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주 옛날에, 우리집에는 <바벨2세>라는 만화책이 몇권 있었다. 바벨2세가 거대한 로봇 포세이돈과, 하늘을 나는 로프로스, 그리고 무엇으로도 변하는 표범과 더불어 지구를 지킨다는 내용이었는데, 어느날 우리집에 온 친구가 그걸 빌려달란다. 어려서부터 거절을 잘 못하는 난 집에 있는 바벨2세를 몽땅 빌려줬는데, 몇 달이 지나도 돌려줄 기색이 없다. 수차례 반납을 요구했지만 "깜빡 잊고 안가져왔다"느니 하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버텼는데, 나중에 그 친구가 전학을 가버린 걸 알고는 어찌나 황당했는지 몰랐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때의 난 그 친구가 전학간 이유가 <바벨2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중학생이었던 우리 누나는 내게 이런 충고를 했다.
"책은 빌려주는 사람도 바보, 돌려주는 사람도 바보!"
그 뒤에도 그런 경험이 몇 번 있었지만, 젊은 시절엔 내가 책 자체를 거의 안읽었을 때라 큰 피해는 없었다. 오히려 난 친구집에서 세권으로 된 <잃어버린 너>를 빌려가서 돌려주지 않음으로써 누나의 말을 실천하기도 했다 (그책은 지금도 우리집에 있는데, '상'은 없고, '중''하'만 있다).
뒤늦게 책에 눈을 뜨고난 뒤, 난 텅 비었던 책꽂이를 내가 읽은 책들이 빼곡이 채워가는 재미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안쓰던 책장을 다시 꺼내고, 이사를 가는 누나로부터 얻고 하면서 겨우겨우 책을 수용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난 책을 소장하는 것 자체에서 큰 기쁨을 느끼는 게 아닌가 싶다.
어느날 여동생이 <태백산맥>을 빌려간단다. 그러라고 했다. 하지만 거듭된 독촉에도 불구하고 여동생은 2년이 지나도 책을 돌려주지 않았는데, 다 읽었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내가 책읽을 시간이 어딨냐? 이제 1권 읽고 있다!"
"우씨, 읽지도 않을 거면서 왜 빌려갔어? 가져갈래!"
"큰오빠 정말 치사 빤스다! 와서 가져가!"
그래서 난 언젠가 날을 잡아 여동생 집에 쳐들어갔고, <태백산맥>과 언제 가져갔는지도 모르겠는 <아리랑>을 집어왔다. 그런데 <태백산맥>은 6, 7권이, <아리랑>은 7. 8권이 없다.
"이거 왜 중간에 없는 게 있지?"
여동생의 앙칼진 대답, "내가 어떻게 알아? 가져올 때부터 없었어!"
그래서 난 책장에 갈 때마다 중간에 이가 빠져버린 대하소설을 발견하곤 마음아파한다. 중고서점에 가서 모자란 부분을 채워넣으면 좋으련만, 게을러서 아직 못하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내가 여동생 방에 있던 <오딧세이아 서울 1, 2>을 몰래 빌려가서 안갖다 준 옛일에 대한 복수인 것 같다. 난 그때 그 책을 내가 이뻐하던 어떤 여인네에게 빌려줬는데, 그녀에게서 책을 받지도 못한 채 헤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 뒤 내가 여동생에게 얼마나 구박과 인간적 모멸을 경험해야 했는지...
원주에 사는 내 남동생은 "안와도 된다"는 엄마의 진심어린 호소에도 불구하고 가끔 우리집에 와서 잠을 자는데마다 책장에서 내 책들을 꺼내본다. 책과 별로 친하지 않아서 그런지 그에게는 보고나서 제자리에 꽂아두는 예의는 전혀 없고, 그러다보니 이따금씩 책이 분실된다. 언젠가 남동생은 정지환이 쓴 <대통령 처조카와 시골군수>라는 책을 빌려가더니만, 절대로 안가져온다. 집요한 내가 그 얘기를 하면 "제자리에 갖다뒀다!"고 박박 우기니, 내가 어쩌겠는가. 이런 일련의 사태를 겪으면서, 책을 소장하는 데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내가 책에 관해 노이로제에 빠진 것은 당연한 일, 난 누가 책을 빌려달라면 아예 사줘 버리고, 그래도 빌려가면 책이 돌아올 때까지 잠을 편히 못잔다. 내가 재미있게 읽은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도 지금 다른 사람의 손아귀에 있는데, 그녀는 갖가지 핑계를 대면서 반납을 미루고 있다. 내가 이따금씩 잠을 설치는 건 순전히 그책 때문이다. 이사를 가면서 홍세화의 <세느강은 좌우를 가르고..>를 잃어버린 것도 두고두고 아쉽다.
난 독서를 작가와 독자의 소통으로 생각하고, 책을 매개로 한 지식의 나눔이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책의 정신은 '나눔'에 있는 법, 서로서로 좋은 책을 빌려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은 책을 다 읽으면 다른 이에게 선물을 한다는데, 그분은 책의 정신을 잘 실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나처럼 책을 소장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소인배가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는 법이고, 이따금씩 남을 빌려주는 것만도 내겐 큰 자선이다. 아쉽게도 우리 사회는, 그러니까 책을 빌려주는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작금의 현실은 날 점점 책의 나눔에 인색한 수전노로 만든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다 사회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