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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방 모중석 스릴러 클럽 29
할런 코벤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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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비밀과 거짓말’

  

  이것은 마이크 리 감독의 영화 제목이기도 하지만 이 말 만큼 할런 코벤의 작품 세계를 정의 내려 주는 말도 또 없을 듯하다. 이번에 새로 나온 신작 ‘아들의 방(Hold Tight)'의 1장엔 바로 그러한 할런 코벤이 주조하는 작품 세계의 핵심이 담겨져 있다. 그 세계에서 영위되는 일상이란 겉으로 보면 참으로 안정된 것 같지만 실상은 소설에도 나오는 것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외부의 단 한 번의 공격으로도 언제 어느 때 허물어져 버릴지 모를 허약한 일상이며 그래서 더욱 더 불안하기 짝이 없는 일상이다. 하지만 이 불안은 단순히 그 일상이 외부의 공격에 훤하게 노출되어 있어서 야기되는 것만은 아니다. 비록 노출되어 있더라도 적의 접근을 알 수 있으면 그다지 불안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정말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다가오는 자가 나의 적인지 이웃인지 구별하기 어렵다는 것에 있지 않을까 싶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라는 말도 있듯이, 내게 다가오는 자의 그 내면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우리가 알 수 없기에 불안한 것이다. 때문에 프로이드는 과연 예수의 말대로 이웃 사랑이라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웃은 칸트적 의미의 ’사물‘이다. 그 사물은 내 주체의 바깥에 존재하면서 그 자체로 내 존재를 한계 짓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절대로 내게 포섭될 수 없는 내 인지의 한계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프로이드는 그것을 ’트라우마‘로 여긴다. 즉 그 사물은 내게 일종의 상처인 것이다. 이웃이라는 타인은 그런 존재다. 칸트의 사물이고 프로이드의 트라우마다. 사르트르에게는 내 실존을 위협하는 방해꾼이었다. 코벤 역시 이 대열에 합류한다. 코벤에게 있어서 ’이웃‘ 또한 전적으로 포용할 수만은 없는 어떤 음험한 것으로 남는다.

 

   더구나 코벤에겐 그렇게 볼 수 밖에 없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그것이 바로 ’거짓말‘이다. 우리는 때로 우리가 다 안다고 자부했던 자들이 어느 순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존재로 돌변함을 볼 때가 있다. 그것은 충격으로 다가오지만 사실상 이러한 돌변 또한 그 내부에 불안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건 간단한 이치다. 타인 내부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우리들은 행여나 있을지도 모를 예측 불허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본능적으로 우리의 진심을 위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건 생존을 위한 일종의 자구책이기도 하다. 우리 역시도 그런 전략을 쓰고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타인의 비밀이 우리의 거짓말을 유도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비밀‘과 ’위장‘은 타인의 속마음을 내 속마음처럼 알 수 없는 우리들로서는 부득불 서로 긴밀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다. 그건 하물며 자신이 낳고 키워온 아들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즉 코벤에게 있어 이웃이 더욱 음험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그 비밀을 안고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 비밀을 더욱 알 수 없게 거짓말 전략을 구사하기 때문이다. 

 

   코벤은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이 거짓말 즉 ’위장‘이라는 전략을 자주 쓰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나 대표적인 것이 범죄자 내시가 살해한 시체를 유기하기 위해 취하는 방법이다.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시체를 전혀 다른 존재로 위장하거나 그가 하지 않았던 비행의 흔적을 거짓으로 꾸며놓는 것이다. 이 내시의 위장은 내시라는 존재 자체가 사회적 공간으로 확대되었다고 볼 수 있는 ’클럽 재규어‘(즉 내시가 절대적 외부적 존재로서의 이웃을 개인화한 상징이라면 클럽 재규어는 그것을 사회화한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역시도 똑같이 취하는 방법이다. 그렇게 코벤은 작품에다 적극적으로 거짓말 전략을 구사하는 등장인물들을 집어넣음으로서 우리가 가진 이웃을 음험한 존재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더욱 확실시 한다. 그런데 이러한 ’거짓말‘의 전략은 사실 또 어떻게 보면 의심의 증거만이 아니라 희망의 근거가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행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단순한 ’돌‘이 아니라 그들 역시도 인식을 하고 생각을 하는 나와 동등한 ’주체‘라는 자각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그 타자들의 행위 때문에 나만의 일방적 공격이 아니라 둘이서 함께 하는 게임을 치르고 있다는 생각을 여실히 하게 된다. 비밀만이 아니라 여기에 거짓말이 더해짐으로 인해 이제 우리의 관계는 게임으로 전환된다. 놀랍게도 코벤 역시 정확히 이것을 염두에 두고 있음이 소설 자체에서 드러난다. 게임 이론의 가장 대표적 이론인 수인의 딜레마(prisoner s dilemma)를 만든 학자인 ’내쉬‘와 이 소설의 범죄자이자 가장 거짓말 전략을 적극적으로 구사하는 자인 ’내시‘가 그 이름에서 거의 똑같다는 것에서...
 

 

 

 

 

  그렇게 코벤은 제안한다.

 

  관계를 게임으로 바라보자고. 그것이 어쩌면 이 불안으로 점철된 세상을 헤쳐 나가는 주요한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일단 게임으로 바라볼 경우 게임의 참가하는 모든 플레이어들은 다 동등하기 때문이다. 여기엔 권력 효과가 미치는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2장에서 티아와 마이크 부부는 아들의 컴퓨터에다 해킹 프로그램을 깐다. 아들의 사생활을 몰래 훔쳐보는 것은 양심에 찔리는 일이지만 그들은 아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그냥 감행한다. 하지만 결국 그 행위가 불행을 불러온다. 이런 전개를 통하여 코벤은 간단히 말해서 아무리 부모라 하더라도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한다는 걸 보여준다. 그들은 아들을 보호한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것은 지나친 행위였고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이 ‘부모’라는 그렇게 ‘지배자’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소설에서 마이크는 아들 애덤에게 자신이 이 집의 주인이니 자신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는 말까지 한다.). 즉 티아와 마이크는 아들을 오로지 그저 수동적이기만 한 ’사물‘로 대한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때문에 코벤은 이러한 아들을 나와 동등한 그리고 대등한 참가자로 인식하기 위해서라도 관계를 게임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 한 가지 이유를 더 든다. 앞서도 말했듯 티아와 마이크가 궁극적으로 불행을 초래하게 된 것은 지켜야 할 것이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모라는 권위를 내세워 그 남용을 정당화했다. 해서 가져온 것은 가족 전체가 극심한 위험 속으로 빠져 들게 된 것 뿐이었다. 하마터면 자녀들의 목숨마저 잃어버릴 정도로. 이로써 코벤은 지켜져야 할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함을 극적으로 보여주는데 이는 또한 관계를 게임으로 바라볼 것에 대한 또 하나의 주요한 이유가 된다. 즉 게임에는 각 참가자는 모두 동등하다는 것 말고 또 하나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중요한 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게임의 규칙은 무조건 준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게임의 승패가 진정한 의미에서 이루어지려면 공정해야 하고 그 공정은 오로지 게임의 규칙을 준수하는 것으로만 보장받는다. 게임의 승패가 진정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그 승리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니 화목과 합의를 목적으로 했던 게임은 다시금 혼란 속으로 와해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니 그 어떤 참가자든 게임의 정해진 규칙을 지키는 것은 필수이며 그것은 자신이 승리할 경우 그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다. 바로 이 게임의 규칙을 우리는 ’관용‘이라는 말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즉 타자도 나와 동등한 존재이며 똑같이 공정한 게임을 위해 규칙을 지킬 것을 전제하는 것, 이것이다. 그는 이 게임의 규칙으로써의 ’관용‘의 중요성을 작품 곳곳에서 보여준다. 특히나 마이크의 이웃인 ’로리안‘이나 내시를 추적하는 ’뮤즈‘의 에피소드가 그렇고 결국은 선을 넘어버렸기 때문에 죽음을 당하고 마는 ’매리언‘의 에피소드는 이를 더욱 강조한다. 즉, 할런 코벤의 이번 소설 ’아들의 방‘은 코벤이 독자에게 건네는 하나의 진지한 제안이다. 비밀과 거짓말로 영원히 타인을 이해할 수 없어 늘 불안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그래도 이 세상을 제대로 헤쳐 나가기 위하여 필요한 제안 말이다. 관계를 게임으로 바라보자는!  앞에서 보듯 그것은 하물며 전적인 애정을 유대로 이루어져야 하는 가족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원제인 ‘Hold Tight’도 주제(주제에는 오히려 ‘아들의 방’이라는 제목이 더 적합하다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그 ‘아들의 방’은 절대적으로 타자가 자리 잡은 공간 자체를 상징화 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기보다는 비밀과 거짓말로 가득한 이 세상을 헤쳐 나가기 위해 코벤이 제안하는 일종의 태도 같은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물론 책을 읽고 나면 이 제목 자체가 어쩐지 비관적 전망 끝에 나온 자포자기식의 체념적 진술로도 느껴짐을 부정할 수 없다. 한 편으로 할런 코벤의 ’아들의 방‘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을 이루고 살아간다는 것 자체에 대해 비관적 시선을 던지는 소설이며 그러한 비관적 전망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궤도 위의 롤러코스터처럼 삶을 지속해 나가야 한다는 체념이 짙게 깔린 소설이기도 한 게 사실이다. 여기의 ‘Hold Tight’는 사실 가족을 단단히 ‘붙들어라!’는 것이라기보다는 ‘Show Must Go On’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에필로그처럼 붙은 마지막 장면이 이것을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 ‘Hold Tight’는 꽤나 반어적으로도 읽힌다. 앞서도 들었지만 주인공 티아와 마이크 부부가 아들의 비밀을 캐기 위해 아들의 컴퓨터에 해킹 시스템을 깔아놓는 것이 특히 그렇다. 여기서 보여준 부모의 사랑으로 위장된 집착 역시 ‘Hold Tight’ 으로 읽힐 수 있지 않을까? 이러고 보면 참으로 많은 해석들이 가능한 ‘아들의 방’ 이라는 이 소설 자체가 독자들에게 하나의 게임을 권유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아도 이 소설은 여러 등장인물들의 목소리가 번갈아가며 이어지는 ‘다성악적(Polyphonic)’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목소리들 또한 소설의 후반까지 도대체 어떻게 서로 이어질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없을 만큼 각기 별개의 궤도를 따라서 전개되고 있으니 말이다. 즉 코벤은 제목이든 문장이든 구성이든 자신이 이 소설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다하여 소설 전체를 하나의 게임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어떤가? 한 번 코벤이 제안하는 이 진지한 게임에 한 번 참여해 보는 것은? 특히나 당신이 만일 솔로라면 이 게임을 끝냈을 때 지금 당신의 처지를 그지없이 다행하게 여길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은 솔로들의 정신 무장을 위한 하나의 경전이 될 수도 있다. 코벤이 이 소설을 통해 강조하는 것의 다른 하나는 분명 이러한 사회에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리스크를 부담해야 하는 것인가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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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8, 우연히 데이브 거니 시리즈 1
존 버든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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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s! 

 존 버든의 데뷔작 '658, 우연히'를 읽고 났을 때 처음 떠올랐던 것은 이것이었다. 흔히 외계인과의 접촉을 일컫는,  '제3종과의 근접 조우'. 절대적으로 만나지 못할 이종(異種)과의 만남이기도 한 이 말만큼 이 작품이 이루어낸 성취에 걸맞는 말은 없다고 여겨졌다. 그는 정말 흔치않은 일을 해냈다. 고전 미스터리와 노르딕 느와르(NORDIC NOIR)적 세계를 그야말로 하나로 융합시킨 것이다. 사실 그 둘을 모두 즐겨온 팬으로서 자신있게 말하는 바이지만, 이 둘은 절대 만나지 않는 영원한 평행선 같은 존재였다. 고전 미스터리 장르에서는 노르딕 느와르가 보여주는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이있고도 진지한 시선을 찾기가 사실은 어렵다. 그건 셜록이든 파일로 밴스이든 엘큘 포와로이든 다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삶에 대한 이해의 시선이 아니라 범죄로 인해 드러난 부르조아 세계의 결함을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르딕 느와르도 마찬가지다. 해닝 만켈이든 아날두르 인드리라손이든 이들에게 미스터리 해결의 쾌감을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들이 더욱 천착하는 것은 그 미스터리가 궁극적으로 지우고 싶어하는 사회의 얼룩을 절대 지우지 못할 것으로 만들어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전 미스터리와 노르딕 느와르는 물과 기름처럼 절대로 섞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삶에 대한 시각의 차이 때문이기도 했고 작가 자신이 서 있는 입장의 차이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독자들로서는, 그것도 양 쪽 모두를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아무래도 이 사실 만큼 아쉬운 것도 없었다. 양적으로도 하나 보다는 둘이 나을 것이지만 질적으로도 이 둘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면 그 독서의 쾌감은 더욱 클 것이 분명하니까 말이다. 그러다 스티그 라르손이 그에 가까운 조화를 보여주었다. 파시즘을 그 근저에서 부터 거부하려는 라르손은 그의 주제의식에 걸맞은 미스터리로 그야말로 성공적으로 노르딕 느와르의 시각과 조화시켰다. 하지만 미처 거기에 환호하기도 전에 라르손은 불과 세 편의 작품만 남기고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고 그 '완성된 조화'를 보고싶은 열망 아닌 열망은 미처 꽃피우지도 못한 채 내내 지연되고 있었다. 

  그러다, 마치 루크레티우스의 빗방울 처럼 이 작가 존 버든이 나타났다. '658, 우연히'란 제목 그대로 문득 이마 위로 차디찬 빗방울을 느끼는 것 처럼 우연히 말이다. 

  존 버든의 이 소설은 하나의 접점이다. 리만 기하학과 같다고나 할까... 영원한 평행선일 것 같았던 고전 미스터리와 노르딕 느와르가 그야말로 한 점에서 감격적으로 포옹한 것과 마찬가지이니까 말이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와는 전혀 상관도 없는 뉴욕 출신의 미국 작가가 그것도 데뷔작으로 이런 성취를 이루어내다니 그저 경이로울 뿐이다. 이건 호들갑일 수도 있다. 좋다. 이왕 이렇게 호들갑을 떨게 된 것 더 떨어볼까. 나는 '658, 우연히'를 이 여름에 읽은 미스터리중 기꺼이 베스트 3의 하나로 꼽겠다. 

  작품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은 이정도로 하고 이제 존 버든이 성취한 지점의 그 내막 속으로 한 번 들어가볼까 한다.  

 

 

 주인공 거니는 은퇴한 전직 형사다. 그렇다고 그가 나이가 많은 것은 아니다. 사실 그는 한창 일할 나이에 스스로 은퇴한 것이다. 그렇다고 형사로서 그가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사실 그는 연쇄살인마를 몇 명이나 검거한 아주 유능하고 유명한 형사였다. 그런 그가 아내를 위해 뉴욕에서 벗어나 시골에서 조용하고 소박한 전원생활을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하지만 전적으로 아내만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가 형사일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그만 자신의 아들을 사고로 잃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그 사고를 자기 탓으로 여겼고 은퇴하고 아내가 원하는 대로 전원생활을 하는 것을 일종의 속죄로 여겼다. 하지만 소설을 읽다보면 이것도 진짜 이유가 아닌 것 같이 느껴진다. 왜냐면 우리는 거니의 깊은 곳에 드리우고 있는 아버지의 그림자를 보게되기 때문이다. 일에만 열중해서 가족을 무심하게 내버려두었던, 그래서 어린 거니로 하여금 영원히 혐오하고 결별하게 만들었던 그 아버지의 그림자를 말이다. 사실 거니 역시도 아들 대니의 죽음을 떠올릴 때 그것을 깨닫는다. 바로 그 때의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도 혐오해마지 않았던 아버지의 모습과 똑같이 닮았다는 것을... 

 

  그렇게 이 작품의 중심엔 아버지가 있다. 

  사실, 이 리뷰의 시작을 이성복의 시 '그해 가을' 에 나왔던 이 문장으로 하려고 했었다. 

'아버지! 아버지 씹새끼 너는 입이 열개라도 말을 못해' 

  과연 이 문장 만큼 '658, 우연히'의 주제를 제대로 드러내는 말이 또 있을까 모르겠다. 이 말 그대로 여기의 심층엔 '아버지'에 대한 거부가 있다. 아니, 다시 말하면 프로이드가 '토템과 터부'에서 서양 문명의 근원이라고도 했던 '부친 살해'의 욕망이 있다. 소설의 모든 미스터리, 설정들은 사실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단, 거니가 은퇴후 가지게 된 새로운 취미활동이 흥미롭다. 거니는 우연히 미술 수업을 들었다가 특히 사진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자기가 잡은 연쇄살인마의 머그 샷들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데 몰입한다.  여기서 버든은 왜 거니에게 '머그 샷'이란 취미를 가지게 한 것일까? 여기엔 내가 보기에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머그 샷' 자체가 가지는 투명성이다. 머그 샷은 범죄자가 유치장에 갇히기 직전, 그러니까 현실로 부터 격리되기 직전의 마지막에 찍는 사진이다. 그러니까 여기엔 어떤 꾸밈도 있을 수 없다. 오로지 있는 그대로의 투명한 모습을 드러낼 뿐인 것이다. 그렇게 버든은 그 진실한 모습을 그대로 담아낸다는 의미로 머그 샷을 가져온다. 그렇게 거니는 온전히 드러난 연쇄살인마의 얼굴을 본다. 그런데 버든은 왜 하필 그렇게 드러난 얼굴들에 거니를 그토록 집중시키는 것일까? 더하여 그들은 모두 거니가 제 손으로 직접 체포한 자들인 것이다. 바로 여기에 버든이 머그 샷을 가져온 두번째 이유가 있다. 특히나 버든은 거니가 자기가 체포한 자들의 머그 샷에 너무도 열중하고 있음을 아내의 불평까지 가미하여 강조까지 하는데 그가 그러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거니의 행위와 이 소설에서 거니가 승부하게 되는 연쇄살인마의 살인 행위가 동일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도대체 이 둘의 존재 포획 행위가 하나는 살인이고 하나는 사진인데 어떻게 동일하다는 것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은 머그 샷이 현실에서 격리되기 직전 마지막 찍는 사진이라는 것에서 똑같이 현실에서의 격리라고 볼 수 있는 죽음과 동일하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연쇄살인마의 살인이라는 행위와 거니의 사진 보기가 궁극적으로는 '회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즉 연쇄살인마는 살인을 통해 자신의 기억을 환기시키는 것이고 거니는 자신이 체포한 자들의 모습을 통해 그 기억을 환기하는 것이다. '회상 혹은 환기'는 기억의 한 유형이지만 단순한 기억과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즉 외부에 있는 것을 그대로 기억하는 것, 그렇게 현실을 토대로 내용을 구성하는 것을 단순한 기억이라고 한다면 '회상 혹은 환기'는 거꾸로 기억하는 주체가 그 기억을 통해 임의적으로 현실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즉, '회상 혹은 환기'의 차원에서는 단순한 기억과 달리 주체가 아주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는데 바로 그 때문에 '회상 혹은 환기'는 정체성을 형성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된다. 즉 버든이 여기서 '머그 샷'과 그 행위적 유사성을 가져오는 것은 바로 그 행위에 깔린 보다 근본적 의미, 즉 그들의 정체성 자체가 동일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인 것이다. 거니와 연쇄살인마가 결국 똑같은 존재라는 것은 작품 도처에서 나타나는데 일단 거니가 전원생활에 와서 주로 하는 것이 새관찰이었는데 연쇄살인마도 새관찰자로 행세한다는 것 그리고 둘 다 보호해야 할 여성이 하나씩 있다는 것 등등이나(보다 더 주요한 공통점은 스포일러상 말하지 않겠다.) 연쇄살인마가 피해자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주로 그들의 기억을 환기시키는데 맞춰져 있다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그렇게 둘의 정체성은 동일하다. 차라리 도플갱어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런데 그 거니의 정체성을 형성한 사람은 앞서도 말했듯 아버지였다. 그가 '머그 샷'을 보면서 내내 환기시키는 기억은 바로 형사로서의 기억이다. 그렇게 형사로서의 정체성이다. 때문에 아내는 그것을 싫어한다. 그 형사로서의 정체성은 아들 대니의 죽음과 더불어 바로 아버지의 아우라라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들이 형사직을 버리고 뉴욕마저 떠난 것은 그 아버지의 그림자로 부터 달아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거니는 계속 머그 샷을 본다. 그렇게 그는 아버지의 아우라를 떠나지 못한다. 당연히 아내와의 사이도 좋을리 없다. 전원생활은 엉망직전이고 전처와의 사이에 난 아들도 여전히 나몰라라 하고 있다. 그렇게 그는 그토록 혐오하는 아버지의 자리에 붙들려 있다.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에... 한 마디로 진퇴양난. 

 연쇄살인마가 그 이름을 쓰는 것 역시 둘이 동일성을 나타낸다. 한 마디로 그것은 그야말로 거니의 현재 상황을 나타내는 말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개인적으로 이 책은 내게 운명처럼 여겨졌는데(운명을 예민한 감각이 우연히 겹쳐진 현실을 포착해내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그것은 바로 얼마전에 내가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에'라는 말을 한 페이퍼의 제목으로 썼기 때문이다. 이런 우연적 겹침이 재미있었고 한편으론 그래서 더욱 이 작품에 몰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이 진퇴양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그림자를 벗어나는 길 밖에는 없다. 그렇게 아버지를 영원히 죽이는 수 밖에 없다. 거니는 오디이푸스가 되어야 한다. 즉, 이 소설에서 거니의 모든 추적은 바로 프로이드가 말했던 부친 살해의 과정에 다름아닌 것이다. 

  아버지란 무엇인가? 왜 아들은 아버지를 살해하려는 욕망을 가지게 되는 것인가? 비단 지금 이 작품만이 그렇게 부친 살해의 욕망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영화에서는 이미 92년에 제임스 그레이 감독이 자신의 데뷔작 '리틀 오뎃사'를 통해 공개적으로 아버지를 처형했었다(물론 아들은 직전에 아버지의 머리를 겨누었던 총구를 거둬들이지만...).  이 두 작품이 모두 데뷔작이라는 것에서도 어떤 기묘한 운명이 느껴지는데 제임스 그레이의 경우 아버지의 처형은, 뉴욕의 러시아인 거주지를 '리틀 오뎃사'로 부르는 것에 비추어 보자면, 사실 소련의 사회주의를 구석구석 질서지웠던 존재인 스탈린과도 같은 독재자 아버지의 처형이었다.  

 

                                                                       영화 리틀 오뎃사에서 아버지 처형 장면 

 

 말하자면 여기의 독재자 아버지는 라캉이 말했던 상징계의 질서 자체를 의미하는 아버지와 똑같다고 할 수 있다. 즉 제임스 그레이도 존 버든도 그리고 뒤이어 또 하나의 데뷔작으로 부친 살해를 감행할 존 하트의 '라이어'도 결국 죽이고 싶어하는 것은 이 질서를 떠 받치고 있는  상징적 존재로서의 아버지 자체인 것이다. 이것은 그냥 하는 억측이 아니고 바로 버든이 왜 범인으로 하여금 피해자에게 '1부터 1000까지의 숫자를 떠올리게 하고 그것을 단번에 맞추는' 트릭을 썼는지에서 바로 증명되는 것이다. 바로 그 트릭의 기저에 라캉의 말에 따르면 언어를 습득하는 즉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아버지의 상징 질서에 편입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으로서는 도저히 달아날 수 없는 이미 구조화된 함정 자체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즉 버든이 그러한 트릭을 전면에 가져온 것은 바로 이 부친 살해의 욕망이 현재 이들의 삶을 구조화하고 지배하고 있는 아버지라는 기표를 향하고 있는 것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인 것이다. 이것은 모든 범죄의 장소가 '집'이라는 것에서 더욱 강화된다. 

 

  그런데 왜 아버지를 살해하려는 것일까? 

  여기에 소설의 첫 희생자이자 거니를 범죄로 인도하는 존재이며 거니와 또 다른 유사한 존재이기도 한 멜러리의 '내면 분리 이론' 에 이어지는 다음과 같은 말은 정말 의미심장하다. 

"한 몸에 사는 두 사람의 고통보다 더 끔찍한 고통은 없다네...' (p.154) 

  생각해보면 멜러리도 알코올 중독의 과거를 간신히 지우고 새로이 인생을 살게된 자였고 다른 피해자들도 멜러리와 같았다.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난 자들이었다는 점에서 그들을 모두 아버지의 질서에게로 편입된 자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두 사람의 고통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아버지의 질서를 받아들였기 때문인 것이다. 이것은 거니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대니의 죽음이 아로새긴 상처가 있으니까. 그리고 그 상처가 아로새겨진 결정적 이유는 바로 거니가 아버지처럼 행동했기 때문이었다. 즉 이 모든 이들이 궁극적으로 두 사람의 고통을 한 몸에 새겨지게 된 것은 바로 '아버지'라는 존재 때문인 것이다. 때문에 부친 살해의 욕망은 바로 이러한 고통을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며 더 나아가서는 아버지가 새겨놓은 질서를 해체하고 새로이 그들만의 질서를 이루고자 함이다. 

 

  모든 질서의 재구축은 구질서의 면모를 파헤치는데서 시작한다. 

  그래서 여기엔 그 과정으로서 '고전 미스터리' 기법이 작용하는 것이다. 고전 미스터리의 기법들은 결함을 제거하는, 다른 말로 치유하는 작용을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미스터리 기법은 어디까지는 구질서를 치유하는 것이지 새질서를 낳게하는 작용을 하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위협이 되는 새질서를 제거하는 작용을 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모순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천만에. 바로 여기서 버든의 뛰어난 점이 나타난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스포일러상 말하지 못하겠고 곁가지 것들중 하나를 말한다면, 거니가 어디까지나 협력자로서 수사에 참여하는 것이지 경찰로 다시 복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유동적인 존재로 머무르고 있으며 경찰은 내내 그에게 비협조적이다. 버든은 집에서 조차 그가 자주 머무르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자주 차에서 잠이 들고 때로는 그 때 경찰로 부터 위협도 받는다. 버든이 거니를 이렇게 고립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바로 범죄자의 유사성 때문이다. 범죄자는 공공연히 경찰과 승부한다. 그는 범죄의 현장에서 은밀하게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알린다. 공개적으로 경찰과 게임을 벌이는 것이다. 거니와 범죄자는 동일하게 경찰과 적대적인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미스터리는 이전의 미스터리와는 다르게 작동된다. 즉 아버지의 질서를 굳건히 지키는 경찰과 싸우기 위해서 미스터리가 작동되는 것이다. 범죄자는 자신의 존재를 보이기 위해서(그렇게 너희의 질서는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거꾸로 미스터리를 제시한다. 일종의 구질서를 해체하기 위한 무기로서 제시하는 것이다.(그리고 결말에서 그 모든 것이 그 질서 자체를 와해시켜버리는 데 있음이 드러난다.) 바로 이 미스터리의 반전된 작동을 위해서 나는 버든이 그토록 거니와 범죄자의 동일성을 강조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동일한 존재라야 무기로 제시한 그것이 상대편의 치유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치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자면 거니와 범죄자의 존재는 어떤 측면에서 엘리아데가 완전함의 이상이라 보았던 '양성(ANDROGYNE)'을 연상시킨다. 엘리아데는 한 인터뷰에서 양성과 자웅동체가 어떻게 다른 것인가에 대해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자웅동체는 그저 여성과 남성이 공존하는 것이지만 양성은 이 둘이 융합한 것으로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 존재라고. 라캉의 말대로 언어를 습득한 그 시점에 바로 아버지의 상징 질서로 편입된다고 한다면 인간인 이상 그 아버지의 질서를 벗어나기란 어려울 지도 모른다. 어쩌면 바로 그것을 예상한 나머지 버든은 그들이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 존재로 여겨질 수 있도록 치밀하게 설정했던 것은 아닐까? 

 

  여기까지의 내 얘기가 전혀 이해불가능하다고 한다면 전적으로 내가 범죄자의 진정한 목적과 결말에서의 버든의 연출을 빠뜨렸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작품의 결함이 아니라 스포일러상 내가 빠뜨린 '결함'의 책임이다. 서두에서 말한대로 이 작품은 정말 뛰어나다. 길이와 공개적인 리뷰라는 한계상 하고 싶은 말을 다 못한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서 더 이해되지 않는 리뷰가 될 것 같아 걱정도 앞선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그러고보니 내가 지금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에 서 있는 듯 하다. 역시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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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9-16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품의 중심에 '아버지' 라는 글을 읽으면서 정말 이건 노르딕 느와르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진한 부분은 결코 정통 미스테리에서 나오지 않으니까요. 분위기 자체가 다르잖아요. 이 작품은 거기에서 독특하군요. 땡기는걸요~ ^^

페이퍼를 읽다보니, 다른 책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 있어요,
형사(잡는 자)와 범인은 비슷한 사고를 지녔다는, 서로 이해 가능하다는거, 하지만
행위는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는 그런 것이었죠. 어느 책인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네요.

즐거운 주말되셔요. 역시 멋진 리뷰세요.

ICE-9 2011-09-20 15:36   좋아요 0 | URL
지금에서야 들어와서 이제야 마녀고양이님의 댓글을 보았네요.
잘 지내시고 계시죠?
저도 '658' 읽으면서 미국 작가인데도 너무 '노르딕 느와르'적이라서 놀랐어요^ ^ 고전 미스터리 퍼즐을 푸는 것도 좋아하시고 노르딕 느와르의 분위기도 좋아하신다면 정말 추천드리고 싶은 작품입니다. 스릴러 작가의 경우 자신이 말하고 싶은 주제를 어떻게 표현할까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주인공만이 아니라 그 범인에게도 투영을 시킬 것 같아요. 그 생각에 저는 범죄자의 범죄도 작품을 해석하는데 있어 꽤 중요한 단서로 여기고 있는 편이구요. 결국 잡고자 하는 자와 쫓기는 자는 어떤 의미에서 서로의 도플갱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강한 편이죠. 니체의 말대로 괴물을 오래 들여다보는 자는 그 스스로도 괴물이 된다는 말이 있듯이... 칭찬의 말씀도 감사합니다.^ ^
 
[스틸라이프]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스틸 라이프 아르망 가마슈 경감 시리즈
루이즈 페니 지음, 박웅희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솔직히 두근거리며 첫장을 넘겼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재림이라는 말마저 듣는 작품이라하니 그동안 맛보지 못했던 고전 미스터리적 재미를 듬뿍 맛볼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왠지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 듯한 작은 시골 마을 '스리 파인즈'는 그 자체로 아가사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의 작은 시골 마을로 여겨졌고 그렇게 내게는 그야말로 '클로즈드 서클'로 보였다. 배경 설명과 주요 용의자들이 될 인물들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듯한(그렇게 독자에게 스스로 미스터리 해결을 위한 예비지식을 제공하는 듯한) 첫 장이 지나가고 이 소설에서 명탐정이 될, 캐나다에서는 이미 범죄 해결로 이름이 놓은 가마슈 경감과 왠지 왓슨역을 할 것만 같은 '니콜(결국 그 기대는 뒤에 가서 처참히 무너지지만)'의 소개가 있고나서 드디어 새벽의 한 숲길에서 남에게 원한이라고는 티끌 만큼도 지지 않을 듯한 선하디 선한 할머니 제인 닐이 시체로 발견된다. 

 해설을 제외하고는 총 457페이지에 이르는 이 소설에서 그 십분의 일 길이의 정도에 이렇게 시신이 발견되었으니 내심으론 남아있는 저 많은 분량 동안 아마도 제2, 제3의 살인이 있을 것이라 짐작되었고 예상대로라면 내 관심은 이제 제인 닐이 아니라 그러한 살인자를 은폐하고 있는 마을 '스리 파인즈' 자체에게로 옮겨질 예정이었다. 그렇게 범죄자를 찾아내는 것과 동시에 그 마을이 감추고 있는 비밀이 또 무엇인지 추리해나가는 재미가 더해질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작가 루이즈 페니는 왜 마을이 '스리 파인즈'인지 알려주는데 그것이 바로 신대륙에 와서 더더욱 위협을 받는 왕당파들을 위한 보호처라는 뜻이라니 예감이 맞아지는 것 같고 뭔가 독립의 역사와도 관계있을 것 같아 책장을 넘기는 손은 더욱 더 빨라질 것이었다. 

 캐나다의 여류 작가 루이즈 페니의 2005년도 데뷔작 '정물화'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스틸 라이프'는 만일 나처럼 그런 기대를 했다면 읽으면서 조금은 실망할 수 밖에 없는 소설이다. 그러니까 순수 미스터리적 재미만을 추구했다면 이 책은 그 남은 십분의 구 동안 도무지 나오지 않는 후속 살인, 능력자 가마슈 경감의 부지런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진척이 없는 수사, 거기다 조금은 반칙 처럼도 느껴지는 사건의 현장 등등 상당히 지루할 수가 있다. 특히나 영미 미스터리식의 빠른 속도에 길들여진 분들이라면 그것이 마치 KTX를 타고 지나간다고 한다면 '스틸 라이프'는 자전거를 타고 하염없이 느릿느릿 지나간다는 느낌을 더더욱 받게 될 것이다. 사용된 무기는 흥미롭지만 트릭이나 범인 감추기가 그렇게 또 뛰어나지 않아서(처음에 예상했던 사람이 결국 범인으로 밝혀져서 개인적으로 좀 아쉬웠다. 뭔가 다른 작가의 계책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정작 결말의 해결에서 아무런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없었던 것도 아쉬웠다. 그리고 미스터리라면 무엇보다 명쾌하게 해결하는 명탐정의 매력 또한 돋보여야 하는데 이 소설에서 명탐정 역할을 맡고 있는 가마슈 경감이 그런 매력을 보여주지 않아 또 아쉬웠다. 아마도 오랜만에 아가사 크리스티식의 고전추리의 재미를 맛볼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에 그 아쉬움이 더 컸던지도 모른다. 

 그런데 만일 전혀 사전 정보없이 보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봤다. 이 소설은 미스터리에 너무 치중하지 않고 본다면 이야기를 끌어가는 속도도 괜찮고 문장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무엇보다 번역이 좋아서 그것을 잘 살려내고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개인적으로는 사실 작가는 미스터리 보다는 제목 '정물화' 그대로 '스리 파인즈'라는 마을 자체를 작품에다 온전히 담아내는데 더 치중한 것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살해당한 제인 닐이 마지막으로 그렸던 그림 '박람회 날' 처럼 말이다. 닐은 친구 티머가 죽은 날이기도 한 박람회 날을 그림으로 그렸는데 그녀는 거기에 그 마을 사람 모두를 변형하여 집어 넣는다. 그렇게 페인도 마을 사람 모두를 생생히 독자에게 전달해 주는데 더욱 더 주력한 듯 느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루이즈 페인은 왜 미스터리적 재미를 상쇄해가면서 까지 그 마을 자체를 온전히 담아내려 했던 것일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관해서 흥미로운 것이 바로 소설 속에 수많은 관계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피터와 클라라의 관계, 루이자와 티머 그리고 제인 닐의 관계 그리고 가마슈 경감과 이제 막 그에게로 배속된 신참 니콜의 관계까지. 루이자 페인이 전해주고 싶은 주제에 맞춰 보자면 특히나 가마슈 경감과 니콜의 관계가 흥미로운데 초반 니콜은 유명한 가마슈 경감과 함께 일하게 되어 기뻐하지만 후반에 가서는 갈수록 일으키는 불협화음으로 인해 예상과는 달리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된다. 니콜은 뭔가 자기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버렸음에 기막혀 하는데 이처럼 루이자 페인이 '스리 파인즈'에 이리저리 얽힌 관계들을 통하여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은 바로 그 '변화'다. 

  이렇게 보면 그녀가 왜 하필 제목을 정물화라는 뜻인 '스틸 라이프'로 했는지도 이해가 된다. 아시다시피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세잔은 과히 '정물화'를 통해 현대미술 자체를 탄생시켰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는 같은 사과를 100번도 넘게 그리곤 했는데 그것은 모두 순간 순간 흩어져 버리는 '진실'을 그림 속에 붙잡아두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그는 하나의 시간 밖에는 간직할 수 없는 그림에다 그 '시간'이라는 흐름 자체를 담으려 했던 것이다. 바로 그렇게 '변화'자체를 2차원적인 평면에다 담으려 했던 것이다. 루이자 페인이 이 소설 '스틸 라이프'를 통해 하고자 하는 것도 세잔이 정물화를 그릴 때 하고자 했던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제목 마저도 '스틸 라이프'인 것이다. 이것은 단적으로 소설 속 가마슈 경감과 유일한 책방 주인 머나의 대화에서 드러난다. 머나는 가마슈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들 대다수는 변화에 잘 적응해요. 그게 우리의 생각일 때는 말이죠. 하지만 외부에서 부과되는 변화는 일부 사람들을 일시에 혼란에 빠뜨릴 수 있죠. 알베르 수사가 정곡을 찌른 것 같아요. 인생은 상실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상실에서, 책이 강조하고 있듯이 자유가 나와요. 영원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변화는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고 우리가 적응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행복해질 거에요.(P.204) 

 페인은 이렇게 '스리 파인즈'를 중심으로 얼기설기 엮어지는 관계들을 통해서 변화에 대처하는 그들의 자세를 묘사한다. 그리고 그 모든 대처의 모습들을 제인 닐의 '박람회 날' 그림 처럼 모조리 다 담아내는 것이다. 마치 제목은 정물화 이지만 세잔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브뤼겔을 따르고 있는 듯이 말이다.  

 

 

           브뤼겔의 '십자가를 진 예수' -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가는 예수의 역사적인 사건을 그리고 있지만 정작 주가 되어야 할 예수는 어디에 있는지 찾기조차 힘들 지경이다. 개인적으로 페인의 '스틸 라이프'도 이와 마찬가지라 본다. 주가 되어야할 미스터리가 각자가 변화에 대처하는 모습들을 온전히 담아내려 한 까닭에 제대로 그 맛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해져 버렸다. 남은 건 그 모든 마을 사람들의 잔상뿐. 그래서 내게 '스틸 라이프'는 브뤼겔적이다. 

 

  결론지어 말하자면 기대치의 문제다. 그러니까 어떤 기대로 이 책을 잡았느냐에 따라 그 만족도 역시 달라질 것이 틀림없다. 미스터리적 재미를 추구했다면 재미를 좀 보지 못할 것이고 순수하게 문학적 읽기의 재미를 추구했다면 감성적이며 섬세한 묘사에다 인물을 묘사하는 솜씨 또한 맛깔나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뭐, 나는 완전 전자의 기대감으로만 읽은 탓에 재미를 못 보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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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over 2011-08-16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틸 라이프가 정물화라는 뜻이었군요...

ICE-9 2011-08-19 01:04   좋아요 0 | URL
네. 이프리트님 리뷰도 잘 읽었습니다.^ ^
 
일곱 번째 이름 모중석 스릴러 클럽 27
루스 뉴먼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생각해보면, 나도 저 먼 기억 어딘가 그렇게 초록 무성한 대학 캠퍼스 잔디밭에 누워 조용히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던 때가 있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한여름의 주말 교정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내내 비워진 시간을 그렇게 오롯이 응시로만 채우던 때가 있었다. 
특별히 외롭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내내 얼굴 위로 내리쬐는 뙤약볕이 귀찮았을 뿐...
그나마 너른 광장을 꽉 채워 불어오는 바람이 없었다면 그렇게 구름을 바라보다 일사병이 걸렸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게 누워서 시간이 하늘에다 점점이 찍어내는 맑고도 투명한 발자국을 바라보면서 문득 삶이 날 얼마나 피로하게 만드는가를 느꼈고 이대로 시간이 흙으로 퇴적되어 날 묻어줘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루스 뉴먼의 ‘일곱 번째 이름’을 읽으면서 문득 기억났던 건 바로 그 여름의 시간이었다. 이 소설이 영국의 유명한 대학 케임브리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물론 이 소설은 연쇄살인마를 소재로 한 스릴러이지만 소설의 꽤 많은 부분이 등장인물들이 대학에서 보내는 일상으로 채워져 있어 비슷한 시기의 어느 여름날 그렇게 온종일 내내 누워서 하늘만 바라보던 그 순간을 나도 모르게 떠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의 연상작용이란 얼마나 어이가 없을 정도로 뻗어나가는 것인지...

봄이라는 계절에 너무도 어울릴만한 화사한 샛노란 표지를 넘기면 그 표지에서 받았던 인상을 완전히 전복시키듯 한 밤 기숙사의 살해 현장으로 우리는 바로 인도된다. 거기 한 여자가 온통 피로 물들어있고 또 한 사람의 남자는 살해된 여자가 쏟아낸 내장을 주워 담고 있다. 표지에서 받았던 인상과는 너무도 다른 잔혹한 현장... 급작스런 분위기의 변화에 우리의 뇌리는 잠시 이것을 어떻게 봉합을 해야 하는지 혼돈을 겪게 된다.

 표지와 첫 장면의 뚜렷한 ‘대조’와 그것의 ‘봉합’은 사실 이 소설 전체를 특징짓는 것이라 할 만하다. 왜냐하면, 이 소설 ‘일곱 번째 이름’의 세계 역시도 한여름 화창한 하늘을 바라보며 문득 죽음을 떠올리는 것처럼 그렇게 대조적인 두 개의 세계 - 계급적으로 차이가 있고 인기의 중심인 한 남자를 향한 소녀의 애틋한 로맨스라는 말하자면 ‘꽃보다 남자’의 세계와 젊은 여대생만을 골라 무참하게 살해하는 연쇄살인마의 세계 - 가 봉합되어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소설판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라고나 할까... 

 
 그렇게 화사한 샛노란 표지가 연상시키는 말랑말랑하면서도 달콤한 그러면서도 언제 그 사랑을 잃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사랑에 서투른 한 소녀의 연애이야기라는 ‘지킬 박사’의 이면에 앞에서는 우정을 말하던 그 친구들이 사실은 뒤에서 배신을 하고 또한 그 친구들이 하나 둘 살인마에게 무참하게 살해되는 그러한 감춰진 ‘하이드씨’의 세계가 봉합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일정한 규칙 같은 것이 없이 ‘무작위적’으로 드러나기에 읽는 이로 하여금 어느 정도 혼란을 유발할 수 있다. 아마도 그 때문인지 소설은 글자의 모습(고딕체와 명조체)을 달리하여 현재와 과거의 시간을, 회상과 고백의 내용을 보여주지만 그래도 완전히 혼란을 잠재우지는 못한다. 그래서 이 봉합은 ‘문득 떠올린 죽음’ 만큼이나 갑작스럽고 그래서 서툴러 보인다. 그런에 이 거칠고 성긴 봉합은 그대로 이 봉합의 중심에 있다고 여겨지는 주인공 소녀 올리비아 역시도 마찬가지다.

 올리비아는 다중인격자이다. 제목인 ‘일곱 번째 이름’은 바로 올리비아가 가지는 일곱 개의 인격을 말한다. 그녀는 친부모로부터 성적으로 학대당한 끔찍한 과거가 있다. 올리비아는 그러한 학대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일곱 개의 인격을 스스로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소설은 이 올리비아가 가진 인격들이 교대로 말을 해 나가는 듯하게 전개된다. 첫 시작에 피로 온통 물들어 있었던 여자가 바로 올리비아였다. 그리고 내장을 집어넣고 있었던 남자는 바로 그가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그녀의 남자 친구 ‘닉’이었다. 출동한 경찰에 둘은 주요한 용의자로서 체포된다. 그런데 올리비아는 전혀 기억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인 매튜가 그녀를 담당해 기억을 복원하려 한다. 바로 이 복원의 과정이 주요한 소설의 내용이 된다.

 소설의 대부분은 올리비아가 들려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내용은 여러모로 부정확한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한 올리비아의 부정확하고 때로는 모순되는 것들을 하나로 봉합하는 역할이 그것을 듣는 ‘매튜’의 역할이다. 그는 올리비아의 고백을 봉합해야 할 뿐 아니라 일곱 개의 인격으로 흩어진 그녀의 영혼 역시 하나로 봉합해야 한다. 그렇게 매튜는 이 소설에서 이중의 역할을 떠안는다. 바로 복원과 봉합의 역할이다.

 여기서 ‘올리비아와 매튜의 관계’는 그대로 ‘일곱 번째 이름’이라는 소설과 그것을 읽는 우리 독자 사이의 관계이기도 하다. 올리비아가 들려주는 것은 바로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소설 ‘일곱 번째 이름’이 펼쳐보이는 세계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 대조적이고 파편적인 세계를 우리는 ‘매튜’처럼 하나로 복원하고 봉합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올리비아의 세계는 그리 만만치가 않다. 그녀는 다중인격자이고 과거를 감추려들고 기억도 부정확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또 온갖 것들이, 왜 이게 소설에 나오는 것인지 얼른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이를테면 타로 점을 보는 장면이나 강신술 장면처럼 별 개연성이 없어 보이는 장면들까지 마구 나오기 때문이다. 과장해서 말한다면 이 소설은 아이 앞에 무수하게 쏟아진 레고 블럭 조각 같은 것이다. 매튜는 아이가 그렇게 블록을 하나하나 맞추어 나가듯이 하나의 이야기로 봉합해 나간다. 하지만 정해진 설명서 같은 것이 없기 때문에 그 봉합은 매튜 혼자만의 임의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당연히 진실을 보장해주지는 못한다. 왜냐면 매튜가 원하는 대로, 오로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주관적인 욕망에 따라 지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 매튜의 실패는 예정되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의 봉합은 객관적 진실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쪽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매튜의 친구 스티븐 역시도 그가 올리비아에 대해 딴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고 지속적으로 다그치지 않는가. 그렇게 매튜의 봉합은 그가 보고 싶어 했고 믿고 싶어 했던 올리비아의 모습만을 투영시켜 만들어진 하나의 환영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실제의 모습이 나타났을 때 그것은 지워질 수 밖에 없다. 그러고 보면 이 소설엔 이러한 주관적으로 만들어진 환영이 실재에 의해 파괴되는 장면들이 참 많이도 나온다. 올리비아가 가졌던 닉에 대한 환영, 폴라가 가졌던 닉에 대한 환영, 사람들이 가졌던 롭 맥노튼의 환영(스테로이드 덩어리, 그렇게 아주 마초적인 남자로 여겼던 그는 결국 게이였음이 밝혀진다.), 시네이드가 가졌던 올리비아의 가족에 대한 환영 등등... 거기다 주 무대가 되는 에이리얼 칼리지 자체마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즉, 이들은 환영의 공간 안에서 자신의 욕망이 짙게 투영된 서로에 대한 가상의 환영들을 가지고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는 유일하게 해석의 주체, 봉합의 주체 매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대로 매튜의 역할을 이어받는 우리 독자도 역시...  



 환영이 가득한 세계에서 진리란 그저 수사에 불과하다. 

 그렇게 반전이란 것도 사실은 독자가 만들어왔던 해석과 전혀 다른 해석 역시도 가능함을 알리는 것에 불과하다. 반전은 뒤집어진 사실 자체로 독자에게 충격을 주지 않는다. 독자들이 진짜 반전에서 충격을 얻는 때는 거기서 나타난 완전히 뒤집어진 해석이 독자 스스로 작품을 차근히 되짚어보니 이미 그것이 작품 속에 나와 있었고 그것이 충분히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전이란 설득 가능한 또 하나의 해석의 가능성이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에 불과하다. 하지만 해석이란 또 무엇인가? 결국은 매튜가 했었던 대로 자신의 욕망을 은밀히 투영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따라서 반전이란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드러남과 동시에 그 가능성이 거울이 되어 내 욕망의 모습이 어떠한지 그 구체적 모습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독자는 그 전지적 입장에서 자기가 읽고 있는 텍스트의 세계를 온전히 지배하고 있다고 여기기 쉽다. 그런데 반전은 독자 역시도 그 세계에서 완전한 지배자가 되지 못하고 그저 참여자가 될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발언을 독자가 투영해왔던 자신의 욕망을 좌절시키는 것으로 행한다. 반전이 충격적인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반전은 그리 강하지 않다. 그것은 이 소설이 그리고 있는 세계가 너무 파편적이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너무 산만하기 때문이다. 반전의 충격은 언제나 작품이 그려내고 있는 세계의 밀도와 관련이 깊다. 그 밀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세계는 구체성을 띄게 되고 그것을 장악하고 있다는 독자의 느낌은 더욱 더 배가 된다. 그는 작품을 해석해 가면서 자신의 욕망을 더 커진 지배력만큼 아낌없이 투여한다. 이걸 몰입도라고 할 수 있다. 몰입도란 작품 속 세계가 독자 자신의 자의대로 움직이고 있음에 대한 확인의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난다. 그렇게 자신이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다고 생각했던 세계가 한 순간에 다른 얼굴을 하면서 자신을 내치기 시작한다. 따라서 독자 자신이 쏟아 부었던 욕망의 크기만큼 아무래도 그 좌절에서 오는 충격은 클 수 밖에 없다. 

 
 펼쳐보이는 세계가 파편화되고 산만하다면 세계에 투여되는 독자의 욕망 역시 그 파편만큼 흩어지기 쉽다. 더구나 매튜가 그랬듯이 봉합의 과정 역시 얼기설기 서투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반전이 주는 충격 역시 그만큼 적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다 이 소설은 다중인격이란 익숙한 소재마저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장르에 익숙한 사람들은 나름의 전개도를 몇 개정도 가지고 읽어나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작품이 그 전개도 중 하나와 맞아버리면 식상한 것이 되고 만다. 솔직히 이 소설은 이런 약점을 다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토록 산만한 전개에 맞춰 생각해보면, 이 소설은 그야말로 독자가 작품에 대해 행하는 봉합 다른 말로 구성적 해석이 얼마나 자의적일 수 있는가를 나타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산만할수록 자의의 여지는 넓어지고 그것은 곧 작품이 내놓은 결말마저도 뒤집을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 그렇게 나 역시 소설의 결말이 진짜 결말이라고 전혀 생각되지 않는다. 


이 소설은 그야말로 환영의 놀이인 셈이고, 놀이의 술래는 자기가 잡고 싶은 대상을 잡을 권리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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