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중석 스릴러 클럽 32
조힐 지음, 박현주 옮김 / 비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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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옷! 굉장하다! 이 책의 초반부터 저는 이미 이런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습니다. 사실 조 힐의 작품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가 그 유명한, 그 누구도 미국 장르 소설계의 거목임을 거부하지 못하는 스티븐 킹의 아들이라는 건 알았지만 솔직히 아버지 덕분에 유명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아예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이 작품을 시작할 때만 해도 잘 한 선택일까 반신반의 하긴 했었죠. 그런데 왠 걸, 명백히 카프카의 단편 '변신'을 패러디한 것으로 보이는 도입부 부터 어, 이거 참신한데 중얼거리게 만들더니 '변신'에서 주인공 그레고리 잠자가 벌레로 변했듯이 주인공 머리에 정말 악마처럼 뿔이 돋아나고 그 때문에 여자친구가 완전히 직설적으로 자신의 내밀한 속마음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장면에서 이미 저는 오래만에 물건 하나 만났다는 생각으로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스티븐 킹의 아들이라서 그런지 정말 전성기 때 스티븐 킹 소설을 읽는 듯 하더군요. 악마라는 명백한 허구의 사실을 일상적인 일들로 자연스레 여기게끔 설득력있게 묘사하는 것도 그렇고 과거와 현재를 오고가며 현재 벌어지는 이야기의 갈등이 어떻게 비롯되었는지와 주인공이 알지 못했던 비밀들을 하나 둘 풀어놓아 흥미와 긴장을 끝까지 지속시키는 것도 비슷했습니다. 특히나 가장 많이 생각났던 건, 스티븐 킹의 '캐슬록의 비밀' 이었네요.


 아무튼 이 작품으로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조 힐은 분명 아버지로 부터 우등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말이죠. 물론 외모가 우등 유전자라는 뜻은 아니죠.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솜씨, 인간이 가진 상식을 살짝 비트는 것만 가지고도 풍부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상상력, 고루한 소재도 새로운 느낌이 날 수 있도록 빚어내는 능력. 그런 것에 있어서 UNCANNY 할 정도로 잘 물려받았다는 것입니다. 조 힐의 이번 작품 '뿔'은 그것을 입증하는 아주 좋은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뿔(THE HORNS)'은 어느 날 갑자기 자고 일어났더니 머리에 두 개의 뿔이 나버린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거울을 보면 영락없이 악마 같지만 사실 처음엔 그저 악성 종양이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뿔이 생기자마자 이상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자신의 여자 친구 글레나를 비롯해 만나는 사람마다 그가 아무리 처음 보는 사람이라 해도 자신의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평소에는 사람들에게 내보일 수 없는 아주 은밀한 어두운 욕망까지 다 말이죠. 그에겐 그 누구도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마치 고해성사를 받는 신부 앞에 선 것 처럼 오로지 진실만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욕망이 다 추합니다. 아름다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남이야 어찌되든 상관없이 자기만 잘되고 편하고 보려는 이기적인 욕망들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주인공 이그나티우스 마틴 페리시는 알게됩니다. 자기가 지금껏 살고 있는 세상이 바로 지옥에 다름 아니었다는 것을... 아니나 다를까 그렇게 이그가 세상의 진실을 알아가는 첫번째 장의 제목 역시도 '지옥'입니다.


 그런데 안 그래도 이그에게는 세상이 지옥이었습니다. 몇 년 전 이 세상에서 유일한 사랑이었던 여자 친구가 처참하게 살해당했고 그 누명을 자기가 뒤집어썼기 때문입니다. 집안이 그대로 꽤나 잘나가는지라 어떻게든 형벌을 받는 건 피했지만 세상의 시선은 여전히 따갑습니다. 사랑을 그렇게 잃어버린 상처만 해도 스스로에게 버거운데 거기다 세간의 시선마저 의혹 일변도인지라 견디지 못했던 그는 스스로 나락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는 그래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그가 그녀를 죽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그렇게 죽도록 내버려둔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죄책감이 세상을 지옥으로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세상은 깨끗한데 자기만 더러운 죄를 짊어지고 살아간다는 자각에서 느끼는 지옥이었습니다. 그런데 뿔이 돋아난 뒤로 그게 완전 뒤집어 집니다. 세상이 선이고 자기가 악한게 아니라 알고보니 세상 자체가 악이고 오히려 선한 건 자기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뿔'은 그런 '전복(SURVERSION)'의 소설입니다.



 


 

 


 

 그러니까 흔히 씨름판에서 보듯 호쾌한 뒤집기와도 같은 작품입니다. 이 소설엔 그런 전복성들이 넘쳐납니다. 지금 말한 주인공 이그의 세상에 대한 인식의 전복은 그들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다른 또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악마'라는 존재의 전복입니다. 앞서 우리의 상식을 약간 비트는 것만으로도 풍부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상상력이란 얘기를 했었죠. 그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조 힐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악마의 모습과 특성을 충실하게 재현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그 앞에 서면 자신의 어두운 욕망을 숨김없이 이야기 하는 것, 그들의 욕망이 통제를 받지 않고 활짝 피어나도록 돕는 것, 그리고 뱀들이 따라오거나 목소리로 유혹하는 것. 이런 건 모두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악마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유발하는 효과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지금까지 악마가 가진 그러한 특성들은 오로지 대상의 파괴를 위해 쓰였습니다. 롤링스톤즈의 '악마를 위한 동정(SYMPATHY FOR THE DEVIL)'이라는 노래 가사에서도 잘 드러나듯 사람들의 영혼과 믿음을 훔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그러한 악마의 특성들은 세상이 감춘 비밀을 드러내고 있는 그대로의 진실된 모습을 드러내게 합니다. 아니 세상 뿐만이 아니라 이그를 파괴시켜버렸던 저 과거의 비극에 숨겨진 진실마저 알게 합니다. 악마의 계교는 어디까지나 거짓에 거짓을 더하는 것이었습니다만 이 소설에서만은 다릅니다. 여기서 악마가 가진 모든 계교는 오로지 진실에 진실을 더하는 것 뿐입니다. 바로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조 힐은 주인공 이그가 점점 악마가 되어가는 과정을 묘하게도 성자가 되어가는 과정과 비슷하게 그립니다. 특히나 이그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오는 뱀의 무리가 인상적인데요. 사실 그 뱀들의 존재는 소설에서 정작 사족에 불과합니다. 이그가 보여주는 능력중 그것만이 아무런 맥락도 효과도 가지지 못합니다. 뱀은 그저 이그를 따라올 뿐입니다. 그 뱀들이 모이고 모여서 뭔가 하는 건 없습니다. 다만 이그가 점점 악마로 완성되어간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것 말고는 말이죠. 바로 여기서 우리는 조 힐이 왜 아무 의미도 없는 뱀 장면을 구태여 반복적으로 묘사하는 것인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독자인 우리들에게 뱀이 하나의 신도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죠. 점점 많은 뱀이 무리지어 이그를 따라오는 것이 그의 악마성이 완성되는 것을 뜻하듯, 예수가 나오는 4복음서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구름처럼 따라다니는 신도의 수가 그의 성인됨을 완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요. 네, 그 뱀은 이그의 그러한 성인됨을 우회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쓰인 것입니다. 그는 악마이지만 조 힐의 소설에서는 성인(SAINT)입니다. 그건 왜 일까요? 이그의 뿔이 적나라하게 드러내었듯이 세상은 오로지 자기만 위하는 이기적 욕망들로 넘쳐나는 지옥인데 오직 악마인 이그만은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고 타자를 위해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이기적인 존재인 악마가 이 소설에서는 가장 이타적인 존재인 것이죠.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이 소설이 가진 가장 커다란 전복성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애마 그렘린이 불에 탄 채 절벽에서 떨어지고 그로 부터 탈출하는 이그의 이야기는 이그가 악마로써 진정한 각성을 하게 되는 계기인 것 같더군요. 해서 그려봤어요 하하^ ^;



  이건 그냥 헛소리가 아닙니다. 조 힐이 작정하고 그것을 지향했다는 것은 주인공의 이름에서 부터 단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인공 이름을 풀 네임으로 다시 한 번 말해볼까요? 그건 '이그나티우스 마틴 페리시' 입니다. 영특하게도 조 힐은 이 이름을 소설의 첫 시작으로 삼아 독자의 관심을 유도합니다. 그건 왜 일까요? 단적으로 바로 이 이름이 이 소설 '뿔'이 말하려는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설의 시작은 카프카의 '변신'에 대한 패러디였습니다만 그 여정은 초대 교회 한 사도의 여정에 대한 오마쥬입니다. 그 사도의 이름이 바로 '이그나티우스' 입니다. 뭐야! 이름만 같은 거 아냐? 하실수도 있는데 저도 처음엔 그런 줄 알았는데 뒤에 나오는 이 '마틴'이란 이름 때문에 더욱 확증하게 되었습니다.       다름 아니라 이 이그나티우스는 로마로 압송되어 사자 먹이가 되어 순교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 시절, 그의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지키다가 결국 황제의 명령으로 안디옥에서 로마로 끌려가 순교당하기 까지, 그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기록의 제목이 바로 이그나티우스의 순교, 즉 'Martydom of Ignatius' 입니다.


 이것으로 확실해지지 않을까요? 주인공 이그의 저 마틴이란 이름이 바로 '순교'를 뜻하는 단어 'MARTYDOM'에서 왔다는 것이 말이죠. 물론 이름의 마지막 부분인 '페리시' 또한 죽음, 특히나 비명횡사를 뜻하는 'Perish'이니 이그나티우스의 비극적 순교를 나타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즉 조 힐은 이 이그의 이야기를 그야말로 '이그나티우스의 순교'를 염두에 두고 거기에 빗대어 써내려 간 것입니다. 악마의 여정이 사실은 가장 죄 없는 자의 순교 여정인 것이죠.(아마 그래서 이그의 힘이 유독 십자가 앞에서는 발휘되지 못하는 것일 겁니다. 이그가 사탄이라서 하나님의 물건 앞에서 무력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 역시도 사실은 아무런 죄 없이 순교나 마찬가지인 죽음을 당했던 이의 물건이었기 때문에 말이죠. 즉 이그나 그 십자가 주인이나 사실은 동류이기 때문에 이그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 '오두막'에서의 일로 더욱 확실히 증명됩니다.) 이것이 이 소설이 마치 수수께끼처럼 은밀하게 감추어 놓은 가장 커다란 반전입니다. 하면, 그는 왜 이런 반전을 마련해 둔 것일까요?


 그 이유란 간단합니다. 홀연히 우리를 저 경계 바깥으로 데려가기 위함입니다. 악마가 되기 전의 이그는 지금의 우리들 모습과 같습니다. 세상의 진실을 모르는 우리들은 지금의 모든 어려움과 아픔이 모두 우리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고 그 때의 이그처럼 스스로를 세상의 오점으로 여기고 괴로워하지요. 하지만 그건 우리가 꾸며진 모습을 진짜 모습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경계 안에 있는 우리들은 그 진실된 모습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이미 우리의 눈이 그것에 의해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죠. 자아, 여기서 조 힐이 왜 하필이면 우리를 경계 바깥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서 악마라는 소재를 택했는가가 드러납니다. 그건 악마가 주로 하는 일 때문이죠. 네, 바로 사람들의 혼을 빼앗는 것 말입니다. 악마가 이 혼을 빼앗는 일을 주로 하기 때문에 조 힐은 경계 너머로 나아가고자 하는 주제를 위해 특별히 그 소재로 악마를 택했던 것입니다. 쉽게 말해 '혼'이 가진 상징 때문이죠. 그런데 '혼'이란 무엇인가요? 영혼이란 어떤 존재인가요? 왜 악마는 그 영혼을 그토록 가지려고 하는 것일까요? 사실 우리는 거기에 대해 어떤 의문을 품어본 적은 없습니다. 그저 우리 안에 있는 진짜 존재라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는 정도죠. 하지만 그건 종교적 시각에 불과합니다. 조 힐이 여기서 추구하는, 그리고 오래도록 계속되어온 악의 상징에 따르면 악마가 영혼을 빼앗으려 하는 건 그게 진짜 존재라서가 아니라 전혀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거기에 대해선 미셀 푸코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는 영혼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하나의 체제 안에서 '신체를 규범화하고, 신체를 사회적 존재로 물질화 하는 역사적으로 특정된 사변적 관념'이라고 말이죠. 즉 악마가 영혼을 취한다는 것은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 이 푸코의 말처럼 그것이 경계 안에 있는 이들의 몸을 입맛대로 움직일 수 있게끔 강제적으로 주입된 특정된 규범적 관념이라서 그렇습니다. 쉽게 말해 우리가 진실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진실이라고 여기게끔 주입되었을 뿐인 관념말이죠. 악마가 취하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을 가져가 홀가분하게 비우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를 억누르고 있던 돌을 치워주는 것과 같은 것이죠. 그러므로 악마는 사실 우리의 영혼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이그에게 돋아난 뿔이 그랬듯이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하여 오히려 우리를 그 거짓의 관념으로 부터 자유롭게 해준다고 보아야 할 것 같네요. 아닌게 아니라 소설에서 후반으로 갈수록 이그가 주로 하는 것도 사실은 이것이죠. 사람들을 멍에로 부터 자유롭게 해 주는 것. 물론 여기서의 악마 개념은 종교적 의미가 모조리 탈색된 개념입니다. 아무튼 조 힐이 그리는 악마는 바로 그러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조 힐은 우리를 저 경계 바깥으로 데려가 세상의 진실을 보게 만들 메신져로 악마만큼 적당한 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조 힐의 '뿔'은 이런 소설입니다 재미로도 물론 탁월하지만 거기에 담겨진 전복성이 더 놀라운 소설입니다. 사실 그가 이것을 위해 악마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창조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약간 살짝 비틀었을 뿐인데 이토록 커다란 반전을 맛보게 되니 더욱 놀랍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 두 눈에 세상이 아무리 굳건하게 보여도 이 정도의 시차 교정만으로도 전혀 다르게 보일만큼 사실은 허약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일까요?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을 통해 이 사회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든, 보이든 그것을 곧이 곧대로 믿지 말고 늘 경계 저 바깥으로 넘어가 보다 객관적으로 음미해 보아야겠다는 다짐은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것도 보다 새로운 진실을 위해 경계 안에서 형성된 나를 죽이는 일이니 일종의 순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보다 자유로운 우리를 위해 그런 매일의 순교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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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섬
브루스 디실바 지음, 김송현정 옮김 / 검은숲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자아, 먼저 호들갑부터...

 

 작년에 이 소설이 에드거상을 받았을 때 부터 정말 읽고 싶었던 작품이었음을 고백해야겠다.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단순한 이유로 이 책을 쓴 브루스 디 살바가 40년 경력의 베테랑 기자였다는 점이다. 지금 말하고 있는 이 소설 '악당들의 섬'은 그 40년 경력 기자의 첫 데뷔작이다. 일단 기자 출신의 작가는 내게 신뢰감을 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들, 그러니까 '발란더 형사' 시리즈의 해닝 만켈, '밀레니엄' 시리즈의 스티그 라르손 그리고 '보슈 형사' 시리즈의 마이클 코넬리까지 다 기자 출신들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 좀 더 마니악(maniac)한 이유로 이 40년 경력의 기자를 작가로 이끌었던 장본인 때문이다. 그가 누구인지 아는가? 바로 에드 멕베인이다. 맙소사! 87분서 시리즈의 그 에드 멕베인이다. 94년 가을, 디 살바는 자신이 처음으로 발표했던 한 단편을 칭찬하는 편지를 한 독자로 부터 받게 된다.  그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실, 그 글은 장편의 소재로도 손색이 없어요. 장편 소설을 써 볼 생각은 없는지요?" 독자의 이름은 에반 헌터였다. 필명인 에드 멕베인의 본명. 그 때 부터 디 살바는 그 편지를 코팅해 컴퓨터에 붙여두고 글을 썼다고 한다. 그 때의 감격이 얼마나 컸던지 그는 아예 이 소설을 멕베인에게 헌정하면서 그 에피소드를 첫 머리에 공개하고 있다. 하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가 그토록 놀라운 칭찬을 해 주었는데 어찌 쓰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렇게 해서 탄생하게 된 소설이니 어찌 아니 읽을 수가 있겠는가!

 

 세번째도 역시 마니악한 이유다. 바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들이 이 소설을 칭찬했기 때문이다. 뭐, 그렇다. 사실 내 귀는 팔랑거릴 정도로 얇다. 그런 칭찬엔, 그것도 좋아하는 작가들이 했다고 하면 금방 혹하고 만다. 아무튼 그 작가들이란 바로 마이클 코넬리, 데니스 루헤인 그리고 할란 코벤을 비롯 리스트가 꽤나 즐비하다. 그러니 보게 되기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나오자마자 잡아서 허겁지겁 읽을 수 밖에...

 

 

 그렇게 나는 악당들의 섬과 조우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결과는?

 과연 그 기다림이 어떤 보상을 받게 되었는지 물으신다면...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고 대답해야 하리라...

 

 기대 이상으로 내게 이 소설은 사랑스러운 작품이었다. 그 많은 동료 작가들의 칭찬 속에 나 역시 첨언하고 싶어질 정도로 만족스러운 작품이었다. 사실 앉은 자리에서 내처 두 번을 읽고도(덕분에 엉덩이가 조금 아팠다.) 지금도 간혹 재미있었던 부분을 발췌해서 읽을 정도로 이 작품을 좋아한다. 나는 그동안 스릴러도 꽤나 진지하게 접근해 읽었고 리뷰 역시도 사회적인 것과 관계해서 쓰곤 하였지만 이 작품만은 그럴 수 없었다. 뭔가 의미를 따지고 구조를 살피고 깔려있는 상징을 파악하기 전에 이미 문장 자체에서 물씬 전해져오는 살인적인 유머 때문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정신적 무장 해제를 당한 속에서 마구 웃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유머가 가미된 스릴러를 상상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봐, 머저리 전에도 말했듯이 진행 중인 수사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할 수가 없어."

 폴레키가 말했다.

 "이번 사건에 대해서도요. 가서 교통사고나 취재하는 게 어때요? 그 쪽이 직접 당한다면 더 좋고요."

 로젤리가 말했다.

 로젤리의 유머 감각은 충분히 즐겼으니, 뭉그적대다가 한 방에 얻어터지지 않기로 결심했다. 휴지통이 폴레키의 여송연처럼 연기를 내뿜었다. 냄새가 과히 좋지도 않았다. 지금이 떠나기에 적기인 듯 했다. 나는 나가는 길에 복도의 화재 경보기를 눌렀다. 그 망할 놈의 장치가 진짜 작동할지 누가 알았겠는가. (P.18)

 

 이런 식의 유머에는 난 정말 당할 재간이 없다. 그래서 정말 낄낄거리며 거침없이 읽었다. 이런 재미를 또 어느 스릴러 소설에서 느껴보았을까 생각했지만 단연코 없었다.(물론 내 독서 경험이 그리 많지는 않다.)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저 유머만 있는 가벼운 작품은 아니다. 흔히들 웃는 광대가 더 슬픈 건 그 웃음 아래 세상의 가장 작은 존재로서 느끼는 진한 비애감이 스며있기에 그렇다고 한다. 디 살바의 '악당들의 섬'에 흐르는 유머도 이와 같다. 또한 니체는 인간은 너무나 슬픈 동물이기에 웃음을 만들어야 했었다고 말했는데 '악당들의 섬'의 유머는 바로 여기에도 해당된다. 그러니까 그것은 처절한 광경을 목도 했을 때의 무장해제 되어버린 마음이 무심결에 짓는 황망함의 웃음이며 그런 세상이지만 어떡하든 포기하지 않고 고쳐보겠다는 견딤의 웃음인 것이다. 밀리건이 이렇게 웃음을 무기로 삼을 수 밖에 없는 것은 그의 처지 때문이다. 그는 기자이고 기자의 신념으로 진실을 밝혀 누군가의 방화로 인해 자꾸만 반복되는 비극을 끊고 싶어 하지만 세상은 거기에 별 다른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가난한자들의 죽음이기 때문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밀리건은 고독하다. 바로 그 고독, 오로지 혼자 그 비극을 자기 일 처럼 생각하기에 웃음을 유일한 그의 무기로 삼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이 지옥으로 변해가도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저마다 자신의 일상에 골몰한 채, 보려고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다. 밀리건의 편집장이 내내 그에게 써 오라고 요구하는 기사처럼 그저 자신이 속한 일상이 여전히 아무 문제 없다고 말해주는 개에 얽힌 미담 정도만이 유일한 관심거리가 되는 세상이다. 바로 곁의 시내 한가운데서 누군가의 방화로 가난한 집 아이들이 죽어도 편집장은 무슨 신성한 의무라도 되는 양 원고에서 '빌어먹을'이나 '우라질' 같은 저속한 단어를 보는 족족 골라내어 한없이 평온한 일상으로 만들 뿐이다. 더러운 건 닦아내고 그래도 지울 수 없는 건 제거하면 된다는 듯이...

 

 타조는 적에게 쫓기면 머리를 땅에 박고 이제 보이지 않는구나 하고 안심하다가 결국 적에게 먹힌다고 한다. 억지로 안정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실 이러한 타조의 막무가내식 안심과 그리 다를 바 없다. 뒤에 도사린 거대한 음모에 의해 착착 다가오는 파국 앞에서 이런 기만적인 안정이란 속절없이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거짓의 일상이요 부질없는 환각의 신념이기 때문이다. 

 

 그런 지옥 속에서 밀리건의 마음이 평온할리가 없다. 뉴옥(NEW獄 - '새로운 지옥')이라 할만한 뉴욕에서 사립탐정으로 일하고 있는 로렌스 블록의 매트 스커더가 알콜 중독에 시달리듯이 로드 아일랜드의 마운틴 호프의 기자 밀리건은 담배와 이혼한 아내로 부터의 독설에 시달린다. 사실 이혼한 아내가 전화할 때 마다 처음부터 들려오는

 

 "이!

  나쁜!

  새끼야!"

 (책에 나온 그대로 인용. 이 인용문은 끝날때까지 내내 이대로 나온다.)

 

 이 같은 욕설은 사실 밀리건에게 있어서 욕이 아니라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깨닫게 하는 기능을 한다. 모든 것이 그저 좋은 게 좋다라는 식으로 평온하게 덧칠되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 같은 세상이 거짓이며 자신은 그 진실을 전하기 위해 일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우는 일종의 새벽을 깨우는 수탉의 울음이 된다. 그러니까 밀리건에게 자신이 어디에 속한 사람인지 그 정체성을 되새기는 장치로서 디 살바가 의도적으로 내내 반복시키는 장치인 것이다. 그렇게 자학적 각성을 할 정도로 그는 고통스러워 하는 것이다.

 

  언론학 교수들은 자신의 기사에 감정적으로 휘둘리지 말라고,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직업적 초연함을 기르라고 권고한다. 하지만 다 헛소리다. 기자도 개의치 않는 온기 없는 기사를 독자인들 신경 쓰겠는가. 나는 혹시 신이 들으실까 해서 기도를 올렸다. 하지만 제설차가 소화전을 파묻을 때 그 분은 어디에 계셨을까? 쌍둥이가 소리쳐 도움을 갈구 할 때 그 분은 어디에 계셨을까? (P.54)

 

 그래서 그만이라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신마저 포기하여 모두의 무관심 속에 버려진 약자들의 희생을 발판삼아 성장하고 있는 도시의 진실을 파헤쳐 그것을 멈추려 한다.

 

 "비 좀 멈추게 해줘요! 비 좀 멈추게 해달라고요!" (P. 357)

 

 이 소설은 그런 싸움이다. 때로는 유치하리만큼의 유머로 또 때로는 뼈마저 얼려버릴 정도의 냉소를 머금은 소설이지만 이 근본엔 유일하게 진실을 아는 자의 사회의 구원을 위한 투쟁이 있는 것이다. 마치 그 옛날 구약 시대의 이사야 같은 선지자 처럼...

  때문에 이러한 밀리건의 분투를 읽으면서 리처드 애덤스의 '워터십 다운의 열 한마리 토끼'를 떠 올리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관심가지지 않는 약자들의 삶에 유일하게 관심을 가지면서 홀로 분투하고 있는, 그런 면에서 밀리건의 형제라고 해도 무방한 로렌스 블록의 매트 스커더의 '800만가지 죽는 방법'에서도 애덤스의 그 작품은 언급 된다. 결국은 다 같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800만가지 죽는 방법'에서 스커더가 만나는 한 여자는 이런 얘기를 한다.

 

 "워터십 다운의 열 한마리 토끼 읽어 보신 적 있나요?"

 읽은 적이 없었다.

 "그 책에 토끼 마을이 나오거든요. 인간들에 의해 길들여진 토끼들의 마을이죠. 인간들이 토끼를 위해 음식을 마련해 주기 때문에 식량은 충분해요. 식량을 주는 사람들이 이따금 덫을 놓아 토끼 고기를 먹으려고 드는 것만 빼면 토끼 천국이라고 할 수 있죠. 살아남은 토끼들은 절대 덫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덫에 결려 죽은 친구들에 대해 말하는 법이 없어요. 그들은 덫이라는 것이 존재하지도 않는 듯이 죽은 동료들이 아예 살았던 적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히 행동하기로 무언의 약속을 한 셈이죠."

 그녀는 이야기하는 동안 시선을 돌리고 있다가 문득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뉴요커들이 마치 그 토끼들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여기 사는 건 문화든 일자리든 간에 이 도시가 주는 뭔가가 필요해서죠. 그리고 이 도시가 우리 친구나 이웃들을 죽일 때 우리는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보죠. 그런 기사를 읽으면 하루나 이틀 쯤은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곧 잊어버리는 거에요. 잊어버리지 않으면 그 일에 대해 뭔가를 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죠. 그렇지 않으려면 이 도시를 떠나야 하는데 떠나고 싶지 않기 때문이죠. 우린 마치 그 토끼들 같아요. 그렇죠?"

 

(로렌스 블록 '800만가지 죽는 방법 P. 249 ~ 250)

 

 젠장, 뉴욕 뿐이겠는가? 밀리건의 마운트 호프도 마찬가지고 우리 서울 역시도 이와 다를 바 없다. 망각과 무관심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가 비겁하다는 것의 증표일 뿐이다 . 아마도 그래서 밀리건은, 매트는 스스로에게 비겁해지지 않기 위해 홀로라도 싸우는 것이며 바로 그 용기가 부러워서 이렇게 내내 그들의 이야기를 벗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매트 보다 밀리건이 더 나은 게 하나 있다면 그는 웃으며 싸울 줄 안다는 것이다. 이왕 싸우려면 웃으며 싸우자는 '나꼼수'의 말처럼.(또 젠장, 오늘 속보로 김어준과 주진우가 선거법 위반으로 검찰에 송치되었다는 기사가 떴다. 언론인이 선거 운동에 개입한 게 그 이유란다. 그렇게 많은 언론 전문가들이 나꼼수가 언론이 아니라고 말하는데도(그들을 비난한 이들 조차 나꼼수는 예능일 뿐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들의 눈에는 닥치고 불법이다. 누구는 카퍼레이드까지 해도 알아서 합법이고... 매카시 식의 마녀사냥은 아직도 영원히 진행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총선 20대 후반의 투표율은 37.9%다.(그 전이 24.2%였으니 그나마 희망은 있는 것인가? 정말?) 다시 말해 망각과 무관심이 습관이 되어버린 워터십 다운의 토끼들이 사실은 이러한 악조건을 더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나는 밀리건을 아낀다. 언젠가 이 비가 멈추리라는 희망 속에 기꺼이 남들에게 우산이 되어주려는 그를... 어서 그의 후속작이 나오면 좋겠다.

 

 그 때를 기다리며 아마도 나는 곧 세번째 악당들의 섬을 방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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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힘 1 밀리언셀러 클럽 124
돈 윈슬로 지음, 김경숙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베트남 전쟁은 미국에게 있어 최초의 패배였고 그래서 트라우마가 되었다.

건국 이후 미국은 70년대까지 타자들과는 모두 세번의 큰 전쟁을 치뤘다. 40년대의 2차세계대전 50년대의 한국전쟁 그리고 70년대의 베트남 전쟁. 40년대의 2차세계대전은 미국에게 지금과 같은 패권국가의 자리를 가져다주었다. 미국의 달러를 기축통화로 정한 브레턴 우즈 체제는 정치권력 뿐만아니라 경제권력까지 미국에게 넘어갔다는 증거에 다름아니었다. 50년대의 한국전쟁은 휴전선이라는 반쪽의 승리에 그쳤으나 그래도 적어도 패배는 아니었다. 하지만 70년대의 베트남 전쟁은 문자 그대로 완벽한 패배였다. 그토록 유례없는 군비를 투여하고 물량공세를 펼쳤지만 돌아온 것은 전면적 퇴각 밖에는 없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오만했던 콧대를 여지없이 주저앉게 만들었으며 그렇게 아무 것도 거칠 것이 없었던 미국이 처음으로 맞딱드린 그 한계는 지울 수 없는 얼룩, 치유될 수 없는 트라우마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트라우마가 생겼다는데 있지 않다. 역사적으로 그런 패배 한 번 겪어보지 않은 나라가 어디있겠는가? 어차피 정상에 있는 존재에게 남은 것이라곤 내리막길 뿐이다. 그러니 미국 역시도 언제고 한 번은 당해야만 하는 아픔이었다. 그래도 미국이 조금 다른 경우라면 당시의 미국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최고의 정점에 서 있는 나라였다는 데 있을 것이다. 자유세계를 마음대로 호령하는 팍스아메리카나! 그게 70년대의 미국이 아니었던가! 마치 소설 '개의 힘'에서 멕시코의 바레라 가문과 같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랬던 미국에게 베트남 전쟁의 패배는 마치 로마의 황제가 변방의 이름없는 부족에게 대패를 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스스로도 적수라 여기지 않았던 상대, 차마 질 것이라 도저히 예측할 수 없었던 상대에게 진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치욕 또한 컸었다. 바로 그 치욕이 오히려 마치 손톱 밑에 박힌 가시처럼 두고두고 곱씹을 수 밖에 없는 아픔을 가져왔던 것이다. 상처받은 자존심. 더구나 당시의 미국은 자유세계의 지도자적 국가. 그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패배는 용납되지 않았다. 패배는 얕보이게 만든다. 미국이 두려워하던 것도 그것이었다. '어라! 미국도 별 거 아니네. 저렇게 큰 힘이 있어도 조그만 베트남 나라조차 이기지 못하잖아'하는 식으로 피식 웃으며 비웃듯 자기를 바라볼 다른 나라들의 시선이었다. 그래서 보스는 더욱 허세를 부리거나 잔인해지게 된다. 소설에서 바레라 가문이 굳이 하지 않아도 되었던 멘데스의 두 아이를 다리 아래로 집어 던졌던 것 처럼...

 

 돈 윈슬로의 '개의 힘'은 75년부터 2003년까지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의 미국과 멕시코간의 마약전쟁을 다룬다. 압도적인 서사로 독자의 넋을 잃게 만드는 작품이지만 윈슬로가 새삼 과거에 군림했던 멕시코의 마약카르텔에 천착하는 것은 그것이 비단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일이기에 그런 것만은 아니다. 더 큰 이유는 바로 저기에 있다. 그러니까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안게 되어버린 미국의 트라우마. 비극이긴 했지만 내부적으로는 보다 현명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계기가 되기도 했었을 그 사건이 어쩌다 미국을 더욱 더 나쁜 쪽으로 몰아가게 되었던가 하는 것을 살펴보는데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상처를 극복하는 방법에 대한 얘기다. 그 상처를 극복하는 데 있어 어떻게 '개의 힘'이라는 악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현명하게 극복할 수 있을까 돈 윈슬로는 궁극적으로 그것을 묻고 싶어한다.

 

  

 물론 미국은 실패했다. '개의 힘'은 사실은 그러한 미국의 실패를 복기하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이 소설이 하필이면 베트남 전쟁이 종전된 75년부터 시작되는 것에서 나타난다. 1975년 4월 30일. 베트남전쟁은 공식적으로 끝났다. 그리고 그 75년,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반은 미국 반은 멕시코인 주인공 아트 켈러는 이제 마약 단속 수사관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얻어 멕시코로 파견된다. 바로 그 때 거기서 30년간 피바람을 불러올 비극의 씨앗이 원죄처럼 잉태된다. 아트 켈러가 멕시코로 간 시기는 공교롭게도 미국이 더 이상 베트남에서와 같은 실패를 겪지 않기 위해 더욱 철저하게 그래서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개의 힘'에게마저 의지하여 (그러한 불법적은 간섭들은 모두 미국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용인되었다.) 중앙아메리카의 공산화를 막으려고 개입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소설에서 아트 켈러의 이야기는 사실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의 역사나 마찬가지다. 그가 티오의 힘을 빌려 처음 했었던 멕시코의 아편 산업에 대한 개입이 그대로 베트남 전쟁을 은유하는 것이라면 그 이후에 벌어지는 아트 켈러의 멕시코 마약 카르텔에 대한 막후 공작은 모두 미국의 중앙아메리카의 개입을 그대로 은유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돈 윈슬로는 분명히 보여준다. 베트남 전쟁이 가져온 트라우마를 지워버리려고 그렇게 '개의 힘'을 빌렸던 미국이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그렇게 아트 켈러를 통해 상징되듯이 그 한 발자욱도 나가지 못하고 여전히 제자리를 맴도는 성찰없는 미국의 반복된 과오가 무엇을 가져오는지 그는 소설을 통해 독자에게 생생하게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고통을 잊기 위해 타인에게 고통을 전가하는 '개의 힘'에 의지하는 것은 그 저 더 큰 불행, 더 큰 지옥을 가져올 뿐임을 말이다.

 

 일단 악이 활동을 시작하고 나면 그 움직임을 멈출 힘이 없다는 사실을 티오는 알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악과 결탁하기를 멀리하는 일이며 지속하다가 멈추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2권 p. 125)

 

 그 다리 위에서 멘데스의 두 아이를 던져버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새로운 멕시코 마약 카르텔의 보스 아단은 문득 이렇게 느낀다. 그와 똑같이 아무리 선한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 그 힘을 빌렸더라도 한 번 빠져버린 '개의 힘'은 마약과 똑같이 그저 더 한 중독만이 있을 뿐이며 오로지 더 강한 자극의 집착만을 가속화시키는 그 중독이 결국에는 가져오고야 말 파멸만이 있을 뿐이다. 이는 돈 윈슬로가 아트 켈러를 통해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는 바다. 자신이 마약 수사관으로서의 경력이 끝장날 것을 두려워하여 가벼운 마음으로 아단의 삼촌인 티오와 하게 된 하나의 작은 타협이, 그렇게 '개의 힘'에로의 가벼운 입맞춤이 과연 어떤한 것들을 불러왔던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멕시코의 막강한 마약 카르텔을 완성시켰을 뿐 아니라 그 카르텔로 인해 '멕시코 트램펄린'이라는 중앙아메리카의 자유화 바람을 조기에 억제하는 미국 정부의 은밀한 작전까지 가져와 중앙아메리카의 자유와 평등을 염원하는 시민들을 케르베로스 혹은 레드미스트 작전으로 무자비하게 짓밟도록 도왔다. 더하여 그렇게 유입된 마약으로 인해 오히려 자신이 지켜야 하는 자국의 미국 빈민계층들의 삶마저 파괴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아트 켈러가 바레라 카르텔에게 복수를 다짐하게 하는 직접적인 계기인 어니의 죽음 또한 그 자신 고백했듯이 자신이 초래한 것은 둘째치고라도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돈 윈슬로우가 어니의 죽음을 베트남 전쟁의 패배로 인한 트라우마의 상징으로 만들고 있는 것임을 본다. 결국 그 어니의 죽음으로 아트는 완전히 '개의 힘'에게 지배당해 버렸고 결국 그가 불러온 것은 아단 카르텔의 성장이며 그로 인해 라헬이나 파비안과 같은 괴물들이 몰고 오는 더 큰 고통들 뿐이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커다란 고통이 바로 가장 순결한 영혼이라 할만한 후안 신부의 죽음일 것이다. 돈 윈슬로우의 '개의 힘'은 사소한 타협에서 무자비하고도 광대한 학살로 이어지는 고통의 하이퍼 인플레이션적 궤도를 재현한다.)

 

 근데, 돈 윈슬로는 왜 새삼 베트남 전쟁이 가져온 트라우마로 인해 미국이 가장 불법적으로 정치적 혹은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한 그 시기의 이야기를 지금 가져오려 한 것일까?  그건 지금도 여전히 그 '개의 힘'이 미국에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2001년의 9.11 사태 이후에 그 보복으로 감행된 이라크 침략 전쟁이 미국이 아직도 그 '개의 힘'에 빠져있음을 증명한다. 그렇게 돈 윈슬로는 보았을 것이다. 자신이 겪은 고통을 여전히 타인에게 가하는 고통으로만 위안 받으려는 미국을. 그렇게 베트남 전쟁 이후로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미국을. 해서 그는 우려했던 것이 아닐까? 단 한 번도 자성의 시간을 가지지 않았던 미국을. 그래서 자꾸만 역사적 과오를 되풀이하고 있는 미국을. 그리하여 두려웠던 것은 아닐까? 그 반성하지 않음에서 오는 반복으로 점철된역사적 잘못이 언젠가의 미래에 또 다시 불러올 지 모르는 비극을... 소설에서 아트의 비극이 칼란의 비극으로 반복되었듯이(아트가 어니로 인해 그렇게 되었듯이 칼란 역시 오밥으로 인해 결정적으로 '개의 힘'에 빠져들게 되지 않았던가? 그렇게 돈 윈슬로는 반복을 통해 아무리 사람을 살리기 위한 길이라 하더라도 불법적인 방법이 가져오는 것은 오로지 비극 밖에는 없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돈 윈슬로의 '개의 힘'은 그래서 보다 본질적으로는 하나의 목소리가 되기 위해서 태어난 소설이다. 미국에게 더 이상 '개의 힘'에 의지하지 말 것을 촉구하는, 그렇게 더 이상 예전의 잘못을 다시는 되풀이 하지 말 것을 호소하는 그런 목소리! 그래서 그는 과거에 일어난 미국의 실패를 이리도 충실히 복원하는 것이다. 독자들에게 그 과오가 얼마나 엄청난 비극을 가져왔는지 제대로 느끼게 하기 위해서. 또한 진정한 성찰이란 무엇보다도 현실을 온전히 인식하는 가운데 가능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그는 장장 5년이라는 시간을 집필에 들이면서까지 사건과 상황을 완벽하게 재현하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그러한 돈 윈슬로우의 시도는 보기좋게 성공했다.

 

 그러므로 '개의 힘'을 그저 단순히 재미를 위한 스릴러로 생각하고 읽는 것은 큰 오산이다. 개인적으로는 좀 더 숙연한 자세로 경청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물론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이 소설에 나타난 돈 윈슬로우의 어조는 어떻게 보면 안토누치 추기경 앞에서 대답하는 후안 신부의 어조와 닮았다.

 "저의 주요 관심사는 복음이 현재 시점에서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굶어 죽은 다음이 아니고(2권 p.57)"

 

 또는 아단이 티오 삼촌을 도와달라고 찾아왔을 때 했던 후조의 어조와도 비슷하다.

 "난 운명의 장난이 소리소문없이 지나가도록 놔둘거야. 인과응보라는 개념은 알지?"

 "진심으로 참회하며 자신의 길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영혼일 경우에나 그렇지. 삼촌이 그러신가?:(2권 p.67)

 

 그러니까 경청해야 한다는 것은 돈 윈슬로의 '개의 힘'이 바로 저 두 가지를 독자에게 전해주기 위해 들려주는 미국에 대한 고해성사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도움이 되기 위해 다른 하나는 너무 늦기 전에 반성을 촉구하고 경고가 되기 위해. 지금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바라보면 아직도 '개의 힘'이 얼마나 유혹적인지 잘 알 수 있다. 그것은 마치 물리기만 해도 감염되는 광견병을 닮았다.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으로 촉발된 자본주의의 위기는 여전히 심화중이고 그리스의 재정 위기로 드러난 유로의 위기 또한 가속화되고 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가중되고 있는 고통이 곳곳에서 갈등과 저항을 부르고 노르웨이에서의 이민자 청소년 학살 같은 무시무시한 범죄마저 양산하고 있다. 한 마디로 파멸을 가져오는 광견병이 언제 범람하게 될 지 모르는 판국이다. 증오와 공격만을 불러오는 광견병의 가장 좋은 특효약은 예방이다. 자신에게 전가된 고통의 의미를 제대로 되새기고 그 속에서 가장 현명한 해결 방법을 찾는 것. 그것만이 파멸로 치달을 고통의 연쇄를 끊는 유일한 길이다. 즉, 내가 지금 안고 있는 고통에 대한 성찰만이 진정한 예방이다. 그런 의미에서 돈 윈슬로의 '개의 힘'은 거기에 대한 진정한 백신이다. 언제 물들게되어 버릴지 모를 파멸의 광견병을 미연에 막기 위해서라도 지금 당장 돈 윈슬로의 이 백신을 접종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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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5-14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금요, 에세르님의 서재에서 <개의 힘> 리뷰를 읽었거든요.
그리고 그 서재에서 헤르메스님을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같은 책에 대한 리뷰를
연이어 읽으니 사람마다 다른 관점이 굉장히 흥미롭네요.....

제목이 하두 강렬해서, <개의 힘>의 의미가 뭘까 생각했는데....
무슨 의미인지 다가왔습니다. 네, 광견병, 악의 힘, 비단 미국까지 갈 것도 없겠는데요.
요즘 우리나라 정치 정세를 보면 말입니다. 머, 사회도 나을 것도 없지요, 교육두요. ^^

어떤 형태이든, 중독은 무섭습니다. 다양한 중독이 있죠,
비단 물질 중독-마약, 알콜, 음식- 등만 중독이라고 할 수는 없을테니까요.
권력이나 힘도 중독인거 같아요...

ICE-9 2012-05-20 21:13   좋아요 0 | URL
정말 우리나라 정치 정세를 보면 '개의 힘'에 어느정도나 중독되어 있는지 잘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리뷰를 썼더 날이 하필이면 통진당 중앙위원회 회의를 하고 있던 날이었죠. 오후 2시 부터 시작된 회의를 10시간 넘게 지켜보면서 정말 중독된 '개의 힘'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꿋꿋하게 민주적으로 회의를 진행했던 심상정이나 유시민 그리고 그 오랜시간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자신의 한 표를 끝까지 행사할 것을 결의했던 나머지 중앙위 사람들을 보면서 결국 그것을 치유하는 길도 우리에게 열려있으며 그 무엇보다 옳은 것을 선택할 우리의 결단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희망은 남에게서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란 걸 다시 한 번 깨닫게 된 계기가 아니었던가 싶네요^ ^
 
와일드 파이어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5-4 존 코리 시리즈 4
넬슨 드밀 지음, 김홍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때로 선입관이란 얼마나 무참하게 깨어지는 것인가?

 

넬슨 드밀의 '와일드 파이어'를 읽고나면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이 책은 여러가지로 내가 읽기전에 가졌던 생각들을 뒤집었다. 도심 한 가운데 핵폭팔로 인한 버섯구름이 그려진 표지로만 보자면 이 소설은 분명 빈스 플린의 '임기 종료' 아니면 인기 미국드라마인 '24시' 인 것만 같다. 그만큼 정부를 전복하거나 인류를 위협하는 압도적 사건들이 잇달아 터지고 그것을 막기위한 주인공들과 그 주인공들을 막기 위한 악인들의 악전고투가 쉴 새없이 종횡무진 이어지는 그런 스타일의 작품 말이다.

 

그의 전작 '플럼 아일랜드'와 '라이언스 게임'을 읽어보지 못했기에 확언할 수는 없지만 나는 넬슨 드밀이 90년대 한창 유행했던 아놀드 슈왈츠제네가나 브루스 윌리스가 나왔던 그런 액션 무비의 소설판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무엇보다 주인공 존 코리 형사가 마초 스타일로 종종 소개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읽었더니 이런 왠 걸 그 모든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넬슨 드밀의 '와일드 파이어'는 사실 아주 기묘한 구성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당신도 이 소설을 읽게 되면 그리고 끝까지 읽어보면 뭔가 다른 것들과는 다르다는 위화감을 분명 가지게 될 것이다. 이 소설과 가장 닮은 작품이 있다면 그건 무엇일까? 그건 이 소설에서도 직접 언급되지만 스탠리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다.

 

 

   미국과 소련간 전면 핵전쟁이 일어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는 이 블랙코미디는 정작 핵전쟁  을 둘러싼 정황을 그리지만 그 어떤 액션신도 서스펜스도 보여주지 않는다. 스탠리 큐브릭이 이 영화에서 담아내는 것은 다만 그것을 둘러싼 지리한 논쟁 뿐이다. 큐브릭이 그것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지구의 종말마저 가져오는 이 중대한 사건이 알고보면 뚜렷한 계기나 합리적 사고도 없이 아주 우연적인 계기로 그것도 아주 이기적이거나 어리석음 가운데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한심하게 찾아온다는 것이다.

 

  넬슨 드밀의 '와일드 파이어'도 그와 비슷하다. '와일드 파이어'란(정말 이런 프로그램이 있는가 싶어 찾아봤는데 정보습득능력의 한계 탓인지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중동으로 부터 핵공격이 있을 경우 자동적으로 그 중동에다 핵공격을 퍼붓도록 하는 프로그램이다.(때문에 중동의 테러리스트들은 미국에 핵공격을 감행할 수 없다고 한다. 이것은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 모두에게 핵억지를 가져왔던 'MAD(상호확증파괴) 프로그램'과 비슷하다. 여기서 MAD란 쉽게 말하자면 너희가 핵을 쏘면 우리도 무조건 가지고 있는 핵을 다 쏜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방은 핵을 쏘기 전에 반격으로 날아올 무수한 핵폭탄을 두려워할 수 밖에 없고 따라서 핵공격을 주저하게 만든다.  이 MAD가 어떻게 유효한 핵억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느냐에 대해서는 존 내쉬의 '수인의 딜레마'가 잘 보여준 바 있다.)

 

 

넬슨 드밀은 이러한 핵공격 프로그램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그 소재로 인해 우리가 가지게 될 전개에 있어서의 기대를 그 어느 하나도 이루어주지 않는다. 핵폭팔을 앞두고 전개되는 서스펜스도 총탄들이 마구 쏟아지는 총격전이나 추격전 조차도 나오지 않는다. 더구나 배경 조차 도심이 아니라 어디 먼 한적한 시골 숲이다. 핵이라고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공간에서 핵을 소재로 한 소설이라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전개로 드밀은 독자들을 마치 이상한 나라에 빠져버린 앨리스로 만든다.

 

그러면서 그가 정작 보여주는 데 주력하는 것은 이상한 나라에 빠져버린 앨리스가 만난 티 테이블에서의 모자장수와 그 친구들이 벌이는 알 수 없었던 대화 처럼 미국이 과연 핵보복을 해야 하느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함무라비 법전부터 이어져 온 '렉스 탈리오'를 관철시키는 게 과연 옳으냐를 둘러싼 논쟁들 뿐이다. 아마도 우리는 여기서 '이건 뭥 미?'와 같은 반응을 할텐데 그러기 전에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이를테면 무협이란 장르에서 두 협객이 서로 합을 이루는 두 개의 검술은 그 자체가 몸으로 실어보내는 서로에게 건네는 대화라는 사실이다. 즉 우리가 말로써 하는 대화를 협객은 검으로 나눈다. 그래서 무협의 대가 김용은 화산에서의 무예 겨룸을 '논검(論劒)'이라 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니까 드밀도 이와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그가 핵을 소재를 다루면서도 우리가 예상했던 모든 전개를 뒤엎는 것은 사실 그걸 보여줄 필요가 없어서이다. 왜냐하면 이 소설에서 벌어지는 논쟁 자체가 그들이 언어로서 주고받는 총격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드밀의 '와일드 파이어' 에서는 언어들이 총알의 역할을 대신한다. 그들의 말이 신체에 가하는 고문을 또한 대신한다. 그만큼 이 소설에서는 물리적 공격이 중요한 게 아니라 신념이, 그리고 그것이 바탕이 된 태도가 중요하다. 이 소설은 두 협객이 검에다 신념을 실어 합을 펼치듯 그렇게 신념과 신념이 맞부딪히는 소설이다.

 

드밀은 왜 이렇게 표현했는가? 물론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바로 이 소설이 그 무엇보다 9.11을 겪은(그것도 바로 얼마전에 가까운 지인들을 피해자로 둔!) 미국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드밀이 이 소설에서 하고자 하는 것은 최종적으로 9.11이 미국에게 어떤 의미인가 하는 것을 묻는 것이다. 그것은 억울한 피해인가 아니면 그동안의 죄의 대가인가 또한 그는 묻는다. 이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안은 미국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렉스 탈리오의 법칙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먼저 스스로를 성찰하고 이런 비극을 되풀이되지 않도록 대승적으로 타자를 껴안을 것인가?

 

언뜻 봐서 마초스럽고 소설 자체에 어쩌면 과잉으로까지 여겨지는 성적 농담으로 가득차 그지없이 가볍게 보여졌던 이 소설은 그렇게 사실은 아주 깊숙한 곳에서 뜻밗의 거울을 스스로에게 비춰보이고 있었다. 논쟁 자체가 하나의 거울이었다. 그 어느 것으로도 결론나지 않아서 당신이 스스로 판단할 수 밖에 없기에 스스로의 모습만이 비춰질 뿐인 그런 거울이었다. 바로 그 거울에 비쳐질 당신의 모습, 당신의 진실은 어떤 것인가? 드밀은 바로 그것을 마지막의 마침표 처럼 묻고 있었다.

 

해서 이 소설은 본질적으로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사립탐정의 외양을 취한다. 전작을 읽어보지 못했기에 존 코리가 전작에서도 그랬는지 아니면 과연 이 소설에만 그런지 확언할 수 없지만 차량이 뒤집히고 무차별 총격을 가하리라 보였던 존 코리가 보여주는 건 그래서 탐문과 고찰 뿐이다. 그는 끊임없이 묻고 돌아다닌다. 하나의 죽음이 초래된 그 진실을 찾아서... 9.11에 희생된 사람들의 숫자에 비해 한 사람의 죽음은 미미하지만 드밀에 있어서는 그 하나의 죽음과 9.11에 희생된 사람의 죽음은 똑같아 보인다. 결국 목숨의 크기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바로 9.11의 비극을 가져오는 근본적 원인임을 아는 까닭이다. 탈무드의 말 그대로다.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전 우주를 죽이는 것이고 한 사람을 살리는 것은 전 우주를 살리는 것이다.' 바로 그 이유로 드밀은 존 코리가 사립탐정의 역할을 맡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다른 이유로도 이 탐정의 외양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사립탐정은 무엇보다도 변화의 관찰자이기 때문이다. 레이먼드 챈들러 이래로 사립탐정들은 '세상이 왜 이렇게 되어버렸지?'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 탐문하고 추적을 해 왔다. 바로 그 이유로 '와일드 파이어'에서 9.11 이라는 커다란 상처가 가져온 미국의 변화를 그리는 드밀에겐 사립탐정은 그야말로 적역이었을 것이다.

 

당신이 가지게 될 진실에 대하여 배려하는 의미로 이 이상 소설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으려 한다. 그냥 개인적인 느낌만 에필로그 처럼 붙여놓도록 하자. 꽤나 화끈한 스타일이 아닐까 예상했었던 넬슨 드밀의 '와일드 파이어'는 의외의 곳에서 문득 마음의 수면 밑을 헤아려 보게 만드는, 그렇게 겉보기와는 다른 진지한 작품이었다. 이 소설의 반 이상이 존 코리의 빈정거리는 농담으로 채워져있다고 해도 말이다. 니체는 사람은 그 무엇보다 슬픈 동물이기에 웃음을 발명할 수 밖에 없었다 라고 했는데 내겐 존 코리의 빈정거림이 그렇게 보였다. 사실 9.11 이란 그 거대한 비극을 앞에 둔 자들이 할 수 있는게 무얼까? 우리는 또한 종종 보지 않았는가? 너무 맞딱드린 비극이 압도적이면 스스로도 감당이 안되어서 자신도 모르게 실실 웃을 수 밖에 없는 것을... 때문에 내게 그의 빈정거림은 상처의 반어법적 표현으로 보였고 그래서 소설 자체엔 마치 그 빈정거림 그대로 무수한 생채기가 나 있는 듯도 했다. 지금까지 9.11의 상처를 다루고 있는 작품을 참 많이도 보아왔다. 대표적으론 폴 오스터의 '보이지 않는'이 있었고 최근의 영화 '머니볼'에서 조차 그 상처의 흔적은 묻어나 있었다. 그런데 스릴러로서는 처음이었다. 어쩌면 스릴러야 말로 그 소재 때문에도라도 가장 먼저 나왔어야 할 장르인지도 모르는데... 이 소설은 2006년에 나왔다. 시기로 보자면 좀 늦은 편인데 그만큼 아픔을 객관화하기 위하여 숙성할 필요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런 소설이다. 당신을 홀연히 그 그라운드 제로의 자리로 데려가는...

 

들으려는 귀가 있는 자만이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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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3-20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어보는데요,
이 책은 읽어야만 하는 책이나, 그다지 읽고 싶어지지 않는 소설이겠는걸 하는
생각이 떠오르는걸요... 맘이 엄청 불편할거 같아요. 그런거 있잖아요, 진실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점점 더 몸둘바를 모르겠는 그런거, 글에서도 쓰셨지만, 감당이 안 되면 실실 웃게 되는거... 이 책이 그런 느낌일거 같아요.... 음, 망설이는 중입니다...

하지만 좋은 페이퍼라서, 역시, 헤르메스님의 페이퍼니까 이런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해주시는구나 싶습니다............ 아, 저는 도저히 지금 이런 페이퍼는 쓸 수 없어요, 생각해보니 원래도 못 썼군요.... ^^

ICE-9 2012-03-20 23:03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느낌이 아마도 정확하실듯 싶어요^ ^ 사실 이 책엔 많은 성적 농담이나 빈정거림이 있는데 저는 그걸 상처의 반어법으로 해석했지만 읽기에 따라선 굉장히 불편할 수도 있거든요. 여성분들에겐 특히 좀 더 그럴 것 같아요. 저도 물론 이 작품으로 처음 만났습니다만 넬슨 드밀 자체가 호불호가 선명히 갈리는 그런 작가인 것 같더군요. 하지만 9.11 자체를 직시하려는 태도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주 교묘하게 위장되어 있어서(이를테면 미국의 대 이라크 보복전에 프랑스가 취했던 태도를 프랑스 출신 요리사로 은근히 묘사한다던지...) 9.11 이후 미국과 국제 정세에 대한 이해를 조금 필요로 하는 면도 있더라구요. 아무튼 저는 추천에 있어 참 조심스럽네요^ ^; 그리고 아유~ 마고님 그런 말씀마세요. 제가 얼마나 마고님 페이퍼에서 스스로 생각할 계기를 많이 가지는데요. 저도 그런 글을 쓰고 싶은데 저는 정말 안되더라구요 ㅠ ㅠ...
 
마타레즈 서클 1
로버트 러들럼 지음, 김양희 옮김 / 노블마인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먼저, 한 장의 사진 부터...


  

  이 사진을 보고 누구인지 척 알아보았다면 단연 당신도 영화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의 주인공은 '비디오 드롬'으로 대표되는 신체와 기계를 서로 교합하여 기괴하고 낯설은 컬트 무비로 관객을 당황시켰던 대표적인 감독인 데이빗 크로넨버그 다. 크로넨버그 뒤의 사진은 그의 영화 '스캐너스'에서 유명한 사람의 머리가 폭발하는 장면. 듣기엔 수박을 사람 머리처럼 만들어서 권총으로 쏘아 만든 장면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비디오로 나왔는데 원본 상영시간보다 딱 1초가 적다. 바로 이 장면 하나만 삭제되었기 때문이다. 

 

   1. 그렇게 시작은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이야기로 부터 ...

  

 

    하지만 늘 신체를 가지고 변형하고 무언가 다른 것과 접속

  시키려 했던 그의 컬트적 경향은 2002년 Patrick McGrath의

  동명 원작을 영화화한 '스파이더'로 인해 결정적으로 변화한

  다. 바로 그 영화에서 크로넨버그는 자신의 주 전공이라 할 

  수 있는 시각적 충격이나 기괴한 주제 의식 그 어느 것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고전적  영화 문법에만 충실하여 영화

  를 만들었던 것이다.

 

     한 정신분열자의 잃어버린 기억을 복원해나가는 이 영화의

  원작은 대부분이 분열자의 혼란스러운 독백으로 되어 있는지

  라 영화화 불가능이라는 판정까지  받았던 작품이었는데 크

  로넨버그는 그것을 영화로 만들었을 뿐만아니라 그것도 전혀

  크로넨버그적이지 않은 '정통' 기법만 사용하여 만듦으로써

  놀라운 비평적 성공을 이루어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의의는 그렇게 형식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주제에 있어서도 중요한 하나의 전 환점이라 할 수 있는데, 즉 그전까지의 크로넨버그 영화들이 인간의 신체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언제나 외부적인 것과 접합하여 왔다면 '스파이더' 부터는 바로 그 접합이 인간 의식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외부로만 향하던 감독의 시선이 '스파이더'에 와서는 본격적으로 그 내부로 향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한 마디로 크로넨버그의 필모그래피에 있어서 일종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 할 만하다. '내부에서의 접합'의 중심엔 언제나 단순히 말한다면 '정체성의 혼란' 이 있다. 그러니까 내가 아닌 다른 것으로 부터 이식되어진 외부의 '의식'이 있고 그 의식 아래에서 본래의 나를 이루며 존재하는 내부적 '의식'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크로넨버그는 정체성을 바로 이러한 내 것이 아닌 '외부에서 이식된 자아'와 '본래적 내 자아'가 서로 교섭하거나 투쟁을 통해 이루어진 일종의 산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스파이더'에서 구현되어 뒤이은 '폭력의 역사(과거를 감추고 평범한 보통 남자가 되어버린 전직 킬러)'나 '이스턴 프라미스(러시아 마피아로 신분을 숨기고 숨어든 위장 경찰)'로 조금씩 변형되어 내내 이어지고 있다. 거기다 이 전회 이후의 영화들 대부분이 크로넨버그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을 만큼 그 성취 역시 날로 일취월장하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당연히 크로넨버그의 차기작은 모든 영화팬들에게 있어 대단한 관심을 받을 수 밖에 없는데 2009년 그는 '폭력의 역사', '이스턴 프라미스'에 이어지는 폭력 3부작을 완결하지 않고 느닷없이 (우리에겐 '본'시리즈의 원작자로 잘 알려진) 로버트 러들럼의 '마타레즈 서클'을 감독한다고 하여 팬들을 놀라게 하였다.

 

    원작 그대로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마타레즈 서클'이라는 국가를 초월한 전세계적 거대한 범죄 음모 집단에 맞서, 가장 능력있는 스파이였으나 그들의 음모로 이제는 반역자라는 누명을 쓰고 쫒기게 된, 거기다 서로가 뼛 속 깊이 증오하던 원수이기도 했던, 미국의 스파이와 소련의 스파이가 함께 협력해서 싸운다는 내용의 이 영화는 감독이 크로넨버그일 뿐만 아니라 주연 배우 역시 미국 스파이 역할을 톰 크루즈가 그리고 소련 스파이 역할을 덴젤 워싱턴이 맡는다고 알려져서 더욱 팬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크로넨버그는 영화로 만드려는 원작을 까다롭기로 고르기로 유명한데(원래 이 영화는 2011년 개봉예정이었으나 지금까지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크로넨버그가 나와 있는 시나리오를 직접 손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어째서, 크로넨버그 최초의 블록버스터라는 점에서 또 하나의 전기가 될, 이 작품에 끌렸던 것일까?

 

 

    그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드디어, '마타레즈 서클'이 노블마인에 의해 국내에 발간되어 크로넨버그가 왜 이 작품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2. 다음엔 '마타레즈 서클'의 이야기...

 

      첫 걸음은 러들럼의 전 세대... 이언 플레밍와 존 르 카레로 부터... 

 

   주된 줄거리는 앞에서 말한 그대로다.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영화적 흐름에 대해서 마치 삼천포로 빠지는 것 같은 의심이 들 정도로 길게 얘기한 것은 그 짧은 줄거리 만으로도 왜 데이빗 크로넨버그가 이 작품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다. 사실 이 소설은 하나의 결말을 향해 줄기차게 달려가는 소설인지라 줄거리를 자칫 상세하게 했다간 뒤에 읽는 이의 재미를 빼앗을 우려가 다분하다. 더구나 이 소설은 '마타레즈 서클'의 정체와 그 맴버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미스터리적 측면까지 가지고 있어 그 위험이 배가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줄거리를 짧게 말하고 그 관련 배경 사항을 길게 말함으로써 '유추'라는 방법으로 암시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줄거리에 대해서는 되도록 침묵하고 이 작품이 가진 주제만 드러내기 위해서 말이다.

 

    읽고나니 왜 크로넨버그가 폭력 3부작을 마무리 하지 않고 곧장 (물론 여기엔 어폐가 있다. 사실 크로넨버그는 이 사이에 또 하나의 작품을 만들었다. 올해 개봉한 'A Dangerous Method'라고 프로이드와 융이 주인공인 영화이다. '스파이더' 이후로 내내 지속해왔던 것이 크로넨버그 식의 '정신분석'이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증거이기도 하다.)  '마타레즈 서클'로 뛰어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왜냐하면 '마타레즈 서클'이 폭력의 역사, 이스턴 프라미스와 사실 주제적인 측면에서 많은 부분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파이'라는 국가가 강요한 정체성으로서의 '외부적 자아'와 본디 부터 있었던 '내부적 자아'와의 대립, '폭력의 역사'에서 에드 해리스가 암시했던 조직이나 '이스턴 프라미스'에서의 러시아 마피아와도 같이 그러한 외부적 자아를 강요하는 존재로서의 단일한 세계 역시 이 소설에서 '마타레즈 서클'로 등장한다. 거기다 '이스턴 프라미스'에서 일원이 되려면 문신이 중요했듯이 여기서도 마타레즈 서클 일원임을 확인 하는 유일한 방법 역시 문신이다. 아마도 이러한 공통적인 모습들이 데이빗 크로넨버그로 하여금 '마타레즈 서클'로 뛰어들게 만든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 리뷰는 어디까지나 로버트 러들럼의 '마타레즈 서클'에 대한 것이므로 이제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얘기는 그만하고 러들럼이 '마타레즈 서클'을 통해 무엇을 하려 했던 것인지 얘기하도록 하자.

 

  그걸 얘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스파이 소설에 있어 가장 대표적이라 할 만한 작품 둘을 살펴봐야 할 것 같다. 하나는 이언 플레밍의 007 이고 다른 하나는 존 르 카레의 대표작 '추운나라에서 온 스파이'이다. 

 

 

  

 

 

 

 

 

 

 

 

 

 

 

 

 

 

 

 

 

 

   같은 스파이 소설이지만 이 둘은 정말 다르다.

 

   그건 단적으로 주인공인 제임스 본드와 조지 스마일리의 차이에서 드러난다. 제임스 본드는 조국의 헌신과 자신의 임무에 대해서 절대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마치 정확한 기계 처럼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임무의 성공을 위해 나아간다. 때문에 그는 자신만만하며 늘 유머를 잊지 않을 만큼 낙천적이고 임무중 로맨스를 불태울 정도로 낭만적이다. 하지만 존 르 카레의 조지 스마일리는 정확히 제임스 본드와 정반대의 인물이다.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이 맡고 있는 임무에 대해 신뢰하지 않으며 늘 의심과 번민 속에서 가까스로 임무를 해 나간다. 그는 제임스 본드와는 달리 자신이 한낱 보잘것 없는 인간임을 잘 알고 있으며 세상 또한 윤리 따위는 얼마든지 헌신짝 처럼 던져버릴 수 있는 구원의 가능성이 사라진 곳이란 걸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제임스 본드에게 있어 의심과 남을 속임은 오직 임무 수행을 위한 수단일 뿐이지만 스마일리에게 있어서는 생존을 위한 절박한 무기다. 그래서 제임스 본드는 적의 총구 앞에 섰을 때도 유머를 잃지 않지만 스마일리는 보이지 않는 총구를 더 두려워하여 필사적이다. 따라서 007의 분위기는 넘쳐나는 활극마저 가미되어 밝지만 스마일리의 분위기는 우울하고 어둡다. 그가 늘 이루어야 하는 임무 보다 임무를 위해 전혀 다른 자신이 되어 남을 속이고 스스로를 속여햐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번민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둘은 여지없이 다른데 과연 이 차이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건 다만 작가 개인적 차이에 지나지 않을 것인가? 물론 그건 아니다. 흔히들 문학은 사회의 거울이라고 한다. 그렇게 소설 역시 사회 혹은 시대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제임스 본드와 조지 스마일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그렇게 달랐던 것은 바로 그들을 낳았던 시대가 달랐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 두 인물은 시대적 산물이었던 것이다. 제임스 본드는 50년대에 태어났다. 그야말로 냉전이 극한을 향해 치닫던 시대였다. 헐리우드 영화들은 당시의 공산주의자들을 지구를 침략하는 외계인이나 괴물로 형상하고 있었다. 그들, 공산주의자들은 그렇게 미국에게 이종의 존재들이었고 그래서 타협이 불가능한 오로지 절멸만이 전부인 존재들이었다. 따라서 적인 분명한 이상 아군도 스스로를 회의하지 않았다. 반면 스마일리는 60년대의 산물이다. 냉전으로 떠받치던 사회에 점점 의심을 보내는 시선과 목소리가 많아졌고 아버지의 가치관을 거부하는 자식 세대가 늘어났다. 반항과 자유를 외치는 록이 전성기를 구가했고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위해 '히피'가 되었다. 프랑스에서 누벨바그가 이런 경향을 흡수해서 나타났고 사람들은 정상성을 전복하는 아방가르드적 정신으로 차츰 무장해갔다. 그렇게 세계를 회의함으로써 오히려 내부에게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스마일리는 바로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의 반영이었던 것이다. 즉 이렇게 달라져 버린 시대의 프레임이 같은 스파이라 하더라도 각각 다르게 빚어내었던 것이다. 스마일리에게 와서 스파이가 가지고 있는 사명은 이제 무조건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정한 것인지 의심의 대상이 되었고 그 보다 더 높은 상위의 원칙에 의해 끊임없이 검증해야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스마일리는 애국심이 아니라 바로 그 상위의 원칙에 의해서만 움직였고 그 원칙은 바로 '휴머니즘'이었다. 즉 그렇게 존 르 카레에게 와서 이언 플레밍에 의해 단절되었던 '나와 너'는 보편적 인간애로 인해 묶이게 된 것이다.

 

 

     두 번째 걸음은... 이제 로버트 러들럼 으로 ...

 

   러들럼 역시 존 르 카레의 계승자다. 그의 대표작인 '본 시리즈'를 떠올리기만 해도 될 것이다. 러들럼의 스파이들 역시 조국에 대한 신뢰로 완전무장하고 있지 못하다. 만일 그들이 전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자발적으로 된 것이 아니라 세뇌에 의해 그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게 아니면 커다란 개인적 원한이 있다거나... '마타레즈 서클'의 두 주인공 미국 스파이 스코필드와 소련 스파이 탈레니예코프 처럼 말이다. 스코필드와 탈레니예코프가 서로의 나라에서 가장 최고의 스파이가 된 것은 모두 개인적 원한을 남김없이 갚으려 했기 때문에 얻은 부산물이었다. 탈레니예코프는 미국에 의해 사랑하는 연인을 잃었기 때문에 그 복수를 위해 스파이가 되어 미국과 싸웠고 스코필드는 탈레니예코프가 복수를 위해 죽여버린 자신의 아내에 대한 원한을 앙갚음 하기 위해 최고의 스파이가 되었다. 그들의 동기 어디에도 007이 가지고 있었던 자기가 속한 국가나 체제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모두 철저히 개인적 동기 뿐이었다. 여기에서 러들럼은 존 르 카레와 이어진다. 그 역시 거대 이념이 아니라 스파이로서의 한 개인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하지만 러들럼이 주로 활동했던 70년대는 또 존 르 카레의 60년대와 같지 않았다. 70년대는 다시금 점증하는 '보수'로 인해 '스타워즈'에서 루크 스카이워커의 아버지가 다스베이더였던 것 처럼 그 빌어먹을 저주의 피가 자신에게도 흐르고 있으며 자신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임을 알아야 했고 더구나 그 피를 물려준 다스베이더에 의해 그들은 오로지 미국의 군산복합체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벌였던 베트남으로 끌려가 그 피를 다시 돌려주어야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념이 아니라 오로지 한 기업의 이익을 위해 죽었고 그 죽음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올리버 스톤이 영화 '플래툰'의 마지막에서 산더미 처럼 썋여진 병사의 시체들을 보여주며 물었던 '그 죽음의 의미는 과연 무엇이었던가'에 대한 대답과도 같았던 차기작 '7월 4일생' 처럼...) 러들럼은 바로 그 시대에 있었다. 이념의 깃발은 이미 오래전에 퇴색했지만 여전히 그 깃발을 흔들며 사람들을 우롱하고 자신의 주머니를 채워나가고 있는 누군가를 보았던 것이다.

 

 

  러들럼에게 있어 70년대란 바로 그런 시대였다. 이념은 사라지고 오로지 음모만이 가득한 시대. 베트남 전쟁은 러들럼에게 그것을 똑똑히 가르쳐 주었다. 아무리 개인 자신이 의심하고 번민 하더라도 개인을 초월하고 국가마저 능가하는 거대 세력 앞에서는 속절없이 무너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그러한 인식이 잘 드러난 작품이 바로 '마타레즈 서클'의 전작인 77년작 'The Chancellor  Manuscript'이다.(이 작품 역시 마크 포스터 감독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으로 영화화가 예정되어 있다.) FBI 국장 재임 당시 최고의 권력자중 하나로 온갖 개인의 비밀을 다 캐내고 그것을 이용했던 에드가 후버가 사실은 자연사가 아니라 그 비밀이 탄로나는 것을 두려워 한 어떤 비밀 세력들에 의해 암살당한 것이라는음모론이 주된 줄거리로 진행되는 이 소설은 대필작가 챈슬러가 주인공인데 그는 어느날 정체불명의 인물로 부터 후버 전기를 쓸 것은 의뢰받고 그가 건네주는 정보를 바탕으로 전기를 써 나간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챈슬러가 써 나가는 내용이 현실에서도 똑같이 일어난다는 점이다. 즉 그는 그를 넘어선 거대한 음모에 의해 자기도 모르게 이용당하고 있었던 것인데 바로 여기서 러들럼은 '베트남 전쟁'을 비유하는 것이다. 자신은 몰랐지만 누군가 의도적으로 건네준 정보를 그대로 받아 씀으로써 그가 의도하는 대로 현실의 사건들을 일어나게 했듯이 그와 똑같이 베트남 전쟁의 참전 역시 자신도 모르게 자기를 초월한 누군가의 의지를 그냥 자신의 의지로 알고 참여했던 전쟁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그가 바라본 70년대는 비밀과 음모와 점철된 시대였고 베트남 전쟁에서 분명히 드러났듯이 개인의 생존마저 위협하고 있었다. 

 

  하지만 러들럼은 거기에 수동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러들럼 자신의 작품에 대한 고백이야 어쨌든 그의 소설들은 모두 그러한 세상과 겨루려는 가운데 태어난 것이 틀림없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마타레즈 서클'이 아닌가 한다. 특히나 후반에서 보여주는 더 할 나위없이 통쾌한 응징은 (당신이 정말 지금의 상황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면 이 마지막 상황의 통쾌한 응징이 그야말로 좋은 치유가 되어주리라 생각된다. 데이빗 크로넨버그가 이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묘사할 지 정말 기대가 된다. 아주 느린 왈츠적 움직임으로 형상화하지 않을까 생각되긴 하지만...) 이러한 러들럼의 세상에 대한 전투적 의지가 얼마나 결연한지 잘 드러내고 있다. 생각해보면 러들럼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존 르 카레의 소설을 읽을 때 그의 고독과 고뇌에 공감하면서도 반복해서 더불어 있기가 힘든 것은 그의 실존적 고독이 가져다 주는 무력감 때문이다. 그가 한 작품의 결말에 묘사했던 그대로 거대한 벽에 가로막힌 채 서치라이트에 갇혀 속절없이 총살당하고야 마는 그런 무력감이 너무도 커서 그 세상 앞에서 우리는 그렇게 무력하게 쓰러져야만 하는가 하는 반발심이 무의식중에 들기 때문이다. 더구나 르 카레가 그렸던 세상이나 러들럼이 그렸던 세상이나 그것과 조금도 변하지 않아 보이는 지금의 세상에서는 더더욱. 아무리 우리 자신의 모습을 진실되게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해도 때로는 그것이 아무리 작위적 환상이라 해도 승리의 기억 역시 필요한 게 아닐까 싶다. 그것이 비록 대리만족이나 상상의 충족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그래도 보다 적극적으로 세상과 마주할 수 있게는 해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에겐 이언 플레밍도 존 르 카레도 그리고 로버트 러들럼도 다 필요하다. 이언 플레밍은 세상을 만만하게 보도록 만들고 존 르 카레는 좀 더 진중해질 것을 요구한다. 삶은 어디로 어떻게 흐를지 모르는 예측불가능성으로 넘쳐나니 그것과 제대로 싸우기 위해서라도 이용가능한 모든 자원은 다 이용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 어떤 때, 문득 승리의 기억이 필요할 때 러들럼을 벗하면, 그렇게 '마타레즈 서클'을 벗하면 좋을 것이다. 다행히 몰입도가 상당해서 들이는 시간 마저 오래걸리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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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12-09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베트남 전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나 봅니다,
아니 영원히 지속될지도 모르겠습니다. 007의 매력적인 모습은, 참 교묘한 위장이죠?
어릴 때 받은 세뇌 교육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직도 스파이라 하면 매력적인 모습이 우선 떠오르잖아요... 실제로는, 정말 실존적 무력함을 그대로 느낄 수 밖에 없는 존재인데 말이죠.
그건 CSI나 크리미널 마인드 같은 미드도 마찬가지인거 같아요. 법의학자나 프로파일러에 대해서 정말 멋진 환상을 심어주고 있죠. 하지만 무감각해지지 않는다면, 그런 상황에서 어찌 제정신으로 살아남을 수 있겠어요...

참 멋진 페이퍼입니다~ 감사합니다. ^^

ICE-9 2011-12-13 12:33   좋아요 0 | URL
앗! 들려주셨군요. 감사합니다.^ ^
저도 법의학자와 프로파일러들에 대해서 마녀고양이님과 생각이 비슷합니다. 과연 저들은 어떻게 그들의 일상을 견뎌나가고 있을까? 아무튼 보통사람들이 바라보는 듯한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는 못할 것 같은데.. 그런 의미에서 케이 스카페타 시리즈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어요. 그 작품엔 물론 엽기적인 세상에 대한 실존적 무력감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콘웰은 현명하게도 그걸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이 생존하는 방식의 힘겨움을 통해 드러내죠. 하지만 그렇게 보편적인 아픔으로 승화시켰어도 그 따가운 개별적인 통증 역시 그대로 느껴지게 해서 어느순간 스카페타의 피로를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거든요. 히어로란 능력이 아니라 그 버텨냄에 있다는 걸 절감하게 되곤 하는 스릴러죠. 그런게 아닐까 싶어요. 자신의 신념을 잃지않고 질기게 버텨내는 것. 챈들러가 그토록 강조하는 `스스로의 무장상태` 저는 러들럼에게서 그런 걸 보고 있는 것 같아요.

노이에자이트 2011-12-09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0년대 작품으로 냉전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미국의 스파이를 냉정하고 회의적인 시각으로 그린 것으로 그레이엄 그린 <조용한 미국인>이 있더군요.아는 사람들에게 읽어보라고 권합니다.

러들럼이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꽤 인기가 있다가 요즘 뜸했던 것 같았습니다만...

ICE-9 2011-12-11 23:31   좋아요 0 | URL
저는 `조용한 미국인`을 영화로 만든 것을 보았는데 정말 좋더군요. 말씀하신 그레이엄 그린의 작품도 좋아하는데 아무래도 이 글에선 가장 대조적인 스파이의 모습을 고르다보니 그린 보다 르 카레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최근에 영화로 본 3부작이 잇달아 개봉됨으로써 다시금 러들럼의 작품들이 인기를 얻게된 것 같아요. 게다가 헐리우드에서 지속적으로 그의 작품들을 만들고 있고 아마도 러들럼이 보았던 시대와 지금의 시대가 통하는 면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이번 작품을 읽다보니 들더군요. 방문해주시고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노이에자이트 2011-12-14 15:58   좋아요 0 | URL
저도 르 카레 좋아해요.그리고 에릭 엠블러. 고전적인 스파이물의 거장들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