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은 본 페이퍼와 그다지 관계가 없습니다.
처음 맞는 긴 연휴, 원래 하려던 일은 대략 10가지쯤 됐다.
그 중 논문 두 편을 쓰자는 것도 들어 있었는데,
그리 길지도 않은 한 편을 쓰는데 월화수 사흘이 날아갔다.
생각보다 큰 출혈이었는데,
이건 순전히 ‘한줄 쓰고 인터넷 뒤지고 또 한줄 쓰고 인터넷 뒤지고’를 반복한
내 집중력 부족에 있었다.
목요일엔 교양과목 2주치 강의준비를 했고,
금요일엔 간만에 테니스를 치고 일산에 사는 친척집을 방문했다.1)
그리고 토요일, 두 번째 논문을 쓰려고 컴 앞에 앉았다.
하지만 논문을 쓰기가 너무 싫어서 계속 딴짓만 하다가
밤 11시에 컴 앞에 앉아 자료를 띄웠다.
그러고 난 뒤 네이버 웹툰을 40분쯤 보다가
그래도 일하기가 싫어서 ‘영화’를 클릭했다가 <범죄도시>가 개봉한 걸 알았다.
소식은 알고 있었지만 그냥 때려부수는 영화다 싶어 볼 마음이 없었는데,
평점이 너무 높은데다 재미있다는 평이 대다수다.
나이가 드는 것의 장점은 알바와 순수한 관객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는 것,
논문은 뒤로 미루고 이 영화를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10월 8일 새벽 12시 45분에 시작하는 표를 예매하고 서둘러 차를 몰아 극장에 갔다.
상영관 앞에 제복 차림의 직원이 있었고,
그 옆에는 웬 여자 둘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서 있다.
한껏 거만한 자세로 직원에게 출력한 티켓을 내밀었더니 그가 이렇게 말한다.
“손님, 이건 다음날 티켓이에요.”
놀라는 내게 직원이 설명을 해준다.
“저희 극장 심야표는 전날 날짜로 찍혀요.”
아, 그렇구나. 내가 그걸 모르다니.
나: 괜찮습니다. 다른 데 앉으면 돼죠 뭐. 표는 좀 봐주세요.
직원: 그게요, 저희도 해드리고 싶은데 지금 표가 매진이에요.
토요일 밤 12시 45분, 인구 60만의 천안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알고보니 여자 두 분도 같은 이유로 서 있는 거였다.
직원은 무전기로 혹시라도 취소된 좌석이 있는지 확인하더니 안되겠다고 했다.
집에 그냥 가기가 너무 싫어서 계단에라도 앉겠다고 했더니
그러라고 했다.
극장에 들어가니 정말 매진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할 수 없이 좌석과 좌석 사이의 계단에 주저앉아 팝콘을 먹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그 직원이 들어온다.
“저기요, 노약자를 위한 이동좌석이 하나 있는데, 거기라도 앉으시겠어요?”
그걸 거부할 소냐. 고맙다고 하고 맨 앞줄에 있는 노약자석에 앉았다.
영화는, 안봤으면 큰일 날 뻔했다 수준으로 재미있었다.
마동석이라는 배우의 카리스마가 뻔하다면 뻔한 액션영화를
아주 신선한 영화로 느껴지게 만들었다고 할까.
그러니까 마동석은 아트박스 사장을 하기엔 너무 큰 그릇이었다.2)
마동석씨, 이런 영화 또 찍어주세요. 전 기생충 연구 열심히 하렵니다.
1) 금요일에 찾아뵌 분은 이전에 쓴 ‘개만도 못한 인지도’에 나온 삼촌이었다.
지금은 그 글이 지워졌는데, 내용은 이랬다.
[나랑 삼촌이 친한 사이라는 걸 동네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삼촌은
안내견을 하다 은퇴하고 삼촌에게 분양된 골든리트리버를 데리고
동네를 산책한다.
하지만 다들 개만 보느라 나에게 관심갖는 이가 없어서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
이번에도 골든리트리버를 데리고 1시간 반 가량 산책을 했다.
4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은 대부분 개만 봤지만,
방송을 좀 해서 그런지 나를 알아봐주는 분도 이따금씩 있었고,
그럴 때마다 삼촌은 으쓱해했다.
그런데 그 개 등에 ‘은퇴한 안내견’이라는 표지를 붙인 탓에
산책하는 동안 이런 소리가 들렸다.
아이: 아빠, 나 저 개 좀 만져봐도 돼?
아빠: 안돼. 저게 시각장애인 안내견이라 만지면 절대 안돼.
이런 대화를 4번째 듣는 순간 난 뒤를 돌아 그분한테 말했다.
“얘가 은퇴한 안내견이라, 괜찮습니다.”
그분이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아니, 그럼 지금 눈이 보이세요?”
‘은퇴한’이란 글자를 더 키워서 표지를 다시 만들어야겠다 싶다.
2) 마동석은 <베테랑>에서 아트박스 사장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