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많은 희생을 치른 나라는 과연 어디일까? 아마 소련과 중국일 것이다. 특히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이 치른 희생은 어마어마했다. 냉전 말기인 1989년 존 키건이 쓴 <2차 세계대전사>에서는 대략 1,300~1,500만 명의 소련인이 전쟁으로 죽었다고 추산했는데, 이 책을 번역한 류한수 교수는 최근의 연구는 2,600만에서 2,700만 명 이상의 소련 사람이 죽은 것으로 최근 학계가 추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중 1,000만 명은 군인이고 1,700만 명은 민간인이었다. 나치가 자행한 유대인 학살로 600만 명의 유대인이 죽었다고 하는데, 이보다 3배 정도 많은 소련 민간인이 나치에게 학살당한 셈이다. 거기다 학살당한 유대인 대다수는 소련 쪽 유대인들이었다.

 

이러한 인명피해에 못지않게 소련은 경제적으로도 극심한 타격을 받았다. 무려 2,500만 명의 소련인이 집을 잃었고, 1,700여개의 도시와 소읍, 7만 이상의 촌락, 32,000개 이상의 공장, 65,000km의 철도, 10만의 콜호즈와 소호즈가 파괴 또는 소실됐다. 히틀러의 침공으로 소련 국부의 1/3이 날아간 셈이다. 대략 98,000개의 협동조합과 5,000개에 가까운 국영농장과 트랙터, 농업기계 창고가 나치에게 약탈당했다. 수만 개의 병원과 학교, 예술학교, 고등 교육기관, 도서관이 완전히 파괴됐다. 히틀러의 침략으로 소련의 입은 물질적인 피해 6,800억 루블을 포함하여 소련의 전쟁피해는 총계 26천억 루블이나 됐다.

 

루도 마르텐스에 따르면, 독일군은 후퇴하는 동안에도 고의로 소련에서 사용될 수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불살랐다. 2,000곳의 도시, 7만 곳의 마을, 400만 명의 노동자들이 일하는 공장들이 전부 혹은 일부분 파괴됐다. 독일군이 침략한 지역에서는 40~60%의 석탄, 전기, 철강, 금속과 기계 생산력들이 파괴됐으며, 몇몇 사람들은 소련이 나치에 의해 받은 상처를 모두 회복하는 데는 수십 년이 필요할 것이라고 추산하기까지 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처칠의 철의장막(Iron Curtain) 발언과 더불어 1947년 트루먼 톡트린(Truman Doctrine)이 선포되면서 이른바 냉전(Cold War)이 시작됐는데, 한때 파시즘에 맞서 같이 싸웠던 미국과 영국은 소련의 전후 재건을 돕지 않았으며 오히려 늦추려 했다. 전쟁이 끝난 이후 스탈린은 전후 재건에 나섰는데, 이 과정에서 보기 좋게 서방에게 한 방 먹였다. 스탈린 집권 말기에 시작된 전후 재건으로 소련은 발 빠르게 전후복구 과정을 거쳤으며, 이는 이후 냉전에서 사회주의 진영에 선 국가들의 모범적 모델로 비추어졌다.

 

이러한 소련의 전후 재건 발전상은 당시 소련을 방문한 문학가 이태준이나 역사학자나 북한의 정치인인 백남운이 쓴 책에도 잘 드러난다. 예를 들어, 이태준은 1946년에 소련을 방문한 이후 3년 뒤 다시 소련을 방문했는데, 수도 모스크바를 둘러보며 “ 3년 전과 비교하여 자동차는 10배 이상 많아 보였고 쏘련 차보다 외국차가 더 많던 것이 이번에는 바뀌되 외국 차는 어쩌다가 한 대씩 볼 수 있는 정도, “국영들이나 상점이 부쩍 늘었고 길 가면서도 사기 쉽게 필수품들은 이동점포들이 많았다. 전에는 사람들이 표를 들고 물건을 따라가 줄지어 섰었으나 오늘은 물건들이 이동점포로 줄지어 다니며 사람들을 따르고 있었다.”라며 극찬했다.

 

1950년 기준으로 소련은 공업 생산고가 전쟁 전인 1940년 수준을 73%나 상회할 만큼 빠른 경제회복과 성장을 보였다. 나치 독일이 침략한 지역에서는 40~60%의 석탄, 전기, 철강, 금속과 기계 생산력들이 파괴되었지만, 1948년 전후 재건의 성과로 공업 생산량은 1940년의 공업 생산량을 넘어섰으며, 1951년에서 1955년까지 매년 12%의 공업 성장률을 보였을 정도였다. 자본재의 경우 5년 동안 80%의 성장을 보였으며, 소련의 공업생산은 서방측의 계산으로도 연평균 12~14%의 고도성장을 기록했다. 이는 서방세계의 성장속도를 최소 2배 이상이나 뛰어넘는 수치였다. 당시 전력생산도 크게 늘었는데, 1954년에는 세계최초의 원자력 발전소가 세워지고, 세계 최대의 쿠이비셰프 수력발전소를 비롯해 수천 개의 발전소가 건설되어, 모든 산업에 충분한 전기를 제공해줄 수 있게 되었을 정도다.

 

전후복구 과정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은 1946년 당시 다음과 같이 연설을 했었다.

 

우리는 점진적으로 상품의 원가를 줄이고 모든 종류의 과학적 연구기관을 설립함으로써, 소비재의 생산량 증가와 노동자들의 삶의 수준 향상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일 것입니다.”

 

비록 스탈린 시기 소련은 만성적인 소비재 부족 현상에 시달렸고, 이를 완벽히 해결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전후복구 과정에서의 소비재 생산도 많이 발전했다. 1947년에 이르러서는 소련에서 이른바 배급제가 폐지되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배급제를 시행했던 영국보다 6년이나 빠른 속도였고, 미군정하의 일본보다도 2년이나 앞섰다. 전후복구 과정 초기 성과로 소비재 생산은 23% 증가했다. 심지어 반북성향을 가진 국민대학교의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 또한 스탈린 시기 최소 1주일에 한 번은 소련 사람들이 육류를 섭취했다고 강조했을 정도다.

 

1970년대 중후반 박정희 시절이나 전두환 집권 초기인 1980년대 초 한국 사회가 과연 육류 소비를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생각해보면, 소련의 소비재 현황이 그렇게 나빴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소련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풍요로운 소비재 생산과 의식주 문제 해결이 된 1960년대 초 소련 사회의 기본적인 토대는 스탈린의 전후재건이 남겼다고 볼 수 있다. 안드레이 란코프 또한 1940년대 후반부터는 소련에서 밥을 굶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을 자유아시아방송에서 얘기한 적이 있는데,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소련 사회는 밥을 굶는 사회가 절대로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게 받은 상처를 놀라운 수준의 속도를 보이며 회복했다. 전후재건으로 소련은 자본주의 최강대국인 미국과 겨루는 나라로 거듭났고, 세계 곳곳에서 자본주의 국가 미국과 충돌했다. 이러한 점을 보았을 때, 이오시프 스탈린이 전후재건을 통해 소련을 미국과는 다른 강대국으로 거듭나게 했다는 사실에서 충분히 재평가를 받을만한 점이 있다. 스탈린에 대해 지나치게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사회에서, 이러한 점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그러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굳게 믿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22년 마지막 해에 올리는 글로 국민방위군 사건에 대해 한번 정리해봤습니다.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195010월 중국이 이 전쟁에 참전한 이후, 한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남으로 후퇴했고, 195114일에는 수도 서울을 다시 내줬다. 중공군 참전 전후로 이승만 정부는 한국군 병력을 보충한다는 이유를 들어 이른바 국민총동원령을 내렸다. 동원령이 내려짐에 따라 전국적으로 남한에 있는 청년들은 영장을 받지 않았음에도 닥치는대로 소집 장소로 몰려들었다. 이러한 소집명령은 당연히 강제적인 방법이 동원됐다.


195012월 이승만 정부는 국민방위군 설치법을 공포하여 제2국민병에 해당하는 만 17세에서 40세 정도의 남성을 방위군에 편입시켰다. 그렇게 해서 모인 병력이 대략 50만 명 정도인 것으로 추정된다. 많게는 68만 명이 소집되었다고 한다. 그중 42만 명 이상이 서울과 경기, 강원, 인천에서 소집됐고, 소집된 장정들은 국민방위군 장교들이 200~300명씩 중대 단위로 편성해 도보로 교육대가 있는 경상도로 인솔했다고 한다. 막대한 예산이 편성되었으나, 1만 명에 가까운 병력을 후송하는데, 쌀이나 군복 하나 안주고 소집 장소만 하달했을 정도로 방위군에 대한 정부의 대우는 최악이었다. 12월 특성상 겨울이었는데, 이런 혹한기에 장정들이 아사하거나 동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심지어 전방이 아닌 후방에서 말이다.


예산횡령이 횡행했다. 당시 국방부 장관이던 신성모는 서북청년단 출신이자 대한청년단 간부 출신인 김윤근이라는 사람을 준장 계급에 임명했지만, 그는 실질적으로 전투 경험이 없는 인물이었다. 대한청년단 초대 단장인 신성모의 사위였고, 신성모의 비리로 임명된 인물이었다. 김윤군은 방위군을 유지하기 위해 받은 비용을 뒤에서 챙겼고, 기생집에 가서 원하는 만큼 돈을 쏟아부으며 사용했다. 김윤근을 포함한 4명이 착복한 돈과 물자는 당시 화폐로 무려 24억 원, 양곡 52천 섬에 달했다. 국회조사단이 진상조사를 통해 밝힌 내용에 따르면 책정된 예산 209억 원 중 실제 집행한 액수는 130억뿐이었고, 740만 명 정도의 유령병력을 조직하여 235천만 원의 현금과 52천여 섬의 식량을 부정유출했다고 한다.

 

국민방위군 1인당 1일 양곡 4, 취사연료비 40, 잡비로 10원을 책정해서, 3개월 예산으로 209830만 원이 배정됐는데, 그중 최소 1/10 이상을 김윤근을 포함한 4명이 착복한 셈이었다. 거기다 실제로 집행한 액수가 130억도 안되었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심각한 것이었지만, 이들이 잡은 군인에 대한 대우가 가장 처참했다고 말할 수 있다. , 이들이 책정한 1인당 1일 양곡 4홉은 하루 55작을 지급받는 전쟁포로만도 못한 대우였다. 그리고 모집된 국민방위군의 숫자를 생각해보자면, 어떤 부정이 없었다 해도 1인당 실제 집행액이 원래 계산만큼 나올 수 없는 구조였다. 심지어 난방비와 피복비는 아예 책정조차 하지 않았고, 엿공장은 생산 능력 대비 소비됐다면서 쌀 양이 계획안보다 6배가 넘었을 정도였다. 여기서 엄청난 뒷돈을 상층부가 챙긴 것이다.


자동차의 경우 250대를 구입했다고 보고했지만, 실제로는 20대밖에 구입하지 않았다. 명태는 386만짝을 구입했다고 했지만, 실제로 구입한 양은 4,000짝뿐이었다. , 국민방위군의 예산은 상층부가 뒷돈을 챙기기 위한 수법으로 진행됐다. 위에서 언급한 현금 횡령뿐만 있던 게 아니다. 현금 횡령이 235,000만 원이었다면, 양곡횡령이 202,710만 원이었고, 예하 공금 횡령이 288,328만 원이었다. 728,000만 원이나 횡령한 셈이다. 근데 이마저도 김윤근을 포함한 수뇌부만 해 먹은 것으로 공식적으로 드러난 액수일 뿐, 얼마나 횡령을 많이 했는지는 정확한 추산이 불가능하다.

 

그 결과 최소 100일 동안 자국 군인이 대량으로 아사 및 동사 그리고 병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소문으로는 최소 5만 명에서 10만 명가량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아다녔는데, 중앙일보가 간행한 민족의 증언50만 명 중 20%가 병사 혹은 아사했다고 추산했다. 심지어 뉴라이트 출신으로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이라고 부르며 찬양하는 정치학자 유영익마저도 이 국민방위군 사건에 대해선, “9만 명이 굶어죽고 얼어죽은 천인공노할 사건이라고 표현할 정도다. 노무현 정권 당시 활동한 진실화해조사위원회의 조사에 따른 추산은 대략 5만 명에서 8만 명으로 보고 있다. 심지어 그 한국전쟁 당시 국회조사에 따르면, 사망자 상당수가 행려병자로 처리되었고, 100일 동안 각종 질병, 동상, 아사, 도주 등 이유로 전체의 40%에 달하는 27만여 명이 사라졌다는 기록도 있다.

 

따라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추산은 불가능한 셈이다. 보통의 경우 7만 명에서 12만 명 사이로 보는데, 이것보다 더 많을 수도 있다. 아무튼, 자국 정부의 방산비리로 최소 10만 명 이상의 군인이 아사하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비극이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 정부에서 발생했다. 미국 통계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 사망자가 14만 명에서 20만 명 정도인데, 그것보다 조금 적은 숫자가 방산비리로 아사해 죽는 사건이 벌어졌다는 사실은 이 사건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결과적으로 김윤근을 포함한 지도부 4명은 결국 사형해 처했고, 국민방위군은 해산됐다. 하지만 1심 재판에서 연루자 16명 중 실형 4, 파면 10, 무죄 2명으로 판결이 났다. 특히 사령관 김윤근에게 무죄가 선고됐는데, 국민은 판결 소식이 들리자 극도로 분노했다. 특히 부통령 이시영이 이 사건에 대해 분노를 표하면서 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고, 대통령인 이승만마져도 사건의 심각성을 고려해 국방장관 신성모를 경질했으며, 이기붕을 국방장관에 앉혔다. 그리고 육군참모총장으로는 정일권에서 이종찬으로 교체했으며, 여론을 의식하여 김윤근을 포함한 지도부 4명을 사형에 처한 것이다.


국민방위군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왜 한국군의 대우가 역사적으로 안 좋았는지다. 그러나 열악한 군인 대우의 시작은 결과적으로 군인에 대해 아무런 배려의식이 존재하지 않던 이승만에서 시작한다. 이승만 정부가 군인에 대해 제대로 된 대우를 안해줬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건의 본질적인 문제는 미국이 자의적으로 대중을 죽이고 패가며 만든 이승만 정부에게 있는 셈이고, 또 그 점에서 이승만 정부는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할 수 있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꼬마요정 2022-12-31 2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천인공노할 사건입니다. 평화로운 때도 아니고 전쟁 중에 방산비리라니... 썩을 놈들 욕이 다 아깝네요. 올려주시는 글들 읽으면서 새삼 공부가 됩니다. 고맙습니다.
올 한 해 마무리 잘 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NamGiKim 2022-12-31 23:46   좋아요 1 | URL
제 PBS 베트남 전쟁 그 긴 리뷰를 열심히 읽고 계시니 참으로 깊이 감사드립니다. 꼬마요정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대학원 다니며 엄청 바쁘게 살다보니, PBS 베트남 전쟁을 리뷰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5화를 연재한지 3개월 만에 6화를 리뷰하게 되네요. 간혹 여유로울 때, 이 다큐멘터리도 지속적으로 리뷰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Things Fall Apart 인트로 영상 장면)

 

베트남 전쟁 당시 헬리콥터 승무원장이었던 참전용사 론 페리지(Ron Ferrizzi)의 이야기다.

 

헬리콥터는 놀라운 장비입니다. 공중에 뜰 수 있으니까요. 마치 신이 된 것처럼 말입니다. 150m 아래로만 비행했습니다. 그 위로는 살상지대였거든요. 가능하면 60m 아래로 머무는 게 좋습니다. 낮을수록 더 안전하니까요. 제 임무는 공격받는 거였습니다. 제 임무는 적들의 사격을 유도하는 미끼 역할 같은 것이었죠. 사격을 많이 받았죠. 적군과의 교전이 빈번했거든요.”

(전장터에 투입된 미군 헬기들, 이들이 제공하는 화력은 막강했다.)

(헬리콥터를 조종하는 미군 조종사)

 

베트남 전쟁은 최초의 헬리콥터 전쟁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헬리콥터가 투입된 전쟁이었고, 가장 많은 헬리콥터를 잃은 전쟁이기도 했다. 베트남 전쟁을 통틀어 당시 헬리콥터의 출격 숫자는 3,600만 번이다. 이 중에는 대다수 베트콩 소탕 작전과 미군의 화력지원을 위한 목적이 있었지만, 승무원들은 적진에 선전용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또한 전투에서 부상당한 미군들을 후방으로 옮기는 역할도 했다. 그 때문에, 미군의 생존률이 제2차 세계대전이나 한국전쟁 때 보다 더 증가했다.

(1967년 말 기준 베트남 주둔 미군 병력 숫자)

 

이러한 최신식 헬리콥터의 투입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전쟁에서 이긴다고 말 할 수 없었다. 1967년이 지나고 1968년 원숭이의 해가 되었지만, 여전히 베트콩들은 남베트남 전역에 확산되어 있었으며, 농촌은 여전히 게릴라의 해방구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적군은 연전연패하고 있습니다. 적은 미국이 가진 불굴의 의지가 결국엔 꺾일 것이라고 희망하지만, 그건 완전히 헛된 희망이죠.”

(구정 대공세를 위해 결집한 베트콩들)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19681월 베트남에 있던 미군의 숫자는 대략 485,600명이었고, 미국의 지도부는 앞에서 인용한 존슨의 연설문처럼 베트남 전쟁에서의 승리가 눈앞에 보인다고 하면서, 길고 힘든 상황이 거의 끝났다고 했다. 존슨은 전쟁이 거의 자신들의 승리로 끝났다고 말했지만, 북베트남은 자신들이 패배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1968년 새해가 다가오자, 북베트남의 지도자인 호치민(Ho Chi Minh)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낭독 했는데, 그 연설에는 여전히 독립과 통일에 대한 의지가 담겨있다.

 

북과 남이 서로 경쟁하며

미제 침략자에 맞서 싸우세!

전진하세!

완전한 승리는 바로 우리의 것이네!”

 

레주언(Le Duan)을 포함한 북베트남의 지도부는 비밀리에 남베트남을 대상으로 한 대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특히나 레주언은 당 내부에서 총 공격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이 총공격으로 전쟁이 끝날 것이라 믿었다. 북베트남군이 지원하는 베트콩 부대들도 동시에 남베트남 전역의 도시와 군 기지를 공격할 예정이었다. 레주언은 만약 자신들이 공격을 시작하면, 남베트남의 민중들이 들고 일어나 사이공 정부를 무너뜨릴 것이라 장담했다. 19458월 베트남 민중이 공산당의 지도 아래 일본 제국주의를 패퇴시키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선포를 알렸듯이 말이다. 만일 그렇게 해서 남베트남 정부가 패배하면 미군도 철수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 레주언의 생각이었다.

(레주언, 그는 구정 대공세를 강력히 밀었던 인물이다.)

(남베트남의 DMZ와 케산 기지)

 

19681DMZ하고 라오스와 가까운 미군의 케산(Khe Sanh) 기지에는 대규모 미군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주월미군 총 사령관인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는 북베트남군이 케산에 미군을 고립시켜 몰살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14년 전 베트민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 121일 북베트남군이 케산에 있는 미군기지를 포격했다. 케산 포위전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케산 포위전에 참전했던 베트남측 참전용사 카오슈안다이(Cao Xuan Dai)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미 해병대는 북베트남군한테 포위되어, 큰 난관에 빠지게 됐죠. 웨스트모어랜드는 이게 미국판 디엔비엔푸 전투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베트남 전쟁의 승패가 달린 전투라고 한 것이죠. 하지만, 당시 북베트남군은 병력 대부분을 이미 다른 곳으로 이동시킨 상태였어요.”

(북베트남군의 포격을 피해 숨은 미 해병대 대원)

(기지에서 포격을 지켜보는 미군들)

 

미 해병대는 케산 기지를 지키기 위해 온갖 화력을 쏟아 부었다. 미군 전투기가 포격을 가하는 북베트남군 진지에 맹렬한 폭격을 가했고, 미 해병대와 남베트남군 또한 포를 발사하여 북베트남군에 맞대응 했다. 그러나 사실 케산 기지에 대한 공격은 하나의 속임수였다. 사실 북베트남측은 남베트남 전역에서 총 봉기를 위한 준비를 비밀리에 준비하고 있었고, 남베트남 전역에 있는 혁명 세력에 무기와 물자가 비밀리에 전달됐다. 당시 공세에 베트콩으로 참전했던 베트남측 참전용사 응우옌 응옥(Nguyen Ngoc)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상부에서는 대대적인 도시 공격을 준비하라고 했어요. 그건 총 공세를 뜻하는 것이었죠. 우리는 도시 외곽에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수월하게 드나들 수 있었죠. 그래서 총 공세가 성공할 줄 알았어요.”

(구정을 즐기는 베트남인들)

(구정을 미리 즐기는 북베트남 군인들)

 

130일 구정을 맞이하여, 베트남 전쟁은 잠시나마 비공식 휴전이 성립된 후였다. 따라서 남베트남군 중 수천 명이 설날에 휴식을 하러 고향으로 휴가를 떠났지만,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아니었다. 베트남측 참전용사 응우옌반통(Nguyen Van Tong)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설을 미리 기념했어요. 명절용 과자며 고기에 절인 숙주까지 먹었죠. 정말 맛있었고 다들 만족스러워했습니다. 우린 다음 날 밤에 사이공 강을 건너서 도시 서부로 행군했어요.”

(DMZ에 배치됐던 로저 해리스, 그는 13개월의 근무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흥미롭게도 그날 미 해병대 상병 로저 해리스(Rogger Harris)13개월간의 근무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는데, 비행기에 타고 돌아가던 중 북베트남군이 쏜 포탄이 빚발치는 모습을 보게 됐다. 이거는 북베트남측의 공격이었다. 당시 해리스는 북베트남군의 포격으로만 생각했고, 비행기에 이륙하여 상공에 뜨자 기뻐했다. 그렇게 무사히 다낭의 미군 비행장에 도착했고, 놀랍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낭 비행장에서 베트콩 측의 화력 공세로 포격을 받고 있음을 알게 됐다. 드디어 베트남 전쟁의 터닝 포인트 중 하나인 구정 대공세(Tet Offensive)가 시작된 것이다.

(구정 대공세 당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공격 지역)

(AK-47을 들고 시가전을 벌이는 베트콩)

(지붕 위에서 AK-47을 발사하는 베트콩)

 

1968131일 새벽 84,000명의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이 남베트남 44개 도의 수도 중 36개 도의 수도와 미군과 남베트남군 기지 수십 군데와 후에, 다낭, 사이공을 포함한 베트남의 6대 도시를 공격했다. 명절 기간에는 공격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허점을 찌른 공격이었고, 그들의 예상을 완전히 빛나가게 한 공격이었다.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도 양측의 치열한 전투지대로 급변했다. 이로 인한 충격은 남베트남 사람들에게도 상당히 컷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상황을 지켜봤던, 즈엉반마이 앨리엇(Duong Van Mai Elliott)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시가전을 벌이는 남베트남군)

(시가전 도중 안전한 곳을 찾아 도망치는 민간인들)

(사이공 대통령궁에 배치된 남베트남군 탱크)

 

우린 도심에서 총성을 들었습니다. 처음엔 다시 한 번 쿠데타가 일어난 줄 알았어요. 그러다가 베트콩이 사이공을 공격했다는 것과 아직도 공격이 진행 중이라는 것을 들었죠. 이에 충격을 심하게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린 사이공이 남베트남에서 가장 안전한 줄 알았기 때문이죠.”

(지프차 밑에 엄폐한 미군 헌병)

(미 대사관을 되찾기 위해 전투를 벌이는 미군들)

(대사관 잔디밭 앞에서 시가전을 벌이는 미군 헌병)

(구정 대공세에 대해 발표하는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사이공 전투에선 한 베트콩 부대가 대통령궁 근처까지 접근했지만, 남베트남군 측의 탱크에 저지당했다. 아무래도 남베트남측 화력에 못 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이공 전역은 이미 양측의 교전이 벌어지는 전쟁터였고, 베트콩들은 도심에서 시가전을 벌였다.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이들을 차례대로 소탕해나갔고, 베트콩의 사상자도 급증했다. 그러나 전투 시작 몇시간 후 베트콩들 중 특공대 19명이 사이공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들은 미국 대사관 벽을 로켓포로 쏴서 파괴한 다음 구내로 침투했으며, 1층을 점거한 뒤 총격전을 벌였다.

(베트콩 용의자를 즉결 처형하는 남베트남 경찰청장, 이 장면은 베트남 전쟁을 통틀어 유명한 사진 중 하나다.)

 

미군은 이들을 죄다 사살하거나 체포하는 데 궁극적으로 성공했다. 그러나 베트콩에 의해 미 대사관이 점령당하는 것이 사이공 현장에 있던 기자들에 의해 생중계가 됐고, 미국 전역으로 그 영상이 퍼졌다.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구정 공세 과정에서 일부 베트콩 부대가 계획적으로 남베트남 측 관리나 정부요인 그리고 군 장교와 그 가족들을 암살 및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를 실행했던 인물 중 한 명인 응우옌반렘(Nguyen Van Lam)은 남베트남군 측에 포로로 붙잡혔고, 남베트남 경찰청장인 응우옌응옥로안(Nguyen Ngoc Loan)은 가차 없이 리볼버 권총으로 즉결처형했다. 응우옌반렘의 처형은 서방측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생중 됐고, 사진과 영상자료가 남게 되었으며, 서방 사회에선 베트남 전쟁의 부도덕성을 보여주는 증거물로 작용했다.

(구정 대공세 당시 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베트남의 어느 마을)

 

구정 대공세는 점차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막강한 화력 공세를 기반으로 반격에 나서면서, 베트콩이 점령했던 지역을 하나 둘씩 탈환해나가는 양상으로 변모했다. 물로 이 과정에서 폭격을 포함함 미군 화력에 의한 희생자가 만만치 않았다. 예를 들어 미군은 엄청난 공군력과 화력을 투입해서 메콩강 삼각주 벤쩨(Ben Tre)시에 머물던 베트콩 1개 연대를 몰아냈다. 그 일이 있은 이후 한 기자는 미군 소령의 말은 인용하며, “마을을 구하려면 파괴할 수 밖에 없았다고 기사에 썼다. 나머지 지역들은 보통의 경우 며칠 안에 탈환됐지만, 남베트남의 중요한 도시인 후에(Hue)는 달랐다.

(후에 전투 당시 양측의 점령 지역)

(기관총과 포를 발사하는 미군 탱크)

 

후에는 역사적으로도 베트남의 중요한 도시로 당시 남베트남의 대도시 중 하나였다. 응우옌 왕조의 황궁이 여기에 있으며, 또한 남베트남 측 반지엠 반티우 시위가 빈번히 일어나던 곳이기도 하다. 그런 지역이 1968년 구정 대공세에서 전쟁터로 변모했다. 후에 전투는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독일군과 소련군처럼 양측의 아주 치열한 공방전 속에서 1달간 전개됐다. 당시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의 목적은 후에에 임시혁명정부를 수립하고 재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이 지역을 폭격으로 파괴해서라도 되찾겠다는 의지를 보였으며, 이로 인해 전투가 격화되고 치열한 양상을 보였다. 당시 후에 전투에 참전했던 미 해병대 대원 빌 에어하트(Bill Ehrhart)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후에 전투 당시 미군 병사들)

(잔해 속에서 진군하는 미군 병사들)

 

저는 베트남에서 12개월을 사살할 자를 찾으며 지냈는데, 그럴 기회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여기 와서 보니 저와 제 동료들을 죽이려는 세상의 모든 북베트남군이 여기에 다 모인 것 같더군요. 아주 차원이 다른 전투였죠.”

 

무튼 후에에서 미 해병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선과 한국전쟁에서 경험했던 치열한 시가전을 다시 경험했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베트콩을 몰아낸다는 이유를 들어 대규모 융단 폭격도 가했다. 양측의 총격전은 치열했고, 정말 근거리에서 적군을 사살하는 일이 빈번히 벌어졌다. 당시 여성이면서 베트콩으로 후에 전투에 참전했던 참전용사 응우옌티호아(Nguyen Thi Hoa)의 얘기도 들어보자.

 

그들이 공격했을 때, 우리가 쏘지 않았더라도 분명히 그들이 우릴 쐈을 겁니다. 그래서 먼저 쏠 수밖에 없었어요. 그들이 보이면 먼저 총을 쐈죠. 3m 정도 떨어진 멀지 않은 거리에 있던 한 미군이 먼저 사격을 시작했는데, 저도 AK-47소총을 들어 조준한 후 총을 쏴서 그 병사를 사살했죠.”

(미군 폭격으로 파괴가 된 후에의 일반적인 모습)

 

미군 폭격의 양상도 극심했기에, 한 미 해병대원은 모든 집의 담을 뚫고 앞으로 나가야 했어요. 그처럼 아름다운 도시를 망가뜨려야 한다는 게 안타까웠습니다.” 26일 간의 교전 끝에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후에에서 후퇴했고, 이로써 후에 전투도 끝났다. 미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도시에서 최소 6,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죽었고, 전체 인구 14만 명 중 11만 명이 집을 잃었다. 심지어 어떤 기자는 후에 도시에 남은 게 강으로 나뉜 파괴된 잔해들뿐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후에 주변을 수색하는 미군 병사들)

(학살된 민간인의 시신을 찾기 위해 땅을 파는 사람들)

(시신을 옮기는 이들)

 

후에를 탈환하고 난 이후 대략 3월 쯤 미군들은 모랫바닥에 뭔가가 파묻힌 것을 발견했는데, 놀랍게도 민간인의 시신들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뒤통수에 총을 맞고, 손이 묶여 있었다. 이런 시신이 발견되자, 미국과 남베트남 측에선 후에 전투 당시 도시를 점령했던 이들이 학살을 벌였으며, 이 과정에서 2,800명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했다. 다큐멘터리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당시 미국과 남베트남측이 발표된 숫자가 현실보다 지극히 과장되어 추산되었고, 심지어 미군의 폭격으로 죽은 이들까지 베트콩의 학살로 둔갑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구정 대공세 당시 부상당한 병사들과 시신들)

 

현재 베트남 측에선 이에 대해 적잖은 반론을 내놓기도 한다. 거기다, 한국전쟁 당시 좌익들의 학살이 진상조사 과정에서 우익들이 한 것으로 상당히 많이 밝혀지기도 했으니, 후에 탈환 이후 남베트남군이 자행한 보복이 있었다는 점에서 진상조사 과정에서 또 다른 사실이 밝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숫자가 과장되었다 하더라도 베트콩이나 북베트남군에 의한 처형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닌 것으로 확인된다. 다큐멘터리에 나온 북베트남군 참전용사 호후란(Ho Huu Lan)는 후에 점령 당시 일부 남베트남 관리들에 대한 처형이 있었다고 얘기한다. 아래 그의 증언을 보자.

 

후에에서 사이공 관리에 대한 진압과 숙청은 잔혹했습니다. 그 얘긴 잘 안 꺼내요. 전 기꺼이 얘기하지만, 보통은 다들 꺼리죠. 저는 제가 아는 진실을 얘기하는 겁니다. 제게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다큐멘터리를 신중하게 만들어 주십시오.”

 

1개월간 지속된 구정 대공세는 군사적 측면에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참담한 실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미군은 2,500명이 전사한 데 비해,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37,000명이 전사했다. 거기다, 남베트남 도시 민중들이 이 봉기에 적극 가담한 것도 아니었으며, 역으로 병력의 위치가 노출되면서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효율적으로 소탕작전을 벌이는 역효과가 났다. 병력면에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큰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장기적인 측면에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정치적으로 승리했다. 왜냐하면 미국 내의 반전여론을 자극시킬 수 있었고, 여러 나라들에서도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운동이 강화됐기 때문이다. 구정 대공세 당시 현장을 직접 취재했던 CBS의 뉴스의 앵커 월터 크론카이트(Walter Cronkite)는 다음과 같은 보도를 했다.

 

우린 베트남과 워싱턴에 있는 미국 지도자들의 낙관론 때문에 너무나 자주 실망해 왔기에 어려움 속에도 희망이 있다는 그들의 말을 더는 믿기가 어렵습니다. 이 모든 증거에도 불구하고, 승리가 가깝다고 말하는 건, 과거에도 틀렸던 낙관론입니다. 그렇다고 패배 직전이라고 말하는 건, 터무니없는 비관론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교착상태에 빠졌다는 게 흡족하진 않더라도 유일하게 현실적인 견론인 것 같습니다.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상태에서 빠져나올 유일한 합리적인 길은 승자로서가 아니라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온 지조 있는 사람으로서, 협상에 임해야 한다는 겁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해 비관적으로 방송하는 월터 크론카이트)

(절망에 빠져있는 미국의 존슨 대통령)

 

구정 대공세로 인해 존슨 대통령은 대선에서도 위기를 겪게 됐다. 그는 재선하기 위해 다시 대선에 도전했는데, 민주당 선거에서 유진 매카시(Eugene McCarthy)를 겨우 꺾었으며, 그 다음에는 존 F. 케네디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Robert Kennedy)하고도 경쟁해야 했다. 이 둘은 존슨 정부의 베트남 전쟁 정책을 비판하며 지지를 끌어 모았었다. 20만 명 이상을 추가적으로 증강하려던 존슨은 13,500명만 베트남에 추가로 파병하는 것에 동의했고,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을 워싱턴으로 소환해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했으며, 부사령관 크레이튼 에이브람스(Creighton Abrams)가 주월미군사령관을 맡도록 결정했다. 또한 부분적으로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중지한다고도 밝혔다.

(1960년대 당시 미국 민간 항공기들)

(당시 미국 공항의 모습)

(당시 미국의 택시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저격당한 당시의 사진)

 

구정 대공세 초기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로저 해리스(Rogger Harris)는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후, 자신이 살던 미국 보스턴으로 다시 돌아갔다. 보스턴 로건 공항에 도착한 후, 택시를 타고 집에 가려고 하는데, 택시들이 해리스를 무시했다. 한 백인 경찰관이 그를 위해 택시를 세우고 태워달라고 얘기했지만, 택시 기사들은 태워주질 않았다. , 그 택시기사는 베트남에서 돌아온 해리스를 군인으로 보지 않고, 검둥이로 보며 인종차별을 한 것이다.

(킹 목사의 죽음을 밝히는 로버트 케네디)

(암살자에 의해 죽은 킹 목사, 이 사건으로 미국 내 인종전쟁이 심화됐다.)

(흑인 시위대를 진압하고자 투입된 미국 주방위군)

(체포작전을 같이 전개하는 미군과 미국 경찰)

(콜롬비아 대학교를 점거한 반전성향의 대학생들)

 

이처럼 여전히 미국에는 인종차별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해 4월 흑인인권운동을 위해 투쟁을 했던 마틴 루터 킹이 암살자가 쏜 총에 맞아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마틴 루터 킹이 암살당하자, 미국 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분노했다. 미국에서 최소 100곳 이상의 마을과 도시로 나와 시위를 했다. 워싱턴 DC에선 백악관이 떨어진 두 곳이 불에 탔다. 미국 정부는 수만 명의 병력을 배치하며 시가지를 순찰하도록 했고, 이 과정에서 46명의 미국인이 사망하고 2,600명이 다쳤으며, 나머지 20,000명이 체포됐다. 그리고 같은 달 반전성향의 대학생들이 콜롬비아 대학교 건물 여러 채를 점거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로써 미국은 인종전쟁과 반전운동이라는 미국 내부의 갈등과 격렬한 전쟁도 동시에 치르게 된 셈이다.

(북베트남군의 두 번째 대공세 지도)

(반격하는 미군 병사들)

(워싱턴 DC에 있는 베트남 전쟁 메모리얼, 전쟁에서 앞으로 더 죽을 이들을 다큐멘터리가 암시하고 있다.)

(베트콩 용의자를 지목하는 남베트남군, 저 베트콩 용의자는 어떻게 됐을까?)

(잔해 속에서의 전투)

 

196855일 북베트남은 또 다른 공세를 게시했으며, 남베트남에 있는 119개의 목표물을 공격했다. 이는 작은 구정 대공세라고 불렸으며, 이 공격도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차례대로 제압하면서 끝이 났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 측에선 이 공격으로 36,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이것이 통일에 대한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한편 미국 본토에선 민주당 의원인 로버트 케네디가 인기를 끌며, 대선 유세를 했는데 그 또한 암살당했다. 여전히 베트남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앞으로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이 철수하게 되기까지 27,184명의 미군과 수십만 명의 라오스인과 캄보디아인 그리고 남북 베트남인이 더 목숨을 잃게 된다는 점에서, 비극은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6화 리뷰가 쓰다 보니 평소보다 많이 길어졌네요. 다음에 7화를 리뷰 하도록 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4.3, 미국에 묻다
허호준 지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4843일 한라산을 중심으로 유격대의 봉화가 타올랐다. 43일에 시작된 봉화는 1954921일 제주경찰국장 신상묵의 명의로 포고문을 발표하며 한라산에 내려진 금족령이 해제되면서 공식적으로 끝났다. 194843일에 시작된 봉기는 결과적으로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진압됐고, 그 과정에서 무차별 민간인 학살이 동반됐다. 4.3 사건 당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대략 인구의 1/1030,000명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추산이다. 현재 북한에서도 30,000명 이상으로 추산하며, 제주 4.3사건 진상보고서도 대략 3만 명 정도로 보고 있다. 지금까지 진상조사로 확인된 사망자만 하더라도 최소 10,000명을 넘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숫자보다 더 높은 사망자 추산도 존재한다. 1949년 당시 제주지사가 미 정보국에 전달한 자료에 따르면, 제주도민의 사망자가 6만 명이라고 나와있다. 한국전쟁의 기원으로 유명한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2016년 제주4.3평화포럼에서, “보다 최근의 연구 자료에 따르면 제주 4.3으로 8만 명 정도가 사망했다는 추정치도 있다.”고 말했다. 이 두 가지 추산을 종합해보자면, 제주 4.3사건으로 억울하게 학살된 민간인의 숫자는 60,000~80,000명으로 제주도 인구의 1/5에서 1/4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제주도 인구의 4명 중 1명이 1948년과 1949년 사이에 있었던 무차별 학살로 목숨을 잃었다는 얘기다.

 

위에서 보는 것과 같이 제주 4.3사건은 명명백백하게 국가가 국민에게 무차별 적으로 행한 제노사이드에 해당한다. 호로위츠에 따르면, 제노사이드라는 개념은 국가기구에 의해 무고한 사람들을 구조적이고 체계적으로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 호로위츠가 규정한 정의를 고려해서 보자면, 제주 4.3사건 당시 발생한 무수히 많은 죽음들은 명명백백히 제노사이드(Genocide)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전두환 정권 당시가 학창시절인 이들은 단체관람 했던 영화 중 킬링필드(Killing Field)라는 헐리우드 영화를 기억할 것이다. 이 영화는 1970년대 캄보디아의 폴포트 정권에서 일어난 제노사이드를 다룬 영화다. 영화를 보면, 캄보디아인 주인공 디스 프란은 크메르 루주가 세운 강제 수용소를 탈출한 이후 사람들의 시신과 해골로 이루어진 곳을 목격한다. 당시 전두환 정권이 이 영화를 국민들에게 단체 관람하도록 한 목적은 반공주의를 합리화하기 수단이었고, 실제로 이런 영화를 통해, 북한에 대한 대북적대의식을 강화할 수 있었다.

 

우리 사회는 박정희 시절 똘이장군이나 헐리우드 영화 킬링필드를 보며, 반공주의적 의식을 길렀지만, 정작 우리 현대사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는 오랜 시간 동안 얘기를 하지 못했다. 우리 현대사의 크나큰 비극인 제주 4.3사건도 마찬가지였으며, 피해자들은 반공이라는 어두운 그늘 아래 침묵했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킬링필드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제주 4.3사건이 국민들 사이에서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것도, 87년 민주화를 쟁취한 이후이며 수많은 진상조사와 활동들을 통해 현재는 적잖은 국민들이 인식하는 비극의 사건으로 기억되는 자리까지 올랐다고 말 할 수 있다.

 

나는 제주 4.3사건이 일어난 지 70주년이 되는 2018년에 제주도를 방문했고, 첫날에 제주 4.3 박물관을 가족이랑 함께 들렸다. 당시 제주 4.3에 대해 단편적으로나마 알고 있었지만, 학살의 과정과 잔혹성에 진심으로 분노하고 경악했다. 제주도에서 벌어진 학살의 피해자들 중에는 도저히 남로당 게릴라라고 판단될 수 없는 여성과 노인, 어린이, 심지어 갓난아기까지 있었다. 도저히, 남로당측의 봉기군이라 판단할 수 없는 무고한 민간인들이 제주 4.3의 희생자였다는 점에서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학살을 주도한 세력은 미군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던 대통령 이승만과 초대 경무부장인 조병옥 그리고 미군정과 우익들이 파견한 친일경찰과 서북청년단 대원들이었고, 이들이 바로 제주도 대학살을 주도했다. 제주 4.3사건 당시 파견된 경찰과 우익 청년단 그리고 군대는 말 그대로 제주도라는 섬에서 광란의 학살극을 자행했고, 학살의 피해자는 순전히 제주 민간인들이었다. 심지어 학살 피해자의 80~90%는 이들이 저지른 것이었다.

 

그러나 제주 4.3사건에는 또 다른 책임자가 존재했다. 국부론을 집필한 애덤 스미스의 표현을 빌려 얘기하자면, 제주 4.3사건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미국(the United States)이었다. 1948년 제주에서 일어난 대학살에는 소위 미국이라는 존재가 아주 깊숙이 개입해있었다. 허호준의 표현을 빌려 얘기하자면, 제주 4.3사건 관련한 영상물에서는 상공을 날아다니는 미군 연락기, 미군 함정이 내뿜는 해안의 검은 연기, 낯선 이방인이 산야를 누비며 작전을 진두지휘하는 모습, 그 옆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두려운 눈빛의 제주사람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말은 미국이라는 존재가 제주 4.3사건에 얼마나 깊이 개입했는지 알 수 있는 방증일 것이다.

 

19484월 말에서 5월 초 진압군을 지휘한 김익렬과 유격대를 지휘한 김달삼 사이에서 잠시나마 휴전 및 총성을 멈추기 위한 평화협상이 있었다. 물론, 글쓴이는 이 협상이 지켜질 것이었다고 보지는 않지만, 일단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는 점에선 큰 의의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적 노력을 단번에 산산조각을 내버린 존재가 바로 하지가 이끄는 미군정이었다. 하지 사령관이 제주도에 보낸 브라운 대령은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오직 진압 뿐이다.”라는 태도로 토벌작전에 임했다. 양측의 협상이 깨진 것도 바로 브라운 소령의 이러한 태도 때문이었다.

 

제주 4.3을 대하는 미군정과 미국의 태도는 항상 일정했다. “공산주의자들을 뿌리 뽑아야하고, 제주 4.3은 스탈린과 소련 그리고 북한의 사주를 받은 공산주의자들의 적화와 테러를 막기 위한 것이다. 트루먼 행정부가 창조해낸 냉전이라는 이분법적인 반공주의 사고방식이 결국 제주도를 양민의 시체와 피로 뒤덮인 피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미국의 이런 반공주의 정책은 제주도 사태를 강경진압을 추진한 이승만이나 우익세력들과 항상 같은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반공주의 국가에 불만을 제기하거나 적응하지 못한 이들을 미국이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아주 명확히 보여준 사건이 바로 제주 4.3사건이었다.

 

미국은 제주 4.3사건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 대통령이던 해리 트루먼은 주한미군사령부와 주한미대사관 등이 본국에 보낸 각종 정보와 보고서를 통해, 제주도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미 국무부는 제주도에서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고 있었으며, “제주도에서 일어난 공산반란으로 최소 15,000명 이상이 공산주의자들이 살육되었다.”고 알고 있었다. 트루먼을 포함한 미국 지도부들에게 있어 제주도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그저 공산주의자들이었고, 인권이 유린되든 말든 무조건 죽여 마땅한 존재였다.

 

제주 4.3사건 당시, 미국은 이 사건에 개입하여 진압하는 데에도 아주 열정적이었다. 미국은 제주도에 파견된 경찰과 군대에게 물자와 장비를 지원했다. 심지어 제주도에서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던 극우 테러단체 서북청년단을 경찰과 군대에 편입시키는 것에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또한 유격대를 진압하기 위해 만든 군대 안에도 장교 출신의 미군고문단들이 적잖게 배치됐고, 실제로 이들은 군사작전을 지휘했으며, 진압군이 민간인들을 체포하고 사살하도록 적극적으로 도왔다.

 

무엇보다, 제주도에 투입된 미군들과 그 미군들을 지휘하는 미군정 및 주한미군사령부 등은 진압군의 무자비한 학살과 진압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이 죽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강경진압을 막는 그 어떠한 행동에도 착수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러한 학살을 군사작전 상에서 적극 지원하고 도왔다. 그들에게 있어 진압군이 죽이고 체포하는 대상은 공산주의자들일 뿐이며, 이 공산주의자들은 소련과 북한의 지령을 받고 자유민주주의 진영을 파괴하려는 존재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트루먼식 반공의 논리는 공산주의자 민간인은 대량으로 죽여도 된다는 인식을 미군들에게 심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48년 당시 미군정이 제주 4.3사건을 어떻게 대응했는지, 책에 있는 내용을 보자.

 

“5.10 선거가 가까워지면서 제주도 사태는 미군정 수뇌부의 직접 개입뿐 아니라 외신을 통해 보도되면서 국제문제로 비화되고 있었다. 딘과 워드의 제주도 동시 방문과 군정 수뇌부의 제주도 현지회의 뒤 미군정은 제주도 사태를 전면적인 유격전(full-scale guerrilla warfare)’으로 보고 진압을 강화했다.”

 

출처: 4.3, 미국에 묻다 p.163

 

아래는 진압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공공연히 말하던 미군정의 브라운 대령에 대한 책의 내용이다.

 

미군정 주도 하에서 전개된 토벌작전의 절정은 제6사단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의 제주도 파견이다. 5.10 선거 실패 이후 경찰의 증강에도 불구하고 무장대의 공세가 수그러들지 않자 미군정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아시아 대륙을 누볐던 야전군 출신 브라운 대령을 제주도 최고 지휘관으로 임명해 제주도 작전을 총지휘하도록 했다. 그는 고문관은 물론 제주도 주둔 경비대와 경찰의 작전을 지휘통솔하는 명실상부한 제주도 총사령관이었다.”

 

출처: 4.3, 미국에 묻다 p.180

 

2003년에 나온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이승만의 발언도 나온다. 아래 인용된 책의 내용을 보자.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미군도 진압작전에 나섰다. 미군이 어느 정도 작전에 참여했는지는 불확실하나 미 해군이 기항하여 호결과를 냈다는 이승만의 발언을 통해 미군의 역할을 일부 엿볼 수 있다라고 분석했다.”

 

출처: 4.3, 미국에 묻다 p.235

 

위의 세 가지 인용문만 보더라도 제주 4.3사건에서의 학살에 미군정과 미군 그리고 미국 정부가 크나큰 책임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놀랍게도 미국의 이러한 개입은 1949년에도 지속됐고, 1950년에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미국은 제주 4.3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여순사건을 진압하는 데에도 열정적이었다. 전라남도에 위치한 여수와 순천에서, 진보적 성향의 군인들이 이승만 정부의 무차별 폭력과 제주 4.3학살에 반대해 봉기를 일으켰는데, 미국은 이승만 정부와 더불어, 진압에 아주 열정적이었다. 여순사건은 군사고문단이 채택한 시스템에 대한 하나의 시험무대였는데, 한국군이라는 파트너에게 적절히 충고와 자문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줬다. , 미국은 이 여순사건에 아주 깊숙이 개입했다.

 

미국은 진압작전을 수행중인 송요찬의 부대가 해안선에서 5km 이외의 내륙지역을 적성지역으로 간주에 모든 것을 죽이고 불태우고 약탈하는 작전을 벌이고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학살극을 막으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 작전은 중일전쟁 당시 만주에서 일본군이 모택동의 홍군을 토벌하기 위해 사용한 작전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미국은 대통령 이승만이 19481117일 이른바 계엄령을 선포하여, 제주도민에 대한 무차별 민간인 학살을 정당화 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었음에도 이를 막으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런 학살극에 책임이 있는 이들을 반공국가의 수장으로 치켜세웠고, 민간인 학살을 동반한 진압작전을 수행한 군인들에게 훈장 및 상을 줬다.

 

제주 4.3사건 당시 악랄하기 짝이 없는 서북청년단을 비호한 것도 바로 미국이었다. 사실 이 서북청년단 대원들을 경찰과 군인에 편입시키도록 적극적으로 노력을 보인 주체가 바로 미국이었으며, 이들의 작전으로 적의 사살자 숫자와 무기의 숫자가 불균형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차별 민간인 학살을 중단시키기는커녕 이들의 토벌을 고무 및 장려했다. 심지어 미군들은 수차례에 걸친 제주도 정찰비행을 통해, 유격대의 집결지와 사령부 그리고 정부군과 반군간의 전투상황을 속속히 알려줌으로써, 학살극을 아주 적극적으로 도왔다. 아래에 있는 책 인용문을 보자.

 

미군 수뇌부의 제주도 사태에 대한 인식은 군에 의한 무차별 학살을 합리화했을 뿐 아니라 조장했다.”

 

출처: 4.3, 미국에 묻다 p.222

 

이처럼 미국은 제주 4.3사건에 깊이 개입했고, 학살과 진압작전을 도왔으며, 군사적인 측면에서 진압군을 적극 지원했다.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제주 4.3학살은 미국의 학살로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이러한 학살을 지휘하고 돕고 지원한 주체가 바로 미국이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읽은 허호준의 4.3, 미국에 묻다COVID-19가 한참이던 2021년 초에 출간됐다. 따라서, 기존에 제주 4.3사건 관련 자료에서 찾지 못했던 미국의 개입 관련 최신 자료들도 제법 보여주고 있으며, 한국 현대사를 공부하는 나에게 훌륭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많은 공부를 할 수 있게 만들어준 책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책이 제주 4.3사건 당시 미국의 역할을 제대로 규명하고, 상당히 의미있는 자료들을 통해서 사태의 본질을 추론했지만, 저자의 말대로 이를 직접적으로 명확히 입증할 수 있는 몇몇 자료를 확보하지 못했다. 책의 저자인 허호준은 김익렬과 김달삼 간 평화협상과 그 이후 사태 전개에 대한 주한미군사령부와 미군정의 지시 내용, 미 국무부와 군부의 제주도 사건 관련 지시 여부 등에 대한 새로운 사료가 더 발굴되야한다고 역설한다. , 이 말은 제주 4.3사건 당시 미국의 책임을 묻기 위해선 앞으로도 발굴되고 연구되어야할 자료와 사건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얘기다.

 

책을 읽으면서, 많은 공부가 되었지만 유난히 흥미롭게 다가온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제주 4.3사건 전후로 미국 및 서방권 언론들이, 자신들의 경쟁자인 소련 및 사회주의권을 악마화하기 위해, 근거 없이 퍼뜨렸던 가짜뉴스들이다. 당시 미국과 서방의 반공주의자들에 의해 각색되어 보도된 내용만 따진다면, 제주 4.3사건은 소련이나 북한에 의해 조작되어 만들어진 사건으로 판단할 수 있을 정도다. 물론 이러한 기사들은 제대로 된 근거를 밝히지 못했으며, 당연히 가짜뉴스였다. 아니 오히려 제주 4.3사건 관련해서는 소련의 보고가 더 정확했다. 1950년 당시 소련은 제주 4.3사건 당시 미군 고문관들의 명령에 의해 남한 정부가 35,000여 명의 주민들을 죽이고 1만여 채의 집을 파괴했다.”고 보고했다.

 

거기다, 1945년 이후부터 미국이 제주도에서 했던 정책들을 보면, 미국이 제주도민의 불만을 자극시킬만한 일들을 벌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46년부터는 제주도에다가 과거 일본에 협력했던 친일경찰들을 임명했고, 19473.1사건에서 시민 6명 이상을 죽인 책임이 있는 당사자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오히려 극우성향의 인사들을 임명함으로써, 제주도민의 불만을 자극했다. 더 나아가, 경제 문제에서도 민생을 파탄에 빠뜨리는 정책을 추진했고, 가뜩이나 먹을 게 없어서 굶주리던 제주도민들의 생활을 더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당연히 민생은 제주 4.3을 거치면서 더 악화됐다. 19504월 기준으로 대략 10만 명이나 되는 제주도민들이 심각한 기아에 빠져 풀을 뜯어먹고 연명하는 수준이었다. 미국의 제주도 정책이 얼마나 반민중적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근거다.

 

저자 허호준은 그리스 내전과 제주 4.3사건을 비교한 박사학위논문을 쓴 인물이다. 그는 1946년부터 1949년까지 미국이 개입했던 그리스 내전과 제주 4.3사건을 비교했다. 나는 제주 4.3사건이 과거에는 그리스 내전 그리고 미래에는 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그리스 내전 당시에도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는 그리스 민간인들이 좌파 게릴라를 지지하지 못하도록, 민간인에게 테러를 가하는 정책을 사용했다. 이 과정에서 민간인들의 대량 강제이주, 노조파괴, 체포, 구금, 네이팜탄 투하가 동원된 폭격 그리고 대량의 민간인 학살이 발생했다.

 

제주 4.3사건 이후에 벌어진 베트남 전쟁 또한 마찬가지다. 베트남 전쟁 초기 남베트남 군인들이 베트콩 가족을 살해한 데 대해 미군들은 그들은 게릴라의 친척이었고, 의심의 여지없이 베트콩에 동조적이었으며, 그들을 지원했다. 그들은 비전투원의 신분이 아니다라는 태도로 전투에 임했다. 이것은 초기 미군사고문단 개입시절에 있던 일이었다. 무엇보다 베트남 전쟁 초기 미국과 남베트남의 평정작전 이론은 농민들을 베트콩을 지지하지 못하도록 테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점에서 제주 4.3사건 당시 미국과 이승만 정부가 자행한 양민학살과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이제 2022년이 끝나가고, 2023년이 다가오고 있다. 이번 학기에 대학원 생활을 시작하면서 많이 바빴다. 그래서 예전보다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을 기회가 많이 줄어들었다. 영화 및 다큐멘터리 감상도 그러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시간을 내어 허호준의 저서 4.3, 미국에 묻다를 읽은 것은 여러모로 많은 지적 호기심을 제공하고, 공부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무엇보다, 반공주의가 사회 전체를 맴돌고 있는 상황에서도 미국이 자행한 폭력과 학살에 대해 이렇게 용기 있는 책을 써준 점에 대해 저자에 대해 깊이 감사한다.

 

많은 이들이 이 책을 끝까지 완독했으면 좋겠다. 이를 통해, 우리 현대사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역사를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쟁일기 - 우크라이나의 눈물
올가 그레벤니크 지음, 정소은 옮김 / 이야기장수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크라이나를 옹호할 이유를 못 느끼겠습니다. 네오나치 아조프가 학살한 것에 대해 눈을 감고 있다가, 전쟁 터지고 나서 혐러주의를 퍼뜨리는게 옳은 일인가요? 전 이 책 논조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newdvs117 2023-07-16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군더나 우크라이나 네오나치들이 오데사에서 노동자들을 집단학살하고,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이 노동법을 개악시켜(노동조합 권리 축소 및 박탈 + 노동자의 임금 지불 및 해고 여부를 고용주가 마음대로 결정) 노동자들을 비국민 취급하는 것을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