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석 감독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과히 좋지 않았다. 프랑스 영화 <마이 뉴 파트너>를 그대로
따라한 <투캅스>를 보면서 얼마나 부르르 떨었는지, 극장에서 나오자마자 평소 잘 안하던
독자투고까지 했을 정도. "이 영화는 <마이..>의 표절입니다. 이런 감독은 한국영화 발전을
위해서 사라져야 한다구요"
하지만 매우 희한하게도 강우석은 건재했고, 그는 한국영화를 주름잡는 실력자가 되어 버렸다.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나도 <공공의 적>을 본 뒤로는 그를 하느님처럼 여기게 되었으니,
나란 놈은 권력에 참 약한 놈이다.

그가 오랜만에 메가폰을 잡는다기에 가슴이 뛰었지만, 그게 <실미도>라는 걸 알고는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사형수들이 북한에 파견되기 위해 훈련을 하다가, 유야무야되면서 대우가
안좋아지자 폭동을 일으켰던 사건. 이런 단순한 스토리를 가지고 그 어떤 새로움을 창조하겠다는
걸까? 돈도 장난이 아니게 쏟아부었는지라 이 영화의 흥행 성적이 못내 궁금했다. 하지만
얼마 전 이 영화를 본 내 심복은 나의 걱정이 기우였음을 말해줬다. 아니나다를까, 영화는 너무나도
재미있었다. 너무도 잘만든 영화, 두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이 짧게 느껴졌고, 배우들이 연기하는
좌절감이 그대로 감정이입되었다. 슬그머니 짜증이 났다. 이 영화가 8천원인데, <낭만자객>도
8천원이라고? 낭만자객이 2003년 최악의 영화로 뽑히지 않는다면 이틀 정도는 단식을 할
용의도 있는 나로서는 그 영화를 내 돈을 내고 본 게 너무도 분하다. 이런 게 있으면 좋겠다.
영화 가격 심사위원회라고, 다양한 취향을 가진 관객들, 예컨대 멜러파, 액션파, 코미디파 등등이
섞인 위원회가 만들어져 영화의 가격을 합리적으로 결정하는 거다. 그런 게 있었다면 <낭만자객>은
200원, <실미도>는 1만원 정도가 책정되지 않았을까.
박정희를 죽이면 조국통일이 될 것이라고 믿은 김일성이나, 사적인 복수가 조국통일의 초석이 될
것처럼 생각했던 박정희나, 여간 꼴통이 아니다. 김일성을 죽인다 한들 그보다 더한 놈이 집권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담? 박정희가 총맞아 죽은 뒤에도 통일의 길은 멀기만 했다는 사실도
김일성의 생각이 오판이었음을 보여준다. 박정희가 북한에 의해 죽었어 봐라. 전 국민적으로
북한을 타도하자는 생각이 불길처럼 일어나지 않았을까? 김일성의 테러 덕분에 공연히 향토예비군만
설립되었으니, 이래저래 고생하는 건 우리 민초들이다. 이놈의 비생산적인 적대관계는 언제쯤
끝이 날까?
영화에 나오는 대사가 다 사실은 아니겠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인간병기들을 월남전에라도
보내지 않은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게 뭔가. 3년의 노력은 허사가 되었고, 그들을
막으려던 애꿏은 군인들만 죽었지 않는가. 우리 국가는 하여간 국민에 대해 무책임하기
이를 데 없다. 비인간적인 부대의 진상이 드러나면 안된다며 "대한민국이 야만국가입니까?"라고
말하는 중정 간부의 모습, 난동을 일으킨 실미도 부대를 "무장간첩"으로 모는 행위, 이것이
우리가 충성을 바쳐야 한다고 믿었던 국가의 참모습이다. 실미도 부대원 하나는 죽으면서
이런다. "무장공비는 너무한 거 아냐?"
연기파 설경구의 연기는 언제봐도 훌륭했지만, 허준호의 열연도 칭찬하고 싶다. <걸어서
하늘까지>에서 그를 처음 봤을 때 "저렇게 못생긴 애도 탤런트를 하네?"라고 생각했지만,
이 영화에서 그가 뿜어내는 카리스마는 장난이 아니다. 그렇긴 해도 이 영화가 성공한
일등 공신은 단연 강우석이다. <낭만자객>을 만든 윤제균에게 동일한 시나리오를 맡겼어봐라.
돈은 더 쓰면서 한숨을 짓게 만드는 희대의 졸작을 만들지 않았을까? 강우석에게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