퐅랜, 무엇을 하든 어디로 가든 우린
이우일 지음 / 비채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른 이들은 봄이나 여름 혹은 가을에 여행서 읽는 것을 좋아하겠지만, 저는 겨울에 읽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어떤 이들에게 여행서는 다만 정보 취득이라는 실용의 목적 뿐이겠지만 저는 다른 목적으로 읽습니다. 굳이 내게 쓸만한 정보를 얻고자 함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이불 밖으로 발도 빼기 싫은 겨울에 여행서를 더 즐겨 보는 것입니다. 여행서란 내게 상상 속 세계로의 초대장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언제 그 곳으로 가기 위해 여행서를 읽지 않습니다. 공상을 위해서 입니다. 그 풍경 속에 있는 제 모습을 상상합니다. 글 속의 인물들을 내가 만나면 어떤 대화가 오가고 일들이 펼쳐질까 몽상합니다. 제겐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러므로 세세한 정보들이 가득 들어있는 여행서 보다 저자 자신이 겪고 경험한 여행 에세이 읽는 것을 선호합니다. 이를테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시드니' 같은 책 말이죠. 그 책 읽어보셨나요? 제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여행에 대한 책이었습니다. 마라톤에게 도대체 무슨 매력이 있는지 모르겠다는 분은 '시드니'를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마라톤'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전략적이고 흥미로운 스포츠라는 걸 물씬 느낄 수 있으실 겁니다. 저는 원래 여행 에세이도 잘 읽지 않았습니다만, '시드니'를 읽은 후로 바뀌었습니다. 다른 책의 리뷰인데, 자꾸만 '시드니'를 언급하는 것은 제게 여행 에세이의 재미를 처음으로 깨우쳐 준 책이기 때문입니다.


 이우일의 '퐅랜'도 그렇게 해서 읽게 된 책입니다. 네, 이 책도 여행 에세이입니다. 



 가족 모두가 2015년에 미국 포틀랜드로 훌쩍 떠나서 2년 간 살아온 경험이 한 권의 책으로 엮이어 나온 것입니다. '퐅랜'이란 제목은 아마도 '포틀랜드'의 원어 발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게 '포틀랜드'하면 떠오르는 것은 구스 반 산트 영화 감독입니다. '포틀랜드'라는 곳을 그의 영화를 통해 처음 접했기 때문입니다. 구스 반 산트 감독 자신이 포틀랜드 출신이기도 합니다. 데뷔작 '말라 노체'를 비롯해서 '드럭스토어 카우보이', '나의 고향, 아이다호', '굿 윌 헌팅', '엘리펀트'를 다 포틀랜드에서 찍었습니다. 이게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재밌는 점이기도 합니다. 그의 작품 중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꼭 '포틀랜드'에서 찍은 것이거든요. 뭔가 '포틀랜드의 힘' 같은 게 있는 걸까요? 그러나 토박이 구스 반 산트는 어쨌든 제겐 그런 힘이 있으리라고 잘 생각되지 않습니다. 구스 반 산트의 영화를 통해 제가 본 포틀랜드의 풍경은 참으로 쓸쓸하고 우울하며 절망적이었거든요. 특히 '나의 고향, 아이다호'는 정말...


 도대체 작가 이우일은 어디서 포틀랜드의 매력을 느꼈던 것일까요? 이렇게 책까지 낸 것을 보면 매력이 꽤나 큰 것 같습니다. 설마 주구장창 까기 위해서 책 한 권을 쓰진 않겠지요. 쓴다고 해도 누가 그런 것을 읽어줄까요? 그러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읽게 되었습니다. 내가 미처 느끼지 못한 포틀랜드의 매력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일단 포틀랜드는 비가 참 많이 옵니다. 10월부터 다음 해 5월까지 우기가 계속된다고 합니다. 아, 가을과 겨울 그리고 봄 내내 비가 온다니... 상상만 해도 우울해질 것 같습니다. 그런 곳이 자전거 도시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포틀랜드는 '자전거의 도시'라는 별명답게 미국 최대 규모의 잘 정비된 자전거 도로가 있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차가 없이도 살 수 있는 유일한 도시라고 하는군요. 이 점은 마음에 듭니다. 그리고 맛집도 상당히 많다고 합니다. 특히 요즘 유행하는 푸드 트럭이 아주 많다는군요. 비가 오지 않는 날에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며 다양한 푸드 트럭에서 이것 저것 골라먹는 제 모습을 상상하니 어느새 입에 군침이 가득 고입니다. 작가는 말미에 포틀랜드의 맛집까지 소개해 놓았더군요. 그렇지 않아도 포틀랜드는 해마다 재즈 페스티벌이 열려 재즈의 도시로도 유명한데, 그런 맛집에서 재즈 밴드의 연주를 들으면서 먹는다는 상상을 하니 공복감이 더욱 치밀어 오릅니다. 아아... 이 허기를 어쩌란 말입니까? 


각 글마다 이런 부록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포틀랜드 맛집 소개' 란입니다.

 이우일 작가가 직접 그린 삽화 또한 많이 들어 있는 책 읽는 재미를 높입니다.


 그런데 그 허기 보다 더 큰 것이 또 저를 옥죄어 옵니다. 솔직히 저는 이우일 작가가 포틀랜드로 떠난 게 다른 거 다 집어치우고 바로 이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포틀랜드가 바로 수집가들의 천국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이우일 작가는 여러 가지 것을 수집하는 것으로 유명하죠. 그런 그에게 온갖 중고 물품이 넘치는 포틀랜드는 그야말로 매력적인 곳이 아니었을까요? 글에서도 그런 마음이 마구 묻어납니다.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구매할 때의 글은 글마저 저자 마음처럼 덩달아 신이 난 것 같거든요. 저도 못 말리는 수집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글을 보노라니 허기 보다 더 큰 수집욕이 절 옥죄어 오더군요. 이처럼 여기 '퐅랜'엔 다른 여행서에는 잘 볼 수 없는, 오직 거기서 오래 산 자만이 쓸 수 있는 포틀랜드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다 읽고나면 굳이 직접 가지 않아도 이미 가 본 듯한 느낌마저 납니다. 후후.


 여행서에는 제가 만든 말이긴 합니다만 '이방인 버프'라는 게 있습니다. 현지인의 눈엔 별 거 아니고 오히려 나쁘게 보이는 것도 이방인의 눈에는 너무 좋게 보이고 매혹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걸 달리 말하면 '이국적'이란 것이겠지요. 경주 사람들에겐 심드렁한 기와 지붕이 외국인 눈엔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죠. 이우일의 '퐅랜' 또한 그런 게 없다고 말하긴 어려울 듯 합니다. 그래서 그 역시 프롤로그에서 '이것은 지극히 나만의 퐅랜 이야기다'라고 단서를 달아 놓았겠죠. 하지만 그걸 감안하고 봐도 이 책 속의 '포틀랜드'는 참 매력적입니다. 이우일이 결심했듯이 정말 한 번 가서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한없이 이국적인 것과 조우할 때 오히려 자유를 느끼고 보다 더 참된 자신의 모습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는데, '포틀랜드'도 그런 것을 줄 것 같습니다.


책의 마지막엔 이렇게 이우일 작가가 직접 그린 포틀랜드 일러스트 지도가 부록으로 들어있습니다.


 겨울은 여행에 어울리지 않는 계절입니다. 그러나 꼭 몸이 움직여야 여행일까요? 머릿속의 움직임도 여행이라고 얼마든지 부를 수 있지 않을까요? 마음 먹기에 따라서 우리들은 얼마든지 책으로도 아주 흥미로운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건 제가 여러 번 경험한 것이기에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요. '퐅랜'은 겨울이라는 이유로 굼뜨는 육체의 한계에서 자신을 해방하여 내면을 통해 멋진 여행을 마련해주는 책입니다. 여기엔 노자도, 다른 준비할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펼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당신은 비 내리는 포틀랜드 어느 거리에서 우산 없이 쏘다니는 많은 행인들과 중고 매장에서 기쁜 마음으로 이런 저런 빈티지한 물건들을 고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것입니다. 풍경은 그렇게 찾아오고 일상의 여백이 홀연히 생겨납니다. 그 여백 속에서 비록 지금 있는 곳이 좁은 이불 속이라 해도 낯선 것이 가져다 주는 자유를 가득 호흡할 것입니다. 감히 그런 책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퐅랜'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도니스의 죽음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 10
M. C. 비턴 지음, 전행선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2월
평점 :
절판




  사랑은 냉혹하여라.

 천상에서 가없이 노니게 할 때는 언제고

 차디찬 등을 보이며 사라진 지금은

 끝도 없는 추락을 선사할 뿐이니...

 문득 사랑을 잃고 절망한 이들이

 왜 자주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리는 지 알듯도 하다.

 지금 자신의 기분이 그와 같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겠지...

 

 벌써 이렇게 되었군요.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이제는 세계적인 코지 미스터리가 된 '해미시 맥베스 시리즈'의 열 번째 소설이 나왔습니다. '아도니스의 죽음'이 그것이죠. 재작년인 2016년 11월에 이 시리즈의 첫 권을 만났을 때만 해도 세계적으로 아무리 유명한 시리즈라도 쉽게 단종되는 우리나라 출판 환경 속에서 과연 얼마나 많이 나올 수 있을까 싶었는데, 10권까지 나온 데다 책 날개를 보면 앞으로 네 권이 또 나온다고 하니 이대로라면 시리즈의 모든 작품이 나오는 것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네요. 뭐, 해미시 맥베스 시리즈가 32권에 이르긴 합니다만.


 네? 맨 앞에 냉혹한 사랑 어쩌고 저쩌고는 왜 써놓았냐구요? 아, 그건 '아도니스의 죽음'을 읽어 보니 이 소설이 사랑이라는 것, 특히나 사랑이 사라졌을 때 남게 되는 것들에 대해 잘 말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흥얼거리게 되었습니다. 네, '아도니스의 사랑'은 해미시 맥베스가 그동안 보여준 것처럼 살인 미스터리가 등장합니다만 그것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놀랍게도 사랑의 상실에 대한 것입니다. 시리즈를 계속 읽어보신 분들은 이 말만 듣고 '그럼, 해미시와 프리실라가 헤어지는 것이냐?'하고 물으실 지도 모르겠어요. '아도니스의 죽음'에서 해미시와 프리실라는 사실상 약혼한 사이니까요. 해미시의 오랜 짝사랑이 결국 이뤄진 것이죠. 그러나 제가 말한 상실은 이별을 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사랑으로 인해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 사랑이 사라지자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만개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쓴 말입니다.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사랑의 콩깍지가 눈에서 떨어진 상태 말이죠. 지금 생각하니 사랑의 상실이라 말하지 말고 '사랑의 사라짐'이라 했어야 할 것 같네요. '아도니스의 죽음'은 그렇게 세상을 온통 핑크빛으로 물들였던 사랑이 문득 사라지고 난 뒤에 찾아오는, 추운 겨울 날 이불 밖을 벗어났을 때 온몸으로 느끼게 되는 서늘한 한기에 대한 소설입니다.



 시작부터 그것을 강조하지요. 해미시는 자기 집에서 일어나자마자 프리실라가 가져온 새 전기 스토브가 자신이 좋아하는 낡은 난로 스토브를 대체하는 것을 봅니다. 그는 난로 스토브를 정말 좋아하지만 싸움을 피하고 싶어서 프리실라가 원하는 대로 내버려 둡니다. 하지만 속은 타들어 갑니다. 그렇지 않아도 프리실라가 약혼한 이후, 해미시를 시골 경찰이 아니라 도시 경찰의 간부로 성공시키겠다고 이래저래 자신의 삶에 잔뜩 간섭과 통제를 해오던 참이었거든요. 스코틀랜드 특유의 독립심과 로흐두 마을의 한가한 경찰로 있는 것 말고는 바라는 게 없는 소박함 때문에 자신의 현실을 결코 바꾸고 싶지 않은 그는 그제서야 사랑으로 보지 못했던 것을 응시하게 됩니다. 존중과 포용이 사랑인 줄 알았는데 실상은 관리와 통제라는 것을 말이죠. 처음 사랑의 온도가 한창 가열되었을 때 존재 그 자체로 만족하던 그 마음은 어디로 갔는가 하고 그는 혼란스러워 합니다. 그런 그의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아무 사건도 안 일어나서 영국 제도에서 가장 따분한 지역인 드림 마을에 그리스 신화 속 아도니스처럼 아주 잘생긴 피터 하인드란 남자가 찾아옵니다. 겨울만 되면 세상과 단절된 느낌만 가득해지는 그 마을에서 한동안 살겠다고 말이죠. 프리실라가 가져온 새 전기 스토브처럼 드림 마을에 사는 여인들 삶으로 끼어든 것이죠.


 그 전기 스토브가 해미시에게 사랑의 알몸을 보게 했듯, 피터 하인드란 남자도 드림 마을에 사는 여인들에게 똑같은 것을 합니다. 남자의 미모에 반한 나머지 마을 여자들은 앞다투어 그를 사랑하고 오로지 가지고 놀기 위해 거짓 사랑 놀음만 일삼는 그를 통해 자신이 하고 있는 사랑의 진실을 체득하는 것이죠. 물론 그것은 공짜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참혹한 대가가 뒤따릅니다. 그건 여인만이 아니라 피터 하인드 본인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드림 마을을 평지풍파로 몰아넣은 피터 하인드가 어느날 별안간 사라진 것입니다. 작가 M.C 비턴은 피터 하인드란 아도니스를 정말로 사랑을 상징하는 존재로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찾아왔던 것과 똑같이 사라진 것도 이처럼 갑작스럽게 만든 걸 보면 말이죠. 중개인에게 나타나 집까지 내놓고 간 것을 보면 마음이 변해 떠난 것 같지만 그래도 해미시는 피터 하인드로 인해 드림 마을 전체가 악의로 넘쳐났던 것을 생각해 볼 때 뭔가 사건이 생긴 것 같다고 여기고 휴가까지 바쳐가며 개인적으로 피터 하인드의 발자취를 추적합니다. 마치 어느새 사라져버린 자신이 생각했던 사랑을 뒤쫓는 것처럼 말이죠.


 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피터 하인드를 뒤쫓은 해미시의 개인적인 추적은 바로 불현듯 없어져 버린, 자신이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을 되찾고 싶은 열망의 표현이라고. 그러나 그 열망은 프리실라가 해미시와 도시에서 같이 살기 위해 사려고 했던 집의 가족을 만나면서 다시 한 번 산산이 부서집니다. 해미시가 곳곳에서 목격하는 것은 사랑의 완성이라 일컫는 결혼이 실은 사랑을 이루는 부드러운 살결을 다 썩어 문드러지게 하곤 오직 증오의 뼈대만을 남긴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소설의 마지막에서 해미시가 그런 선택을 하는 것도 당연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아도니스의 죽음'은 사랑의 실패를, 사랑이 썰물처럼 쓸려버리고 난 뒤 해변에 남은 더러운 잔해들을 바라보게 만드는 소설입니다. 그렇다고 우울하거나 재미없는 것은 아니에요. 지금까지 제가 한 말은 어디까지나 해미시 맥베스가 가지고 있는 코지 미스터리의 재미와 매력을 한결같이 고수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하는 말이니까요. 그러니까 여기서 제가 하고 있는 말은  M.C 비턴이 열 번째 이야기를 왜 이렇게 썼나 하는 궁금증에 대해 나름 답변을 해 본 것이라는 거죠. 사실 해미시와 프리실라의 로맨스는 해미시 시리즈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어 준 중요한 동력원 중 하나였습니다. 이제 그것이 결실을 맺기에 이르러 과연 사랑이라는 게 뭔가란 질문을 이 소설에서 제대로 풀어보려 한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사랑이 허영으로 그치지 않고, 해미시가 바랐던 것처럼 존중과 포용으로 나아가는 길을. 자기 중심의 마음과 자기 주장의 말로 가득한 사랑이 아니라 타인 중심의 마음과 타인의 말을 먼저 들어주는 것으로 충만한 사랑으로 향해가는 길을.


 물론 그 해답은 이 소설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건 다음의 이야기에서 밝혀지겠지요. 아, 얼른 읽어보고 싶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상을 바꾸는 언어 - 민주주의로 가는 말과 글의 힘
양정철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8년 1월
평점 :
품절



 블로그에 리뷰라는 걸 쓰면서 좋은 점이 하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말의 무게를 느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아무 때나 아무 말을 별 생각없이 직설적으로 내뱉던 게 바로 저였습니다. 그만큼 지금 내가 내놓는 말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다가갈 것인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하지만 글을 계속 쓰다 보니 점점 이럴 때 이런 말을 써도 되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더군요. 한 문장, 한 단어를 세상에 내놓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깊이 느꼈습니다. 그렇기에 이 책에 눈이 머물렀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언어'라는 책에 말이죠.


 이 책을 정작 손에 잡게 된 것은 저자 때문이었습니다. 지은이가 바로 양정철이었거든요.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 중 한 사람으로 그의 곁에서 오래도록 함께 정치 활동을 한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문재인 정부가 자리를 잡자마자 문재인 정부에게 부담이 되기 싫다면서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나라마저 홀연히 떠났습니다. 그것은 간다는 기별조차 없이 몰래 말이죠. 범인이라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열심히 도와 모시는 주군이 드디어 군주의 자리에 올랐으면 마치 그간 고생한 것에 대한 보상이라도 찾으려는 것처럼 자신의 위상을 높이려 힘쓸 터인데 오히려 그런 자신이 정부에 부담이 될까 하여 모든 것을 내어놓고 몰래 사라지다니, 거기서 작가의 그릇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겠더군요. 그 때부터 양정철이란 사람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 번 그의 목소리를 진중하게 듣고 싶었는데 마침 이렇게 그의 책이 나온 것이죠.




 '세상을 바꾸는 언어'는 말에 대한 책입니다. 그가 왜 이런 책을 쓰게 되었나에 대해 그는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그러니까 노무현 전 대통령이 아직 살아계실 때입니다. 정치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찾아 그 뜻을 밝혔는데, 정작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정치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민주주의적 진보를 이루려면 국민들 생각과 의식을 바꾸고 문화를 바꿔야 한다면서 정치를 하지는 말고 봉하 마을로 내려와 같이 좋은 책을 내자고 말이죠. 저자는 그 말에 큰 감화를 받아 정말 봉하 마을로 내려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내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여 그 뜻을 이루진 못했습니다. 이 책은 그렇게 미완으로 남았던 계획이 드디어 결실이 되어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의식과 문화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는 말할 것도 없이 '말'입니다. 어떤 말을 어떻게 쓰느냐가 우리의 의식을 만들고 문화의 성격을 형성합니다. 또한 말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가장 많이 하는 것입니다. 때와 장소에 따라 할 수 있는 말과 할 수 없는 말이 있듯이 삶에서 우리가 자주 쓰는 말도 우리를 이루는 중요한 한 부분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그는 말에 대한 책을 낸 것입니다. 무엇보다 민주주의는 생활 속에서 시작되며 우리 생활 속 작은 일과 작은 생각 그리고 작은 언어부터 바꿔야 민주주의 역시 온전한 모습으로 자리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책은 그렇게 5장에 걸쳐서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언어들에 은밀히 깃든 정치적 의미와 타인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잘못된 사용법들을 알려줍니다. 이를테면 미망인이나 여류 같은 단어들 말이죠. 우리 역시 무의식 중에 자주 쓰곤 하는 말인데, 혹시 그 의미를 아시고 계셨나요? 우리는 남편을 잃고 홀로 된 부인에게 미망인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요, 사실 미망인의 뜻은 '아직 따라 죽지 못한 사람' 입니다. 즉 '미망인'이란 말 속엔 '남편을 따라 빨리 죽지 왜 아직 살아 있느냐?'란 의미가 포함된 것입니다. 멀쩡하게 살아 있는 사람에게 오직 여자고, 아내라는 이유 만으로 죽음을 강요하다니, 이런 폭력적인 말도 또 없을 것 같네요. '여류'란 말도 그러합니다. 많이들 그런 말을 쓰는데, 사실 그 말의 본뜻은 '기생'이란 말입니다. 예술가들에게 자주 여류란 말을 붙인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어요. 조선 시대에는 예술을 하는 여인의 대부분이 기생이었으니까요. 한 마디로 비하하는 말인 것이죠.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버릇처럼 자주 쓰는 말들엔 이렇게 아주 폭력적인 의미가 깃들어 있었습니다. 이 책엔 이렇게 평등 보다는 차별을, 존중 보다는 폭력을 은근히 조장하는 말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것도 우리가 자주 쓰는 말로써 말이죠. 그렇지 않아도 글을 쓰면서 말의 무게를 진득하게 느끼는 중이었는데, 이 책마저 읽으니 한 마디의 말이라도 더욱 조심히 써야겠다는 생각이 아니 들 수 없더군요. 저자는 마지막에 참된 민주주의 문화를 토착화시키기 위해서 그렇다면 말은 어떻게 되어야 하나에 대해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섬김의 언어, 겸손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죠.


  막말과 암호 같은 말들('급식체' 같은 것들 말이죠)로 넘쳐나는 요즘을 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네요. 원래 말이란 소통을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너무나 서로 다른 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내 마음 같이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말이란 걸 하게 된 겁니다. 그러나 지금 말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본분을 잊어가는 것 같습니다. 막말이나 암호 같은 말들은 소통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을 더 많이 드러내기 위해서만 존재하니까요. 거기에는 타인에 대한 그 어떤 배려도 없습니다. 그저 자신과 다르면 가차없이 차별하고 배제하겠다는 폭력이 있을 뿐입니다. 이런 말이 더 많이 유행하고 인기를 얻는다는 게 어쩌면 우리 사회가 그만큼 이기주의적이고 폭력적이라는 걸 나타내는 것은 아닌지 걱정됩니다.


 지금부터라도 섬김과 겸손의 언어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을 '세상을 바꾸는 언어'라는 책으로 시작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마지막 대륙
미지 레이먼드 지음, 이선혜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2월
평점 :
절판



 삶의 시간이 유한하고 내일을 과거처럼 알지 못하며 남의 마음이 내 맘 같지 않은 이상 상실은 필연적이다. 누구나 그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잘 안다고 해서 상실로 인한 고통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알고보면 사람이 살면서 하는 모든 일의 근본에는 이토록 고통을 가져오는 상실을 어떻게든 줄이려는 마음이 있다. 누구는 그 아픔이 너무 두려워 혼자 되기를 고집하기도 하고 또 누구는 더 많이 가지고 더 높이 올라가 상실이 가져다 주는 고통에서 달아나려 애쓴다. 그러나 상실은 능력이 뛰어난 술래다. 아무리 잘 숨고 멀리 달아나도 언제든 반드시 찾아내거나 따라잡는다. 이토록 삶에 상실이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다면 우리가 더 많이 생각해야 할 것은 상실이라는 사건 자체보다 그 이후여야 하지 않을까? 다시 말해, 어떻게 하면 상실로 인한 고통 속에 주저 앉거나 자멸하지 않고 잘 감내할 것인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상실 이후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이 하나 있다. 그것이 바로 미지 레이먼드의 '나의 마지막 대륙'이라는 책이다.


 미지 레이먼드, 잘 모르는 작가다.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오직 소설의 배경이 남극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존재가 충만한 곳보다 부재하는 쪽을 선호하다. 내가 가장 가고 싶고 머물고 싶은 곳은 사막이나 높은 산 또는 북극 혹은 남극이다. 남극은 내 오랜 로망 중 하나다. 살면서 언제고 한 번 꼭 가서 머무르고 싶었다. 요즘은 남극 관광도 한다고 들었기에 예전처럼 불가능한 꿈은 아니게 되었다. 그래서 이 소설이 남극이 배경이라기에 그 때를 위해서라도 읽어 본 것이다. 정작 읽고 나선 남극 관광에 대한 내 생각을 접어야 했지만.



 이 소설은 '뎁 가드너'라는 여성이 주인공이다. 그녀는 남극의 펭귄을 연구한다. 원래는 사진 전공이었지만 상실로 인한 고통을 겪다가 펭귄에게 매료되어 전문적으로 연구까지 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펭귄은 그녀에게 삶이 준 두 번째의 기회였다. 해마다 그녀는 남극으로 떠난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개인이 책임지기엔 너무나 큰 비용이다. 그래서 그녀는 '코머런트 호'라는, 남극 크루즈 여행선에서 일한다. 그녀가 소속된 비영리 연구 단체인 '남극 펭귄 프로젝트'는 코머런트 호와 연구자들이 그 배에서 관광객들을 일하며 무상으로 남극까지 올 수 있도록 제휴했던 것이다. 뎁은 남극에서 온전한 자유를 느끼며 할 수 없이 미국에 있어야 할 때면 언제나 다시 그 곳으로 돌아가길 바란다. 남극, 그 곳은 뎁에게 상실로 인한 아픔이 치유되는 곳이다. 뎁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소설은 뎁처럼 남극에서 치유와 새로운 희망을 찾는 이들을 계속해서 등장시킨다. 리처드와 케이트 부부 그리고 켈러 같은 사람을.


 켈러는 뎁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뎁의 연인이니까 말이다. 켈러도 커다란 상실을 겪었다. 원래 잘 나가는 변호사였던 그는 하나밖에 없는 아이를 잃었다. 그로 인해 삶의 모든 의욕과 희망까지 무너져 버린 그는 남극에서 뎁처럼 삶의 두 번째 기회를 찾았다. 그렇게 켈러와 뎁은 닮았다. 둘은 서로에게 급속히 빠져들지만 상실의 고통에서 아직 헤어나오지 못한 켈러는 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못하다. 뎁 또한 켈러를 정말 사랑하면서도 그와 정착하는 것에 일말의 불안을 느낀다. 삶은 하나의 모습이 아니라 언제나 이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남극 또한 그렇다. 치유의 땅인 그 곳은 죽음의 땅이기도 하다. 이것은 소설 초반 데니스라는 남자의 죽음에서 나타난다. 그 또한 이별의 고통을 잊기 위해 남극을 찾았는데, 그만 죽어버린 것이다. 사고인지 자살인지 분명하지 않다. 이 죽음은 사실 하나의 복선이다. 소설은 처음부터 '난파 며칠 전'이란 형태로 전개되는데(이 소설은 한 챕터가 바뀔 때마다 시간이 과거와 현재를 마구 넘나들기에 그 시간을 항상 유념하고 읽을 필요가 있다.), 이처럼 여기엔 아주 커다란 비극이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난 남극 관광에 대한 계획을 사실상 포기했다. 아무튼 바로 그 어마어마한 비극을 위한 복선이 데니스의 죽음인 것이다. 이렇게 남극은 희망의 땅이자 절망의 땅이다. 남극을 연구하기 위한 비용을 남극을 파괴시킬 뿐인 관광 사업을 통해서만 조달할 수 있는 것과 똑같은 모순이다.


 그러므로 남극은 뎁의 말처럼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사람과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는 사람'을 위한 곳이 아니다. 남극이 온전한 치유를 줄 수 없는 건 세상 여느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결국 소설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확실하다. 나 바깥의 것에 기대어 상실의 아픔을 치유하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그 어떤 바깥의 것도 치유를 줄 수 없다.


 '뜻밖의 수확'이란 말이 있다. 내겐 이 소설이 정말 그렇다. 별 기대없이 읽었는데 진짜 좋았다. 인용하고 싶은 문장이나 대목들이 많은데, 그걸 다 쓰면 너무나 길어질 것 같아서 하지 못하는 게 유감이다. 번잡한 일상 속에서 왠지 너무 붕붕 떠다니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면 이 소설을 한 번 벗해보는 것도 좋겠다. 읽다보면 어느새 침잠하게 되고 내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된다. 이야기 자체도 새롭고 흥미롭다. 저자가 실제 펭귄 연구를 했던 체험을 토대로 썼기 때문에 소설의 모든 상황에서 현실감이 넘쳐난다. 남극에 대해 관심이 많다면 이 책을 통해 간접 경험을 해 보는 것도 좋으리라. 어쨌든, 당신이 내 지인이라면 일부러라도 연락해서 무조건 추천하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드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변의 피크닉 스트루가츠키 형제 걸작선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0년대에 우리나라에서 영화 좀 본다고 말하기 위해선 마치 통과 의례처럼 필수적으로 알아야만 했던 러시아 감독이 하나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영화로 시를 쓴다고 평가받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였습니다. 이걸 잘 보여주는 사례 하나가 있는데, 바로 처음으로 극장에서 개봉된 그의 영화 '희생'입니다. 유럽 사람들조차 영화가 너무 어려워서 흥행 실패한 이 작품이 우리나라에선 영화광들이 너도 나도 앞다투어 보는 바람에 흥행을 하여 유럽을 깜짝 놀라게 한 것입니다.


 물론 저도 그 감독에게 빠진 영화 키드 중 하나였죠. 대학 다닐 때 철학 논문을 그의 영화를 주제로 할 정도로 말이죠. 언제나 구원이라는 주제에 집착했던 그의 필모그래피 중에서 딱 두 편의 SF 영화가 있는데, 하나는 스티븐 소더버그가 리메이크 한 바도 있는, 스타니스와프의 원작으로 하여 '솔라리스'고, 나머지 하나는 이번에 소개할 아르카디 스트루가츠키와 보리스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소설인 '노변의 피크닉'을 원작으로 하여 만든 '잠입자(STALKER)'입니다. 저는 이 두 작품을 주로 칸트의 '초월적 이성'과 관련하여 풀어나갔는데, '솔라리스'는 원작 소설까지 번역되어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어 좋았던 반면, '노변의 피크닉'은 번역되지 않아 무척 아쉬웠던 기억이 지금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어쨌든 그렇게 글을 쓸 정도로 정말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그 때 산 비디오를 아직도 이렇게 소장하고 있을 정도로 말이죠. 그러니 이번에 나온 이 소설 또한 여간 반갑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작 소설의 작가들 역시 '잠입자'의 시나리오에 참여했지만 원래 타르코프스키 감독 자체가 원작을 그대로 재현하는 감독은 아닌지라 소설은 어떤 영화와 또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그 오래된 궁금증을 풀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말이 나온 김에, 소장하고 있는 '잠입자' 비디오와 이번에 나온 '노변의 피크닉'을 함께 찍어 봤습니다.


 우리나라에선 지금에서야 소개되었지만 해외에선 이미 77년에 번역 소개되어 지금은 가장 대표적인 러시아 SF 중 하나로 엄청난 추앙을 받고 있는 작품입니다. 물론 이 소설에 영향을 받은 작품들도 많구요. 가장 최근까지도 그러합니다. 이를테면 '스파이더맨 홈커밍'을 들 수 있겠네요. 거기서 메인 빌런인 벌처가 했던, '어벤저스'의 뉴욕 침공 때 외계인이 남긴 유류물을 수거해 그 기술을 몰래 사고 파는 행위들 있잖아요? 그것이 바로 '노변의 피크닉'에 나오거든요. 이 소설의 주인공 '레드릭 슈하트'란 남자가 그와 비슷한  일을 합니다. 생존을 위해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 목숨을 걸고 금지 구역에 몰래 들어가서 외계인이 남긴 물건을 가져오죠. 영화만이 아닙니다. 음악도 있습니다. 2013년에 영국의 프로그레시브 락 그룹 'GUAPO'가 발표한 음반이 바로 그것입니다.



 '노변의 피크닉'을 읽으신 분들이라면 앨범 제목만 봐도 이 음반이 '노변의 피크닉'을 주제로 한 작품이라는 걸 아실 듯 합니다. 앨범 제목인 'HISTORY OF THE VISITATION'은 '노변의 피크닉'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필먼 박사가 쓴 책의 이름이니까요. 네, 이 앨범은 '노변의 피크닉'을 바탕으로 하는 컨셉(음반의 모든 곡을 하나의 주제로 통일한 걸 가리키는 말입니다.)앨범인 것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방면으로 영향을 끼쳤습니다. 물론 거기엔 'S.T.A.L.K.E.R'나 '메트로 2033'과 같은 게임도 포함되지요.


 외계인과의 접촉을 다루는 소설이지만 정작 외계인은 나오지 않습니다. 등장하는 것은 외계인이 잠시 머물다 간 지역에 그들이 남긴 물건 뿐입니다. 이것이 이 소설이 가진 가장 독특한 점입니다. 영화 'E.T'나, '클로즈 인카우터'처럼 조우 그 자체를 다루지는 않고 그 '여파(aftermath)'를 더 많이 다룬다는 것 말이죠. 소설은 필먼 박사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하기까지 합니다.


 '인류가 존재한 이래 가장 중요한 발견은 방문이라는 사실 자체입니다. 방문자의 정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하러 왔는지, 왜 그렇게 잠깐 머물렀는지, 그 후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류가 우주의 외로운 존재는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 분명히 알게 됐다는 게 중요하지요." (p. 18 ~ 19)


 이런 시도는 SF 소설 역사상 처음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감히 바로 이런 점이 이 소설을 무엇보다 특별하고 꼭 시간을 들여 읽을만한 존재로 만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외계인이 등장하는 여타의 소설과는 달리 이 소설은, 특히나 윤리적인 관점에서, 전혀 다른 질문을 독자에게 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일단 윤리라는 것을 어디까지나 타자에 대한 나의 태도에 관계된 문제라고 한정시키도록 하죠. 그런데 그 때까지 외계인이 등장하여 직접 대면하는 것을 다뤘던 소설들은 공통적으로 외계인에 대해서는 수많은 질문('그들이 누구고, 이런 것을 어떻게 할 수 있지?' 등등)을 해댔지만 정작 그 '외계인'이라는 타자를 바라보는 나 자신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지도,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사실 그렇게 나타났던 외계인들 조차 엄밀한 의미에서 타자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모두 인간이 가진 이성이라는 범주 내에서 이해가능한 존재들이었죠. 영화 'E.T'를 생각해보면 잘 아실 겁니다. 아니면 '별에서 온 그대'도 좋구요.


 그런 존재들에게 우리가 '이건 정말 이상하다. 진짜 외계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구나!'하는 점은 별로 보이지 않을 겁니다. 그들의 사고도, 행동도, 모두 우리가 헤아리거나 예상하는 범위 내에 있으니까요. 이건 이상하죠.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환경과 사고 방식의 산물이니까요. 원래는 개미가 물고기를 만나는 것 같아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도 그들과 소통이 가능하고 그들의 내면을 헤아리며 행동도 예측할 수 있다? 그러면 그건 이미 외계인이 아니지 않을까요? 그저 외계인이라는 가면을 쓴 인간에 불과한 게 아닐까요?


 달리 말하면, '외계인'이라는 점에서 더욱 더 인간에게는 절대적으로 타자인 그런 존재마저도 우리는 이처럼  '인간주의적인 시선' 속에 가둬 보고 있었다는 겁니다. 나랑 닮았거나 별 차이가 없는 존재이었기에 굳이 나 자신에 대해서도 질문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죠.


 그러나 절대적 타자는 필연적으로 나 자신에게 질문을 제기합니다. 그런 존재들은 지금까지의 내 합리적 이성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어서 끝내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지식이나 하고 있는 생각들이 옳은 것인가 하고 의심과 회의를 움트게 하니까요. 그런 식으로 절대적 타자는 나의 완결성에 흠집과 균열을 내고 겸허의 자각과 변화의 용납을 자아냅니다. 그래서 '노변의 피크닉'은 정말 대단하고 중요한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이 소설은 외계인이 나왔던 다른 SF 소설은 줄 수 없던 것, 그 의심과 회의를 통한 겸허와 변화를, 가져다 주니까요.


 영어 판 '노변의 피크닉' 표지입니다. 영화 '잠입자'에 나오는 장면을 표지로 썼네요.


 바로 이것이, 요즘 같은 때에는 더욱, 우리가 이 소설을 만나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전세계적으로 나의 완전무결함을 애써 믿거나 남에게 강요하고 있는 시대이니까요. 미국의 트럼프와 일본의 아베, 시리아의 IS 그리고 브렉시트를 단행한 영국이 대표적입니다. 다들 내가 가지고 있는 정체성이 절대적인 진리라는 믿음으로 타자를 용납하지 않고 있지요. 그들이 타자에게 허용하는 것은 딱 두 가지 뿐입니다. 자기처럼 바뀌거나 아니면 제거되거나. 네, 이러한 모습은 2차 대전의 독일 나치와 그리 다르지 않지요.


 아마 스트루가츠키 형제들이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도 당시 소련 체제가 역시 한 몫 했을 겁니다.

 그 때의 소련이란, 독일 나치와 어깨를 견줄 만큼 엄혹한 전체주의 사회였으니까요. 특히나 형제가 열심히 이 소설을 집필하던 무렵의 60년대는 소련이 바깥으로 자신의 힘을 엄청나게 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체코슬라바키아는 소련 침공으로 '프라하의 봄'을 잃어버렸고 헝가리 역시 같은 꼴을 당해야했습니다. 소련은 자신의 체제 지속을 위해서라면 타자의 자유와 행복 따위는 깡그리 없애버릴 수 있는 나라였던 겁니다. 이런 '천상천하 유아독존'식의 자기 중심주의로 똘똘 뭉친 소련을 보면서 그들은 더욱 과연 자신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이념이나 신념이 옳은 것인지 스스로 질문할 수 있는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틀림 없습니다. 이런 점은 소설 속의 한 박사가 한 다음과 같은 말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아주 원대하고 고귀한 정의를 말해 보지요. 이성이란 주변 세계를 해치지 않으면서 그 세계의 힘을 이용하는 능력이다.(p. 227)


 여기서 방점은 분명 주변 세계를 해지지 않는다는 데 찍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당시 많은 이들에게 고통과 절망을 주었던 소련이 하고 있는 것과 정확히 반대되는 일일 테니까요. '노변의 피크닉'은 그런 그들의 생각이 낳은 최상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시작을 여는 필먼 박사의 짧은 인터뷰를 제외하면 모두 네 개의 파트로 이뤄져 있으며 세 번째 부분을 빼면, 모두 가장 탁월한 '스토커(stalker)'인 레드릭 슈하트의 입장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남자가 사실 소설의 진짜 주인공으로 소설은 그의 9년이란 시간을 다루고 있지요. 그 9년의 시간 속에서 레드릭은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가지는 등 자신의 삶에 지속 가능한  점차 안정적인 형태를 부여하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그러면 그럴수록 더 크게 구역의 여파에 자신의 삶이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흐름이 이 소설에선 정말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것을 통해 진정한 주체성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처음 레드릭이 소설 속에 등장할 때는 구역으로 여행을 떠나는 그룹의 리더로 그는 정말 독립적이며 강한 리더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가 강한 주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장면이죠.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런 주체성은 점차 훼손됩니다. 그토록 강했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약하고 혼란스러운 모습이 도처에서 목격되는 것이죠. 그리고 마지막 장면, 그러니까 구역의 영향으로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 자신의 딸 때문에 그것을 고쳐줄 수 있는 금빛 구체를 찾아 다시 구역으로 들어간 최후의 여정에서 드디어 금빛 구체 앞에  다다르자 그는 자신이 짐승이라고 선언하게 됩니다.


 나는 짐승이다. 나는 말을 모르고, 나에게 말을 가르치지 않았고, 나는 생각할 줄 모르고, 그 더러운 놈들이 나에게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다.(p. 330 ~ 1)


 레드릭의 고백 그대로 그는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언어를 잃었습니다. 그런데 이 언어란 과연 무엇입니까? 프랑스의 철학자 라캉에 따르면 언어란 한 개인을 사회화 시키는 가장 원초적은 도구로써, 우리는 언어를 매개로 자신의 진정한 주체성을 희생시키고 사회에 포섭됩니다. 그러므로 그 언어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잃어버렸다는 것은 진정한 주체성을 장악하고 있는 사회가 부여한 정체성에서 벗어 났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한 마디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주체성의 해방인 것이죠. 그것은 레드릭이 짐승이라 고백한 다음 하게 되는 다음과 같은 선언에서 두드러집니다.


 나는 내 영혼을 그 누구에게도 팔아넘긴 적 없으니까! 그건 내 것, 한 인간의 것이다!(p. 331)


 타자는, 그것도 헤아릴 수 없는 정체불명의 타자는 주체를 불안과 혼돈에 빠지게 만들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라 우리는 배워왔습니다. 이방인을 잔뜩 경계하는 것도 그 때문이죠. 하지만 이 소설은 '과연 그럴까?'하고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실은 절대적 타자야말로 사회에 압도되어 자신조차 방기하고 있었던 진정한 주체성을 자각하는 매개체일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므로 타자는 배척의 존재가 아니라 설령 그것이 끝없는 불안과 혼돈을 준다고 해도 끝까지 대면하고 대화해야 한다는 것도 더해서.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는 외계인의 짧은 방문과 그들이 남기고 간 정체 불명의 물건들에 대한 너무나 멋진 비유를 제목으로 쓴 '노변의 피크닉(ROADSIDE PICNIC)'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질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넌 지금 네가 생각하는 너를 진짜 너라고 생각해? 그런 너야말로 오히려 편협하고 협소한 자아가 아닐까?"라고 묻는 것이죠. 그들이 이 소설을 썼던 때와 오늘의 시대적 분위기를 생각한다면 한 번쯤 스스로에게 꼭 물어야 할 질문인데다 소설 또한 명불허전을 느낄 정도로 뛰어나기 때문에 꼭 한 번 만나보시라고 추천하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