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 안나
알렉스 레이크 지음, 문세원 옮김 / 토마토출판사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부모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일 중 하나는,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누군가에게 유괴되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로펌의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줄리아 크라운에게 일어나고 말았다. 그녀의 하나밖에 없는 딸, 다섯 살 안나가 누군가에게 유괴된 것이다. 그녀가 바로 알렉스 레이크의 소설 '애프터 안나'의 주인공이다.



 이것만 해도 그녀에겐 충분히 지옥과 같은 상황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그녀가 당하는 고통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로펌 일이 그녀의 예상 보다 길어지는 바람에 그녀가 그만 안나의 학교에서 안나를 데려가야 하는 시간에 지각하고 말았는데, 하필이면 그 때 유괴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언론으로부터 무책임하고 태만한 엄마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써야 했다. 그동안 업무와 양육에 있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려 애를 썼는데도 불구하고.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직장에서는 그녀에게 클라이언트의 부름에 즉각 응하는 뛰어난 변호사가 되라고 요구하고, 동시에 가정에서는 딸의 부름에도 즉각 반응하는 완벽한 엄마가 되길 기대하고 있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게 불가능하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 기대치를 낮출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p. 21 ~ 22)


 그녀의 고백대로 그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것은 멀리갈 것도 없이, 바로 우리 주위의 일하는 엄마의 일상을 조금만 들여다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직장과 가정 모두에서 완벽하라고 말하는 것은 한 인간이 부응하기에는 너무 무리한 요구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최선을 다했다. 안나를 데리러 가야 하는 시간에 늦었을 때는 아이에게 미안하고 스스로 무책임한 엄마 같아서 기분이 더럽기도 했다.


 복도를  따라 내려가는 그녀의 발걸음이 조급하다. 좀 늦는다고 큰일이야 벌어지겠느냐마는, 그래도 딸을 제시간에 데리러 가지 못했다는 이 기분, 정말 더럽다.(p. 22)


 하지만 그런 사정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들에겐 그저 그녀가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하는 시간에 늦었고, 학교에 늦는다고 미리 연락하지 않은 사실(이것도 마침 그녀의 핸드폰 배터리가 떨어졌기 때문이었다.)만 보일 뿐이다. 그녀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언론은 다짜고짜 그녀를 영국의 위기를 초래하는 태만한 엄마의 대표적인 인물로 1면에 싣고, SNS를 비롯한 여론은 그녀를 미친 엄마, 무자격 엄마, 그리고 난잡한 엄마라는 막말의 별칭으로 조롱한다. 한 마디로 그녀는 결코 고의가 아니었던 지각으로 인해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줄리아는 그런 엄마가 아니다.

 그녀는 바람피운 적도 없고 안나를 두고 떠날 생각을 한 적도 없다. 하지만 지금 진실은 중요한 게 아니다. 지어낸 얘기지만 진실 역시 담겨 있다. 적어도 그녀는 이혼을 원한다. 그것 하나가 모든 혐의를 기정사실로 만든다. 그녀의 태만에 이 혐의가 더해져 이제 줄리아는 공공의 적이 되고 말았다. (p. 177)


 이런 그녀가 의지할만한 사람이라고는 남편밖에 없지만 설상가상으로 남편조차 그녀의 편이 아니다. 그녀에게 연일 무지막지한 비난이 쏟아지는데도 남편은 그녀를 위해 변호할 생각조차 안한다. 오히려 그들과 같은 편이 되어 그들의 말이 다 맞지 않느냐고 그녀를 공박한다. 시어머니까지 가세해 그녀의 마음을 뒤집어 놓는다. 시어머니는 마치 미드 '위기의 주부들'에서 완벽에 대한 강박으로 가족과 이웃을 오히려 힘들게 만들던 브리가 나이가 들면 될 것 같은 모습이다.

 기억하시려나요? '위기의 주부들'에 나온 이 브리를?


 시어머니는 시아버지가 젊은 여자랑 바람이 나서 함께 사라져서 그런가 자식에 대한 집착이 여간 심하지 않다. 자식들을 자기 뜻대로 지배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녀는 그로 인해 자식들과 결혼한 며느리들을 조금도 탐탁지않게 여긴다. 결국 며느리와의 갈등으로 남편의 형은 시어머니와 깨끗하게 갈라섰다. 시어머니가 첫째 며느리에 대해 사람들에게 모함하고 다닌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시어머니였다. 마음에 안 들면 뒤에서 비열한 공격도 서슴지 않는 사람. 그런 시어머니의 공격을 이제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가 된 줄리아가 다 감내해야 했다. 


 '지금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세요?' 줄리아는 이번에는 자신의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시어머니의 분노에 맞서는 분노다.

 '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높단다. 하지만 네 평판은 썩 완벽하진 않잖니? 적어도 너를 잘 아는 이들 사이에선 말이다.(p. 141)


 남편이라도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주었다면 결혼 생활이 괜찮았을 지 모른다. 하지만 남편은 거기서도 아무런 의지가 안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시어머니의 뜻대로 움직이는 '마마보이'였다. 무엇이 되었든 시어머니의 말이 옳다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자기 편에 서서 시어머니와 싸워줄 리는 만무했다. 줄리아가 애초에 남편과의 이혼을 결심한 것도, 야망이 없어서라기 보다는 그런 데에 있었는지 모른다. 결코 자신의 편이 되어주지 않을 사람, 오히려 언제든 적이 될 수 있는 사람. 그런 남자를 어떻게 평생의 반려자로 삼을 수 있을까?


 줄리아는 고립되었다. 사회도, 가족도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그런 그녀에게 유괴는 시작에 불과했다. 자신의 발 아래로 지옥의 입구가 열리는 시작. 물론 유괴 그것 하나만으로도 삶은 충분히 지옥이 되었지만, 마치 그보다 더한 고통이 있다는 듯이 유괴로 인한 여파가 그녀를 더욱 나락으로 빠뜨렸던 것이다.


 그런데 중반에 뜻밖의 사실이 밝혀진다. 안나를 유괴한 범인의 진짜 목표가 바로 줄리아였다는 사실이.


 아이가 가고 나면 너의 진짜 표적에게 관심을 줄 차례야.

 아이 엄마 말이야. (p. 215)


 바로 여기서 '애프터 안나'가 왜 유괴를 다루는 스릴러 소설로써는 다소 특이한 구성을 취했는지 그 이유가 암시된다. 그렇다. '애프터 안나'는 유괴물의 전형적인 전개 방식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부분 유괴를 소재로 다루는 소설들은 범인에게서 아이를 되찾는 과정에 집중한다. 그런 소설들에겐 꼭 나타나는 장면들이 있다. 범인의 연락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것이라든지 다른 한편으로 단서를 쫓아 범인을 추적한다든지 또는 몸값 지불을 둘러싼 범인과 경찰들의 두뇌 싸움 같은 것.


 그러나 '애프터 안나'에서는 이런 장면들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애프터 안나'는 그런 수사 과정들에 무심하다. 잘 보여주지도 않는다. 소설의 카메라는 다만 줄리아를 담는다. 오로지 아이를 유괴당한 어머니의 심리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그녀가 느끼는 고통, 두려움과 절망 그리고 처절한 고독(줄리아 외에 등장하는 내면은 오직 범인의 것 뿐이다.). 더구나 '애프터 안나'에는 다른 유괴 소재 소설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오로지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뚜렷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바로 유괴 당한 아이가 일주일만에 멀쩡히 살아서 돌아온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돌아온 이후의 이야기가 유괴 당했던 때의 이야기와 비슷한 분량으로 펼쳐진다는 것. 소설은 크게 전(before)와 후(afterward)로 나눠어져 있는데, 물론 이 '전과 후'는 안나의 생환을 기준으로 한 전과 후이다. 바로 이 '후'에서 안나가 무사히 돌아오고 난 뒤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유괴가 줄리아에게 고통의 극한이 아니라 더 커다란 아픔을 껴안기 위한 시작이었듯이, 딸의 생환 역시도 그녀의 고통을 끝내는 종지부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딸의 생환을 기뻐할 여유도 없이, 더 커다란 고통과 위기 그리고 한층 더 끔찍한 진실과 마주해야 했다. 원래 아이 엄마를 노렸다는 범인의 말 그대로 말이다.


 그 전과 후를 소설은 줄리아의 심리 묘사에만 일관되게 천착한다. 갑작스럽게 삶의 벼랑으로 내몰렸으나, 누구에게도 도움을 구할 수 없는 여성의 심리를 아주 세밀하게 담아내면서 관통하는 것이다. 사건의 긴박함이 아니라 심리의 긴박함이 있다. 이렇게 오로지 한 여인의 심리로 소설 전체를 일이관지(一以貫之) 하는 것을 보면, 이것이 작가에겐  무엇보다 중요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정말로 유괴는 다만, '슬램덩크'에 나오는 말마따나 슛을 잘하기 위해 거드는 '왼손'에 지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직장과 가정을 가진 한 여성의 심리를 극한으로 몰고가기 위한 왼손.


 그렇다면 이 '일이관지(一以貫之)'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작가는 왜 줄리아의 심리에 이토록 집중했던 것일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문득 경기도 안양시에 있는 한 대형 마트에서 얼마전에 일어난 폭행 사건이 떠오른다. 그것을 우리는 폭행을 당했다는 여성의 자녀가 자신의 SNS에 공개한 CCTV 영상으로 알게 되었다. 거기엔 마트에서 일하는 남성이 계산대에서 일하는 여성 직원의 머리를 다짜고짜 때리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 이것은 많은 네티즌의 공분을 샀다. 많은 이들이 남성을 거세게 비난했고 일부 네티즌은 남성의 신상까지 털었다. 하지만 뒤늦게 밝혀진 사건의 진실은 보이는 것과 전혀 달랐다. 남성은 지금까지 8년동안 마트에서 배달원으로 일해왔다. 그는 5급 지적 장애인이었지만 배달일을 하는 데엔 아무 지장이 없었고 주위 동료들과도 잘 지냈다. 그런데 영상에서 머리를 맞은 여성과는 그렇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유 없이 자신을 무시하고, 배달 물품을 잘못 가져가게 하거나 고객이 요구한 사항을 알려주지 않아서 몇 번이나 헛걸음 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영상에 찍혔던 날도 그런 일을 또 당하여 순간 화를 참지 못하고 저지른 짓이라고 했다. 이렇게 사건의 내막은 달랐다. 현실엔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엄연히 존재했다.


 최근 들어와 SNS가 활발해지면서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한 샤브샤브 체인점에서 일어난 임산부 폭행 동영상이나 '세모자 사건'들이 대표적인데, 그것도 진실과 가해자는 보이는 것과 아주 많이 달랐다. 하지만 이런 사건들을 두고 '아, 이런 오해해 버렸네.'하고 넘어갈 수 없는 것은 희생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안양의 CCTV 사건에서도, 샤브샤브 체인점의 동영상 사건에서도, '세모자 사건'에서도 희생자가 있었다. 직장과 가게를 잃은 사람들이 있었고 신상이 공개 되어 수없이 쏟아지는 비난 메일과 5초마다 걸려오는 욕설 전화를 받았어야 했다. 줄리아도 희생자였다. 영화 '곡성'은 우리에게 현혹되지 말라고 하지만, 우리는 정말 쉽게 현혹된다. 하나의 동영상이 유포되면, 제대로 헤아리지도 않고 보이는 그대로 믿어 그것을 유포시킨 자의 의도대로 움직인다. 소설에서 줄리아가 당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이토록 줄리아의 심리 구현에 집착하는 것엔 소설 상의 재미를 넘어 사회적 의미가 있다고 보여진다. 정보화 시대로 접어 들면서 더욱 빈번하게 된, 함부로 타인의 삶을 재단하는 경향에 대한 신랄한 경고라고 말이다. 그 위험성을,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쉽게 사건과 사람의 겉모습에 현혹되는 지(무엇보다 나중에 밝혀지는 범인의 정체는 이러한 우리의 경향을 단적으로 지적하고 있다.)를 독자인 우리가 제대로 경험할 수 있도록 그는 이렇게 '유괴물'로써는 이례적일 정도로 독특한 구성을 취한 것이다. 소설에 투영된 작가의 마음이 너무도 선명하게 다가오기에, 읽고 나서 한번쯤은 나는 과연 쉽게 현혹되지 않는지, 그만큼 타인의 삶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단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예기치 않게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날 때가 있다. '애프터 안나'가 그랬다. 작가도 누군지 몰랐고, 대강의 설정만 보고 읽게 된 작품이었는데 너무 좋았던 것이다. 단 한 사람의 심리에 초점을 맞추지만 심리 묘사가 좋은 데다가 이야기의 흡인력도 뛰어나 손에서 책을 놓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이 소설엔 범인의 정체에 대한 놀라운 반전이 존재한다. 그리고 기시 유스케의 '검은집'의 마지막 장면을 연상시키는 범인과 주인공 사이의 처절한 대결도. 끝까지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흔히들 '대중성과 깊이를 다 갖추었다'는 말을 하는데, 이 소설이 거기에 해당되지 않을까 한다.


 읽고 나면 '알렉스 레이크'라는 작가의 이름이 뇌리에 각인될 것이다. 책날개에 저자에 대한 소개가 나와 있는데, 알려진 것은 영국 출신이고 현재 미국 북동부에 살고 있다는 것밖에 없으며 나머지는 베일에 싸여있다고 한다. 혹시 '은교'의 이적요가 그랬듯이 스릴러 대가가 다른 인물이 쓴 것처럼 내놓은 것은 아닐까? 어째, 작가마저 작품만큼 흥미로워진다. 얼른 다음 작품으로 만나게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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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아이들 1부 : 동굴곰족 1 대지의 아이들 1
진 M. 아우얼 지음, 정서진 옮김 / 검은숲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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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 M 아우러의 '대지의 아이들'은 내게 '응답하라'와 같은 소설이다.



 어렸을 때,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ACE 88'이라는 것이 있었다. 서양의 아동문학을 번역한 시리즈로 책 좀 읽는다는 아이들에게 나름 유명했던 것으로 아는데 그 중, '100만년'이란 제목으로 6권의 연속된 소설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이 진 M 아우러의 '대지의 아이들'이었다. 처음 읽었을 때도 백과사전에서나 만날 수 있는 선사 시대의 모습이 너무나 상세하면서도 충실하게 묘사되어 있는 지라 무지 신기해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작가는 과연 어떻게 이 많은 것들을 알아낼 수 있었던걸까 참 많이 궁금했었다. 어쨌든 너무나 좋았던 소설로 내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다. 그리고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 이렇게 다시금 만나게 된 것이다. 감개무량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겠지?

 


 다시 읽어 본 '대지의 아이들'은 어릴 때 느꼈던 감상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는 걸 확인시켰다. 내가 읽은 것은 그 중 첫 권인 '동굴곰족'의 1권이다. ACE 88로 치자면 '100만년 동굴'과 '100만년 사냥'의 어디쯤 될 것 같다. 3권이 합쳐서 동굴곰족의 이야기였으니까. 번역이 훨씬 더 좋아져서 그런가, 선사 시대의 묘사가 더 세밀하고 풍부하게 느껴졌다. '대지의 아이들'은 작가가 선사 시대 소설을 쓰기로 하고 40세에 회사를 그만둔 뒤, 집필에 전념. 30년 동안 모두 6부가 나온 작품이다. 굉장히 방대한 양의 소설로, 1부가 '동굴곰족'이다. ACE88로는 2부인 '말들의 계곡'까지 읽었는데 부디 6부가 다 나와주었으면 좋겠다.


 '대지의 아이들'이 담는 시기는 네안데르탈인크로마뇽인이 세대 교체를 할 무렵이다. 정확히 2,5000년 전이라고 한다. 시리즈의 주인공인 여성 에일라가 바로 크로마뇽인이다. 최근에 나온 유발 하라리가 쓴 '사피엔스'에 따르면 크로마뇽인(유발 하라리는 '호모 사피엔스'라 부른다. 사실은 같은 뜻. '크로마뇽'이란 이름은 호모 사피엔스의 화석이 발견된 동굴의 이름으로, 가장 먼저 발견되어 호모 사피엔스의 존재를 알렸기에 호모 사피엔스의 대표적인 명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이 아라비아 반도로 건너와 유라시아 전체로 퍼져나간 것이 대략 7만년 전이라고 한다. 당시 유라시아엔 네안데르탈인이 이미 정착해 살고 있었으므로 크로마뇽인과 네안데르탈인은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실제 마주쳤을 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이것이 진 M 아우얼이 이 대작을 쓰게 된 출발점이었다. 그녀는 그 상상을 소설로 써야겠다고 생각했고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자료를 모으고 수차례 현지 답사까지 한 노력 끝에 결국 에일라의 이야기를 완성시켰다.


 그런데 소설이 아닌 실제 세계에서 이 마주침은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유발 하라리는 과학자들도 아직 정확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대략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뉘고 있는데 하나는 서로 배척하지 않고 무리없이 섞였을 것이라는 '교배 이론'이고 다른 하나는 서로에게 반감을 가져 상대편 인종을 마구 죽였을 것이라는 '상충 이론'이다. 아우얼은 '교배 이론'을  따른다. 동굴곰족 1부의 시작은 그것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지진으로 가족을 잃어버린 다섯 살 에일라는 며칠 낮밤을 헤매다 그만 동굴 사자의 공격을 받고 쓰러진다. 그러다 같은 지진으로 예전의 거처를 잃고 새로운 거처를 찾아 방황 중이던 네안데르탈인 씨족에게 발견된다. 씨족들은 자신과 전혀 다른 골격을 가진 에일라를 보고도 놀라지 않는데 아마도 이미 크로마뇽인이라는 존재에 익숙했던 것 같다. 쓰러진 에일라를 본 씨족의 치료사 여성 '이자'는 그녀를 거두고 싶어한다. 하지만 엄격한 남성 가부장제 사회인 그 씨족에선 여성 혼자 결정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족장 브룬은 거부하지만 다행히 주술사 크렙의 도움으로 에일라는 이자에게 거둬져 목숨을 건지게 되고 결국 같이 살게 된다. 이렇게 공존이 가능했다는 '교배 이론'을 소설이 따르고 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이자는 에일라를 거둔 뒤, 그녀와 함께 씨족이 거주할만한 동굴을 우연히 찾게 되는데 놀랍게도 그 동굴은 씨족이 가장 숭배하는 동굴곰족의 터전으로 밝혀져 그 때문에 이자와 크렙은 에일라가 범상치 않은 존재라고 느끼게 된다. 그렇게 새로운 동굴에서의 삶이 시작되는데 바로 여기서부터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진짜 매력, 다시 말해 선사 시대의 아주 상세하면서도 충실한 복원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동굴을 그냥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사냥을 통해 동굴의 정령이 과연 그들이 그 곳에 살 것을 인정하는지 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라든지, 남성과 여성이 사냥과 채집으로 바깥에서의 활동이 엄격하게 나눠져 있는 점이라든지, 네안데르탈인 사회가 이미 종교적이었으며 놀랍도록 동식물에 대한 정보를 축적하고 있었다는 것을 소설을 통해 가득 알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그 때의 삶을 경험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선사 시대의 삶이 궁금했다면 단연 이 책을 추천드리고 싶다.



  네안데르탈인 씨족 사회에서 여성들은 주로 채집을 맡았다. 물론 아이들도 참여했다. 노동에 있어선 아이들이라고 해서 열외가 없었다. 여성들은 각종 식물들에 대한 지식을 대를 이어 전달했고 당시는 식물이 의약품 역할을 했기에 치료사의 역할도 여성들이 맡았다. 기독교에 의해 악의적으로 왜곡되기 전의 중세 마녀의 이미지는 알고보면 선사 시대 여성이 그 근원이다. 아우얼은 소설에서 네안데르탈인 여성에게 방대한 식물 지식은 유전자 정보로 각인되어 별다른 학습 없이도 후대 여성들이 알 수 있는 반면 크로마뇽인은 새롭게 얻은 능력인 기억과 학습으로 그것을 익힌다고 묘사한다.



 성역할은 엄격하게 구분되어 사냥은 전적으로 남성만 참여할 수 있었다. 사냥을 성공해야 무리에서 남성의 일원으로 당당히 인정받았다. 여성은 사냥 도구를 만지기만 해도 처벌을 받았고 심하면 축출될 수도 있었다. 네안데르탈인은 늑대의 사냥 방식을 모방해 무리 지어 사냥했으며 도구도 많이 발달시켰다. 적은 힘을 이용해 멀리 날릴 수 있는 줄팔매도 있었다. 이것은 나중에 에일라의 무기가 된다. 줄팔매는 돌을 날리지만 줄팔매와 똑같은 원리로 창을 멀리 날리는 도구도 있었다.



 동굴에서의 밤은 온갖 전설과 신화가 태어나고 활동하는 밤이기도 했다. 여기서 그들은 자연을 다양한 정령들이 살아 움직이는 장소로 해석했고 그들의 가호가 없이는 생존도 어렵다는 인식이 자리잡아갔다. 그것을 전승하는 역할은 주로 주술사가 맡았는데 아이들은 밤마다 그에게 몰려들어 그의 입에서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허구를 진실로 받아들였다. 씨족을 묶는 사회화는 그런 식으로 진행되었고 종교는 그렇게 태어났다.



 실제 선사 시대 거주 동굴에서 발견된 아마도 주술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었을 세 마리 들소 상. 동굴을 발견했을 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그 동굴을 이전에 누가 사용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 동굴이 씨족이 신성하게 섬기는 존재였을 경우 동굴은 은총의 대상이 되어 바로 거주지로 확정되었다. 그들에겐 각종 토템이 있었고 씨족의 번영을 위하여 항상 제사를 드렸다. 제사를 드리는 장소는 주로 동굴 가장 깊숙한 곳에 마련되었는데 이 들소 상 또한 그런 곳에서 발견되었다. 제사는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행사 중의 하나였고 그래서 제사를 주관하는 주술사 또한 족장만큼이나 존중 받았다. 에일라는 목우르 주술사의 보호를 받으며 자라난다.


 [인용한 사진들은 모두 이 책에서 가져왔다. 이 책의 내용으로 소설의 내용을 검증해 보았는데 일치하는 것이 많았다. 고증은 어느 정도 확실한 것 같다.]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이 소설에 대해 하나 더 깨닫게 된 사실이 있는데, 이 소설이 페미니즘에 있어서도 꽤나 풍성한 해석 거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2권을 읽고 거기서 리뷰하려 한다.


 '대지의 아이들'은 미국의 FOX에서 드라마로 만들고 있다고 하는데, 이것이 첫 영상화는 아니다. 이미 1986년에 영화로 만들어진 바 있다. 미국에선 3부인 '매머드 사냥꾼'까지 나온 시점이다. 영화는 시리즈 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1부인 '동굴곰족'만 다룬다. 참여한 인물의 면면을 보면 제작사 워너브라더스가 이 작품에 꽤 높은 기대를 걸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연인 에일라는 당시 '스플래시'의 인어 역으로 인기 몰이를 하고 있었던 다릴 한나가 맡았고 각본은 무려 미국 인디영화계의 거장 존 세일즈다. '메이트원'의 감독 말이다. 이 당시 그는 시나리오 작가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고 바로 다음 작품이었던 '메이트원(1987)'을 통해 그것이 결코 헛된 명성이 아니었음을 당당히 입증했다. 촬영은 또 폴 베호벤의 영화들을 통해 주가를 올리고 있었던 얀 드봉이다. 그리고 음악은 헉! 알란 실베스트리. 거기다 감독은 이럴수가! 마이클 채프먼.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와 '성난 황소'를 찍은 그 사람. 감독으로 전업한 후 두 번째 작품이다. 크레딧을 보면 어찌나 화려한 지, 다리오 아르젠토의 데뷔작, '수정 깃털의 새'의 크레딧을 다시 보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만한 인물들의 협업에도 불과하고 영화는 폭망. 이 영화의 성공으로 대지의 아이들 시리즈를 계속 영화로 만들려했던 워너브라더스의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시리즈를 좌초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 '배트맨 대 슈퍼맨'의 40년 선배인 것이다. 물론 워너브라더스는 저스티스 리그 유니버스를 포기하지 않고 있지만.


[사진은 영화의 OST, OST 커버는 영화 포스터를 그대로 사용했다. 포스터의 여성은 에일라로 분한 다릴 한나. '블레이드 러너'의 안드로이드 연기로 캐스팅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영화의 실패야 어쨌든 소설만큼은 뛰어나다. 아직 이 소설을 만나보지 못했다면 꼭 한 번 만나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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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6-04-19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 이런 책도 있었군요.
네안다르탈인의 유전자 변화로 남아를 낳지 못해서 멸망했다는 기사를 얼마 전에 읽으면서
설마, 하고 갸웃했던 기억이 나네요. 반응이 좋지 못하면 끝까지 나오지 않을건데, 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되는군요.

야심차게 뱀파이어의 인터뷰 시리즈를 시작하고, 뱀파이어 아르망에서 끝낸 기억이 털어지지 않아요. ㅠ

ICE-9 2016-04-20 13:21   좋아요 0 | URL
오옷! 반가운 마녀고양이님의 댓글을 만나니, 식곤증을 단번에 날아가버리는데요^^
아, 저는 이 책 나름 유명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그렇지는 않은가 보군요. 저는 다시 나온다길래 꽤 호들갑을 떨었거든요^^ 네안데르탈인이 유전자 변화로 남아를 더이상 생산하지 못했다니, 그 변화엔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요? 선사 시대 이 쪽에 관심이 많아서 몹시 궁금해지네요. 계약은 다 되어 있는 것 같던데 그래서 다 나오지 않을까 섣불리 추측해 봅니다. 책 날개엔 매머드 사냥꾼만 근간으로 나와 있어 좀 불안하긴 해요^^;

아,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시리즈 딱 절반까지만 나왔었죠. 도서정가제 하기 전에 11권짜리 세트를 떨이 가격으로 판매하는 것을 봤는데도 중간에 끝날 것을 생각하니 왠지 안 사게 되더라구요 ㅠ ㅠ 출판시장이 열악해서 시리즈 구매는 확실히 모험하는 느낌이 있는 것 같아요. 메그레도 75권에서 20권으로 끝나고 ㅠ ㅠ 찾아보면 그런 게 한 두 개가 아니겠죠ㅠ ㅠ
 
살인해드립니다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로런스 블록 지음, 이수현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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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켈러(Keller). 주인공의 이름이다. 모음 하나만 바꾸면 킬러(Killer)가 된다. 주인공의 직업이다. 그는 살인청부업자다. 의뢰를 받으면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 천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날아간다. 나이는 중년, 일처리는 야무지고 뒷처리가 깨끗해서 업계에서는 제법 인정을 받고 있다. 덕분에 의뢰는 끊이지 않고 노후 대비도 튼튼하다. 하지만 능력이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어서 삶은 외롭고 공허하기 이를 데 없다. 장거리 세일즈맨을 닮은 업무 특성상 그는 미국 전역을 돌아다녀야 하는데 어딘가에 도착할 때마다 그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이란 여기가 과연 자신이 정착할만한 곳인가 알아보는 것이다. 그만큼 그는 머물게 되기를 희구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말 좋은 곳에 못처럼 박혀선 그곳을 고향으로 여기며 보통 사람처럼 살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직업이 별스럽다 뿐이지 그는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은 사람일 지도 모른다. 사실 그는 사이코 패스도 아니고 어떤 뚜렷한 계기가 있어 살인청부업자가 된 것도 아니다. 그 자신의 고백에 따르면 그저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흘러와버렸을 뿐이라고 한다. 생업으로 삼을 작정도 아니었고 관심은 물론 소질도 없었는데 그저 몇 번 하다보니까 어느새 직업이 되고 말았다고. 그리고 자신의 고백에 결론을 내듯 이렇게 마침표를 찍는다.


 진로는 준비하는 게 아니야. 중간에 우연히 그 일에 대비하게 만든 사건들이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진로는 선택하는 게 아니야.(p.158)


 지금의 모습은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저 삶이 흐르는 곳으로 '어쩌다 보니' 배를 타고 떠내려가다 문득 정박하게 된 곳이라 할 수 있었다. 우리 대다수가 직업을 가질 때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러니 어쩌면 켈러의 방황이나 고민 혹은 욕망에서 우리의 닮은 꼴을 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지도 모른다. 누구나 한 번쯤 지금의 삶이 뭔가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억지로 입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지 않은가? 마치 한참 지도를 보며 길을 찾아가다 틀린 지도를 갖고 왔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 아이처럼 실은 내가 가고자 했던 곳과 전혀 다른 곳으로 왔다고 느낄 때가. 그런 기분을 가져본 이라면 켈러에게 많이 공감할 지도 모른다. 로런스 블록은 켈러를 평범한 사내처럼 보이도록 묘사하고 있고 켈러의 이야기는 갑자기 삶이 공허를 느껴버린 중년의 이야기로 읽어도 그리 다르지 않으니까. 


 이제 매튜 스커더 탐정 시리즈로 우리에게도 제법 이름을 떨친 로런스 블록이 98년에 불현듯 내놓은 ‘살인해드립니다’는 그런 켈러의 이야기다. 장편은 아니고 열 개의 에피소드가 들어 있는 단편집이다. 이 작품은 장르상 하드보일드로 분류된다. 그러고 보니 켈러의 이야기들의 뿌리가 되는 하드보일드도 실은 공허함의 발견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하드보일드는 더쉴 해미트의 '말타의 매'에서 시작되었는데 거기서 해미트는 주인공 샘 스페이드의 입을 통해 자신의 하드보일드가 어디로 향해 갈 것인지 일러 준 적이 있다. 샘 스페이드는 자신이 언젠가 맡았던 한 사나이의 실종 사건을 설명하는데 알고보니 그 사나이는 실종된 것이 아니라 어느 날 길을 가다 위에서 떨어지는 벽돌에 목숨을 잃을뻔한 일을 겪고는 그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 자신의 삶이 공허하다는 것을 깨닫고 모든 것을 버리고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떠나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해미트는 현대인의 영혼을 좀먹는 공허와 불안은 다름아닌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영역의 협소에서 초래된다고 하면서 하드보일드를 통해 무엇보다 한 개인의 주체적인 선택과 결단을 강조해 갈 것이라 천명했다. 세상의 논리 보다는 자신만의 논리로 움직이는 샘 스페이드는 이것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캐릭터였다. 그 뒤를 이은 필립 말로와 루 아처에서도 그건 변함없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살인해드립니다'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열 개의 에피스도가 모여있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일관되게 관통하는 주제가 없는 것은 아닌데 그 주제가 바로 '선택'인 것이다. 열 개의 에피스도를 주의 깊게 읽다보면 켈리를 중심으로 하여 이 선택이 처음의 '제로'에서 점점 더 그 영역을 넓혀가는 것을 보게 된다. 사실 켈러는 첫 에피소드인 '솔저라고 부르면 대답함'에서 이미 자신이 정착할만한 곳을 찾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켈러는 주어진 임무에 충실하여, 살인을 그만두고 그의 정착을 내심 기대하고 있던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데 그러는 켈러의 결정이 너무도 갑작스러운 지라 결말이 좀 억지스러운 것은 아닐까 생각되기까지 한다. 하지만 좀 더 세세하게 들어가 보면 왜 결말이 이렇게될 수밖에 없는지 이해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로런스 블록이 켈러의 이야기를 통해 정말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지도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로런스 블록이 그 이상향에 켈러를 머무르지 못하게 한 이유, 그것은 켈러에게 아직 아무런 주체적인 선택이 없기 때문이다. 그 곳은 원해서 온 곳이 아니었다. 살인 의뢰를 처리하러 들른 곳이었다. 그런데 제거 대상인 '잉글먼'이란 남자는 정부가 증인 프로그램으로 보호하는 자였다. 그는 정부에 의해 강제로 이름을 바꾸고, 사는 곳을 바꾸고, 삶마저 바꾼 자였다. 켈러에게 완벽하게 이상향으로 보였던 그 곳은 실은 강제성으로 넘치는 곳이었다. 그는 잉걸먼의 바뀐 삶을 보면서 그런 독단성에 끌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상향이지만 개인의 의지는 전적으로 배제된 공간. 이것은 제목에서부터 암시된다. '솔저라고 부르면 대답함'. 이는 그대로 개인의 의지가 전무하다는 것의 표명 아닌가. 사실 개의 이름이 하필이면 군인을 뜻하는 솔저라는 것도 이것을 나타낸다. 군인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존재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겉모습이 아무리 완벽하게 보인다 해도 그 곳은 켈러의 정착지가 될 수 없었다. 그는 단순히 겉모습에 현혹되었을 뿐이다. 그것은 켈러에게 정착의 동기를 강하게 심어준 한 웨이트리스의 결혼 반지가 실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는 사실에서 암시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공허를 발견하는 순간은 동시에 그동안 세상이 내 두 눈에 콩깍지처럼 씌워놓았던 현혹이 벗겨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는 이런 순간이 많다. 아무래도 주인공이 청부살인업자라 그런지 주로 의뢰인의 정체와 살인 의뢰의 진짜 목적이 밝혀질 때 잘 나타난다. 때로 의뢰인은 켈러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며,(어떤 때는 목소리 변조로 성별마저 다를 때가 있다.) 의뢰의 이유도 의뢰인이 밝힌 것과 전혀 다른 것으로 나타날 때가 많다. 그 때마다 켈러는 자신의 의지로 현혹으로 왜곡된 질서를 바로 잡는다. 왜곡과 교정이 접점되어 있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아버지의 사진이다. 어릴 때 켈러의 어머니가 아버지 사진이라고 주었던 군인 사진은 사실 진짜 아버지가 아니었고 사진관에서 진열하기 위해 쓴 장식용 사진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그것으로 뿌리 없는 자신을 자각하고 스스로 뿌리를 내리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가 빨간 알약을 먹고 자신이 속한 세계의 진실을 알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네오가 그랬듯이 우리는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야 비로소 진짜를 찾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공허의 발견은 끝이 아니고 어쩌면 내 삶을 보다 더 진정하게 살기 위한 시작인 지도 모른다. 마치 그것을 말해주기라도 하듯, 결혼반지에 대한 진실을 안 켈러는 자신의 선택으로 바로 대상을 살해한다. 모든 것이 개인의 의지를 압도하고 있는 그 공간에서 유일하게 개인에게 선택할 의지가 있음을 입증하는 행위를 말이다. 때문에 결론이 그렇게 난 것이다. 거기서의 살인은 세상의 현혹에서 벗어난 개인 의지의 자유로운 구현을 의미하고 있다. 의뢰인의 진짜 정체와 목적이 밝혀졌을 때 켈러의 살인이 그러했듯이.


 (비록 로런스 블록은 이 에피소드를 쓸 때만 해도 이것으로 끝낼 생각이었지 이어갈 작정은 아니었다고 해도) 우리는 여기서 열 개의 에피소드 전체를 관통하며 주제에 있어서 대립하고 있는 두 지점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물론 하나는 선택이며 다른 하나는 그 선택을 막는 현혹이다. '살인해드립니다'에서 정말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주인공이 어떻게 대상을 제거하느냐가 아니라 바로 이 현혹과 선택 사이에서 일어나는 싸움에 있는 것이다.


 에피소드가 나아갈수록 켈러의 선택 강도도 높아져 간다. 그저 의뢰 대로 대상만 착실하게 제거했던 그가 이제는 자기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방향에 따라 제거 대상이나 제거를 할지 말지까지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럴수록 현혹도 교묘해져 간다. 마치 어릴 때 오락실에서 했던 슈팅 게임에서 한 라운드의 보스를 물리치면 뒤의 라운드에서 더 강한 보스가 나오는 것과 같다. 이를테면 제거 대상을 임의적으로 선택하여 보다 주체적인 된 켈러에 뒤이어 나오는 세번째 에피소드인 '켈러의 상담 치료'에서는 세상의 현혹이 아버지의 모습으로 나와 이렇게 말한다. (물론 진짜 아버지는 아니다. 켈러는 자신의 친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다만 이 에피소드에서 삶의 의미를 묻는 켈러에게 그 의미를 찾도록 하는 상담 치료사가 아버지와 비슷한 위치에 거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정신분석가가 실은 저항하는 개인에게 아버지의 질서를 다시금 강요하는 자라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안티 오디이푸스'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이며 이 때 상담 치료사는 사회 자체를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우리가 인생의 모든 것을 선택했다고 보는 형이상학 이론이 있어요. 사실은 태어난 부모도 우리가 선택했고,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우리의 의지가 반영된 일이라는 거예요. 따라서 사고도 우연도 없다는 겁니다. (p. 106 ~ 107)


 마치 요즘 유행하는 아들러의 논지를 짧게 요약한 것만 같은 이런 말로 아버지이자 사회 자체이기도 한 상담 치료사는 켈러에게 실은 그 어떤 것도 강요는 없었으며 모든 것이 다 네가 선택한 것이라고 현혹한다. 켈러는 이 말에 혹하며, 그를 진심으로 믿고 갱생의 기회를 가져보려 하지만 결국 그 마음은 배반당하고 만다. 여기서 배반의 계기가 실로 의미심장한데 그것은 하나의 개 때문이었고 또 그 개가 매개가 된 불륜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개의 이름이 '넬슨'이다. 유명한 영국의 해군 제독의 이름인 것이다. 처음 나온 개의 이름은 '솔저'였다. 솔저와 넬슨 모두 군인인 것은 같다. 하지만 솔저는 명령을 받는 자고, 넬슨은 명령을 내리는 자다. 개의 이름이 솔저에서 넬슨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그대로 선택으로 나타나는 켈러 개인의 자유 의지가 그만큼 더 강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상담 치료사의 아내를 유혹한다.(물론 유혹할 당시에는 켈러가 이 사실을 몰랐다.) 이 에피소드가 주로 정신 분석을 소재로 하고 있고 그것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오디이푸스 컴플렉스임을 생각한다면(아디사시피 정신분석학에서 이 '오디이푸스 컴플렉스'는 개인을 사회에 종속시키는 강력한 기제(機制)로 모든 사회화의 기반이다.) 아버지 역할을 하고 있는 상담 치료사의 아내를 유혹했다는 것은 그대로 오디이푸스 컴플렉스의 중대한 위반이 된다. 이것은 그대로 사회의 중대한 기반을 허무는 행위이기에 동시에 가장 강력한 개인의 저항 행위이기도 하다. 로런스 블록은 이 정도로 커다란 반항이었기 때문에 개의 이름을 하필이면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군인 중의 하나인 '넬슨'으로 지었는 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넬슨이라는 개는 개인의 의지가 충만한 주체성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로런스 블록은 그 개를 상담치료사를 죽인 뒤에 가지도록 한다. 억압하는 사회가 붕괴되어 비로소 자신의 온전한 주체성을 되찾은 것과 유사하게 말이다. 뒤이은 에피소드에서 개는 켈러가 가장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대상이 되고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유일한 대상이 된다.


 이제 켈러의 마음이 향하는 곳은 저 바깥이 아니라 내부로 향한다. 어딘가에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이상향이 아니라 자기가 있는 그곳에서 자신의 삶을 바꿔보려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동시에 일에 있어서도 주체성을 발휘하는 영역이 점점 더 확장되어 간다. 그는 이제 단순한 살인 기계가 아니다. 그는 정보를 모으고 때로는 대상을 직접 만나기까지 하면서 탐문하며 스스로의 추리를 통해 사회가 강요한 질서가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기에 옳다고 여기는 질서를 만들어 나간다. 그 지점에서 그의 암살 여정은 일종의 영토 전쟁이다. 세상에 맞서 자신의 영토를 하나하나 확장해 나가는 싸움인 것이다. 그럴수록 세상은 점점 더 허약한 모습을 보인다. 켈러 세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그래서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실제 아버지라고도 할 만한 화이트 플레인스의 노인이 제거 대상을 혼동하거나 쌍방 의뢰를 받는 등 해서는 안 될 실수를 자주 하는 것이다. 물론 그 실수를 바로 잡는 것은 언제나 켈러다. 그만큼 그는 내적으로 성장한다.


 마지막에 켈러가 열의를 담아 하게 되는 우표수집은 거기에 대한 결정적 증거라고 해도 무방하다. 처음에 그는 영원히 안주할 곳을 찾으려 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세상에 수집되려는 욕망이었다. 거기서 주체는 세상이었고 그는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는 세계의 우표를 모은다. 그가 스스로 선별한 시기와 대상에 따라 세계가 수집되는 것이다. 관계는 전복되었다. 이만큼 강고해진 그의 주체성을 잘 드러내는 비유도 또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우표가 된 세계엔 다른 의미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더 이상 개인에게 현혹의 힘을 뻗칠 수 없는 민낯의 세계를 나타내는 의미도 있는 것이다. 작고 핀셋으로 조심스럽게 집어야만 하는 얇은 우표는 그대로 내가 공허에 눈을 뜨고 내 자신의 의지를 믿고 써보리라 결행한 순간 현혹의 힘을 잃어버린 세계가 어느정도까지 허약해질 수 있는지를 암시한다. 이제 더이상 세계는 개인에게 아무런 불안도 고통도 주지 못한다. 이런 면에서 켈러의 다음과 같은 마지막 대사는 얼마나 의미심장한가.


 "이야기를 들어주실 필요는 없어요. 이미 행복하니까." (p. 444)


 '살인해드립니다'는 살인청부업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근저엔 우리도 마주할 수 있는 삶의 공허에 눈을 뜬다는 것의 의미와 그랬을 경우 놓이게 되는 세상의 현혹과 개인의 선택 사이에서의 갈등을 담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비록 소재야 덥석 손잡아 주기 어려운 것이었다고 해도 충분한 공감과 함께 계속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어쩌면 내가 이 소설을 이렇게 보게 된 것이 최근 내가 켈러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었기 때문인 지도 모르겠다. 물론 내가 살인청부업자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 역시 요즘 자꾸만 알 수 없는 허무에 젖어 어디로 가야 할 지를 많이 생각하게 되고 그로 인해 불안한 적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다 켈러를 만났고 그에게서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나는 마치 친구의 고백을 읽듯 그의 이야기를 살갑게 읽었고 그의 고민에 내 고민을 투영해 나갔다. 어쩌면 여기서 지금까지 내가 쓴 모든 말은 그토록 안정과 희망을 갈망했던 켈러만큼이나 절박했던 내 마음이 걸러낸 언어일 지도 모르겠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켈러가 보여준 길을 내가 가야 할 길로 믿고 싶다. 공허의 깊은 늪에 빠진 지금, 거기서 무력감과 불안만 길어내기 보다는 이 순간이 실은 보다 더 제대로 내 삶을 정비할 순간이라 생각하면서 중단없는 모색과 꾸준한 노력을 향한 의지를 돋우고 싶다. 드라마 '송곳'에서 말하길, 싸움은 직접 맞부딪쳐서 자신과 상대가 가진 힘과 그릇의 크기를 가늠하는 기회라고 했다. 그와 똑같이 나도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하고 앞이 보이지 않지만 켈러를 믿고 두터운 연막처럼 무럭무럭 나를 덮쳐오는 세계라는 것에 부딪쳐 볼 생각을 한다. 지금 내 불안을 초래하는 세상의 힘이 실은 현혹에 불과하다는 켈러의 말을 뇌리에 새기면서 말이다. 정말로 힘껏 부딪혀본다면 지금은 커다랗게만 보이는 세상이라는 것이 한 장의 우표처럼 작고 약한 존재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될 지도 모르겠다. 부디 켈러의 마지막 말을 나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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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스트레인저
세라 워터스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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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핑거스미스'의 집이 생각났다.

 여주인공 모드를 가두고 있던 집. 그녀는 거기서 삼촌에게 속박당한 채, 삼촌의 명령으로 자신이 혐오해마지 않는 음란 서적을 대필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집은 감옥이었고 탈출은 염원이었다. 얼른 '리틀 스트레인저'의 캐럴라인과 겹쳐진다. 그녀 역시 자신이 사는 헌드레즈홀을 감옥이라 여기고 있으며 하루라도 빨리 거기서 자유롭게 되기를 갈구한다. 그녀가 페러데이를 사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가 자신을 거기서 데리고 나가주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페러데이는 '핑거스미스'의 사기꾼을 닮았다. 작품에선 그를 '젠틀맨'이라 부른다. 물론 그에게 있어 '젠틀은 어디까지나 여자를 유혹하기 위한 덫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  배를 불리기 위해서라면 어떤 파렴치한 짓이라도 하는 악인 중의 악인, 그가 바로 젠틀맨이다.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매개로 여자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페러데이도 젠틀맨과 비슷하다. 물론 페러데이는 자신의 사랑을 순수하다 생각하지만 캐럴라인이 헌드레즈홀의 딸이 아니었다면 그처럼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소설은 캐럴라인이 그다지 끌릴만한 인물이 아님을 누누히 강조하고 있으니까. 페러데이는 오래도록 선망의 대상이었던 헌드레즈홀에서 살 수 있기에 캐럴라인을 원했던 게 틀림없다. 한 예로 캐럴라인이 헌드레즈홀이 지긋지긋하다며 빨리 떠나버리고 싶다고 말하자 페러데이는 놀라며 그녀를 말린다. 왜 그러는 지 자신은 도통 이해할 수 없다고 하면서. 그건 물론 자신을 '헌드레즈홀'과 깊은 인연을 맺게 해 준, 베키에게도 마찬가지다. 베키는 그 저택의 유일한 하녀다. 그녀는 거기서 벗어나려고 꾀병을 부렸고 그러다 임시로 불려온 페러데이에게 그사실을 간파당한다. 페러데이가 왜 꾀병을 부리는지 이유를 묻자 그녀는 저택이 정말 싫다고 대답하고 페러데이는 역시나 베키의 그런 마음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베키는 '핑거스미스'의 '수'를 닮았다. 젠틀맨을 도와 모드를 유혹하기 위해 저택의 하녀로 들어갔던 여자. 베키가 헌드레즈홀의 하녀로 일하게 된 것도 남자 때문이었다. 바로 그녀의 아버지가 억지로 거기로 데려다 놓은 것이다. 베키는 원래 공장 노동자가 되길 원했다. 하녀 같은 건 시대에 뒤떨어진, 촌스런 직업이라 생각했으니까. 이렇게 자꾸만 은근슬쩍 겹치니까 '리틀 스트레인저'를 '핑거스미스' 옆에 놓고 싶어진다. 비교를 위해서. 물론 둘은 시대적 배경이 다르다. '핑거스미스'는 빅토리아 시대고, '리틀 스트레인저'는 1948년이니까. 그렇지만 어떤 연속성이 느껴진다. 바로 집에 관해서다.


 '핑거스미스'에서 집은 군림의 존재였다.

 그것은 여성 위에 군림했다. 항상 남성이 지배자의 자리에 앉아 있었던 그 집은 그래서 그대로 가부장제의 구현체였다. 하지만 '리틀 스트레인저'에서 집은 더이상 군림의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쪼그라들어 있다. 페러데이는 몇 십년만에 다시 찾은 헌드레즈홀이 목책으로 된 울타리로 포위되어 있음을 본다. 바로 중간 계급들을 위한 집을 짓느라 부지 확보차 세워진 울타리였다. 그렇게 헌드레즈홀은 자기보다 아래 계급들에 의해 포위되어 있었다. 쇠락의 징후는 저택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기 살고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가문의 장남인 로더릭은 전쟁에서 입은 부상과 정신적 후유증으로 상당히 쇠약해져 있었다. 에어즈 부인 역시도 심신이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날이 갈수록 어려워져만 가는 헌드레즈홀을 꾸려가기엔 몹시 힘겨워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헌드레즈홀에게 닥쳐오는 어려움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기만 한다. 집은 더이상 견고하지 못했다. 그것은 계속 부식되고 있었다.


 이러한 집의 변화는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그것은 물론 외부 상황이다. 둘 사이에 있었던 거대한 전쟁. 바로 세계 2차 대전이다. 본디 전쟁은 많은 것을 바꿔 놓는다. 영국에게도 변화가 찾아왔다. 그것도 엄청난 변화가. 정치적 환경이 급변한 것이다. 1881년에 창당한 노동당은 단 한 번도 보수당을 이겨본 적이 없다. 그들은 늘 2인자였다. 하지만 전쟁은 그들의 운명을 변화시켰다. 전쟁이 끝난 1945년. 전후에 처음으로 치른 총선거에서 노동당은 놀랍게도 보수당에게 압승했다. 과반이 넘는 의석을 차지한 것이다. 이제 노동당은 단독으로 내각을 수립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말은 보수당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정책을 만들고 집행도 가능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바야흐로 흔한 말로 좌파 정권이 들어선 것이다. 지금의 내겐 얼마나 부러운 상황인지.


 이런 상황의 변화는 예전의 계급 질서를 크게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직격탄은 젠트리 계급에게 가장 많이 떨어졌다. '리틀 스트레인저'에서도 한 인물의 입을 빌려 공공연히 언급하지 않았던가. 젠트리 계급 중 열에 여덟은 하루가 멀다하고 사라져가고 있다고. 헌드레즈홀의 쇠락은 그런 현실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최근에는 소문도 좀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헌드레즈홀의 외관 때문에 사람들이 흥미를 잃었을 것이다. 당연히 이제 정원은 도저히 손쓸 수 없을 만큼 수풀이 우거졌고, 테라스는 잡초에 가려 보이지도 않았다. 아이들이 벽에 낙서를 해대고 창문에 돌을 던지는 바람에 헌드레즈홀은 혼돈 한 가운데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상처입고 피폐한 짐승처럼 보였다.(p. 705)


이것은 어린 시절의 그를 매혹시켰던 저택의 모습과 얼마나 다른가? 하지만 그 때조차 저택은 그에게 감히 범접하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는 내부조차 들어가지 못했다. 그런데 세라 워터스는 어린 그를 정말로 매혹시켰던 것이 무엇이었나를 아무렇지도 않게 슬쩍 드러낸다. 이렇게.


나는 대체로 어른 말을 잘 듣는 아이였다. 그러나 그날만큼은 아니었다. (...) 메이드가 살며시 복도 한쪽으로 사라지자 나는 대담하게 그 반대쪽으로 몇 걸음 내디뎠다. 엄청난 전율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단순히 몰래 침입했기 때문이 아니라 집 자체에 대한 전율이었다.(p. 13)


금기의 위반. 고착된 계급이 부여한 규율의 무시. 그것을 감행하게 했던 공간이기에 그는 헌드레즈홀에 매혹된 것이었다. 즉 그가 소설에서 그토록이나 저택을 선망하는 이유는 그곳이 자신을 뛰어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는 이보다 조금 전에 나타나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거꾸로 보강된다.


그때 훨씬 더 신나는 일이 벌어졌다. 아치형 통로 벽 높은 곳에 전선과 종들이 어지럽게 걸린 배선함에서 종이 하나 울렸다. 위층의 호출이었다. 호출받은 팔러메이드를 따라간 나는 저택 후미와 본관을 분리하는 성긴 초록색 모직 커튼 사이로 집안을 훔쳐볼 수 있었다.(p.12~13)


 이 장면은 뒤이어 나오는 페러데이의 금기 위반에 대한 선망을 더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나중에 페러데이의 어머니에 관한 사실이 하나 밝혀지는데 페러데이의 어머니도 바로 이 저택에서 유모로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호출 종이 울리면 무조건 거기로 가야했다. 따라서 호출하는 종은 엄마의 순종을 강요하는 고정된 계급의 상징이며 그 어머니는 그런 계급에 종속되어버린 존재라 할 수 있었다. 저택에서 어머니의 위치가 하필이면 유모가 된 것도 이런 계급 상황을 재생산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며 이것은 저택에서 나온 엄마가 계속 유산하는 바람에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했다는 것으로 더욱 부각된다. 호출 종에 대해서는 소설 중반에 유령이라 추정되는 것들이 호출 종에 혼선을 일으켜 그 종을 더이상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명확화 한다. 이런 면에서 넘어선 안 될 선 안쪽으로 들이민 페러데이의 한 발이 가지는 의미는 엄마의 처지와 대비되어 더욱 선명해지며 이렇게 하여 페러데이는 전후에 달라진 계급의 위치를 약호화하는 역할을 떠맡는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저택에서 도토리 조각 하나를 몰래 가지고 온다. 아마도 이 도토리는 캐롤라인에 대한 복선일 것이다. 끝내 이 도토리는 현 계급 관계에 포섭되어버린 엄마에게 빼앗겨 재가 되어버리는데 이 역시 캐롤라인과의 암울한 결말을 암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소설에서 유령을 가리키고 있는 '리틀 스트레인저'의 존재는 다름아니라 막을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을 나타내는 게 아닌가 한다 즉 경계의 침범이요, 무시 혹은 와해시키는 모든 것들이다. 제목이 그런 존재를 뜻하는 '폴터가이스트'가 아니라 굳이 '리틀 스트레인저'가 된 것은 세라 워터스가 여기에 페러데이도 포함시키고 싶었기 때문인 것 같다. 헌드레즈홀의 벽에서 도토리를 훔친 어린 시절의 페러데이 역시도 '리틀 스트레인저'이기 때문이다. 그가 냈던 집의 균열을 현재의 유령들이 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령들은 페러데이의 분신 혹은 계승자라고 할 수 있다. 즉 유령은 페러데이 욕망이자 더  나아가선 젠트리 계급을 굴복시켰던 계급 평등 욕망의 대변자들인 것이다. 이들은 헌드레즈홀에서 오랜만에 열린 무도회처럼 저택이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려 할 때마다 나타나서는 훼방을 놓고, 존재를 지속시키려 애쓰는 로더릭을 정신적 공황 상태로 몰고간다. 그 유령들은 현실에 있는 카운티 의회와 조응한다. 물질적으로는 카운티 의회가 그들을 압박하고 정신적으로는 유령들이 그들을 두려움과 신경쇠약으로 몰아간다. 이제 더 이상 혈통이나 가문이 아무 것도 보장해 주지 못하는 시간이 점점 임박해 온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세라 워터스의 다섯 번째 소설 '리틀 스트레인저'는 2차 대전 후에 급격하게 일어난 계급 변화를 고딕 스타일로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페러데이와 캐럴라인의 로맨스는 그런 면에서 계급 사이에 작용하는 역학 관계의 변화로 읽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랬기에 이 소설은 참 흥미로웠다. 뭔가 세라 워터스가 담고자 하는 지평이 보다 확대되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빅토리아 시대 3부작은 어디까지나 고립된 여성의 은밀한 욕망이라는 개인적 지평 위에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것을 넘어 사회적 변화를 세심하게 포착하려 하는 것이다. '리틀 스트레인저'와 비슷하게 고딕 스타일로 된 '끌림'에 견주어 본다면 변화는 더욱 뚜렷해지는 것 같다. 이 같은 변화, 왜 이렇게 하는 것인지 그 동기가 내겐 참 흥미롭고 궁금한데 그래서 '핑거스미스'와 '리틀 스트레인저' 사이에 존재하는 '나이트 워치'가 정말 읽고 싶다. 본격적인 변화는 '나이트 워치'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 작품 역시 '리틀 스트레인저'처럼 전후의 40년대 시간을 다룬다. 그녀가 왜 이 시대에 천착하는지 그 진짜 이유는 바로 거기서 알 수 있을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순서대로 읽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그랬다면 '리틀 스트레인저'를 더욱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결국 세라 워터스의 이야기는 타자를 중심으로 주체가 새로이 형성되는 것임을 '리틀 스트레인저'로 깨닫게 되었다. 얼른, 2014년의 '페잉 게스트'까지 나와서 타자의 현대적 연대기를 보다 완전체로 경험하고 싶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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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라이징 레드 라이징
피어스 브라운 지음, 이원열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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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어스 브라운의 2014년작 , '레드 라이징'은 레드 라이징 삼부작의 첫 권이다. 인류가 태양계의 다른 혹성들을 식민지로 만든 지 700년 정도 지난 시점의 이야기로 SF다. 공간적 배경은 화성. 하지만 '마션' 보다는 화성의 광산을 다루고 있는 영화  '아웃랜드'에 더 가깝다.



 '레드 라이징'이란 제목을 서투르게 번역하자면 '봉기하는 레드'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한다. 제목에 왜 '레드'가 들어가냐면 이 시기 지구는 계급에 따라 색깔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신라에서는 관리들이 성골이냐 진골이냐 혹은 6두품이냐에 따라 서로 다른 색깔의 옷을 입었다고 한다. 그것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다스리는 지배 계급은 '골드'라 불리고, 골드의 곁에서 치안을 책임지는 이들은 '그레이'라 불리며 골드에게 신체적 혹은 정신적으로 위안을 주는 이들은 '핑크'라 불린다. 그리고 그들의 가장 밑바닥, 그들이 호위호식 할 수 있도록 죽을 때까지 저임금으로 노동력을 제공해야 하는 이들을 '레드'라 칭한다. 레드는 말 그대로 노예다. 가장 힘들고 가장 위험한 작업은 모조리 레드 차지이다. 소설은 그런 세상이다.


 이런 세계가 읽는 동안 내게는 꽤나 피부에 와 닿았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도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 우스개 소리로 말한 '수저계급론'. 태어날 때 부터 누구는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고 또 누구는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며 또 누구는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다. 이젠 이 말을 들으면서 웃을 수 없을 것 같다. 그야말로 우리의 적나라한 현실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레드 라이징'의 세계는 이걸 좀 극단화시켰다 뿐이지 우리의 세계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이대로 가다간 조만간 진짜 그렇게 될 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쩌면 만사를 제쳐두고 읽어햐 하는 책이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흙수저인 대다수의 우리들은...


 주인공은 대로우. 나이는 십대. 그는 '레드'다. 화성의 지하 광산에서 골드에게 필요한 자원을 캐는 일을 한다. 아주 고되고 위험한 노동이다. 주어지는 임금은 쥐꼬리 십 분의 일 정도. 매일 먹을 빵조차 가지고 있기 곤란하고 설탕은 어마어마한 사치품이다. 과일? 그건 전설에나 존재한다. 아버지는 레드의 처지에 반발해 저항했다. 그러다 체포되었고 교수형을 당했다. '레드'에게 교수형은 방식이 좀 다르다. 집행관이 하지 않고 가족들이 한다. 자녀나 부모 그리고 형제 혹은 자매가 스스로 교수형 당하는 이의 발을 끌어내리는 것이다. 대로우도 그 일을 했다. 그 때 잡았던 아버지 발의 감촉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저항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에겐 '이오'란 아내가 있기 때문이다. 그녀도 레드다, 이오는 노래를 부른다. 레드에겐 금지된 노래를. 그 노래엔 이오의 꿈이 담겨 있다.


 "그냥  '어떤 꿈'이 아니야, 대로우. 나는 내 아이들이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날 거라는 꿈을 위해 살아. 내 아이들이 자기가 원하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거라는 꿈. 아이들이 자기 아버지가 준 땅을 가지게 될 거라는 꿈."(p. 69)


 그 꿈을 보여주기 위해 이오는 대로우에게 밤하늘의 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별을 보고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로 이오는 교수형을 당한다. 그녀는 죽기 직전 이 한 마디를 했다.


 "사슬을 끊어요."(p. 90)


 대로우는 끊었다. 작은 것에 만족하고 안정만 추구하는 삶을, 이전에는 사슬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레드'의 삶을 끊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 결심을 이오의 시체를 묶고 있던 사슬을 끊어 끌어내리는 것으로 행동에 옮겼다. 교수형 당한 자의 시체를 멋대로 끌어내리는 자도 교수형이다. 대로우는 죽는다. 그리고 다시 태어난다. 이전부터 이 체제에 저항하고 있던 '아르고스의 아들들'에 의해.


 그들은 대로우를 골드로 만들 것이라 한다. 골드가 되어 힘을 가진 다음 그들의 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도록. 이오의 복수를 원하는 대로우는 쾌히 응한다. 그렇게 '레드 라이징'으로 가는 발걸음이 떼어졌다.


 하지만 골드가 된다고 해서 힘이 그저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커다란 힘을 가지기 위해선 그것을 받을 자격이 된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해 보여야 했다.


 "세 종류의 사람이 졸업해. 흉터를 입은 비할 데 없는 자, 졸업생, 치욕을 당한 자. 비할 데 없는 자들은 사회에서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어. 졸업생도 올라갈 수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비교적 제한되어 있고, 졸업생은 반드시 흉터를 얻어야 해. 치욕을 당한 자는 명왕성 같은 멀고 힘든 식민지로 가서 지구화의 첫 몇 년을 감독해야 해."

 "어떻게 하면 비할 데 없는 자가 되죠?"

 "랭킹 시스템이 있는 것 같아. 아마 경쟁을 하겠지. 나도 몰라. 하지만 골드는 정복을 기반으로 하는 종족들이야. 경쟁에 정복이 포함될 법 하지."(p. 199)


 어디든 경쟁이다. 골드도 예외는 아니다. 정복이 골드의 속성인 것을 보니 작가는 아마도 '로마'를 모델로 레드 라이징의 세계를 설계한 것 같다. 그렇지만 랭킹 시스템은 스파르타의 것을 가져왔다. 스파르타도 아이들은 맹수가 드글거리는 계곡에 보내어져 거기서 생존하는 것으로 일원의 자격이 있음을 인정받았다. 골드들도 그렇다. 졸업을 앞둔 이들은 화성의 매러디스 계곡으로 가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상대 골드들을 정복하여 승자가 되어야 한다. 이 승자가 바로 '비할 데 없는 자'이다. 이제 대로우는 마르스 하우스에 소속되어 아폴로, 미네르바, 플푸토, 머큐리, 다이아나, 세레스, 바커스, 주노 하우스들과 싸워야 한다. 이야기의 중후반은 모두 여기에 할애되어 있다.


 '레드 라이징'을 읽다보면 이거 어디서 봤는데 하는 설정이 많다. 일단 대로우가 자신의 육체를 완전히 바꿔 골드가 되는 과정은 에단 호크 주연의 영화 '가타카'가 떠오르고 단 하나의 승자가 되기 위해 겨루는 장면은 이게 집단 간의 전투이고 전략을 쓰면서 이뤄지기 때문에 오슨 스콧 가드의 '엔더의 게임'이 연상된다. 거기다 각 하우스마다 감독관이 프록터가 있어 일종의 하우스 스폰서가 되는데 그것은 또 '헝거게임'과 비슷하다. 이런 식으로 소설은 우리들에게 익숙한 설정을 여기저기 따오고 있는데 그렇다고 식상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것이 바로 작가 피어스 브라운의 역량이 아닌가 한다. 익숙한 재료도 조리법에 따라서 처음 맛보는 맛을 낼 때가 있는데 바로 그런 것을 작가가 여기서 하고 있는 것 같다. 서스펜스를 바탕으로 배치의 묘미를 살리고 캐릭터들간의 갈등과 대결 구도를 적절하게 가미하는 등 자기 것으로 만드는 재주가 능수능란하다. 분위기도 진행에 따라 일변한다. 이오의 죽음과 더불어 대로우가 혁명을 각성하게 되는 초반은 절절하고 본격적으로 하우스에 소속되어 최고의 골드가 되기 위해 싸우는 부분은 긴장이 넘친다. 거기다 프록터마저 가담한 음모까지 펼쳐져 더욱 페이지를 빨리 넘기게 된다.


 분명 '레드 라이징'은 엔터테인먼트 적으로 좋은 작품이다. 하지만 주는 것은 결코 재미만이 아니다. 이 작품은 점점 수저계급화 되어가는 현세계의 단면을 극명하게 재현하고 있으며 거기서 인간답게 사는 것은 어떤 것인가를 질기게 쫓고 있다. 사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을 때는 인간답게 사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포기해야 할 것이 적기에 순수하게 옳은 것만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가진 권력이 커지고 보다 많은 이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휘두를 수 있게 되면 배덕의 유혹도 그만큼 커지게 마련이다. 룰은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만 존재하고 타인은 그저 자신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게 보는 때가 오는 것이다. 무엇보다 최고의 권력자 중의 하나인 총독 네로가 그것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래도 대로우는 그 유혹을 뿌리치려 한다. 이오의 꿈을 기억하려 한다. 그 유혹은 이오의 꿈을 부수는 것이므로. 그래서 머스탱이 전쟁에 진 아이들을 노예로 만들자고 했을 때 이렇게 말하면서 거부한다.


 "우리는 이보다는 나은 사람이어야 하잖아. 비할 데 없는 자들이라면 그래야 하는 것 아니야. 더 약한 컬러들을 노예로 만들려는 충동은 초월해야지."(p. 520)


 그러나 유혹도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대로우가 더 큰 자리에 오르자마자 더욱 더 커다란 유혹을 해 오는 것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속삭인다. 너만 생각하라고, 괴물이 되라고.


 과연 점점 커져만 가는 유혹 안에서 대로우는 이오의 꿈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앞으로 이어질 레드 라이징 속편을 바라보는 내 관점이 될 것 같다. 자신의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한 분투. '레드 라이징'에서 '레드'가 진정 가리키는 것은 바로 '인간'이 아닐 지. 왜냐하면 대로우 앞에 서 있는 세계란 골드부터 레드까지 모든 것을 오로지 경쟁으로만 관철하는, 그리하여 사람들을 이기적 탐욕 밖에 없는 괴물이 되거나 자아 없이 상위 권력에 굴복하는 기계로 만드는 곳이기 때문이다. 모든 이들을 비인간화 시키는 세계. 그러니 그것의 전복은 동시에 인간다움의 회복이 될 수밖에 없을 터. 그런데 그러한 대로우의 세계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기도 하다. 여기저기에서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파렴치한 짓도 서슴지 않는 괴물들이 하루가 멀다 않고 마구 나타나고 생각하는 것을 관두고 그저 거수기가 되어버린 자들조차 심심치 않게 보이는 요즘이 아니던가. 괴물과 사람을 놓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깊어만 간다. 사정이 이러하니 2권인 'GOLDEN SON'이 이미 2015년 1월에 발간되었다고 하는데 어서 번역되어 나와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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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3 0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15 0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