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극과극>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사진의 극과 극 - 카피라이터 최현주의 상상충전 사진 읽기
최현주 지음 / 학고재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사진의 자정과 정오의 시간

작가는 말한다. ‘극과 극’은 삶과 죽음이나 앞과 뒤처럼 반대되는 극점에 서 있는 개념이 아니다. 흰색과 검은색 사이에 화려한 색깔들이 수를 놓고 있는 것처럼 각각의 사진들이 모여 한눈에 담을 수 없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 같은 공간이지만 다른 시간을 갖거나 같은 시간을 공유하지만 다른 공간을 갖는 소재를 뽑아내 보여주고 있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구성은 먼저 비슷한 소재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두 명의 사진작가를 두고 사진을 골라낸다. 그 사진작가와 사진을 가지고 떠오르는 단상을 시, 소설, 영화, 미술 등 다양한 예술 분야나 개인의 추억들을 이용해 다채롭게 꺼내놓는다.

특히, 카피라이터답게 문체가 단문으로 깔끔하고 강렬하다. 그 문장을 씹고 고심하는 맛도 색다른 경험을 전해준다. 그 중에서도 글쓴이만의 재미있는 발상도 엿볼 수 있었다.

나는 ‘사이’라는 말을 무척 좋아한다. 우리가 A와 B 사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A와 B를 포함하고 있기도 하고 A와 B의 어느 것도 아니다. A와 B 사이는 A와 B의 합보다 크고 웅숭깊다. 모든 ‘사이’는 기본적으로 관계 지향적이어서 은밀하고 에로틱하다. ‘사이’는 국경처럼 위태롭다. 사진 속에서 불안이나 불안정한 감정,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읽힌다면 그것이 바로 ‘사이’의 특징이다. (140쪽)

많은 사진작가들과 그들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사진을 접할 수 있었던 점이 좋았다. 단지 아쉬운 점은 사진이 적게 실린 점이었다. 하지만 특정한 몇 명이 아닌 거의 50명이 넘는 현대 사진작가를 아우르며 소개하고 있다는 점은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다 우리나라 작가나 외국 작가를 따로 구분하여 한 부분만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작가들을 만날 수 있어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 중에서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던 것은 박하선이라는 사진작가의 작품이었다. 티베트에 들어가서 조장을 하는 풍습을 찍은 사진이었다. 조장은 우리나라의 매장이나 화장처럼 하나의 장례 풍습이다. 그건 너른 들판에 시신을 두면 독수리들이 육신을 먹고 영혼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 내세에 더 좋은 생으로 윤회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다른 말로 ‘천장’이라고 하는데, <천장터의 독수리들>이란 작품은 흑백의 명암 대비로 흡사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것처럼 그 느낌이 무척 강렬하다. 그리고 거대한 한 마리의 독수리가 사진 앵글로 달려들 듯 날개를 활짝 펴고 솟구치는데 그것은 사신이 들고 있는 기다란 낫을 휘두르는 것처럼 눈으로 무섭게 파고든다. 거기다 그 독수리는 초점이 맞지 않은 듯 흐릿하게 찍혀 있다. 그럴수록 독수리 날개의 힘찬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 모래 폭풍을 일으키는 것 같다. 독수리는 먹이를 낚아채듯 날카로운 발톱을 들어 내 얼굴을 할퀴어버릴 듯 그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이 강렬한 사진 한 장을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그리고 사진에 이렇게 다양한 주제가 있는 줄은 미처 예전에는 몰랐다. 그저 빛과 어둠을 이용하거나 순간적인 찰나를 찍은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세계적인 사진작가의 사진집을 보거나 사진 전시회를 다녔어도 그동안 사진에 대해 너무 안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많은 작가들이 자기만의 주제로 꾸준히 사진을 찍어 왔고 단순히 사진을 찍는 행위로만 그치지 않았다. 어떤 이는 마술처럼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연구해서 실제로 그럴듯하게 찍었고, 또 어떤 이는 호텔의 많은 창에 비친 방을 따로따로 세트장에서 찍고 하나로 모아 찍거나, 또는 신문지상의 사건을 재구성하여 모형으로 만들고 그것을 다시 찍거나, 사진 속에서 자신을 무한 복사를 하거나, 콜라주 방식으로 여러 사진을 이어 붙여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거나, 사진 속의 다양한 형식 실험은 끝이 없었다.

책의 소개 문구처럼 정말 많은 사람들이 ‘유쾌한’ 사진 놀이에 푹 빠져 있었다. 그 무한한 상상의 세계 속에서 극과 극은 어느새 사라지고 감탄만이 남아 긴 여운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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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마크하기[국내도서] 뇌과학 대표도서 총집합 이벤트 당첨자 발표국내도서 : 2010년

알라딘 l 2010-12-16 13:39


http://blog.aladin.co.kr/eventWinner/4342926


본문의 너비가 페이퍼의 제한 너비를 초과한 글입니다.
여기를 클릭하면 새창에서 원래 너비의 글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10년 10월 29일부터 11월 30일까지 진행된 <뇌과학 대표도서 총집합> 이벤트에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벤트에 당첨되신 분들 모두 축하드립니다.
  
☞ 관련 이벤트 :
http://www.aladin.co.kr/events/wevent_detail_book.aspx?pn=101019_buddha  

 

-> 기대하지도 않았던 이벤트 응모... 그저 사고 싶은 책을 사서 자동적으로 응모가 되었는데, 어느 날,,,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갑자기 당첨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런 게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는 걸까? 즐거운 마음에 받은 적립금을 가지고 무엇을 살까,,, 행복에 고민에 빠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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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대중문화 분야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12월 예술/대중문화 분야는 미술 관련 책들이 유독 돋보인다. 그 동안 한국 유물, 영화, 건축, 사진을 살펴봤으니, 이제는 미술 분야를 접할 때가 된 것 같다. 예술/대중문화 분야에서 가장 좋은 점은 이렇게 다양한 분야를 골고루 접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번 달에도 두근두근한 마음을 품고 흥미로운 책들을 골라 보았다. 

  

 <현대미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다> 

고전 미술에서부터 모더니즘,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2차 모더니즘까지 현대 미술사를 아우르고 있다. 유명한 미술 작품들과 그것의 시대적 의미, 철학적인 차원에서 해석되는 상징적인 의미들까지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큰 책이라 할 수 있다. 현대 미술의 용어와도 친숙해질 수 있는 '꽉' 찬 책이다.

  

 

 <어느 시각탐닉꾼의 구경> 

표지부터 눈을 확 사로잡았다. 마네킹 같은데, 저 어설픈 토끼 귀는 뭘까? 그러다 제목을 보니, '시각탐닉꾼'이란 단어가 낯설면서도 뭔가 쌉싸레한 뒷맛을 남겼다. '탐닉'은 열정적으로 좋아하면서도 증오하는 듯한, '애증'의 다른 이었기 때문이다. 목차의 내용들도 현대 미술의 뜨거운 감자로서 대척점에 놓인 화두(실재와 재현, 가독과 비가독, 거시와 미시)를 다루고 있었다. 동전의 양면이나 야누스처럼 선악을 논할 수 없는 것들이 토끼의 귀처럼 쫑긋 솟아 있다. 그 토끼 귀를 한번에 잡을 수 있는 기회다! 

 


 

 <마크 슈미트의 이상한 대중문화 읽기> 

표지의 스머프를 보며 '얜 누구야?' 생각했다. 목차를 훑어보는데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스머프 마을에도 우울한 날이 있다니. 이게 무슨 말이야?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럴만도 했다. 몸 전체가 파란 스머프, 파랑색 자체가 우울과 몽상을 상징하니, 그렇게 생각할만도 하다. 다른 목차 내용도 훑어보면 대중문화의 이면을 엿볼 수 있는 재밌는 책일 것 같다. 

  

  


  

 <저널리스트가 쓴 문화예술론- 문화의 풍경> 

다방면에 걸친 한국 문화의 풍경들을 여러 가지로 조망하고 있다. 우리는 문화적인 향수가 어린 추억의 장소와 물건들을 많이 잃어버리고 달려왔다. 다음 세대에서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영원히 사라질 것들이다. 새것이 좋을 때도 있지만 때가 탈수록, 세월을 먹을수록, 더욱 진중해지고 매력을 높여가는 것들이 있다. 이것은 그러한 추억들을 되새김질해 보여주는 소중한 문화 유산이다. 

 

 


  

 <영화는 끝나도 음악은 남아있다> 

아~ 흑백 영화는 다채로운 색상이 없어서 심심할 수 있지만 묵혀 둘수록 질리지 않는 깊은 울림을 전해준다. 그 영화를 흘러가는 배경 음악은 정말로 끝없이 끝없이 출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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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향 2010-12-24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2월 신간서평단 책으로 <이상한 대중문화 읽기>와 <영화는 끝나도 음악은 남아있다>가 선정되었다. 처음으로 추천한 책 중에서 2권이 선정되다니, 뿌듯하면서 즐겁다^^ 이번에도 무척 재미나게 책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1 - 선사 삼국 발해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1
유홍준 지음 / 눌와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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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 때 누구나 수학여행으로 경주나 여러 박물관을 가본 적이 있을 것이다. 당시에도 누구의 무덤이나 어떤 탑이나 건축물, 유물 등을 봐도 그저 무심하고 담담했던 기억이 난다. 정말로 세계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이다. 지금 보면 첨성대는 그냥 서 있는 게 아니고 불상의 옷 자락 하나도 그냥 흘러내리고 있는 게 아니고 손가락 하나도 아무렇게나 놓인 게 아닌 걸 아는데, 왜 그때에는 몰랐을까. 이렇게 재미있는 걸 왜 그때는 아무런 마음도 들지 않았을까?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이 뛰어난 예술품을 감상한 뒤 받은 흥분에서 생기는 현상으로 '스탕달 신드롬'이 있다. 예전에 미술관에서 고흐의 미술 작품을 보자 가슴이 두근거리며 뛴 적이 있다. 그것은 그냥 사진이나 도판으로 봤을 때는 전혀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직접 작품을 마주 대하고 캔버스에 두껍게 덧칠 된 붓질 자국이 선명한 걸 보자 그제야 현실감 있게 다가온 것이다. 여기 있는 게 '진짜' 작품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 흥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하지만 그 작품에 대한 '흥분'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아무 이유 없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것일까? 그게 고흐의 작품이 아니었다면, 내가 평소에 고흐의 작품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그런 감정의 동요가 있었을까 의심스럽다. 일례로 보면 클림트도 좋아해서 작품을 보러 미술관에 갔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치여 내 마음속의 감정을 느낄 사이가 없었다. 어떤 작품을 감상할 때는 그 당시 내 마음의 감정 상태도 중요한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평소에 예술 작품에 대한 관심을 갖고 좋아하는 마음을 갖는 것일 것이다. 여기서 '좋아하는 마음'은 저절로 그런 마음이 드는 걸 말하는데, 어떤 대상을 보다보면 항상 새롭고 친근해서 '정'이 드는 마음 상태를 말한다.

이 책은 '평소에' 한국 예술 작품에 한걸음 다가갈 수 있는 다리를 놓아준다. 할머니가 손자를 무릎에 눕히고 가만가만히 해주던 옛날 얘기처럼. 여기에다 여러 유물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진 도판까지 있어서 내용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동안 많이 소외되었던 가야와 발해의 유물을 얘기하고 있는 점도 좋았다. 단지 도굴당하거나 다른 나라 땅이 돼서 유물을 찾을 수 없어 안타까운 점도 있지만, 그만큼 연구되지 못한 부분도 있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인다면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또한, 각 장마다 우리가 일본에 어떤 영향을 주어 어떤 문화가 꽃 피우게 되었는지 간략하게 다루고 있는 점도 의의 있었다. 우리가 중국이나 다른 먼 나라에서 영향을 받고 더 높은 수준의 문화를 발전시켜 왔듯이 그러한 영향 관계를 나름대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었다.

여기서 좋았던 점은 책 뒤에 불교와 관련된 부록이 짧게 실려 있다는 점이었다. 불교에서 여러 보살의 의미와 불상의 수인에 대한 상징성에 대한 내용까지 간단하게 나와 있는데, 삼국시대의 여러 불상의 모습과 비교해서 보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저자가 하나의 장에 백제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점이 반가웠다. 고구려다운 웅장한 기상도 멋지고 신라의 화려한 금속공예도 멋지기는 하지만, 유물이 많이 없는 우아한 백제의 문화를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고분이 쉽게 도굴당하기는 했지만 그런 와중에도 '백제금동대향로'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다. 그 작은 뚜껑에 얼마나 많은 조각이 있고 그 뒤에 숨은 곳에는 구멍이 몇 개나 뚫려 있다니, 오늘날의 기술로도 재현하기 힘든 작품이라는 말이 거짓은 아닐 것 같았다. 그 당시 백제의 예술 수준과 기술이 얼마나 차원이 높았는지 알 수 있었다. 

정말 한국 미술은 보면 볼수록 아름다웠다. 내 몸에도 그들의 미의식이 조금이나마 담겨있기를 염원했다... 신나고 재미있게 읽었다. 그렇다고 술렁술렁 책장이 넘어간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여기서 나온 유물들을 직접 마주 대할 날이 왔으면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나올 고려와 조선 시대의 유물에 대한 내용도 기대가 되었다. 

(윽, 아프다... 열심히 쓴 게 한 순간에 날아가 버려 다시 쓰는 건 역시나 맥이 풀린다ㅠ0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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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역사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영화는 역사다 - 한국 영화로 탐험하는 근현대사
강성률 지음 / 살림터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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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문제는 ‘소통’이다. 과거와 현재의 소통 문제. 과거는 우리에게 말을 건다. 현재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과거가 되고 과거의 시간을 재현하는 것은 현재의 시간에 필요한 말을 하기 위해 과거의 시간을 경유하는 것이다. 과거를 현재화하는 것이다. 역사와 영화의 문제는 ‘과거의 현재화의 문제’라는 것이다. (8쪽)

그렇다. 결국 과거는 과거가 아닌 ‘현재의 거울’이다.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관건인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이런 관점에서 영화가 역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시류에 편승하기도 하고 반항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자리를 어떻게 지켜왔는지 분석하고 있다.

다른 예술 작품들도 그 시대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반영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영화는 다른 무엇보다도 거대 자본이 투입되고 그것이 대중의 취향에 따라 흥행과 참패가 결정되므로 어느 예술 장르보다도 철저히 대중에게 영합하는 내용을 다루어야 한다. 그러한 파급력을 지배 권력도 알고 있으므로 사전 검열을 통한 영화에 대한 통제력을 높여왔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는 일본이었지만 그것은 시대가 변천하면서 미국이나 신군부 등의 지배층으로 바뀌었을 뿐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이익과 지배의 정당성을 위해, 그리고 자신들의 지배를 옹호하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와 거대한 자금으로 영화 시장을 뒤흔들어 왔다. 9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국민의 정부가 등장하기 시작하자 영화에 대한 규제가 풀리면서 한국 영화가 다양해지고 경쟁력을 갖추면서 꽃망울을 터트리는 현상을 보이는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 할 것이다.

우리는 친일 영화나 독재정권을 옹호하는 영화를 만들기도 했지만 위안부, 빨치산, 비전향장기수, 조총련 등 우리 시대의 어두운 부분을 양지로 끌어내기도 했다. 그런 영화는 다큐멘터리 형식이기는 하지만 역사의 무게에 억눌리더라도 숨통이 트이게 할 수 있는 작지만 커다란 족적이 되어왔던 것이다. 저자는 이런 부분에서도 감독에 따라 영화 내용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 지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서 해당 영화에 흥미가 일었다. 특히, 일본에 있는 조총련에 대해 비판적인 내용으로 자전 영화를 찍고 소외당하고 있다는 감독의 뒷얘기는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왜 우리는 한 민족을 자꾸 배척해야만 하는지, 무수하게 꼬인 실타래를 풀 수 있는 날이 있을 지, 알 수 없는 일이라 안타까움이 더 했다. 

이 책에서 재미있었던 것은 지배 권력과 시대 상황에 따라 영화에서 다룬 역사적 소재의 범위가 어떻게 달라지는 지 논의한 부분이었다. 특히, 베트남전의 기억과 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룬 영화가 감독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지고 있음을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 <부활의 노래>, <꽃잎>, <박하사탕> 등에서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로 만들어져 온 것처럼, 감독이 어떤 시대를 겪어왔는지 그 경험에 의해 소재를 다루는 방법에서도 차이가 드러나게 마련이다. <화려한 휴가>의 감독은 광주 민주화 운동을 직접 겪은 세대가 아니므로 영화에서도 그 죄의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대중성을 피력할 수 있었다. <화려한 휴가>가 발포 명령을 내린 실세가 누구인지 그 갈등에 대해서는 다루지 못한 한계가 있지만 분명 광주 민주화 운동 자체의 실상을 대중적으로 알린 것은 사실인 것이다.

예전에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공포 영화인 <알포인트>를 재밌게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베트남 전쟁’의 의미가 남다르다는 점은 생각지도 못했다. 6.25전쟁으로 우리는 한 민족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싸우는 것이 얼마나 큰 아픔인지 알고 있다. 아직도 이산가족의 슬픔은 끝없이 쌓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베트남 전쟁’에서 그때와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것도 이번에는 남의 나라 전쟁에, 돈에 팔린 용병으로 참가한 가해자로서 말이다. <하얀전쟁>이 전쟁에 참여한 피해자로서의 사회 부적응 자를 그렸다면, <알포인트>는 ‘베트남을 침략했던 모든 외세에 대한 응징이자 복수’로서의 공포 영화를 그려내고 있다. 그 당시에도 <알포인트>은 입소문이 퍼졌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일반적인 공포 영화였다면 이 영화에서 처럼 묘한 여운을 남기지 못 했을 것이다. <알포인트>란 영화를 베트남 전쟁과 우리나라의 입장을 대비하여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 무척 인상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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