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갑작스런 패턴의 변화는 좋지 않은 신호라는 것을 안다. 추세가 급격히 변하는 것은 정상이 아니라는 의미다. 남편이 갑자기 콜롬보 지갑을 사오면 그건 내연녀에게 콜롬보 백을 사주었다는 뜻이다. 의심해봐야 한다. - P23

할머니가 처음부터 고수였던 것은 아니다. 그도 소싯적에는 감방을 들락거린 속칭 ‘꽈배기‘였다. 그러나 어설픈 처벌이 반복되면서 마치 비 온 후 죽순 자라듯 사기 공력이 늘었고, 경찰·검찰의 속성에도 정통하게 되었다. 꽃다운 청춘의 한 조각을 감방에서보낸 대가로 얻은 관록과 후덕한 인상, 그리고 대범함이 더해져 ‘만렙‘ 사기꾼으로 성장한 것이다.
- P25

 피해자들은 속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인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상대방의 외모나 인상만 보고판단하는 경우가 많고, 또 그런 허술한 판단이 옳다고 고집스럽게우긴다. 더욱이 사람들은 너무 큰 불행이 닥치면 부정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사기를 당한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속인다. 할머니의회사에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긴 걸 거라고, 곧 돌아와 예전처럼 어음을 잘 해결해줄 거라고 스스로를 속인다.
- P25

우리나라 검사들은 2년마다 인사이동을 한다. 대구지검에서 근무하다가 순천지청으로 가는 식이다. 인사이동을 하면 그동안 자신이 담당했던 사건들은 해당 검찰청에 그대로 두고 가는데 대략200~300건이다. 이 사건들은 다른 검사들이 배당받아 처리하게 된다. 이것을 재배당‘ 이라고 한다. 재배당은 매우 빈번하게 일어난다.
통상 6개월마다 이루어지는 부서 이동이나 휴직 연수 등 검사가 자리를 비워야 할 때에도 일어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언론에 자주나오는 검사보다는 재배당과 이송을 적게 하는 검사가 좋은 검사다. - P26

할머니는 새로운 검사에게 자신의 사건이 재배당된 것을 확인한 후, 토요일 오전을 택해 느닷없이 검사실로 쳐들어온다 (당시에는토요일 오전에도 근무를 했다). 조금 있으면 퇴근한다는 기대감으로 느슨해진 틈을 타 다짜고짜 욕설과 고함을 지르며 들이닥치는 것이다.
자신은 이름을 빌려주었을 뿐인데 도대체 왜 자신을 수배해놓았느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이른바 ‘선빵‘을 날리는 것이다. 그 기세에 눌린 새로운 검사는 전임 검사가 무언가 실수를 했구나 싶은생각이 들어 쩔쩔매게 된다. 기선에서 밀리면 끝까지 밀리는 법이다.
병아리 때 쫓기면 장닭이 돼도 쫓긴다.
- P27

검사는 할머니에게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고 사과하면서 우선 수배를 해제시켜놓을 테니 나중에 소환하면꼭 나오시라고 당부한다. 이렇게 할머니는 수배가 해제되고 아무런조사도 받지 않은 채 오히려 검사의 사과를 받으며 당당히 검찰청을 걸어 나간다. 들뜬 토요일의 퇴근 욕심이 부른 집중력 부족을 할머니는 이탈리아 축구의 전설 ‘인자기‘ 뺨칠 위치 선정으로 파고드는 것이다.
- P28

일반적인 회사에서는 부장이 차장보다 상급이지만 검찰청은 다르다. 차장은 ‘차 검사장‘의 줄임말로 부장의 상급자이고 모든 사건의 결재를 담당하는 중요하고도 엄청난 중노동을 하는 역할이다. 지리산 천왕봉으로 올라가기 직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깔딱 고개와 같은 것이다. [검사의 승진 순서는 평검사(3급대우) → 부부장검사 → 부장검사(13~19년 차) → 차장검사(19~20년 차) → 검사장(준차관급)- 고검장(차관급) → 검찰총장(장관급) 순이다.]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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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철학자들 글을 꾸준히 읽는다. 그들은 참 괴상하고 웃기고 대책 없는 작자들ㅡ 도박꾼들이다. 데카르트가 등장해 말하길, 이 친구들 지금까지 순 헛소리만 했어. 그는 수학이 절대적이고 자명한 진리의 모형이라고 했다. 기계론이다. 그다음엔 흄이 과학적 인과론의 타당성을 공격하며 등장했다. 이어서 키르케고르, "손가락으로 존재를찔러보았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다. 내가 어디에 있는가?" 다음은존재가 부조리하다고 주장한 사르트르의 등장. 난 이 작자들이 사랑스럽다. 그들은 세상을 뒤흔든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느라 골머리가쑤시지 않았을까? 이빨 사이로 암흑이 몰려나오며 포효하지 않았을까?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길에 나다니거나 카페에서 뭘 먹거나 티브이에 나오는 사람들과 대비해보면 차이가 너무도 엄청나서, 내 속에서 뭔가 뒤틀리며 창자를 발길질한다.
- P16

헤밍웨이에게투우가 필요했던 까닭을 난 안다. 그에게 투우는 삶이라는 그림을 끼울 액자 같은 것으로, 자기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를 일깨워주었으리라. 때때로 그걸 우린 잊어버린다. 기름 값을 지불하고 엔진오일을 교환하는 등등에 정신이 팔려서, 대다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준비가 없다. 제 자신의 죽음이건 남의 죽음이건, 사람들에게 죽음은 충격이고 공포다. 뜻밖의 엄청난 사건 같다. 염병, 어디 그래서 되겠나.
난 죽음을 왼쪽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때때로 꺼내서 말을 건다. "이봐, 자기, 어찌 지내? 언제 날 데리러 올 거야? 준비하고 있을게."
- P17

꽃이 피어나는 것이 애도할 일이 아니듯, 죽음도 애도할 일이 아니다. 끔찍한 건 죽음이 아니라 인간들이 죽기까지 살아가는 삶, 또는 살아보지 못하는 삶이다. 인간들은 제 삶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제삶에 오줌을 싸댄다. 제 삶을 똥 싸갈기듯 허비한다. - P17

대다수 인간들의 죽음은 짝퉁이다. 죽을 게남아 있어야 말이지.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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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순간이면 콜랴는 인상을 팍 쓴 채 창문을 바라보거나 자기 장화에 구멍이 난 건 아닌지 살펴보거나, 한 달쯤 전 갑자기 어디선가 얻어 집으로 들인 뒤 무엇 때문인지 친구들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고 방 안에서 몰래 키우고 있는상당히 커다란 옴투성이의 털북숭이 개 페레즈본을 맹렬하게부르곤 했다. 그런데 그는 이 개에게 무척이나 난폭하게 굴며 온갖 재주와 묘기를 다 가르쳤는데, 결국 이 불쌍한 개는 그가 학교에 가서 집에 없을 때는 끙끙대며 울다가, 그가 돌아오면 좋다고 멍멍 짖어 대고 반쯤 미친 듯 펄펄 뛰면서 주인을 섬기는가 하면 땅바닥에 나뒹굴어져 죽은 척을 하는가 하면, 한마디로 자기가 배운 재주를 죄다 보여 주었으니, 이건 주인이 무슨 요구를 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저 혼자 기뻐 죽겠고 너무 고마운 나머지 진심으로 그랬던 것이다.
- P21

페레즈본은 아주 신이 나서는 연신 좌우로 고개를 기울여 어디 무슨 냄새라도 맡는지 킁킁대며 뛰어다녔다. 다른 개들과 마주칠 때면 자기들 나름의 규칙에 따라 예사롭지 않을 정도로 기꺼이 서로 몸 냄새를 맡았다.
- P37

"그런데 너 눈여겨본 적 있냐, 스무로프, 한겨울에는 영하 15도,심지어 18도가 되어도 예를 들면 지금처럼 이렇게 춥게 느껴지지 않아. 하지만 지금과 같은 겨울 초에는 갑자기 영하 12도의혹한이 닥치는 거니까 춥게 느껴지는 거야, 눈이 거의 없는데도 말이야. 이건 다시 말해 사람들이 아직 익숙해지지 않아서그렇다는 거야. 인간 만사는 모두 습관이야, 국가적 일이나 정치적 일에서도 모든 것이 습관이지. 어디나 습관이 주된 동력이란 거야"
- P38

"이봐, 스무로프, 첫마디에 못 알아듣고 자꾸 되묻는 걸 나는 좋아하지 않아. 어떤 것은 아예 설명을 할 수도 없단 말이다.
- P39

콜랴는 근엄한 얼굴을 하고 담장에 몸을 살짝 기댄 채 알료샤가 나오길 기다렸다. 그렇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료샤를 만나고 싶었다. 그에 대한 얘기는 아이들한테서 지겹도록 많이들어 왔지만, 지금까지 아이들이 자기 앞에서 그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고 심지어 ‘비판‘까지 할 때면 그 얘기를 들을 때마다 겉으로는 늘 경멸스럽고 무심한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무척, 무척이나 사귀고 싶었다. 그가 들은 알료샤에 대한 얘기 속에 모두 뭔가 공감이 가고 사람을 끄는 것이 있었던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이 순간은 중대했다. 첫째, 독립심을 보여 주기 위해 제 얼굴에 먹칠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안그러면 내가 열세 살짜리 꼬마라고 생각하면서 나를 저 녀석들과 똑같은 코흘리개로 간주할 거야.  - P47

알료샤는 우리가 그의 이야기를 중단한 시점 이후 몹시 달라져 있었다. 승복을 벗어 던지고 지금은 멋지게 재단된 프록코트를 입고 부드럽고 둥근 모자를 쓰고 있었으며 머리카락은 짧게 깎은 상태였다. 이 모든것이 그를 몹시 돋보이게 만들어서, 완전히 미남이 되어 있었다.
그의 귀염성 있는 얼굴은 항상 명랑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이 명랑함은 어쩐지 조용하고 평온한 것이었다.  - P49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것이 당신의 신념인가요?" 콜라가그를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그 발상은 상당히 흥미진진하네요. 나는 지금 집에 도착하면 이 문제를 놓고 머리를좀 굴려 보겠습니다. 고백하건대, 나는 정말로 당신한테 뭔가를 배울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어요. 내가 온 것은 당신에게서가르침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카라마조프 씨." 콜랴가 감명을받은 듯 격정적인 목소리로 말을 끝맺었다.
"그럼, 나는 당신에게 가르침을 받도록 하죠." 알료샤가 그의 손을 쥐면서 미소를 지었다.
콜랴는 알료샤에게 굉장히 만족했다. 그를 감동시킨 것은알료샤가 자기를 극히 동등하게, 그러니까 자기를 ‘완전한 어른으로 대하며 얘기를 나누고 있다는 점이었다.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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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는 남는 장사다. 밑천 없이 시작할 수 있고, 세금도 안 낸다. 사기를 쳐도 잘 잡히지 않고, 설사 잡혀도 대부분 쉽게 풀려난다. 손익분기점을 훌쩍 넘긴다. 그러다 보니 한 해에 24만 건의 사기 사건이 발생한다.
2분마다 1건씩 사기가 벌어지는 셈이다. 사기로 인한 피해액도 매년 3조원이 넘는다.
- P18

사기꾼은 어지간해서 죗값을 받지 않는다. 사기꾼이 구속될 확률은 재벌들이 실형을 사는 것만큼 희박하다. 설사 구속되더라도 피해자와 외상합의(합의금의 일부만 주고 나머지는 나중에 주겠다고 약속하는 것)를 하거나 할인합의를 하면 구속적부심 (피의자의 구속수사가 합당한지를 법원이 판단하는 절차, 구속된 피의자는 검사가 기소 제기를 하기 전까지 누구나 청구할 수 있다)이나 보석으로쉽게 풀려난다. 재판 중에도 피해자 일부에게 합의금을 주는 조건으로 위증을 교사하곤 한다. 그래서 무죄로 빠져나오기도 쉽다. 수사나 재판을받을 때 중병이 드는 것은 재벌이나 정치인에게 국한된 일이 아니다. 원래그 초식은 사기꾼들이 만든 비급이었다. 자신이 병들지 않으면 가족중에 누구 하나라도 죽을병에 걸린다. 이 병이 신기한 것은 영어의 몸에서풀려나면 저절로 낫는다는 점이다. 내림굿을 하면 씻은 듯이 낫는 신병과같은 것이다.
- P19

실형이 선고되더라도 낙담하기에는 이르다.1심에서 법정구속이 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구속될 경우 사기꾼의 방어권이 심하게손상될 수 있다는 해괴한 믿음 때문이다. 오랜 실무 경험을 가진 변호사를 선임하거나 일부 합의라도 하면 항소심에서는 집행유예가 나올 확률이 높아진다. 실형이 나오더라도 어지간해서는 검사 구형량과 동일한 형이 선고되는, 소위 ‘역기 드는 일이 없다. 교도소를 가더라도 가석방을 노릴 수 있고, 형집행정지도 종종 받는다.
이런 천혜의 환경 조성으로 우리나라 사기범의 재범률은 77%에 이른다. 처벌을 받은 사기꾼 10명 중 8명은 다시 범죄를 저지른다는 뜻이다.
사기범의 55%는 5개 이상의 전과를 가지고 있다. 이건 확실히 비정상이다. 이렇게 사기범의 재범률이 높은 것은 처벌이 약하기 때문이다. 위험과 수익을 비교해 볼때 위험은 무시할 만하다는 것을 몸소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기는 줄어들지 않고, 사기꾼의 재범은 늘어나는 것이다.
- P20

애석하게도 우리나라에서 사기군에게 응당한 처벌이 가해진다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지닌 배신자 인지 능력은 법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바로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불신이다. 사법 제도가 극적으로 개선되지는 않을 테니 그 불신이 이른 시일에 해소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서 당분간 이 배신자 인지 능력의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서는, 매정한 말이지만, 각자가 알아서 사기를 피해야 한다.
옛말에 ‘도둑놈은 한 죄, 잃은 놈은 열 죄‘라고 하지 않았던가. 무책임하다고 욕하지는 마시라. 그리 무리한 요구는 아니다. 왜냐하면 사기의 공식은 비교적 단순하고 허접하기 때문이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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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불멸이란 산 자들의 멍청한 발명품이다. 경마의 효용이 뭔지 아는가? 경마는 글줄이 흘러나오게 만든다. 번개 치듯 불시에 찾아드는 행운, 마지막 파랑새 노래. 내가 무슨말을 하든 멋있게 들리는 건 내가 도박하듯 글을 쓰기 때문이다. 신중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들은 연구하고, 가르치고, 그리곤 망친다.
 관습이 그들에게서 열정의 불꽃을 앗아간다.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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