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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쁨과 슬픔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알랭 드 보통을 처음 접한 건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였다.
그 책에서 드 보통은 시시각각 변하는 사람의 감정을 해박한 지식으로 담아냈는데,
당시 그런 류의 지식에 목말라 있던 난 드 보통에게 흠뻑 매료됐다.
그 뒤에도 보통은 날 실망시키지 않았고,
난 그가 쓴 <여행의 기술>, <행복한 건축>, <불안>, <프루스트를 아시나요>를 읽으면서
거의 빈 채로 놔뒀던 내 지적 호기심을 마음껏 충족시켰다.
딱 한번 그에게 실망했던 건 <Kiss & Tell>인데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이라는 제목에 속았던 탓이었다 (알고보니 철학책!).
그 책이 유독 기억에 남는 건
“재밌는 책 없냐?”는 친구의 부탁에 당시엔 읽지도 않았던 그 책을 추천한 거였는데,
나중에 내가 읽고 나서 친구한테 미안하다고 했다.
그랬다고 해서 내가 드 보통을 싫어하게 된 건 아니었고,
주위 사람들한테 “앞으로 난 드 보통 씨와 쭉 함께 한다”고 떠들고 다녔을 정도였다.
드 보통의 거의 모든 책을 다 읽었던 내가
이번에 나온 <일의 기쁨과 슬픔>을 주문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책이 오자마자 난 그의 책을 읽을 땐 늘 그렇듯이 막연한 설레임을 안고 책을 폈는데
이상하게도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한줄 한줄이 다 예술인지라 음미하다 보니 그런 적도 있었겠지만,
한 일주일 쯤 읽다 자다를 반복하다 결론을 내렸다.
“이 책, 별로 재미없잖아!”
일주일이면 대개 책 한권을 읽는 스피드를 감안할 때
열흘이 넘도록 아직 참치 얘기에 머물러 있는 걸 재미없다는 말 이외에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설마 드 보통이 쓴 책인데 재미가 없다는 게 말이 되냐,
혹시 내가 이상한 게 아닌가 싶어 다른 분들이 쓴 리뷰를 찾아봤다.
“역시 그의 책은 보통이 아니다”-이환님
“그에게 팬이 많은 이유를 발견하다”-violamuse님
내가 이상하구나,란 결론을 내리려고 보니 그렇지 않은 리뷰도 있다.
“...문장들은 너무 길고 난해하다”-하쿠나마타타님
“난 에세이에 취미가 없으며, 그 결과 알랭 드 보통의 글솜씨에도 빠져들지 못한다는 것을 그저 확인만 했을 뿐”-몽자&콩자님
보통이 갖는 이름값을 생각할 때 이 정도의 반응은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
확실히 이전 책들보다 이번에 나온 책은 재미가 덜한 것 같다.
한때 베르나르 베르베르에 열광했었다.
나뿐 아니라 다른 한국 독자들도 그에게 찬사를 보냈다.
베르베르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소설 주인공을 한국 사람으로 하는 등
나름의 노력을 했는데,
그런 것에 신경을 쓰느라 그런지 정작 소설은 점점 재미가 없어졌다.
그래서 난 그 책의 리뷰에 이런 말을 썼다.
“천재작가에게 우리가 바라는 건 한국 사람을 넣어주는 게 아니라
소설을 재밌게 써주는 거다.”
물론 베르베르는 내 리뷰를 읽지 않았고,
계속 재미없는 소설을 쓰다가 지금은 과거의 명성을 많이 잃었다 (이건 물론 나만의 생각일 수도 있다).
근데 <일의 기쁨과 슬픔>을 보면 드 보통도 한국 독자들에게 보답하려는지
우리나라를 여러번 언급한다.
그리고 이 책 역시 재미가 없다.
베르베르와 드 보통은 급이 다르다고 생각은 하지만,
좀 불안하다.
앞으로 드 보통의 책이 점점 재미가 없어질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