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8일, PM 17:30
하루 종일 학회장에서 발표를 듣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우리나라 학회처럼 사람도 많고 장소도 넓다면
중간중간 나가서 잡담도 하고 그러겠지만,
그곳은 강의실 한 개 크기의 방에 사람 이름이 쓰여진 종이 명패가 놓여 있는지라
나가서 놀기가 어려웠다.
발표를 듣고 사람들이 총평을 하는 시간.
총 6명이 얘기를 하기로 했고,
그림을 그리면서 그 지겨운 연설들을 참아냈다.
여섯명의 연설이 다 끝났을 때,
명단에도 없는 우크라이나 학자가 갑자기 나오더니 30분이 넘게 얘기를 한다.
자기가 이미 발표했던 슬라이드를 다시 보여주면서!
우크라이나 사람의 발표가 유독 힘든 건,
그가 러시아말로 말을 하면 몽골 사람이 몽골어로 통역을 하고,
그럼 우리나라 통역이 다시 한국어로 통역을 해야 하는,
소위 3단통역이기 때문이다.
끝이 안날 것 같은 연설이 결국 끝났다.
근데 그 사람한테 산적처럼 생긴 남자가 손을 들고 질문을 하는 걸 보고 기절할 뻔했다.
우크라이나 학자는 매우 좋아하면서 5분이 넘게 답변을 했고,
3단통역을 통해 그의 얘기를 듣는 우리들은 그 5분이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학회가 끝나고 나서 우리 측 사람들은 10분이 넘게 그 우크라이나 학자 욕을 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말을 오래 하냐?"
"밥시간 되었는데 그렇게 오래 말하는 건 결례야!""거기다 질문하는 사람은 또 뭐야?"
4월 28일, PM 19: 30
저녁은 뷔페다.
음식들이 잔뜩 있었지만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었다.
눈치를 봐가면서 마술도시락에 물을 부었고,
8분간 의자 밑에 내려놓은 뒤 먹기 시작했다.
슬슬이 아니라 노골적으로 질린다.
친구가 다가와 무슨 말을 하려고 하기에 이렇게 말했다.
"너 몽골음식 맛있다고 얘기하려고 하지?"
친구가 어떻게 알았냐고 놀란다.
4월 28일, PM 20: 00
높은 사람들이 무대에 올라가 연설을 한다.
"이번 세미나가 아주 잘 끝났고 어쩌고..."
근데 갑자기, 미라 팀 대표로 내가 연설을 하란다.
그런 자리에 서본 적이 없어서 당황스러웠는데,
몽골 사람들도 다 박수를 치고 있다.
할 수 없이 나갔다.
"이런 자리에 서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몽골말로 통역.
"그래서 무슨 말을 할 지 미처 준비를 못했습니다."
통역.
"내년에 열리는 3회 세미나에서는 반드시 멋진 말을 해드리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먹는 걸 보니 갑자기 목이 말라
생맥주 한잔을 시켰다.
그 시원한 맛이라니!
맛에 놀란 나머지 500cc 생맥주 세잔을 더 마셨다.
4월 28일 PM 22: 30
다시 울란바트르 공항에 왔다.
좌석배정을 받고 할 일이 없어 1달러에 15분짜리 인터넷을 했다.
이럴 수가!
보스톤이 양키스를 세 번 다 이겼다.
4월 29일 AM 2:00
정상적이었다면 한시간 반 전에 이륙을 해야 했지만,
비행기는 아직도 떠나지 않고 있다.
"바람이 심해 이륙이 지연되고 있단다.
설마, 가긴 가겠지 했는데
두시가 넘었을 무렵, 바람이 더 심해져서 비행기가 못뜬다는 방송이 나온다.
난생 처음 대한항공에서 지정해주는 호텔에 묵었다.
2인1실이긴 해도 내가 자던 곳과는 비교도 안되게 좋은 곳이다.
아쉬운 것은 비행기에 실은 짐을 가져올 수 없었다는 것.
그 안에는, 좀 질리긴 했지만, 마술도시락 두세트가 있고,
식빵과 더불어 딸기잼이 잔뜩 있는데.....
그 생각을 하면서 잠이 들었다.
비행기가 오후 두시에 떠난다니 푹 잘 수 있겠다.
4월 29일 AM 11:00
"그래도 이번 여행은 먹는 것 때문에 고생하지 않았어."
어제 저녁 때 일행 중 하나에게 했던 말이다.
이런 걸 전문 용어로 설레발이라고 한다.
다른 이들은 호텔에서 제공하는 뷔페식을 맛있게 먹었지만,
내가 먹을 게 가방에 있고 그 가방은 비행기 안에 있는지라
난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쫄쫄 굶어야 했다.
4월 29일 PM 1:00
배가 고파 죽겠어서 조그만 가방을 열어봤더니 글쎄 김이 들어 있다.
그 김은 내가 "필요없다"고 극구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가 싸준 광천 김.
난 아내의 혜안에 거듭 고마움을 표시하며 공항 의자에 앉아 김을 뜯어먹었다.
총 두봉지의 김을 먹으니 배고픔이 약간 가신다.
내 친구가 카메라를 꺼내더니 내가 김을 먹는 모습을 찍는다.
갑자기 자신이 한심해졌다.
4월 29일 PM 6: 20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전화기를 켜고 아내에게 전화했다.
"나 배 무진장 고프니까 저녁 왕창 차려 줘."
집에 갔더니 아내와 개 두 마리가 엄청 반겨준다.
내년에 또 가야 하나를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 사진이 있으면 좋았을텐데, 제가 카메라를 가져가지 않은 관계로 나중에 받고나서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