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석 교수(이하 직함 생략)와 난 초등학교 동창이다.
내가 반에서 중간 이하의 성적을 기록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던 반면
우수한 학생들이 몰린 사립초등학교에서 그는 별처럼 빛나는 우등생이었다.
그와 같은 반을 두 번쯤 했지만,
그에게 나는 있으나없으나 한 미미한 존재였으리라.
장하석과 난 중학교를 건너뛰고 고등학교에서 다시 만났다.
1학년 1학기 때, 여러 가지 운이 따른 결과지만 난 전교 1등을 했고,
하석이는,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5등 내외에 머물렀던 것 같다.
내게 뒤졌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장하석은 학교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건너갔고,
노벨상의 산실인 칼텍에서 물리학 박사를 받는다.
내가 기생충학 박사를 받았다는 걸 알게 된 장하석은
박사학위의 숫자로 날 앞서겠다고 결심, 스탠포드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뒤에도 타도 서민을 외치며 열심히 공부한 끝에 28세에 런던대학 교수가 된 장하석은
지금 그의 형과 같이 캠브리지 교수로 복무 중이다.
내가 <기생충열전>을 베스트셀러로 만든 것에 자극받은 나머지
그는 자신이 6년 전에 쓴 <온도계의 철학> 번역판을 국내에서 출간했다.
타향살이가 벌써 30여년, 이제 귀국해 우리나라에서 살고 싶지만,
베란다쇼 출연 등올 잘나가는 내 존재가 부담스러워 아직도 영국에 머물러 있다.
이상이 일방적인 내 주장이고,
장하석이 세바시 강연을 왔을 때 이 주장이 맞냐는 세바시 피디의 말에
그는 이런 답변을 했다.
“중학교 때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어요.
몇 개 번역판을 다 읽고, 그래도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있어서 영어판을 구해다 읽었어요.
그러면서 미국에 가서 물리학을 제대로 배워보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막상 물리학 박사를 받고나니 아쉬움이 남더군요.
그래서 철학을 전공해 과학과 철학을 융합하고자 시도했습니다.”
이 답변을 들으면 누구 말이 맞는지 쉽게 판단할 수 있으리라.
칼 세이건의 책을 원어판으로 읽고, 물리학을 전공해야겠다고 결심하는 중학생이라니,
그와 나는 애당초부터 그릇이 달랐다.
그가 쓴 <온도계의 철학>은 과학철학이 뭔지를 알려주는 작품으로,
우리가 당연하게 알고 있던 100도의 온도가 어떻게 정해졌는지에 대한 지난한 논쟁을 담았다.
이 책으로 그는 ‘과학철학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러커토시상을 수상했고,
그 자신은 토마스 쿤과 비교되고 있다.
지난 2월 잠시 귀국했을 때 세바시 강의를 들으러 찾아갔는데,
장하석은 날 반갑게 맞아 줬던 기억이 난다.
그와 같은 학교를 나왔다는 사실이 어찌나 고맙던지,
4대 1의 경쟁을 뚫고 홍익초등학교에 들어간 보람을 물씬 느꼈다.

세바시 때 사진. 가운데가 장하석 교수다.
지금까지 온도계의 철학을 100페이지쯤 읽었다.
그리 만만한 내용은 아니지만 올해가 가기 전에 다 읽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 책을 다 읽는다면 나도 과학적으로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