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출구조사 결과를 보고 나가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총선에 대한 소감을 써달란다. 알았다고 했다. 난 TV를 보면서 맥주를 마셨는데, 처음 맥주를 마실 때는 맥주맛이 좋았지만, 갈수록 맥주가 쓰더니만, 막판에는 한약을 먹는 기분이었다.... 그래도..1당이 어디냐. 딴지에 보낼 원고를 여기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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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과
선거가 종료되기 13분 전, 난 방송국에서 근무하는 심복으로부터 출구조사 결과를 남보다 미리 들을 수 있었다. 열린우리당 172석, 한나라당 101석, 민노당 11석. 그걸 듣자마자 길길이 뛰었지만, 술집에서 맥주를 마시는 동안 경합지역 대부분이 한나라당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열린우리당의 예상의석은 151석, 겨우 과반수를 넘는 수준으로 떨어져 버렸다. 하지만 출구조사 결과에 고무되어서 그렇지, 내가 바란 것은 원내 제1당, 그 꿈은 이루었으니 충분히 행복해 해야할 거다. 더구나 민노당의 국회 진출은 그 자체로 흥분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원래 난 우리 국민을 믿었다. 우리 국민의 기억의 빈혈을. 우리 정치가 후진적인 이유는, 정치인들이 무슨 짓을 하든 선거에서 심판을 제대로 못한 우리 유권자의 탓이 아니던가. 탄핵 직후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이 크게 올랐지만, 그래서 난 그게 오래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 한마디면 한나라당의 지지층이 결집되고, 영남지역의 많은 의석수를 바탕으로 한나라당이 1당이 될 것이니까. 한나라당이 영남을 휩쓺으로써 내 우려는 어느 정도 적중했지만, 그게 수도권에까지 전달되지는 못했나보다. 미흡하긴 하지만, 한.민.자가 연합한 의회쿠테타는 이것으로 응징되었다. 촛불을 들고 민주주의를 외쳤던 우리 국민의 수준을 너무 낮게 봤던 점에 대해 깊이 반성하며, 사과드린다.
2. 총선, 화제의 인물들
당선, 혹은 낙선된 사람들 중 흥미로웠던 사람들을 조명해 본다.
-홍사덕; 촛불시위는 실업자들이나 하는 거라고 했던 그는 이번 총선에서 낙선하면서 스스로 실업자가 되었다. 이제 광화문에 가면 촛불을 들고 시위를 하는 홍사덕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송영선: 이라크에 파병을 해서 "미국을 감동시켜야 한다"고 말했던 송영선이 신용불량자들의 조직적인 반대에도고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국회의원이 된 그녀가 어떻게 미국을 감동시킬지 기대만빵이다.
-김희정: 이 사람의 당선은 외모지상주의가 급기야 국회에까지 상륙했다는 신호탄이 될 듯 싶다. 그녀가 우리 지역구에 나왔다면 나도 찍지 않았을까 싶다.
-노회찬: 숱한 유행어를 만들었던 그,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함에 따라 더 풍성한 활약이 기대된다. "한나라당, 민주당,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야당은 민노당에 맡기십시오"라던 그의 말이 생각나는 밤이다.
-한선교: 아나운서 출신의 인지도를 바탕으로 국회에 들어갔다. TV에 나오던 사람은 2년 정도의 유예기간을 둔 뒤 출마를 허용하도록 하면 어떨까? 전용학의 경우를 보면, 이미지 정치는 한번이 한계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말이다.
-김종필; 뻔뻔스럽게 비례대표 1번 자리를 꿰찼던 그는 자민련의 정당득표가 3%에 미달되는 바람에 10선에 실패했다. 자민련 지지자들은 "원래 표현을 잘 안한다"가 아니라, "투표도 안한다"고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정형근: 부산의 명예에 먹칠을 하곤 했던 정형근은 이번에는 다소 어렵게 국회에 진출했다. 부산 시민들이여, 조금만 더 애써주시라.
-이만기: 처음에는 왜 이런 사람을 공천했나 싶었지만, 탄핵 가결을 보면서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가 낙선한 걸 보니, 더 이상 힘쓸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나보다.
-추미애; 괜찮은 여성 정치인이 한순간의 판단 착오로 정치생명이 위협받게 되는 광경은 영 마음이 아프다. 광주 지역주의에 호소하느라 자신의 지역구를 관리 못한 게 탈락의 원인?
-전여옥: 안그래도 기세등등한 테러분자였던 그녀, 국회의원 배지까지 달았으니 얼마나 기고만장일까? 대변인인 그녀가 어떤 언어폭력을 행할지, 지켜볼 일이다.
3. 향후 전망
1)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양강체제, 제3당으로 우뚝 솟은 민주노동당, 그 틈바구니 속에서 나머지 당들은 생존의 길을 모색할 것으로 예상된다. 가장 쉽게 예상되는 것이 민주-자민련-국민통합21의 합당. 합당을 하면 다음과 같은 점이 좋다.
-충남의 자민련, 호남의 민주당, 영남의 국민통합21, 새 당은 그러니까 전국정당이 된다.
-새 당은 민노당을 제끼고 제 3당이 되어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다. 무소속을 영입하고 커트라인을 내려달라고 우기다 보면 원내교섭단체도 꿈은 아니다.
-마땅한 대선후보가 없는 상태에서, 정몽준이라는 강력한 대선후보를 보유하게 된다.
2) 개표를 다시 할 것이다
제1당을 빼앗긴 한나라당은 십중팔구 이번 총선이 개표조작이라고 우길 것이다. "우리가 질 리가 없는데 졌다. 그러니 조작이다!"라는 단순명쾌한 논리는 건수에 목마른 수구보수세력을 감동시켜, 개표를 다시 하게 만들 것이다.
3) 노무현은 더 이상 핑계가 없다
늘 소수정권의 한계를 탓하며 개혁을 미루어왔던 노무현, 열린우리당이 과반수를 점하게 됨에 따라 더 이상 핑계댈 것이 없어졌다. 잘 못하기만 해봐...주거! 민노당도 지켜보고 있다!
어찌되었건 탄핵은 응징되었다. 이 땅에도 드디어 정의가 살아 숨쉬기 시작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