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딸만 넷인 집에서 자랐다.
그런 아내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아르미안의 네 딸들>을 읽고 있다.
이미 전설의 반열에 이른 이 만화책을 이제야 읽는 게 조금은 쑥스럽지만,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아무튼 우리나라 만화 중에 중동지방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초대작 만화가 있었다는 게
경이롭기만 하다.
총 10권으로 재발간된 <네 딸들> 중 현재 8권을 읽고 있는데,
아내에 초점을 맞춰서 읽으려는 게 내 의도였다.
처음에는 넷째니까 레 샤르휘나겠거니 했다.
난 당연히 그의 운명의 상대인 에일레스가 되겠고.
그런데 아무리 봐도 아내는 첫째인 레 마누아를 닮았다.
지배욕구라는 면에서 특히 그렇다.
그럼 내가 레 마누아의 운명의 상대 리할이냐면 그건 아닌 것 같다.
리할은 조그만 일로 삐져서 레 마누아를 다신 안보겠다며 성깔을 부리는데,
우리 집에서 그런 일은 상상할 수도 없지 않은가.
차라리 아내 옆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다 하는 케네스가 내 역할인 듯.
그러니까 난 이 만화책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 알아냈다고 할 수 있다.

<네 딸들>을 보고 있는 동안 KBS에선 경사가 났다.
<웃어라 동해야>에서 조동백이 안나 레이커라는 사실이 결국 밝혀진 것.
그간 그 드라마를 한달에 한번씩 보면서 난 내가 천재인 줄 알았다.
그렇게 띄엄띄엄 보면서도 내용 파악을 문제없이 해냈으니 말이다.
근데 그 드라마의 애청자인 어머니에 따르면 진행 속도가 너무 느려 답답해 죽겠단다.
하긴, 요리대회 얘기만으로도 두세달을 끄는 걸 보면
보통 드라마는 아닌 듯하다.

그 드라마의 하이라이트는 지난주였다.
강석우는 조동백이 안나 레이커라는 걸 할아버지.할머니에게 드디어 밝히기로 한다.
수십년간 동백이를 찾아온 두분임을 고려하면 바로 말해야 할텐데,
강석우는 이렇게 말한다.
“집에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니, 바로 말하고 집에 가면 될 것이지 왜 집에 가서 말을 해?
드디어 집에 갔고, 말을 하려는 순간 강석우 아들이 달려온다.
“큰일났어요. 엄마(정애리)가 전화를 안받아요.”
엄마가 애도 아니고 전화 좀 안받을 수도 있고,
안나 레이커라는 걸 가르쳐 준 다음에 아내를 찾으러 가도 될텐데,
강석우는 “안되겠다”며 아내를 찾으러 나간다.
내가 할아버지라면 강석우를 막아세우고 “안돼! 가르쳐 주고 가!”라고 할텐데
그분들은 어찌나 관대한지 그냥 보내준다.
그 다음날, 어쩌면 그 다음다음날, 어머니로부터 낭보를 전해들었다.
“민아, 드디어 밝혀졌다.”
어찌나 속이 시원한지, 8개월 된 4.5미터짜리 기생충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그 드라마의 시청자들은 하나같이 욕하면서 본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하는 게 나로서는 참 신기한데,
그만큼 우리 TV가 볼 게 없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그렇게 질질 끄는 작가에게 헛돈을 쓰지 말고
차라리 <네 딸들>을 드라마로 만들어 일일드라마로 방영하는 건 어떨까.
물론 레 마누는 아내, 케네스는 내가 나와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