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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산책시키는 남자 - 2012년 제8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전민식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3월
평점 :

예삐가 죽기 일주일 전쯤, 첫째인 뽀삐가 몸이 안좋아 보여 병원에 데리고 갔다.
아내가 뽀삐와 있는 동안 병원이라면 질색하는 예삐를 유모차에 싣고 밖으로 나왔다(그때만 해도 예삐는 건강했다).
병원이 홈플러스 안에 있는 거였는데,
그 안에는 제법 큰 책방이 있기에 거길 잠깐 들렀다.
거기서 책 두권을 고른 뒤 약간의 죄책감-알라딘에서 안사는 것에 대한-을 느끼며 계산을 했다.
그 중 한권이 바로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로, 순전히 제목 때문에 고른 거였다.
오히려 이런 책에 개가 잘 등장하지 않는 건 아닐까 했는데,
의외로 첫 페이지 첫줄부터 개가 나온다.
"닥스훈트가 가로등 밑둥치에다 오줌을 찔끔 지렸다."
개가 나오기도 하지만, 이야기가 의외로 재미있어 손에서 책을 쉽사리 놓기가 어려웠다.
개 산책을 대행해주는 사람이 식당에서 불판 닦는 일도 하고,
그러다 부잣집 개만 전속으로 산책을 시키고 이러는 내용인데,
그다지 잘나가는 사람은 아님에도 주인공이 부러웠던 건 뻔질나게 등장하는 술자리 때문이었다.
작년 10월 말 이후 난 아내로부터 금주령을 하달받았으며,
그걸 어겼다 작살이 난 이후엔 충실하게 그 명령을 따르고 있다.
그래도 손이 떨리지 않는 걸로 보아 난 알코올 중독은 분명 아니었던 것 같지만,
혹시나 해서 일할 때나 심심할 때마다 열심히 다리만 떨며 술에 대한 갈망을 이겨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이 책을 보니 어찌나 술이 마시고 싶던지.
"상 위에 모아온 소주와 김치, 그리고 감자 크로켓을 펼쳐 놓았다."(91쪽)
"테이블 위엔 소주와 맥주, 그리고 장어와 어묵탕이 놓여 있었다."(103쪽)
"내가 술집으로 들어섰고 은주가 따라왔다."(122쪽)(아, 맞다. 주인공은 여복도 있는 편이다)
"10시 정각...삼겹살과 소주가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132쪽)
"그가 바바리 오른쪽 주머니에서 손바닥만한 크기의 양주병 하나를 꺼냈다. 왼쪽 주머니에선 육포가 나왔다."(188쪽)
"밥그릇을 물리고 본격적으로 술자리가 시작되자 그들은 오히려 더 멀쩡해 보였다."(228쪽)
"술집 주인이 소주 한 병과 오징어 볶음을 가져왔다."(257쪽)
대충 찾은 것만 이 정도니, 내가 얼마나 마음이 쓰렸겠는가?
갑자기 냉장고 안에 넣어둔 맥주캔 하나가 생각났다.
두달 전 우리집에 놀러온 손님을 위해 냉장고에 넣었는데 먹지 않고 남은 맥주가.
아내는 자고 있었고, 난 그 맥주의 존재를 아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냉장고 문을 열었더니 맥주가 보였다.
표면을 만졌더니 아주 시원했다. 마시면 얼마나 시원할까?
하지만 모범생 기질이 발휘된 탓에 난 쓸쓸히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로부터 열흘이 지난 후, 아내가 식탁에 앉아 그 맥주를 마시고 있는 광경을 봤다.
그러니까 아내는 그 맥주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
그때 먹었다면 큰일날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