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 사회에서 소련에 대한 온갖 악의적인 비방과 비난 그리고 거짓말들은 차고 넘친다. 특히 레닌 사후 소련의 지도자가 된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한 온갖 비방과 악선전들은 조금 과장하여 밤하늘의 별만큼 많다고 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 대기근, 대숙청, 굴라그 수용소, 독-소 불가침 조약, 핀란드 침공, 발트 삼국 합병, 트로츠키 죽음, 카틴 대학살, 소련군의 인명 경시 전략 전술, 소련군의 약탈과 아녀자 강간, 동유럽의 위성국화, 한국전쟁 책임자 등등등, 말 그대로 서방이 스탈린에게 하는 악선전은 끝이 없는 수준이다. 그 중에서 이 글에선 스탈린 시절 굴라그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소련의 굴라그 수용소의 존재가 서방에서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은 아마 극우 망명자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에 의해서일 것이다. 국내에서도 <수용소 군도> 시리즈로 유명한 솔제니친은 자신의 소설에서 말 그래도 소련에 대한 거짓된 소설들을 끊임없이 양산해냈다. 솔제니친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제국주의적이고 친서방적이며 친식민지주의적인에 대해 서방 사회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북베트남과 해방전선의 승리로 끝나자, 전적으로 미국을 옹호하던 인물이었다. 또한 포르투갈에 맞서 앙골라에서 민족해방운동이 일어나자, 포르투갈의 식민지 지배를 옹호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솔제니친의 반동적이고 악의적인 이데올로기 따위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솔제니친은 소련 시기 굴라그에 수감된 인원이 도합 5,000만 명이라는 희대의 거짓말을 진실로 포장했다. 영미 제국주의 국가들도 이런 새빨간 거짓말을 진실이라고 우겨댔다. 솔제니친과 더불어 소련에 대한 온갖 악의적인 거짓말을 퍼뜨린 인물이 있다면 아마도 로버트 콘퀘스트(Robert Conquest)를 뽑을 수 있을 것이다. 로버트 콘퀘스트는 스탈린이 단행한 대숙청 시기 수백만 명의 소련인이 목숨을 잃었다는 거짓말을 했다. 대숙청이 한참이던 1937년에서 1938년 콘퀘스트는 700만에서 900만 명이 체포되었고, 1934년 당시 500만 명이 굴라그에 억류되었으며, 대략 합쳐서 1,200만 명의 희생자가 나왔고, 이 중 3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이 통계를 바탕으로 콘퀘스트는 1939년부터 1953년까지 1,260만 명이 굴라그에서 죽었다고 말했으며, 이러한 거짓말들을 총합해서 콘퀘스트는 스탈린이 집권기간 동안 2~3천만 명을 학살했다는 거짓말까지 했다. 


이런 거짓말들을 바탕으로 극우 네오콘 정치학자인 루돌프 럼멜은 한술 더 떠서 스탈린이 집권기간 동안 4,500만에서 6,200만 명을 학살했다는 말이 안 되는 소리를 사실인 양 통계화하기까지 했다. 물론 그 통계는 루돌프 럼멜의 자의적인 덧셈 뺄셈이지만 말이다. 럼멜의 주장은 워낙 말이 안되는 소리라 언급할 가치마저 못 느낄 정도이다. 심지어 1990년대 문서고 혁명으로 거짓말이 다 들어난 이후 콘퀘스트가 200만 명이 대숙청으로 희생되었다고 했을 때, 비슷한 시기 럼멜은 430만 명이 희생됐다고 뻥쳤다. 그러니까 스탈린이 4천만 명을 죽였다느니, 6천만 명을 죽였다느니 하는 소리의 원출처가 극우 네오콘인 루돌프 럼멜의 헛소리인 셈이다.


콘퀘스트에 따르면 1939년부터 1953년까지 연평균 사망률이 대략 10%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1934년 당시 정치범이 500만 명이라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공개된 무서를 보면 실제 정치범의 숫자는 12만 7,000명에서 17만 명 사이였다. 그리고 강제노동수용소에 억류된 모든 이들의 정확한 수치는 대략 51만 307명이었다. 이 중 정치범의 비율은 25~35%였다. 즉 콘퀘스트는 15만 명의 억류자라는 현실적인 수치에 485만 명이라는 엄청난 부풀림을 한 것이다. 독소전쟁이 진행중이던 1941년에서 1942년 굴라그 수감자의 숫자는 50만 명 사이에서 오르내렸다. 무튼 콘퀘스트나 솔제니친 그리고 럼멜 등은 실제 숫자보다 수십 배는 부풀려 소련에 대한 악의적인 거짓말을 한 것이다.


콘퀘스트에 따르면 대숙청 시기 200만 명에서 300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희생된 사람은 벨기에 노동당 당수이자 역사학자인 루도 마르텐스(Ludo Martens)에 따르면, 11만 5,922명이라고 한다. 즉 마르텐스에 따르면 실제 죽음 11만 6,000명에 콘퀘스트는 188만 4,000명을 추가하는 악의적인 반공 시체놀이를 한 셈이다. 거기다 굴라그 수감자도 가장 많던 1951년만 보더라도 실질적으로 195만 명에서 250만 명 내외였다. 이 중에서 정치범은 57만 명 정도다. 또한 이 정치범 57만 명 중 33만 명은 주로 나치 협력자들이었다. 이러한 맥락과 사실따위는 콘퀘스트나 럼멜 같은 이들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고, 외면당했다.


전쟁 당시 굴라그 수용소의 석방자가 늘어났다가, 전쟁 이후 수감자가 증가한 것은 나치 협력자들 및 여러 잡범들을 수용하면서 생긴 일이었다. 그리고 굴라그의 생활은 우리가 생각하는 무슨 철조망 처진 곳이 아니었다. 대다수의 수용소의 인원들은 인근 마을과 수용소를 이동할 수 있었으며, 숙식이 제공됐다. 물론 강도 높은 노동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 당시 소련은 8시간 노동제를 고수했다. 굴라그 최대 수용 인원은 200~250만 명 정도인데, 사실 1990년대 미국의 감옥 수감자 숫자보다 300만 명이나 적은 수치다. 그러나 이런 사실에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대숙청만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라는 측면이 존재했으며, 숙청 또한 지극히 과장됐다. 서방세계에서 수정주의 학자로 유명한 아치게티(Arch Getty)가 <대숙청의 기원(Origins of the Great Purges)>에서 쓴 글을 보자.


“이런 증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숙청의 시기로 인식하는 예조프 시기가 다시 정의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그것은 경직된 관료주의가 반대파를 짓밟고, 고참 급진 혁명주의자들을 절멸시킨 결과가 아니었다. 사실, 그것은 완전히 정반대였을 것이다. 예조프 시기는 관료제에 대항하는 다소 과격하고, 심지어 히스테릭한 대응이었다는 주장은 증거와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 변화할 줄 모르는 관료들은 주의주의와 혁명적인 청교도주의로 요동치는 혼란스언 정국 속에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파괴되었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수감자 숫자를 얘기하겠다. 스웨덴의 사회주의 활동가인 마리오 소사(Mario Sausa)는 <진실이 밝혀지다>에서 “1996년 역사상 가장 많은 550만 명이 미국의 형벌체계 하에 있다”는 1997년 AP통신의 기사를 인용하며, 전쟁 직전의 스탈린의 소련과 미국을 비교했다. 이 숫자는 당사 미국 성인 인구의 2.8%에 상당하는 규모다. 형벌체계 하에 있다는 것은 교도소 수감자와는 다소 다른 의미다. 여기에는 보호관찰까지 포함된다. 그렇다고는 해도 2007년 말 기준 미국 법무부 통계는 730만 명이 교도소 수감, 보호관찰 등의 형태로 교정기관의 관리대상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2007년 말 기준 미국 성인의 3.2%가 수감되어 있거나 지역 공권력의 감시 하에 있다. 


미국의 수감자 인권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숫자일 것이다. 2005년 ‘시사저널’에 실렸던 정문호의 “미국 교도소에서는 엉덩이 지키기 어렵다” 기사의 일부 내용을 보자.


“지난 2000년 미국의 교도 행정 전문 잡지인 <프리슨전 저널>이 4개 주 7개 교도소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재소자 중 21%가 최소 한 번 이상 강간 위협을 당했으며 그중 7%는 실제 강간을 당했다. 이 같은 수치를 근거로 따져보면 매년 최소 14만 명이 미국 내 교도소에서 강간당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미국의 감옥인권 문제는 굴라그 그 이상으로 심각한 것을 알 수 있다. 근데 왜 우리는 미국의 이런 인권유린은 보지 못하며, 스탈린 시기 굴라그에 대해 비난하기 바쁜 것일까. 마찬가지로 실체조차 불분명한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얘기는 거짓말하는 태영호류 탈북자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미국의 감옥 인권은 전혀 보지 않을까? 필자는 이것이야말로 서방 스스로가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반공세뇌 시스템이라고 본다. 그러한 세뇌 시스템에 서방의 대다수 민중들은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고, 마찬가지로 반북주의로 무장한 한국의 대다수 일반인들도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솔제니친, 콘퀘스트, 럼멜이 한 거짓선전을 믿지 않고 비판적으로 분석할 때, 그런 세뇌된 반공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며,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악의적인 여론조작과 언론검열의 추악한 민낯을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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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찌민 시집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호찌민 지음, 안경환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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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의 시를 읽으며

대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구경하던 중, 안경환이 번역한 <호찌민 시집>을 찾았다. 몇년 전 같은 저자가 번역한 <옥중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옥중일기>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2년 8월부터 1943년 9월까지 호치민이 중국 감옥에서 옥중생활을 하며, 4행시 형태로 남긴 문학작품이다.

감옥생활을 하며, 호치민이 겪은 열악한 감옥사정과 대우 그리고 부당함 등이 시안에 들어가 있다. 시를 읽으며, 일제시대 당시 재판받고 복역하던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들이나, 해방 이후 국가보안법으로 장기수로써 인생을 감옥에서 보낸 억울한이들이 유난히 생각나게 한달까. <옥중일기>의 한 구절을 보자.

˝4개월간 배불리 못먹고,
4개월간 잠 한 번 제대로 못자고,
4개월간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4개월간 씻지도 못했기 때문이라.˝

이 4행시에는 감옥생활의 열악함이 그대로 담겨있다.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활동을 했던 분들을 만나서 옥살이 얘기를 들어보면, 이러한 경험을 들을 수 있다. 나 또한 그분들을 만나본적이 있으며, 얼마나 고생했는지 잘알고 있다. 호치민의 <옥중일기>는 혁명투사의 고된 옥살이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번에 읽은 책은 같은 저자가 번역한 <호찌민 시집>이다. 안경환씨가 2018년에 번역한 <호찌민 시집>은 <옥중일기>에다가 이후 호치민이 쓴 시와, 글, 편지, 그리고 연설을 추가했다.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이자, 국부인 호치민이 애국애족 정신이 담겨 있으며, 자유와 독립을 향한 그의 의지가 시 안에 잘 담겨있다.

한국에서 호치민하면 20세기 공산권 지도자인 스탈린이나 마오쩌둥 그리고 김일성 등과 비교했을때 제법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몇안되는 인물일 것이다. 한국과 베트남의 외교관계에 따른 그 영향이 있는 것도 한몫할 것이다. 물론 호치민에 대한 해외에서의 평가도 다른 공산권 지도자들보다 좋은 편이다. 아무튼 호치민은 세계가 인정하는 베트남 건국의 아버지다.

그러나 한국에서 호치민에 대한 인식은 베트남의 정치인 정도에서 못 벗어났다고 본다. 미국을 상대로 전쟁에서 승리한 지도자 정도에서 평가가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호치민에 대해서 깊게 공부해보면, 그가 한 평생을 베트남의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조선의 독립운동가들 못지않게 투쟁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그는 베트남 혁명을 성공시킨 인물이다. 미국에 맞서 승리하기 이전에, 일본과 프랑스 제국주의를 무찌른 인물이며, 그것도 혁명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했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호치민을 포함한 지도부는 이미 1945년에 일본을 무찔렀고, 1954년에 디엔비엔푸 전투를 통해 프랑스를 무찔렀다. 그런 점에서 베트남 전쟁은 참전용사 출신인 미 정치인 콜린 파월도 인정하듯이, 미국에 명분이 너무나도 없는 전쟁이었다.

안경환씨가 번역한 <호찌민 시집> 내용 중 디엔비엔푸 전투 승전관련 시와 베트남 전쟁 당시 새해 연설들이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베트남 사람들이 그를 아직도 존경하는 데에는 그가 진심으로 베트남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헌신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호치민은 자유와 독립의 소중함을 알았고, 진심으로 인민을 사랑했던 지도자라고 생각한다. 일각에서는 그의 모습이 연기된 것이라 말하지만. 연기라고 하기엔 그가 실천적으로 보인 모습에서 근거가 부족하다. 따라서 나는 베트남 인민에 대한 호치민의 사랑은 거짓됨이 없다고 보며, 현재 베트남 사람들이 보이는 호치민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안경환씨가 번역한 <호찌민 시집>은 인간 호치민의 인간적인 감정과 인민에 대한 사랑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는 책이다. 호치민의 말과 행동에는 적어도 진심이 담겨있다. 그런 점에서 <호찌민 시집>은 인간 호치민의 진심을 보기에 부족함이 없는 문학작품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호치민이 서거하기 전, 발표했던 1969년 신년 연설을 인용하겠다.

˝작년의 승리는 찬란했으니,
금년에도 갈수록 전선에서 분명히 대승을 거두리라.
독립을 위해, 자유를 위해,
미국을 깨끗이 몰아내자, 꼭두각시를 쳐부수자.
진군하자!
전사, 동포들이여!
남북이 함께 모여, 새해마다 더 즐겁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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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우크라 헤르손철수 평가>

논자마다 그 숫자는 조금씩 다르지만 약 3만 러군이 2-3일사이에 드네프르강 서안에서 동안으로 깜쪽같이 이동했다. 장비도 다들고 말이다. 알려지기로 고철이 된 헬기 한 대와 파괴된 T90전차 한 대만 남겼다 한다. 실로 감탄을 금치 못하겠다. 철군하면서 강의 동서를 연결하던 교량 2개도 마치 가위로 오려 내듯 파괴해 마지막 마무리도 왼벽했다.

작전상 철수와 패전후 후퇴는 추격이 있는 지 여부가 결정적 차이가 아닐 까 싶다. 왜냐하면 대개 전투에서 최대의 병력 손실은 등을 보인 적에 대한 추격전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추격은 없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군사적 관점이다. 예상했던 그대로 우크와 미는 대대적인 선전전을 개시했다. 이를 역사적 승리라고 했다. 아마 제2의 부차 연출도 예상된다. 프로파만 가지고 전쟁이 결정된다면 나는 우크가 이긴다고 본다. 우크의 네오나치는 아주 숙련된 프로파 기술자들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헤르손이 어딘지도 모르는 한국언론도 따라 붙는다. 그렇다. 이게 한국언론의 사명이다.

종합적인 평가는 여전히 다른 문제다. 전쟁에서 정치적 관점과 군사적 괸점은 무엇이 우선되는가? 참으로 난제 중 난제다. 이번 헤르손철수는 정치적 부담에도 불구 군사적 합리성을 선택한 것이다. 푸틴도 당연히 동의했다.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다. 이번 철수의 정치적 부담이 이번 전쟁의 정치적 목표달성에 그 어떤 치명적인 장애가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동의했을 거로 본다.

전쟁은 자신의 문법Grammar은 가져도,자신의 논리Logik를 갖는 것은 아니다. 클라우제비츠의 유명한 말이다. 그렇다. 이번 철수는 전쟁의 ˝문법˝에 충실한 결정이었다. 그렇다면 그 ˝논리˝는? 그 논리는 전쟁의 목표에서 나온다. 우크라 중립, 돈바스, 무장해제, 나치제거... 동남4주의 러연방가입으로 돈바스문제의 정치적 해결은 가닥은 잡았지만 아직 군사적으론 아니다. 나머지도 여전히 아니다. 갈 길이 한참 멀다. 평화는 아직 요원하다.

미국군사평론가 빅서지big serge의 평가인데 읽어 볼 만하다. 헤르손철수에 대한 네개 가설을 따져 본다. 1.러 패배설 2.러의 함정설 3.미러 밀약설 4.러 작전상 선택설 이 네가지다.

출처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pfbid0KBugo6e9ARqgSNpN2LLZgACzAo8JPSR6ewWhNyeeqpH1WBT7TVnwUnTECdTFJDuyl&id=100080442895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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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하다! 정말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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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7-16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B와 그 패거리들은 천안함 사건 이후 대북제재를 강화하여 남북교류를 파탄냈고,
윤석렬과 그 패거리들은 북한에 대해 ‘선제타격‘, ‘원점타격‘ 등의 거친 막말을 내뱉으며 한반도를 전쟁위기로 몰고 가고(게다가 이번에는 ‘화력격멸훈련‘을 강행하여 포천 지역민들을 전쟁공포에 떨게 했습니다!),
박그네는 개성공단을 폐쇄하여 남북 경제교류를 끊어버렸고,
황공안은 사드를 배치하여 동북아시아를 전쟁기지로 만들었다.

한반도의 평화통일은 커녕 남북관계파탄과 전쟁을 좋아하는 전쟁광 MB, 윤석렬, 박그네, 황공안 등 탐욕스런 뉴라이트 수구세력들과 그들의 물적토대 국짐, 조선일보 등이 있는 한 한반도에 평화도 통일도 없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끝난 지 이제 대략 1년이 흘렀다. 20019.11 테러에 대한 분풀이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미국은 20년간 이 나라에서 전쟁을 전개했고, 궁극적으로 패전했다. 전쟁 말기 이른바 2,000페이지에 달하는 아프가니스탄 페이퍼가 세상에 공개되면서, 미국 지도부가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전쟁을 진행했다는 것이 폭로됐다. 1971년 대니얼 엘스버그가 폭로한 펜타곤 페이퍼처럼, 아프가니스탄 전쟁도 베트남 전쟁처럼 미국의 거짓과 기만 그리고 위선 속에서 시작된 침략전쟁이었던 것이다.

 

미국의 항구자유작전(Operation Enduring Freedom) 이후 몇 개월 동안 사망한 아프가니스탄 민간인 숫자는 2만 명을 돌파했고,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막대한 자금과 병력을 투입했다. 2010년에는 최소 500명 이상의 미군이 전사했고,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병력을 10만 명을 돌파했다. 미군은 이른바 최신식 무기인 드론(Drone)을 이용하여,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일대를 폭격했으며, 그로 인해 수많은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아프가니스탄 민간인 사망자 추정치는 5만 명에서 많게는 10만 명 정도인데, 이러한 숫자를 합쳐 도합 24만 명의 아프가니스탄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수치가 정확한 추산은 절대 아니다. 지난 2021SBS에서 인터뷰한 탈레반 대변인 수하힐 샤힌은 아프가니스탄 국민 수십만 명이 미점령군에게 살해당했고, 미군 폭격기와 드론 공습에 맞아 죽은 비극적인 사연이 아주 많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미국의 현 대통령인 조 바이든은 전쟁이 끝날 무렵 2001년부터 20년 동안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최소 1조 달러(한화 1,170조 원) 정도에 달하는 비용을 썼다고 말했다. 반면 미국 국방부에서 2020년에 발간한 전쟁 비용 보고서에는 8,147억 달러(한화 995조 원)을 사용했다고 나오며, 여기에는 각종 무기와 파병 부대 운영비, 작전 비용 등이 포함되어 있다. 반면 미국 브라운대학교 전쟁비용프로젝트 통계에 따르면 대략 20년간 미국은 전쟁비용으로 총 22,610억 달러(한화 2,653조 원)을 사용했다고 나온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미국이 사용한 전쟁 비용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이 사용한 전쟁비용을 상회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사용한 전쟁 비용은 6,700억 달러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미국이 사용한 전쟁 비용을 상회하는 사례는 제2차 세계대전 뿐이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를 침략하여 천문학적인 전쟁비용을 사용했음에도 전쟁에서 패배했다. 미군은 2,500명이 전사하고 2만 명이 부상당했다.

 

미국이 이러한 전쟁비용을 들어가면서 아프가니스탄에 세운 정부는 말 그대로 썩어빠진 정부였다. 미국 정부가 임명한 아프가니스탄 친미 대통령인 하미드 카르자이는 아프가니스탄을 세계 최대의 아편 공급 국가로 만들어 놓은 잔인하고 부패한 군벌 들 및 부패한 관료들과 손잡고 통치했다. 당연히 민주주의 같은 이상은 전혀 없었으며, 여성들은 여전히 탈레반 치하 못지 않게 탄압 받았다. 2004년 기준으로 아프가니스탄은 세계 아편 수요의 87%를 공급했으며, 2009년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세계 부패지수는 2위를 기록했다. 따라서 탈레반이 적잖은 아프간인들의 지지를 받은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 탈레반의 억압성은 친미정부의 부정부패와 폭력으로 인해 옛날 일이 되고 만 것이다.

 

2009년 기준으로 아프가니스탄은 세계 5위의 최빈국이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인 1인단 GDP426달러였으며, 빈부격차는 극심했고, 전체 인구의 68%는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깨끗한 식수를 마실 수 있는 아프가니스탄인은 전체 인구의 23%였다. 평균 수명은 43세였으며, 인구의 76%가 문맹이었다. 특히 여성의 문맹률은 86%였고, 전쟁 10년째 되던 2011년 학교에 다니는 아프가니스탄 소녀는 전체 비율의 30%도 안됐다. 즉 미국은 이처럼 열악하기 그지없는 상황에서 연간 최소 1,000억 달러 이상의 군사비용을 지출했다. 이 중 아프가니스탄 지역 개발에는 20억 달러 밖에 사용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싱크탱크 미국진보센터는 소련도 아프간 재건에 미국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썼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친미정부 하의 아프가니스탄의 여성들은 여전히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미국 정부는 대다수 가난한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에게 교육할 기회를 전혀 부여하지 않았다. 친미정부 하에서도 유아사망률과 산모사망률은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2009년 기준으로 아프가니스탄은 여전히 남녀평등지수 최악의 국가 2위를 기록했다. 사실상 탈레반이 통치하는 것이나 친미정부가 들어선 것이나 여성들의 처지는 큰 차이가 없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은 미군의 군사작전 과정에서도 인권을 보장받지 못했다. 미군은 탈레반에 대한 소탕전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친미정부 군대와 함께 민간인들의 대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이 닥쳤으며, 이는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에서 민간인들에게 했던 짓과 일치했다. 또한 미군의 드론 공습으로 적잖은 민간인이 사망했으며, 드론이 투하한 폭탄은 비극적이게도 탈레반 소탕을 빙자하여 민간인을 노렸다. 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의 지방경찰들은 보호 대상인 시골 주민들을 강간하고 살해하기도 했으며, 국립경찰 또한 구금자들에게 조직적으로 고문했다는 정황이 유엔 아프가니스탄지원단에 의해 확인되기도 했었다. 아프가니스탄 친미 정부가 자국 국민에게 자행한 고문은 상상을 초월했으며, 당연히 인권유린이 무수히 많이 벌어졌다.

 

이러한 사실을 보더라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여성해방도 민주주의도 그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으며, 미국의 침략 명분은 말 그대로 거짓과 위선으로 점철되었을 뿐이다. 지난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탈레반이 승리하자, 국내 언론들은 자극적으로 여성인권을 갑자기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탈레반의 문제점과는 별개로 아프가니스탄 친미 정부가 아주 썩어빠진 정부이며, 인권은 1도 존중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국내 언론은 전혀 주목하지 않았고, 그저 미국이 써주는 선전문구를 옮기기 급급했다. 현재 탈레반 정부는 분명 반동적인 정부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미국과 친미정부에게 어떻게든 좋은 명분을 주려는 이들의 모습은 그저 한심할 따름이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그 시작부터 잘못된 미제국주의의 침략전쟁이었으며, 미국의 탈레반 여성인권 운운은 한 마디로 핑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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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4-05-11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서는 언급이 잘 되어 있지는 않지만 미국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1979-1989) 시기 ‘소련에 의한 공산화를 막겠다‘는 명목으로 무자헤딘과 탈레반으로 대표되는 ‘이슬람 극단주의‘ 조직을 후원한 적도 있습니다. 반면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사회주의정부를 지지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