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동감에서 21년의 시차를 두고 살아가고 있는 김하늘과 유지태는


무선통신이 잘못 연결되는 바람에 둘 다 20대 학생인 채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하필이면 둘은 같은 대학에 다니고 있기에,

시계탑 앞에서 만나기로 한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상대는 오지 않는다.

기다리는 동안 김하늘은 시위대를 향해 쏜 최루탄 가스를 맡아야 했고,

유지태는 때마침 내린 소나기에 흠뻑 젖는다.

2시간 가까이 기다린 끝에 둘은 각자 집에 가지만,

그날 밤의 교신을 통해 둘은 서로 다른 시간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같은 대학 교수님이 전화를 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서민 선생님이 강의 영상 촬영을 좀 해주시면 안될까요?”
이해력이 딸리는지라 그분이 앞에 한 말의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내가 방학 때 인터넷 강연을 촬영하면
그걸 가지고 2학기 때 좀 더 편하게 강연을 할 수가 있단다.
학교마다 이런 걸 좀 해야 하는 모양이다.
그쪽에선 부탁이었지만, 내 입장에서도 인터넷 강연이 여러모로 편한지라
흔쾌히 하겠다고 했다.
까짓것, 방학 때 좀 고생하지 뭐.
언제 한번 만나서 자세한 얘기를 하자기에 그러기로 했고,
내가 그분 있는 곳에 가겠다고 말했다.
“네 그럼 범정관 xxx 호로 와주세요.”

범정은 우리 학교를 설립하신 분의 존함으로,

학교의 핵심 부서가 다 거기 들어가 있다.

시간이 돼서 범정관에 갔는데 xxx호가 없다.
전화를 걸었다.
“제가 그곳이 어딘지 못찾겠네요. 길치라서 이해해 주십시오.”
그는 우리은행을 얘기했다.
우리은행까지 150미터를 종종걸음으로 달려갔지만, 그곳에도 xxx호가 없다.
“아, 제가 말한 건 우리은행이 아니라 우리은행 ATM기를 말하는 건데요. 범정관으로 다시 와주십시오.”
다시 범정관으로 왔지만, 아까 안보인 게 지금 보일 리가 없다.
게다가 그 건물엔 ATM기 같은 건 없다.
결국 우린 범정관 앞에 있는 범정선생 동상 앞에서 만나기로 한다.

나: 지금 저 동상 앞이어요.
그: 저도 동상 앞인데... 혹시 깃발 보이세요?
나: 보이죠.
그: 이상하네요. 저도 나와 있는데 왜 못찾겠죠?


그의 말을 들으며 퍼뜩 떠오른 생각이 그와 내가 다른 시공간에 있는 건 아닐까, 였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갑자기 난 카카오맵이 생각났다.
그것만 있다면 자신의 위치를 상대방에게 쉽게 알려줄 수 있지 않은가.
카카오맵 캡쳐본을 보내고 난 뒤 그한테서 전화가 왔다.
“아, 이거 정말 죄송합니다. 여기는 죽전 캠퍼스거든요.”

단국대는 죽전과 천안, 두 곳에 있으며, 의대는 내가 있는 천안캠퍼스에 있다.
하지만 양쪽 다 범정관이 있고, 설립자 동상이 있고, 우리은행이 있어서
서로 다른 캠퍼스라는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영화 동감과 달리 우리는 같은 시간대에 머물렀지만,
다른 공간에서 서로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결국 그가 천안으로 내려오기로 함으로써 이 헤맴은 끝이 났다.
트렌드에 맞게 구호를 외쳐본다.
“지금까지 이런 만남은 없었다. 이건 해피엔딩인가 황당엔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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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2 15: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12 2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9-03-12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처음 웃었습니다. 마태우스님 덕분이어요.

마태우스 2019-03-12 21:29   좋아요 0 | URL
오옷 웃으셨다니 기쁩니다. 제가 해냈습니다!!

레삭매냐 2019-03-12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로만 보면 황당엔딩으로 보입니다.

마태우스 2019-03-12 21:31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예서 봬니까! 그죠? 황당엔딩이죠? 캠퍼스라도 가까우면 바로 갈텐데, 한시간 반이 걸리는지라...ㅠ 그나저나 레삭의 2019년이 걱정됩니다. 젤 어이없는 게 클로저 없이 시즌을 치른다는 거죠. 맷 반스가 뭡니까. 시범경기부터 얻어맞고 있는데... 킴브렐 데려와야 한다고 봅니다

moonnight 2019-03-13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시공간을 떠올리실 만 했네요 ㅎㅎ 수고많으셨어요 어쨌든 올해도 야구시즌이 돌아왔네요 두근두근^^

마태우스 2019-03-25 16:49   좋아요 0 | URL
글게요 야구시즌이 돌아오길 얼마나 기다렸는지... 외도 차원에서 르브론의 레이커스를 응원하다 참담한 마음으로 접었습니다

2019-03-25 07: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25 16: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비종 2019-03-30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면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필이면 그 시간에, 하필이면 그 공간에 서있게 되는. 적어도 그 순간은 두 사람의 시간축과 공간축이 일치하는 것이니까요.^^ 그 순간이 설렌다면 더할 나위없는 행복이겠습니다. 며칠 전, 그런 경험을 했답니다. http://blog.aladin.co.kr/nabijong/10763142 제목은 <남기고 싶은 하루>입니다. 시간나실 때 들러주세요~^^;
 
설이 - 심윤경 장편소설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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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윤경 작가가 새 소설 <설이>를 냈다.


장편소설을 낸 건 <사랑이 채우다>가 마지막이니, 무려 6년만이다.

좋아하는 작가가 소설집을 드문드문 내는 건 아쉬운 부분이지만,

그 퀄리티가 기다림의 고통을 다 없애주니 계속 좋아할 수밖에 없다.


<설이>는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구조된 ‘윤설’의 이야기다.
척박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설이는 공부를 제법 잘해서,
부잣집 아이들만 다니는 우수한 사립초등학교에 전학가게 된다.
기생수 (기초생활수급자) 같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임대아파트에 사는 게 무슨 큰 죄라도 지은 양 몰아붙이는 그곳에서
설이가 싸워야 할 적들은 차고 넘친다.
그런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가슴을 졸이게 되니,
책을 읽는 게 마치 액션영화를 보는 기분이다.
[...이 생일파티에 초대된 것도, 엄마들이 나에게 이만큼 관심을 보이는 것도 모두 나의 성적과 관계가 있었다. 부모가 없다고 무시하던 사람들이 내 성적을 보고서는 갑자기 관심을 가졌다. (106쪽)]

그래도 그 학교 학부모들이 설이를 받아들여주는 건 오직 공부 때문이지만,
그 공부는 설이가 동경해 마지않던 부잣집 자식들이 사지로 내몰리는 이유였으니,
드라마 ‘스카이캐슬’을 떠올리는 건 요즘이라면 당연한 일이다.
소설의 결말은 어떻게 될까?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를 잘한 설이가
고액과외로 치장한 부잣집 아이들을 물리치고 성공을 쟁취할 것 같지만
이런 평범한 결론을 내는 건 심윤경 작가가 아니기에,
난 궁금증에 사로잡힌 채 소설의 마지막을 향해 갈 수밖에 없었다.
다 읽고 난 뒤 내가 했던 말, “거봐! 이게 바로 심작가라니까!”


주제의식에 걸맞게,
이 소설에선 아이를 위하는 척하는 어른들의 위선이 낱낱이 드러난다.
이 위선의 항연을 보면서, 내가 저 입장이라면 어땠을까를 잠시 생각했다.
나 역시도 바깥에선 마음껏 뛰놀 아이들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내 자식에겐 ‘공부해야 잘산다’며 공부를 닦달하지 않았을까.
“넌 못생겼으니 공부라도 잘해야 돼!”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본다면 내가 아이를 낳지 않은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적어도 한 명은 지옥에 가는 걸 막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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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19-01-29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 책에 1등으로 리뷰를 달았네요! 마태우스 만세!

hnine 2019-01-29 0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윤경 작가는 역시 성장소설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오랜만의 출간 소식 저도 반갑네요.
리뷰 제목도, 내용도, 책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킵니다.

마태우스 2019-01-29 13:20   좋아요 0 | URL
그죠 성장소설의 아이콘ㅅㅅ 이책쓴이유도 내 아름다운 정원의 동구때문이래요

moonnight 2019-01-29 0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덕분에 심작가님을 알게 됐었죠. 새 책 소식 들었었는데 역시 읽어야겠네요.^^

마태우스 2019-01-29 13:20   좋아요 0 | URL
그럼요 심작가님은 믿어야합니다

stella.K 2019-01-29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참, 지난 토요일 K TV에 나오셨던데 그거 생방송이었죠?ㅎ

마태우스 2019-01-30 22:58   좋아요 0 | URL
그...그게요, 정치 잘 모른다고 안나간다고 버티다 끌려나온 건데요, 역시 괜히 나왔어요. 너무들 말이 많으셔서, 나라도 침묵하자 이러면서 버텼다는..ㅠㅠ 죄송합니다

stella.K 2019-01-31 12:38   좋아요 0 | URL
아유, 왜요? 잘 하셨습니다.^^

forgetedmemory 2019-02-12 0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을 보니 더 읽고싶어지네요. 아름다운 정원도 많이 언급되던데 그것도 같이 읽어야겠어요

마태우스 2019-03-12 14:20   좋아요 0 | URL
네 그거 이어서 읽으시면 더 좋습니다 답 늦어 죄송요

불사조 2019-02-20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일고 참 뭐라 표현하기 힘든 감동을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글쓰시는 분들 참 대단한 것 같아요. 신작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태우스 2019-03-12 14:21   좋아요 0 | URL
글게요 좋은 소설이란 참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선사하죠. 불사조님한테도 이 책이 좋은 기억으로 남으면 좋겠네요
 
그들은 왜 극단적일까 - 사회심리학자의 눈으로 본 극단주의의 실체
김태형 지음 / 을유문화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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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를 보면 온통 극단적인 사람들 투성이다.


서울역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던 이들도 그랬고,

즐겨가는 커뮤니티에서 한 정치인을 공격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저 사람으로 인해 세상이 멸망할 것’이란 기세로 총공격을 해댔는데,

이는 진보나 보수나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럴 때 의지할 수 있는 게 바로 책,

<그들은 왜 극단적일까>는 여기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심리학자 김태형이 쓴 이 책은 극단주의에 대해 다루는데,

그 방식이 몹시 독특했다.

심리학 분야는 워낙 미국에서 연구가 많이 된 학문이라,

대부분의 학자는 미국 학자의 주장을 진리인 듯 소개하거나,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미국 학자의 사례를 덧붙인다.

하지만 김태형은 매우 긴 분량에 걸쳐 극단주의에 대한 미국 학자들의 견해를 반박하는데,


그 반박은 현실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설득력이 있다.

예컨대 미국의 주류 심리학은 편향된 정보가 극단주의를 부추긴다면서

다양한 정보를 접하다 보면 극단주의가 약해질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 대한 저자의 명료한 반박,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들과 자유한국당 지지자들이 활발하게 대화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 극단주의가 약화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즉 진보적인 청년들이 태극기를 들고 거리에 나오는 극우 노인들과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게 되면 그 노인들이 극단주의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믿는 것은 극히 비현실적이라는 말이다. (122쪽)]


이유인즉슨 사람들은 정치적 지향 같은 중요한 의제를 다룰 때는

정보의 취사선택을 매우 편향적으로 하기 때문에,

설사 가짜뉴스라 할지라도 자신의 입맛에 맞는다면 그걸 사실로 받아들인다.

노래 ‘Yesterday’의 가사를 써놓고 ‘BBC도 박대통령 탄핵을 비판했다’라고 했을 때,

태극기 부대원들이 열광했던 건 그들이 영어를 몰라서만이 아니라,

그들의 원했던 내용이었기 때문인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주류 심리학이 이런 엉터리같은 얘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면에 불순한 동기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지배층이나 엘리트는 지배당하고 착취당하는 민중이 더 이상 참지 못해서 들고 일어날까 봐 두려워한다...민중항쟁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서는 민중을 조종하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지배층의 계급적 동기가 반영된 것이 바로 미국 심리학의 수동적인 인간관이다. (149쪽)]

즉 미국의 집단심리 연구는 “태생적으로 어용학문이었다” (155쪽)는 게 저자의 말,

심지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스탠포드 교도소 실험’ 등 일련의 심리연구들도
사실은 조작된 것이란다.

‘민중이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악마가 될 수 있다’는,

그들의 민중혐오 사상을 퍼뜨리기 위한 것이었다나.

 

 

마지막으로 저자는 우리나라야말로 극단주의가 설칠 조건을 다 갖춘 나라라고 말하면서

이를 줄이기 위해서는 나름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가 제시한 것들이 자본주의의 개혁, 기층민주주의의 실현 등인데,

말이야 맞는다 쳐도 어째 좀 공허한 것 같기는 하다.

그렇다 해도 이 책을 통해 극단주의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할 수 있었으니,
읽을 만한 가치는 충분해 보인다.

위의 예에서도 보듯 저자가 진보적 스탠스를 취한 분이라,

태극기 쪽 분들은 불편할 수 있다는 것도 미리 말씀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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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좋아 2019-01-28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에서 노동자가 회사 운영에 관여해야 생사여탈권에 의한 불안을 덜 느낄 수 있다는 얘기에 공감이 많이 됐어요. 당장 도입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

마태우스 2019-01-29 00:41   좋아요 0 | URL
아 네. 댓글 감사드립니다. 댓글에 목말라 있던 터라 더 고맙네요. 근데 저도 나이를 먹었나봐요. 과거엔 님같은 생각이었는데, 많이 보수화됐어요 ㅠㅠ

책이좋아 2019-01-29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연탄‘이라는 시가 생각나네요. 한때 뜨거웠던 적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꽤 잘 산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각자 보수에 대한 기준이 달라서 남들의 기준으로는 보수적이라 보기 어려울 수도 있고요 ^^

마태우스 2019-01-29 13:21   좋아요 0 | URL
앗 저는 뜨거웠던적이 없습니.다ㅜ 그시절 암것두안한 부채감이 많이남아있어요

책이좋아 2019-01-30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럴 수 있겠네요. 그치만 그 시절 뜨거웠던 분들이 꼰대가 되어 갈 때 교수님은 목소리를 내시고 있잖아요(박근혜를 반어법으로 까시고, 다들 악플 부대가 무서워 못하는 이야기들도 하시고..) 그걸로 충분히 멋집니다.

마태우스 2019-01-30 22:5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ㅠㅠ 그래요, 꼰대는 되지 않을게요 그리고 하고픈 말 그냥 하겠습니다! 믿어주셔서 감사해요.

책이좋아 2019-01-31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응원하겠습니다~
 
당신이 남긴 증오
앤지 토머스 지음, 공민희 옮김 / 걷는나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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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당신이 남긴 증오>는 미국의 인종차별에 관한 이야기다.


‘흑인’이란 말을 쓰지 않는 게 올바르다고 하지만,

편의상 여기선 흑인-백인이라 표기한다.

십대 남자애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경찰로부터 총을 맞고 죽는다.

조수석에 앉아 그 광경을 목격한 주인공이 증언을 하지만,

그 경찰을 처벌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이게 이 책의 주된 내용이다.

소재가 소재다보니 <앵무새 죽이기>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앵무새>가 좋았던 건 주변 환경에 대한 묘사가 워낙 뛰어난데다

이게 옳다, 라고 윽박지르는 대신

어린 딸과 아버지의 대화를 통해 독자에게 무엇이 옳은지 스스로 느끼게 해준다는 데 있었다.

반면 이 책의 초반부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다소 지루했다.


짝퉁은 원본을 이길 수 없구나, 라고 느낄 때쯤
이야기에 갑자기 탄력이 붙어 진도가 빨라지는데,
이는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유지된다.

이 책이 갖는 힘의 상당부분은 인종차별이라는 소재에서 나온다.
하지만 실제사건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리얼하게 이야기를 전개하는 작가의 능력이 아니었다면,
이 책이 내게 그렇게까지 큰 울림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있다면, 이 책의 시대적 배경이 현재라는 점이다.
<앵무새>는 대공황이 끝나고 난 1930년대를 다룬다.
그때는 인종차별이 당연했고, 흑인은 그냥 2등시민이었다.
반면 지금은 공식적으로는 인종차별이 없어졌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흑인을 차별하며,
흑인으로 성공하는 건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가난한 곳에서 태어나 교육받을 기회도 없다보니
마약을 팔라는 유혹에 굴복하게 되고,
그러다 걸려 전과자가 된다.
감옥에서 나오면 갈 곳이 없으니 폭력조직에 몸담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이 없다.
그러니까 이 책은 노골적인 차별과 은근한 차별 중 어느 것이 힘드냐고 묻고 있는데,
내가 이 책을 <앵무새>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 고평가하는 건 이 때문이다.
 
각종 갑질이 횡행하는 우리나라가 여러 인종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어땠을까?
명목상이긴 해도 우리나라가 단일민족인 게 다행이다 싶지만,
그런 와중에 지역과 성별을 따져가며 차별을 일삼는 걸 보면
차별이라는 게 어쩌면 인간의 본성인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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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9-01-26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짝퉁은 원본을 이길 수 없구나.ㅋㅋ
이런 책이 있었군요.
요즘에도 미국의 인종차별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보면
영원히 없어지지는 않겠구나 싶기도 해요.

앞으로 우리나라도 단일 민족의 의미가 점점 퇴색해
가지 않을까 싶어요. 이게 인종차별을 더 부추기게 될지
오히려 희석시키는 계기가 될지 모르겠네요.
아마도 후자쪽이 되긴 어렵겠죠?

마태우스 2019-01-26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미국보다 차별을 더 많이 하는 나라잖아요. 차별총량의 법칙은 울나라엔 안맞는 듯요. 다문화가정 차별을 한다고 해서 기존 차별이 줄어들기는커녕, 더 늘어나고 있으니까요. 어디서 봤는데 한 아이에게 ‘기생수‘라고 부른데요. 기초생활수급자의 준말이라나. ㅠㅠ
 
조류학자라고 새를 다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만
가와카미 가즈토 지음, 김해용 옮김 / 박하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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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책이 나왔을 때랑 연구가 잘돼서 논문이 나왔을 때랑 언제가 더 기쁘세요?
답: 당연히 논문 나왔을 때가 기쁘죠. 본업은 속일 수가 없나봐요. 하하하.


인터뷰에서 저런 질문이 나올 때마다 내가 했던 대답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난 거짓말을 했던 것 같다.
논문이 나오기를 기다린 적은 없지만 내 책이 나올 때쯤 내 목은 십여센티는 족히 길어졌고,
책이 나온 뒤 최소한 한 달간은 붕 떠서 지낸다.
그러니 저 대답은, 과학자로서의 원칙이 그렇다는 것일 뿐
솔직한 내 심정은 아니었다.


가와카미 가즈토.
<조류학자라고 다 새를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만>을 쓴 조류학자다.
그는 희귀한 새를 찾아서 일본의 오지-주로 섬-를 다닌다.
화산폭발로 생긴 오가사와라라는 섬이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그는 햇볕을 피할 곳조차 없는 조그만 섬에서 며칠씩 묵기도 하며,

입에 파리가 잔뜩 들어가는 것도 감수하며 새를 쫓는다.
결국 원하는 새를 관찰했을 때, 그간의 고통은 기쁨으로 바뀐다.
이런 가즈토를 보면서 좀 부끄러웠다.
내가 한번이라도 저자와 비슷한, 아니 반 정도의 열정이라도 가진 적이 있었던가 싶어서 말이다.
말로만 기생충의 아버지일 뿐,
실제로는 자식을 버린 패륜애비가 바로 나다.


저자가 존경스러운 점은, 이렇게 힘들게 여기저기를 다니면서도
늘 유머를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유머는 고스란히 책에 반영돼,
책을 읽는 게 즐거웠다.

사실 이 책의 리뷰를 좀 더 일찍 쓰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작년 말에는 많이 바빠서 쓰지 못했고,
시간이 좀 생긴 올해 초엔 책이 어디 있는지 찾지 못했다.
혹시 잃어버릴까봐 책상 위에 놔뒀고, 작년 말 책의 존재를 내내 확인했건만,
막상 쓰려니 책이 없어진 것이다.
책을 찾는 데 또 며칠의 시간이 흘렀는데,
오늘 또 십여분의 시간을 책을 찾다가 결국은 포기했다.
이게 도대체 리뷰냐, 싶은 글을 리뷰라고 쓰게 된 건 다 그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리뷰를 올리는 것은
저자의 열정을 다른 독자분들도 공유했으면 좋겠다는 마음 때문이다.


작년 말, 한 번도 보지 않았던 백종원의 골목식당을 보게 됐다.
논란의 중심에 섰던 피자집 주인 때문이었는데,
그는 백종원이 내준 숙제-가장 잘 하고 또 빨리 만들 수 있는 음식을 준비하라-조차 하지 않고 손님을 맞는 뻔뻔함을 보여 시청자의 공분을 샀다.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고로케집을 차린 25세 청년도
‘어떻게 저런 정신으로 장사를 하나’ 싶었다.
음식과 과학은 전혀 다른 분야 같지만,
죽도록 열심히 해야 잘될 수 있다는 점은 똑같다.
비단 음식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일이 다 마찬가지일 터,
뭔가를 시작하려는 분들에게 가와카미 가즈토가 쓴 이 책을 권한다.
이 조류학자의 마음으로 산다면, 뭘 해도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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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19-01-26 08: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놀랍게도 책을 찾았다. 책은 내 베개 밑에 있었다. 그게 하필이면 책찾기를 포기한 순간에 나타난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雨香 2019-01-26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송구스럽습니다만, 이 책을 읽다가 한국에는 *민 이라는 분이 글을 이렇게 재미있게 쓰는데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 (마태우스님이 잘 아시는)

읽는 내내 재미있어 죽을 뻔 했는데, 에피소드 뒤에는 무겁지 않게 지식을 전달해주는 것을 보며 팬이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태우스 2019-01-26 13:29   좋아요 1 | URL
어머나어머나... 그 *민이라는 자는 저도 잘 아는데요, 이 책 저자에 비하면 몇 수 아래에요!! 암튼 재미나게 읽어주셨다니, 반갑네요. ^^

불사조 2019-02-13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를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구매해야 겠어요.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