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ke : 초보 메이커의 전기 공작 - 쉽게 이해하는 전자 회로와 아두이노 초보 메이커 시리즈
조디 컬킨.에릭 헤이건 지음, 이하영 옮김 / 블로터앤미디어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전기 공작. 제게는 뭔가 추억을 소환하는 말입니다. 아버지가 회사에서 전기 관리 일을 했기에 어릴 때부터 이쪽 방면과 친해 즐겨 만들었기 때문이죠. 그 때는 회로도도 직접 그리고 녹색 기판에 부품 꽂고 납땜 인두 지지며 뭔가를 만들었는데, 지금은 아두이노(ARDUINO)라는 것이 있는 모양이더군요. 이건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Make : 초보 메이커의 전기 공작'이란 책입니다.


책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막상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제목에 속았다는 생각부터 먼저 들었어요. 제목 때문에 저는 무턱대고 이 책을 다양한 것을 만들 수 있는 전기 공작 책으로 여겨버렸거든요.

그런데 '아두이노'에 대한 책이더군요. 제가 이렇게 허술합니다. 무작정 단정 짓고 잘 살펴보지 않아요. 하하. 그래도 어쨌든 이렇게 '아두이노'라는 것을 알았으니 뭐, 손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네요. 뭐라도 하나 새롭게 배우면 다 이득인거죠. 이거 근거 없는 자기 합리화일까요? 어쨌든 저처럼 아두이노를 처음 들어본 분들을 위해 아두이노가 뭔지 간단히 설명하자면, 아두이노란  엔지니어가 아닌 디자인 전공 학생들이 상호 대화가 가능한 사물과 환경을 만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저렴하고 단순한 소형 컴퓨터라고 합니다.


아두이노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아두이노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실 분들을 위하여 그 모습을 올려봅니다. 



 왜 요즘 설치 미술들 보면 전구가 시시각각 다양한 색으로 점멸한다든지 사람이 다가오면 빛과 소리가 나온다든지 하는 게 많잖아요? 미술만 한 사람들이 그러한 전기에 관련된 일에 지식이 많을 리 없으니 그런 작업을 하는 게 어려울 거라는 건 뻔한 사실이죠. 한 마디로 아두이노는 그런 일에 도움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제품이라는 거죠. 그렇다고 당연하게도 디자인 전공 학생에게만 소용이 있는 건 아니에요. 일상 생활에서도 무한하게 응용 가능한 게 또 아두이노더군요. 그렇지 않았다면 2005년에 첫 선을 보인 아두이노가 아직도 전 세계적으로 쓰이고 있진 않았겠죠. 뭐, 이 정도로 아두이노에 대한 설명하고 내게 아두이노에 대해 처음 알려준 이 책에 대해서 말하자면, 정말로 제목 그대로 초보자를 위해 쓴 책입니다.


 아두이노가 무엇이고 그것은 기본적으로 어떤 것을 필요로 하며 구성은 어떻게 되어있는지를 비롯한 아주 기초적인 사항부터 아두이노를 가동시키는 데 필요한 부품 설치하는 법과 운용 시키기 위한 프로그램을 인터넷으로 다운받고 설치하여 코드 짜는 법까지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더군요. 때로는 전압과 전위 그리고 저항등, 전기 공작하면 친숙해질 수밖에 없는 기초적인 사항까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어 살짝 짜증도 났습니다. 그러나 이건 저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고 이런 걸 처음 접하는 이들에겐 이참에 전압이 뭐고, 전류와 저항은 뭔지 아주 잘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책은 총 9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나 하나 단계별로 나아갑니다. 나중엔 서브 모터를 연결하여 아두이노를 통해 움직이게 하는 것과 자신만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아두이노를 활용하는 방법까지 전진하고 있더군요. 원래 아두이노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그것을 기초부터 잘 안내해 줄 책을 찾고 있었다면 이 책은 꽤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검색해 보니 요즘은 초등학교에서도 아두이노 프로그램 수업을 하는 것 같더군요. 그러고 보니 이 책, 초등학생이 보면 딱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제가 원한 책은 아니었습니다만 그래도 어릴 때의 취미였던 전기 공작의 취미를 한껏 소환시켜 주어 좋았습니다. 읽다보니 아두이노에 대해 관심도 많이 가더군요. 언제가는 옛날의 기분을 느끼면서 아두이노를 해보고 싶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 때, 컵라면을 들이밀면 3초간 스프를 뿌려주는 기계를 만들려고 했던 게 기억나네요. 물론 저 혼자만의 설계는 아니었고 '라디오와 모형'이라는 잡지에 나왔던 것을 따라 만들려했던 것이었습니다만. 결국 부품을 구하지 못해 중간에 접어야했지만 그래도 회로도 보면서 작동 원리를 배워 나갔던 게 기억납니다. 그렇게 원리를 알고 나니 사물이 정말 이전과 완전히 다르게 보이더군요. 전기 공작이란 단순히 만든다는 것에만 있지 않고 이렇게 사물을 새롭게 만나고 이해하게 되는 기회도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 걸 아두이노를 통해서 느껴보는 것도 좋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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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을 죽인 형사 형사 벡스트룀 시리즈
레이프 페르손 지음, 홍지로 옮김 / 엘릭시르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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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스웨덴은 최근 주목할 많나 여러 건의 문화 수출을 했다. 여기에는 전 세계의 공항 서점을 북유럽 누아르물로 점령한 것도 포함된다. 대표적으로 3500만 부를 판매한 헨닝 만켈과 6000만 부를 판매한 스티그 라르손이 있다.

 (마이클 부스, '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 중에서)

 

 부스의 이 말처럼 명실상부한 노르딕 누아르의 대표 주자 격인 스웨덴에서 또 한 명의 걸출한 작가가 등장했다. 그것이 바로 세 권까지 나오고 미국에서 TV 드라마로도 제작 중인 벡스트룀 시리즈의 작가, 레이프 페르손이다. 그는 헨닝 만켈과 스티그 라르손, 요 네스뵈아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그리고 카린 포슘 또한 수상하여 마치 노르딕 누아르의 대표 주자가 되기 위한 통과 의례와도 같았던 스칸디나비아 범죄 소설 작가 협회가 주는 유리 열쇠 상까지 2011년에 스탠드 얼론인 'THE DYING DETECTIVE'로 수상함으로써 자신이 계승자임을 증명했다. 


  그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벡스트룀' 시리즈는 일단 벡스트룀이란 캐릭터 자체가 매우 인상적이다.

  노르딕 누아르에서 지금까지 보아왔던 주인공 형사들과 무척이나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일단 벡스트룀은 이런 장르의 형사들에게 의례 따랐던 우울과 비관이 없다. 자신에 대해 불신하거나 회의하기는 커녕 자기를 제외한 사람들을 모두 발 아래로 보는 오만방자로 가득하다. 거기다 정의 구현 같은 것에도 전혀 관심이 없다. 수사 명령을 받으면 거기서 떨어지는 떡고물부터 신경쓰는 형사다. 가장 놀라운 것은 벡스트룀은 인종 차별주의자에다 여성 차별주의자라는 것이다. 이는 노르딕 누아르의 특징과 같았던 타자에 대한 존중과 이해와는 완전히 상반된 모습이다. 벡스트룀은 가족을 만드는 것을 거부하며 어린이들은 혐오한다. 한 마디로 그는 오직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벡스트룀이란 존재는 뇌리에 단단히 새겨질 수밖에 없다. 도대체 이런 캐릭터로 어떻게 독자의 관심을 유지하면서 이야기를 끝까지 이끌어 갈 것인가? 바야흐로 작가의 능력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이번에 나온 '용을 죽인 형사'는 벡스트룀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이다.

 '린다 살인 사건의 린다'에 뒤이은 작품인 것이다. 소설은 2008년에 발표되었다. 나는 이 소설로 벡스트룀을 비로소 만났다. 읽는 동안 첫 권을 읽지 않았다는 게 자못 아쉽게 느껴졌다. 이 시리즈가 가진 독특함은 벡스트룀 캐릭터에만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점이 그동안 읽은 노르딕 누아르와 선명한 차이를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작가의 카메라가 주인공에만 맞춰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벡스트룀 못지 않게 그가 지휘하는 수사팀원은 물론 그를 하루라도 빨리 제거하고 싶어하는, 벡스트룀의 정적이 되는 경찰 내부의 인물을 비롯하여 피해자나 목격자를 포함한 조연들까지 재현의 시선이 골고루 할애되고 있었다. 그래서 내게 이 소설은 인류학적인 느낌마저 갖게 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연유가 있었다. 작가가 스웨덴 범죄소설의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 할만한, '웃는 경관'이 대표작인 마이셰발과 페르발뵈 부부의 '마르틴 베크 시리즈'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걸 오마쥬하고 있었던 것이다. 범죄소설사에서 마르틴 베크 시리즈가 가지는 의미는 아주 크다. 일례로 범죄소설 전문 학자인 울리히 브로이히에 따르면 초창기 탐정 소설이 가진, 수수께끼에 빠진 살인 사건과 추적 그리고 해결이라는 단순한 도식에 혼자 일하는 탐정이 아니라 집단으로 일하는 경찰을 가져와 심리학적 깊이를 더하고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을 추구하려고 시도한 작품 가운데 조르주 심농의 메그레 경감과 더불어 가장 성공한 작품이라고 한다. 그런 면에서 '벡스트룀 시리즈'가 '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영향을 받았다면 여기엔 사회 비판적인 요소가 강하다는 의미이기도 하겠다. 어쩌면 그래서 소설의 카메라는 되도록 많은 인물을 골고루 담으려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은 알콜 중독자가 많기로도 유명한 스웨덴에서, 벡스트룀 스스로 말하는 바와 같이 아주 흔하게 일어나는 사건인 술고래였던 전직 회계사가 후라이팬으로 가격 당해 죽은 사건을 중심으로 진행되는데, 이야기가 앞으로 나아가면서 더 많이 보여주는 것은 이민자를 가장 많이 받아들여 가장 개방적인 나라로 세계에서 손꼽히며 또한 양성 평등에 있어서도 가장 성공적인 나라로 인정받는 스웨덴이 실은 그 두 가지 면 모두에 있어 여전히 아주 차별적이라는 모습이니까 말이다. 마치 작정하고 그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스웨덴이란 나라의 인상을 곡괭이로 깨부수려는 것만 같다.


 공간적인 배경은 솔나다. 마이클 부스에 따르면 차별이 횡행하는 스웨덴의 어두운 이면은, 흔히 스웨덴 제3의 도시라 일컫는 말뫼에서 드러난다고 하는데, 이 작은 도시 솔나 또한 예외는 아닌 모양이다. 아무튼 사건은 거기서 일어나며 전작에서 스톡홀롬에 있던 벡스트룀은 여기에 발령을 받아 온 상태다. 소말리아 난민으로 지금은 신문배달을 하고 있는 청년, 셉티무스 아코펠리의 신고로 사건 현장에 온 벡스트룀은 당연하게도 사건엔 별 관심이 없다. 최근 의사로부터 주당인 자신에겐 사형 선고나 다름 없는 술을 멀리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하다는 말을 들은 탓이다. 오직 살기 위해 어떻게 하면 금욕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만 생각하는 벡스트룀은 인종차별주의자답게 신고를 한 아코펠리를 덮어놓고 의심한다. 그런데 살해당한 다니엘손이 알려진 것과 다르게 꽤 많은 현금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살해 당하기 바로 전날  찾았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이것이 단순한 살인 사건이 아니라는 의혹이 짙어지고 거기다 그가 수상쩍은 거래에 많이 관여했다는 게 그가 쓴 수첩으로 드러나면서 이 살인이 솔나에서 가장 잔혹하기로 이름난 범죄자인 이브라힘 형제와 연관이 있다는 의심을 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작가 레이프 페르손은 슬쩍 세 명의 용의자를 독자에게 제시한다. 하나는 벡스트룀이 의심한, 셉티무스 아코펠리. 다른 하나는 수사팀원인 알름이 의심하는 다니엘손 옆집에 사는, 20대로 말은 어눌하지만 수학 계산 능력만은 탁월한 세포 라우렌. 마지막으로 벡스트룀을 호시탐탐 경찰에서 추방하려는, 최대 라이벌이기도 한 토이보넨이 의심하는 이브라힘 형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세 용의자 모두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소말리아 난민, 다른 하나는 사회 부적응자 그리고 마지막은 무슬림으로 따지고 보면 모두 사회 주류가 아닌 주변인적 존재인 것이다. 한 마디로 그들은 스웨덴이란 나라의 낯선 타자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용의자가 된 것엔 정황 증거만 있을 뿐, 유력한 증거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가지게 된 의심을 쉽사리 거두지 않는다. 흡사 오직 타자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지워지지 않는 낙인을 받는 것만 같다. 앞서 말했던 대로 벡스트룀 시리즈가 마르틴 베크의 영향 아래 사회 비판적인 요소가 짙다면 그건 바로 여기서 대표적으로 표출된다. 이러한 용의자 선정과 추적 과정에서 스웨덴의 저변에 깔려 있는 불관용과 배척이 세밀하게 도려지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벡스트룀 시리즈'를 세상에 내보인 스웨덴의 두터운 화장 아래 숨겨져 있는 민낯을 정직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벡스트룀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만날 때마다 이런 말을 하곤 한다. '도대체 스웨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소설은 바로 그 의문에 답을 주려는 것 같다. 제목에 빗대어 말하자면, 벡스트룀은 스웨덴을 위협하는 용을 죽이는 경찰이지만, 사실 진짜 용은 스웨덴일 지도 모른다는 것을.




 미국의 폭스 TV가 2015년에 드라마로 만든 벡스트룀 시리즈의 이미지.

 벡스트룀이 타인을 대하는 기본적 태도인 'TOTAL DICK'이 전면에 나와 있다^^



 셉티무스 아코펠리를 하필이면 소말리아인으로 설정한 건 아마도 이를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이름에 속으면 안 되는 '스웨덴민주당'은 스웨덴의 대표적인 우익 정당이다. 그 정당은 반이민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데 그들의 슬로건이 바로 '소말리아 피자'다. 한 명의 소말리아인의 망명을 받아주면 피자 가게를 운영하여 소말리아에 있는 많은 친척을 데려와 피자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읽는 많은 스웨덴 사람들에게 소말리아는 분명 그 소말리아 피자를 연상시킬 것이다. 따라서 소말리아를 가져왔다는 것 자체가 보이는 것과는 다른 스웨덴 속내에 존재하는 이중적 태도를 꼬집고 있으며 이 소설이 어떤 존재를 용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암시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이처럼 소설은 스웨덴을 향한 날선 비판이 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설이 본래 가지고 있는 재미를 놓치진 않는다.

 범죄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은 하나의 사건에서 여러 줄기로 뻗어 나가 독자의 흥미를 계속 지속시키며 앞서도 말했듯 다수의 용의자를 제시하여 그 속에서 진짜 범인을 찾아나가는 고전 미스터리의 형식 또한 지니고 있는데다 최근 범죄 소설의 공식이 되어버린 것만 같은 반전까지 준비되어 있기에 범죄 소설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매력을 잘 지니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역시 이 소설의 가장 커다란 매력은 범죄 소설 보다는 인간 드라마적인 성격이다. 등장인물들을 잘 묘사해 어느 것 하나 생생하게 다가오지 않는 것이 없음으로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저마다의 욕망과 믿음에 따라 서로 얽히고 풀어지는 걸 보는 재미가 쏠쏠한 것이다. 벡스트룀 또한 마찬가지다. 물론 그의 오만하며 인종과 여성 차별주의자라는 허들을 넘을 수 있어야겠지만 어쨌든 이 캐릭터에 한 번 몰입하기 시작하면 다니엘손의 비밀 금고에 바보같이 혼자 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장면처럼 웃겨주는 데가 많다. 이러면 왜 이 소설을 가지고 블랙 코미디 드라마로 만들었는지도 슬슬 이해가기 시작한다.


 이제야 처음으로 만났는데, 진짜 스웨덴의 모습을 가리고 있는 위장막을 블랙팬서처럼 발톱으로 날카롭게 할퀴는 것이나 벡스트룀을 비롯하여 저마다의 개성으로 무장한 인물들이 함께 추는 군무와 같은 드라마도 마음에 들어 시작은 과연 어떠했는지 궁금해진다. 앞서도 말했듯 벡스트룀 시리즈는 지금까지 세 권이 나와 있는데, 다음 권도 얼른 번역되어 나와주었으면 좋겠다. 



벡스트룀 시리즈의 미국 번역판 커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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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패트릭 멜로즈 소설 5부작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 지음, 공진호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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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은 아주 고통스런 기억에 대한 것이다.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늘 죽음을 바랐던 이가 오로지 거기에 대해서 쓰는 것만이 자신을 살아있게 하기에 써야만 했던 소설이기도 하다. 바로 2018년 5월, 베네딕트 컴버배치 주연의 미니시리즈로도 만들어진 '패트릭 멜로즈'의 원작이 되는 소설에 대한 얘기다.





 그 원작이 되는 소설이 국내에 발간되었다. 작가의 이름은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 1960년에 영국 런던에 부유한 상류층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작가와 작품 모두 아직은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영국에선 꽤나 유명하다고 한다. 그 예로 총 다섯 권으로 이뤄진 이 시리즈의 첫 권인 '괜찮아'는 베티트래스크 문학상을 받았고 네 번째 권인 '모유'는 페미나상을 받았으며 맨부커 상 최종 후보에도 올랐다.


 나는 그 중 처음으로 나온 '괜찮아'를 읽었다. 원제는 'NEVER MIND'. 귀에 낯이 익다면 그건 미국의 대표적인 얼터너티브 락그룹인 '너바나' 때문이다. 그들의 두 번째 앨범이자 90년대의 음악 판도를 완전히 뒤바꿔버린, 역사적인 음반 제목이 바로 'NEVER MIND'였으니까 말이다. 어쩌면 소설의 제목 역시 너바나의 음반 제목에서 가져온 것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음반은 91년, 소설은 92년에 나왔으니까. 92년 쯤이면 'NEVER MIND'가 특히 'SMELLS LIKE TEEN SPIRIT'를 선두로 세계 전체를 폭풍처럼 휩쓸고 다닐 무렵이다. 제목을 지을 때, 작가나 편집자의 귀에 한 번은 들어갔을 것이며 너바나의 노래가 담고있는 메세지가 '패트릭 멜로즈'의 주제와도 상통한다는 생각에 '이거 좀 잘 어울리는군' 하며 썼을지도 모를 일이다. 'SMELLS LIKE TEEN SPIRIT'이 어떤 노래인가에 대해 커트 코베인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다.


 그 노래는 자신의 친구들에 대한 노래이며 그들은 늘 자신을 십대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늘 어른이 될 수 있는 가이드라인 같은 것이 지금 세상에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어른다운 어른이 없는 세상. 그들은 어른이라 말하지만 사실 실패한 어른에 지나지 않는 세상. 그러므로 그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어른이 되는 길을 찾아갈 수밖에 없는 세상. 'SMELLS LIKE TEEN SPIRIT'은 바로 그런 세상의 모습을 얘기했고 'TEEN SPIRIT'을 지도가 사라져버린 세상에서 스스로 지도를 만들어 나가는 혁명의 상징으로 삼았다.  '괜찮아'를 읽어보면 보여주는 것이 이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소설은 오전 7시부터 모두가 잠든 밤까지 단 하루를 담는다. 1960년대의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을 배경으로 말이다. 소설이 한 권에 걸쳐서 이 하루를 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른다. '괜찮아'를 비롯하여 패트릭 멜로즈 시리즈의 모든 작품들은 사실 작가의 자전적인 소설이고 그의 삶을 들여다 볼 때 그 하루는 자신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뒤바꿔버린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그 날, 다섯 살인 패트릭은 아버지 데이비드에게 강간을 당했다. 실제 작가 또한 그랬다. 겨우 담 위로 올라가 걷다가 뛰어내린 일에서 촉발된 그 사건은 작가와 그의 분신인 패트릭 모두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 그 일로 작가는 글쓰기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구할 수 있게 될 때까지 내내 약물 중독과 반복된 자살 시도라는 자기 파괴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뒤이은 시리즈의 책들은 모두 그런 고통의 기록이라 할 만하다. 이처럼 자신의 삶이 순식간에 무간 지옥으로 변해버렸으니, 한 권 전체를 할애하여 그 날을 복기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소설은 아버지 데이비드로 시작한다. 출발부터 데이비드는 자기보다 약한 존재를 무자비하게 괴롭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원의 개미들을 물줄기를 퍼부어 죽이는가 하면 자신의 집에서 하녀로 일하는 하층 계급인 이베트가 무거운 세탁물을 들고 지나가자 일부러 말을 걸어 팔이 아파서 괴로울 때까지 그 자리에 있도록 하기도 한다. 영국 왕의 사생아 가문인 그는 마치 조상이 당한 멸시를 후손이 되갚아 주기라도 하는 듯이 타인을 지배하고 군림하지 않으면 못 사는 존재이다. 식탁 상석에 있는 데이비드 전용 의자인 '총독 의자'는 그런 데이비드 모습을 단적으로 상징한다. 그런 아버지로 시작하여 소설이 줄기차게 보여주는 것은 어른이라고 할 수 없는 어른의 모습이다. 그들은 많은 돈과 지식 그리고 교양을 가지고 있지만 그 어느 것 하나도 그들을 어른으로 만들어주지 못한다. 데이비드의 아내이자 패트릭의 엄마인 엘리너도, 데이비를 숭배하는 니콜라이도, 친구인 교수 빅터도 모두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타인의 인정을 구걸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인정 받기 위해 허영을 부리고 남을 험담한다. 후반의 데이비드의 저택에서 벌어지는 저녁 만찬이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처럼(개인적으로 이 소설의 가장 압권인 부분이 아닐까 한다.)남을 비꼬고 무시하는 것이 마치 상류층의 매너라도 되는듯 행동하는 그들은 자신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듯 가식과 위선에 불과하다. 패트릭이 당한 강간은 진실과 존중 그리고 배려가 사라진, 그러한 어른 같지 않은 어른의 세계가 끝내 낳고야 만 비극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두 커버가 겹쳐져 있습니다. 보는 방향에서 오른쪽에 있는 것이 드라마 방영을 기념하여 특별히 나온 표지이고 왼쪽에 있는 것은 원래 표지입니다.


 '괜찮아'는 도저히 지도로 삼을 수 없는 어른들의 세계를 마치 날카로운 메스를 대듯 신랄하게 비난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닮고 싶은 어른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른으로 인정할 수 있는 모습을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 너바나가 'NEVER MIND'를 통해 들려주려 했던 이 말을 우리는 바로 이 소설에서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 세상이 정말 그랬다. 90년대는 미국 부시 정부의 걸프 전쟁으로 막을 올렸다. 초장부터 십대의 아이들이 보게 된 것은 밤 하늘을 별처럼 수 놓으며 날아가는 미사일과 대기에 꽉 차 흐르는 피와 죽음의 냄새 그리고 증오의 후끈한 열기였다. 이것은 80년대 횡행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무시와 배제로 요약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가 마치 최대치에 도달해 폭발한 것만 같았다. 그것이 십대에게 어른이 되라고 강요하는 어른들이 만든 세상이었다. 도처에서 죽고 다쳐서 쓸려나가는 사람들과 폐허가 되어가는 풍경을 보면서 십대의 아이들이 어른들이 자신의 손에 쥐어준 지도를 찢어 발기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제목은 '괜찮다'고 하지만 사실 그 어디서도 괜찮다고 할 수 있는 모습을 찾을 수 없는 이 소설은 차라리 '너바나'와 같은 제목을 사용했던 섹스 피스톨즈이 외쳤던 것과 똑같이 그런 어른들의 세상에 대해선 '신경 꺼라!'로 소리치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이 말은 그 후로도 3년 내내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홀로 아버지에게 끔찍한 일을 당했던 그 때의 자신에게 지금의 작가가 해주고 싶은 말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보기에 '괜찮아'엔 그런 시대의 들끓음, 응집된 분노가 서려있다. 이 소설이 하필이면 대처 수상의 은퇴하고 얼마 안 되어 나왔다는 것도 이런 느낌을 더욱 강화한다.


 어쨌든 고통은 시작되었다. 이후로 오래도록 작가와 그의 분신인 패트릭은 절뚝거리며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누구도 무서워하지 않았던 데이비드에게도 공포는 있었다. 언젠가 그는 그리스의 이타카 공항에서 기어다니며 구걸하는 거지를 본 적이 있다. 데이비드는 혹시 자신의 진실된 초상이 그런 거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거지가 되지 않기 위해 그는 더욱 더 타인의 약점을 물어뜯는 걸 즐기며 남들에게 아멸차게 군다. 그의 공포는 그대로 패트릭에게 전이되어 현실로 만들고 말았다. 이후의 패트릭 삶은 실상 그런 거지와 다를 바 없었으니까 말이다. 거지가 되지 않으려는 마음이 결국 아들을 그런 거지로 만들고 말았다. 옛 사람들은 부모가 죄를 지으면 자식이 죗값을 치른다는 말을 흔히 했다. 누군가의 탐욕과 무분별이 일으킨 전쟁이 많은 고아를 만드는 것과 똑같이. 악의와 죄는 어디로든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도착하고 마는 편지처럼 돌아와 응당의 대가를 치루도록 한다. 크면 클수록 더 오랫동안. '패트릭 멜로즈'는 그 궤적의 길이를 생각토록 한다. 비록 자신이 가해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패트릭의 엄마인 엘리너가 그랬듯이 또 뭔가 잘못된 걸 알았지만 내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끝내 방관하고만 앤이 그랬듯이 침묵과 방관 속에 더 커지고 길어지는 누군가의 비극을.


  작가의 엄마는 작가가 아버지에게 그런 짓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누구에게도 전할 수 없었던 그 아픔이 고이고 쌓이면 어떻게 될까? 다음의 이야기는 바로 그것에 대한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마치 '여기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가 새겨진 단테의 지옥 문 앞에 서 있는 기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읽은 소설 중 가장 인상 깊은 것중 하나이기에 어서 문을 열고 들어가 다음 작품을 만나고 싶은 마음을 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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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자이너
나오미 울프 지음, 최가영 옮김 / 사일런스북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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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오미 울프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페미니스트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녀는 언제나 나의 고정관념에 강력한 의문을 제기하고 이면의 진실을 발굴하여 그것을 전복시켰다. 여자에게 강요된 아름다움에 대해 쎴던 '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가 그랬고, 예전 한 칼럼에서는 페미니즘이 극우 이데올로기와 친화성이 있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기도 했다. 원래는 2012년에 나왔지만 최근에 번역 간행된 '버자니어'는 여성의 성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었던 고정관념을 무너뜨린다. 이 책은 단적으로 버자이너와 뇌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말은 여성의 경우 성적 쾌락이 오로지 육체적인 것에서만 오지 않고 정서적인 것에서도 매우 많이 온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여성은 몸과 감정 모두가 만족해야만 오르가슴을 느끼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일단 해부학적으로 그러하다. 여성의 골반은 신경계가 단순하게 분포되어 있는 남성의 생식기와는 다르게 수많은 신경계가 아주 복잡하게 얽힌 구조로 되어 있다. 게다가 그 얽힘이 일반적이지 않고 모든 여성이 저마다 다 다르다. 여성 개인은 오직 혼자만의 골반 신경계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모든 여성은 저마다 개성적인 신경망 얽힘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어떤 여성은 신경 분지가 질에 더 발달해 있고 어떤 여성은 신경 분지가 음핵에 더 많죠. 회음부나 자궁경부에서 신경 가닥이 집중적으로 분지된 여성도 있습니다. 그러니 성적 반응의 개인차가 벌어지는 게 당연하죠."(p. 24)


 그러므로 여성에게 성행위와 성생활에 있어서 일반론은 없다. 지금까지 우리가 사람을 통해서나, 책을 통해서 들었던 모든 여성의 성에 대한 지식들은 지극이 운이 좋아야만 적용될 수 있는 헐거운 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여성에게 마치 하나의 정답이 있는 것처럼 강요해왔다. 그 때문에 사회가 요구한 것과 다르게 느끼는 여성들은 가지지 않아도 좋을 수치심과 죄책감을 가져야 했다.


 문화와 가정교육이 여성의 성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많은 여성에게 억울한 죄책감과 수치심을 안기거나 여성으로 하여금 내가 변태가 아닌가 하는 자괴감에 빠지게 만든다. 자신이 애인에게 오럴 섹스를 그의 전 여자친구보다 더 많이 요구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가? 질과 항문 모두 만져 달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창피한가? 가끔 절정까지 오래 걸리건 절정이 모호한 것과 같은가? 여기서 주목. 그건 당신의 할머니가 양손을 이불 위애 고이 포개고 자라고 가르쳤거나 중학교 때 수녀 선생님이 유독 무서웠기 때문이 아니다. 당신은 애인의 전 여자친구보다 성적으로 흥미가 덜한 사람이 아니고 더 엄격하게 길러지지도 않았다. 어떤 잠자리를 좋아하고 원하든, 모든 여성의 저마다 다른 성적 성향은 온전히 신경계의 물리적인 구조에서 오는 것일지 모른다.(p. 33)


 


 책이 강조하고 있듯이 우리가 때로 자신에 대해 어떤 자괴감이나 죄책감에 젖는다면 그건 아마도 우리 몸을 너무 모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사회는 우리가 그런 쪽에 관심을 갖고 알려고 하는 것을 부끄러움과 죄책감과 연결시켜 지레 못하게 만들었으니까. 프랑스의 철학자 미셀 푸코가 '성의 역사'에서 특히 자위와 관련하여 탁월하게 보여주지 않았던가? 개인이 성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을 통제하여 수치심을 느끼도록 함으로써 사회 권력의 지배를 공고히 해 왔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사회는 언제나 성 담론을 지배하고 관리함으로써 개인의 주체성을 박탈하고 쉽게 순응하는 존재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자신의 몸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며 오히려 사회에서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한 저항적인 실천이라 할 수 있다. 나오미 울프의 '버자이너'는 그런 해방의 동력을 가져다 주는 책이다. 요즘 한창 일어나고 있는 탈 코르셋 운동이 증명하듯이, 생각해 보면 여성은 언제나 자신의 몸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자신의 몸을 자신의 눈으로 직시하기 보다는 남들이 만든 틀에 맞춰 바라보기 일수였다. 그러므로 자신의 몸에 따라 개인적인 요구를 하려해도 언제나 슬며시 일어나는 죄책감 속에서 남의 눈치를 봐야했다. 그러나 '버자이너'는 단호하게 말한다. 그런 자신을 전혀 죄스러워할 필요도, 남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고.


 사실상 모든 여성이 적절한 환경만 조성되면 오르가슴에 도달한다는 최신 연구 결과가 많이 나와있다. 이렇게밖에 표현 못 해서 미안하지만, 이렇게 많은 여성이 성욕 결핍과 좌절, 의욕 상실로 고통받는 것이 혹시 남자들이 여자에 대해 잘못 배워서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 아닐까?(p. 109)


 더구나 '버자이너'가 누누이 강조하듯이 여성의 경우 특히 몸은 마음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강간의 경우, 그것은 단순히 몸을 범하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인격적 살인에 해당한다. '버자이너'는 대표적으로 시에라리온 내전 중 병사들에게 무자비하게 강간당한 여성의 모습을 통해 강간이 얼마나 여성의 정신을 파괴시키는지 보여준다. 그러므로 강간은 아주 무서운 죄이다. 


 강간은 영구적인 신체 손상을 남길 수도 있는 고도의 강력범죄다. 그러나 사람들은, 심지어 그 짓을 저지르는 당사자조차도, 무기가 사용되거나 다른 신체적 상해, 멍 혹은 핏자국이 남지 않는다면 강간이 그저 '강제적인 성관계'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근 연구들은 데이트 성폭행을 비롯해 경범죄의 탈을 쓴 강간의 공포와 폭력성이 뇌와 온몸에 각인되어 피해자의 심신을 평생 괴롭힌다고 말한다. (...) 또한 오래전에 입은 성적 외상이 전혀 상관없는 것 같은 현재의 만성적 통증 감각을 심화시킨다는 최근의 분석 결과도 존재한다. 즉 옛날에 성폭행이나 성적 학대를 당했던 사람은 훨씬 나중에 아무 관련 없어 보이는 다른 병을 앓게 되면 그 통증을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크게 느낀다는 얘기다. 코디 박사는 이 상관관계를 거의 확신하고 있어서 '강간이 곧 통증'이라고 말한다.(p. 138)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법원은 그 위중함을 아직 인지하지 못하고 있으니 하루빨리 이런 연구결과가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


 이렇게 '버자이너'는 여성의 성에 대해, 정말로 묻고 싶었으나 어디서도 쉽게 들을 수 없었던 대답을 그것도 아주 제대로 들려주는 책이다. 나오미 울프는 들어가는 말에서 이런 말을 했다.


 오늘날 우리가 여자로 살아가는 게 불편한 이유 중 하나는 여자의 몸과 버자이너를 가리키는 언어가 형편없다는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버자이너가 그냥 살덩어리라는 잘못된 인식 탓이다. 하지만 여성의 성적 쾌락의 요체는 생식기만도 쾌락만도 아니다. 여성의 성적 쾌락은 여성의 자기 인식과 긍정적 태도, 창의력과 용기, 집중력과 추진력을 매개하며 여성에게 초월적 황홀경과 해방감 비슷한 감정을 선사한다. 다시 말해 버자이너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버자이너가 뇌의 연장선상일 뿐만 아니라 영혼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p. 5)


 작가가 말하듯, 정말로 자신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우울과 불안에 휩싸이게 되는지도 모른다. 하여, 자신의 몸이 가진 진실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면 '버자이너'가 좋은 첫걸음이 되어 주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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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방랑
후지와라 신야 지음,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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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지와라 신야의 '동양 방랑'. 제목처럼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앙카라와 흑해, 티벳과 버마, 치앙마이와 상하이, 홍콩과 청량리, 도쿄로 이어지는 여정을 다룬 여행서다. 하지만 표지부터 범상치 않다. 작가의 얼굴에 책에서 인용한 글로 꽉 채운 것이 예쁜 풍경을 주로 쓰는 전형적인 여행서 표지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표지부터 이 책은 네가 알던 여행서와 많이 다르다면서 마음의 준비를 시키는 것 같다. 읽어보니 과연 그랬다. 당신이 만약 여행서를 가고자 하는 곳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읽는다면 이 책엔 당신이 기대하는 것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랜드마크는 물론, 예쁜 거리의 모습이나 풍경은 고사하고 그 곳의 먹음직스러운 대표 요리 또한 나오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반대의 것들이 가득하다. 여행지에서 일부러 가지는 않는 곳들. 허름한 선술집, 버려진 항구, 인적 드문 빈민가의 시장이나 골목, 사창가 등등. 매끈하게 꾸며진 외관의 여행 엽서 같은, 그 곳의 삶이 아니라 우리네 삶처럼 신산하고 질척하며 땀에 절은 살내음이 물씬 풍기는 삶을 담는다. 


 어느새 여행이 떠도는 풍수처럼 제멋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사실은 터키 이스탄불에서 시작해 수많은 도시의 인간 진창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인도 콜카타에 도착해 질리도록 악취를 맡고, 이제 슬슬 동남아시아로 떠나려는 단계에서  심호흡을 하고 싶어졌다.

(p. 249)

 생각해 보면, 여행은 심호흡을 하기 위해서다. 꽉막힌 일상의 악취에서 벗어나 낯설고 이국적인 곳에서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하지만 후지와라 신야의 여행엔 그런 공기가 없다. 어딜가든 코 끝에 진하게 배여드는 건, 이 곳과 그리 다르지 않는 허무와 비애 그리고 고통의 진한 내음 뿐이다. 어떻게 보면, 그는 대지의 곳곳마다 감돌고 있는, 삶 자체에서 눅진하게 풍겨오는 악취를 맡기 위해 400여일의 여행을 떠난 것 같다. '인도 방랑'과 '티벳 방랑'에 이어 '방랑 3부작'을 완결짓는 '동양 방랑'은 그런 여행의 기록이다. 인간을 떠나 인간이 없는 곳에서 자유와 해방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인간 사이로 들어가 그들의 육신에 새겨진 삶이 남긴 생채기들을 더듬는 것. 자유가 아니라 속박의 의미를 헤아리는 것. 그것이 바로 '동양 방랑'의 기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붙박이처럼 한 자리에 머물면서 힘겹더라도 자신의 방식으로 삶을 견디며 버티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게 된다. 때가 되면 연례 행사처럼 목을 매면서도, 구출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명랑하게 되는 여인이라든지, 낯선 손님이 식당에 찾아오면 무작정 합석해 손님에게 많은 음식을 사달라 하고는 모조리 먹어치우고 나중에 식당 주인에게 리베이트를 받는 거구의 이스탄불 여성 같은, 정말 그저 한 번 보고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오래 머물면서 그 삶 깊숙이 들어가지 않고서는 볼 수 없는 삶의 모습들이 이 책엔 참 많이 나오는 것이다. 특히 저자가 앙카라에서 우연히 한 창부의 사진첩을 보고 사진 속 여성이 내뿜는 광기에 강한 인상을 받아 그 주인공을 찾아 앙카라의 온갖 곳을 헤매고 다니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사실 그에게 여행이란 찾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책에서 내내 냄새를 얘기한다. 어디를 가면 꼭 맡게되는 냄새가 있다는 것이다. 냄새, 그건 육신을 가진 존재가 내뿜는 살내음으로 저자에게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이 가상이 아니라 실상이라는 걸 알려주는 신호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그에게 냄새란 실존의 증거였고, 깃털처럼 무작정 떠다니고 있는 것만 같은 자신의 발을 대지에 단단히 묶어둘 수 있는 중력 같은 것이었다. 그런 냄새의 출처와 만난다는 것. 그것이 그에겐 구원이었고 그런 면에서 1년 넘에 이어진 여행은 구도의 여정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앙카라에서 그가 했던 추적 또한 그가 여행을 통해 하고자 했던 것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자를 만날 수 없었다. 그리고 정말은 여자도 아니었다. 마침내 사진 속 여자를 알고 있는 남자를 만난 저자는 그에게서 그녀는 실은 성전환한 남자이며 이미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얘길 듣는 것이다. 일전에 저자가 보고서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바다에. 거긴 해마다 많은 여성들이 목숨을 내던지는 곳이라면서...


 보는 건 겪는 것과 다르다. 저자에게 여행이란 어쩌면 그걸 깨닫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그는 어디를 가든 매순간 자신의 상식과 가치관을 내려놓고 먼저 공감과 헤아림의 시선을 보내는지도 모른다. 앞서도 말했듯 그는 서울의 청량리도 여행한다. 때는 1981년의 겨울이다. 광주의 항쟁이 있고나서 1년이 지난 뒤의 서울. 그는 서울에 오자마자 택시 기사가 틀었던 라디오에서 우연히 듣게된 판소리에 매혹된다.


 전라남도는 한반도 남단에 위치하는, 일본으로 치면 현이다.

 판소리는 전라남도의 노래다. 예로부터 전라남도 사람들은 중앙으로부터 멸시와 학대를 받아왔고 지금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판소리는 그런 풍토에서 태어난 가시 돋친 잡초 같은 노래다. 주로 부조리에 대한 원한, 권력에 대한 강렬하고 외잡한 풍자를 담고 있다고 한다. 판소리는 전라도 사투리로만 불려진다.

 "작년에 폭동이 일어난 광주는 전라남도의 중심 도시죠?"

 "맞아요."

 "그럼 이마에서 피를 흘리던 그 청년들은 함께 목이 터져라 판소리를 불렀던 거군요."

 ".... 손님. 그런 이상한 말은 서울에 도착하면 함부로 입에 담지 않는 게 좋아요."(p. 244)


 그런데 그 때 광주는 어떤 곳이었던가? 그만한 비극을 당했으면서도 자신의 고통을 호소할 수 없었던 도시요, 아예 거기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 자체가 폭력적으로 금지된 곳이었다. 그건 아무도 찾아와 주지 않는 버려진 육신이나 다름 없었다. 어쩌면 저자가 얘기하는, 청량리에서 저자를 느닷없이 덮쳐 여관으로 끌고 가 저자의 완강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계속 성행위할 것을 강요했던 곰치 할멈은 광주를 비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도 자신을 찾아와 주지 않고 보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해서 자신이 여기 있다는 것을,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은 마음은 그 때의 광주도 다르지 않았을테니까 말이다. 이런 생각이 그리 틀리지 않다고 여기는 것은 저자가 곰치 할멈의 얘기를 이렇게 끝맺기 때문이다.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효자손이 눈에 띄었다. 그 낡고 반들반들한 대나무 손가락을 보면서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빗소리에 섞여 여자의 오열과 울음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p. 461)


 책의 마지막에 실린 '여행의 빙점'이란 글에서 그는 말한다. '동양 방랑'은 아무리 낯선 곳에 가더라도 무심해지는, 그렇게 빙점이 되어버린 자신의 여행을 기사회생 시키기 위해 떠난 여행이라고. 그는 자신의 여행이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얼어붙어 버린 것을 인간을 피해 풍경만 찾아다녔기 때문이란 걸 깨닫고 '동양 방랑'에선 정반대로 인간을 만나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고 한다. 그렇게 눈 앞에 나타나는 모든 인간을 일생일대의 인연으로 여기고 소중히 대하며 변두리 유곽의 창녀에서 심산에 틀어박힌 스님까지 어떤 인간이든 철저히 사귀기로 했다고 한다. 이제야 왜 '동양 방랑'이 눈 보다 코를 더 자극했는지 이유를 알겠다. 이 책은 그가 자신에게 부여한 과제를 얼마나 충실히 수행했는가를 증명이라도 하듯 인간이 지닌 저마다의 살냄새로 자욱했기 때문이다. 그는 단언한다.


 누구에게나 빙점은 있다.

 반드시 찾아온다.

 인간의 빙점을 녹이는 것은 인간이다.

어쨌든 사귀어보라.

 '인간은 살덩이죠. 감정으로 가득한...' 


 여름이다. 많은 이들이 여행을 떠날 것이다. 그 중엔 저자처럼 여행의 빙점을 느끼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런 분들에게 '동양 방랑'을 권해본다. 어쩌면 좋은 자극이 되어  빙점이 되어버린 여행을 저자처럼 기사회생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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