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이 되어 오래 마주하면 뭐든 무덤덤해진다. 그래서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지 말라는 말도 있다. 더군다나 재난에 관한 일이 직업이라서 재난에 무덤덤해지면 어떻게 될까.
p.12 요나에게 어떤 지명들은 재난과 동의어였다. 뉴올리언스에서는 허리케인의 흔적을 볼 수 있고, 뉴질랜드에서는 도시를 폭삭 무너뜨린 대지진을 훔쳐볼 수 있고, 체르노빌에서는 핵 누출로생긴 유령 마을과 낙진으로 생긴 붉은 숲을, 브라질의 빈민가에서는 경제 재앙의 현실을, 스리랑카나 일본, 푸껫에서는 쓰나미의 위력을, 파키스탄에서는 대홍수를 경험할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재난이 없는 도시는 없었다. 재난은 우울증 같은 거라 어디에든 잠재했다.
어쩌다보니 다양한 아르바이트와 직업을 경험한 나는 성형외과에서 한동안 일을 했었다. 처음 일하던 병원에서는 시술에 관한 기사도 직접 쓰고 그걸 보고 전화한 사람들에게 전화상담과 내원을 유도하는 것도 주로 내몫이었다. 혼자서 하루에 300통 넘는 전화를 받아내야 할 때도 있었다. 귀에서 피가 난다는 농담에 누구보다 웃음이 터지는건 경험에서 나오는 공감탓이리라.
한번은 어떤 남자가 사각턱수술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며 전화했다. 이미 수백통의 전화를 받고 퇴근이 임박한 시간이라 지쳐있던 나는 그 사람이 원하는만큼 다정하고 섬세한 답변을 주지 못했던것 같다. 느닷없이(나에겐) 화를 내면서 그 사람은 내게 악담을 퍼붓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 식의 막말을 들으면 마음이 상하기 마련이건만 도리어 정신이 버쩍 든 나는 그 사람에게 미안했다. 종일 힘들었던 탓에 그런 피곤과 짜증이 전달된 것 같다고, 제가 자세히 설명을 다시 해드리겠다고 전화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수도 없었다.
p.15 "애가 아프다고요. 병원에 입원했어요. 이렇게 되면 인지상정으로라도 취소해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 원하시면 취소는 가능해요." "환불은 안 되고. 그렇죠?" "잘 알고 계시네요." "당신 이름이 뭐야?" "고객님" "이름이 뭐냐고? 당신 말하는 싹퉁머리가 기분 나빠서 못참겠어.이름 말해." "고요나입니다."
재난 지역 여행상품을 판매하는 회사 '정글'에서 여행지 코스 프로그래밍을 담당하는 고요나. 언젠가부터 회사에서의 입지가 불안하게 느껴지고 자신이 결국 '퇴출'을 의미하는 옐로카드를 받은 상황은 아닐지 의심하게 된다. 상사의 갑작스러운 추행과 희롱에 더욱 그런 의구심은 힘을 얻고 비슷한 일을 겪은 회사동료들이 연대할 것을 제의하지만 자신은 그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며 엮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날 사직서를 제출했는데 되려 판매상품인 한 곳에 휴식차 다녀오라는 제의를 받는다. 그리고 요나는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일에 휘말린다.
구매한 책이 이미 너무 많아 자제하고 있을 때 페넬로페님의 리뷰를 보고 윤고은 작가의 이 책이 읽고 싶어 도서관에서 빌리려했다. 국내에서도 상을 받았다는데 거기 더해 영국의 대거상(중 번역추리소설상)을 수상해 인기가 높아졌는지 예약3순위가 되어 거의 한 달을 기다려 받았다. 재난 지역을 여행한다는 독특한 소재의 이 작품에는 커다란 싱크홀이 있는 마을이 등장하는데 싱크홀은 자연 발생적인 경우와 난개발로 인한 인재의 결과등 세계 곳곳에 발생하는 지반침하 현상을 일컫는다.
p.124 싱크홀은 왕복 5차선 도로도 5분 안에 먹어 치울 수 있다. 입이 큰 뱀이 집채만 한 개구리를 꿀꺽 삼키듯, 두 개의 구멍은 어느 마을의 소박한 운동회를 집어삼킬 수 있다. 시간은 이제 수챗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하수처럼 그 일을 향해 빨려 들어갈 것이다. 이미 그 소용돌이가 시작되었다.
리뷰를 읽은지도 오래되어 어떤 내용인지 거의 잊을 무렵이라 무심코 펼쳤던 나는. 몇 시간만에 이 작품을 뚝딱 다 읽어버렸다. 100페이지 즈음 다가가며 스릴러로 전환되었던 반전이 주요했다. 사람은 대부분 직접 겪지 않은 일에 온전히 공감하기 힘들다. 그것이 직업에 관련되어 무수히 반복되는 걸 지켜보는 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오롯히 내 일이 될 때라야 그 의미를 피부로, 가슴으로,온 정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싱크홀이라는 큰 구멍이 상징하는 아득함과 공포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타자들만의 사건이고 외면하고 싶은 재앙의 다름아닌 은유다.
p.195 나는 리모컨의 Do not disturb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방갈로의 눈꺼풀은 내려가지 않았다. 아무리 눌러도 리모컨은 작동하지 않았다. 눈은 이제 요나의 의사와 관계없이, 다른 말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