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 엘지에 특별한 감정은 없다. 프로야구에서 두산이 엘지의 라이벌이라 꺼림직하긴 하지만, 그걸 빌미로 엘지의 모든 것을 거부하고픈 마음은 없다. 딱 하나, 휴대폰에 있어서만큼은 엘지가 싫다. 몇년 전, 싸이언을 쓰면서 내가 다시 엘지 휴대폰을 쓰면 염소다, 이런 말을 하기도 했을만큼 거기에 질려 버렸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휴대폰을 쓰라고 광고를 할 수가 있는지, 그 바람에 그다지 나쁘지 않았던 박진영까지 싫어져 버렸다.
난 019를 쓰는 사람을 동정심을 가지고 본다. 그들은 필경 019 측과 연고가 있거나, 그들로부터 약점을 잡힌 사람들이라, 협박을 당해 가입한 거라고 생각을 한다. 그렇지 않다면 왜 011이나 016을 놔두고 019를 가입한담? 자동차 시장이 삼성과 현대의 싸움으로 귀결되었듯, 휴대폰 시장 역시 KTF와 SK의 싸움으로 마무리질 터, 엘지는 필경 KTF에 인수될 거라는 게 96년부터 휴대폰을 써온 내 생각이다.
내 남동생은 엘지를 다닌다. 거기서 바닥재를 파는 일을 하는데, 걔는 할수없이 019를 쓴다. 019 전화의 특징은 터지는 건 잘 안되지만 중간에 끊어지는 건 잘된다는 거다. 말을 한참 하고 있으면 어느새 끊어져 있다. 그래서 난 019를 쓰는 애들한테 늘 이런다. "너도 011로 바꿔!" 거기에 더해 소리도 잘 안들리는지, 남동생은 전화를 할 때마다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곤 한다. 아, 불쌍한 남동생.
휴대폰과 전혀 관계없는 일에 종사를 하지만, 엘지에서는 남동생에게 011 가입자를 빼앗어 올 것을 명했다. 그런 상황에서 믿을 건 가족밖에 없었지만, 오래 동안 쓴 휴대폰 번호를 바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빌어먹을 번호이동성 제도가 생기면서, 이젠 번호를 바꾸지 않고도 회사를 옮길 수가 있게 되었다. 누가 옮기겠나 싶었지만, 동생의 말에 의하면 30만명이 SK를 떠나 KTF나 019로 회사를 옮겼단다. 가입할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019로 옮기는 사람은 019 관계자나 가족, 아니면 협박에 못이겨 옮기는 사람일 것이다. 나처럼.
"형, 019로 좀 옮겨 줄래? 21개씩 하라고 했는데 그건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실적이 하나도 없는 건 너무하잖아? 다들 두세개는 했던데"
처음 동생이 019로 옮겨달라고 전화했을 때, 난 정말이지 싫었다. 번호는 안바뀌지만 그간 쌓아온 기득권을 포기하기가 싫어서 말이다. 난 SK의 최우수고객이다. 오죽했으면 고맙다고 지갑과 벨트를 보내줬을까. "정말 전화를 많이 쓰세요. 혹시...사업하세요?"라는 전화도 받았었다. 내가 내는 요금이 SK 전체 고객 중 상위 3% 안에 든다는 무서운 사실도 얼마 전에야 알았다. 그 모든 걸 포기해야 한다니. 마치 서울서의 삶을 접고 이디오피아로 이민가는 심정이었다. 생각해 보겠다고 전화를 끊은 뒤, 정말로 생각을 좀 해봤다. '동생인데....' '아냐, 그래도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어'
생각을 해보니 말만 최우수고객이지 SK에서 내게 별반 해준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체 한번 안하고 그 전화비를 내줬는데, 내가 받은 게 뭐가 있담? 달랑 지갑과 벨트? 그래, 옮기자. 평소 동생에게 잘해준 것도 없는데, 이번 기회에 돕자.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랑 엄마랑 옮길께"(난 엄마와 패밀리로 묶여 있어서 같이 옮길 수 있다). 나 때문에 동생이 기뻐한 건 실로 오랜만인 것 같다. 내가 SK에서 기득권을 쌓았다 해도, 동생의 절박함을 무시할 정도는 아니잖는가? 앞으로 내게 전화하는 분들, 앞으로 전화가 잘 안터지더라도 이해하기 바란다. 공일구니까. 엘지에서 차를 안만드는 게 정말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