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는 이마다 “손은 어쩌다...”라고 묻곤 한다.
그때마다 난 배시시 웃으며 “연구를 너무 열심히 하다가..”라고 답한다.
하도 여러번 말했더니 술마시다 그랬다고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좀 식상하기도 하고,
또 내가 그런 놈이라는 걸 잘 모르는 이들한테 광고하는 것도 그리 좋을 것 같지 않아서다.
그러면 사람들은 “어떤 연구를 하다가?”라며 더더욱 궁금해하고,
난 “시약병을 돌려따다 손목이 부러졌다”는, 더더욱 말도 안되는 농담을 해버린다.
이 얘기를 하는 건 두달이 넘는 공백이 손목이 아픈 데 기인한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만들고,
그럼으로써 알라딘에 충실하지 못했던 지난날을 어물쩡 넘어가려는 데 있다.
습관이란 참 신기한 것이어서
알라딘에 글을 오래 안쓰다보면 복귀하기가 참 쑥스럽다.
한때는 매일같이 들어가 글을 남기고 댓글을 달던 공간인데,
두달 쯤 안가다보니 마치 남의 집에 가는 느낌이 든다 (‘나의 서재’라고 되어 있음에도!)
8월 15일에 손을 다쳤으니 벌써 석달이 지났다.
그동안 가장 힘들었던 건 물론 오른손을 못쓰는 불편함이었지만,
왼손의 놀라운 적응력으로 인해 보름 정도만에 다 극복을 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가장 힘든 건 술을 못마시는 게 됐다.
난 아내 앞에서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각서를 써야 했고,
모임에 가서는 사이다랑 물만 마셨다.
심지어 안주가 생선회임에도!
생선회를 물과 함께 마시는 기분은
글을 오십편 가량 썼는데 댓글이 하나도 없는 그런 기분보다 훨씬 더 이상한,
그러니까 남의 페이퍼에 댓글을 달았는데 무시당하는 일을 열댓번쯤 반복하는 그런 기분?
그 생활이 벌써 석달, 술에 대한 갈증은 늘 최고조에 달해 있다.

지난 토요일, 청주에서 강의가 있어 청주에 들렀다가
입원을 한 우리 둘째를 데리러 춘천에 갔다가 집에 가는,
600여킬로가 넘는 길을 장장 7시간 반을 운전한 적이 있다.
집에 가면서 아내에게 말했다.
“먹은 것도 없이 운전만 하니 피곤하다. 오늘 술 한잔 할 수 있게 해달라.”
아내는, 이것이 또 수작이냐,는 표정으로 날 째려봤고,
난 할수없이 타협을 했다.
“그럼 가볍게 와인이나 한잔 하자.”
내 노고를 아는지라 아내는 그것마저 말릴 수는 없었다.
중국집에다 팔보채를 주문했고, 아내는 자기가 좋아하는 와인을,
와인을 안좋아하는 난 달짝지근한 빌라엠을 꺼냈다.

한잔 마셔보니 맛이 이상했다.
달짝지근하기는커녕 목을 타고 내려가며 점막을 태우는 게 신선의 술이다.
두잔째 마셨을 때 난 상황을 파악했다.전에 장모님이 주신 양주를 마시려다 오래된 콜크 뚜껑이 빠져버려
술을 한번 거르고 빈 빌라엠 병에다 넣어둔 거였다.
그러니까 그 술은 빌라엠이 아닌, 시바스리걸이었는데,
이게 웬 대박인가?
석달의 갈증을 풀려고 두잔째를 원샷한 뒤 세잔째를 마시려는데
갑자기 아내가 내 술병을 빼앗았다.
“나도 한번 마셔보자.”
반잔을 들이킨 아내는 킁킁거리며 술의 냄새를 맡았다.
“이거 맛이 왜이래? 이거, 양주 아냐?”
석달을 기다려온 갈증해소 프로젝트는 그렇게 끝이 났고,
간신히 목만 축인 터라 술에 대한 갈증은 원래보다 훨씬 더 고조된 상태다.
지금 기분이라면 소주 댓병도 혼자서 다 마실 수 있을 것 같다.
이 글의 결론.
술로 사고를 치고도 계속 술에 탐닉하는 날 보면
남자들은 대개가 야생마고, 따라서 엄격한 조련사가 필요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아내는, 탁월하고 가혹한 조련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