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도 얘기한 바 있지만 내가 요즘 하는 일은 오래된 유적에서 기생충알을 찾는 거다.
그럼으로써 과거 시대의 기생충 감염률을 파악하고
베일에 싸인 과거 화장실의 형태를 알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선 인류의 이동에 대한 정보를 주기도 한다.
실제로 아메리카 대륙에서 아주 오래 된 십이지장충 알이 발견됨으로써
빙하기 때 인류가 아시아에서 베링해를 건너 아메리카로 건너갔다는 가설은
“베링해를 건너가기도 했지만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기도 했다”는 걸로 수정됐다.
이는 십이지장충이 추위에 약해 베링해를 건너가는 동안 감염이 유지되지 않기 때문으로,
이런 흥미로운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게 바로 고기생충학이다.

우리나라에서 고기생충을 하는 사람은 나랑 내 동료 한 명이 전부인데,
그래도 우리 둘이서 제법 논문을 많이 내다보니
고기생충학의 대가 라인하르트 박사(이하 라박)가 우리를 주목하게 됐다.
그러던 차에 고병리학회(여기에 고기생충학이 포함된다)에서 라인하르트를 초청했더니
흔쾌히 응했다.
다른 사람들은 외국 학회에서 그를 많이 봤지만
체질상 외국에 나가지 못하는 난 이번이 첫 대면이었다.
심혈을 기울여 발표준비를 한 건 그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전에 주최측 몇 명이서 라박과 점심을 같이 먹을 기회가 생겼고,
난 그때 처음 그에게 인사를 했다.
나이스 투 미트 유, 라고 그는 말했다.
내가 한 문장을 완벽하게 알아들은 건 그게 전부였다.
학계의 대가답게 그는 우리가 10초짜리 질문을 하면 5~10분짜리 답변을 했다.
외국 경험도 있고 영어도 곧잘 하는 동료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들었건만,
내 나이 또래 전체인구를 기준으로 해도 끝에서 30%에 들 정도인 나의 듣기능력으론
그의 말을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짧은 말이야 어떻게 할 수 있겠지만, 말이 길어지면 듣기가 정말 힘들었다.
거기서 일어난 해프닝들.

1) 내 질문에 대한 라박사의 답변을 8분간 듣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날 보면서 묻는다.
“Do you make sense?”
그냥 바라보기만 하던 난 급작스런 질문에 놀라 혀를 깨물었다.직감적으로 난 이게 ‘알아들었냐’고 묻는 거란 걸 알았다.
더듬거리며 말했다.
“I...I am poor at English, so I partly understand...”
그 후부터 라박은 웬만하면 날 보면서 말하는 걸 삼갔고,
난 혀가 아파서 식사를 다 못하고 남기고 말았다.
2) 점심을 먹고 난 뒤 우리끼리 한국말로 얘기하다가 문득 라박사를 너무 방치했다 싶었다.
그에게 점심이 어땠느냐고 묻자는 기특한 생각을 했다.
“How about lunch?”
내가 발음이 아무리 후지다 해도 이 말은 알아들었을 테지만,
라박사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옆 친구에게 사정을 말했더니 그가 이런다.
“네 말은 점심 먹을래,란 말이다. 점심 맛있게 먹었냐는 How was lunch,라고 해야 한다.”
방금 밥을 다 먹은 사람한테 또 먹을래라 물어보니 황당할 수밖에.
3) 라박사한테 멋진 질문을 할 게 있었다.
내가 했더니 역시나, 라박사는 못알아듣는다.
옆 동료가 대신 해줬더니 라박사가 이런다. “굿 아이디어!”
그래서 그 친구를 불러서 이랬다.
“아니, 내 아이디어인데 왜 네가 칭찬을 받아?”
4) 영어로 했던 유머 하나.
“My name is Seo Min. In Korea, Seo means the ruling party.”
5) 대망의 발표 시간.
참석자는 전원 한국인이었지만 라박사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려고 영어로 발표를 했는데,
이것 때문에 걱정이 돼서 잠을 거의 못잤다.
연습을 워낙 열심히 해서 그럭저럭 발표를 마치긴 했지만,
동료 선생이 와서 이렇게 말할 땐 좀 슬펐다.
“확실히 영어로 하니까 유머실력을 전혀 발휘 못하는구나.”

(사진이 마음에 안드는데 남들이 잘 나왔네,라고 한다ㅠㅠ)
논문 쓰는 거 이외엔 영어를 잊고 사는데다
해외연수도 일본으로 갈까 싶어서 영어의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고기생충의 대가와 반나절을 보내면서
내가 영어를 잘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며 탄식한다.
지금이라도 영어회화 공부를 하면 어떨까 싶어 천안의 영어학원을 검색해 보지만,
라박사를 또 언제 만나겠냐는 검은 마음이 검색을 방해한다.
연구도 안하고 놀기만 했던 30대 때 영어라도 공부할 걸 그랬다.
* 보너스 컷.

사진제목: 장난꾸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