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시: 7월 11일(일)
누구와?: 미녀와
태도: 최선을 다해서 마셨다.
97년 대선 때, 조선일보의 편파보도에 항의하는 뜻에서 국민신당 사람들이 조선일보사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그때 술에 잔뜩 취해 지나가던 김대중 주필이 이런 말을 했다.
"이거 뭐야? 니네들, 내일 모레면 다 죽어. 국민회의, 국민신당, 내일 모레면 없어질 정당이..."
평소 쓰는 칼럼에서 내비춰지는 정치적 편향성과 맞물려, 그의 발언은 '취중진담'이라 불렸다. 그렇긴 해도 난 기본적으로 취중진담을 믿지 않는다. 술에 취하면 기분이 고양되고 쓸데없는 자신감이 생긴다. 다시말해 술에 취한 사람은 취하기 전 사람과 다른 사람이 되며,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이상한 행동들을 하게 되는 거다. 술에 취해 하는 행동들이 그의 본성은 아니듯, 그가 하는 말들 역시 진심은 아니다. 더구나 말한 사람이 기억도 못한다면, 과연 그게 진심인지를 의심해 봐야지 않을까. 플라시보님의 글이다.
[맨정신에는 하나도 하지 못할 말들을 쏟아내는걸 보면서 나는 참 안타까웠다. 술만 마시면 생기는 용기는 용기가 아니며 술마시고 생기는 감정은 감정이 아님을 왜 모를까? 그런것들이 진심이 되려면 잠시도 깨지 말고 계속 술에 취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술이 깨어버리면 그 모든게 날아간다. 다만 그걸 맨정신으로 지켜본 나에게만 남을 뿐이다
(취중진담, 마이페이퍼 링크 주소 : http://www.aladin.co.kr/foryou/mypaper/490817)]
엊그제 술을 같이 마신 친구는 주량이 약했다. 소주 세잔을 마시고 응급실에 실려간 적도 있을 정도인데, 그날 역시 산사춘 세잔을 마시고 맛이 갔다. 먼 곳까지 데리러 온 남편을 따라 집에 간 뒤, 그녀와 난 이런 문자들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녀: 일찍가서 미안. 담에 놀자. 난 니가 너무너무 좋아.
나: 나도.
그녀: 내가 더 좋아할걸?
나: 아냐, 내가 더 좋아해.
그녀: 그럼 담에 줄자 가지고 만나자.
나: 그러자.
그녀: 사랑해
나: 히히 나두.
그녀: 나두 부끄...부끄...
나: 피곤할텐데 자렴.
그녀: 응 자기야
그녀가 자신이 문자를 보낸 걸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보낸 문자들이 남아 있으니 전혀 기억을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그 사실을 부끄러워할지도 모른다. 그날 이후 내게 전화를 못거는 건 그 때문이겠지.
그녀와 난, 물론 그녀가 유부녀이기도 하지만, 전혀 그런 사이가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그런 문자를 보낸 건 한껏 좋아진 그녀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함이다. 진짜로 사랑한다면 비록 문자를 보낸다 하더라도 가슴에 거센 파도가 일어나는 법이지만, "나도 니가 좋아"라는 문자를 그녀에게 보낼 때 내 가슴은 대체로 평온했던 것 같다. 그녀 역시 그랬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아주 잘생기고 키도 클 뿐 아니라 돈도 잘버는 남편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녀의 문자들은 '취중실언'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술을 먹고 필름이 잘 끊기는데다 술마시는 횟수도 많은 탓에, 주로 난 취중실언의 가해자였다. 아는 여자애한테 뜬금없이 "세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한 적도 있고-있다고 하고-좋아하지 않는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런 말을 들으면 부끄러워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곤 했다. 그 말을 들은 상대방의 기분이 어떠했을지 난 짐작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날 좋아한다고 했을 때, 난 사실 기분이 그리 나쁘진 않았다. 이건 내가 그녀에게 어느 정도 호감-친구로서의 호감이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테고,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 그랬다면 짜증이 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취중실언도 상대를 잘 가려서 해야 한다.
기분이 좋은 것과는 별개로, 이제 어떻게 그녀를 대해야 할지가 내게 숙제로 남겨졌다. 아무일 없는 것처럼 모른척 할 수도 있고, 그때 상황을 말해 주면서 크게 개의치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먼저 전화할 용기는 나지 않는다. 혹시나 내 메시지를 보면서 그녀가 오해를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지만, 그녀의 남편이 내 문자들을 보고 "이제 그놈 만나지 마!"라고 할까봐 더 걱정이 된다. 그녀가 없다면 인생의 재미 중 20%는 없어져 버릴텐데.
*이번주 목요일쯤 올해 100번째 술을 마신다. 이걸 축하해야 하나, 반성의 계기로 삼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