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 엄마
어제, 엄마가 이러신다.
"내일 매제가 오니까 니가 좀 놀아줘라"
내일? 할 일도 많은데? "왜 온데요?"
매제가 어버이날이라고 엄마한테 근사한 곳에서 점심을 대접하겠다고 했단다. 그걸 엄마가 "괜히 돈쓰지 마라"면서 반찬이 많으니 우리집에 와서 먹으라고 했다는 거다. 열이 받았다.
"아니 그럴 때는 비싼 것도 먹어보고 그러는 거지, 왜 그랬어요?"
"애들도 있고, 밖에서 먹으면 정신없지"
엄마는 어디론가 전화를 하셨다.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니 가끔씩 오시는 파출부 아줌마다. "xx엄마, 내일 우리집에 좀 와줄래? 사위네가 온다고 해서... 뭐? 안된다고? 할 수 없지 뭐" 그래서 사위 반찬을 차리는 건 온전히 엄마 몫이 되었다.

오늘 아침, 엄마는 아침부터 반찬을 차렸다. 내겐 대충 밥을 챙겨주고, 매제가 온다는 시각에 맞춰 진수성찬을 차리기 시작했다. 닭, 돼지, 소에 생선까지, 그야말로 환상적인 식탁이 아닌가. 매제 내외는 "반찬이 너무 많아서 뭘 먹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신나게 밥을 먹었다. 애들은-그나이 평균에 비해 지나치게 산만한-여기저기 뛰놀면서 집안을 망가뜨렸고, 그네들은 늘 그렇듯이 산더미같이 쌓인 설거지를 남겨놓고 집에 갔다.

엄마는 설거지를 하면서 말씀하신다. "아이구, 다리야!" 컴퓨터를 치다가 부엌에 나가보니, 정말 장난이 아니다. 냄비에, 접시에, 수많은 그릇들.... "저걸 언제 다해요?"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어버이날 이게 무슨 일이람? 어제도 어머니는 내가 할머니랑 밥을 사드리겠다는 제의를 거절했었다. 집에 반찬이 많다고. 나야 뭐 대충 먹어도 되지만, 사위네까지 집에 부른 건 좀 너무했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 왜 그렇게 돈, 돈 하시는 걸까. 엄마가 아낌으로써 자식들에게 뭔가 해주고자 하는 마음이 나쁜 건 아니겠지만, 너무 그러니 자식들이 엄마를 우습게 알고, 돈이나 뜯어낼 봉으로 취급하는 것이리라. 권위는 누가 찾아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세우는 것, 우리 어머니는 그 점에서 실패하셨다.

물론 동생네도 나쁘다. 어머니가 오란다고 진짜로 와서 그렇게 민폐를 끼쳐야겠는가? 내가 그 입장이었다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평소에도 애들 데리고 우리집에 와서 한끼를 해결하는 일이 잦았지만, 오늘은-정확히는 어제지만-어버이날이 아닌가. 지금도 설거지에 열중이신 어머님을 보니 마음이 아파온다. 차라리 오랜 기간 얼굴을 안비치는 누나네가 동생보단 더 효녀가 아닐까.

2. 오늘
친한 친구가 미국에서 왔다. 그래서 친한 애들끼리 오늘 만나기로 했는데, 원래 모이는 시각은 오후 세시다. 다른 친구집에 모여 수다나 떨다가, 저녁을 먹기로 했다. 하지만 난 지금도 안가고 버티는 중이다. 부부동반 모임이라서다. 혼자가 자유롭고 편한 건 있지만, 그런 모임에 가면 아무래도 쓸쓸하다. 쌀쌀한 가을에 반팔을 입은 것처럼, 혼자 그런 곳에 가면 스스로가 왜소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제법 커버린 애들은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고, 친구들은 그런 애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겠지. 그래서 난 몇 번 그 모임에 불참하곤 했는데, 내가 불편해하는 걸 아는 친구는 내게 이런다. "너는 그냥 바로 식당에 와도 돼"
그 친구 딴엔 배려를 하는 거지만, 그런 말을 들으니 더더욱 가기 싫다. 식당이라고 해서 좀 나을까? 가족끼리 한 테이블씩 차지한 마당이라, 내가 앉을 곳은 애매하기만 한데 말이다. 가기 싫은 마음을 아는지 비는 하염없이 내린다. 하지만 이젠 정말 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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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4-05-09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셔서 드시는 건 몰라도, 뒷정리를 어머님께 온전히 맡겨두고 돌아가신 건 좀 잘못하신 것 같네요. ^^;; 적어도 설겆이는 했어야.. 음..

마립간 2004-05-09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친한 친구들, 예를 들면 고등학교 친구들 모임을 예로 들면
한 친구가 결혼하기 전까지 누구도 여자를 우리모임에 함께 오는 친구가 없었습니다. 그런던 중 하나, 둘씩 결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기혼자는 기혼자끼리, 미혼자는 미혼자끼리 만나게 된 시간이 잠시 있었지요. 하지만 그도 잠시 나머지 친구도 결혼을 하면서 미혼으로 저만 남게 되었습니다. 친구들 결혼식에 참여하면서 저만 혼자임을 느겼을 때가 있었습니다.
시간이 좀더 흐르게 되니 친구들의 아이들도 생기고, 친구에게 안부전화했을 때 제수씨들이 주로 전화를 받게되기도 하면서, (다른 친구들로 열심히 살면서 저녁에 안부전화를 하면 아직 퇴근을 안 했음.) 친구도 그리고 친구의 가족도, 만나면 만나는데로 평안한 친구가 되어 갑니다.

다이죠-브 2004-05-09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당당해 지세요. 그 길 밖에 없지 않나요?ㅡ.ㅡ 단지 비가 와서 기분이 꿀꿀한 걸 껍니다. 힘내세요!

비로그인 2004-05-09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니가 고생이 많으시겠어요. 컴터치고 있는 아들이 쫌 헹구기라고 했음 좋으려만...글로만 마냥 안되었다고 하시니..원~ 모임은 쫌 그렇겠군요. 잘 하셨어요. 맘이 안땡기면 안하는 겁니다. ^^

다연엉가 2004-05-09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엇이든 다 주고만 싶은 어머니의 마음을 알겠습니다. 마태우스님 설거지라도 좀 하시지잉..

sweetmagic 2004-05-10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번째 단락 첫째 줄 !! " 내겐 대충 밥을 챙겨주고 "-> 요대목 주시~~!!
님~~~ 또 삐지셨군요~~ ^^ ㅎㅎㅎ
아무리 그래도 설겆이는 좀 도와주시지 그러셨어요. 동생분은 몰라서 그랬다 치고,
어머니 힘드신 줄 뻔히 알면서도 하나도 안 도와드린 님이 더 나빠요 ~

세번째 단락 마지막 줄 !! " 우리 어머니는 그 점에서 실패하셨다 "
어머니께서도 실패 했다고 생각 하실까요 ?
어머니는 아마 기꺼이 이해한다고 하실 것 같은데..
성공,실패란 말보다는 이해 그리고 아직 덜 이해...란 말이 더 어울리는 관계,
그게 ..... 부모 자식간의 관계..아닐까요 ?

비로그인 2004-05-10 0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와서 먹는건 그렇더라도, 설거지는 해두고 갈만 하건만...마태우스 어머님 설거지 하시는 모습이, 왠지 안쓰러워요...마태우스님이 좀 더 잘해드리세요~ 집에 일찍 와서 저녁먹자고 하시면 그렇게 해드리구! ^^

책읽는나무 2004-05-10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댁이든...친정이든....자식들은 손주 보여드린다는 명목하에..때론 안부인사 여쭙는다는 명목하에.....정말 부모님께는 못할짓 하는것 같네요!!....님의 글 읽고 있으니 반성이 됩니다..ㅠ.ㅠ

플라시보 2004-05-10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울한 기분으로 가셨을것 같네요. 어머니 사건도 그렇고 부부동반 모임도 그렇고. 술 많이 드셨을것 같습니다. 힘내시길..

마태우스 2004-05-10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라시보님/아네요, 가서는 즐겁게 놀았구요, 술은 출근 생각해서 마니 안마셨어요. 대신 화요일날 코가 비뚤어지기로 했답니다.
책읽는나무/무슨 말씀이세요. 훌륭한 따님이고 며느리신 것 같은데... 저희 집 사람들이 좀 너무한 거죠.
앤티크님/그쵸? 어머님 연세가 벌써 65세인데... 아들 뒷바라지도 모자라 딸 내외 접대까지...잘해드릴께요, 제가.
sweetmagic님/어머님도 실패하신 걸 아실 겁니다. 인정을 안하실 뿐이죠. 그리고 제가 설겆이를 하려는 시도를 여러번 했지만, 그때마다 어머니는 불같이 화를 내십니다. 제가 몰래 해놔도 다시 하시거든요. 우리 어머님이 좀 그러세요.
책울타리님/저도 설겆이 좋아하거든요. 근데 어머님이 절 못믿으신데요. 전 참 깨끗이 하는데..
마립간님/저도 뭐 젊은 시절부터 알던 여자들이니 친하게는 지내는데요, 스스로가 왜소해 보여서 문제죠.
폭스바겐님/님은 늘 저만 미워해!!!! panda78님을 본받으세요!!!
토끼똥님/ 당당하게 잘 마시고 왔습니다. 제 토크에 애들이 재밌다고 어찌나 좋아하는지...

sweetmagic 2004-05-10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저희 엄마도 좀 그러세요...그래도 저희 어머님은 실패라고 생각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부모님 권위는 부모님 스스로가 아니라 자식들이 만드는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 바뀌려고 노력 중 이거든요. 잘 안되지만.....참....안돼요...나쁜 습관에 너무 길들여 져서....
 

 

 

 

 

 

*경고: 대변 얘기가 난무하니 심장이 약한 분과 식사 직전, 혹은 직후에는 읽지 마시길.

* 딴지에서 건강동화를 쓰라고 해서 썼습니다. 근데 제가 기생충에 관한 모든 걸 이미 우려먹은 뒤라 생각이 전혀 안나더라구요. 어제 새벽까지 이거 쓰느라 낑낑댔고, 오늘도 아침부터 계속 머리를 짜냈습니다. 역시 억지로 쓴 건 잘되는 법이 없다구요.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곧 알라딘 뉴스레터 3호가 나가니깐요.

* 이것도 써야하고, 곧 술먹으러 나가야 하는데, 친척이 와서 두시간여를 빼앗아 가네요. 그 바람에 원래 쓰려던 '미팅기'는 내일 써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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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람의 파이터

 

그의 첫인상은 '산적'이었다. 우락부락한 덩치에, 가늘게 찢어진 눈, 덥수룩한 수염은 우리가 만화에서 익히 봐온 산적과 너무 똑같았다.
"안녕하세요? 명성 듣고 찾아왔습니다. 그럴껄이라고 합니다"
그는 마태우스의 제자가 되고자 했다. 기생충 탐정이 되는 길이 가시밭길임을 알기에 그간 제자를 받지 않았지만, 이 청년이라면...
"고향이 어딘가?"
"산동성에서 왔습니다. 조선족이죠"
산동성이라면 기생충의 박물관, 그 역시 어려서부터 온갖 기생충의 습격을 받으며 기생충에 대한 증오심을 키워왔다고 했다. 그날부터 그는 마태우스 탐정 사무소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예비탐정으로서의 계단을 밟아 나갔다.

"손을 푹 담구게"
"아니 이건 좀..."
시범을 보이기 위해 난 세숫대야 깊숙이 손을 담궜다.
"이제 자네 차례일세"
그럴껄은 공포에 질린 표정이었다.
"아니 방송에 나와선 기생충학이 대변검사하는 곳이 아니라고 하더니, 대변더미에 손을 넣으라는 건 또 뭡니까?"
내 무서운 눈초리를 본 그는 할수없이 표면에 손을 얹었다.
"더 깊이!"
그는 눈을 꼭 감고 서서히 손을 넣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많이 먹게. 체력은 말이지, 국력이야"
고된 훈련에 지친 그를 위로하기 위해 진수성찬을 차렸지만, 그럴껄은 몇숟갈 뜨지 못하고 숟가락을 놓았다. 가슴을 쓰다듬는 걸 보니, 넘어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고 있는 듯했다. 뭔가 한마디 해줄 필요가 있었다.
"자네가 속이 거북한 것은, 아까 본 대변을 계속 떠올리기 때문이야. 상상이란 인간이 고통을 견디는 마취약이 되어 주기도 하지만, 때론 사람을 더 힘들게 하기도 해. 예컨대, 대변 하면 대개의 사람들은 변기에 담긴 길다랗고 굵은 밤색의 물체를 생각하지. 하지만 우린 그래선 안돼. 난 말야, 대변 얘길 들으면 저 파란 하늘을 생각한다네. 우리가 대변 얘기를 하면서도 맛있게 식사를 하는 이유가 거기 있네"
"아, 아무리 그래도 대변은 똥이고, 똥은 더러운데..."
마태우스는 자신도 모르게 들고있던 단무지를 던졌다. "퍽!"
그럴껄은 이마에 붙은 단무지를 떼서 입에 넣었다.
"대변도 우리몸의 일부야. 자신의 대변을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다면 누가 사랑하겠어? 니가 그렇게 깨끗해? 너도 심심할 때면 코를 후비고, 트림을 하고, 항문 주위를 긁잖아?"
그럴껄의 눈에서 눈물이 찔끔 났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흐흑"

그 일이 있은 후 그럴껄은 달라졌다.
"흐음. 이 사람은 삼겹살을 먹었군요. 이건 개피향인걸? 쩝쩝? 다른 대변 더 없어요?"
처음엔 회충이 징그럽다고 만지지도 못했지만, 이젠 회충 두 마리를 이어만든 목걸이를 한 채 잠을 잤고, 광절열두조충으로 된 벨트를 착용했다. 그는 천생 기생충탐정이었고, 마태우스는 그가 성장하는 과정을 즐겁게 지켜봤다. 그는 틈나는대로 추리소설을 읽으며 추리력을 길렀고, 마태우스가 이따금씩 해주는 특강을 들었다. 마태우스와 같이 나간 실전 경험도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을 터였다.

"오늘은 대변을 씻는 걸 가르쳐주지"
그럴껄은 놀란 표정이었다. "대변을 씻어요?"
"그러니까 대변에서 기생충을 고를 때, 식염수로 대변을 씻어 시야를 좋게 한 다음에 찾는 거거든. 대변에 물을 넣고 여기 있는 망으로 거른 다음에..."
대변을 망으로 거르면 고춧가루, 파, 깨 같은 것들이 걸러진다. 망을 통과한 물질에 식염수를 넣고 잘 섞은 뒤 상층액을 버린다. 이런 과정을 대략 6-7차례 반복하면 대변이 깨끗해지며 그 속에 숨어있던 기생충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래, 그렇게! 이제 현미경을 보면 돼. 어때? 한결 보기가 좋지?"
그럴껄은 마냥 신기한 듯 현미경을 들여다봤다. "저기 네모난 것들이 다 기생충이어요? 우와, 졸라 많네요!"

전화가 걸려온 것은 그때였다.
"네, 마태우스 탐정 사무소의 조수 그럴껄입니다. 네? 수면병이요?"
수면병이라는 말에 마태우스는 전화기를 넘겨받았다. "남편이 잠만 자고 일어나질 않아요. 병원에서는 바이러스성 뇌염이라는데, 탐정님이 쓰신 책을 보니 아무래도 수면병 같아서요"
수면병이라는 병이 있긴 하다. 하지만 수면병을 매개하는 체체파리가 우리나라에 없으니, 아프리카에 가지 않는 한 그 병에 걸리기란 불가능하다.
"저, 남편 분은 수면병이 아닐 확률이 더..."
하지만 그는 자신의 말을 끝맺지 못했다. "목 뒤의 림프절이 만져진다구요!"
목 뒤의 림프절이 만져지는 것, 이것은 윈터보톰 사인(Winterbottom's sign)이라 불리는, 수면병의 특징적인 병변이었다. 25년 전 TV에서 방영된 <뿌리>에서는 흑인 노예들의 목을 만진 뒤 바다에 던지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게 바로 수면병을 감별하기 위함이었다.
"어서 장비를 챙기게. 급히 가봐야겠어"

마태우스는 그럴껄과 S병원으로 향했다. 병실에 들어서자 여자 하나가 남자의 손을 잡고 울고 있었는데, 그녀가 탐정사무소에 전화를 한 것 같았다. 수면병의 확진은 혈액 속에서 병원체를 발견하는 것, 간단한 소개를 한 뒤 마태우스는 조심스럽게 환자의 손에서 피를 뽑았다. 슬라이드에 피 한방울을 떨어뜨려 도말한 후, DQ 시약으로 염색했다. "이럴 수가!" 슬라이드를 현미경에 올리자마자 편모를 움직이며 헤엄을 치는 수면병 원충들이 수없이 관찰되었다. 이 정도로 밀도가 높다면, 환자는 위험했다.
"정말 아프리카에 가신 적이 없나요? 수단이나 잠비아 같은 나라..."
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작년에 저랑 같이 중국에 다녀온 이후 밖에 나간 적이 없어요"
수면병은 일단 혼수상태가 시작되면 치료에 잘 듣지 않아, 감염 경로가 어떻든간에 되도록 빨리 치료하는 게 좋다. 하지만 이 환자의 경우, 너무 시간이 많이 지나간 듯했다.
"국립보건원에 가면 희귀한 질병에 대비한 상비약이 보관되어 있거든요. 일단 빨리 약을 드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제가 진단서를 써드릴테니, 오늘 중으로 다녀오세요. 약이름은 슈라민(suramin)이구..."
서둘러서 약을 먹였지만, 환자는 사흘을 더 버티지 못하고 사망하고 말았다. 장례식장에서 마태우스는 여인의 손을 잡았다. "죄송합니다. 그대신 제가 진상은 꼭 규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아프리카에 가지 않고 수면병에 걸렸다면 다른 사람에 의해 파리가 옮겨졌음을 뜻했다. 환자가 사는 지역은 서교동, 마태우스와 그럴껄은 그 지역 사람들 중 아프리카 서부에 간 사람이 있는지를 뒤지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이 파리를 가져올 수도 있나요?"
마태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이런 적이 있었지. 말라리아가 발생하지 않는 지역에서 환자가 발생했어. 알고보니 그 옆집 사람이 아프리카에 다녀왔는데, 모기가 그 사람의 가방에 실려 그 나라까지 온 거였어. 의도적인 게 아니라면, 이번 경우도 그럴 확률이 높아"
"네, 그렇군요" 그럴껄은 꽤 감동한 눈치였다.
서교동 주민 3만4천명 중 두달 전에 아프리카를 다녀온 사람은 총 11명, 그 중 1명이 수면병의 유행지인 수단에 다녀왔다. 그의 이름은 윤경식이었다. 놀랄만한 사실은 또 있었다. 그 지역 주민 중 두명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뇌염으로 비슷한 시기에 목숨을 잃었다는 것.

"이거 놔요! 도대체 왜 그러는 겁니까? 전 피살자와 일면식도 없다구요!"
경찰에 끌려가면서 윤경식은 거칠게 저항했다.
경찰: 두달 전에 수단에 갔다왔지?"
윤: 네, 갔습니다. 그게 무슨 죄가 되나요?
경찰: 왜 갔어?
윤: .........
윤경식이 대답을 하지 못하자 경찰은 그가 범죄를 시인하는 것으로 단정짓고 구치소에 가뒀다. "알고 그랬으면 살인이고, 모르고 그래도 과실치사야!"
그는 나중에 "채팅해서 알게된 수단 여자를 만나러 갔다"고 주장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그래! 잘한다!"
사무실에서 메이져리그 야구를 보고있던 마태우스에게 그럴껄이 다가왔다.
"저...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합니다"
"뭐가?"
마태우스는 야구볼 때 말시키는 사람을 제일 싫어했다.
"윤경식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범인이 아닌 것 같아서요."
끝난 사건을 다시 끄집어내다니, 그것도 한창 야구를 보는데.
"이봐, 정 궁금하면 자네가 조사해 봐. 참, 어제 맡긴 대변은 잘 다져 놨나?"
"네, 냉장고에 넣어 두었습니다. 그럼 저 좀 나가보겠습니다"
그럴껄은 장비를 챙겨들고 밖으로 나갔다.
"저저저, 저녀석... 수사를 감으로 하나? 수사는 말야, 과학이라고!"

그럴껄은 열심히 그 사건에 매달렸다. 좋아하던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았고, 잠도 거의 안자는 듯했다. 수염은 덥수룩하게 자랐고, 피부도 꺼질해져, 이젠 길거리를 걸으면 다들 피할 정도였다. 그렇게 2주가 지났을 무렵, 그가 마태우스에게 입을 열었다.
"윤경식은 역시 범인이 아닙니다"
"그래? 그럼 누가 범인이지?"
"그러니까..."
그럴껄은 그간 밝혀낸 사실을 설명했다. 죽은 남자의 소지품을 뒤지다보니 파라다이스 모텔의 성냥이 나왔다. 다른 모텔이 다 그렇듯, 파라다이스 역시 손님들이 잠시 쉬어가는 러브호텔, 그렇다면 그 남자에게 여자가 있었다는 소리가 된다. 남자의 사진을 들고 파라다이스에 간 그럴껄은 그가 어떤 여자와 함께 자주 호텔에 왔다는 종업원의 증언을 들었고, 경찰의 협조를 받아 휴대폰 통화 내역을 조사한 결과, 뻔질나게 전화한 여인의 이름을 알아냈다.
"그녀의 이름은 박마리, 나이는 33세고, 애가 둘입니다"
그럴껄은 박마리를 찾아갔다.
"이 남자 아시죠?"
남자의 사진을 내밀자 박마리의 얼굴이 흑빛으로 변했다.

"피살자가 박마리의 차를 들이받은 적이 있습니다. 둘은 그렇게 만났고, 그때부터 관계를 가져왔던 겁니다. 박마리의 남편은 둘의 관계를 눈치챘고, 소리없이 남자를 제거할 생각을 했지요"
얘기하다 보니 마태우스는 눈을 감고 자고 있었다.
"마선생님, 일어나세요. 제 말을 마저 들으셔야죠!"
화들짝 놀라 잠을 깬 마태우스는 입가의 침을 닦았다. "어, 그래그래.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남편은 대학 때 생물학을 전공해 수면병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체체파리를 구해다 남자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최근 석달간 그는 수단에 네 번이나 갔다왔는데,  그게 다 체체파리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럴껄의 말을 들은 마태우스는 상념에 잠겼다. 수천개나 되는 러브호텔이 미어터지는 불륜의 천국 우리나라, 그 불륜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고, 그로 인한 범죄는 또 얼마인가.
"그래서 어떻게 할 셈인가?"
그럴껄은 한숨을 푹 쉬었다.
"글쎄요, 미망인에게 말을 하면 좀 문제가 되지요. 몰라도 될 고인의 불륜을 알게 된다면, 그녀에게 상처로 남을 테니까요. 어쨌든, 억울하게 감옥에 가있는 윤경식부터 구해내는 게 순서일 것 같습니다"
마태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범인은 어떻게 잡아야 하지?"
"그가 그런 짓을 한 동기는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그렇다 해서 살인이 용납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의 집을 뒤지면 아마 증거가 나올 겁니다"
마태우스는 일어서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대단해! 자넨 이제 내 조수가 아니라, 그럴걸 탐정이네. 사실 나도 윤경식의 무고함을 알고 있었어. 단지 자네의 능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그랬던 걸세. 자네, 날 믿지?"
그럴껄이 특유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럼요, 제게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박마리의 남편 이달호가 아내의 불륜을 눈치챈 것은 그해 여름이었다. 몸이 아파 집에서 쉬는데, 아내 휴대폰에 문자가 뜬다. 호기심이 일어 지갑을 열고 휴대폰 메시지를 확인했다.
[2시에 비가 오니 꽃 271송이가 떨어지다 -흑표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건 파라다이스 271호에서 2시에 만나자는 뜻이었다. 이달호는 분노했다. '내가 자기한테 얼마나 잘했는데! 용서할 수 없다!'
사흘간 궁리한 끝에 이달호는 수면병 생각을 했고, 연구를 빙자해 수단으로 출장을 갔다. 남자가 아침마다 조깅을 한다는 걸 알아낸 이달호는 수단서 구해온 체체파리를 들고 조깅을 하는 길목에서 남자를 기다렸다. "쉭!" 사흘간 굶은 체체파리를 날렸지만, 파리는 하늘높이 날라갔다가 낙하해 엉뚱한 사람을 물고 만다. 그녀가 첫 번째 희생자인 김옥화였다. 두 번째로 구해온 체체파리는 사흘째 굶어죽었고, 그다음 파리 역시 반대편으로 날라가 마주오던 남자를 물었다. 두 번째 희생자는 그렇게 죽었다.
"에이 쌍, 졸x 안맞네!"
안되겠다고 생각한 이달호는 기다란 대롱을 만들어 체체파리를 넣은 후, 남자를 향해 힘차게 불었다.
"윽!" 남자가 잠시 목을 만지더니, 이달호 쪽을 한번 흘기고는 계속 뛰어갔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부터 남자는 더 이상 조깅로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마태우스와 그럴껄은 체체파리의 흔적이 있으면 형광을 내는 시약을 만들어 냈고, 그 약을 통해 이달호의 집 여러 군데서 체체파리의 자취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완강히 부인하던 이달호는 결국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마태우스는 차를 몰아 약속 장소로 가고 있었다. 그럴껄이 경찰청장이 주는 탐정 허가증을 받는 날이었다. '그나저나 접촉사고를 내서 눈이 맞았단 말이지. 나도 한번 접촉사고나 내볼까? 혹시 알아? 묘령의 여자라도 만날지' 히죽이죽 웃고 있는데 쾅 소리와 함께 엄청난 충격이 밀려왔다. 마태우스는 목을 부여잡고 밖으로 나갔다. "누구야?"
"어유,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험상궃게 생긴 남자가 뒷차에서 내렸다. 마태우스의 얼굴이 벌레를 씹은 표정이 되었다.
"아이구 내 팔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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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5-10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이것이, 어제 새벽에 써야한다던 그 글이로군요~ 으...중반쯤에는 너무 부담스러워서 페이지를 넘겨버리고 싶었지만...마지막까지 읽으니, 딱! 떨어지는 내용이 참 좋습니다. 다만, 그럴껄이 아닌 저야말로 내일 밥을 제대로 먹을수 있을지...T^T

고민고민 2004-05-13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딴지의 마태우스 님이 알라딘에 계시는 줄 몰랐네요.
건강 동화를 참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직업이 기생충 관련 이신지요? 궁금하네요. 저는 물리를 전공했는데, 학부때 전공과 관련지어 재미도 있고 전공도 포함하는 그런 이야기가 없을까 하고 궁금했거든요. 그런데 마태우스 님이 그런 일을 하셨네요. 대단합니다. 짝짝짝!!!

마태우스 2004-05-13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앤티크님/ 한달 쉬신다는 게 제 글 읽어서 그런 거 아닌가 싶어, 갑자기 죄송합니다.
mylux님/아이, 그런 걸 하려면 제대로 했었어야 하는데, 제가 좀 유치하죠. 그래도 칭찬 들으니 기분 좋습니다. 박수 감사드려요.
 

 

 

 

 

 

제목: 알라딘 평정기
장르: 3류 사소설
"사소설의 경지를 한단계 끌어내린 역작!" -알라딘 뉴스레터-
-------------------------------------
"메이저급 서재라 코멘트 쓰기 조심스럽지만.."
"마태우스님 서재는 이제 제법 큰 허브가 되었습니다^^"
양털 소파에 앉아 인터넷을 하던 마태우스는 담배를 한모금 빨아들인 후 고개를 뒤로 젖혔다. "메이져급 서재라..."
갑자기 지난날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작년 초까지만 해도 마태우스는 늘 교봉에서 책을 샀고, 교봉에다 리뷰를 썼다. "오프라인 최강이 인터넷도 최강이지!" 그는 자신이 교봉북클럽의 우수회원이라는 것에 자부심마저 느꼈다. 그토록 교봉에 충성도가 높았던 그가 '인터넷 교봉 모니터요원'에 지원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1.2대 1의 경쟁을 뚫고 다섯명의 모니터요원에 뽑혔다.

"에...여러분이 할 일은 다른 사이트를 부지런히 다니면서 장.단점을 분석하는 것입니다. 마선생, 알라딘이나 그래스물넷 사이트 가본 적 있어요?"
"네? 아직 없습니다"
"앞으로는 열심히 가세요. 알겠죠? 거기에 대해 이달 중순까지 리포트를 써주세요"

마태우스는 그래서 생전 처음 다른 인터넷 서점을 가봤다.
"뭐야 이건!"
마태우스는 화들짝 놀랐다. 오프라인 최강은 온라인 최강이 아니었다. 인터넷 서점의 활성도는 물론이고 디자인마저도 알라딘이 훨씬 뛰어났으니까. 특히나 알라딘의 마이리뷰는 양과 질에서 모두 탁월했다. 모니터 모임이 있을 때마다 그는 일관되게 주장했다.
"독자서평을 활성화시켜야 합니다. 누가 몇편을 썼는지도 모르는 지금 방식은 곤란합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다른 이가 쓴 독자서평에 리플도 달 수 있게 해줘야 합니다."
상품도 문제였다. 교봉에선 한달간 가장 많은 서평을 쓴 사람에게 고급을 사칭하는 만년필을 줬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원하는 것은 사이버머니였음에도. 개수로 따지는 것도 문제가 있었다. 마음먹고 일년치를 풀어놓는다면 누구나 일등을 할 수 있을 테니까. 심사를 하는지 안하는지, 심지어 이런 서평도 올라왔다. "난 아직 이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저처럼 당신 편이 많습니다. 이회창 파이팅!" 달랑 한줄짜리 문장도 서평 한 개로 쳐준다는 게 마태우스는 싫었다.

하지만 그의 제안은 그리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누가 독자서평을 보고 책을 고르나요?"라는 반론에 그는 할말을 잃었다. 다음달에 개편된 독자서평 시상제도는 그 주의 우수작에게 1만원의 사이버머니를 지급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강남 교봉점이 완공되었을 때, 마태우스는 깨달았다. 교봉은 인터넷 서점에 더 이상 투자할 뜻이 없다는 것을. 모니터요원으로 활동한 석달이 지난 뒤, 마태우스는 교봉을 탈당하고 알라딘에 둥지를 틀었다. 장점이 훨씬 더 많은 사이트를 보고나니 교봉에 접속하는 게 괴로웠으니까.

알라딘에는 고수가 많았다. 마이리뷰가 수백개씩 되는 사람들이 즐비했고, 명예의 전당에는 내공이 뛰어난 고수들이 활짝 웃고 있었다. "물만두란 사람은 어떻게 이리 책을 많이 읽었을까? 평범한 여대생 좀 봐. 정말 대단하군!" "언젠간 나도..."라는 마음에, 마태우스는 열심히 리뷰를 써나갔다. "명예의 전당에 오른 사람 중 100개 조금 넘는 사람도 있던데, 조금 있으면 불러주겠지?"라고 스스로를 달래면서.

어느날인가 '나의 서재'란 게 생겼다. 그간 쓴 마이리뷰와 산 책들을 몽땅 모아주는, 사실상의 홈페이지였다. 리뷰가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점수가 올라갔고, 그걸 보면서 마태우스는 은행의 잔고가 늘어나는 것같다는 생각을 했다. '리뷰가 수백개인 평범한 여대생 같은 사람은 억대 부자네?' 마태우스는 어서 빨리 부자가 되고 싶었다.
운명의 11월, 마이페이퍼라는 기능이 서재에 추가되었다. 눈이 번쩍 뜨였다. '알라딘 서재가 점점 걷잡을 수 없게 되어버리는구나!' 낮게 탄식한 마태우스는 리뷰야 따라잡기 어렵지만, 페이퍼에서는 한번 일등을 먹어보자는 생각을 하게된다. 구닥다리 홈피를 삼년간이나 이끌었던 경험에서 비롯된 자신감이 그를 도취시켰다. 하지만 그 작업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서재 인기의 척도인 즐겨찾기 순위에서 상위권을 휩쓴 사람들은 대개 리뷰가 수백개씩 되는 명예의 전당 사람들, 그들은 갈고닦은 내공으로 멋진 글들을 뿜어냈다. 지금은 '자몽상자'가 된 '라스꼴리니꽃'의 글은 마태우스를 주눅들게 했다.
"윽. 인간이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가 있담?"
리뷰는 관두고 페이퍼만의 순위에서도 마태우스는 하위권이었다. 그당시 그는 이런 글을 쓰고 있다.
[난 하루에 서너개씩 글을 쓰는 건 나같이 집요한 사람이나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나 말고도 마이 페이퍼에 목을 맨 분들은 굉장히 많았다. 베스트서재의 주인공인 '진우맘'님이 이런 글을 쓰신 걸 봤다. "마이 페이퍼 쓰느라 책을 못읽겠다!"
아닌게 아니라, 진우맘님이나 플라시보님 등등 책을 많이 읽는 분들은 하루에도 여러편씩, 주옥같은 글들을 쏟아내고 있다. 게다가 글의 수준도 상상 이상이라, 별로 경쟁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몸살이 나서이기도 했지만, 요 며칠 내가 서재에 글을 안썼던 이유는 바로 그런 것 때문이다(2004/1/10)]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알라딘 평정이 실패로 돌아가서 하는 말이지만, 서재지수 같은 것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다. 무슨 주식 시가를 보는 것도 아니고, 자신만의 따뜻한 방이 계량화되어 경쟁의 장에 나서는 게 과연 좋은 일인가 하는 회의도 들었다. 플라시보님 말이 맞다. 서재는, 책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 책으로 못하는 얘기를 마이 페이퍼에 담아야지, 본말이 전도되어야 되겠는가. 아쉬운 것은 내가 서재지수에서-최소한 마이 페이퍼라도-알라딘을 평정한 뒤 이런 말을 하면 다들 기립박수를 치겠지만, 1등 하려고 아등바등하다가 두손을 들고 나서 이러니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 플라시보님이 일은 많고 연봉도 많은 대기업을 갈 것인가, 아니면 지금 직장에 머물 것인가를 고민했을 때, 난 속으로 이랬다. "플라시보님! 대기업 가세요. 그래야 제가 추월하지요"]

열흘 후, 그는 다시 이런 글을 쓴다.
[전에 마이페이퍼에 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다른 건 힘들겠지만 마이페이퍼 부문은 내가 평정하려 했는데, 다른 분들이 워낙 글을 많이 쓰셔서 도저히 상대가 안될 것 같다, 그래서 마이페이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조용히 살겠다, 뭐 이런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건 남들로 하여금 방심을 유도하려는 수작에 불과했다. 실제로 난 그 글을 쓰고 난 뒤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써댔다. 알라딘에서 제공하는 달력을 보라. 9일부터 모든 날에 새글이 있음을 알리는 밑줄이 그어져 있지 않는가]
그가 내린 결론이다.
[그래서 난 결심했다. 모든 집착을 버리기로. 이런 말을 두번째 하는거라 남들이 의심을 하겠지만, 이번엔 진짜다. 쓰고 싶으면 쓰고, 쓸 게 없으면 안쓸 것이며, 매일같이 순위를 확인하는 일도 안할 거다. 모든 집착을 버리고 나니 이렇게 마음이 편해지는 걸,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 걸, 왜 그동안 부귀영화에 눈이 멀었었을까. 어느 유명한 야구선수가 마음을 비우니 홈런이 더 잘나온다고 했다. 혹시 아는가. 포기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톱10의 딱지가 날라들지]
그 글에 벨벳님이 코멘트를 날리셨다.
"포기하지 말고 계속 재미있는 글 올려주시라는 의미에서, 추천 왕창 누릅니다. 저의 추천이 순위를 끌어올리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길~"
'아, 고마운 벨벳님' 그의 볼에 한줄기 눈물이 흘렀다. 세 번이나 거짓말을 한 양치기소년처럼, 그때도 그는 진짜로 포기한 게 아니었다.

2월께로 생각된다. 그의 서재에 즐겨찾기를 한 사람의 숫자가 열명을 돌파한 것이. 그는 친구에게 그 경사스러운 일을 전화로 알렸고, 친구는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 줬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서재에 가본 그는 다시금 좌절한다. 그가 친구와 술을 마시면서 한 얘기다.
"세상에, 다른 사람은 즐겨찾는 사람의 숫자가 200을 넘더군. 게다가 다들 글을 너무나 잘써. 야, 내가 과연 평정할 수 있을까?"(주: 그땐 다른 사람의 숫자를 보이게 해놨다)
친구의 대답이다. "내가 니 홈피를 봐서 아는데, 너 정도의 능력이면 가능할 것으로 본다"
하지만 마태우스는 알았다. 친구의 말은 자신이 술값을 낸다고 해서 한 접대성 멘트라는 것을. 그 뒤에도 친구는 집요한 한탄에 시달린다.
"야! 아직도 평정 못했어. 너 니말에 책임질 수 있는거야!"
"그 플라시보란 사람 말이야, 그 사람 주위에서는 무슨 일들이 그렇게 많이 일어나?"
"진우맘이란 사람이 있는데, 세상에 심리검사를 해주면서 인기를 끌어. 나도 뭐 할 게 없을까?"
심지어 이런 짓도 했다. 내 친구 회사에 놀러갔을 때, 그의 이름으로 알라딘 계정을 만들어 내 서재를 즐겨찾기 한 것. 그것도 부족해 내가 썼던 마이리뷰를 몽땅 추천을 했다. 나중에 인기서재의 소유주인 모 인사에게 이 사실을 고백했을 때, 그가 이랬다. "아니 정말 그런 짓도 했단 말입니까?"

마태우스는 정말 열심히 썼다. 알라딘 달력을 보면 1월에 이틀이 빠졌을 뿐, 2월 퍼펙트, 3월 퍼펙트를 기록했으니 말이다. 글의 질로 경쟁하는 것은 일찌감치 포기한 채, 유머로 승부를 낸 그의 전략은 주효했다. 2월 26일 그가 쓴 <알라딘 폐인>은 최초의 히트작이었다. 앤티크, 연보라빛우주, 진우맘 등 지금은 그와 절친한 친구가 된 서재 주인장들이 하나둘씩 그의 서재를 찾기 시작했다. 다른 분의 코멘트에 답을 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젠 순위에 신경 안씁니다!" 세 번째 거짓말이었고, 그 순간 그는 밖에서 닭우는 소리를 듣는다. "꼬끼오!"

그 후 그는 <지금 알라딘에선>을 비롯해 <알라딘이 경제를 망친다>, <알라딘, 총선참여 선언> 등을 히트시키며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3류소설과 <알라딘 뉴스레터>를 발행하며 중견 서재인으로서 자리를 잡고 있다. 하루종일 대여섯편의 글을 써도 서녀명의 방문자를 맞는 게 고작이었던 더벅머리 소년이 드디어 자신의 꿈을 이룬 것이다. 아무리 뛰어도 일당을 벌기 어려웠던 시절은 종말을 고하고, 양털로 된 소파에서 우아하게 인터넷을 하는 사람이 된 것. 명예의 전당 출신이 아닌 사람이 서재를 평정했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2세대 알라디너의 시대가 왔다'고 입을 모았다. 그는 말한다. "이루고자 하는 꿈이 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면, 언젠가는 그가 원하는 꿈은 이루어진다"고. 알라딘에 얽매여 정작 해야할 일을 못하지만, 그는 행복하다. "저는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제가 직장에서 해고된다 해도 여한이 없습니다"
그가 내뿜은 담배연기가 도너스 모양을 띄며 공중에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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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04-05-09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장에서 해고된다해도 여한이 없다~~~~ 네번째 거짓말을 하시네요....ㅎㅎㅎ
님의 고군분투.....만인의 귀감이 됩니다.....^^
사실.....저또한 님의 덕(?)을 좀 본것같아 감사하고 있지만.....저또한 님의 서재에 코멘트 달기가 좀 조심스럽습니다.....워낙 많은 인파가 집중적으로 몰려드는 곳이라~~~~^^
그래도 오늘은 간만에 님의 서재에 제일 처음으로 코멘트를 남길수 있는 이영광을 누리고 싶어 또 두서없는 말만 남기고 사라집니다....저도 도너스 모양의 똥글뺑이를 공중에 띄우면서요!!ㅎㅎㅎ

로렌초의시종 2004-05-09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고에요 최고! 저도 언젠간 마태우스님같은 달콤하고 여유로운 회상의 순간을 즐길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kimji 2004-05-09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하- ^>^ (잘 읽고 갑니다!)

로렌초의시종 2004-05-09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가 일등인 줄로만 알았다는 ^^; 무서워요 무서워~

갈대 2004-05-09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득 마태우스님과의 첫만남이 떠오릅니다. 제가 쓴 코멘트로 인연을 텄던 것 같은데... 그때 마태우스님의 칭찬이 큰 힘이 되었다는 걸 꼭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게 아니었다면 지금쯤 저의 서재는 활동정지 상태가 되었을 겁니다^^

남자 2004-05-09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마누라가 나보다더 좋아하는 이유를 알겠군!

sweetmagic 2004-05-09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요,,,,저는 코멘트칸도 다 막아두고 혼자 놀기하고 있었거든요~
마테우스님이 아니였으면 저도 혼자놀기에 지처 활동정지 되었을 지도 모르죠 ~~^^
고마워요 님~~ 이번 서재 대 공사도 님 격려 아니였으면 포기했을지도 모르죠 ㅋ

연우주 2004-05-09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없으면 서재 생활을 어떻게 했을까 싶어요. ^^ 알죠? ^^ 전 마태우스님의 측근입니다 음하하하하. 공유.. 얘기만 안 하시면 열렬한 팬이 되어 드리겠다는! ^^

panda78 2004-05-09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도나스 연기 만들 줄 아세요? ^^;;;
마태우스님 글이 없었다면 알라딘 들어오는 재미가 반으로 줄었을 거에요~
꿈은 이루셨다지만 계속 계속 많이많이 올려주세요~ ^^

마태우스 2004-05-09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anda78님/무슨 과찬의 말씀을....^^ 글구 저 아직 담배 안피워요. 도너스도 안좋아하구요.
연보라빛우주님/님은 저 측근 맞지요. 제가 어려울 때마다 힘을 실어주신 분이구요. 공유를 대체할 다른 단어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눔?
sweetmagic님/좋은 그림과 글이 많은 그 서재가 활동정지를 당했으리라 보지는 않습니다. 어찌되었건 님을 알게되어 정말 기쁩니다.
갈대님/저 때문에 힘을 얻으신 분이 계시다니, 가슴이 뿌듯합니다. 님도 마찬가지지요. 님 서재에 올라오는 글들을 제가 얼마나 좋아한다구요.
남자님/호, 혹시 누구의 부군이신지요? 아무튼 반갑습니다.
kimji님/크하, 라는 감탄사는 소주를 한잔 마시면 나오는 건데, 제 글이 소주 한잔 정도의 가치는 있다는 칭찬으로 생각해도 되지요?
로렌초의 시종님/헤헤, 그러고보니 제 책이 <나는 이렇게 성공했다>는, 제가 싫어하는 종류의 책과 비슷한 얘기같군요. 님도 꼭 평정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책읽는나무님/네번째 거짓말...헤헤, 들켰다!!

마냐 2004-05-09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실상부 자타공인 알라딘의 '허브' 이신 마태우스님, 매우 귀여운 글입니다그려..흐흐.

비로그인 2004-05-09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그간 보아온 마태우스님 서재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군요~ 맨 마지막에는 왠지 감동의 눈물까지 왈칵! 쏟을뻔 했다니까요~ ^^ 님과의 백일을 못챙긴게 너무 한스럽고...ㅎㅎ 아무튼 직장에서 해고되지도 않으면서, 알라딘을 계속 멋지게 평정해주세요~저랑도 계속 잘 놀아주실꺼죠? ^^ 그럼 화이팅!!

비로그인 2004-05-09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님이 누구의 부군이신지 그게 가장 궁금합니다....누굴까??? 여하튼 마태우스님덕에 서재질를 한다는 님들의 말씀 동감입니다. ^^

아영엄마 2004-05-09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처럼 글쟁이(작가^^)신 분에게 이런 역사가 있었군요.. 리뷰나 페이퍼의 숫자가 많은 서재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재미를 주는 글이 많은 곳이 다른 서재 지인들을 끌어모으는 비결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서재 마실을 많이 다니면서 글을 남겨야 찾아 오는 분들이 많아진다는 것을 저도 실감하고 있습니다. 쩝~
리뷰 열심히 쓸려고 알라딘 들어오지만 막상 로그인해서 제 서재에 들어왔다가는 다른 서재 글보고 코멘트 달러 돌아다니느라 정작 하려던 일은 뒤로 밀리기 일쑤네요~ ^^;

진/우맘 2004-05-09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하...오랜만에 유머를 포기하고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소설을 쓰셨군요.(자전 소설인가?) 저는 아직 숫자에 연연합니다. 내가 그런 유치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보듬어 안으려 애쓰고 있지요.^^;
에구구...비가 와서 날이 쌀쌀하네요. 조만간 턱을 얻어 먹어야 할터인데...

쎈연필 2004-05-09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페이퍼 초창기부터 팬입니다...... 늘 통쾌하게 웃곤 하지요...... 님이 짱이에여!!!

찌리릿 2004-05-09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생이 라면 삶아서 "불어터지기 전에 빨랑 와서 먹어라"고 하는데도, 글을 다 읽고, 이렇게 코멘트 까징 다느라... 라면 벌써 다 불어버렸을테지요. 하지만.. 넘 재밌습니다. ㅋㅋㅋ
진짜로.. 작년부터의 근 1년이.. 주마등처럼.. 제 머리속에 휙휙.. 지나갑니다.

연우주 2004-05-09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나눔이라뇨! 마태우스님, 응징이 두렵지 않습니까? 진정? ^^;;;;

다연엉가 2004-05-09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입니다. 어떨땐 소년처럼 어떨땐 테리우스처럼 다가오는 님의 글 감사합니다.^^^

chaire 2004-05-10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 님 서재는 정말루, 서재의 허브이자 포털이자, 가이드이자... 암튼 짱이라는 데 동의!

플라시보 2004-05-10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책읽기가 주가 되어야 한다고 해 놓구서는 한가지 책을 작년 8월에 걸쳐 어제밤에 비로서 다 읽고 오늘 마이리뷰를 쓰려는 저는 한없이 찔립니다.

*^^*에너 2004-05-10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의 글을 보면서 감탄사를 빼놓지 않습니다. ^^
쭈~욱 좋은 글 볼수 있게 해주세요. ^^

마태우스 2004-05-10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이레님/짱이라... 얼짱이란 말씀이신지요?^^ 치, 님이 글도 훨씬 잘쓰면서...
플라시보/별로 찔리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걸요^^
책울타리/테리우스라... 권상우랑 비슷하단 말은 들었어도, 테리우스는 좀...하핫.
연보라빛우주님/아, 알았어요. 농담도 못합니까!!! 응징이 두렵습다.
찌리릿님/라면은 불기 전에 먹어야 하는데,.....^^
자몽상자님/님의 글이 제게 좌절을 많이 줬지만, 님의 격려 덕분에 힘도 많이 얻었었지요. 감사드립니다.

마태우스 2004-05-10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냐님/제가 동경하던 분 중에 마냐님도 있었습니다. 제가 마냐님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이유가 오마쥬의 일종이거든요.
아영엄마님/저도 이 글 쓰면서 울었습니다. 너무 슬픈 역사여서...흐흑.
앤티크님/피, 말만 놀아달라고 하고, 제가 놀아달라면 외면하면서...앞으론 친하게 지내도록 합시다.
 

 

 

 

 

 

내가 명함을 파지 않는 이유는, 언제 내가 잘릴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그래서 난 정교수가 되어 "이젠 놀아도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부러운지 모른다. 희한한 것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치고 진짜로 노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정교수는 고사하고 내년 시즌의 재임용 통과가 최대의 목표인 나는 아무것도 안하면서 하루하루 잘릴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런데 내가 잘리는 게 더 앞당겨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계기는 오늘 있었던 방송 리허설. 다음주 x요일에 전파를 탈 그 프로에서 사회자인 김어준은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서민씨는 더 이상 대학병원에 취직할 수 없을 것 같네요" 그 말을 듣고보니 걱정이 되었다. 내가 한 발언의 파장이 일파만파 커지고, "저런 놈은 당장 잘라라"는 소리가 높아지면서, 결국 자진사퇴의 명목으로 그만두는 시나리오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나는 어떤 말을 했던가?

[김어준: 오늘은 대학병원의 허와 실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나: 대학병원의 '실'은 이런 게 있습니다. 거기 가면 병이 나을 수 있다는 신뢰감을 주며, 그 분야의 전문가가 환자를 진료하는 동시에 각 과별로 원활한 공조체제가 굴러간다는...
김어준: 그렇다면 '허'는 어떤 게 있습니까?
나: 그러니까 환자를 진료한다는 기능과, 학생들을 교육시킨다는 기능 사이의 균형을 잡는 게 어렵다는 거죠. 내시경을 할 때 환자는 답답해 죽겠는데 "학생들, 이리와 봐. 이거 보이지?"라고 설명하는 것이 바로 그런 예지요....

나: 직장검사라는 게 있어요. 직장에 손가락을 넣어 전립선을 만져보는 건데, 그게 입원할 때면 꼭 해야 하는 항목이거든요. 그런데 그게 굉장히 수치스럽고 그렇잖아요. 그래서 모 고위 관료는 "모욕당했다"면서 화를 내고 퇴원해 버리기도 했는데, 그걸 한사람만 하면 괜찮지만, 이사람 저사람 다 하는 건 좀 힘들거든요. 병원에 왔으니까 시키는대로 다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할 수 없이 대주는데, 마음이 아프더라구요.
김어준: 아무래도 직장이니까...
나: 그래서 제 생각인데요, 그렇게 힘든 일은 그냥 학생들끼리 하면 어떨까 싶어요. 그러면 환자의 고통도 알 수 있고...
김어준: 서로의 직장을 찌르면서 유대감도 깊어지고....
나: 그렇죠. 직장이니까요

나: 내진도 그래요. 자궁경부가 얼마나 열렸나 보는 건데, 손가락을 넣어봐야 알 수 있긴 하죠. 하지만 학생들이 우르르 와서 이놈도 찌르고 저놈도 찌르고 그러면 산모는 정말 수치스럽거든요...]

내 결론은 대학병원이 환자의 편의를 위해 좀더 노력했으면 한다는 거였다. 담당피디는 괜찮은 아이템이라고 하지만, 김어준의 말을 들으니 갑자기 불안해졌다. 나도 병원의 녹을 먹고 있는 사람인데, 대학병원의 교육기능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이런 말을 하고도 무사할 수 있을까? x요일이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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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magic 2004-05-08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님의 용기있는(용기란 말을 왜 써야 하는지 !!) 비판을 열혈지지 합니다.
님의 연구실적 부족으로 불이익을 당하신다면야 뭐 전 딱히 할 말 없지만 ^^;;
위에 열거하신 그런 이유로 불이익을 당하신다면 저 sweetmagic 머리에 붉은띠 하나 질끈 동여 매고
정의 실현을 위해 이 한 몸 바쳐 시위 투쟁하겠습니다.
그런 비판도 수용 못해서야 어디 발전 발뒤꿈치라도 따라 가겠습니까 ?

로렌초의시종 2004-05-08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저도 병원 자주 다녀봐서 생각해봤던 건데, 환자로써의 역할과 교육의 피사체로써의 역할은 대학병원의 환자라면 받아들여야 할 역할이기는 하지만 그 구분이 명확해야 한다고 봐요. 가르치는 것도 환자를 위해서지만 지금 당장 누워있는 사람도 바로 그들이 목적으로하는 환자니까요......

비로그인 2004-05-08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짤리면 한달정도의 식량을 대줄 용의는 있습니다.

마태우스 2004-05-09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폭스바겐님/제가 얼마나 많이 먹는지 모르시나보죠? 하하하!
로렌초의 시종님/그렇죠? 근데 왜 짤릴것같다는 생각이 드는지...
sweetmagic님/오늘도 서재를 복구하시느라 잠을 설치시는 님, 고사리같은 손으로...흐흐흑. 어서 주무세요. 내일이 있잖아요.

비로그인 2004-05-09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번에 아이템 구상하셨던 것을, 드디어 찍으셨군요! 왠지 대화로 나열해 놓으니 더 생생한 것이...^^ 일리 있는 말인데, 아주 칼맞기야 하겠어요~ x요일 후의 반응도 알려주세요~ ^^ 참, 내년시즌 임용 필승통과!!

진/우맘 2004-05-09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폭스님이 대준 후의 식량은 제가...

계란말이 2004-05-09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여기저기에 쌓아두신 주식이 있잖습니까~
저도 2년째 치아교정을 하고 있는데, 가끔 옆에서 지켜보는 학생이 있을때면 입벌리고 누워있는 저로써는 굉장히 불편하고 기분이 상하더군요.

사비나 2004-05-12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폭스님.마태우스님이 얼마나 많이 드시는지 모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한달 먹이다 거덜날겁니다. 거기다 술이 밥인 양반입니다. 술도 술이지만 안주발이.....크게 선심쓰셔서 하루식량만 대세요,..
 
 전출처 : 호밀밭 > 여성이 뭔데?

어제 명세빈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결혼하고 싶은 여자>를 보았다. 32살의 여성 셋이 주인공이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 신영은 꼭 결혼을 해야만 하는 사명감에 불타는 여성이다. 그녀는 돈과 남편이라는 양자 선택의 기로에 선다면 남편을 선택하겠다고 말하는, 내 기준에서 보면 특이한 기준을 가진 여성이다. 남들 다하는 결혼 뭐하러 하려고 하냐고 물으니까, 남들 다 하는 거 혼자 못하면 상대적 박탈감 느낄까 봐서라고 대답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여성은 꼭 결혼을 하는 것이 좋다. 상대적 박탈감은 우울한 인생의 동반자다.

이 드라마 아기자기하게 재미있다. 경쾌한 톤을 유지하는 것과 화면이 밝은 게 마음에 든다. 하지만 노처녀를 집안의 애물단지로 보고, 뭔가 성격적인 문제가 있다는 시선으로 보는 느낌이 조금 있어 마음에 걸리지만 사실 그런 시선이 있기는 있으니 어쩔 수 없다. 인생에서 남의 시선을 쏙 빼고 내 느낌과 생각만으로 행복해 하며 살 수는 없는 거니까.

<섹스 & 시티>에도 나오는 말이지만 괜찮은 30대 독신 남자들은 없는데 괜찮은 30대 독신 여자들은 많단다. 괜찮은 남자들은 이미 다 뽑혀서 결혼에 안착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괜찮은 여자들은 왜 그대로인데? 남자에게 결혼이 날개를 달아 주기 쉽다면 여자는 있던 날개도 부러지기 쉽다는데 절반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머지 절반은 기타 등등의 이유일 것이다. 물론 결혼 후 날개가 아니라 비행기를 타듯 고공으로 수직 상승하는 여성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여성이 해야 될 몫이 결혼에는 많이 있다. 

4월달에 여성 영화제에 갔다 왔다. 여성 영화제의 구호는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 였다.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게 어려운 걸까?

여성을 알자는 뜻일까? 가끔 영화 속에서 여성의 성기를 들여다보는 장면이 있다.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에서는 남편에게 사랑 받지 못하는 여성인 케시 베이츠가 무슨 수업을 들으면서 거울로 성기를 본다. 강사인 듯한 여자가 우리 모두 거울을 통해 그곳을 들여다보자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처녀들의 저녁 식사>에도 진희경이 목욕을 하다가 불안정한 자세로 성기를 들여다보다 팔이 부러진다. 이번 영화제에서 상영된 영화 중에 <지옥의 해부>에서 내가 볼 수 없는 부분을 들여다 봐 달라고 여자는 남자에게 거래를 한다. 그런 장면들이 말하는 건 무얼까? 남녀간의 차이의 근본을 알자는 건가? 여성들이 모르는 자신의 육체를 완전히 이해하자는 것일까? 자신의 육체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자신감으로 나타날 수도 있으니까 후자에 가까운 이야기일 것이다.

세상의 온갖 잡스러운 기사들을 다 모아 놓은 잡지에는 여성지라는 이름을 주고, 시사니 경제니 하는 기사들을 모은 잡지는 남성지로 불린다. 여성지에 실린 기사는 남녀 모두가 궁금해 하는 내용들이다. 인간이 궁금해하는 내용이란 것이다. 여성이 아니라. 물론 요리, 인테리어, 육아는 여성이 책임지는 부분이 많으니까 여성지라고 이름이 붙을 수도 있지만 여성을 소비와 온갖 소문의 중심에 두는 건 뭐지?

여성을 수동적으로 보는 건 서양도 마찬가지이다. <프랜즈>에서는 피비가 먼저 마이크에게 청혼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것도 어찌어찌하다고 그렇게 된 것인데 농구장에서 청혼을 하려는 피비를 보고, 주변 사람들은 결혼하면 남자를 꽉 쥐고 살겠다면서 놀린다. 사람들은 마이크보러 달릴 것 안 달렸나고 놀리고, 가랑이 허전한 사람이라며 살짝 비웃는다. 청혼은 여성이 해서는 안되는 금기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왜? 청혼은 전통의 영역이고, 이건 늘 남자의 몫이었다는 것이다.

<홍등>에 보면 남자가 여러 명의 첩을 거느리고 그날 밤 잘 부인의 방에 홍등을 켜게 하는 장면이 나온다. 지금은 그 시대에서 멀찍이 온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이혼하는 커플 중 배우자의 외도로 이혼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런데 남자의 외도가 아니라 이 경우에는 여자의 외도인 경우가 많단다. 이유는 남자의 외도는 눈 감아 주기도 하는데 여자가 외도하면 눈 감을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외도하는 쪽은 남자가 더 많단다. 맞바람이 여권 신장과는 상관 없다. 외도에 대해 이중적 잣대를 갖다 대는 게 문제겠지.

영화에서 여성의 모습은 가장 왜곡되기 쉬운 존재이다. 김기덕 영화에서 모든 여자는 창녀이고, 헐리우드 로맨틱 코미디에서 여주인공은 신데렐라 지망생이거나 바보 온달을 구하는 평강공주들이다. 괜찮은 놈 만나 결혼하거나, 모자라고 부족한 놈 만나서 변화시키거나. 연극 작품에서도 모든 남자들을 포용하는 창녀나, 자신의 자식에게 헌신하는 어머니들이 주를 이루는 배역이다.

마음에 드는 주인공들도 있다. <초콜렛>의 줄리엣트 비노쉬의 모습도 괜찮다. 자신의 가게를 가지고 있고, 기술을 가지고 있으며 아빠 없이도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는 경제력과 정신력이 있다.
<미술관 옆 동물원>의 춘희는 자신만의 공간도 있고, 직업도 있고, 미래를 준비하는 열정도 있다. 그녀의 짝사랑은 자기 만족인 부분이 많기 때문에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여성이 남성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 자체가 모순이다. 남성과 여성은 너무나 다르다. 그 다른 것을 제대로 표현하는 것이 여성을 이해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읽었던 하루 종일 일하는 전원일기 여자들이라는 칼럼처럼 쉬지 않고 소처럼 일하는 여성이 여성의 본모습은 아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하고, 또 치장하는 여성들이 여성의 본모습도 아니다. 그냥 피곤하면 소파에 널부러지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미래를 계획하고 꿈꾸는 것, 모든 인간이 그런 것처럼 여성도 그렇겠지 생각하면 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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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5-08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밀밭님의 서재에 들렀다가 퍼왔다. 보석같은 서재를 발견한 느낌이다. 님께서 먼저 와주신 것에, 그래서 나도 가볼 수 있게 된 것에 감사드린다.

호밀밭 2004-05-08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이 여기 와 있으니 조금 당황스럽네요. 제가 논리는 부족한데 우기기는 잘해서 가끔 남들이 볼 때 뜬금없는 글이나 말을 한답니다. <결혼하는 여자>가 재미있기는 한데 가끔 노처녀를 사회적인 문제아로 보는 듯한 말을 하곤 해서 그냥 떠오르는 것들을 써보았어요.

연우주 2004-05-09 0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글 정말 좋은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