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5월 7일 프랑스군의 최종진지를 함락시킨 베트민)


올해 5월은 베트남에게 있어 아주 특별한 해다. 왜냐하면 베트남 현대사에 있어서 한 획을 그은 디엔비엔푸 전투(Chiến dịch Điện Biên Phủ, Battle of Dien Bien Phu) 승전 70주년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1954313일에 시작되어 57일 베트남의 승리로 끝난 전투다. 서구 제국주의 열강이던 프랑스가 식민지 지배를 당하던 나라에게 전쟁에서 패전한 전무후무했던 사건이었다. 그 당시 대다수의 서구의 지배계층들은 이 전투가 베트남의 승리로 끝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기도 하다. 반면에 베트남에게 있어 이 전투는 영광스러운 승리 그 자체였다. 디엔비엔푸 전투를 통해 100년간의 프랑스 식민지 지배를 종결시켰기 때문이다.

 

1. 디엔비엔푸 지역에 대한 설명

(디엔비엔푸 야경, 글쓴이가 직접 현장에서 찍은 사진이다.)

 

디엔비엔푸는 베트남 북쪽 디엔비엔 성의 성도로 길이 20km, 6km 분지 지형인 므엉타인(Mường Thanh) 계곡에 자리하고 있으며, 라오스 국경이랑 워낙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디엔비엔푸 시내는 라오스 국경이랑 대략 20km 정도 떨어져 있다. 인구는 대략 8만 명 정도며, 베트남 주 민족인 킨족은 전체 인구의 1/3 정도다. , 베트남 소수민족이 주로 거주한 지역으로 타이(Thai)족과 몽족(Hmong), 시라(SiLa)족 등이 거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쉽게 말해 디엔비엔푸는 베트남의 시골이며, 관광지로 알려진 곳은 전혀 아니다. 지난 20231월 글쓴이는 디엔비엔푸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숙소와 공항의 거리가 말 그대로 얼마 차이가 나지 않아서 놀랐었다. 디엔비엔푸로 가는 교통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10~12시간 이상 버스나 봉고차를 수도 하노이에서 타고 가는 법이다. 두 번째는 그것보다 비용이 조금 들더라도 하노이에서 출발하는 디엔비엔푸 국내선 비행기를 예매하여 비행기를 타고 가는 법이다. 비행기로 가는 경우 대략 1시간 정도 걸리며, 운항편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감안해야할 것이다.

 

이 곳이 유명한 이유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베트남 현대사에서 빠질 수 없는 상징적인 역사적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미국이 베트남을 침략하기 이전 프랑스가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벌인 전쟁 과정에서 일어났다. 디엔비엔푸 전투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2. 프랑스의 가혹한 식민지 지배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베트남의 근현대사를 보면,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운 저항의 역사다. 1850년대 프랑스는 베트남의 항구도시 다낭에 상륙하면서 베트남을 식민지 지배했고, 대략 100년간 이 지역을 지배했다. 인도차이나라 불린 지역을 북부 통킹, 북부와 중부 안남, 남부 코친차이나, 라오스, 캄보디아로 나누어 지배했다.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는 말 그대로 그 지역 민중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1941년 통계에 의하면 베트남의 문맹률은 90% 이상이었고, 병원이나 학교가 매우 부족했으며, 그와 반대로 술집과 아편 흡인장소 그리고 매춘이 프랑스 식민권력에 의해 창궐했다.

 

프랑스는 베트남의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것에도 열정을 다했다. 1930년 베트남 북부와 중부에서 반프랑스 봉기가 일어나자, 프랑스는 강력한 군대를 동원하여 이를 진압했다. 심지어 프랑스는 전투기도 동원했다. 적잖은 독립운동가들과 민중들이 체포되고 죽었으며, 베트남 공산당이 봉기를 주도했던 응에안 성 소비에트의 경우 프랑스군 전투기의 폭격으로 200명이 죽는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베트남 측 시위대를 전투기로 진압했다는 사실에서 프랑스 식민주의의 지배 및 통치가 얼마나 가혹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일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는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당했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이 인도차이나를 접수했다. 일본은 나치가 앞세운 비시 프랑스 정권과 함께 인도차이나를 통치했다. 이들의 통치도 매우 가혹했다. 1945년 일본의 공출로 베트남에선 기근이 발생하여 최소 40만 명에서 많게는 200만 명이나 되는 베트남인이 아사했다. 이와 같은 현실 속에서 한 베트남 독립운동 단체가 구세주 역할을 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베트남독립동맹 즉 베트민(Viet Minh)이다.

(보 응우옌 지압 장군, 베트남의 명장으로 일본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의 침략을 무찔렀다. 2013년 10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베트민은 1941년 초 중월국경지대에서 창설된 독립운동 단체였다. 단체를 창설한 인물이 바로 베트남의 국부인 호찌민(Ho Chi Minh)이었고, 그 군대를 지휘한 장군이 바로 보응우옌지압(Vo Nguyen Giap)이었다. 베트민은 창설시점부터 프랑스 제국주의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저항할 것을 촉구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1945년 베트남 북부 지역에서 기근이 발생하자 베트민은 일본군의 곡식창고를 습격하여 이를 농민들에게 분배했다. 따라서 베트민은 민중의 대대적인 지원 및 지지를 얻을 수 있었고, 19458월 일제가 패망하자 전국적인 총 봉기를 일으켜 정권을 잡을 수 있었다. 194592일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호찌민은 이른바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며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미 베트남은 강대국들에 의해 분단이 결정된 상황이었다. 베트남에는 장제스가 지휘하는 중국 국민당군과 더글라스 그레이시(Douglas Gracey)가 지휘하는 영국군이 주둔하게 됐다. 이건 1945년 얄타 회담과 포츠담 회담에 따른 결과였다. 물론 영국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인도차이나를 프랑스 측에게 양도했다. 반면에 국민당은 1946년 초 자국 내의 내전을 대비하여 철수했다. 인도차이나에 다시 들어온 프랑스는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 지배할 궁리를 했다. 호찌민이 독립을 선포하기가 무섭게 베트남에는 옛 지배자인 프랑스가 다시 베트남에 입성했다.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자로써,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화 하고자 했다. 베트남과 프랑스의 충돌은 사실상 예고된 것이었고, 여기서 발발한 전쟁이 바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항불전쟁)이었다.

 

194611월 프랑스는 하이퐁을 포격 및 폭격하여 당일 6,000명의 민간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포격 및 폭격으로 발생한 민간인 부상자는 25,000명 정도에 달한다. 하이퐁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한 프랑스군은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수도 하노이를 그해 12월에 점령했다. 이것이 바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즉, 항불전쟁의 시작이었다. 전쟁은 주로 베트남 북부와 통킹 지역에서 치러졌다. 어쨌든 전쟁 초기 프랑스는 최신식 탱크와 비행기 그리고 군함과 대포로 무장했고, 게릴라전을 전개하는 베트민을 상대로 압도적인 화력 우세를 보였다. 그러나 베트민은 항불항전 전략을 1·2·3단계로 이론화했다. 당시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총비서인 쯔엉찐은 1947년에 쓴 글에서 방어에 치중해야 하는 1단계, 아군과 적군이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2단계, 아군이 총반격에 나서는 3단계로 설정했다.

(베트남의 국부 호찌민, 현재까지도 베트남 사람들이 진심으로 존경하는 인물로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한 평생을 베트남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1969년 미국에 맞서 싸우던 중에 생을 마감했다.)

 

실제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전투는 그렇게 전개됐다. 프랑스는 전쟁을 단기간에 승리로 이끌기 위한 계획을 세워 이른바 레아 작전(Operation Léa, Chiến dịch Việt Bắc)을 실행했다. 이들은 공수부대까지 투입하여 수천 명의 베트민군을 사살하거나 생포했다. 그러나 작전에서 목표로 했던 호찌민을 생포하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이 전투 이후 프랑스는 1950년까지 전선이 교착되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반면에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이 지휘하는 베트민은 민중들의 지지를 얻으며 해방구를 확장했고, 1950년에는 중월 국경지대에서 대대적인 반격을 하기에 이른다. 거기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고, 소련이 핵개발을 하면서 미소냉전이 보다 격화됐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중국과 소련이 호찌민의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지원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반면 프랑스는 반공을 내세우는 미국의 지원을 받았으며. 자신들의 꼭두각시인 바오다이 황제를 내세워 식민지 전쟁을 반공주의 이념전쟁으로 포장하려고 획책했다. 이 부분에 대해선 아래 장인 4장을 통해 보도록 하겠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 전쟁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베트남인들의 독립을 위한 전쟁이었다. 그리고 이 전쟁은 너무나도 압도적으로 베트민이 대중적 지지를 받을 수밖에 없던 전쟁이었다. 베트남인들 대다수는 프랑스의 군사적 행동을 식민지 지배라고 생각했다. 당시 호찌민의 연설을 보면, 이 전쟁의 성격은 너무나도 분명해진다.

 

베트남 혁명의 주요한 과업은 제국주의 침략을 분쇄하는 것이며, 완전한 독립을 이룩하고 베트남을 재통일하는 것이며, 모든 형태의 봉건적 착취를 일소하고, 논을 경작자에게 돌려주고, 사회주의로 향하는 것입니다.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은 봉건주의에 대한 투쟁과 유사합니다. 그러나 현 단계에서 혁명의 주요한 목적은 우리 조국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혁명의 적들은 제국주의 침략자들과 그 앞잡이들입니다. 혁명의 창끝은 그들을 겨냥해야 합니다.”

 

1950년부터는 국제정세 및 전황이 베트민에게 유리하게 전개됐다. 우선 19501월 중국과 소련이 베트남민주공화국과 수교를 맺었다. 마오쩌둥은 베트민을 위해 군사고문단 파견과 장비 및 물자를 지원했고, 이에 따라 베트민의 무장력도 강해졌다. 1950년 가을 베트민은 중월국경지대에서 프랑스 정예군 1만 명을 격퇴했으며, 이를 통해 프랑스군을 향한 공세를 강화하게 됐다. 중월국경지대에서 벌어진 동케 전투의 경우 프랑스 최정예 부대인 외인부대를 포함하여, 프랑스군 300명이 전사하고 적잖은 탄약과 무기를 확보했었다. 베트민이 전개한 중월국경지대에서의 총 반격으로 프랑스군은 수천 명이 전사하고, 또 다른 수천 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동케 전투를 지휘하고 있는 호찌민)

 

이와 같은 중월국경지대 전투가 있은 직후인 1951년 초 베트민은 홍강 삼각주와 하노이를 향해 공세를 가했다. , 앞서 언급한 3단계 작전을 실행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으로부터 물자지원을 받은 프랑스군의 네이팜탄 폭격으로 큰 전투에서 네 차례나 패전했다. 결국 베트민은 이 방어선에 철저히 막혀 도리어 수천 명 이상의 큰 사상자만 남긴 채 하노이 함락에 실패했다. 그러나 베트민은 그 이후 다시 승기를 잡았다. 195110월 초 프랑스군 15개 연대가 두옌하, 훙난 그리고 띠엔 훙 지구에서 베트민과 대규모 전투를 시작하여 격렬한 전투를 치렀고, 여기서 베트민이 승리했다. 꽁호와 안미 그리고 안빈 이 세 지역에선 500명의 프랑스군이 전사하기도 했었다. 1952년 베트민은 호아빈에서 벌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정규전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1952년 겨울 라오스 쟈로 평원과 1953년 삼네우아 해방, 1953년 나산 전투에서의 승리 등으로 다시 승기를 잡았다. 또한 베트민은 베트남의 중부지대와 중부 고원지대 그리고 남부에서도 승리를 이룩했다.

 

1953년으로 접어들면서, 서구 열강들은 교착상태에 빠진 한국전쟁을 휴전회담을 통해 합의를 보려고 했으며, 인도차이나 또한 그러했다. 19535월 앙리 나바르 장군이 프랑스극동원정군의 새로운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프랑스 측의 전황은 암울했다. 베트남민주공화국은 라오스의 저항조직 파테트라오를 지원했고,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은 프랑스가 세운 괴뢰국의 수도 사이공을 함락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프랑스는 이를 막기 위해 라오스 국경지대에 대규모 요새를 세웠고, 이게 바로 디엔비엔푸였다.

 

3. 디엔비엔푸 전투의 전개과정과 승리

(디엔비엔푸 전투에 투입된 프랑스 공수부대)

 

19531120일 오전 630, C-47 정찰기 1대가 디엔비엔푸 마을을 선회하며 폭격을 가했고, 이후 64대 이상의 프랑스군 정찰기에서 공수부대가 투하됐다. 당시 이들이 낙하한 곳에는 베트민 2개 중대가 있었으며, 양측의 전투가 발생했다. 프랑스군도 최소 40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왔고, 베트민의 2개 중대도 적잖은 병력이 손실됐다. 이후 앙리 나바르는 이 디엔비엔푸에 요새를 만들기 시작했고, 최소 11,000명 이상의 병력을 디엔비엔푸에 배치했다. 디엔비엔푸 요새를 세운 프랑스군 중 일부는 이 요새에 겁먹은 베트민들이 감히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는 오만하고 오리엔탈리즘적인 망상과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물론 이는 전혀 근거가 없는 프랑스군의 망상이었다.

 

이와 같은 프랑스의 망상은 당시 프랑스 여론에서도 드러났다. 예를 들어, 공수부대의 투하가 프랑스에 알려지자 로로르라는 프랑스 신문은 1면에 앙리 나바르가 베트민에게 새로운 공격을 가했다. 수천 명의 공수부대원이 디엔비엔푸를 점령했다. 프랑스군은 인도차이나에서 군대의 용맹과 지도자의 권위를 확인했다.”라는 표제를 달았다고 한다. 말 그대로 프랑스는 베트민의 군사적인 능력을 너무나도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은 딩인비엔푸 전투를 회고한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쓰기도 했다.

 

나바르는 디엔비엔푸를 보강하고 우리 정규군을 상대로 전투를 수행한다는 전략적 결심을 확고하게 견지했다. 그리고 이 일대를 우리가 계곡을 공격하더라도 심각한 손실을 입힐 수 있는 이상적인 전장으로 여겼다. 나바르가 이 진지에 집중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저지른 실수는 디엔비엔푸의 장점에만 주목했을 뿐, 약점을 보지 못했다는 데 있다. 더 큰 실수는 부르주아 전략가의 개념에 골몰하여 국가의 독립, 자유, 그리고 사회주의를 구하기 위해 싸우고 있던 인민군과 전 인민들의 어마어마한 가능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우리 인민과 군의 진화와 괄목할 만한 성장, 그리고 필승의 신념을 가진 인민군의 불굴의 투쟁정신을 깨닫는 것은 나바르에게 여전히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

 

호찌민과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이 지휘하는 베트민은 중국으로부터 받은 소련제 트럭을 활용했고, 5만 명의 병력과 26만 명이나 되는 민간인을 동원했으며, 산길을 지나 물자와 화기를 운반했다. 이들은 중포와 방공포도 운반해 기지에 배치했다. 베트민 병사들은 직접 포탄을 머리에 이고 날랐으며, 대포를 맨손으로 끌고 갔다. 당시 어떤 베트민 병사는 대포를 옮기다가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해서 임무를 수행했다. 말 그대로 베트민에게 있어 이것은 총력전이었다. 전 민중이 베트남의 독립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단결했다. 당시 베트민 부대들은 프랑스군의 항공기가 정찰하면, 풀숲이나 밀림에 숨었으며, 정찰기가 사라진 이후 다시 진격했다.

(대포를 운반하는 베트민 병사들을 표현한 모형, 글쓴이가 디엔비엔푸 박물관에 들렸을 때 직접 찍은 사진이다.)


(디엔비엔푸 베트민 사령부가 있는 곳, 글쓴이가 직접 현장방문하여 찍은 사진이다.)

 

프랑스군 디엔비엔푸 요새에 대한 본격적인 제1차 공격은 1954313일에 시작됐다. 밀림 속에 잠복해 있던 베트민군의 대포가 계곡 바닥에 모여 있는 프랑스군에게 분당 50발의 포를 쏘아대기 시작했다. 1차 공격으로 프랑스군은 활주로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물자보급과 병력 보급은 프랑스군의 항공기로부터 낙하산 투하에 의존하게 됐으며, 프랑스군 포대 지휘관인 피로트는 전투가 시작된 이후 충격을 받아 스스로 자살했다.

 

1954315일에는 프랑스군의 요새 가브리엘과 앤 마리 이 두 곳이 베트민군의 공격을 받고 붕괴되었다. 다음 날인 16일 프랑스군은 병력을 증강했으며, 전투를 통틀어 총 16,200명의 프랑스군 병력이 디엔비엔푸 전투에 투입됐다. 327일 베트민은 프랑스의 엘리안느 1기지를 확보했으며, 활주로 중앙에 포탄을 퍼부었다. 330일 베트민은 이른바 A1 고지라 불린 엘리안느 2기지에서 프랑스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당시 프랑스군은 A1 고지에 견고한 지하 벙커를 건설했으며, 기관총을 비롯한 중화기로 무장한 최정예 부대를 배치해 항공기의 폭격 지원을 받으며 진지를 지켰다. 베트민군은 330일부터 43일까지 5일간 연속적으로 공격을 퍼부었으며 고지의 절반을 차지했다.

(베트민 측 대공포 부대)

 

이후 A1 고지에서의 전투는 소강상태에 있다가 51일 다시 시작됐다. A1 고지가 완벽히 점령당한 것은 195456일 베트민 부대가 프랑스군의 철통같은 방공호에 1,000kg의 폭탄을 터뜨린 다음 고지를 점령하면서였다. 다음 날인 57일 오후 4시 반에 완전히 점령했다. 이 전투에서 베트민군은 비밀 터널을 굴착하고 1톤의 지하 폭발물을 설치하여 진지 대파 후 최후의 승리를 이끌었다. 이들은 교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이러한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베트민은 1차 공격을 실행한 이후 프랑스군의 거점을 차례로 점령했다. 베트민은 대공 방어 진지를 증강했으며, 프랑스군 수비대의 방어 진지는 점차 감소했다. 1954329일 베트민은 비행장 동쪽과 남쪽 그리고 남영강 동쪽 고지를 점령했으며, 야포와 박격포 사격을 가한 뒤 4개 주요 진지를 점령하고자 지뢰밭과 철조망 방어 지대를 지나 공격했다. 프랑스군의 희생이 급증하자 신병들은 밀림 속으로 도주했다고 한다. 41일 지압 장군이 디엔비엔푸에서 직접 북베트남군을 지휘했다. 당시 프랑스군의 막강한 항공 화력 및 공세로 베트민의 사상자가 수천 명이나 됐다고 하며, 지압 장군은 더 신중한 방법을 선택하여 적은 인원으로 프랑스군 진지에 바짝 다가가서 참호를 부수는 작전을 사용했다.

 

1954410일 이후 잠시나마 디엔비엔푸 전투는 소강상태로 들어갔는데, 그 동안 프랑스 공군은 디엔비엔푸에 병력을 증강하고 탄약과 식량을 공중 투하했다. 대략 4,000명 이상의 최정예 공수부대가 디엔비엔푸 전투가 전개되는 중에 증원됐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보급품은 번번이 베트민 쪽에 떨어지기도 했다. 지압은 휘하 병력 35,000명과 압도적인 야포와 박격포 그리고 대공 화기로 프랑스군 참호를 격파했다. 지압 장군이 지휘하는 베트민군이 마지막 공세에 나선 것은 1954429일에 이르러서였다. 5월 초부터 베트민은 디엔비엔푸의 외곽 방어선까지 돌파했으며, 내부의 프랑스군 요새를 포격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프랑스군의 내부 방어진지가 하나씩 함락되었고, 앞서 언급한 A-1 고지도 그렇게 함락됐으며, 디엔비엔푸의 지휘관 드 카스트리가 있던 지휘부 요새도 백기를 들었다. 이에 대해 지압 장군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총공격을 위한 준비가 끝났다. 195457일 오전, 작전 성공을 보장하기 위한 준비가 한창 진행 중일 때, 적이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극소수의 항공기가 식량만을 공수 투하할 뿐, 탄약을 운반해 온 항공기들은 하노이로 돌아갔다. 적 지역 여기저기서 무기를 파괴하는 것 같은 폭발음이 들려왔다. 일련의 병사들이 무기와 탄약을 넘롱강에 던져 놓고 있었다. 우리는 적이 혼란에 빠졌다고 판단했다. 아군은 준비 명령을 수령했다. 14:00, 어느 아군 부대가 507번 거점을 공격했다. 적은 미미한 저항 끝에 항복했다. 이 승리에 이어 우리는 넘롱강 좌안의 508, 509번진지를 소멸시켰다. 적이 큰 혼란에 빠져 전투 의지를 상실했음이 명백해졌다. 백기가 여기저기에 내걸렸다. 15:00, 우리는 밤이 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집단전술기지에 대한 총공격을 곧바로 실시하라고 명령했다. 아군 여단들은 동쪽과 서쪽에서 상호 협조 하에 적 지휘소를 직접 타격했다. 비록 적은 아직 10,000명이나 남아있었지만 완전히 사기가 저하된 상태였다. 아군이 가는 곳마다 적은 백기를 들고 항복했다. 17:30, 우리는 지휘소를 탈취했다. 드 카스트리와 참모들은 모두 생포되었다. 계곡에 있던 모든 적들이 나와서 항복했다. 그들은 포로로서 잘 취급되었다. ‘결전필승이라는 구호가 적인 깃발들이 디엔비엔푸 상공에 휘날렸다.”

 

이에 대해 호찌민은 다음과 같은 축하서한을 보냈다.

 

우리 군이 디엔비엔푸를 해방시켰습니다. 정부와 저는 우리 모든 장병, 전시 근로자, 청년 의용대, 지역 주민들이 부과된 각자의 과업을 획기적으로 완수한 데 대해 경의를 표합니다. 그러나 승리는 위대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마지막으로 함락된 프랑스군 참호 실제 사진)

 

결과적으로 디엔비엔푸 전투는 베트민의 승리로 종결됐다.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총 2,293명 전사, 6,650명 부상 그리고 1,729명이 실종됐다. 대략 11,721명이 베트민군의 포로로 붙잡혔으며, 미군 2명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베트민의 경우 최소 4,020명에서 많게는 8,000명 이상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대략 1만 명 정도 전사했다고 추산하는 경우도 있다. 병력 55,000명 중에 대략 25,000명의 사상자가 나왔다고 한다. 디엔비엔푸에서만 최소 62대의 프랑스 측 항공기를 격추시켰고, 그 시기 다른 전선에서 베트민은 177대를 격추했다고 한다.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민 병사들이 보인 용기와 불굴의 의지는 당시 적이었던 프랑스군 지휘부로부터도 인정받았다.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민의 포로로 붙잡혔던 비제아 중령은 베트민을 마음속으로 존경했다.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난 이후 비제아 중령은 베트민에 대해 존경심을 드러내며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베트민에게 포로로 붙잡힌 프랑스군 포로 행렬)

 

그들은 사냥총과 같은 치졸한 무기를 가지고 전투를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전쟁 준비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분대에서 중대로, 대대에서 연대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완전한 사단으로 성장해 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보았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베트민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보병이었다고. 이 인내심 강한 병사들은 운동화에, 밥 한 공기만으로 하룻밤에 50km를 행군했다. 그리고 전투에 임해서는 군가를 불렀다. 이처럼 뛰어난 보병이었기 때문에, 디엔비엔푸에서 우리를 패배의 수렁으로 몰아갔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가 병력에서 수적으로 열세였고 프랑스에서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들이 미군도 격퇴시켰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들은 아주 뛰어난 보병이었다.”

 

4. 미국 제국주의의 프랑스 식민지 전쟁 옹호 및 지원

(디엔비엔푸 전사자 묘역)

 

디엔비엔푸 전투는 100년간 베트남에서 지속된 프랑스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종결시켰다는 사실에서 아주 위대한 승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라는 역사에는 주목해야할 또 다른 역사가 있다. 그것은 바로 미제국주의의 인도차이나 전쟁 개입이다. 사실 미국이 처음부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를 지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949년 미소냉전이 본격화되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미국은 프랑스를 지원하게 됐다. , 여기서 반공의 논리가 작용했으며, 프랑스도 이 전쟁을 반공 이념전쟁으로 포장하려 했다. 물론 프랑스 식민지 전쟁이라는 본질이 전혀 바뀌지 않았지만, 미국과 프랑스는 반공과 제국주의 그리고 식민주의라는 자신들이 가진 모순 그 자체에 빠져버렸던 것이다.

 

미국의 군사물자 원조는 19511,490억 프랑에서 19521,960억 프랑으로 증가했고, 인도차이나로 항공기, 전투차량, 중화기, 탄약, 상륙함, 차량, 무전기, 네이팜탄, 연료를 신속히 보내주었다. 미국은 1952년에 프랑스 전쟁 비용의 40% 1953년에는 50%를 부담했다. 1954년에는 이 수치가 대략 80%까지 상승했다. 마이클 매클리어가 쓴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 따르면, 미국은 전쟁이 끝나가던 1954년 대략 10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과 1,400대의 탱크와 340대의 비행기, 350대의 정찰 보트, 24만 정의 소총 및 기관총, 1,500만 발의 탄약 등을 프랑스에게 지원했다고 한다. 미군 정규군이 들어가지 않았을 뿐 사실상 미국이 이 전쟁을 치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규모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미국의 개입은 디엔비엔푸 전투가 전개되는 와중에도 확인이 된다. 비록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미국 및 프랑스 지도부는 소위 독수리 작전(Operation Vauture)’을 감행하고자 했다. 이것은 오키나와와 필리핀에 주둔한 미국 공군기지의 전투기를 출격시켜 디엔비엔푸 요새에서 공격을 감행하고 있는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의 군대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공습을 가한다.”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미국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전술핵무기 3발을 사용할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물론 이 두 가지 옵션은 실행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선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의 회고록 내용을 보자.

 

“19544월 초순, 프랑스와 미국 장군들은 디엔비엔푸가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고 보았다. 그와 동시에 프랑스 정부는 기지에 병력을 증원하기위해 미국에 전투기 대대와 중폭격기 대대 파견을 공식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 관료 사회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국가들도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은 항공기 투입으로도 프랑스 원정군을 구할 수는 없으며, 국내외 여론의 심각한 비난에 직면할 뿐이라고 판단했다. 결국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앞서 언급한 전술핵 관련 부분은 올리버 스톤과 피터 커즈닉이 집필한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 윌슨에서 케네디까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아래의 내용을 보자.

 

래드퍼드 합참의장과 나(미 공군 참모총장 네이선 트와이닝)는 전술핵무기 3발 정도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도 그것이 좋은 아이디어였다고 생각한다. 상당히 고립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한 발만 떨어뜨려도 기선을 제압할 수 있다. 반대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 다음 남은 빨갱이들을 쓸어내면 프랑스군은라 마르세예즈(프랑스 국가)’를 연주하면서 멀쩡하게 디엔비엔푸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빨갱이들은 이럴 것이다.‘, 저놈들 우리한테 또 그럴 거야. 조심해야겠어.’”

 

또한 디엔비엔푸 전투에 참전한 미군도 있었다. 이들은 민간업자로 위장한 CIA 요원이었으며, 이들 중 2명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 중 한 명은 2004CIA가 비밀 해제한 정보에 따르면 맥거번 2세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으며, 이후 민간 조종사로 CIA에 고용된 인물이었다. 미국은 디엔비엔푸 전투 당시 식민지 지배자 프랑스를 돕기 위해, 비밀리에 CIA 요원을 민간업자로 위장시켜 물자를 비행기로 수송했던 셈이다. 정리하자면 미국의 제국주의는 자신들이 베트남 전쟁을 일으키기 전부터 프랑스의 부도덕한 식민지 유지 전쟁을 반공이라는 논리로 포장하면서 도왔던 것이다. 따라서 미제국주의자들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개입은 마땅히 규탄 받고 강력히 비판 받아야할 역사적 사실이다.

 

5. 디엔비엔푸 전투 승전의 현재성

(디엔비엔푸에 있는 승리 기념상)

 

디엔비엔푸 전투가 베트남의 승리로 끝난 이후 베트남은 미제국주의의 침략과 신식민주의적 지배에 맞서 다시 한번 저항해야 했지만, 디엔비엔푸 전투가 제3세계 인민들의 탈식민화 운동에 준 영향은 실로 막대했다. 특히나 프랑스의 또 다른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경우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독립전쟁이 발발했고, 1962년에 독립을 쟁취했다. 그 시기 미제국주의자들과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의 프랑스군의 영웅주의를 칭송했다면, 소련과 중국은 베트민 전우들의 승리를 환영했다. 어찌됐든 디엔비엔푸 전투는 냉전시기 탈식민주의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반제국주의 투쟁사에 앞으로도 길이 남을 위대한 승리다.

(디엔비엔푸 승전 70주년 열병식)

 

2024년인 올해는 디엔비엔푸 전투 승전 70주년이 되는 해다. 현재 베트남에서는 디엔비엔푸 전투 70주년 행사를 대대적으로 준비하고 있다. 글쓴이는 페이스북에 베트남 친구들이 많은데 이 중 한 사람은 열병식 연습을 하고 있다. 그 외에도 베트남 친구들의 페이스북에서 디엔비엔푸 전투를 기념하는 여러 포스팅들을 쉽게 확인하고 있다. 이제 70년도 더 지난 현대사의 한 획을 그은 디엔비엔푸 전투가 과연 현재성이 없을까? 글쓴이 전혀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 이유는 현재까지도 아프리카를 비롯한 이른바 제3세계 나라에선 서구의 경제적 지배에 맞선 항쟁들과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팔레스타인에서는 이스라엘의 제국주의적 지배에 맞선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영미 제국주의자들이 후티를 축출한다는 명분을 들어 예맨을 폭격했지만, 이들의 저항 앞에 제국주의자들은 먼저 협상을 제안하기도 했다. 지난 2023년 여름 니제르에서 시작된 반프랑스 봉기는 아프리카 사헬 지대를 거쳐 거세게 일어나고 있으며, 서구의 경제적 지배에 저항하고 있다. 이처럼 서구 제국주의 열강에 저항하는 움직임은 지금도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이러한 움직임에 훼방을 놓고 간섭을 하는 주체는 미국 제국주의 자신이다. 마치 이들이 베트남에서 프랑스 식민지 전쟁을 도왔듯이 말이다. , 지금도 이와 같은 제국주의의 지배와 간섭에 맞선 저항이 이른바 서구 일극패권체제에 반대하는 나라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전은 지금도 의미하는 바다 크다.

 

지난 20231월 글쓴이는 베트남을 여행하며 디엔비엔푸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 당시 글쓴이는 디엔비엔푸 승전 박물관과 A1 고지,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이 지휘한 베트민 사령부 진지 및 프랑스군 사령관이 항복한 참호까지 두루 관광했다. 글쓴이는 베트남 민중의 항쟁 유적지를 돌아보며 깊이 감동했다. 현재 우리들 앞에 전개되고 있는 국제정세는 점차 반제국주의 진영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앞서 언급한 제3세계의 반제국주의 항쟁이 보여주듯이, 디엔비엔푸의 영광스러운 승리는 또 다른 국가에서 반복될 수 있다. 따라서 디엔비엔푸 전투 승전 70주년이 제3세계 해방전사들에게 주는 역사적 의의는 막대하다. 이 글이 많은 이들에게 반제항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이상으로 긴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참고문헌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 옮김,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을유문화사, 2002.

보응웬지압, 강범두 옮김, 디엔비엔푸, 길찾기, 2019.

소볼레프·콘스탄티노프 외 지음, 김영철 편역, 반제민족통일전선 연구 - 인민민주주의 혁명론 및 각국의 혁명사례 분석, 이성과 현실, 1988.

송필경, 왜 호찌민인가?, 에녹스, 2013.

R.B. 에스프레이, 편집부 옮김, 세계게릴라전사 3, 일월서각, 1989.

올리버 스톤·피터 커즈닉, 이광일 옮김,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 윌슨에서 케네디까지, 들녘, 2015.

윌리엄 J. 듀이커, 정영목 옮김, 호치민 평전, 푸른숲, 2003.

유일상, 베트남 역사문화기행, 하나로애드컴, 2021.

이재원, 인도차이나전쟁과 프랑스 식민주의 이념, 홍문각, 2023.

David Halberstam, Ho,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2007.

Kevin Boylan & Luc Oliver, Valley of the Shadow: The Siege of Dien Bien Phu, Osprey, 2018.

Marilyn B. Young, The Vietnam Wars 1945-1990, Harper Prennial, 1991.

Nguyen Khac Vien, Vietnam a long history, The Gioi Publishers, 2015.

William J. Duiker, The Communist Road To Power In Vietnam, Westview Press, 1981.

윤충로, 베트남 혁명과정에 관한 연구,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6.

정재현, 195457일 디엔비엔푸 요새의 함락과 프랑스 식민지 제국의 해체, 프랑스사 연구48, 한국프랑스사학회,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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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시선, 문화의 기억 서강학술총서 103
이재원 지음 / 서강대학교출판부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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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프랑스 제국주의 비판인가?

많은 사람들이 ‘제국주의(Imperialism)‘ 하면, 세계사 시간에 배우는 19세기 시대의 서구 열강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현재도 제국주의가 존재한다고 얘기한다면, 그 말부터 의심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보는 이유는 간단하다. 소위 19세기 제국주의 열강은 알지만, 그 제국주의 열강이 20세기와 21세기에 들어서 다른 국가들에게 했던 일에 대해선 상당히 무지하기 때문이다. 대영제국이라 불리기도 하는 영국을 한번 보자. 많은 사람들이 대영제국이라는 말은 알지만, 정작 그 대영제국이 20세기와 21세기에 했던 일에 대해선 잘 모른다.

예를 들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라는 출처 불명의 명언 주인공으로 알려진 처칠이 인도와 케냐 그리고 말레이시아 등에서 식민지를 유지하려는 전쟁을 벌인 장본인이었고, 그리스 내전의 책임자 중 한 사람인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또한 영국이 21세기에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리비아에서 부당한 침략전쟁을 벌인 사실에 대해 상당히 무감각한 모습을 사람들이 보이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영국과 함께 세계 분할에 앞장섰던 프랑스는 어떠할까? 프랑스 또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태평양 일대에 수많은 식민지를 거느렸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도차이나와 알제리 등에서 식민지 전쟁을 벌이다 패배했다. 또한 프랑스는 드골 정부 하에서 개발한 핵폭탄의 성능시험을 한때 자신들이 점령하게 된 식민지에서 100번이나 넘게 수중실험을 벌였고, 단연컨데 그 핵실험으로 인한 방사능 유출과 환경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영국과 마찬가지로 프랑스도 21세기 들어 리비아에서 침략전쟁을 수행했고, 코트디부아르에서도 전쟁을 벌였다.

쉽게 말해 프랑스 제국주의라는 주제는 분명히 현재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성을 가지는 주제임에도 국내에 관련연구를 다룬 저서를 찾기는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관련 연구자이자 학자인 이재원의 <제국의 시선, 문화의 기억>은 상당히 의미가 있는 책이라 필자는 생각한다.

서문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프랑스 제국주의를 다룬 저서들 중에 국내에 출간된 것들도 있다. 마르크 페로의 <식민주의 흑서>나 질 망스롱의 <프랑스 공화국 식민사 입문>이 있다. 이 책들은 프랑스 제국주의의 정복과 착취 그리고 지배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췄다.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들이다.

그러나 이재원의 저서 <제국의 시선, 문화의 기억>은 이전에 국내에 번역된 책들과는 달리 프랑스 제국주의의 사회 문화적 측면에 초점을 두고 있다. 즉, 프랑스 제국주의가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를 어떻게 합리화 했고, 그런 부분들이 교육, 언론, 박물관, 일상 등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본 것이다.

이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의식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영역 중에는 우리의 일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지점들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가 보게되는 서구 영화들 중에 과연 그런 식민주의적 혹은 제국주의적 요소가 들어간 것이 없을까? 2000년대 중반 한국에서도 유행했던 영화 ‘300‘만 보더라도 곳곳에서 오리엔탈리즘적 요소와 미국의 대이란 정책과 이라크 전쟁을 옹호하는 부분이 많이 드러났다.

이런 문제는 비단 영화 ‘300‘만의 문제는 아니다. 1990년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디즈니 애니 라이온 킹에서도 드러난다. 아래의 책의 내용을 보자.

˝오늘날 오모 미크로(Omo micro)와 같은 세제 선전이나 정글북(The Jungle Book)과 같은 만화영화에서, 그리고 몇몇 영화에서 원숭이가 흑인을 대체하긴 했지만, 식민지적 수사는 그대로이다. 예를 들어 월트 디즈니(Walt Disney)의 영화 「라이온 킹」(1994)의 비비 원숭이 라피키(Rafiki)의 경우, 프랑스말로 더빙하면서 억양이 강한 아프리카인의 목소리를 사용했다. 반면에 아랍인은 몇몇 영화 속 인물들을 통해 유머가 있고, 뤽 베송(Luc Besson)이 제작한 「택시」(1998)에서처럼 현대 도시 우화의 일종의 광대이자, 프랑스를 위해 전쟁에 참여하는 현대의 새로운 ˝원주민˝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재원, 제국의 시선 문화의 기억, 서강대학교출판부, 2017, 237~238쪽.

그렇다면 우리가 놀러가는 놀이공원과 같은 여가 시설들은 어떠할까? 그런 제국주의 혹은 식민주의적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일까? 아래 책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놀이공원의 시초‘이며 진정한 ‘환상의 세계‘였던 1931년 식민지박람회는 대중들을 초대하여 ˝하루 동안의 세계 일주˝를 가능하게 해 주었다. 이 상상으로의 여행을 통해 유럽의 ‘문명화된‘ 세계와 ‘원시적인‘ 세계의 이분법적인 사고에 의해 만들어진 꾸며낸 세계에 대한 믿음이, 항상 서양에 유리하고 불평등한 식민지적 관계의 사고방식이, 5대양에 걸쳐 1억이 넘는 인구를 가진 ˝위대한 프랑스˝라는 의식이 확산되게 되었다. 건축물과 장식의 아름다움과 장대한 정경들은 프랑스인들이 오랫동안 기억할 ‘식민지 환상‘에 기여했던 것이다.˝

이재원, 제국의 시선 문화의 기억, 서강대학교출판부, 2017, 186~187쪽.

이러한 부분을 보았을 때, 프랑스 제국주의적 유산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필자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본 저서가 다루는 프랑스 제국주의의 사회 문화적 측면은 중요한 주제라 할 수 있다. 책에서 상당히 흥미롭게 읽은 부분을 뽑자면, 1930년 프랑스 식민지 박람회의 인간 동물원과 사라 바트만의 이야기 그리고 반식민지 박람회와 앙리 마르탱 석방운동이다.

전자는 프랑스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을 다룬다면 후자는 프랑스 제국주의에 대항했던 움직임을 다룬다. 후자에서 보다 주목하게 되는 점은 프랑스인들의 반식민주의 투쟁이다. 특히나 앙리 마르탱 석방운동이 상당히 흥미로웠다.

프랑스의 제국주의 침략전쟁인 인도차이나 전쟁에 맞섰던 앙리 마르탱의 존재도 감명깊었지만, 전단지를 살포했다는 이유 때문에 감옥에 갇힌 그를 석방하기 위해 전개된 반전운동과 석방운동도 감명깊었다. 프랑스 공산당의 선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대중운동을 잘 주도했다는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공산당의 활동에 대해 높게 평가한다.

필자는 이 책의 가치와 의의를 매우 높게 평가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프랑스 제국주의에 대해 학술적으로 비판한 저서를 국내에서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며 사회 문화적 측면에서의 프랑스 제국주의를 보게 되니, 현재 2년이 넘게 진행되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수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왜 서구가 주도하는 대러제재에 동참하지 않는지 확실하게 이해가 된다.

현재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가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 서방세계와 자유를 지키자˝고 말하는데, 이게 과거 제국주의 국가의 지배를 받은 이들에게 공감될 리가 없다. 이렇게 보자면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던 니제르를 포함한 아프리카 국가들이 서구 편을 안드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

아프리카를 포함한 과거 프랑스에게 식민지 지배를 당한 국가들이 현재 NATO 대 러시아의 싸움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절대로 NATO편을 안드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 이면에는 프랑스 제국주의의 잔혹하고 폭력적이며 백인 우월주의적인 지배가 있었음을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프랑스 제국주의의 문제는 분명히 현재성을 가진 주제다. 필자는 그런 점에서 이 책을 많은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앞으로의 세계는 제국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한 세계가 되야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바라며 서평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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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퍼레이션 페이퍼클립
애니 제이콥슨 지음, 이동훈 옮김 / 인벤션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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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국 영화 마블(Marvel) 시리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영화상에서 등장하는 악역 하이드라(Hydra)’를 대충 알 것이다. 영화 주인공인 캡틴 아메리카(Captain America)가 처음으로 맞서 싸운 대상이 바로 이 나치 소속인 하이드라였고, 이 하이드라는 다음 시리즈에서도 캡틴 아메리카의 적으로 등장한다. 놀랍게도 이 하이드라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였던 이들은 70년 뒤인 미국의 여러 정치 및 군사 그리고 연구기관에 침투해 있는 것으로 나온다.

 

지난 2023년에 개봉한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가 제작한 영화 인디아나 존스(Indiana Jones) 시리즈의 마지막 시리즈인 인디아나 존스: 운명의 다이얼(Indiana Jones and the Dial of Destiny)’를 보면, 여기서 인디아나 존스의 적으로 등장한 악역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으로 이주한 나치 과학자 위르겐 폴러(Jürgen Voller). 영화 설정을 보면, 위르겐 폴러는 1969년 아폴로호 착륙에 크게 기여한 미국의 과학자로 등장한다. 2차 세계대전이나 세계사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적 설정이 바로 달 착륙에 기여한 과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인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나는 10대 시절부터 1969년 아폴로 11호의 달 탐사에 기여한 과학자가 베르너 폰 브라운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베르너 폰 브라운이 나치 과학자 출신인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아마 군복무를 하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당시 나는 소방서(사회복무요원)에서 근무 도중 유튜브(Youtube)를 통해 BBC에서 만든 다큐멘터리를 보았는데, 미국과 소련의 우주경쟁을 다룬 다큐멘터리였다. 그 다큐멘터리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인물이 바로 베르너 폰 브라운이다. 다큐멘터리에선 베르너 폰 브라운이 나치에 협력했지만, 그리 순종적이지만은 않은 인물로 그려진다. 따라서 아주 적극적인 나치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이번에 그 생각이 완전히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매체들을 통해 알 수 있거나 유추해볼 수 있는 사실이 있다. 이것은 바로 적잖은 나치 협력자들이 미국에 정착했다는 사실이다. 지난 202311월 집 근처 도서관에서 책 구경을 하는 도중 제목부터 아주 재밌는 책을 우연히 발견했다. 그 책이 바로 오퍼레이션 페이퍼클립(Operation Paperclip)이었다. 책을 보자마자 나는 도서관에서 읽기 시작했고, 나도 모르게 챕터 2장까지 읽었다. 너무나도 흥미진진한 내용들이 많아 상당히 지적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학업이라는 본업과 사회운동 그리고 여러 바쁜 생활을 하다 보니 완독을 하는 데는 좀 오래 걸렸다. 그래도 읽으면서 흥미로운 내용들을 일부러 SNS 및 컴퓨터에 메모하며 완독했으니 만족한다.

 

제목을 보면 알겠지만, 책은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고 난 다음 이른바 나치 과학자들을 어떻게 이주시켰는지 그리고 이들 중 상당수가 어떻게 미국의 군사 및 과학기술 분야에서 활동했는지를 보여준다. 놀라운 것은 이들 중 대다수가 과거 히틀러와 나치에 충성을 맹세하던 이들이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 중 대다수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저지른 반인륜적 전쟁범죄에도 크게 기여하기까지 했다. , 전범으로서 처벌받아 마땅한 행위를 한 이들이 미국 정부의 도움을 받아 미국에 정착했고, 미국인이 되었으며 이후 후세대들에게 훌륭한 과학자로 기억 속에 남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달 착륙에 기여한 과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에 대해 얘기해보자.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베르너 폰 브라운은 분명히 나치 소속의 과학자였다. 폰 브라운은 나치 소속의 과학자로서 미사일 개발에 많은 기여를 했고, 실제로 나치의 최신 미사일을 개발했다. 19449월 나치는 영국 런던에 이른바 미사일 공격을 감행했는데, 당시 사용된 무기가 바로 V-2 로켓 미사일이었다. 그것을 제작한 인물이 바로 폰 브라운이었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미사일을 만든 공장은 독일 노르트하우젠에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미군 부대가 이 노르트하우젠에 입성하여 나치 독일의 무기 공장을 탐색했다. 그 결과 V-2 로켓미사일을 만들기 위해 동원된 수천 명의 노예노동자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처참하게 죽어있는 수백 구의 노예노동자 시신도 현장에 있었다.

 

, 폰 브라운은 노예노동자 수천 명을 강제노동에 동원하고, 적잖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책임이 있었다. 당시 베르너 폰 브라운은 나치 친위대 돌격대 지도자였다. 군 계급으로 치자면 대략 소령 정도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전쟁 말기 나치 독일은 V-2 미사일은 영국을 포함한 연합군 점령 지역에 발사했는데, 이로 인해 사망한 사람의 숫자는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대략 7,000명 정도였다. 그러나 그와 비슷한 숫자의 노예 노동자들이 폰 브라운이 실질적 책임자로 있던 군수공장에서 죽어나갔다. 그리고 폰 브라운에겐 이 노예노동자들이 반항하면 총살할 권한까지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게 된 내용이다.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거기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군 앞에서 폰 브라운이 보인 행동도 정말 놀라웠다. 책에 나오는 내용을 발췌하겠다.

 

공포의 V-2를 만든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미군에 체포되었다는 것은 세계 언론에 대서특필될 엄청난 소식이었다. 그들은 사진촬영을 위해 포즈를 잡으며 모두 미소 지었다. 폰 브라운은 V-2개발과 관련하여 으스댔다. 자신이야말로 V-2 발명가이자 독일 과학자들의 리더라고 강조했다. 그에게 다른 사람들은 부차적인 존재에 불과했다. 미육군 제44사단 방첩대의 일부 인원들은 폰 브라운의 자만심을 눈치 챘다. 한 방첩대요원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모든 미군 장병과 함께 엄청나게 많은 사진을 찍어댔습니다. 사진 속에서 폰 브라운은 미소를 짓고 미군들과 악수를 하며, 호기심이 많은 표정으로 미군들의 훈장을 가리켜댔죠. 전쟁포로라기 보다는 유명인에 가까운 태도였습니다. 병사들을 대하는 태도도 마치 군부대 시찰 나온 국회의원마냥 상냥했습니다."”

 

애니 제이콥슨, 이동훈 옮김, 오퍼레이션 페이퍼클립, 인벤션, 2016, 117~118.

 

책에서 폰 브라운 외에 주목한 나치 신봉자는 대략 21명이다. 그 중 폰 브라운을 포함하여 오토 암브로스, 테오도르 벤칭거, 쿠르트 블로메, 발터 도른베른거, 지크프리트 크네마이어, 발터 쉬버, 발터 슈라이버 등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아돌프 히틀러, 하인리히 힘러, 헤르만 괴링 등과 함께 일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당시 독일의 권력 체계에서 과학자가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간 인물들이었다. 21명 중 15명은 나치의 헌신적인 당원이었고, 또 그중 10명은 나치당 산하의 준군사조직인 돌격대(SA)와 친위대(SS) 대원이었다. 이들 모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게시한 이른바 페이퍼클립 작전의 대상자였다.

 

이 페이퍼클립 작전의 목적은 나치 과학자와 기밀 군사계약을 맺고 그들을 미국으로 밀입국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들은 나치 독일이 패망하던 19455월부터 미국 정부를 위해 연구를 재개하게 되었으며, 전쟁이 끝난 이후 냉전이 시작되면서 대략 1,600명이나 되는 나치 협력자들이 미국으로 이주하게 됐다. 놀랍게도 이들 중에는 베르너 폰 브라운과 같이 미국인들에게 영웅으로 기억에 남은 이들도 상당히 많다. 물론 전쟁 이후 냉전 초기 이들에 대한 보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의 행적이 기밀 처리되었고, 냉전을 거치며 포장작업을 거쳤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들을 데리고 오자 미국 내에서도 문제가 생겼는데, 당시 미국이 보인 태도는 이들에 대한 비호였다. 아래 책의 내용을 보도록 하자.

 

어느 익명의 정보원은 <뉴욕타임스>에 다음과 같이 밝혔다. “1,000명 이상의 독일 과학자들이 미국으로 입국하고 있다. 그들 모두 자발적으로 미국과 계약했으며 이들의 적응기간은 보통 6개월이고, 그 후 시민권을 신청하고 가족을 미국으로 데려올 수 있다.” <뉴스위크> 역시 이 기밀군사 프로그램의 이름이 페이퍼클립 작전임을 폭로했다. 육군부는 이 기사를 부인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대중들에게 기밀을 제외하고 프로그램 전체를 알리기로 했다. 즉 라이트 항공기지의 과학자 중 몇 명을 선발해 언론 및 라디오방송, 사진을 통해 알리고자 했다. 기지 개방 행사도 기획되었다. 물론 상세한 정보의 개방 수위와 사진촬영의 정도는 육군의 검열을 받았다. 행사의 목적은 미국에 들어와 있는 독일 과학자들이 결코 해로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애니 제이콥슨, 이동훈 옮김, 오퍼레이션 페이퍼클립, 인벤션, 2016, 336~337.

 

2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국은 뉘른베르크 재판을 통해, 이른바 나치 전범들을 재판정에 세웠다. 나치 지도급 인사들은 사형 혹은 무기 징역을 받았지만, 전쟁범죄를 실질적으로 자행했던 이들 중 일부는 페이퍼클립 작전의 대상자였다. 그리고 이들은 미국 정부의 비호를 받았으며, 이후에도 자유와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미국인이 됐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그들의 나치 행적은 침묵되거나, 서류상 기밀 처리됐다. 미국은 이들이 가진 지식과 기술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사용되기를 원했고, 특히나 소련과의 냉전이 시작되면서 그들의 행적을 묻지 않으려 했다.

 

책을 읽으면서 많이 놀랐다. 상당히 많은 분야에서 이들이 큰 영향을 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의 지하 벙커를 설계한 기술은 페이퍼 클립을 통해 온 설계관여자에 의해 냉전시기 미국의 핵 대피소 기술로 사용됐다. 나치의 의학 기술이나 과학 기술이 미국의 의학 및 과학 기술에 크게 관여했는데, 이것은 당시 미국에 온 나치 협력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2차 세계대전 이후 더글라스 맥아더가 731 부대의 책임자 이시이 시로를 살려주고, 731 부대가 확보한 연구 결과가 미국으로 갔던 것을 알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치의 기술이 이런 식으로 미국에 가게 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페이퍼클립 작전을 통해 미국에 정착하게 된 나치 과학자들은 미국의 독극물 개발에도 기여했다. 미국은 냉전의 흐름 속에서 자신들에게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지도자들을 암살하려는 시도를 했었다. 대표적으로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나 콩고의 파트리스 루뭄바가 그 예시였다. 미국은 피델 카스트로와 파트리스 루뭄바를 암살하기 위해 독극물을 사용했는데(이러한 미국의 암살시도는 실패했다.), 그 독극물 종류가 나치 과학자에 의해 개발된 것이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이 사용한 맹독성 고엽제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의 경우 나치에 협력한 과학자가 만들었다.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총 4,315만 리터 이상의 에이전트 오렌지가 남베트남 국토의 전체 면적 24%에 뿌려졌다. 고지대와 삼림 500만 에이커, 경작지 50만 에이커가 초토화되었다. 이는 매사추세츠 주 만한 면적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나치 과학자 출신 인물들은 미국 과학기술 및 군사기술 그리고 그 외의 여러 영역에서 많은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이런 인물들이 나치에 협력한 인사들이라는 사실은 비교적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2년 전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비나치화를 외쳤고, 이러한 러시아의 주장은 푸틴의 선전으로 치부됐다. 그러나 이것 또한 역사를 들어다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우크라이나 지역을 점령했었고, 이 과정에서 스테판 반데라나 로만 슈케비치, 디미트리 돈초프, 미콜라 레베드와 같은 우크라이나의 극우민족주의자들은 나치에 협력했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과 폴란드인 학살 및 인종청소로 악명높은 나치들이었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미국은 소련에 맞선다는 이유로 이 나치세력을 반소-반공투쟁에 이용했다. 1980년대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를 단행한 이후 우크라이나에서는 기존의 소련사회에서 억눌려있던 극우민족주의가 다시 고개를 들고 나왔는데, 이들은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난 이후 우크라이나에서 번창했다. 이들이 가장 활발히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2013년 유로마이단을 전후해서였다. 이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유로마이단을 획책했고, 돈바스 내전에서 강력한 군대로 탄생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초기인 마리우폴 포위전 당시 우크라이나군의 주력부대였던 아조프 대대(Azov Battalion)가 있었다. 이들이 바로 돈바스 내전 당시 미국과 NATO의 지원을 받아 우크라이나군의 주력부대가 된 군대였다.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미국이 나치과학자들을 데리고 온 역사와 현재 미국이 우크라이나 네오나치 지원이 상당히 오버랩 됐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파시즘을 물리친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나치독일 패망과 일제 패망에 있어 미국의 공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소련과의 냉전을 시작하면서 미국은 페이퍼클립 대상자와 같은 파시스트 지지자 및 협력자들과 결탁했다. 이와 같은 행위들은 소련에 맞서기 위함이라는 명분 아래 합리화됐다. 당시 미국이 소련에 맞서기 위해 그랬다면, 현재는 러시아를 상대로 그러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애니 제이콥슨의 책 오퍼레이션 페이퍼클립은 읽는 이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주는 책이다. 간만에 지적 희열을 최고조로 느낄 수 있고, 올바른 역사를 알 수 있는 책 한권을 완독했다. 그리고 이 책은 현재 미국이 우크라이나 네오나치 문제에 대해 보이는 태도라는 측면에서도 상당히 깊은 교훈을 주는 책이라 생각한다. 오퍼레이션 페이퍼클립맨 마지막 장에는 질문과 토론주제목록이 있다. 이를 공유하며 긴 서평을 마친다.

1. 이 책에서 애니 제이콥슨은 전후에 미국 정부가 히틀러의 과학자들을 밀입시키려 했던 노력을 냉철하게 바라보았다. 당신은 이 책을 읽기 전에 페이퍼클립 작전에 대해 알고 있었는가? 이 프로그램에서 당신이 알게 된 가장 놀라운 사실은 무엇인가? - P.714

2. 연합국 정보요원들이 전후 나치 과학자들의 처분에 있어 맞닥뜨린 가장 주된 질문 중 하나는 누구를 고용하고 누구를 처형할지였다. 당신은 이 질문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가? - P.714

3. 전후의 미국은 소련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정말 나치 과학자들이 필요했는가? 오히려 나치 과학자들의 고용이 미국과 소련의 갈등을 증폭시키지 않았는가? - P.714

4. 페이퍼클립 작전은 대중에게 선한 얼굴을 띠고 있었지만, 과학자들의 전시 행적에 대해 진실은 기밀로 처리되었다. 대중들은 더 많은 것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는가? 미국은 대중들에게 정보를 공개해야만 했는가? - P.715

5. 이 책을 읽고 미국 정부에 대한 당신의 관점이 달라졌는가? 과거의 정부기밀 프로그램 공개가, 오늘날 어떤 정부 기밀 프로그램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지지 않는가? - P.715

6. 페이퍼클립 작전에서 가장 끔찍하다고 느낀 부분은 무엇인가? - P.715

7. 1951년, 독일 주재 미국 고등판무관 존 J. 맥틀로이는 유죄를 선고받은 다수의 나치 전범들을 사면하고 란츠베르크 교도소에서 풀어주었다. 당신은 왜 그가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하는가? - P.715

8. 책에서 저자는 부헨발트 강제수용소 정문에 적혀있는 독일속당 "누구나 과오에 걸맞은 대우를 받는다"를 독자들에게 몇 번 환기시킨다. 철학적인 관점에서 이 말은 옳은가? - P.715

9. NASA는 논란이 되는 베르너 폰 브라운, 쿠르트 데부스, 아르투르 루돌프의 전시 행적을 포함시키기 위해 그들의 전기를 수정해야만 했는가? - P.715

10. 개인적인 신념과 직업상 의무의 충돌로 인해 도덕적 딜레마에 직면한 적이 있는가? 책에 나오는 어느 순간이 당신이 처했던 상황과 유사한가? - P.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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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4-03-19 2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국은 나치독일 부역자들과 결탁해서 그들을 ‘세탁‘한 다음 ‘자유를 위해 싸우는 반공주의 투사‘로 둔갑시켰고, 한국의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실무에 밝다‘는 이유를 들어 이들을 그대로 등용해서 ‘친미파‘로 변신시킨 후 이들을 ‘공산당 때려잡는 열렬한 반공투사‘로 만들었죠. 미국은 나치 독일 부역자들과 한국의 내로라하는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엄벌하기는 커녕 이들을 ‘실무에 밝다‘는 이유로 그들과 결탁하여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의 극대화‘라는 죄를 지은 것입니다!
 

어린 시절 만화작가 이원복이 쓴 『먼나라 이웃나라』를 정말 재밌게 읽었었다. 당시 이원복이 쓴 『먼나라 이웃나라』 도이칠란드 편을 재밌게 읽었었는데, 당시 책에 등장한 동독의 이미지는 지금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동독은 항상 서독에 비해 무언가 부족한 나라였다. 베를린 장벽을 넘어 자유를 찾아 나서는 동독인들의 모습과 소비재 부족으로 인해 서독 관광객으로부터 생필품을 갈취하는 동독 경찰의 모습이 만화에서 묘사됐다. 그리고 동독이라는 나라는 자유가 억압당하며, 공산당 독재자들이 통치하는 뭐 그런 나라로만 보였다. 이것이 단순히 이원복이 쓴 만화책의 문제만은 아니다. 2018년 독일에서 개봉한 영화 ‘벌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전적으로 동독 체제에 불만을 가진 가족이 서독으로 도망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특히나 통일하면 독일식 흡수통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동독에 대해 이런 식으로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동독에 대한 아주 단편적인 시각이다. 동독이 세운 업적도 분명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독일의 탈나치화(De-Nazification) 문제를 보면 그렇다. 동독사 연구자인 카트야 호이어에 따르면, 서독은 나치 출신을 공직계·교육계·문화계, 심지어 경찰 조직에도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독일민주공화국은 반파시즘을 기본 신조로 유지했다. 소련 군정 하에서의 동부 독일과 동독 정부는 미군정 하에서의 서부 독일과 서독 정부에 비해 훨씬 광범위한 탈나치화 과정을 거쳤다. 심지어 경제에 타격이 있어도 그 과정을 거쳤는데, 공학자와 경찰이 사라진 자리는 미숙하더라도 이념적으로 문제가 덜한 사람들로 채웠다.


독일의 경제 또한 그렇다. 물론 동독이 서독 보다 경제적으로 낙후된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렇다 해서 못사는 나라는 절대 아니었다. 1990년 기준 당시 서독과 동독의 1인당 GDP를 비교해보면 그렇다. 당시 서독의 1인당 GDP는 15,300 달러였고, 동독은 9,679 달러였다. 당시 소련이 대략 9,100~9,200달러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동독의 경제력은 결코 낙후되지 않았었다. 물론 이원복 또한 동독이 전후재건에 성공하여 사회주의 국가들 중에 비교적 잘 살았다는 점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문제는 ‘사회주의=가난’이라는 점에만 초점을 맞춘다는 데에 있다. 사회주의 국가하면 무조건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한국인들은 동독도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처럼 굶주렸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동독의 지도자에 대해서도 ‘독재자’ 혹은 ‘권력가’라는 단어로만 해석한다. 소위 한국에서 민주진보 진영에 있는 사람들 또한, 현실 사회주의권 지도자나 제3세계 지도자를 보면 항상 그 수식어로만 보는 경향이 크며, “이승만이나 박정희 그리고 전두환처럼 독재한 사람일 뿐이다.”는 매우 지엽적인 편견에 빠져있다. 구사회주의권 지도자들이 이른바 ‘서기장’이나 ‘일당독재 체제’를 유지했다는 점을 들어 그저 장기집권을 했다는 이유를 들어 독재자라고 단순무식하게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여기에는 “미국이나 한국처럼 4년이나 5년에 한번 씩 대통령을 선출해야만 민주주의라는 이상한 강박관념”에 빠져있기도 하다.


물론 1당 독재도 엄밀히 말해서 독재는 맞다. 그러나 그 독재의 성격이 어떠한지는 전혀 보지 않는 것이다. 정말 이 체제가 무슨 우리가 생각하는 인민을 대량 학살한 체제인지 박정희 정권처럼 치마 길이까지 검열하는 체제였는지, 경찰의 공권력이 삼청교육대를 운영하던 시절 대한민국 만큼이었는지를 진지하게 분석조차 하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리비아를 생각해보자. 많은 사람들이 리비아의 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에 대해 독재자 혹은 망나니라고 비난했었다. 그러나 카다피의 정치통치 방식인 자마히리야의 적용을 보면, 소위 서구가 주장하는 민주화(라고 쓰고 색깔혁명 혹은 폭동이라 읽는다.) 이후보다 선거제도와 지방자치제도가 자리 잡혔었다. 자미히리야(인민의회) 의원 중에서도 상당수가 여성과 소수민족이었던 만큼 지역간 갈등 완화나 소수자 인권 보호에도 꽤나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한국의 이승만 독재나 박정희 전두환 독재 시절과는 전혀 다른 지점이 이렇게 존재한다. 이런 리비아가 “과연 박정희나 전두환 보다 비민주적이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폭압적인 독재통치라고 말 할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이들은 한국 사회에선 거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도 이러한 접근이 과거에 존재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에게도 필요하다. 즉, 단순히 지도자가 1당독재를 했다고 해서 1인체제를 유지했다고 해서, 소위 미국이라는 세력의 우산 아래 있던 친미 성향의 자본주의적 독재자와 같은 선상에서만 놓고 보는 것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동독의 경우도 그러하다. 많은 사람들이 동독하면, 억압·자유의 부재·검열·통제·생필품 결핍 등 절대 긍정적일 수 없는 요소들만 생각하지만, 동독의 사회를 들어다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앞서 리비아의 사례와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의 박정희나 전두환 시절의 그것과 단순히 비교해서 “독재 통치일 뿐이다.”는 식의 관점도 어찌 보면 단순도식화다.


따라서 에리히 호네커에 대한 분석도 단순히 독재자라는 식의 관점은 분명히 잘못됐다고 본다. 호네커 시절 동독 사회를 보면 더욱 그러하다. 호네커 시절 동독은 나름 청소년들의 수요를 맞추기 위해 서방의 의류 등을 수입했고, 음악에 대해서도 풀어주며 서독과 교류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즉, 서독 문화가 크게 금지됐던 것고 아니고, 정부의 일부 정책에 반하는 행동이 전면적으로 금지가 됐던 것은 아니다. 다만 체제 전복을 목적으로 삼는 행위는 금지가 됐는데, 이것은 소위 자본주의 국가들도 같은 선상에서 막는 부분이다. 참고로 에리히 호네커의 전임자인 발터 울브리히트의 경우도 서구의 시각에선 동독의 독재자로 규정받는데, 울브리히트는 1971년 수상직에서 사임했다. 이것이 무슨 이승만처럼 4.19 혁명과 같은 일로 사임한 것인가를 묻는다면 전혀 아니었다. 


호네커 시절의 동독은 여성인권에 있어서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이는 동독의 여성 취업자 수치를 보면 명확하다. 동독의 여성 취업자 수는 1989년 기준 130여만 명으로 거의 세 배에 가까운 증가율을 보였다. 특히나 비생산 영역에선 여성 취업률이 1950년대 50% 수준, 1960년대 60% 수준, 그리고 1970년대 이후 70% 수준을 넘어가면서 남녀 동등한 비율의 취업률을 달성할 수 있게 됐다. 


고용률에서도 마찬가지다. 동독 사회의 여성 고용률을 살펴보면, 괄목할만한 변화를 알 수 있다. 동독이 탄생했던 1949년 전체 취업인구 731만 3,000명 중 여성이 298만 9,000명으로 40.9%를 차지했으며, 취업인구에서 차지하는 남녀 비율은 60:40이었다. 이러한 비율은 1970년대 말에 들어 여성 비율이 50%를 넘기면서 남녀 간 완전한 고용평등을 달성했다. 비록 1980대를 거치며 하락하여 1989년에는 40% 수준에 머물렀지만, 여성 고용률 50% 달성은 비생산 영역에서 이루어졌다. 1949년 비생산 영역 취업활동 인구 90여만 명 중 여성이 54만 명으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는데, 1949년부터 1989년까지 비생산 영역 취업인구는 180여만 명으로 두 배 정도 증가했다. 즉, 이런 나라가 어떻게 해서 박정희 시절 훅은 전두환 시절의 독재정권과 같은 선상에서 비교가 될 수 있는지 심히 의심이 든다.


즉, 이와 같은 변화가 에리히 호네커 시절 동독에서 있었다. 노동 시간에서도 선진적이었다. 이해영이 집필한 『독일은 통일되지 않았다』에 따르면, 동독에서는 근로자의 약 75%는 1주에 43.75시간을 근무했고, 16세 미만의 청소년과 임산부의 경우, 야간작업이 금지되었으며 6세 미만의 자녀를 가진 여성과 돌보아야 할 식구를 거느린 근로자는 야간작업을 거부할 수 있었다.시간 외 근무는 예외적인 경우, 노동자위원회의 동의가 있어야 가능하며, 연간 20~26일의 휴가를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동독의 경우 노동의 권리(Recht auf Arbeit)는 인간 기본권으로써 헌법으로 보장받았다. 그러니까, 근로기준법 조차도 없었고, 노동자를 굴리는 것 밖에 생각하지 않으며, 민주화 된 이후에도 주 120시간 노동을 지껄이는 윤석열이 집권하는 한국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 대해 무작정 독재자 프레임을 씌우는 이들은 앞서 언급한 것들을 전혀 보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호네커는 단순히 군사독재에 복무한 사람이거나, 과거 나치에 협력하며 민족반역의 길을 걸었던 인물이 전혀 아니었다. 에리히 호네커는 열렬한 사회주의 혁명가였고 투사였다. 1920년대 독일 공산당에서 활동했으며, 1930년대 국제레닌대학교에서 유학하며 경력을 쌓은 인물이었다. 1933년 히틀러가 집권을 하자, 이에 맞서 싸우다가 나치 독일 치하에서 감옥살이를 했다. 1935년 투옥되어 1945년 소련군에 의해 독일이 해방될 때까지 옥살이를 한 인물이다. 쉽게 말해, 제국주의와 파시즘에 맞서 저항한 열렬한 혁명가였던 것이다. 도데체 어떻게 해서 호네커라는 인물이 이승만이나 박정희 그리고 전두환과 같은 이들과 동일선상의 독재자 프레임으로 엮을 수 있는지 나는 이해가 되질 않는다.


지금까지 “에리히 호네커를 단순히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독재자로 규정하는 것”이 왜 문제가 있는지를 알아보았다. 한국 사람들은 사회주의 지도자에 대해 단순히 자유주의적 관점에 따라 독재자로 규정하는 경향이 강하다. 특히, 이승만과 박정희 그리고 전두환의 독재를 생각하며 같은 선상에 일단 놓고 보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그렇게 했을 시 생기는 오류가 분명히 있다. 따라서 나는 자유주의자들이 가진 이런 관점이 진지하게 문제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회주의 국가들이 오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국가에 따라 억압의 강도가 강할 수 도 있고, 약할 수도 있다. 이는 자본주의 국가도 그러하지 않은가? 그러니 자본주의 국가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면, 사회주의 국가도 다양한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에리히 호네커를 단순히 ‘동독의 독재자’ 프레임으로만 규정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가 존재하는 것이다. 에리히 호네커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선 보다 구체적으로 다음에 다뤄볼 예정이다.


참고문헌


이해영, 『독일은 통일되지 않았다』, 푸른숲, 2000.

정재훈·박수지, 『동독 사회보장제도: 역사와 변화』, 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17.

카트야 호이어, 송예슬 옮김, 『장벽너머 - 사라진 나라 동독 1949-1990』, 서해문집, 2024.

Honecker Erich, From My Life, Pergamon Press, 1981.

Murphy Austin, The Triumph of Evil: The Reality of the U.S. Cold War Victory, European Press Academic Publishing,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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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4-03-19 2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리히 호네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따지고 보면 한국인들의 사고를 지배하는 낡아빠진 ‘반공주의‘ 사상이 낳은 산물이 아닌가 싶네요! 사실 우리 머릿속에 ‘사회주의 국가‘하면 ‘가난하다‘, ‘억압적 통치가 이루어진다‘라는 의식이 너무 뿌리깊게 (반공주의에 찌든 나머지) 박혀있지만, 사회주의 국가 중에도 동독과 같이 잘 사는 국가도 존재했고, 자본주의 국가 중에 가난한 나라들(과테말라, 필리핀...)도 꽤 많았습니다.
 

한국전쟁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적이고 살인적인 전쟁이었다. 3년이라는 전쟁 기간 동안 300~400만 명이나 되는 한반도 인명이 희생되었는데, 이 중 100~150만 명은 군인이었고, 나머지는 민간인이었다. 민간인 사망자의 원인은 이승만 정부의 양민 학살과 미군의 무차별 공중폭격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일어난 베트남 전쟁에서 비슷한 인명이 희생되었는데(로버트 맥나마라의 추산에 따르면, 미국이 일으킨 전쟁으로 380만 명의 베트남인이 희생당했다. 노엄 촘스키는 400만 명으로 추산했다.), 베트남 전쟁은 한국전쟁 보다 3배 이상 기간이 더 길었다.



브루스 커밍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국전쟁 당시 미군 폭격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나 일본에게 한 것 보다 파괴적이었다. 1950년 11월 8일 맥아더 사령부가 북한의 도시 신의주를 폭격했을 때, 대공 방어막이 전혀 없던 이곳엔 지옥이 펼쳐졌다. 그날 미군 B-29 폭격기 70대를 포함한 100대 이상의 항공기가 8만 5,000발의 네이팜탄과 폭탄을 투하했다. 총 3,017호에 달하는 신의주 공공건물 중 2,100호가 파괴됐고, 1만 1,000호 이상의 일반 주택들 가운데 6,800호가 파괴됐다. 16개의 초등학교와 14개의 중등학교, 15개의 교회와 2개의 병원도 이날 폭격으로 파괴됐다. 총 5,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당일 폭격으로 사망했는데, 이중 4,000명 이상은 여성과 어린이들이었다. 즉,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민간인 80%는 여성과 아이었던 것이다.


이게 바로 한국전쟁 당시 북한이 경험했던 참극의 역사였다. 놀랍게도 당시 이와 같은 미군의 폭격은 전쟁 내내 지속됐다. 한국전쟁 당시 남한의 영토는 개전 초기의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됐다. 그러나 1951년부터 전쟁이 다시 38선 인근에서의 전투로 전개되면서,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중공군이나 북한군의 대규모 공습을 전혀 받지 않았다. 따라서 이때부터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재건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북한의 사정은 달랐다. 북한은 1950년 6월 29일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에 서명하고 나서 12시간이 지날 때까지 미군의 폭격을 받았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1950년 6월 25일 전쟁을 먼저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그 문제와는 별개로 미군의 폭격은 과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나치 전범들을 처벌하면서 내세웠던 기준에 따라 보자면 전쟁범죄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공습은 북한 사람들이 미국을 극도로 증오하게 되는 계기였고,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들 눈앞에서 소중한 사람이 미군이 투하한 네이팜탄에 맞아 사지가 불타고 찢기며 산산조각 나는 모습을 보며 이성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북한이 반미교육을 강화한 데에는 전쟁 당시 자신들이 겪은 끔찍한 트라우마 때문인 것을 이제는 우리가 알 필요가 있다. 북한의 트라우마는 결과적으로 전후재건기 방공망 강화로 이어졌다. 김일성 시대 당시 북한은 소련의 모스크바를 제외하면 소련의 S-25(장거리 지대공미사일)가 배치된 유일한 도시였다. 1980년대 초반까지 소련의 최신식 지대공 무기들이 북한 전역에 배치됐다. 그러나 여기에는 현존하는 미국의 군사적 압력도 크게 작용했다.


이승만 정권 말기인 1958년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부는 핵 공격에 나서겠다는 위협을 고조시켰다. 1958년 1월부터 미국은 남한에 일방적으로 핵무기를 배치했다. 그 결과 대략 950개나 되는 핵탄두가 남한에 배치됐다. 이것은 미국이 마음만 먹으면 북한을 핵무력으로 파괴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론상으로 이 정도의 무력이면 당시 북한과 중국을 지도에서 지워버릴 수 있던 수준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가 한참이던 1970년대 초중반 남한에 배치된 미국의 핵탄투는 대략 700개 정도였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이승만의 반공주의를 물려받아 북한의 위협을 정치 및 사회적으로 항상 내세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는 현실과 상충되는 주장이었다. 종합적으로 봤을 때, 당시 북한이 미군 공습에 대한 공포를 가질만했다. 



실제로 미 합동참모본부는 “북한군을 상대로 대규모 핵 공습이 즉각 뒤따라야 한다.”는 의견을 표명하기도 했다. 미국은 북한 영토 위로 감시 비행 활동을 벌여 조선인민군의 방위에 관한 상세하고 중요한 정보를 획득했고, 이를 남한의 공군과도 공유했다. 1958년 1월 말 기준으로 보자면, 미국은 한반도 이남에 150개의 핵탄두를 배치했다. MGR-1 어네스트 존 로켓포 시스템, 280mm 대포와 203mm 핵 곡사포, ADM 핵지뢰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 해 3월에는 미국의 타격 전투기들이 자체 핵탄두를 장착했고, 탄도 미사일을 장착한 MGM-18 라크로스와  MGM-19 서전트, M-28 데이비드 크로켓 활강포를 포함한 전술핵무기를 위한 발사 장치가 즉각 뒤를 이어 배치됐다.



이렇게 해서, 미국의 핵미사일 배치는 196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북한 입장에서 보자면, 재래식 포 자산으로 방비가 삼엄한 미군 기지를 포격하는 것 말고는 잠재적 핵 공격에 대응할 아무런 방도가 없었다. 누가 봐도 한반도의 힘의 균형은 미국에게 압도적으로 쏠려 있는 상황이었다. 1953년 정전 협정 이후 미군 첩보기가 북한 영공을 비행했으며, 전쟁 이후 몇 년 동안 EC-121 첩보기를 포함한 최소 10대 이상의 미군기가 북한 측에 의해 격추됐다. 북한에 따르면 수십 년간 날마다 핵무기를 투하할 수 있는 미군 폭격기가 38도선에 접근했다가 마지막 순간에 선회했고, 따라서 미국의 핵 공격 가능성을 매일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이 터지자 미국은 결국 북한의 요구조건을 들어주고, 석방된 인질들을 데려왔다. 당시 미국의 협상가들은 북한 영해 침범에 대해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서면으로 약속했지만, 북한은 그 이후에도 1980년대와 1990년대 해마다 7,900건 이상의 도발행위를 집계했다. 그리고 미국은 날마다 이루어진 북한에 대한 고도 감시 비행을 인정했다. 1980년대 한국에서 나온 북한방문기인 『분단을 뛰어넘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나는 생각했다. 저 분단의 장벽을 쌓으려고 얼마나 많은 백성의 피땀이 흘러졌으며 얼마나 많은 서민의 혈세가 소비되었을까? 또 한편 저 분단의 공사를 함으로써 높은 분과 군 장성 그리고 청부업자들의 배를 얼마나 부르게 했을까. 나의 상상은 끝이 없었다. 2배나 되는 인구를 갖고 수적으로 우세한 병력, 그리고 최신의 미제무기를 장비로 갖춘 국군, 그 뒤에 미 지상군 4만과 해공군의 지원, 핵탄두 700개, 그것을 갖고도 현대판 만리장성까지 쌓았다. 그리고도 계속 남침의 위협을 고창하면서 국민을 억압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자면, 북한이 남한을 군사적으로 침공할 것이라는 주장은 1958년부터 현실 가능성이 없는 반공 정부의 프로파간다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북한이 핵무장을 하게 된 데에는 이러한 군사적 불균형과 미국의 일방적인 전쟁도발행위가 존재했다. 그렇다면, 1960년대 북한에서 나온 남조선혁명론과 1968년 김신조 사건은 과연 어떻게 봐야하는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한 얘기는 다음번에 올리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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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4-03-25 2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진실을 부정하는 분단Yuji세력 국짐과 윤석렬-김거니-한똥훈 정치검찰파쑈독재정권은 허구한 날 ˝선제타격!˝만 외쳐대고 허상에 가까운 북한붕괴론을 맹신하여 남북관계를 파탄내고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