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부터 오후 세시반까지, 난 조조에게 붙잡혀 있던 유비의 심정이었다. 물론 차이는 있다. 유비가 "여기서 나가면 천하를 도모하리라"라는 거창한 뜻을 품고 있었던 데 비해, 난 기껏해야 "이것만 끝나면 다시는 발을 들이지 않겠다"는, 무척이나 소극적인 결심을 하고 있었다.
어제 오후, 전화가 왔다. YTN에서 내 책도 소개하고, 기생충도 좀 찍어간단다. 그러자고 했다. 기자는 갑자기 내가 모교와 친하냐고 물었다. "그럼요! 요즘도 같이 술마시고 그럽니다"
기자의 말이다. "이왕이면... 설대서 찍으면 안될까요?" 그쪽에선 천안까지 내려가는 게 귀찮아서였겠지만, 나는 다른 이유로 설대서 찍기를 원했다. 그림이 되려면 엽기적인 기생충들이 많아야 하건만, 내가 있는 곳에는 회충 몇 마리를 포함해 십여마리의 기생충밖에 없었으니까. 문제는 허락을 맡는 거였는데, 기자는 자신이 책임지겠다면서 전화를 끊었다.
2분도 안되서 연락이 왔다. "김갑수 선생님(가명. 우리 주임교수다)이 흔쾌히 허락을 하시던데요?" 웬일인가 싶었다. 일단 오후 1시 반에 만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도 허락을 맡아야 하기에, 선생님께 전화를 돌렸다. 역시나, 선생님은 떨떠름 그 자체였다. "얼떨결에 허락을 해 줬는데.."로 시작한 선생님의 궁시렁은 약 3분간 계속됐다.
"넌 이미 우리 사람이 아니잖아? 장소가 설대라는 걸 모르게 해야지, 남들이 알면 내가 곤란해져"
개뿔, 장소가 설대면 자기가 뭐가 곤란하담? 술을 먹거나 행사 때는 맨날 우리 식구 어쩌고 해놓고선... 결정적으로 네 지도교수는 이런 말도 했다. "아니 그런 책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있나봐?"
그때부터 기분이 나빴는데, 오늘 오전에 찾아뵜더니 또다시 장황한 말씀을 하신다. 간단한 것인 줄 알고 허락을 했는데 후회가 된다느니, 아래 스탭이 강력하게 안된다고 했다느니, 그런 건 매우 민감한 사안이라질 않나. 이왕 장소를 빌려 주기로 했으면 설령 마음에 안드는 게 있어도 통 크게 협조해 줘야지, 이런 식으로 하면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난 이랬다. "물의를 빚어서 죄송"하다고. 하지만 오후 1시가 넘어서 기자가 왔을 때도 김갑수 선생님의 궁시렁은 계속됐다.
"쟤가 설대 교수가 아닌데 남들이 오해할 수가 있다"질 않나, 설대라는 걸 남들이 알면 절대 안된다질 않나...
기자: 벽만 나올 거니 남들이 모르겠죠.
김갑수: 그래도 우리 학회 사람은 여길 와봤으니 알잖소? 보고서는 저 프로가 사기라고 얘기하지 않겠어요?
개뿔. 그건 YTN에서 걱정할 문제지, 왜 그런 것까지 신경을 쓰는가?
찍는 과정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찍는데 문을 열고 들어와 눈을 부라리고, 갑자기 나타나 "이게 뭔가?"라고 묻질 않나. 그럴 때마다 냉기가 흘렀고, 난 구석으로 후닥닥 몸을 숨겼다. 그런 모습을 기자들에게 보이는 게 영 민망했는데, 기자는 오히려 날 위로했다. "교수님들이 다 그렇죠 뭐" 기자에 의하면 김갑수 선생이 하도 그래서 찍고 난 뒤 필름을 검사맡기로 했단다....(결국 장소협찬: 설대, 라는 문구를 삽입하기로 했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갔고, 세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촬영이 끝났다. 기자는 김갑수 선생 방에 들어가 5분을 앉아 있었고, 그 뒤에 들어간 나는 십분이 넘도록 잔소리를 들었다. 그때 내 맘 속에는 어서 빨리 여기를 나가자, 그리고 다신 오지 말자, 라는 마음 뿐이었다.
내가 책을 드리고 간 뒤, 선생님들은 날 많이 욕했단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논문 쓰라고 자료 가져가더니, 책을 들고 오데?" 책을 쓴 게 그렇게 대역죄인 줄은 미처 몰랐다. 장소를 제공해준 선생님께 응당 고마워해야 하거늘, 난 그런 마음이 이미 다 사라졌고, 맘 속에는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 그 불은 모닥불이 아니라 성화며, 성화가 2주 남짓 타다 꺼지는 데 비해 몇 년간 타오를 것이다. 그 불이 꺼지지 않는 한, 난 설대에 발을 들여놓지 않을 생각이다. 물론 그럼으로써 내가 받는 손해는 제법 있다. 하지만 그쪽도 전혀 손해를 안보는 건 아니다. 가끔씩 내가 술값을 내는 것도 그중 하나지만, 내가 없으면 술자리 분위기가 팍 죽는다는 게 더 큰 손해일 테다. 음하하하.
모교서 트레이닝을 받은 사람들이 다른 학교에 발령받아 가는 걸 그쪽에선 '시집보낸다'라고 한다. 그렇다면 모교는 친정인 셈, 시집간 딸이 좀 도와달라는데 그토록 냉담하게 했어야 했을까? 기생충이 매스컴을 타는 게 뭐 그리 해로운 일인가? 그러니 이런 말이 나오는 거다. "자기가 TV에 못나와서 화난 게 아닐까요?"
술만 마시고 희희낙락할 때는 잘 모를 수 있다. 어려운 일을 겪어봐야만 그 사람의 정체를 깨닫게 된다. YTN 촬영 덕분에 모교 선생님들의 인간성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 이게 오늘의 소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