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처 소생 아이들을 학대하다 못해 죽게 만들고, 암매장까지 한 부모가 있다. 이쯤되면 신데렐라나 콩쥐팥쥐는 저리가라다. 굳이 따지자면 ‘장화홍련’ 정도? 하지만 수법이 그보다 더 잔인한 것 같다.
[...전처 소생 남매가 못마땅 했던 이들은 밥을 제 때 주지 않았고 결국 배고픔에 지친 남매는 집안을 뒤져 밥찌꺼기를 주워먹거나 이웃 슈퍼마켓 등지에서 과자등을 훔쳐 먹으면서 이웃의 눈총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들 부부는 그 때마다 남매에게 매질을 해왔으며 급기야 아내 손씨는 2001년 7월 같은 빌라에서 '언니', '이모'하며 친하게 지내던 이웃들에게 "아이들이 도벽이있고 말을 듣지 않으니 버릇을 고쳐달라"는 부탁을 했다. 이후 2년 9개월은 이들 남매에게 주민들의 폭행이 반복되는 지옥같은 기간이 됐다]
계모야 자기가 낳은 딸이 아니라 해도, 거기 동조한 아버지는 뭔가? 그리고 부모의 부탁을 받고 때려준 이웃사람은 도대체 뭘까? 폭행을 견디다 못한 딸이 결국 죽었을 때, 이들은 자신의 안위만을 먼저 생각한다.
[아버지 정씨와 주민들은 자신들의 폭행 사실이 탄로날까 두려운 나머지...야산에 암매장했다. 이 과정에서 정씨는 딸의 사체에 새 옷을 입히고 문종이로 싼 뒤 과자도 3봉지를 구입해 함께 묻어주는 `호의'를 베풀기도 했다. `살아남은' 전처 소생 아들은 현재 장애인인 할머니의 보호를 받으며 어렵게 살고 있으나 폭행 후유증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한겨레 기사)]
예전같으면 이 기사를 읽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겠지만, 스캇 팩의 <거짓의 사람들>을 읽고 난 뒤부터는 그렇게 많이 놀라진 않는다. 스캇 팩의 지적대로 이들은 악이고, 악은 어떤 짓이든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계모, 그리고 이웃 사람들, 이들은 집단으로 악에 전염되어 올바른 이성이 작동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21명을 별 가책도 없이 죽인 유영철이나, 내가 어릴 적 17명을 죽였던 김대두 역시 ‘악’이라는 끔찍한 질환을 앓고 있었다.
꼭 신문에 나고 사람을 죽여야만 악인 것은 아니다. 그들이 보이는 악이 작은 것일지라도, 그가 뼈속까지 악에 물들어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사람을 살아가면서 만나게 된다. 인도-그 인도 말고-에서 택시를 기다리는데, 사람이 가득 찬 프라이드가 지나가다가 차를 세운다. 술에 취해 퀭한 눈으로 그들을 보니까, 그 중 인상이 험악한 인간이 이렇게 소리친다.
“뭘봐 이 x새끼야!”
차가 출발한 뒤 한동안 서 있었다. 내게 그렇게 한 그들은 기분이 좋았을까? 글쎄다. 표정으로 봐서는 아닌 것 같은데. 별로 이득도 없는 일을 순전히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고 하는 것, 그게 바로 악의 본질이리라.
중학교 3학년 때, 난 쉬는 시간마다 학교 뒤편 조그만 운동장에서 제기를 찼다. 정확히 말하면 제기로 야구를 했는데-제기야구라고 한다-제기를 유난히 잘찼던 난 최고의 강타자로 이름을 날렸었다. 우리 학교는 3학년이 1층을 썼고, 맨 꼭대기 층은 1학년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제기를 차면 1학년들은 창문 틀에 몸을 기대고 구경을 했다. 그중 몇 명은 우리에게 침을 뱉었다. 침에 맞아 열이 받은 우리가 위를 쳐다보면 침을 뱉은 그 인간은 잽싸게 숨어 버렸다. 그들은 일년 내내, 우리가 제기를 찰 때마다 그 짓거리를 했다. 도대체 우리한테 침을 뱉으면 뭐가 좋을까? 그것도 3학년 선배들한테 말이다. 친구를 잠복시켜놓고 범인을 잡았어야 했지만, 붙잡아서 조진다고 악이 사라지는 건 아닐게다. 악은 묘한 특성이 있어 악에 감염된 사람을 제거한다 해도 또다른 악이 생겨난다. 즉,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총량은 늘 일정하다. 요즘 들어 악이 더 기승을 부리는 것 같지만, 그건 악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이 잔인해진 것일 뿐, 악의 총량이 증가한 건 아니다.
착하디 착한 내 친구도 양성 악에 감염된 것 같다. 다른 면에서는 모범적인 삶을 사는 내 친구는 내 차만 타면 코를 후빈다. 그리고 나서 그 내용물을 조수석 카페트에 태연히 버린다. “죄의식을 갖지 않느냐”는 내 질문에 그는 대답한다. “전혀!” 지금이야 악이 그의 극히 일부만을 점거하고 있지만,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악의 힘에 굴복할지 모르는 일이다. 악은 그만큼 힘세고 끈질긴 존재니까. 그 친구와 같이 있다보니 나도 서서히 악에 점령당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테니스를 치고 나서 그 친구의 차를 탈 때면, 난 내 몸의 때를 민다. 팔과 다리, 심지어 배에 있는 때까지도. 그 때가 어디로 가는지 난 알지 못한다. 그 친구가 그랬던 것처럼 내게도 죄의식은 없다.
이렇게 생각하니 악이 결국 이 세계를 점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주방에 있는 사람은 비빔밥에다 비듬을 털어대고, 카페 종업원은 커피에다 콧물을 넣으며, 냉면집 요리사는 육수에 침을 섞는 상상을 하니, 갑자기 세상이 끔찍하게 느껴진다. 이 세상을 악의 손아귀에서 구하기 위해 절대반지를 용암에다 던져넣을 자는 과연 누구일까.