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와 두산이 준플레이오프에서 만났을 때,
난 사실 두산이 꼭 이겨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다.
나름 두산 팬이고, 두산 경기의 60% 이상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한 시즌의 결실을 추수할 포스트시즌에 그런 이상한 느낌이 든 건
올 시즌 중반부터 두산에 가졌던 실망감 때문만은 아니다.
축구나 농구와 달리 야구가 응원하기 힘든 종목인 이유는
매일 경기가 벌어지다시피 하는 것도 있지만
아무리 잘하는 팀도 승률 6할을 넘기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른 종목과 달리 야구에서 제일 중요한 투수가 한번 던지면 4일을 쉬어야 하기 때문인데
그래서 대부분의 팀은 다섯명의 선발투수로 한 시즌을 꾸려나간다.
한 팀에는 제일 잘 던지는 에이스가 있고, 그 다음으로 잘하는 2, 3선발이 있는데
4, 5선발은 크게 기대를 안하는 허접한 투수라고 보면 된다.
선발투수는 대부분 연봉을 많이 받는지라
연봉을 가장 많이 쓰는 양키스 같은 팀도
선발투수 다섯명을 모조리 에이스급으로만 꾸미지 못하는지라
못하는 투수가 나오는 날엔 질 수밖에 없고,
잘하는 투수가 나온다해도 컨디션이 안좋거나, 전날 여친과 싸웠다든지 하는 일이 있으면
잘 던질 수가 없다.
그러다보니 승률 6할이면 꽤 잘하는 축에 속하게 되고,
우리나라의 경우 반타작만 해도 4위를 해서 가을잔치에 나갈 수가 있는 거다.
두산에게 실망한 건 어떻게 된 게 단 한명도 그럴듯한 선발투수가 없느냐는 거였다.
미국 물을 먹었다는 이유로 김선우 같은 투수에게 15억을 쓴 것도 그렇고,
외국에서 데려온다는 선수가 어쩌면 위력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세데뇨와
SK에서 포기하고 버린 니코스키일까.
홍상삼이라는, 왠지 홍삼CF에 어울릴 것같은 신인투수가 등장해 겨우 숨통을 트여 줬지만
선발진 중 10승을 거둔 선수가 한명도 없을 정도로 한심한 게 바로 두산 투수진이었다.
마음을 너무 주면 상처도 큰 법,
내가 두산 경기에 시큰둥했던 이유중 하나는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팬이라고 롯데에게 1차전을 지자 가슴이 아파왔고,
2차전을 이기고 3, 4차전도 내리 이겼을 때 주먹을 불끈 쥐며 기뻐했다.
그렇긴 해도 난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었다
한 학생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에.
그러니까 준플레이오프를 일주일쯤 앞뒀을 때,
난 1시부터 4시까지로 예정된 수업에 들어갔다.
그때 그 학생이 내게 오더니 수업을 듣지 못하겠다고 했다.
“오늘 2시에 인터넷 예매가 있습니다. 표를 사려면 집에 가서 컴퓨터를 해야 합니다.”
그 학생은 매주 주말마다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롯데 경기를 관람할 정도로 광적인 롯데팬이었고,
나 또한 야구팬이었기에 그 학생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에게 말했다.
“꼭 표 사세요. 올해는 롯데가 이기길 바랄게요.”
그 학생이 예매한 표는 아마도 추석 전날 경기였을 거다.
3-0으로 앞서던 무사 만루에서 김동주가 큼지막한 홈런을 쳤을 때,
거기에 그치지 않고 점수를 더 줘서 12-1이 됐을 때,
그 학생이 감내해야 할 좌절감의 크기를 생각하며 마음 아팠다.
그 다음날 만루에서 용덕한이 3타점 2루타를 쳤을 때,
그 학생의 슬픈 눈망울을 상상하니 기뻐할 수도 없었다.
8888577이란 지옥같은 7년을 견뎌낸 팬들에게
2년 연속 준플옵 탈락은 너무 잔인한 일이다.
SK와 경기를 보느라 여념이 없는 나와 달리
그 학생은 내년 4월까지 야구 없는 6개월을 감내해야 한다.
다음 달이면 모든 팬들에게 야구가 없겠지만,
그 전까지 공중파에서 벌어지는 야구중계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 학생을 비롯한 롯데팬들은 가슴이 찢어질 것이다.
내년에는 부디 롯데가 좀 더 높이 오르기를,
그래서 그 학생의 큰 눈망울에 눈물 대신 미소가 깃들기를 빌어 본다.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면 난 사이비 두산 팬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