의 모든 부르주아 계급은 중국의 모든 반동세력, 봉건세력과 결탁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새로운 아시아, 즉 수억의 아시아 근로대중은 문명국들의 프롤레타리아트를 확고한 동맹세력으로 삼고 있다. 유럽과 아시아 민족들의 해방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를 저지할 수 있는 세력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20세기 중반인 오늘날 레닌이 말한 ‘새로운 아시아’는 바로 중화인민공화국, 몽고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그리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이다. 아시아의 다른 지역들에서도 이와 같은 새로운 세력이 민족해방투쟁을 위해 일어나고 있다. 위대한 혁명 전략가의 이러한 과학적 예견들은 너무 빨리 실현되었기 때문에 제국주의 진영은 초조와 두려움에 떨고 있다! 만약 마르크스-레닌주의 당의 지도하에 아시아 예속민족들이 실질적인 성공을 거두었다면 그것은 그들이 레닌의 위대한 가르침에 따랐기 때문이다.


레닌은 동방의 혁명가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여러분들 앞에는 세계의 다른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과제가 놓여 있다. 공산주의 이론과 공동실천에 따라 그것을 유럽에는 존재하지 않는 특수한 조건들에 적용하면서, 여러분들은 농민이 기본대중을 이루고 있고 자본주의에 대해서가 아니라 봉건 잔재에 대한 싸움이 과제가 되어 있는 조건 속에서 어떻게 그 이론과 실천들을 활용할 것인지를 알아내야 한다.”


이것은, 인구의 90%가 농업에 종사하며 부패한 봉건주의와 관료체제의 잔재가 여전히 광범위하게 남아 있는 우리나라 같은 곳에서 가장 유익한 교훈이 된다. 영광스러운 중국 공산당과 명민한 지도자 모택동 동지의 지도하에 위대한 중국혁명이 승리한 것은 레닌주의 사상의 승리였다. 모택동 동지가 “10월혁명의 총성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중국에 가져다주었고, 6억 인민이 일시에 모두 제국주의의 손아귀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레닌주의를 국제주의에 적용하기 위해, 사회주의를 성취한 소비에트 연방은 식민지와 예속국가들의 민족해방운동에 끊임없이 강력한 도덕적 지원을 보냈다. 특히 일관된 평화정책과 전세계에 걸친 막중한 권위로써 소비에트 연방은, 조선과 베트남 인민들이 미제국주의와 그 동맹국들에 의해 초래된 위험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조국을 지키는 것을 크게 지원했다. 소비에트 연방의 외교활동은 조선과 베트남에서의 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베트남 인민들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정신 속에서 교육 받았기 때문에 인도차이나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싸우고 있는 프랑스 근로인민들도 포함한 전 세계 인민들의 도덕적 지원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레닌은 모든 공산당과 노동당에게 그러했듯이 우리에게도, 그의 이데올로기였던 혁명적 당의 조직 원칙, 이론, 그리고 전술이라는 값진 보석을 남겨 주었다. 레닌주의는 우리 당을 지도하고, 또한 우리 당으로 하여금 근로대중조직의 최고 형태이자 인민의 지성, 존엄성, 양심의 구현체가 될 수 있게 해 주는 강력한 이념적 힘이다. 레닌주의의 기치 아래 베트남 노동당은 우리 인민의 신뢰를 획득했으며 그들의 전위당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우리 당은 노예와 식민주의의 굴레에 결코 자신을 내맡기지 않는 우리 인민의 잠재력과 창조성을 활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레닌은 당 내부의견의 통일, 당원간의 유대, 혁명적 규율의 존중, 위대한 공산주의의 대의에 대해 변함없는 믿음, 최후의 승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체현했다. 이 모든 것들은 현재 베트남노동당에게 격려가 되고 있다. 베트남노동당은 매일 매시간 비판과 자기비판의 원칙을 적용해 왔으며, 그것을 주관주의와 자만의 정표들에 대한 투쟁에 있어 오류와 결점을 교정하는 가장 탁월한 방법으로 간주해왔다. 우리 당의 관심은 오로지 우리 인민과 조국에 대한 것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은 그 사업의 수준을 높이는 데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자신의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한편, 우리 당은 투쟁성, 정치적 역동성, 조직의 통일성, 그리고 당원들의 이념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레닌주의를 연구해 왔다.


우리 인민과 당원들은 민족해방을 위한 길고 험한 투쟁의 불꽃 속에서 단련되었으며 말할 수 없는 어려움과 고통을 감수했다. 8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우리 인민과 당은 베트남 인민을 승리로 이끌고 인도차이나에 평활르 재건한 영웅적 투쟁을 전개했다. 제네바 협정은 베트남 인민과 라오스, 캄보디아 형제들의 민족해방투쟁과 그들의 고결한 희생과 영웅적 행위가 국제적인 인정을 받아 왔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이 세월동완 우리 당이 결연하고 끈질기게 인민들오 하여금 위대한 희생정신으로 투쟁하도록 이끌었다는 사실은 자랑할 만한 일이다.


평화가 회복된 오늘날에도 우리는 제네바 협정의 올바른 준수를 위해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이미 확인된 자료에 따라 우리는 최근에 다음과 같은 것을 확언할 수 있다. 즉 협정상대가 2,114건의 협정위반을 저질렀으며, 거기에는 남베트남에서 위반한 467건도 포함된다. 게다가 그동안 806명이 사망하고, 3,501명이 부상당했으며, 12,741명이 근거 없이 체포당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지난해 9월, 베트남 노동당은 제네바 협정의 정확한 이행과 그것을 파괴하려는 모든 책동에 대항하기 위한 우리 인민의 행동에 관한 많은 결의들을 채택했다. 우리의 주요과제들은 다음과 같다,


1. 평화를 굳게 다진다. 

2. 민족통일을 완수한다. 

3. 완전한 독립을 획득한다. 

4. 민주주의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킨다.


지금 우리는 이러한 기본과제들을 달성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 동시에 우리는 마닐라와 방콕에서 제국주의자들이 회의를 연 이후 아시아에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지금 미국은 공공연하게 인도차이나 문제제 간섭하고 있으며 제네바 협정을 파괴하려는 수많은 책략들을 꾸미고 있다.


제국주의자들과 모든 그 앞잡이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나라를 영구히 분할하여 남베트남을 자신들의 지배하에 두고, 모든 민주세력들을 제거하며 1956년 총선거를 저지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다시 전쟁에 불을 붙이려는 적의 음모를 저지하고 1956년 7월로 예정되어 있는 전국 총선거를 통해 민족 재통일을 달성키 위해 우리의 투쟁은 휴전단계에서 정치투쟁의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


평화, 재통일, 민족독립, 그리고 민주주의는 상호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문제들이다. 만약 평활르 굳건히 다지지 못한다면 총선거를 통한 베트남 재통일의 가능성은 없다. 역으로, 총선거를 통한 민족 재통일의 달성이 없다면 평활르 위한 굳건한 토대를 건설할 가능성은 없다. 최근의 사태 진전과 정치상화엥 대한 점검을 통해 우리 당은 베트남 인민들의 평화와 독립,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 매우 힘든일이라는 것과 투쟁의 도정에서 베트남 인민이 수많은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당은 최후의 승리를 굳게 확신하고 있다.


가장 강력한 레닌주의 교의로부터 우리는 평화와 독립, 재통일, 그리고 민주주의를 쟁취하려는 우리의 신성한 과업을 달성하고 사회주의를 성취하기 위한 위대한 힘을 끌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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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혈맹. 평양, 하노이 그리고 베트남전쟁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총서 모노그래프시리즈 11
도미엔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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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폭격>의 저자로 유명한 김태우 교수가 집필한 신간 한권이 있다. 책의 이름은 <냉전의 마녀들>로 한국전쟁 당시 북한 사회에서 반파시즘 연대운동을 벌였던 국제여맹의 활동을 재조명했다. 1951516일부터 527일까지 북한 전 지역을 돌아다니며 조사를 벌였던 국제여맹의 조직원은 총 18개국으로부터 온 21명의 외국인 여성으로 구성되었었다. 이들 중에는 놀랍게도 베트남 출신의 여성도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 국제여맹이라는 조직은 반파시즘 반식민주의 차원에서 쿠바, 아르헨티나, 튀니지, 알제리, 중국, 베트남과 같은 소위 제3세계로 불릴 수 있는 국가의 인물들과도 교류를 했던 것이다.

 

<냉전의 마녀들>에선 자세히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비슷한 시기 전개되었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프랑스-베트민 전쟁) 당시 호치민(Ho Chi Minh) 정부는 미국과 전쟁을 치르던 중국 북한과 연대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4.27 시대에서 출간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을 보면, 1960년대 당시 북한이 쿠바와 베트남 그리고 이집트 등과 같은 반제민족해방투쟁에서 연대와 지원을 한 것으로 나온다. , 북한과 베트남의 반제국주의 연대 차원에서의 관계에 대한 나의 관심은 이 두 권의 책이 제법 자극제를 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놀랍게도 2022년 올해, 아주 흥미로운 책 한권이 출간된 것을 확인하게 됐다. 그 책이 바로 베트남 연구자인 도미엔(Do Mien)씨의 저서 <붉은혈맹: 평양, 하노이 그리고 베트남 전쟁>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저자의 박사논문을 책으로 간추린 것으로, 베트남 전쟁 당시 북한과 북베트남의 동맹관계를 재조명한 책이다. 아주 흥미로운 주제이며, 올해 들어 정말 흥미롭게 읽은 책이 됐다. 사실 한국 사회는 이승만 시대부터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극단적 반공주의(Anti-Communism)이 아직도 남아있는 사회다. 따라서 북한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모종의 잘못된 행위로 간주되는 이상한 분위기가 일반인들에게 아직도 남아 있는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 그것도 베트남 전쟁 시기 북한과 북베트남의 공동연대의식을 조명했다는 점은 한국 사회에서 건드리기 다소 힘든 점을 용기 있게 조명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도미엔씨는 북한과 베트남의 연대의식의 시작점은 제2차 세계대전 전후로 양국이 경험했던 식민주의 제국주의적 비슷한 경험의 공통성으로부터 비롯됐다고 주장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베트남은 호치민이 독립을 선포하자마자 얼마 되지 않아 프랑스의 침공을 받아 8년간 전쟁을 치렀다. 북한 또한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수립 이후 불과 2년 만에 한국전쟁을 통해 미국과 전쟁을 치렀다. 그리고 놀랍게도 양국의 전쟁에는 미국이 개입되어 있었으며, 미국은 이 두 전쟁을 반공주의의 논리로 접근했다. 당시 미국 사회에는 중국의 공산화와 소련의 핵개발에서 비롯된 매카시즘이 사회 곳곳에 퍼져 있었고, 그러한 반공주의는 반제국주의·반식민주의적 성격을 가진 전쟁을 오로지 반공주의적 논리로 접근하게 만든 것이다.

 

, 이러한 상황에서 양국에 형성된 반제국주의·반식민주의적 의식이 1954년 제네바 협정 이후 베트남의 남북분단 상황과 미국의 남베트남 군사고문단 파견 그리고 베트남 침략에서 보다 구체적인 양국의 반미의식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2019년 북미정상회담이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서 개최되자, 당시 북한과 북베트남의 관계를 얘기하는 국내 기사들이 제법 나왔었다. 특히나 베트남 전쟁 당시 전사한 조선인민군 공군조종사의 묘가 베트남 박장 성에 있다는 사실도 기사화됐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당시 이들의 연대의식이 기원이 과연 어디인지 얘기하는 기사는 없었다. 그러한 점을 이 책이 충분히 채워줬다고 나는 생각한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의 명장인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의 자서전인 <디엔비엔푸(Dien Bien Phu)>를 몇 년 전에 읽은 적이 있다. 길찾기 출판사에서 번역한 잡 장군의 책에는 디엔비엔푸 전투 10주년을 맞아 그가 쓴 디엔비엔푸 대첩과 동춘 승리의 궁극적 의의라는 글도 같이 실려 있는데, 그 글에서 잡 장군은 제국주의자들이 당황하고 낙담한 반면, 우리의 승리에 대한 소식은 전 세계의 진보적인 인민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은 디엔비엔푸에서 거둔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눴다. 이는 억압받던 인민들의 자랑거리였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알고 있던 국가 해방을 위한 세계적인 운동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썼다.

 

잡 장군이 1964년 글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이 내용이 정말 사실이었다는 것을 1950년대 북한의 김일성 위원장의 연설을 통해 알 수 있다. 아래는 김일성 위원장의 연설 문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사실은 전 세계 피압박 인민들에게 민주진영의 적극적인 지지 밑에 자기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전 민족이 단결하여 일떠서 싸우면 어떠한 제국주의도 물리칠 수 있다는 신심을 굳게 하여 주었습니다. 실례로 지금 이란, 애급, 윁남, 말라이를 비롯한 여러 나라 인민들이 조선 인민의 투쟁에 고무 되여 민족해방투쟁의 불길을 더욱 높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전을 요구하며 그 실현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꼭 정전이 된다고만 생각하고 장기전에 대처할 준비를 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출처: 붉은혈맹 p.59

 

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북한과 베트남은 중국과 더불어 소위 반제국주의 연대를 구축했던 것으로 드러난다. 책을 읽으면서 놀란 것이 또 있다. 그것은 바로 한국전쟁 시기 북한을 돕기 위해 참전한 중공군 중에는 중국 군사학교에 간부 및 군인으로 파견된 베트남인들도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책에 따르면 19506월까지의 통계에 따르면, 북베트남인 3,000명가량이 중국에서 군사훈련 및 정치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이것이 무슨 얘기인지 이해하기 위해선 당시 정세를 볼 필요가 있다. 1949년 중국이 마오쩌둥의 주도로 통일이 되면서, 아시아에서의 냉전진영은 극적으로 소련에게 유리해졌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베트남은 호치민의 지도하에 1946년부터 프랑스의 침략에 맞서 싸웠고, 침략자 프랑스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그러던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중국 공산당은 프랑스에 맞서고 있던 호치민 정부를 지원했는데, 이 과정에서 일부 베트민 병력이 중국에서 군사 및 정치훈련을 받았고, 더 나아가 일부가 한국전쟁에 참전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한국사회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입장은 김일성은 침략자이기에 나쁜 놈이다라는 이미지가 유난히 부각되며 사회적으로 강조된다. 그러나 책에 나온 사실을 포함한 여러 가지 사실들은 그러한 하나의 사실관계만으로는 한국전쟁을 파악할 수 없음을 입증한다고 할 수 있겠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한참이던 19504월부터 9월까지 중국은 베트민에게 다량의 군수품과 일반물품을 원조했다. 그것은 14,000자루의 소총과 조종사, 1,700자루의 기관총과 무반동총, 150문의 박격포, 60문의 포, 300개의 바주카포뿐만 아니라 탄약, 약품, 통신 재료, , 음식 2,800톤을 포함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원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한국전쟁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중국의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양국에 대한 중국의 지원은 당시 미국의 대아시아 반공정책과 연관이 있다. 아래의 인용문을 보도록 하자.

 

중국의 베트남과 북한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은 당시 사회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의 갈등에 대한 마오쩌둥의 신념에 바탕을 두었다. 마오쩌둥은 한국전쟁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프랑스에 대규모 원조를 제공한 미국의 움직임을 한반도-대만-인도차이나 세 방향에서 중국을 포위-침공하는 전략을 실행한 것으로 판단했다. 그리하여 그는 3국의 상황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으며, 만약 미국이 한반도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면 중국과 아시아의 혁명이 거대한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거시적으로, 마오는 중국의 한국전쟁 및 항불전쟁 참여가 세계와 아시아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및 반제국주의 혁명 수행을 지원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출처: 붉은혈맹 p.45~46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이 남북분단이 되자, 미국은 제네바 협정에서 약속한 총선을 거부했다. 미국이 자신들의 꼭두각시로 내세운 응오딘지엠은 과거 항불 투쟁하던 이들에 대해 탄압과 구금 그리고 학살을 자행했다. 이것이 결국 1960년 베트콩 창설에 큰 이유를 제공했다. 응오딘지엠이 전직 베트민 투사들에 대해 탄압과 학살을 자행하던 1957년 호치민은 대략 5일간 북한을 방문하여 대미행장에 힘쓰기 위해 북한·북베트남 연대를 강화하자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호치민은 북한과 북베트남의 분단문제에서 미국의 책임을 언급하고 다음과 같이 양국의 단결을 호소하는 연설을 했다.

 

미 제국은 조선 및 베트남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군사기지를 늘리며 긴장상태를 일으키고 있고 사회주의 진영을 공격하려고 합니다. 미 제국의 전쟁도발 음모에 당면했기에, 선두에 선 소련과 중국, 그리고 사회주의 형제 국가들은 인류의 평화문제와 사회주의 업적에 책임을 인식하여 단결심을 강화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바탕으로 서로 협력을 증진해야 합니다.”

 

출처: 붉은혈맹 p.65~66

 

이러한 호치민의 연설에서 알 수 있듯이, 항불전쟁과 한국전쟁 시기 식민지 경험과 반식민지 투쟁에서 형성된 양국의 연대의식은 양국의 남북분단이라는 현실 속에서 반미주의적 연대의식으로 보다 구체화됐다. 즉 이러한 과정에서 북베트남과 북한은 미국이라는 제국주의에 맞선 연대의식을 강화해나갔고, 이것은 1960년대 미국이 침략으로 일어난 베트남 전쟁 속에서도 나타난 것이다. 양국의 문화 및 정치도 교류를 통해 서로에게 소개되기도 했으며, 1964년에는 로버트 맥나마라를 암살하려다 체포당해 총살당한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응우옌반쪼이(Nguyen Van Troi)가 북한에서 소개되기도 했다. 놀랍게도 북한은 응우옌반쪼이 정신을 강조하기도 했으며, 응우옌반쪼이의 이름으로 생산력 강화를 주장하며 공장의 생산력 증진 및 북베트남의 지원을 강화하기도 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60년대 베트남 전쟁 당시 북한의 공군 조종사 파견은 한국 언론에 보도되었을 정도로 제법 유명하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당시 북한이 북베트남에게 얼마나 많은 무상지원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도미엔씨의 논문은 이러한 점을 아주 잘 집고 있다. 북베트남에 대한 북한의 무상지원은 1965년부터 시작되어 1973년까지 지속됐다. 이러한 지원의 규모는 결코 작지 않았으며, 초기 지원은 북한이 요구한 것 보다 1.5배나 많기까지 했다. 북한의 지원은 단순히 공군 조종사 100명과 심리전단 인원뿐만 아니라 무상지원도 있었다는 사실을 같이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베트남에 대한 북한의 무상지원은 1965년에 시작되었다. 해당 문서에는 1965~1973년에 이르는 동안 연도별 북한의 지원액에 대한 정확한 통계가 나와 있다. 북베트남 정부는 북한의 지원을 4년 단위로 나누어 총 2단계로 파악하고 있다. 1965년부터 1968년까지의 4년이 1단계, 1969년부터 1973년까지는 2단계이다. 1960년대 중후반 북한북베트남 관계의 진전을 잘 보여준 북한의 베트남 무상지원 1단계 양상이 <3-1>에 제시되어 있다. <3-1>에서 보듯 1965년의 지원 금액은 1,200만 루블이었다. 1965~1968년의 지원 금액은 3,000만 루블에 이르렀는데, 북베트남 정부는 이를 높은 지원 수준으로 평가했다. 북한의 북베트남 무상지원은 1970년대까지 진행되었으나, 전체 연도를 놓고 봤을 때 1965년의 1,200만 루블이 가장 고액이었고, 해당 연도가 1965~1968년 총지원액인 3,000만 루블에서 40%를 차지하고 있다. 다시 말해 1965년 지원액이 베트남 전쟁기 북한이 베트남에 지원한 최고 지원 금액이었다.”

 

출처: 붉은혈맹 p.163

 

북한과 북베트남의 연대와 양국의 협력의식은 놀랍게도 1968년 베트남의 구정 대공세(Tet Offensive)를 기점으로 다소 약화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러한 저자의 근거는 당시 북베트남에 대한 북한의 지원액의 감소와 1969년 전투기 조종사의 철군 등과 같은 여러 근거에 입각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양국의 연대의식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며, 1975년 통일 이후 양국의 약간의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미국에 맞서 승리한 베트남의 승리에 대해 환영해주긴 했다.

 

그러나 1975년 이후 북한의 중국에 가까운 노선을 걷고 베트남이 소련에 가까운 노선을 걸으면서, 양국의 갈등이 있었다. 특히나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을 빌미로 중국이 베트남을 침공하자, 북한은 베트남에 대해 비판 성명을 냈다. 그러한 배경이 1990년대 북한과 베트남 관계의 냉각 기류에 영향을 주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거기다 1992년 베트남은 대한민국과 수교했고, 1994년 미국과 수교를 했다. 1986년부터 추진한 개혁개방 정책인 도이모이의 영향이었다. , 그러한 점은 당시 북한이 베트남과 거리를 두었던 이유일 것이다. 그래도 양국의 관계는 2000년대 들어 다시 회복세로 진입했으며, 오늘날의 관계까지 이어졌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번에 도미엔씨의 책을 읽으며, 내가 많이 궁금해했던 주제를 많이 공부할 수 있어서 기뻤다. 지금껏 알지 못했던 여러 사실을 가르쳐준 저자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낀다. 물론 나는 이 책 내용에 100%까지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훌륭한 연구 자료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베트남인 연구자이기에 베트남측 문서를 많이 활용한 것이 눈에 들어왔으며, 한국 사람들이 정말 알기 쉽지 않은 최근 베트남 역사학계의 동향까지 알려준 것도 정말 의미가 있었다. 예를 들면 책에 나온 다음과 같은 예시를 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최근 베트남에서 이루어진 연구는 이미 1967년부터 소련이 북베트남에 미국의 협상 조건을 전달했고, 북베트남에 협상에 들어갈 것을 권유했음을 드러냈다. 1960년대 말 베트남 전쟁에 대한 소련의 관점은 현상 유지였기 때문이다. 즉 소련은 미국의 북베트남 폭격 중단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그다음에 남베트남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남베트남에서의 미군 철수 및 군사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그다음에 정치 및 통일을 해결하자는 것이다.”

 

출처: 붉은혈맹 p.216~217

 

그 외에도 헝가리 연구자의 문서와 윌슨 센터 자료, 기존 국내에 나온 연구와 북한 자료 및 베트남 자료를 고루고루 사용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러한 자료들 중에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최신의 자료도 제법 많이 담고 있다. 이러한 점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 또한 은연중에 언급한 민족해방전쟁론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 베트남 전쟁을 호치민의 민족해방전쟁으로 보는 관점은 <전환시대의 논리> 저자인 리영희 교수에 의해 나온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에 대해 일각에서는 낡은 관점으로 치부하며, 도리어 정통성이 없던 남베트남에 대한 옹호의 흐름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흐름은 서방학계 일부의 흐름일 뿐, 전반적인 진실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제3세계적 흐름을 쉽게 무시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책의 저자 또한 베트남 전쟁을 통일전쟁이자 민족해방전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 또한 베트남 전쟁은 기본적으로 민족해방전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이 자료도 입증하고 있듯이, 북한과 북베트남의 연대뿐만 아니라, 미국이 내세운 나라 남베트남의 정통성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응오딘지엠 정부가 과거 독립운동을 하던 베트민 투사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탄압하고 학살했던 역사에서 입증 된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베트남 전쟁은 기본적으로 호치민과 북베트남 공산당의 민족해방전쟁적 성격을 가진 것이다. 책 초반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하겠다.

 

베트남 전쟁은 제국주의와 식민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사회주의 진영 내부의 갈등이 복잡하게, 뒤얽힌 복합전쟁이었다. 물론 베트남 전쟁은 기본적으로 통일전쟁이고 민족해방전쟁이었다.”

 

출처: 붉은혈맹 p.8

 

그 외에도 다음과 같은 책의 내용을 통해 저자가 베트남 전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한편, 베트남 전쟁의 성격과 그 의미는 전쟁의 발생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따라서 그 역사적 기원을 현대사에서 찾는다면,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발생한 베트남의 ‘8월 혁명일 것이라는 설명이다. 19459월 베트남민주공화국 수립과 함께 호찌민이 선언한 베트남 민족의 독립과 베트남 통일을 당시 국제사회가 승인했다면, 특히 구식민지 종주국인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 대한 지배 의지를 갖고 있지 않았다면, 그 후 30년에 걸친 프랑스, 그리고 미국과의 전쟁은 발발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 후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프랑스와의 전쟁), 2차 인도차이나 전쟁(미국과의 전쟁)은 연속적인 반제국주의 항쟁인 것이다.”

 

출처: 붉은혈맹 p.29~30

 

이 책의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베트남 전쟁 당시 북한의 공군 조종사들이 얼마나 많은 전투기를 격추했고, 또 얼마나 많이 전투에 기여했는지에 대한 내용이 빈약하다는 점이다. 그래도 이 책이 아주 잘 쓴 명저라는 점은 너무나 분명하고 이 책을 통해 정말 많은 것을 공부할 수 있었다. 그 점에서 다시 한 번 저자에게 깊이 감사함을 표하고 싶다. 사실 이 책은 저자 논문의 절반 부분을 책으로 낸 것이다. 저자 논문의 절반 부분이 북한과 북베트남의 관계를 조명한 것이라면, 나머지 절반 부분은 남한과 남베트남의 관계를 조명한 것이다. 이 나머지 부분이 책으로 나올 것을 저자는 머리말에서 암시하고 있다. 그 점에서 나머지 절반 부분도 많이 기대가 된다. 나는 북한과 베트남에 대해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일독을 권하고 싶다. 앞으로 더 좋은 연구 성과가 이 책을 시작으로 더 많이 등장할 것이라 기대하며 긴 서평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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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은 정통성을 어디에 두고 있을까? 대한민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정통성을 두고 있으므로, 국군도 독립군 또는 광복군에 정통성을 두고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군사에서 군사영어학교나 국방 경비대를 이어받았다는 주장은 있어도 광복군을 이어받았다는 주장은 미약하다. 국군은 미군이 만들었다고 주장하더라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미군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그런가 하면 1960년대까지 국군의 고위 지휘관은 일본군(만주군 포함) 출신이었다. 군은 반민족행위처벌법도 어쩌지 못하는 성역처럼 취급되어 악질 친일 경찰의 도피처가 되었다.

 

주한미군은 194512월 군사영어학교를 설치했다. 광복군 출신은 거의 없었고, 일본군 출신 중에서도 초급 장교들을 주로 선택했다. 다음 해 4월에 폐지된 이 학교는 통역과 관련해 군사영어교육에 치중했으나, 국군에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이 학교 졸업자 110명은 교육 기관 중 임관되어 육군 군번 1(이형근)부터 110번을 부여받아 대개 30대에 별을 달았고, 20대에 별을 단 사람도 여럿이었다. 이들은 1960년대까지 육군 참모총장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등 군 요직을 독차지했다.

 

미군이 창설한 국방경비대는 정부 수립 후 육군으로 재편되었다. 미군은 전쟁 발발 이전부터 통신학교, 공병학교, 보병학교, 포병학교를 운영했다. 또한 교육 과정이 확대되면서 1952년에 4년제 육군사관학교가 문을 열어 11기가 신입생이 되었다. 미국의 육군지휘참모대학을 본뜬 육군대학은 1951년에 설립되었다. 미국의 국방대학원을 본떠서 만든 국방대학원은 1956년에 문을 열었다. 미군은 장교 교육을 시켰다. 각급 군사학교에서는 물론이고 야전 훈련장에서도 미군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백선엽처럼 정보장교들이 정보 교육을 받기도 했다.

 

미군은 장교들을 미국에 보내 교육을 받게 했다. 첫 번째로 정부 수립 직전인 1948811일 이형근, 장창국, 이한림 등 6명이 국군 창설자라는 애칭을 가진 하우스만 대위의 노력으로 포트베닝 미 육군보병학교에 입학했다. 이형군은 1949년 준장 진급(28)과 동시에 주미 대사관 초대 무관 발령을 받았다. 전쟁 발발 직후 33세에 3군 총사령관 겸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정일권은 19517월 강문봉 소장(27)과 함께 미 육군참모대학에 유학을 갔다.

 

1953년 휴전협정 체결 며칠 뒤 유재흥 중장, 양국진·송요찬·이성가·백인엽·함병선·김종갑·박임항·오덕준·백남권 소장과 최경록 준장 등 3명의 준장, 2명의 대령 등 14명이 미 육군참모대학에 입학했다. 미군은 장교들을 1951년부터 대규모로 미국에 위탁교육을 보냈다. 19519월에 165명이 미 육군보병학교 초등군사반에 들어가기 위해 부산항을 떠났다. 이들 중에는 김종필, 길전식, 강상욱 대위 등도 있었다. 1952년에는 594, 1953년에는 829명이나 갔다. 박정희는 미 육군포병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현지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그는 일본군의 황국군인 정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 자료에는 1950년부터 1957년까지 육군 4,729, 해군 920, 공군 1,503명 등 7,000여명이 미국의 군사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당시 정부 각 부처 관리들의 미국 유학보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았고, 같은 시기 도미 유학생보다도 월등히 많았다. 군 지휘관중 자래가 보장되는 미국 유학을 갔다 오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다. 노태우 대위는 결혼 며칠 뒤인 19596월 결혼식 사회를 본 전두환 대위와 함께 도미해 육군특수전학교에 입학했다.

 

미국은 유학생에게 군사교육 못지않게 정신교육을 시켰고, 미국 문화에 젖어들게 했다. 위대한 미국을 찬탄해 마지않던 유학생들은 반공정신에 투철했고, 미국의 안보와 국가 이해를 한국의 그것과 동일시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민주주의와 인권의식은 희박했고, 민족의식 또한 투철하지 못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30대 초반에 대장이 된 백선엽, 이형근과 37세에 대장이 된 정일권 사이에 파벌 갈등을 조장해 군을 장악하고자 했다.

 

1950년대 말에도 비슷한 수법으로 송요찬과 유재흥 등을 요직에 발탁했다. 그러나 세 명의 대장 중 적어도 한 명은 이승만보다 미국에 마음을 더 두었고, 육군 참모총장 송요찬은 1960419일 계엄사령관에 임명되었지만 이승만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고 중립을 지켰다. 친미적인 송요찬은 4월혁명 후 정군 대상으로 지목되어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났으나 5.16 군부 쿠데타 후 내각 수반, 국방부 장관 등을 지냈다.


부부가 영어에 능통한 장도영은 이기붕 양자라는 소문이 돌 정도여서 4월혁명 직후 정군운동의 대상이 되자 예편원까지 냈는데, 뜻밖에도 19612월 미국의 입김으로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다. 5.16 군부 쿠데타의 성공은 장도영이 양다리를 걸친 것이 주요 요인이었다. 미국에서 국가를 이끌어갈 엘리트 교육을 받은 군인들은 19615.16 쿠데타와 197912.12 쿠데타, 19805.17 쿠데타를 일으켜 30년 동안 군부 통치 시대를 열었다.

 

참고자료

 

서중석,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웅진지식하우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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