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박2일간 대전에 끌려갔다 왔습니다. 무슨무슨 워크숍이라는 곳에 끌려갔다 왔는데, 이틀 가까이 컴퓨터에 접속하지 못하니 힘들더군요. 알라딘엔 별일이 없는지, 서재상으로 매일 뵙던 알라디너 분들은 다들 안녕하신지. 어젯밤 7시가 넘어 하루 일정이 끝났으니, 맘만 굳게 먹는다면 유성 근처의 피씨방에 들어가 뭔가를 할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흐흑. 저란 놈은 피씨방에 가는 대신, 대전에 있는 제 친구 둘과 밤새 술을 마시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오늘 서재에 와 보고서야, 제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화성에 갔다는 설, 테러를 당했다는 설, 심지어 사망설까지 나돌더군요. 걱정해 주신 여러분께 송구스럽고, 저 때문에 의심을 받은 '교봉'과 '그래 스물넷'에게도 심심한 사과를 드립니다. 그러게 평소에 바르게 살았어야....하핫. 술은 좀 덜마시더라도, 제가 잘 살고 있다는 정도는 알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을 깊이 반성합니다.
제가 참석한 모임은 유성호텔에서 열린 의학교육학회였습니다. 각 학교에서 쓰는 문제-단순한 문제는 아니구요, 애들이 토론을 할 수 있는 문제를 말합니다. 하나 만드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죠-들을 모든 의과대학이 공유하고자 하는 획기적인 프로젝트로, "참석하지 않은 학교는 국물도 없다"는 협박에 못이겨 50만원이나 되는 참가비를 내고 거길 갔지요 (물론 학교에서 냈지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일을 가지고 1박2일이나 시간을 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모여서 한두시간 얘기하면 될 것을, 그 아까운 시간동안 별로 생산적이지 못한 얘기들을 하더군요. 니네학교는 왜 그렇게 하느냐, 우리 학교에서는 이렇게 교육을 어떻게 한다느니 하면서 말이죠. 지루한 회의 때마다 그림을 그리는 게 취미인 저는 그동안 스무점이 넘는 그림만 연습장에 열심히 그려댔는데, 몇점은 정말 훌륭한 그림이라, 디카만 있다면 여기다 띄우고 싶을 정도입니다. 1박2일간 관찰한 교수들의 특징을 여기다 적어 봅니다.
1) 말이 많다; 말을 안하면 큰일나는 줄 안다. 간단히 할 수 있는 말도 최대한 늘려서 한다. 질문을 빙자해 자기 얘기를 한다. 심지어 질문 하나를 십분이 넘게 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다 듣고나서 답변자가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질문이 뭐였지요?"
내가 속한 조는 소위 '죽음의 조'라서, 조원들이 하나같이 질문을 많이했다. 그런 조에 속하게 되면 영 피곤하다. 조별로 토론하는 일이 많았은데, 다른 조는 다 끝나고 노는 동안 우리만 침을 튀겨가며 토론을 하곤 했다.
2) 뭘 말해야 하는지 모른다; 강의가 끝나고 나서 하는 질문들의 대부분이 주제와 벗어난 것들이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질문은 딱 하나 있었다. 바로 내가 한 거였다! "제가 들은 얘기는 그게 아니던데, 그게 정말 그렇습니까?" 다들 내 질문에 감동하는 눈치였다.
3) 시간을 안지킨다: "10분 쉬고 세시까지 오세요"라고 하면 정작 모이는 건 3시 15분쯤? 그것도 그렇지만, 강의하는 사람도 배정된 시간을 전혀 안지킨다. 그것보다 일찍 끝나면 좋지만, 대개는 20-30분 늦게 끝나, 스케줄이 다 뒤로 밀린다.
4) 불평이 많다; 워크숍이 너무 스파르타식이다, 힘들어 죽겠다고들 불만이 많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질문을 많이 해 원만한 진행을 어렵게 했던 사람들이다. 그들만 질문 안하면 훨씬 덜 힘들텐데.
5) 양복을 즐겨입는다; 잠바 차림인 사람은 40명의 참가자 중 딱 둘이었는데, 그중 하나가 나였다.
여섯 번째 특징을 말씀드리기 전에, 옛날 얘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강도가 칼을 들고 젊은 여자를 위협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돈이 없는데 어떡합니까? 할수없이 강도가 이렇게 말합니다.
강도: 벗어!
여자: 안돼요!
강도: 왜 안돼?
여자: 너무 더러워요.
강도: 그래도 벗어!
여자가 옷을 벗자 강도는 깜짝 놀랐습니다. 정말 더러웠던 것이지요. 놀란 강도가 칼을 떨어뜨리자 여자가 칼을 주워들고 강도에게 이럽니다.
"핥아!"
죄송합니다. 저질 얘기를 해서. 이와 비슷한 일이 교수 사회에선 자주 일어납니다. 이번 워크숍에서도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을 시작합니다. "이상한 질문인지 모르지만" 그 사람이 막상 질문을 하자 다들 놀랐습니다. 질문이 정말 이상했거든요. "지엽적인 질문인 것 같지만"으로 시작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상하거나 지엽적이라는 걸 스스로 아는 사람이, 굳이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요?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저는 열심히 그림만 그리는 수밖에요. 참고로 다들 제 그림에 놀라면서, 전시회를 하라고 하더군요. 그림 볼줄은 알아가지고....
이번엔 사건 하나. 다음날 있는 역할극을 위해 우리조 사람 하나가 밤 12시까지 워드를 쳐서 대본을 완성해 놓았습니다. 아침에 막상 그걸 하려고 보니, 대본이 없는 겁니다. 분명히 사람 수대로 복사까지 맡겼는데... 알고보니 우리 옆 조가 "대본이 없는데 이거라도 하자"면서 그 대본을 훔쳐간 겁니다. 그것도 어이없는 일인데, 역할극이 끝나고 나서 토론을 하는 와중에 옆조에서 "대본이 문제가 아주 많다"는 식의 얘기를 하는 겁니다. 조금 덜 건전한 상식으로 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그런대도 그 조는 미안한 기색은 전혀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대본이 없었는데, 마침 거기 대본이 있더라"라고 우길 뿐입니다. 이게 교수사회의 일반적 특징인지 아닌지는 좀더 연구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일곱 번째 특징. 말은 아주 많이 하면서도, 막상 "이조에서 어느 분이 해주시겠습니까?"라고 하면 모두 고개를 숙이거나 딴청을 피웁니다. 누구 하나가 맡으면 "그래, 너 잘할 것 같다!"라면서 "우리 모두 같이 나누어 하자"고 합니다. 하지만...알죠? 저녁 먹고 다 어디론가 도망가 버린 거. 술약속이 있던 저도 그건 마찬가지였는데요, 그 사람이 밤 12시까지 고생을 하고, 오늘 아침에도 복사한다고 뛰어다니는 걸 보면서 '내가 안하기 잘했다'는 생각을 여러번 했습니다.
여덟 번째. 자기가 하는 건 다 옳은 줄 안다. 학교마다 목표가 다르고 역량이 다르니, 교육방법도 차이가 있기 마련이지요. 그런데 교수들은 이럽니다. "우리는 이러이러한 방법으로 한다. 니네 방법은 문제가 있다!" 아이구, 그런 분들과 1박2일을 살다 왔으니, 제가 얼마나 머리가 아픕니까? 긴말은 절대 못하고, 예정된 시간보다 훨씬 빨리 강의를 끝내는 걸 보면, 전 원래 교수가 될 사람은 아니었나 봅니다....
다시 돌아와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저를 소재로 멋진 기사를 써주신 진우맘님과 연보라빛우주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없는 동안 제 서재의 즐겨찾기 숫자가 늘어난 걸 보니, 가끔씩 사라지는 것도...하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