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ㅡ오로지 시각과 청각에만 호소하는 듯한 작품들도,그것을 음미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깨어난 지성이 이 두 감각과 밀접하게 협력해야 하는 것처럼 ㅡ나는 지난날 알베르틴을 잘 알지 못했을 때 그녀가 내 마음속에 불러일으켰던 꿈들을, 또 우리의 일상생활이 사라지게 했던 꿈들을 나도 모르게꺼내곤 했다. 나는 그 꿈들을 마치 도가니에 던지듯 음악가의악절이나 화가의 그림 속으로 던졌고, 내가 읽고 있는 작품에그 꿈들로 양분을 주었다. 그러자 확실히 작품은 보다 살아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알베르틴도 이에 못지않게 두 세계 중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즉 우리가 매일 접하고 동일한 물건을번갈아 배치할 수 있는 세계에서, 질료의 중압감으로부터 벗어나 유연한 사유의 공간에서 뛰어놀 수 있는 세계로 이동한다는 이점을 가지게 되었다. - P93
이 모든 아름다운 물건에 대한 알베르틴의 안목은 공작 부인보다 훨씬 예리했는데, 우리의 소유를 방해하는 모든 것들이 그렇듯이(이를테면 내게서 병이 여행을 그토록 어렵게 만들면서 동시에 갈망하게 했던 것처럼), 가난은 부유함보다 관대한 탓에 여인들에게 그들이 살 수 없는 옷 이상의 것, 즉 옷에 대한욕망을 선사하며, 바로 이것이 옷에 대한 구체적이고 깊이 있는 진정한 인식에 이르게 한다. 그녀 스스로는 이 옷들을 마련하지 못했고, 나는 그녀를 기쁘게 하려고 그 옷들을 제공했으므로, 우리의 이런 모습은 먼저 그림을 연구한 뒤 드레스덴이나 빈으로 보러 가기를 열망하는 대학생들과도 흡사했다. 반면 수많은 모자와 옷에 둘러싸인 부유한 여인들은, 미리 욕망을 느끼지 못하고 미술관을 산책하는, 그래서 현기증과 피로와 권태만을 느끼는 방문객들과도 같다. - P104
그녀는 경박하지 않았고 더욱이 혼자 있을 때면 책을 많이읽었으며, 또 나와 함께 있을 때면 내게 책을 읽어 주기도 했다. 그녀는 지극히 지적인 여성이 되었다. - P105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지배 이데올로기나 대중매체에서 떠드는 것 이상을 알기 어렵다. 알려는 노력, 세상에 대한 애정과 고뇌를 유보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한나 아렌트(Hanna Arendt, 1906~1975, 전체주의 비판자이며 참여 민주주의옹호자인 독일 출신의 유대계 여성 정치철학자)가 말했듯이, 사유하지않음 이것이 바로 폭력이다. - P56
사회운동 중에 여성운동만큼 편견에 시달리는 운동도 없을 것이다. 아니, 아예 여성운동을 사회운동으로 취급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여성운동에 대한 비난은 장애인운동이나 노동운동, 평화운동,반미운동 등 다른 사회운동에는 절대로 적용될 수 없는 말들이다.평화운동을 ‘먹고 사는 게 해결된 한가한 사람들의 운동‘, 장애인운동을 ‘중산층 지식인들의 운동‘ 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노동운동가들은 노동 의식만 있지 사회 의식은 없다." 이런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여성운동가에게 사회 의식이 없다는 말은, 여성문제는 개인의 문제이지 사회 문제가 아니며, 따라서 여성 의식은사회 의식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 P58
어떤 면에서 부르주아 지식인 남성이 노동자 계급의 이해를 옹호하는 ‘좌파‘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것은 그들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일이 아니다. 세상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권력, 남성의 주체성을 조금도 훼손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남성이여성주의자가 되는 것은 자기 존재를 상대화해야 하는, 자신을 후원하는 ‘아버지‘를 버려야 하는, 매일매일 보이지 않는 (가사)노동을 감당해야 하는 힘든 일이다. 그야말로 존재의 전이인 것이다. - P60
여성운동은 남자 시스템에 저항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남성의 세계관과 경험만을보편적인 인간의 역사로 만드는 힘을 조금 상대화시키자는 것이다. 남성의 삶이 인간 경험의 일부이듯, 이제까지 드러나지 않았던여성의 경험도 인간 역사의 일부임을 호소하는 것이다.또 내가 생각하는 여성운동은 여성이 ‘공적 영역‘에 진출하는 것을 넘어, 남성이 ‘사적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정신 차려야할‘ 집단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다. 남성들이 집에서 노동하지 않는 한, 여성에게 사회 진출‘은 이중의 중노동만을 의미할 뿐이다. - P61
한국 사회에는 유난히 남자의 기(氣)를 살리자는 식의, 남성을불쌍히 여기는 담론이 만연해 있다. "남자는 독립적이고 강하다."라는 성역할 고정관념은, 실은 서구 백인 중산층을 기준으로 했을때의 이야기다. 한 남성 시인은, 서부 영화에서는 악당이 쳐들어오면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네가 가족을 지켜야 한다."라고 말하지만, 아마 한국에서라면 아버지와 아들은 "엄마가 나가 봐."라며 치마 뒤로 숨을 것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 P62
유엔을 비롯한 각종 국제기구의 통계들은, 한국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 확대와 높은 교육 수준에 비해 권한 척도는 현저히 낮다고 보고하고 있다. 한국은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가부장적신념이 강한 사회인데도, 왜 남성을 "약하고 불쌍하다."고 이야기할까? 왜 그토록 남성들은 열등한 여성들의 위로와 격려를 필요로 할까? 혹 이러한 ‘응석‘이 남성의 성장과 우리 사회의 성숙을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 - P62
다른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사회는, 갈등 없는 사회가 아니라 가능성이 없는 사회다. - P63
견고한 습관이란 보통 부조리한 측면과 관계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찬란한 행동은 대개 간헐적으로 하는 법이다. - P73
편집증적인 사람이 스스로에게 온갖 쾌락을 금하고 엄청난 고통을 가하는 미친 삶,이런 삶은 가장 변하지 않는 법이다. 우리는 십 년마다, 만약호기심이 있다면, 삶을 즐길 시각에는 잠을 자고, 거리에서살해당할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할 게 없는 시각에는 외출하고,항상 감기에 걸릴까 봐 조심하면서도 더운 날 찬 음료를 마시는 불행한 자를 만나게 될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삶을 제대로바꾸기 위해서는 단 하루 작은 에너지를 사용하는 운동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런데 바로 이런 삶은 보통 에너지가 결핍된 인간들의 전유물이다. 악덕은 이 단조로운 삶의 또다른 양상으로, 작은 의지만 있어도 우리의 삶은 덜 비참해질것이다. - P73
정체성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와 맥락 속에서 구성된다. 모든 정체성은 차이를 가로질러 형성된다. - P37
남성들은 개인 혹은 인간으로 간주되지만, 여성들은 여성으로 여겨진다. 여성이나 페미니즘이 다 똑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타자 내부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억압이다. 여성들간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여성 해방이다. 여성을 여성으로 환원하는 것이 가부장제이기 때문이다. - P39
정체성의 정치가 문제적인 것은, 사회적 범주와 사회적 그룹들을 동질화, 자연화하여,경계의 이동과 내부의 권력 차이와 이해 갈등을 부정한다는 점이다. - P41
여성주의는 성별 관계뿐만 아니라 다양한 타자들과의 소통, 그리고 다른 사회적 모순과 성차별의 관계에 주목한다. 때문에 여성주의는 그 어느 정치학보다도 다른 사회적 차별에 매우 민감하며,다양한 피억압자들에게 관심을 갖는 연대와 제휴의 정치이다. - P41
인간의고통, 사회적 불평등은 계급, 민족 등 어느 한 가지 사회적 요인만으로는 설명 불가능하다. 계급이든, 민족이든, 젠더 모순이든 모두다른 사회 문제와 관련성 속에서 작동한다. - P42
유사 이래 모든 문학, 예술 작품의 지은이들은 실연당한 사람들이다. "나는 그를 버렸도다!" 이런 작품은 없다. 대부분의 예술은"그가 나를 떠났구나."에서 시작된다. 상처를 준 사람은 상처에 대해 연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상처받은 사람은 그것의구조와 원인, 역사를 규명하려 한다. 상대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쪽은 언제나 ‘약자‘ 이거나 더 사랑하는 사람이다. - P43
이처럼 얇은 경계와의 만남에서 가능하다. 그러므로 편안한 상태에서 앎이란 가능하지 않다. 경계를만났을 때, 가장 정확한 표지는 감정이다. 사회적 약자들은 자신을억압하는 상황이나 사람을 만났을 때 ‘감정적‘으로 대응하기 쉬운데, 이건 너무도 당연하다. 감정은 정치의식의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감정이 없다는 것은 사유도 사랑도 없다는 것, 따라서 삶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감정 (emotion)의 라틴어 어원은 자기로부터 떠나는 것, 나가는 것(moving out of oneself), 즉 여행이다. 근대의 발명품인 이성(理性)이 정적이고 따라서 위계적인 것이라면, 감정은 움직이는 것이고 세상과 대화하는 것이다. 감정의 부재, ‘쿨‘함은 지배 규범과의 일치 속에서만 가능하다. 반응하는 것. 이것이인간의 모든 느낌, 모든 즐거움, 모든 열정, 모든 생각의 근원이라고 생각한다. - P45
고통의 반대는 행복이 아니라 권태다. - P47
지그문트 프로이트,카를 마르크스,자크 라캉,피에르 부르디외,주디스 버틀러 - P53
여성주의는 남성 언어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사유 방식의 전환을 요구한다. 그들은 이제까지"여성주의는 편파적이고 나는 객관적"이라고 믿고 있다가, 자신의사고 역시 편파적이며 더구나 강자의 경험을 보편과 객관으로 믿어 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 P53
사실, 여성주의는 객관적이지도 보편적이지도 않다. 아니, 그것을 지향하지 않는다. 여성주의는무전제의 전제에서 출발하지도 않고, 그 어떤 전제도 없는 청중들을 설득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상에 그런 청중은 없기때문이다. "남성적이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라는 질문에, "당연하지요. 세상에 그것밖에 없으니까요." 라고 답한 프랑스의 철학자 뤼스 이리가레(Luce Irigaray, 1932~, 서구 전통 철학의‘남근이성중심주의‘ 사유를 비판하는 프랑스의 페미니즘 철학자)의 말대로, 세상에 하나의 목소리만 있을 때는 다른 목소리는 물론이고, 그한 가지 목소리마저도 알기 어렵다. 의미는 차이가 있을 때 발생하며, 인식은 경계를 만날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 P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