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춘천문협에 가입하기는 올 정초다. 최현순 시인이 지난 연말에 나를 찾아와문협에서 함께 활동하는 게 좋지 않으냐고 간곡히 부탁한 게 계기다. 나는 사실 교직생활을 그만두고는 소설 쓰기에 전념하는 생활이므로 어떤 조직에 들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람쥐 쳇바퀴처럼 돌아가던, 게다가 승진을 향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던 모 학교에서의 경험이 역겨워서 , 다시는 조직 같은 데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결심한 바도 있다.

하지만 고교 시절 문예반 후배이기도 한 최현순 시인(현 춘천문협 회장)의 간곡한 부탁에 더는 사양하지 못하고 춘천문협에 든 것이다.

춘천문협에 들면서 소스라치게 놀랐으니 100명 넘는 회원들 대부분이 시 혹은 수필을 쓰는 분이라는 사실이었다. 소설 쓰는 분은 나까지 포함해 단 3명이었다. 그러고 보면 같은 문학을 해도 나는 무심하게도 고단한 짓을 해 온 것이다. 하긴 두문불출하는 성격이라면 죽치고 앉아 글 써야 하는 소설가가 적합하지 않겠는가.

 

서두가 길었다.

1214, 전상국 선생님의 북콘서트에 갔다가 박계순 소설가를 만났다. 박 선배는 소설가가 극히 드문 시대에, 더구나 여성이다. 당사자는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희귀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여류 소설가이다.

나와의 인연은 저 1970, 강원대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나는 국어교육과 1학년생이었고 박 선배는 서울에 있는 모 대학을 다니다가 고향 춘천으로 내려와 강원대 모 과로 학사 편입했다. 나보다 3년 선배다.

강대 학보에 자주 실린 내 글을 보고 흥미를 느껴, 박 선배가 먼저 말을 걸었다. 같은 교양강좌를 들은 게 계기다. 우리는 잣나무가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 교정의 길을 걸으면서, 화사한 늦봄의 햇살 아래 문학을 중심으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자리를 옮겨 시내 중앙로에 있는 지하다방 남강에서 커피 마시며 얘기를 이어나가기도 했다. (얼마 전 만났을 때 ‘1970년 늦봄 어느 날, 남강 다방에서 커피 마시며 대화 나누기도 했다는 내 얘기에 박 선배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부분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전의 특별한 경험에 대한 내 기억은 놀랄 정도로 생생하다. 70년대 춘천 중앙로에 있었던 남강 다방. 지하라서 늘 습했던 그 공간. 기회가 되면 남강 다방을 소재로 글 한 편 쓸 것이다.)

 

 

얼마 후 여름방학이 왔고 개학하면서 2학기가 됐다. 그런데 박 선배를 더는 캠퍼스에서 볼 수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박 선배는 1학기를 마치자마자 자퇴해 버렸단다. 하긴 서울에서 대학을 다닐 때 무용을 전공했으니, 그 비슷한 과조차 없는 강원대에서 박 선배는 견디기 힘들었을 것 같다. 어쨌든 박 선배와 나의 인연은 1970년 강원대학교 1학기, 늦봄의 두어 번 만남이 전부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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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화유령작가에서, 주인공(이완맥그리거 분)이 살인 사건의 단서를 찾아 바닷가를 헤매는 장면을 잊지 못한다. 늘 바람 불고 염분이 많은 곳이라 그런지 제대로 자란 나무 하나 없는, 황량한 바닷가.

그 풍경이 막막한 주인공의 심정을 대변해 주는 듯싶었다.

 

사실 우리의 삶은 아름다운 꽃밭과 풍성하게 자란 나무숲만 있지 않다. 의외로 꽃 하나, 나무 한 그루 없는 삭막한 풍경과 수시로 만난다. 영화 유령작가의 감독 로만 플란스키가 황량한 바닷가 장면을 아무렇지도 않게 처리했지만 나는 그 바닷가 장면에 가슴이 먹먹해졌고 몇 달 지난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피할 수 없는 삶의 공허함 내지 쓸쓸함을 목격한 듯싶어서.


*영화 유령작가’: 2010.06.02 개봉, (감독) 로만 폴란스키 (주연) 이완 맥그리거

유령작가란 유명인의 뒤에서 그 사람 이름으로 글을 대신 써 주는 작가를 이른다. 실존하지만 드러나서는 안 되는 기막힌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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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쾌한 미소의 시인 유기택한테서 몇 권의 시집을 선사받았다. 그 중 가장 최근에 낸짱돌시집을 읽어 봤다. 아니 맛봤다. 사실 시는 맛봐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시를 읽는 것은 시가 문학의 한 장르로서 문자로 쓰여 있기 때문이다. 문자. 문자가 있어서 우리는 문학을 감수하는 이점을 얻었지만  그렇기에 생생한 마음을 놓치는 손해를 감수하는 것임을.

우리 주변의 사물에서 느껴지는 감흥을 문자로 옮기는 순간 그 감흥은 박제되는 숙명을 어쩌지 못한다. 이를 시인 박남수는 일찍이 라는 명시에서 갈파했다.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순수(純粹)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2.

유기택의 짱돌 시집에 실린 시들에서 나는 그의 동심(童心)을 보았다. 예를 들어이란 시의 이런 표현이다.

 

내가 가끔 당신에게 힘내.”라 말하는 것도

흩어서 거꾸로 묶으면 내 힘으로도 읽히는

 

이렇게 장난기 넘치는 표현이 있을까! 동심이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는 표현이다. 하지만 그 동심은 깊이를 잃지 않았다.

 

그 무의미한 것들에서 문득,

낱낱의 그것이 우리였다는 비의를 캐냅니다

 

라는 표현으로서 인생이란 사실 하루하루가 쌓여서 이뤄지는 것임을 갈파했다. 유 시인은 생각의 틈에 관한 보고서란 시에서도 이런 동심을 보여준다.

 

나는, 내가 식어가는 것이 싫었다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

 

삶의 무력감을 견디지 못해 보이는 행동이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것이었다. 뜨거운 커피를 마신다 한들 무력감이 극복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시인은 그런 표현으로써 자신을 지탱한다. 사과의 한 품종인 홍로를 다룬 시도 있다. 빨갛게 익은, 사과나무 밭을 보며 시인은 이리 표현했다.

 

새가 노을을 물어들이는 저런 세상

 

각각이 존재하는 ’‘사과’‘노을이 하나로 어우러지고 있다.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다. 시인은 이웃이란 시에서 집으로 전선을 들이려다 계획이 바뀌면서 흘린 구멍에 참새 두 마리가 깃들여 사는 모습까지 놓치지 않았다. 동심의 눈이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는 시다.

 

3.

유 시인은 짱돌시집에서, 살아가면서 느껴지는 감흥들을 담담히 노래했다. 문자(시어)를 사용하면 생생한 감흥을 손해 보기 십상인데 그다지 개의치 않는 것 같다. 유 기택. 그는 마치 짱돌들을 여기저기 던지듯 세상을 노래했다. 의외로 그 짱돌들은 맞아도 아프지 않다.

그의 문운을 빈다.

 

 

첨언: 좋은 표현들이 많았다.

 

의자에 앉아 잠깐 졸다

앞으로 쏟아질 뻔했습니다

! 이다지 출렁거리는 생이여

<‘취생몽사 >

 

첫눈을 기다리는 애인들을 위해

매 겨울마다, 거르지 않고 첫눈이 내립니다

<‘첫눈 >

 

물든다는 것

그보다 천천한 혁명은 다시 없을 거라

<‘정경 >

 

무성영화 같은 바깥 풍경들이 종일

마당을 쌀쌀대며 돌아다녔다

<‘몸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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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겨울 그분



 

처음에 그분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자취만 남겼다

우리 내외가 땀 흘려 일군 고구마 밭을한꺼번에 폭탄 맞은 듯한 쑥밭으로 만들어버리는 짓으로 첫 선을 보인 것이다. 처음 겪는 일이라 누구 짓인지 몰라 인근에서 농사짓는 분한테 그 요절난 고구마 밭을 보였더니 이렇게 말씀했다.

멧돼지 짓이네. 그러잖아도 이 지역은 산골짜기라 산짐승들이 자주 내려온다고 알려드리려 했는데. 우리처럼 상주하면서 농사를 짓는 게 아니라면 고구마 농사는 가급적 피하는 게 좋아요. 산짐승들도 사람들이 고구마를 맛있어 하면 똑같이 맛있어 하니까 말입니다. 수박 참외 같은 농사를 이 동네에서 엄두내지 못하는 게 그 때문이죠.”

그럼 여기서는 뭘 농사지어야 합니까?”

옥수수 농사가 무난하죠. 그놈들이 옥수수를 따다 쪄 먹을 것도 아니니 밭의 옥수수는 그냥 내버려두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내외는 이듬해 봄, 밭에다 옥수수 모종을 사다 심었다. 고추도 겸해서 심었다. 그랬더니 밭에 별일 없이 그 해가 갔다. 다시 해가 바뀌어 2014년 가을 어느 날이다. 아내와 함께 우리 밭 바로 아래 집에 들러 동네 사람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밖에서 누군가 소리 질렀다.

멧돼지다!”

얘기 나누다 말고 뛰쳐나와 그 쪽을 봤더니 우리 밭 가까운 산 쪽으로 뒤뚱거리며 달아나는그분이 보였다. 50미터가 넘는 거리에서 엉덩이만 보이는지라 그 모습을 제대로 본 것은 못됐다. 하지만 멧돼지인 게 분명했다. 흑갈색 털빛이며 돼지 특유의 뒤뚱거리는 걸음이며.

그분은 우리 밭에 먹을 작물이 없나 해서 옥수수 밭에 접근했다가 동네 사람이 소리치자 기겁해 달아난 것이다.

가슴이 벌벌 떨린다는 아내 옆에서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알아서 산으로 달아나다니, 그럼 자기가 잘못했다는 도덕적 관념이 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도덕적 관념이라기보다는 본능적으로 자기보다 강한 자(사람)와 맞닥뜨렸다는 두려움에 달아난 거겠지.’

여하튼 결론은 그렇게 내렸지만 그분의 뒤뚱거리며 산속으로 피하는 모습 자체는 사람이 무슨 잘못을 저지른 뒤 달아나는 행동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구체적으로는불륜을 저지르다가 발각돼 급히 뒤뚱거리며 달아나는 중년 사내같았다.

산짐승임에도 내가그분이라 부르게 된 까닭이다.

 

그 후 몇 년 간 그분은 우리 밭에 나타나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밭 부근에 살면서 농사짓는 게 아니라, 시내에 살면서 바람이라도 쐬고 싶을 때 차를 몰고 와서 농사짓는 거라 사실 밭을 제대로 지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서서히 그분에 대한 기억마저 사라지는가 싶었는데 올 가을 들어 그분, 아니 그분들이 큰 문제를 일으킬 줄이야! 밭에 들어와 작물을 휘젓고 달아난 정도가 아니다. 아프리카 돼지 열병이라는, 바이러스 성 전염병의 매체로서 국내 양돈계를 위협하는 악역(惡役)으로서다.

그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 그분들을 말살하는 정책이 펼쳐지고 있다. TV 뉴스 시간마다 산과 들, 심지어는 도시의 한복판에서 엽사들에게 사살된 그분들 사진이 뜨는 판이다. 농가에 피해를 주는 정도로 인식되던 그분들이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느닷없이 몰살될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추운 겨울이 바짝 다가왔다. 그러잖아도 겨울만 되면 산에서 먹이가 떨어져 인가로 내려오다가 포획되곤 하는 그분들인데이런 범정부적인 조치에 과연 한 마리라도 살아날지 의문이다. 몇 년 전 우리 밭을 방문했다가 달아난그분도 결국은 목숨을 잃게 될 것 같다. 이미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이 산하의 야생동물 중에서 최상위 포식자가 그분들이라는데 그분들의 씨를 이렇게 말려도 괜찮은 걸까? 생태계가 무너지면서 아프리카 돼지 열병 이상의 큰 혼란이 닥치게 되는 건 아닐까? 이른 봄부터 시작한 장편집필도 웬만큼 된 데다가, 올해 농사까지 끝나 한가해져서인지 나는 별 걱정을 다하며 이 겨울을 맞고 있다.


www.kimyouje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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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쩜 햇살이 저리 맑게 떨어질 수 있을까. 인적은 그쳐도 성령은 풍성할 듯싶은 작은 공소.

무심론자 K의 마음에 잔잔히 물결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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