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병 시인은귀천이 대표 시로 돼 있다. 나는 귀천보다는 갈대가 그의 대표 시가 돼야 한다고 여긴다. ‘갈대시를 보자.

 

갈대 / 천상병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나란히 소리 없이 서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안타까움을 달래며

서로 애터지게 바라보았다.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눈물로 젖어 있었다.

 

 

이 시에는 인간의 근원적인 외로움(김현승 시인의절대고독과 같다.)이 잘 나타나있다. 사실 존재의 외로움은 숙명적인 거라서 그 누구도 면()할 수 없다. 심지어는 갈대조차 외로움에 처해 있는데, 그렇다고 갈대와 내가 함께 있다고 해도 그 외로움이 절감되지 않음을 이 시는 절절하게 보여준다. 이 시에서달빛이 한 역할 한다. ‘갈대와 나라는 존재를, 나아가서는 존재의 외로움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이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에.

이 시에 등장하는 사물들 대부분은 시적화자의 정서처럼 연하기 짝이 없다. ‘갈대’ ‘달빛’ ‘눈물이 그렇다. 그 탓에 작품의 분위기가 가라앉을 수 있는 위험을바람으로써 해결했다. 바람이 불어옴으로써 안타까움을 달래며 나아가 서로 애터지게 바라보게까지 했다. 고요한 가운데 움직임이라는 정중동(靜中動)이 이것이다.

 

이 시의 스토리는 이렇다.

어느 환한 달밤에, 나는 갈대밭에 있었다. 그 때 바람이 불며 나와 갈대는 함께 흔들렸다. 나는 마음이, 갈대는 잎과 줄기가 흔들린 것이다. 하지만 그뿐, 각자(各自)의 외로움은 여전하다. 외로움은 존재의 숙명이니까. 결국 나는 눈물 흘린다.

 

사실 이 시는 어느 달 밝은 밤에 갈대밭에 혼자 서서 눈물짓는 사람의 장면을 전제한 것이기에 언뜻 보면 달밤에 근거 없이 우는 청승맞은 사람꼴이다. 이 지점에 시의 역설(逆說)이 있다. 그가 우는 까닭은 속세에 있지 않고 우주에 있으므로.

우리는 왜 태어났는가?

이 물음에 딱 부러지는 답을 얻지 못한 채 수백 만 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금도 답을 얻지 못한다. 그렇기에 환한 달빛 아래 그는 눈물짓는다.

 

사실 이 시는 매우 단순한 구조로 돼 있다. 3개 연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1연과 2연의 내용이 거의 같다. 1,2연 모두 환한 달빛 속에서/갈대와 나는/ 있었다.’라는 단순반복인 것이다.

간단하게 썼으면서 그 내용은 우주적인 시. 천상병 시인의 대표 시는 이 시로 삼아야 한다.

 

그림 = 김춘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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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초 어느 날이다. 아내가 밭에 들어갔다가 길이 1미터가 넘은 뱀이 꽈리들 무성한 데로 숨어드는 것을 목격했단다. 나는 그 얘기를 들은 후 웬만하면 그 부근에 가는 일이 없도록 신경 썼다. 불가피하게 그 부근에 가게 될 때는 '혹시 그 놈을 발로 밟는 불상사가 생길까' 두려워 편히 걷지도 못했다. 

 그런데 한 달 넘게 별 일 없이 꽈리들만 무성하게 잘 자라났다. 더 이상 방치했다가는 꽈리들이 땅바닥에 다 떨어져 못 쓸 것 같았다. 나는 걱정만 하고 있는데 아내가 어느 새 그 꽈리들을 수확했다. 아내한테 내가 물었다. 

"그 뱀, 못 봤어?"

"못 봤어. "

"당신도 참!. "

"조심하면 되지, 뱀이 뭐가 무서워?"


자, 큰 바구니에 담긴 잘 익은 꽈리 열매들. 색깔이 빨간 건, 내 생각에는 그 무서운 뱀의 음덕(蔭德)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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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고 1학년 시절(1967년) 가을, 문예반 친구들과 동인지를 냈다. 동인지의 이름은 '소연'. 소박한 잔치라는 뜻일 게다.


오늘 아침, 최종남 선배님의 '춘고 재학시절 이도행 문우와 펴낸 2인 문집' 얘기가 동인지 '소연'을 서고에서 찾아내게 했다. 기억은 옛 사랑처럼 잊었던 물건의 발견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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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을 설계한 분이 뭐라고 그 설계 취지를 말했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막국수를 뽑는 국수틀과 가마솥을 본떠서 건물을 지어 봐야지!’하는 동심이 한몫했을 것이다.

내가 사는 춘천에는 이런 동심이 엿보이는 구조물들이 더 있다. 소양강 스카이 워크가 그 중 하나다. 보나마나 강물 위로 걸어간다면 얼마나 무섭고 신이 날까!’하는 동심이 그 구조물 건립에 한몫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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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9-15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하게 건축한듯 합니다 ㅎㅎ막국수 먹고 싶네요

2019-09-16 07: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편소설 퇴고가 100M달리기라면 장편소설 퇴고는 마라톤이지.”

내가 아내한테 무심결에 한 말이다.

 

나는 요즈음 지난 8월 중순에 일단 마무리한 장편소설의 초고를 퇴고하며 하루하루 보내고 있다. 200자 원고지로 1000매 분량이라 퇴고하는 일도 여간 고된 게 아니다. 예를 들어 소설 속 등장인물의 어떤 특이행동을 퇴고하면서 일부 고친다고 하자. 구체적으로는 젊잖게 살아온 사람으로 설정됐던 K가 어느 날 갑자기 포악한 행동을 보이는 것으로 소설내용을 일부 수정한다고 치자. 단편소설이라면 작가로서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200자 원고지로 100매 이내의 내용들을 점검해서 K가 그런 행동을 보이게끔 복선을 새로 마련해주면 되는 일이니까.

하지만 장편소설이 되니 작가로서 점검해야 할 내용이 1000매나 돼 여간 힘들고 고된 게 아닌 것이다. 1000매 되는 분량을 일일이 살펴서 K가 그런 생각지도 못한 행동을 하게 된 복선을 새롭게 만들어줘야 하므로.

 

그러니, 바로 눈앞의 목표를 보며 냅다 달리는 100M달리기와 달리 주위의 풍경과 바람을 느껴가며, 체력의 안배까지 해 가며 천천히 달려가는 마라톤같더라는 사실이다.

 

마라톤.

100리 넘는 먼 거리를 뛰는 일이다. 눈앞의 목표만 생각해서는 결코 뛸 수 없다. 뛰는 도중 주변의 풍경도 보고 부는 바람도 몸으로 느껴가며 천천히 뛰는 일이다.

마라톤 코스로는 우리 춘천의 코스가 일품이지 않나?

푸른 호수 변을 따라 돌면서 거대한 수석(壽石) 같은 삼악산, 봉긋하게 솟아 있는 봉의산을 보며 뛰는 그 기나긴 과정. 비록 몸은 고될지언정 마음은 여유롭기 짝이 없을 것 같다.

 

아내가, 내가 무심결에 말한 단편소설 퇴고가 100M달리기라면 장편소설 퇴고는 마라톤이지.”를 듣고는 이리 호응했다.

당신 말을 들으니 장편소설 쓰는 일이 어떤 건지 가슴에 확 와 닿네!”

, 나는 오늘도 마라톤을 뛰려한다. 몸은 비록 고달플지언정 마음은 여유로우며 주변의 풍경과 바람이 기다리고 있기에.  


*사진출처= 달리기협동조합 http://jirunni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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