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전 30대 회사원이 현금인출기를 털다가 잡혔다. 그는 범행동기를 이렇게 말했다. "카드빚 때문에..." 장난감 총을 들고 은행에 들어갔던 남자 역시 카드빚 때문에 범행을 저질렀다고 실토했다.
요즘 일어나는 모든 범죄는 다 카드빚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의 범행이 성공했다면 그 돈으로 과연 카드빚을 일부라도 갚았을까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지만 말이다.
카드빚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된 사람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수백만이다. 신용카드의 대량발급이 외환위기 이후 우리 경제를 살린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제는 그 신용카드가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론에서는 연일 신용불량자에 대한 대책을 정부에 촉구하지만, 막상 빚을 탕감해준다든지 한다는 발표가 있으면 "도덕적 해이를 조장한다"는 사설을 써대니, 그들의 진짜 속내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나 역시 처음에는 카드빚 탕감에 부정적이었다. 한때지만 돌려막기를 하면서까지도 카드 연체를 하지 않았을 정도로 성실하게 카드 대금을 납부해 온 나로서는 자기가 좋아서 쓴 카드빚을 깎아 준다는 게 좋을 리가 없다. 엄연한 성인인데, 자기가 쓴 빚은 자기가 갚아야지 않는가.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게 꼭 그 사람만의 잘못은 아닌 것 같다. 자본주의의 총아인 카드, 그것은 멀쩡한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힘이 있다. 외상을 할 때는 대개 미안한 마음을 갖지만, 카드라는 놈은 외상을 하면서도 목에 힘을 주게 만드니 말이다.
돌려막기를 하다가, 더이상 이런 생활을 하지 말아야지 하는 맘으로 모든 카드를 없애버린 적이 있다. 그 후 일년간 난 카드가 없었다. 카드 없는 삶은 정말이지 불안의 연속이었다. 애들을 불러서 술이라도 한잔 사려면 화장실에 가서 지갑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 수시로 확인해야 한다. 돈이 오버되었다 싶거나 차비가 없으면 잽싸게 은행으로 달려간다. 잔고가 없어서 이은행에서 저은행으로 4천원을 보내 1만원을 찾은 슬픈 기억도 내겐 있다. 그런 생활을 하던 끝에 난 다시금 카드를 만들었고, 카드가 닳도록 열심히 그어대고 있다. 카드와 함께이니 20명, 30명이 몰려와도 하나도 무섭지 않다. 지난번에 써클 모임에 가서 몇십명에게 갈비를 살 때도 난 당당했다. "더 시켜!" 이러면서. 그 후유증으로 다음달엔 거의 최저생활을 했지만 말이다.
카드가 지닌 이 마력, 의지가 굳은 사람이라면 모를까, 웬만한 사람이라면 이 유혹을 이기기가 꽤 힘이 들거다. 카드가 없었으면 가진 돈에 맞추어 먹었을 술도 쓸데없이 비까번쩍한 곳에 가서 먹게 되지 않는가. 카드를 만든 후, 난 카드가 없을 때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소비를 하게 되었고, 그 바람에 "한달에 얼마씩 돈을 모아서... "라는 깜찍한 계획은 거의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연체를 한 적이 없으니 카드회사는 내게 참 잘해준다. "고객님, 우수고객이세요! 저희가 고마우니까 주유권 보내드릴께요" "고객님, 참으로 카드를 많이 쓰세요. 내년에도 많이 이용해 주세요!" 이쁜 목소리의 여직원이 역시 이쁜 목소리로 얘기할 때면, 목에 힘이 불끈 들어간다. "그래! 더 많이 쓰는거야!" 하지만 난 안다. 내가 한번, 혹은 두번 연체를 하면, 이쁜 여직원 대신 목소리가 끈적끈적한 직원이 전화를 걸어 빚갚기를 독촉할 것임을. 세번 연체를 하면? 아, 생각만 해도 오싹하다.
카드는 빚이고, 빚은 언젠가 갚아야 할 것이건만, 카드는 그 모든 것을 잊게 만든다. 그러니 카드빚으로 고민하는 사람들을 무턱대고 욕할 것은 아니다. 정부는 무분별한 카드발급을 조장했고, 그 결과 카드는 오늘날 사회불안의 요소가 되고 있으니, 정부가 일정부분 책임을 나누어 져야지 않겠는가. 돌려막기의 악몽에서 벗어난 내가 약간은 성실한 삶을 사는 것처럼, 카드빚을 진 사람도 거기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다시금 검소한 사람으로 돌아오지 않겠는가. 사치와 향락에 몸을 맡기다보니 그렇게 되었을지언정, 한때의 잘못으로 평생 범죄자의 낙인이 찍히는 것은 억울한 일이다. 어떤 방법이 되었든지, 그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었으면 좋겠다. 그런 조치가 나왔을 때, "나는 성실히 갚았는데"라며 볼멘 소리를 하지 않았으면 더 좋겠다. 더불어 사는 사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