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도 얘기한 바 있지만 내가 요즘 하는 일은 오래된 유적에서 기생충알을 찾는 거다.

그럼으로써 과거 시대의 기생충 감염률을 파악하고

베일에 싸인 과거 화장실의 형태를 알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선 인류의 이동에 대한 정보를 주기도 한다.

실제로 아메리카 대륙에서 아주 오래 된 십이지장충 알이 발견됨으로써

빙하기 때 인류가 아시아에서 베링해를 건너 아메리카로 건너갔다는 가설은

베링해를 건너가기도 했지만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기도 했다는 걸로 수정됐다.

이는 십이지장충이 추위에 약해 베링해를 건너가는 동안 감염이 유지되지 않기 때문으로,

이런 흥미로운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게 바로 고기생충학이다.

 

 

 

 

우리나라에서 고기생충을 하는 사람은 나랑 내 동료 한 명이 전부인데,

그래도 우리 둘이서 제법 논문을 많이 내다보니

고기생충학의 대가 라인하르트 박사(이하 라박)가 우리를 주목하게 됐다.

그러던 차에 고병리학회(여기에 고기생충학이 포함된다)에서 라인하르트를 초청했더니

흔쾌히 응했다.

다른 사람들은 외국 학회에서 그를 많이 봤지만

체질상 외국에 나가지 못하는 난 이번이 첫 대면이었다.

심혈을 기울여 발표준비를 한 건 그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전에 주최측 몇 명이서 라박과 점심을 같이 먹을 기회가 생겼고,

난 그때 처음 그에게 인사를 했다.

나이스 투 미트 유, 라고 그는 말했다.

내가 한 문장을 완벽하게 알아들은 건 그게 전부였다.

 

학계의 대가답게 그는 우리가 10초짜리 질문을 하면 5~10분짜리 답변을 했다.

외국 경험도 있고 영어도 곧잘 하는 동료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들었건만,

내 나이 또래 전체인구를 기준으로 해도 끝에서 30%에 들 정도인 나의 듣기능력으론

그의 말을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짧은 말이야 어떻게 할 수 있겠지만, 말이 길어지면 듣기가 정말 힘들었다.

거기서 일어난 해프닝들.

 

 

 

 

1) 내 질문에 대한 라박사의 답변을 8분간 듣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날 보면서 묻는다.

“Do you make sense?”

그냥 바라보기만 하던 난 급작스런 질문에 놀라 혀를 깨물었다.직감적으로 난 이게 알아들었냐고 묻는 거란 걸 알았다.

더듬거리며 말했다.

“I...I am poor at English, so I partly understand...”

그 후부터 라박은 웬만하면 날 보면서 말하는 걸 삼갔고,

난 혀가 아파서 식사를 다 못하고 남기고 말았다.

 

2) 점심을 먹고 난 뒤 우리끼리 한국말로 얘기하다가 문득 라박사를 너무 방치했다 싶었다.

그에게 점심이 어땠느냐고 묻자는 기특한 생각을 했다.

“How about lunch?”

내가 발음이 아무리 후지다 해도 이 말은 알아들었을 테지만,

라박사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옆 친구에게 사정을 말했더니 그가 이런다.

네 말은 점심 먹을래,란 말이다. 점심 맛있게 먹었냐는 How was lunch,라고 해야 한다.”

방금 밥을 다 먹은 사람한테 또 먹을래라 물어보니 황당할 수밖에.

 

3) 라박사한테 멋진 질문을 할 게 있었다.

내가 했더니 역시나, 라박사는 못알아듣는다.

옆 동료가 대신 해줬더니 라박사가 이런다. “굿 아이디어!”

그래서 그 친구를 불러서 이랬다.

아니, 내 아이디어인데 왜 네가 칭찬을 받아?”

 

4) 영어로 했던 유머 하나.

“My name is Seo Min. In Korea, Seo means the ruling party.”

 

5) 대망의 발표 시간.

참석자는 전원 한국인이었지만 라박사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려고 영어로 발표를 했는데,

이것 때문에 걱정이 돼서 잠을 거의 못잤다.

연습을 워낙 열심히 해서 그럭저럭 발표를 마치긴 했지만,

동료 선생이 와서 이렇게 말할 땐 좀 슬펐다.

확실히 영어로 하니까 유머실력을 전혀 발휘 못하는구나.”

 

 

(사진이 마음에 안드는데 남들이 잘 나왔네,라고 한다ㅠㅠ)

 

 

 

논문 쓰는 거 이외엔 영어를 잊고 사는데다

해외연수도 일본으로 갈까 싶어서 영어의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고기생충의 대가와 반나절을 보내면서

내가 영어를 잘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며 탄식한다.

지금이라도 영어회화 공부를 하면 어떨까 싶어 천안의 영어학원을 검색해 보지만,

라박사를 또 언제 만나겠냐는 검은 마음이 검색을 방해한다.

연구도 안하고 놀기만 했던 30대 때 영어라도 공부할 걸 그랬다.

 

* 보너스 컷.

사진제목: 장난꾸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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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2-07-15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영어 땜에 스트레스인데..ㅜㅜㅜ ..이넘의 영어..ㅜㅜ

마태우스 2012-07-15 19:27   좋아요 0 | URL
글게요 입시만 끝나면 완전히 끝인 줄 알았는데ㅠㅠ

BRINY 2012-07-15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옹? 맨 마지막 사진??

마태우스 2012-07-15 19:27   좋아요 0 | URL
어맛 브리니님 안녕하세요 저게요 제목이 장난꾸러기잖아요. 유골 가지고 장난친 거랍니다. ^^

야클 2012-07-15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여간 나랑 많이 닮았다니깐!

마태우스 2012-07-15 19:28   좋아요 0 | URL
외모는 차이가 많이 나지 않니...?

야클 2012-07-15 22:43   좋아요 0 | URL
설마 외모가지고... ^^

http://blog.aladin.co.kr/yahkle/3359696

마태우스 2012-07-19 09:29   좋아요 0 | URL
아, 글쿠나. 난 그래도 어제 퇴근길에 천안 터미널 근처의 영어학원 전단지 받아가지고 왔다. 난 영어는 절대로 얼굴 보면서 익혀야 한다고 믿고, 내가 돈을 내면 돈값을 하려고 열심히 하걸랑. 1년 후에 영어로 프리토킹하세.

재는재로 2012-07-15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장소가 어디죠 발굴장인가요

마태우스 2012-07-19 09:28   좋아요 0 | URL
아 저기는 박물관이어요. 맨 아래 사진은 외국의 발굴장이구요

이진 2012-07-15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재미나요. 마태우스님 재치는 국가대표급!
저는... 저 간단한 영어 유머조차 이해못하겠는데, 어디 설명 좀... ㅎㅎㅎ

마태우스 2012-07-19 09:27   좋아요 0 | URL
님 세대는 저희 떄랑 또 달라서, 다들 영어를 잘하더라구요. 님도 아마 그럴 것 같은데요. 제가 구사한 영어유머는 원어민한테만 통하는 듯해요 호호

hnine 2012-07-15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 좀 못하셔도 돼잖아요, 이렇게 글을 재미있게 잘 쓰시는데...

마태우스 2012-07-19 09:26   좋아요 0 | URL
아유, 격려해주셔서 고마워요. 근데 제 분야에서 좀 하려면 외국 학자들과도 좀 얘기해야 하거든요. ㅠㅠ

하늘바람 2012-07-16 0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엊그제 연가시 영화 소개하는 프로그램에서 마태님을 본거 같아요 그게 영화 속 장면인지 그냥 소개인지
넘 유명해지시는 거 아녀요?

마태우스 2012-07-19 09:24   좋아요 0 | URL
그럴 리가요 아직 듣보잡이구요, 앞으로도 쭉 그럴 거 같은데요^^

마립간 2012-07-16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라박사님이 마태우스님과 대화하기 위해 한국말을 배우는 날을 꿈꾸겠습니다.

마태우스 2012-07-19 09:24   좋아요 0 | URL
하핫 마립간님두... 그분은 저보다 열살 이상 연배가 높기 떄문에, 새로운 언어 배우는 게 어려울걸요. 한살이라도 어린 제가 배워야죠^^

다락방 2012-07-16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금 30대이니 공부 좀 할까봐요..하아-

마태우스 2012-07-19 09:23   좋아요 0 | URL
다락님 지금 공부하심 금방 늘 거예요. 문학성에 영어까지 갖춘다면 최강이죠

風流男兒 2012-07-16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행을 다녀오면 항상 영어를 하자.. 하지만, 어느새 그 마음은 사라지기 일쑤에요 ㅠ
정말 자동 통번역기라도 어디 없는지..

마태우스 2012-07-19 09:22   좋아요 0 | URL
그래서 어제 천안 지역의 회화학원을 알아봤어요. 주말반이라도 다니려고 합니다. 라박사한테 "영어공부 열심히 할 거다. 담엔 프리토킹 하자"고 약속했거든요

blanca 2012-07-16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라박사님 5~10분 답변에 그만 웃어버렸어요. 외국 사람들은 꼭 그러더라고요--;;

마태우스 2012-07-19 09:22   좋아요 0 | URL
흠, 라박사님만 그런 건 아니군요. 전 그분이 대가라서 그런 줄 알았다는...^^

2012-07-16 14: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19 0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17 08: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19 0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테레사 2012-07-20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하...근래 좀 우울했는데 마태우스님의 서재를 발견하고 하루하루 들락날락하는 재미로 삽니다...마태우스님은 정말이지 멋진 분 같아요...근데 왜 마태우스일까 싶은 의문이 드네요.....

마태우스 2012-07-22 23:54   좋아요 0 | URL
부끄럽습니다. 그게요 마침내 태어난 우리들의 스타,의 줄임말이랍니다^^

산사춘 2012-07-22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첫사진 표정 짱이십니다.
전 영어로 먹고 사는 주제지만 리스닝은 푸어족입니다.
사실 한국말도 못 알아먹어서 힘들어요. 전 글이 좋아요.
하지만 마태님의 발전을 기원합니다. 영어로도 웃겨주세요.

마태우스 2012-07-22 23:55   좋아요 0 | URL
영어유머,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학원 전단지를 좀 뒤져보니까 딱이 마음에 안들었는데
학교 안에 어학원이 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습니다.
나중에 영어로 프리토크 해요
댓글저장
 
사랑의 기초 : 연인들 사랑의 기초
정이현 지음 / 톨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주제넘게도 글쓰기 강의를 하고 있다.

그것도 2년째로, 강좌 제목은 <과학적 글쓰기>다.

믿는 거라곤 경향에다 3년째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는 것과

빈약한 결과에도 미사여구를 동원해 그럴듯하게 논문을 써왔다는 건데,

학생들이 뭘 좀 얻어갔는지 여부는 강의평가가 말해주겠지만

개인적으론 무지 부끄럽다.

내가 대체 뭐라고 그런 걸 가르치나.

 

외부강사를 모시는 건 그 부끄러움을 조금이나마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작년엔 내 영원한 은인이자 무영문학상 수상작가인 xxx 작가님을 모셨는데,

감동을 받은 학생들이 "한명 더 모셨으면 좋겠다"고 강의평가에 썼기에

올해는 두분의 강사를 목표로 했다.

물론 내 영원한 은인 xxx 작가님은 어려운 와중에도 흔쾌히 와주셨지만

나머지 한명이 문제였다.

ㄷㄱㄴ로 유명한 xxx, 문화평론가 ㅈoo, ㄲoㄴ oㄹo의 xxx 등등

많은 작가들에게 문자나 메일로 강의를 부탁드렸지만,

이곳은 천안이고, 강의시각은 오후 1시 20분이었다.

내 강의에 오면 하루를 다 날려야 하니, 선뜻 내키지가 않는 것 같았다(강사료도 적은데다!).

 

그나마도 대부분 응답을 안하는 걸로 답변을 대신했지만

정이현 작가님은 "그럼요, 서민님 기억하죠"로 시작되는 따뜻한 답장을 보내주셨다.

결론은 하는 일이 많아서 안되겠다,는 거였지만,

날 기억하고 계시다는 게 무지무지 기분 좋았던 기억이 난다.

메일을 받고나서 인터넷 검색을 해봤더니

프랑스의 유명작가 알랭 드 보통과 사랑에 관한 책을 집필 중이란다.

정말 바쁘시겠구나, 싶었고 그 와중에도 답장을 보내주신 것에 감사드렸다.

 

그 바쁨의 결과물인 <사랑의 기초>를 읽었다.

아, 바빴던 보람이 있구나,라는 감탄이 나오는 그런 책.

대부분의 책들이 사랑을 장밋빛으로 그리건만

이 책은 어떤 다큐보다 더 사랑의 진짜 모습을 적나라하게 말해주고 있다.

만남 초기엔 자기들의 만남에 작용한 수많은 우연들을 생각하며 서로를 운명이라 생각하다

권태기가 되면 헤어지잔 말도 못한 채 상대가 먼저 그 말을 해주길 기다리는 모습이라니,

"원래 그런 사람들 있어요. 관계가 끝난 걸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끝까지 자기가 악역을 맡기 싫은 거예요. 미적미적.

상대방이 알아서 정리하기를 바라는 거죠."

이 대목을 읽고 마음 한구석이 따끔했다.

"어느 순간부터 현석은 늘 바쁘다고 했다. 주중에는 피곤했고, 주말에는 친구들 모임에 나가야 한다고 했다."라는 대목에서도 과거의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지금 아무리 좋은 사람인 척해도, 사실 난 나쁜 놈이었단 걸

이 책을 읽으며 깨닫는다.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이런 책이야말로 좋은 책이 아닐까.

정작가님, 우리 학교 강의는 그냥 제가 알아서 잘 하겠습니다. 대신 좋은 책 많이 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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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2-07-12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학적 글쓰기>는 마태님이 재밌게 잘 하실 거 같아요.^^
강사비 적으면 강사 모시기도 힘들죠.
저도 월욜에 강사비는 적지만 부탁할 때마다 선뜻 받아주시는 교수님 모시고
다산 특강, 주민교양강좌를 엽니다.^^

2012-07-13 1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12 06: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13 18: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2-07-12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앗, 저는 이 책 관심도 없었는데 이 글을 읽고나니 이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불끈.

아, 마태우스님. 제가 유명 작가라면 정말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면 마태우스님께 이메일을 보내서, 제가 마태우스님 글쓰기 강의에 강사로 하루쯤 가고 싶은데 받아주실건가요, 라고 할텐데 말입니다. 저는 작가가 될 수는 없겠지만, 제 마음이 이렇다는 것은 알아주셔요, 마태우스님. 흑.

마태우스 2012-07-13 18:05   좋아요 0 | URL
음, 우린 참 이상해요. 둘 다 서로의 팬이라니, 이럴 수도 있는 거군요. 전 다락방님이 세상에서 리뷰를 제일 잘쓴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분이 제 리뷰를 읽고 책에 흥미가 동했다니 기분 좋습니다. 내년에 강사로 모시겠습니다. 그때 꼭 와주십시오. 리뷰 쓰는 법에 대해서요!

stefanet 2012-07-12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책을 찾아서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리뷰입니다! :)

마태우스 2012-07-15 14:50   좋아요 0 | URL
가,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꾸벅

페크pek0501 2012-07-14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학적 글쓰기 강의, 저도 듣고 싶네요.ㅋㅋ
알랭 드 보통의 <사랑의 기초>는 구입하려고 찜해 놓았는데, 정이현 님의 책까지 관심이 가네요.

요즘 마태우스 님의 불타오르는 글발에 "앗 뜨거"하고 갑니다.




마태우스 2012-07-15 14:50   좋아요 0 | URL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 이후 저랑 소원해졌답니다. 대신 정이현 작가님은 앞으로도 쭉 팬 하려구요. 보통 책 읽으시고 소감 말해주세요. 글구 제 강의는, 호홋, 알라딘 분들이 들으면 너무 수준낮다,라고 할 거 같은데요
댓글저장
 

 

 

 

 

 

 

 

 

예삐는 옥션에서 고른 강아지다.

두번째 아이를 원했던 아내는 옥션에 올려진 강아지 사진을 보고 한눈에 반한다.

동대문 집을 찾아간 아내는 실물이 사진보다 훨씬 더 예쁘단 것에 놀라 서둘러 계약금을 건다.

엄마 젖을 좀 더 먹고 오라며 예삐와 헤어진 건, 지금 생각하면 위험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이 예삐를 보고 "내가 가져가겠다"며 계약금의 두배를 물어준다고 한다면 어쩌겠는가?

하지만 인연이란 게 있는지 예삐는 우리 집으로 왔다.

난 처음부터 예삐가 좋았다.

이전 강아지의 추억 때문에 다른 강아지를 예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예삐를 보고 나선 한눈에 반했다.

머리 좋고 사람 잘 따르고 무엇보다 예쁘고.

녀석은 동작 하나하나가 예술이었다.

아장아장 발을 올리며 걷는 거나 옆으로 누워 자는 것도 그랬고,

특히나 아내가 '미친 강아지'라고 이름붙인, 첫째 강아지 뽀삐 주위를 뺑뺑 도는 장면은

언제든 우리를 즐겁게 했다.

아내는 말했다.

"내가 바라던 삶이 바로 이런 거였어."

 

그 평화가 깨질 조짐이 보인 건 2010년, 그러니까 예삐가 두살 때였다.

걸핏하면 쓰러지기에 병원에 데려갔더니 심전도 사진이 기가 막혔다.

페이스메이커에서 심장을 뛰라는 신호를 잘 안보내고 있었고,

예삐가 쓰러진 건 그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심장수술을 하는 강원대병원에 찾아간 덕분에

예삐는 인공심박기를 달았는데,

이게 잘 정착되기까지 두 번의 수술을 더 해야 했다.

그래도 이젠시련이  끝났구나, 다시금 평화가 찾아오겠거니 했다.

앞날에 대한 희망이 있던 그땐, 지금 생각하면 참 행복한 시절이었다.

 

올해 예삐는 갑자기 발작을 하기 시작했다.

그 전에도 조짐이 있었지만, 전신적인 발작을 한 건 처음이었다.

침을 흘리며 괴로워하는 예삐를 보면서 아내와 난 "이렇게 예삐를 보내는구나"는 생각까지 했지만,

다행히 예삐는 약을 먹고 괜찮아졌다.

그때부터 스테로이드 인생이 시작됐다.

매일같이 스테로이드를 먹었고, 하루라도 안먹으면 발작이 재발했다.

스테로이드의 부작용은 만만치 않아, 예삐는 식욕이 점점 증가했고,

날씬했던 녀석은 어느덧 뚱보의 상징인 뽀삐보다 비대해졌다.

자연히 움직임도 둔해졌고, 내가 열광했던 '미친 강아지' 같은 건 다시 보기 힘들어졌다.

 

어느 순간부터 예삐는 걷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풀밭에 내려놔도 헉헉거리며 앉아만 있는 예삐,

혹시 심부전이 온 게 아닐까 싶어 병원에 데려갔더니 빈혈이 아주 심하단다.

수혈을 받아야 할 정도라니, 그것 때문에 심장이 무리를 했을 수도 있겠다 싶다.

이제 예삐는 발작약에다 빈혈약까지 같이 먹어야 한다.

긴병에 효자 없다고, 예삐를 정성으로 간병하던 아내는 점점 지쳐 간다.

생활비는 물론이고 '알바'라고 부르는 원고료와 강연료 등도 거의 대부분 예삐한테 들어가,

처음 마티즈 중고를 살 땐 장난 비슷한 마음이었는데

지금은 정말로 마티즈 중고밖에 탈 수 없는 사정이 됐다.

 

처음 예삐를 고를 때 아내는 강아지의 미모와 더불어 뒷다리가 튼튼한지를 확인했다.

첫째 강아지 뽀삐가 슬개골 수술에 고관절 수술, 거기에 발바닥 수술 삼종세트를 한 것도 모자라

자궁축농증에다 슬개골 재수술을 한 것에 질려서 다리 튼튼한 걸 본 거였는데,

요즘 보면 첫째 아이가 오히려 건강해 보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도 헉헉거리며 엎드려만 있는 예삐,

우리도 그 소리가 힘들지만 본인은 얼마나 괴로울까 하는 생각에 안스럽기만 하다.

"예삐야 걱정 마. 우리가 꼭 책임질게"라고 수시로 말해 보지만,

아내가 그런 것처럼 나도 점점 지쳐가는 건 어쩔 수 없다.

 

원래 우리 생각은 예삐 이후 3년쯤 있다가 세번째 아이를 입양하는 거였다.

강아지 세마리가 나란히 앉아서 우리를 바라보는 모습, 생각만 해도 예쁘잖은가?

이제 그런 장면은 실현 불가능한 꿈이 되버린 것 같다.

그저 예삐가 우리에게 준 추억들을 되씹으며 살아가야 할 듯 싶은데,

예삐가 다른 집으로 갔다면 얼마나 구박받을까를 생각하면

녀석이 우리 가족이 된 건 다행스런 일이다.

아무래도 이건 신이 개에 대한 우리 사랑을 시험해 보기 위한 건 아니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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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2-07-11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삐가 빨리 건강해져야 할텐데...

마태우스 2012-07-11 23:24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양심이 없다니깐요! 글구 본문에 쓴 마티즈 얘기는, 좀 과장이랍니다. 그래도 예삐는 학원비가 안들잖아요. 너무 걱정 마시어요 저희가 꼭 고쳐놓을게요

웽스북스 2012-07-11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예삐가 정말 좋은 주인을 만났어요. ㅠㅠ
저는 사실 동물을 무서워하는데요. (공포증이 살짝 있어요) 예삐 사진은 정말 사랑스럽네요. 첫번째 사진이요. 책에 기대 있는 포즈하며, 살짝 풀린 표정, 하며... 왜 반하셨는지 알 것 같아요. ㅎㅎ

마태우스 2012-07-13 18:06   좋아요 0 | URL
헤헤 예삐 캡 귀엽죠? 사실 개에게만 이런 거, 좀 문제가 있어요. 소나 돼지도 얼마든지 사람을 따르는데, 저는 그 동물들을 먹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으니깐요. 말이 이상하게 나갔는데요, 암튼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예삐를 알아주셔서요

이진 2012-07-12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예삐가 정말 안됐어요. 자기는 얼마나 힘들까요. 수의사가 되고 싶었던 제가 감히 말씀드리건대, 마태우스님께서는 천사십니다!

마태우스 2012-07-13 18:07   좋아요 0 | URL
네??? 예삐가 천사죠 제가 왜 천사...? 수의사 되시면 천안서 좀 개업해 주세요. 천안에 마음놓고 갈만한 곳이 그닥 많진 않더라구요.

heima 2012-07-12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데리고 있는 강아지는 뽀삐와 같은 종이라 슬개골 수술을 늘 염두에 두고 있고, 친정에서 데리고 있는 강아지는 예삐와 같은 종인데 그 애도 자주 아파서.. 마태우스님 댁 두 마리 사진 보니 뭉클하네요. 예삐 여름 나기 힘들어 하지 않나요? 건강하게 잘 지낼 수 있기를 멀리서 응원 또 응원합니다!

마태우스 2012-07-13 18:08   좋아요 0 | URL
아이고 님도 페키니즈군요 페키 한번 키우면 계속 페키만 키우게 되는데, 그 녀석들이 유전병이 많더라고요. 응원 감사드리구요 잘 기르겠습니다

야클 2012-07-12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과 난 참 닮은게 많네요. 버티다 버티다 결혼 늦게 한것도 그렇고( 그것도 둘 다 출중한 미모의 아내와), 동물을 좀 과하게 좋아하는 것도 그렇고. 우리집에도 입양한 길냥이 한마리가 심하게 아파서 늘 병원신세라서 고양이사랑에 대한 신의 시험을 받고 있답니다.

마태우스 2012-07-13 18:09   좋아요 0 | URL
하지만 야클님은-갑자기 웬 존대말?-길냥이를 친자식처럼 기른다는 점에서 우리 부부와 상대가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길냥이 거두는 사람은 천사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지라.... 요즘 술 끊었으니, 그것도 다른 점이 아닐까 싶다는...

건조기후 2012-07-12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예전에 심장수술할 때 올리셨던 글 기억납니다. 수술 잘 되고 좋아지기를 바랐는데 더 많이 아프게 됐군요 ㅜ 작은 게 얼마나 힘들지... 울집 다롱이 수술하던 때도 생각나고.. 넘 안쓰럽네요. 그래도 마태우스님처럼 좋은 아빠를 만나서 정말 다행이에요.

마태우스 2012-07-13 18:09   좋아요 0 | URL
아유 녀석이 정말 양심도 없게 계속 아프더라구요. 우린 결심했어요. 꼭 다 낫게 해서, 재룡도 피우게 해서, 치료비 본전 뽑겠다구요^^

울보 2012-07-12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과 아내님이 마음이 느껴져요,
저도 예삐가 더이상아프지 않기를 같은 마음으로 바람니다,

마태우스 2012-07-13 18:10   좋아요 0 | URL
울보님 따스한 댓글 감사드립니다. 님 말씀처럼 예삐가 잽싸게 나았음 좋겠습니다

수호천사 2012-07-18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진행성(선천적) 슬개골탈구는 전형적인 유전질환이지만 수술없이도

평생을 같이하는 아이들이 많지요.

슬개골앞 전십자인대를 튼튼하게 해주시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관절에 좋은 영양 보조제등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외국에서는 슬개골, 대퇴골 탈구의 아이들은 교배를 못하도록 막고 있습니다.

저희 카페에 슬개골탈구와 관련된 자료를 참조하세요.

동물병원 리얼스토리 카페지기로부터...

http://cafe.naver.com/meshabber

산사춘 2012-07-22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러면 안 되는데 미모 때문에 더 가슴이 아프네요.
예삐야, 부모님 걱정 안 하시게 빨리 나아라~

마태우스 2012-07-22 23:54   좋아요 0 | URL
요즘 많이 좋아졌답니다. 춘님은 건강 괘안으신지요???

산사춘 2012-07-25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부모님 걱정 안 하시게 많이 좋아졌어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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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살았던 오늘 - 이제 역사가 된 하루하루를 읽다
김형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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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는 분이 책을 한권 보낼테니 서평을 부탁한다고 했다.

지인이라고 안하고 아는 분이라고 한 건 그렇게까지 친분이 있는 건 아니어서인데,

알고보니 그 아는 분이 해당 책의 저자도 아니었다.

어떤 책일까 했는데 배달된 책을 보니 제목이 <그들이 살았던 오늘>이고, 무지 두껍다.

척 보니까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의 얘기 같다.

별로 재미가 없을 것 같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삼일간 보지 않았다.

그 대신 다음날 배송된 <나의 삼촌 브루스 리>을 폭풍처럼 읽었다.

 

책이 충분히 만족스러웠기에 그 포만감을 간직하기 위해 <제노사이드>를 마저 읽을까 하다가,

아 참, 서평을 부탁받았지,란 생각에 그래도 예의상 책을 집어들었다.

누운 채 책날개를 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자 이름이 낯익다 했는데, 내가 아는 그 김형민이 맞았다.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익함과 재미를 모두 갖춘 <썸데이서울>의 저자.

그 책을 몇 분에게 추천했고, 알라딘에 <별 여섯 개를 주고 싶습니다>란 리뷰도 썼는데,

그 리뷰를 보고 책을 읽게 된 알라딘의 대표적인 서평가인 마냐님은 그 책에 대해 이런 서평을 썼다.

[그의 글은 살아 있다...그다지 에세이류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완전히 사로잡혀버렸다. 코드가 맞는달까....무엇보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는 삶....을 지향하면서도 때로는 슬쩍 고개를 숙여버리고...때로는 나중에야, 화끈거리는 얼굴로 진실과 마주하는 우리네 사는 방식. 그 진정성을 함께 나눌 수 있는게 이 책의 미덕이 아닌가 싶다]

 

<그들이 살았던 오늘>을 읽으면서 마냐님이 했고 <범죄와의 전쟁>에도 나왔던 그 대사가 떠올랐다.

"살아 있네."

특정 날짜와 관계된 사람을 선정해 그에 관한 얘기를 하는 내용인데,

모르는 사람의 경우엔 그에 관한 소개를 해주고, 아는 사람인 경우엔 우리가 모르는 뒷얘기를 해준다.

글쓰기에 관한 책에 이런 말이 나온다.

"그는 키가 컸다"라고 하는 대신 "그는 출입문에 들어갈 때 허리를 구부렸다"라고 하면 더 생동감이 있다고.

김형민의 글은 생동감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주고 있으며,

독자들은 그 사람의 생을 옆에서 관찰하는 것처럼 실감나게 느낄 수 있으리라.

게다가 그의 삶에 관해 나름의 코멘트를 할 때면 가슴이 애잔해진다.

예를 들어 형사를 도와 칼 든 소매치기와 싸우다 목숨을 잃은 이근석씨 얘기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동료들은..몽둥이라도 하나 들었어야 한다는 둥, 너무 무모했다는 둥 사설을 달고 있었다. 그때 한 선배가 그 구설들을 한 마디로 틀어막았다. "용기 없으면 용기 있는 사람 존경이라도 하자. 그 사람이 그걸 몰라서 그랬겠냐.]

그러면저 저자는 이렇게 우리를 한번 더 부끄럽게 한다.

"용기라는 건 남보다 한발 더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발을 내딛었다가 상처받은 사람의 용기를 기리기보다 한발 나서지 않아 온전할 수 있었던 지혜를 대견스러워하는 것에 더 익숙하다....용기는 무모함으로, 때로는 미련함으로 폄하되기 일쑤다.]

김형민의 전작 <썸데이서울>은 베스트셀러가 되지 못했다.

좋은 책이라고 다 잘 팔리는 게 아니라해도, 그리고 피디로 일하는 저자가 책의 판매에 그렇게 목을 맨 건 아니었다 해도, 무지 아쉬웠다.

<그들이 살았던 오늘>은 이왕이면 좀 더 많은 이들에게 읽혔으면 한다.

저자가 나랑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이 책을 읽은 사람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가 더 나은 사회가 될 거라는 확신 때문에.

책에 나온 말을 살짝 바꿔보자.

용기라는 건 남이 안사는 이 책을 장바구니에 담고 결제까지 하는 거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책을 산 사람의 용기를 기리기보단 책살 돈으로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을 본 걸 대견스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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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12-07-10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곰곰히 생각해보니 썸데이 서울을 마태우스님 덕분에 읽게 된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분께 선물한터라 지금 제 손엔 그 책이 없지만 저도 그 책이 참 좋았어요. 글쓴 의도를 선명하게 제시하진 않지만 책을 읽다보면 저자가 말하려는게 맘에 와닿아요.

마태우스 2012-07-11 21:12   좋아요 0 | URL
그래요 자기 주장을 강하게 하지는 않는데요 은연중에 저자의 의도가 와닿는 게 이번 책에서도 느껴지더군요. 아치님은 책의 핵심을 정확히 짚어내세요!

무해한모리군 2012-07-10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적극 추천이시니 읽고 제 소감도 남길게요 ㅎㅎ

마태우스 2012-07-11 21:12   좋아요 0 | URL
아 네...원래 이런 댓글 보면 "무섭다" 이래야 하는데
저 책은 워낙 자신있지요^^

moonnight 2012-07-10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용기있는 사람이 되고자 보관함에 넣습니다. 감사합니다. ^^

마태우스 2012-07-11 21:11   좋아요 0 | URL
아 네..달밤님은 원래 용기있는 분이시죠^^

재는재로 2012-07-11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네이버 검색하다 님을 발견했습니다 숨은 그림찾기도 아니고 연가시에서 나오시네요 단국대학교 의학대학 기생충학 박사 서민 교수 Q & A
영화 연가시를 검색하다 발견했습니다
인터뷰를 보니 화면 잘받으시네요 목소리도 중후한게 좋은 다음에도 볼수 있으면 좋겠네요

마태우스 2012-07-11 21:11   좋아요 0 | URL
어..제가 네이버에 나오나요? 찾아봐야겠군요 근데 전 목소리도 엉망이고, 화면에 나올 땐 너무 바보같아요ㅠㅠ 연가시 인터뷰라고 다르겠나 싶네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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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나의 삼촌 브루스 리 나의 삼촌 브루스 리 1
천명관 지음 / 예담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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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관은 그 이름만으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책을 사게 만드는 작가다.

그가 쓴 장편은 두 편밖에 안되고, 그 중 <고령화 가족>은 뭐 그렇게 재밌다고 생각지 않지만,

데뷔작이었던 <고래>가 워낙 뛰어난 작품이라,

후속작이 그 정도 수준만 유지한다 해도 읽을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해서다.

하지만 내 기대와는 달리 후속작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는데,

데뷔작에 쏟아지는 찬사 때문에 작가가 부담을 느끼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영화 <지구를 지켜라> 이후 장준환 감독이 결혼 말고는 한 일이 없는 것처럼.

 

<나의 삼촌 브루스 리>를 보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그전에 읽고 있던 다른 책들을 제쳐두고 읽기 시작했는데,

<고래>에서 보여줬던 이야기꾼의 재능이 여전한데다 유머까지 잔뜩 포진해 있어 한 며칠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소설가 성석제한테서 유머기법을 배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데,

예를 들어 이소룡의 대역을 위해 일군의 젊은이들이 홍콩으로 배를 타고 건너가는 대목을 보자.

[이봐 젊은이 인생은 분명 용기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지혜도 필요한 법이라네,라고 말해주고 싶은 이소룡, 그런데도 말귀를 못 알아듣고 그게 무슨 뜻인데요,라고 물으면, 그러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말이지, 음, 그럼 이렇게 얘기해볼까? 옛날 이탈리아에 프란체스코란 성인이 한분 계셨는데 그분께선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남기셨다네. 주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하게 하시고,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체념할 줄 아는 용기를 주시며,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그런데도 여전히 아이, 씨발, 그러니까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고요,라고 하면 가지 말라고 인마! 가봤자 안된다고!라고 말해 주고 싶은 이소룡...(1권 318쪽)]

 

책 말미에 실린 작가의 말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독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고마워요, 여러분!"

저자가 이러는 건 그 구절을 읽는 독자라면 필경 책을 사봤을 거니까 그런 것일게다.

만일 책이 별로인데 작가가 이런다면 더 짜증이 나겠지만,

워낙 책을 재미있게 읽어서 그런지 마음속으로 이랬다.

"뭘요, 제가 감사드려야죠. 이렇게 멋진 책을 써주셔서요."

지금 막 생각난 거 하나. 독자가 작가의 말을 읽는 건 책이 재밌을 때일 확률이 높다.

내가 좋아하는 페더러 선수가 우승했을 때 시상식까지 보게 되는 것처럼,

재미있는 책을 폭풍처럼 읽고나면 여운이 남아 작가의 말까지 보게 되는 것 같다.

그나저나 천명관의 다음 작품은 또 언제쯤 읽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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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는재로 2012-07-10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재미있죠 이소룡이라는 당대의 액션배우를 등장시키지만 결국 이소룡과 같은 시대를 살아간 평범한 남자 삼촌의 이야기죠 이소룡을 동경하고 그를 닮기를 원했지만 결국 무너져 버린
남자 80년대 군사정권아래 상처받고 무너진 인간군상들의 이야기

마태우스 2012-07-10 11:17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삼촌의 삶이 너무 답답할 때가 많지만 그래도 뭐, 그 정도면 해피엔딩인 듯... 그나저나 그 상구란 아이, 악마더군요. 어떻게 그런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지, 소설인데도 읽다가 놀랐답니다.

레와 2012-07-10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보관함에 있어요!! ^^

마태우스 2012-07-11 21:13   좋아요 0 | URL
아 네... 한 며칠간 이 책의 폭풍에 빠져보시면 천명관의 팬이 될 거예요.

좋은날 2012-07-10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재미있어서 아는 사람들에게 다 선물하고 싶은 책이예요.
상구가 한 짓은 소설인데도 읽으면서 어찌나 속이 상한지...
천명관님의 다음 소설이 빨리 나왔음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마태우스 2012-07-11 21:14   좋아요 0 | URL
정말 그렇죠? 상구의 짓은 정말, 책을 집어던지고 싶을만큼 잔인하더군요
어린 나이라 더더욱 그랬죠...

blanca 2012-07-11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명관 작가 지금 ebs에서 <몬스터> 연재하고 있어요.(낭독 방송입니다) 앵벌이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인데 분량면이에서나 스케일면에서나 야심작이 될 것 같아요. 천명관 작가 책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 마태우스님의 이 리뷰를 읽으니 꼭 읽어봐야 할 것 같아요.

마태우스 2012-07-11 21:15   좋아요 0 | URL
아 네..낭독방송이라니, 좀 색다른 쟝르네요. 전 읽는 게 편한데, 앵벌이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라니 끌리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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