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이들어 배우기'의 속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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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으로부터 온갖 구박을 받아가면서도 두달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컴퓨터 학원을 다니셨던 어머님의 노력은 수포로 결국 돌아갔다. 다른 일로 너무 바쁘신 어머니가 학원서 배운 바를 한번도 복습을 하지 않았던 것도 이유가 되지만, 학원서 가르치는 종목이 어머니에게는 별반 필요가 없는 것들이었던 게 더 큰 원인이었다. 엑셀을 하고, 그림파일을 올리고, 그림그리기를 하고, 챠트를 만들고.... 이런 것들이 전혀 필요가 없는 건 아니겠지만, 내 생각에 어머니께서 그 모든 걸 아실 필요는 없었다. 컴맹인 내가 아무 불편없이 인터넷에 글을 쓰고 읽는 것처럼, 자신에게 꼭 필요한 한가지의 기술이면 충분한 게 아닐까? 학원을 두달 다닐 게 아니라 그 시간에 인터넷에 실린 여러 자료들을 읽고, 이메일을 주고받고, maxmp3로 음악을 듣고, 프리챌에서 만들어진 엄마의 홈피에다 글을 쓰는 게 훨씬 더 남는 장사일 수 있다는 거다.
아는 것도 없고, 그나마도 잘 가르쳐 주지 않던 내게 어머님은 이러셨다. "너 내가 컴퓨터 잘하게 되면 너랑 안놀아" 학원을 다닐 때만 해도 그렇게 꿈에 부풀었던 어머니는 회의를 느끼셨는지 두달의 마지막 일주일을 나가지 않으셨다. 늘 하던대로 바쁜 나날을 보내던 어머니는 이제 컴퓨터를 잊은 듯했다. 그러던 어느날, 다급하게 날 부른 어머니는 한글의 표만들기를 통해 만들어진 전화번호부를 보여주셨다.
"모임 같이하는 엄마 친구가 이걸 자기가 만들었다고 나누어 줬어. 어찌나 충격을 받았는지..."
학원에서 표만드는 걸 배우셨지만, 아무것도 만들 줄 모르는 어머님으로서는 어머님 또래분이 주소록을 만든 게 쇼크일 법도 했다.
그때부터 내 삶은 조금 귀찮아졌다. 뭔가를 좀 하려면 어머님은 "x아!" 하고 특유의 우렁찬 목소리로 날 불러댔으니까.
"칸을 하나 없애려고 하는데, 안된다"
"칸을 키워야 하는데 아무리 해도 안돼"
"칸에다 슬러시를 어떻게 만드냐?"
뭐, 뒤늦게 뭔가를 해보려는 건 좋은 일이고, 어머님께 많은 것을 받은 나로서는 열심히 가르쳐 드리는 게 그 은혜를 갚는 한가지 길이었다. 문제는 어머님의 수업 태도가 그다지 좋지 못하다는 것.
어머님은 아는 분이 많았다. 평소에도 무슨 약속이 그리 많은지 달력이 스케줄로 새까맣게 변할 정도다. 아버님의 장례식 때, 나름대로 친구가 많다고 자부하던 나는 어머님을 뵈러 온 인파를 보고는 질려 버렸다. '이상하다... 유머감각도 별로 없고, 목소리도 아주 큰데....그렇다고 술을 드시는 것도 아니고...' 내가 술을 같이 마심으로써 친구들을 관리한다면, 어머님의 관리수단은 전화였다. 단둘이 사는 우리집은 전화가 정말 많이 왔다. 내 친구들이야 휴대폰으로 하니, 집으로 오는 전화는 100% 어머님 전화였다. 하루에 30-40통 정도는 오는 것 같았고, 다들 끈질겨서 한번 안받아도 세번, 네번 계속해서 전화를 했다 (발신자 번호가 뜨니까 알 수 있다). 어머님도 휴대폰이 있지만, 다들 장시간 통화를 하고자 하는지라 일반전화로 전화를 했다. 혼자 있을 때 그 전화벨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정신병에 걸릴 것 같았다. 하여간 어머님은 댁에 계실 때 언제나 전화통을 붙들고 사셨다. 한시간, 두시간, 가부장적인 아버님 때문에 눈치를 보며 전화를 해야 했던 한을 푸는 것이리라, 하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내가 컴퓨터를 가르쳐 드리는 와중에도 전화벨은 수시로 울렸다.
"그러니까 컨트롤 버튼을 누르고 화살표로 크기를 조정하는...따르릉! 따르릉!"
20분, 혹은 30분 후 어머님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린다.
"x아! 좀 가르쳐달라니까 또 어딜 갔어?"
하지만 오래지 않아 전화가 울려댄다. 장시간 통화중이었으니 얼마나 안타까웠겠는가.
성당에서 결성된 무슨 모임의 주소록을 어머님이 만드시겠다고 자청한 엊그제, 난 밤 12시까지 대충 열번도 넘게 컴퓨터방과 내방을 왔다갔다해야 했고, 어머님은 이쁜 주소록을 만들 수 있었다.
가끔은 어머님이 학자의 길을 걸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60이 훌쩍 넘은 연배에 휴대전화로 문자메시지를 보낼 줄 알고, 스팸밖에 오지 않을지라도 이따금씩 메일을 확인하시는 멋쟁이, 배우려는 욕망이 참으로 강한 분이시니까. 내가 어머님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았다면 좋은 학자가 될 수 있었을 텐데. 그게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